다산의 재발견 -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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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석학이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선생에 대해 진귀한 자료와 그의 발자취를 간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 무엇보다도 다행이다.조선후기 천주교가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신유사옥) 형(정약전)과 함께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그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간 강진 유배시절 후학을 양성하고 승려 및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방대한 저술과 시첩 등을 엮어 내기도 하고 아끼는 후배에겐 아낌없는 조언과 지원이 있었다.또한 학파(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간의 대립도 엿보이고 그의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도 학문의 자질을 전승한거 같다.

 이 도서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주로 다산과 그와 교유했던 분들의 시와 시첩이 오랜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랬지만 그 학문적 가치는 높다고 생각한다.그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찾아 나선 저자의 발품과 자료의 소지자들과의 끈질긴 교섭력의 결과물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대표적으로는<매옥서궤>,<다산여황상서간첩>,<수종시유첩> 등의 자료가 있고 그림으로는 <매조도>와 <일속산방도>가 인상에 남는다.매조도의 경우는 그의 첩에 의해 태어난 자식을 그리워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강학과 제자 교육,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다산 일문의 행각과 낙수(落穗)가 주요 내용이다.교학 방식은 단계별,전공별,맞춤형,실전형,토론형,집체형으로 나뉘고 있는데 꽤 단계별,수준별 교육의 전형이라 보여진다.다산여황상서간첩에선 제자 황상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서 혜(慧),근(勤),적(寂)이 있어야 성취감이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또한 승려 초의,호의,하의 등 3명의 승려들은 성씨가 다산과 같은 정(丁)씨여서 아꼈는데 천대를 받던 불교보다는 자신과 같은 유학의 학문세계로 동참해줄 것을 권유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다산의 부자론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지만 진정한 부자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데 옳은 일을 해서 이롭게 된 경우,옳은 길을 갔는데 손해가 된 경우,나쁜 일을 해서 이로움을 취한 경우,나쁜 짓을 해서 결국 해는 입는 경우를 들려주고 있다.대부분 둘째와 셋째의 선택을 두고 고민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이치가 도덕군자가 아닌 이상 성실함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기에 세번째가 많지 않을까 싶다.나아가 다사나은 원포(園圃) 이를 테면 과수원이나 채마밭을 가꾸고 일구어 자급자족 및 판매로 인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꼼꼼하게 들려주고 있고 가정에서의 아내의 역할(게으르지 않고 알뜰살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유배시절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제자,승려들,후학들과의 교유와 그의 사후 맏아들 학연,추사 김정희,황상 등이 그를 기리고 학문과 우정을 나누는 시와 서간들이 세속을 벗어나 유유자적하고도 풍치있으며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소인묵객(騷人墨客)의 절정을 담대하게 보여주고 있다.형극의 길인 유배지의 생활이지만 다산은 조정에 대한 불만 및 원망보다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초지일관 조직하고 운영하며,그와 주위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밀착시켜간 점이 무엇보다 대인이라고 할 만하다.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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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쟁 생중계 -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 전쟁 생중계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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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물과 이야기는 제법 많은데 이에 비하면 고려시대는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멀게만 느껴진다.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면서 고려는 사분오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인 개혁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해 나갔다.고려는 918~1392년까지 34대의 왕조가 있었다.불교가 국교이면서 팔관회 등을 통해 내치를 다져 나가기도 했다.당시 대외관계는 요나라,여진족,몽고,왜구 등과의 빈번한 전쟁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허약한 왕조로 인해 무인과 승려들이 득세하기도 했다.고려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원의 속국이 되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인질로 끌려 가기도 했다.원의 공주와 결혼한 혼혈왕이 탄생하기도 했다.국사(國事)를 강력하게 다스리지 못한 무능한 왕과 주변세력들의 아귀다툼에 의해 고려는 이성계로 하여금 역성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고려시대에 요,여,원,왜구 등과의 잦은 전쟁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면서 백성이 국가의 왕조를 믿지 못하는 이반현상이 발생하는 등 국가의 체신은 말이 아니었다.그러한 가운데서도 나라의 방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장수들을 비롯한 무명의 병사들은 목숨을 담보로 치열한 전장 속에서 일전일패를 거듭해 나갔다.고려시대에 발생했던 이웃나라들과의 전쟁의 소용돌이는 오늘날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그대로 보여 주기도 한다.당시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들은 대부분 화살이 주가 되었고 최무선에 의해 발명된 화약은 진일보한 것이었다.초창기에는 요나라와의 전쟁이 주류를 이루다가 여진족,홍건적,왜구와의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약체의 왕조는 더욱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고 말았는데,고려 후반기 최영,이성계 등이 보여 주었던 애국정신의 발로는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고려시대의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일천할 뿐인데,이번 도서에서는 고려가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던 굵직한 전투를 10회에 나누어 전문가들이 현장감 있게 해설을 해 주고 있어 고려시대의 면면을 진지하게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정명섭,신효승,이노우에히로미 공저자는 관련 전투에 대한 역사적 자료 및 개연성을 두고 서술한 이후,독자들을 위해 생중계 방식으로 현장감과 이해도를 높여 주고 있다.맨마지막에는 전쟁과 관련한 비화(秘話)를 소개하면서 관련 전투 및 고려의 사회상에 대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들려 주고 있다.고려가 건국될 시기에 중국은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와의 책봉을 받는 상황이어서 복속을 요구하는 요나라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요나라가 여진족을 복속하면서 요나라의 팽창정책은 고려를 정벌하려는 야욕을 품게 된다.고려는 요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을 하지만 요는 압록강지역을 장악하려 들면서 전쟁이 발생한다.고려는 소손녕 장군이 지휘하는 삼수채 전투는 결과적으로 무승부로 끝나고 만다.그리고 강감찬장군이 지휘하는 귀주대첩은 요나라 군대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요군을 강물에 휩쓸려 내려 가게 하고 대승을 거둔다.그런데 고려사에는 요의 침입 기록이 없다고 한다.고려는 험난한 지형에 익숙하고 이를 잘 활용하였기에 요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리라 생각한다.이러한 사이에 국내에서는 무신들에 대한 홀대와 모욕이 정변의 원인이 되었다.

 

 그뒤로는 윤관에 의한 귀문관 전투가 발생했다.윤관장군은 기병부대인 신기군 즉 별무반을 창설한다.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함경도 지방에 동북 9을 쌓기도 한다.여진족과의 전쟁은 귀문관 전투가 서막일 뿐이다.허재의 길주성 전투를 치르고 금나라는 세력을 키워 가면서 송나라와 영토 배분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기도 한다.금은 후일 원(몽고)에 복속이 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고려와 몽고간에는 6차에 걸친 전쟁과 두 차례의 여.몽연합군에 의한 일본 큐슈지방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몽고의 쿠빌라이 칸은 3차 전쟁을 지시하지만 전쟁에 지친 반대세력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게 되고 몽고는 고려를 조공관계를 요구하면서 고려의 왕세자를 볼모로 몽고의 공주와 피를 섞는 혼혈왕(충선왕)이 탄생하기도 한다.그외 김윤후가 지휘하는 충주산성 전투,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최무선의 진포,이성계의 황산대첩에 이르기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고려 후반기에는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조운선,곡식 등을 수탈해 가면서 고려의 정세와 사회상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세 명의 공저자들이 사료에 바탕을 두면서 당시 고려와 이웃나라들간의 전투 상황과 뒷이야기 등을 잘 풀이해 주고 있어 고려 역사를 새로운 각도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게는 매우 유익했다.역사 이야기는 실증적인 자료에 바탕을 둔 객관성과 ~일 것이다 라는 추측성 개연성을 놓고 읽어야 하기 때문에 아전인수격의 역사인식은 위험하고 편협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특히 요나라와의 전투 기록이 실존하지 않기에 공저자들도 중국 고대사에 기초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그렇지만 단편적인 고려 전쟁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나마 확장되어 관련 도서를 읽을 때에는 더욱 이해와 인식의 폭이 넓혀지리라 예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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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읽다 - 역사와 삶의 고비마다 고려를 지키고 빛낸 문장들
이혜순 지음 / 섬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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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34대 왕과 474년 간의 역사 갖고 있다.후삼국을 통일하고 개국한 고려는 참신한 인재등용법부터 다양한 개혁을 이루어 나간다.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용인하고 공존하게 한 다양성과,그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정체성을 일깨웠다.깨어있는 고려왕조는 다원사회가 특징이며 고려왕조의 특성이기도 하다.고려는 다원성을 띤 역사이기도 했기에 글로벌주의를 부르짖는 현대사회와 맞물리기도 하기에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과 화해를 갖어야 치열한 경쟁의 무대에서 전진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한다.

 

 고려 역사는 474년을 갖고 있다.고려 왕조의 존망을 가늠하는 두 차례 각각 30여 년간에 걸친 거란,몽골 등 이민족과의 전쟁을 극복하기도 했으며,무신정권과 승려들에 의해 집권이 뒤바꿔지면서 왕조는 약체가 되기도 한다.몽고에 의에 고려는 쑥대밭이 되면서 도읍지가 개경에서 강도(강화도)로 천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하며,여.몽 연합군에 의한 두 차례의 일본 정벌은 양국간에 커다란 시련과 좌절을 안겨 주기도 했다.또한 고려에 귀화한 쌍기에 의해 과거제도가 도입되고,해서는 훈요십조 및 팔관(해서는 안될 여덟가지 사항)회 등이 개최되기도 한다.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충(忠)자가 들어가는 왕은 원에 의해 정해지기도 했다(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고려는 결국 이성계를 위시한 역성혁명에 의해 474년 간의 막을 내리고 국명이 조선으로 바뀌게 된다.이러한 기본적인 고려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갖고 이번 《고려를 읽다》를 읽어 내려 갔다.통상 고려의 전분야에 대한 통사적인 것을 기대했는데 그것과는 전혀 다른 한문으로 쓰인 고려시대의 명문장들이 정선된 문장만을 골라 세련되게 번역되어 나왔다.한문장을 번역한 내용들은 문학적인 평가를 받은 것에 국한하지 않고 전분야를 아우르는 고려시대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정치적인 글,외교문서,논설문,편지,묘지문(墓誌文),종교 의례문,과거시험 문제 등을 소개하고 있다.이혜순저자는 한국 고전문학,한문학회회장을 역임해서인지 정교한 내용과 풍부한 해설,꼼꼼한 학자적 자세가 글의 내용에 그대로 비춰지고 있어 믿음이 가고 남는다.

 

 우선 여섯 파트로 나뉘고 있다.왕과 신하,그들의 세계,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킨 문장보국의 명문들,친구란 무엇인가,사람의 일생,사대부의 삶과 철학,사회와 역사 인식,종교와 학문의 세계로 되어 있다.한문 실력은 변변치 못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차분하게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려의 대외관계를 비롯하여 과거 출제시험,야사와도 같은 일반 백성의 삶의 진면목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라시대 경순왕 김부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박인량의 통찰력 있는 글쓰기가 시선을 끌기도 했다.김부식의 온달 장군의 이야기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국순전과 국선생전의 얘기는 많이 들어서인지 깊은 관심으로 대했다.그중에 보국명문이 갖는 의미는 고려가 대외관계에서 힘의 역학을 잘 조율해 냈다는 평가를 할 수가 있으며,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문장력과 양국간의 가교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실리적이고 선린우호적인 차원에서 막중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자랑스러운 점은 최치원이 당나라에 머물렀던 중국 양주에 외국인 기념관이 설립되었다는 점이다.(2007년 중국 중앙정부에서 세움)

 

 고려의 힘이 원보다 약하다 보니 원에서는 고려 처녀 공출을 수도 없이 요구하는데 이곡의 글에서 처녀 공출의 폐지를 요구하는 글을 접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원나라 황실에 바친 고려 처녀의 수는 150명이 넘는다고 한다.또한 원 쿠빌라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왕인 충선왕이 티벳으로 유배를 가야만 했던 사연,사행(使行)으로 일본으로 떠나는 정몽주가 일본을 유람하며 느낀 소회 등이 인상에 남는다.친구란 무엇인가 라는 편에서 임춘은 글쓰기는 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문장의 어려움은 강한 기운이 가슴속에 차고 넘쳐서 자신도 모르게 말로 나타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밑줄을 그어본다.서울 둔촌동의 유래도 흥미를 끌었는데 이집이 몸을 피해 숨어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실천윤리에 기반을 두고 글을 쓴 사람은 단연 이제현의 유학에 잘 나타나 있다.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여 아내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묘지문을 쓴 최루백의 사연,가난과 기근이 들기라도 하면 부부가 자식을 파고 남편은 아내를 팔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채마밭과 훼손된 가옥을 수리하는 일상,색(色)에 빠지는 것은 망조라는 사대부들의 의식,그리고 최초의 서사시인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소개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고려는 도교와 불교의 색채가 짙다는 것을 알게 되고,과거시험은 유용지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배운 것을 실생활에 요모조모 잘 활용해 생활개선과 사회발전을 꾀하는데 있다는 것이다.다양한 분야에 대해 정선된 한문장을 잘 다듬고 풍부하게 해설까지 들려 주고 있는 《고려를 읽다》는 흥미적인 요소와 학습적인 요소가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의미있는 시간이 되어 매우 다행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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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마을을 찾아 떠나다
남민 지음 / 소울메이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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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 뒤로는 저수지 전방은 평야,동서로는 산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그때는 이웃과 이웃이 가족과 같은 공동체 생활이어서인지 누구네 집의 신발이 몇 켤레이고 숟가락,젓가락은 몇 개인지까지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그만큼 자주 놀러 다니고 또 우리집에도 찾아 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다만 모든 일들이 손과 발로 하는 육체적 노동이고 위생시설이 덜 된 우물물,재래식(치간) 등이 도회지와 비교가 되어 불편하기도 하고 도회지 생활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그러다 대학생활,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본가와는 물리적 거리가 거의 300KM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성묘 내지 명절이 아니고서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지금은 획일화된 네모 상자인 아파트 집단생활을 하고 있는데 편리하고 사적인 즐거움을 누리기에는 여러 모로 좋기는 하지만,자연의 흙을 밟고 자연의 풍경과 인심이 넉넉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조선중기 이후 쓰여졌다고 하는 정감록(鄭鑑錄)국가의 운명,생민존망(生民存亡)을 담고 있다.정감록을 쓴 저자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선 개국공신 중의 하나인 정도전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그렇다면 정감록의 주요 내용은 무엇일까.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미래의 국운을 예언한 도참서(圖讖書)이자 살아남기 위해 '십승지(十勝地)'라고 하는 피난처에 찾아가는 비법을 제시한 비결서라고 남민저자는 말하고 있다.특히 조선 중.후반기에 이르러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침과 민란 등 정치적 사회(士禍)를 거치면서,도탄에 빠진 백성과 파직당한 선비들이 보신보명(保身保命)할 안식처가 필요했는 바,자연스레 십승지가 그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으리라.

 

 현재 헤럴드 경제 모바일 컨텐츠 팀장인 남민저자는 십승지 마을을 두 발로 여러 번을 답사하고 탐문하면서 역사 속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 생생하게 그곳을 기록한 '역사기행서'이고 '감성 여행서'이며 '힐링서'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십승지는 태백산맥 백두대간에서 소백산맥 하단에 이르는 곳까지 10개 지역이 십승지로 꼽히고 있는데,십승지로 지목된 지역들이 대부분 인적이 드문 깊은 오지 내지 분지(盆地)인 것이 특징이다.외침과 전쟁을 피해 은신을 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누가 십승지로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풍수지리사상에서 말하는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더욱 선망이 되는 점은 십승지가 풍수사상과 맞물려 나라의 인재,재목이 많이 탄생했다는 점이다.십승지는 바로 다음과 같다.《영주 풍기,봉화 춘양,보은 속리산,남원 운봉,예천 금당실,공주 유구.미곡,영원 연하리.미사리.노루목,무주 무풍,부안 변산,합천 가야이다.산맥과 고산지대와 관련이 없는 곳이 유일하게 부안 변산인 점이 눈에 띈다.조선 최고의 술사 남사고는 명종 때 활동했던 분으로서 《격암 유록》을 남겼다.역학.풍수.천문.관상의 비결에 도통했으며,그의 예언은 잘 들어맞아 각지에서 그를 보려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주민 70%가 이북 출신인 영주 풍기,임란 후 이순신장군이 은둔했다는 봉화 춘양,세조의 딸(공주)가 숨어 들었다는 보은 속리산,조선 개국의 주춧돌을 놓고,놀부와 흥부의 마을이 있는 남원 운봉,고종과 명성황후의 비궁이 있던 예천 금당실,김구가 일본인 장교를 보복 살해하고 마곡사에 은거했던 공주 유구.마곡,조광조 후손을 살리고,김삿갓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영월 연하리.미사리.노루목,전라도 속 소수민족으로 불리는 경상도 마을인 무주 무풍,허균이 이상사회를 꿈꾼 우반동 부안 변산,최치원이 내란을 피해 은거하고 사명대사의 안식처였던 합천 해인사가 바로 십승지이다.그외에도 십승지에 비견될 만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십승지는 '경치가 빼어난 곳'을 의미하고 관광과 즐기는 곳으로 인식하기 마련일텐데,십승지는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또한 십승지는 3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전쟁이 나도 안전한 곳,흉년이 들지 않을 곳,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할 곳인 '삼재불입지지(三災入之地)의 땅이다.한국역사와 문화의 단면이면서 정신적 힐링의 명소로도 손색이 없는 마음의 본향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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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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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는 헤이안 시대(794~1185)의 도읍지로서 유적,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서 헤이안 시대 이전 한반도 및 대륙에서 들어온 귀화들에게 의해 농업,양잠.견직들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그후 바쿠후 정권에 의해 도읍지가 에도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경제.문화의 중심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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