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역사를 제대로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과 정체성을 확고히 다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자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릇되게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현 정부가 한일 과거사 및 위안부 문제 등에 집중 몰입하고 있다면 한국사에 대해서도 바르게 잡을 필요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이것은 역사에 대한 균형을 바로잡는 것과 동시에 지난 시절 한국 역사가 뼈아픈 시련과 고통을 거울 삼아 밝은 한국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연구가,교수,재단관계자 등이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해 가는 한편 이를 바로 잡으려는 학자,교수들과는 입과 문을 닫고 대화와 토론의 장에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니 자신감이 없기는 없는가 보다.

 

 

사학자 이병도

 

 김진명 작가의 《고구려 시리즈》 이덕일 저자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를 읽으면서 한반도 고대사는 중국의 허베이성(하북성)까지 지배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문헌과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가 있었다.또한 학창시절 한사군이 북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 지역 쯤에 자리잡고 있다고만 인식하고 있었는데,이번 도서를 통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현 정부 들어 식민사관으로 논란이 되었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식민사관 망언(妄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 글을 읽노라니 수미일관 한국의 지식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국민의 혈세를 쉽게 받다 먹는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기도 했다.현재 동북아 특히 한반도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고대 역사왜곡과 일제 강점기 일본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으로 인해 한국역사의 근간이 위태로울 지경인데 한국 고대사 부분을 제대로 잡아야 할 책임에 있는 사람들이 안일한 자세로 세금만 축내고 있는지 분노가 일어난다.

 

 

 현재 한국 고대사 즉 한사군의 한반도설 및 일본세기의 임나일본부설은 모두가 일본의 정치적 힘의 논리에 의해 한국 고대사를 축소하고 조작했던 것이다.조선총독부가 주관이 되어 식민사관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 《국사안》이 발효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에 기인한 바 한사군은 평양,개성,강원,함경도 지역으로 국한해 버리고,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고대 일본이 한국 이남을 지배했다는 논리이다.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조선총독부 아래 《조선편수사》를 조종하면서 고대 한국사 및 근대 역사를 마음대로 조작해 버렸던 것이다.학문을 침략의 도구로 악용한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비롯하여 한국 현대사의 거물로 알려진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이나바 이와키치,야나이 와타리,마쓰이 히토시 같은 역사학자들이 이병도에게 식민사관을 답습하도록 종용했던 것으로 보인다.일제 강점기에는 개인이든 사회든 일본의 무력 앞에 힘이 없었다 해도 해방후에는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는 분들이 일본 제국이 조작해 놓은 식민사관 그대로를 답습하여 교과서를 만들고 세뇌교육까지 시키고 있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사학의 진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신채호,박은식김승학 선생과 같은 분들은 도외시하고 친일파들이 정치,경제,역사,사회 등 모든 분야를 지배.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다.이승만은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고 역사문제도 식민사관 그대로 이어져 갔던 것이다.노무현 정권 들어 친일파 명단을 만들었지만 세부적으로 이행한 것은 없는 것 같다.쓰다 소키치-이병도-(현재)한국 식민사학자로 이어지는데 '한사군 한반도설'과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에 대한 비판 저서 및 논문의 설명<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이론 비판>에 대해 식민사학자들은 귀뚱으로 들으려 하지 않고 토론 및 대화의 장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뭐 구린내가 많이 나는가 보다.또한 중국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동북공정 역시 한사군 한반도설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다.그렇게 된다면 북한 땅은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보면 용정,연변 같은 곳은 조선인이 정착하여 살던 조선의 땅이었음이 확연하기만 하다.중국 허베이성 창리현 갈석산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음이 역사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동북아역사재단와 같이 고대 한국사에 대해 바르게 잡아 정통성과 정체성이 있는 한국역사를 후학 및 일반인들이 인식해 나가야 마땅한데 작금의 상황은 식민사관 그대로이고 관련자들은 국민의 세금만 축내고 제대로 된 연구와 성과,올바른 역사인식은 찾을 길이 없다.만시지탄이지만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가 근래 동북아역사재단에 공문을 보내 한사군의 위치 문제를 놓고 공개 학술 대회를 제안하고 있다.그 실적은 미미하지만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식민사관을 바로 잡으려 초지일관한다면 한반도 고대사 부분은 바른 방향으로 선회하리라 생각한다.한국사 관련 예산 즉 국민의 혈세로 책임과 의무로 왜곡된 고대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수구적이고 안일하게 대처하는 것은 현대판 사대주의가 아닐까.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가운데 과연 한국에 애국자가 몇 명이나 될까.있더라도 몸과 마음으로 보여 줄 애국자는 과연 있을까를 되뇌어 보았다.이덕일 저자의 왜곡된 역사 사관에 대해 솔직하고 용기있는 학자적 자세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제발 사(史)피아(Pia)가 사라지기를 갈구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적의 역사 - 이기환 기자의 이야기 조선사 지식기행 7
이기환 지음 / 책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 기록은 당대 집권자의 의도 및 국가 이데올로기,사회제도 및 시스템에 맞춘 정형화되고 획일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역사를 학습하는 차원에서는 대강(大剛)의 줄기도 매우 중요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료를 현대식 언어로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면 역사는 딱딱하여 재미없다는 편견과 인식을 불식할 수가 있다.그래서인지 역사 장르가 작가 및 저자의 다양한 관점과 상상력,기지를 발휘한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어 기존의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을 넘어 흥미와 학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가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제 깊은 관심과 흥미를 안겨 주고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에다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유교가 국가의 정체성을 두고 있다 보니 사회제도가 봉건적이고 폐쇄적이었다.역성혁명에 의해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 그리고 이성계의 실질적 참모였던 정도전이 쌍두마차가 되어 조선개국의 주역이었다.특히 삼봉 정도전은 신권정치를 실질적으로 펼치면서 각종 문물,제도 등을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총감독인 셈이다.조선 27대 왕권 가운데에는 성군도 있고 폭군도 있었다.명,청,왜군 등이 수시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의 산하는 민둥산과 같은 형세로 변하고,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는데,이는 국정을 총괄 지휘하는 임금과 신료 간의 정책에 대한 엇박자가 심했던 것이 커다란 원인이다.특히 사색당파로 인해 국정의 혼란이 지속되는데 숙종대에 이르러 사색당파는 정점을 보인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생각한다.과거의 잘못된 인습,제도를 답습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더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기 위해 진보해 나가는 것이 천고의 진리이다.그러한 까닭에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면서 내일의 역사를 위한 소중한 교훈인 것이다.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개인의 삶,사회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습을 통해 얻은 소회이다.사회에디터로 재직하면서 다년간 기자생활을 했던 이기환 저자는 조선 역사 속의 색다른 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주제도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당시에는 불경스럽고 금기시되었던 왕과 신료 그리고 잡초와 같은 백성들의 삶의 내면은 웬만하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역사의 흔적을 조선과 중국 고대 문헌을 샅샅이 뒤져 가면서 조선과 중국의 당대 상황을 크로스 체크식으로 비교 해설하고 있는데 쉽게 이해가 가고 커다란 울림과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인재(人災)는 《태종실록》에 나온다.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해 1,000여 명이 수장되었다는 내용이다.조운선의 침몰 이유는 선장의 무리한 운항과 화물과적 때문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조운선 침몰의 책임을 태종 자신이 모두 떠 안았던 것이다.현대식으로 말하면 '쿨'하게 사과하고 사고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사기》와 《조선왕조실록》 등 다양한 문헌을 바탕으로 해석을 할 때마다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공명이 갔다고 하는 저자의 말이 딱 들어 맞는다.비록 권력과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한 조선시대 임금들이었지만 국사를 위해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국사에 대한 안일한 대책과 무능력한 소신에 의해 임금이 몽진(蒙塵)을 갔다든지 인조와 같이 청에게 삼배고구두를 조아리는 장면에서는 부끄럽다 못해 책을 덮고 싶을 정도였다.당시에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및 인식이 결여되다 보니 신화 및 비과학적 요소에 의해 국사의 향방이 정해지기도 했다.운석(隕石)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재변은 인사의 잘못이고 국가의 쇠잔과 혼란을 암시한다는 것이다.주지하다시피 조선은 명과의 오랜 조공관계에 있다 보니 영주와 농노와 같은 관계였다.임금을 정하는 것도 명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정례적으로 조공을 바쳐야 하는 등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열세에 있었다.게다가 후금(청)의 세가 발흥하면서 조선이 청에게 보인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외교관계는 조선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부이다.이를 두고 선군(광해군)의 등거리 외교가 좋았다 어떻다 하는데 국가의 지도자는 국가의 대계를 위해 긴 안목으로 참모 및 장관들과 심모원려를 거쳐 국력증강,국리민복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임금과 신하,대외관계,사대부 및 백성들의 삶 등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소개가 되고 있지만 정말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기만 하다.청렴강직할 줄 알았던 암행어사도 속물근성이 있었던 모양이다.지방의 비리를 척결해 준다는 명목하에 권력과 권위를 내세워 수뢰를 하고 성상납을 받기도 했다.또한 정조 임금은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조선 백성들에게 담배를 보급화했던 인물이다.요즘 흡연을 둘러싸고 유무해 논란이 끊이지를 않는데 정조 임금 자신이 골초였다고 한다.파격적인 것은 개인의 안위만 생각하는 현대 관료들에 비추어 당시 대신 및 관료들은 임금의 잘잘못을 서슴없이 직언(사간원)을 하기도 했다.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끝까지 해야 속이 풀렸던 것 같다.나라를 개국한 임금에게만 시호로서 조(祖)를 칭하는데 종(宗)으로 했다가 조(祖)로 바꾼 사례도 꽤 눈에 띄었다.속칭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임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겉으로는 국사를 위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신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속은 속물근성과 같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임금도 많았다.

 

 기이하여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주제와 다양한 인물,다양한 사건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모두에서도 말했듯 현재는 과거의 역사와 끊임없는 대화이다.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개인,사회,국가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면목를 보이려 노력과 의지를 게을리 않는 실천적인 자세와 현명한 마인드가 어느때 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 알마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의 기록은 대부분 굵직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국사(國事)가 위주가 된다.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사회와는 달리 고대,중,근대사는 왕권을 중심으로 편년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그래서 왕을 중심으로 왕족 그리고 신료들의 일상사 및 치부와 관련한 비사는 많지가 않아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기록된 행적을 통해 사학자 및 역사 연구가들의 개연성 있는 각색에 의해 지레 짐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하물며 민초들의 삶을 알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일진대 다행스럽게도 조선 평민들의 단편적인 삶이나마 접할 수가 있게 된 것은 역사의 편린을 좋아하는 내게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동.서양의 전기(傳記)들을 보면 서양은 영웅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장편 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동양은 한 시대 역사의 작은 부분을 다루고 있어 간결하기만 하다.주인공의 행적 역시 삶의 극히 일부분만 기록되어 있기에 전체적인 삶과 행적,시대상을 반추하기는 쉽지가 않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주역이 아닌 중인 이하의 인물들의 삶을 다양한 분야,다양한 각도에서 조응할 수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길고 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조선평민들의 기전체(紀傳體) 역사 종래 편년체와 잘 통합하여 서사적인 글로 완성해 놓는다면 후세들에게 깊이 있고 효율성 있는 역사학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에 조선 후기 조수삼의 <추재기이>를 읽었던 적이 있다.조선시대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즉 마이너리티의 삶을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평민들의 일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런데 이번 <조선평민열전>은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과 인물들의 행적이 잘 그려져 있는 게 눈에 띈다.<호산외기><이향견문록>ㅏ희조질사>를 자료를 출전으로 하여 편집되었다.조선시대 중인들의 직업은 시인,화가,서예,의원,역관,천문학자,출판,의협,처사.선비,바둑,충렬,장인,효자,효녀,절부.열녀,기생.공녀로 다양하기만 하다.현대사회로 돌아오면 아마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문화인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다만 유교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여성이 사회적 진출이 폐쇄적이다 보니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심과 기생.공녀(貢女)와 같이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불우한 여성들의 삶이 부각되고 있다.

 

 왕과 신료들이 조선시대를 장악해 가면서 중인층들의 삶은 은둔과 체념 속에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애잔하기만 하다.하얀 광목을 입은 선비들의 은둔적인 삶이지만 자신들의 직업만은 천직으로 인식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대부분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빈한하게 살아갔던 이들은 책읽기를 좋아하면서 시와 서예,회화 등에 주력했다.사정이 좀 나은 이들은 역관,천문학자도 있었다.부모에 대한 효를 백행지본으로 삼았다.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간 여막 생활을 하면서 불초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서두에서도 말했듯 조수삼의 경우에는 팔방미인일 정도로 재주와 능력이 다방면에서 출중했다.풍도,시문,공령,의학,바둑,서예,기억력,담론,복택,장수에서 뛰어난 인재였다.이들이 비록 야인생활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의 비상한 능력을 인정하여 관료로 등용하려고도 했다.의협심이 강한 의적들은 도둑질을 하되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재물을 주고 삶의 활기를 북돋우는 모습은 가렴주구 정책을 펼치던 사회상과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도서의 제목은 평민열전이지만 실상은 사회의 주류세력이 아닌 아웃사이더와 같은 이들의 삶이다.조선시대는 양반과 상민,남존여비 등 봉건적인 유교사상이 강했고 사색당파와 같은 당파간의 이념대립이 조선후기에까지 이어지고,외척들과 권문세가들이 정국을 뒤흔들다 보니 조선은 먼 미래를 바로 볼 줄을 모른 채 좌초된 선박과 같이 그대로 침몰했던 것이다.이 글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군과 인물들의 편린적인 행적을 통해 국가의 삶의 기초는 평민에서 기인한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판 기행 -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
김봉규 글.사진 / 담앤북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인의 정신적 내면 세계는 유교문화의 본류가 깊게 배여 있다.즉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주자학이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유교문화를 깊게 숭배하는 민족은 정도의 차이는 나겠지만 한국이 최고일 것이다.그중에 예의와 충효정신은 현대 한국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것이다.시대와 의식은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반드시 유교문화가 시대착오적이고 변화와 개혁의 걸림돌이 된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과거 한국 역사를 되새김질 하고 내면을 깊게 성찰해 가는데 있어 지난 시절의 유적,문화 등을 고찰하는 것은 개인이든 사회든 그 의미와 가치는 자못 크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 위나라 태수를 지낸 서예가 위탄(韋誕)은 뛰어난 글솜씨로 광록대부(光綠大夫)에 오르고 한자 10체에도 뛰어났다.그는 그중에 제서題書(서적의 머리나 비석 등에 쓴 글).서서(署書)라는 현판(懸板) 글씨에 두각을 나타냈다.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현판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동문선> 등 문헌에 편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편액에 대한 기록이 조선시대에는 사찰,도성의 문루,궁궐의 전각,지방 관아와 향교,서원,주택 등에까지 걸렸다.편액에 쓰이는 한자는 액체(額體)라고 하며,굵은 필획으로 뚜렷하고 분명한 점이 특색이며 원칙이다.짜임새가 긴밀,방정하면서 장건한 글씨여야 했기에 주로 해서(楷書)가 대부분이다.훌륭한 현판 글씨는 공력과 실력이 요구되기에 아무나 쓸 수 없었기에 각 건축물에 남아 있는 현판 글씨는 특별하고도 소중한 것이다.참고로 한국의 편액 중 가장 오래 된 글씨는 신라의 김생(711-791)이 쓴 것으로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이 남아 있다.

 

 건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현판의 글씨는 역대 왕을 비롯해 당대 대표적 지식인 및 명필 등이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으로 시대의 정신,가치관,예술의 정수가 잘 배여 있어,한국 문화 예술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가 없다.그런데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옛 현판들이현판에 대한 인지.식견 부족에 의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건축물의 현관문이라 할 수 있는 현판을 통해 현판에 담기니 사연,건물과 현판을 쓴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국 역사의 속살을 체현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과 철학,풍류의 향기를 느껴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영남일보>의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인 김봉규 저자는 정자와 누각,서원과 강당,사찰에 걸린 현단의 다양함과 다채로움을 사진과 해설을 균형감 있게 배치하면서 현판의 소중함과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국가가 환난을 만났을 때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임금이 아끼는 신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려져 있고,출항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도성의 제1관문을 수문장의 상징으로 나타내기도 한 현판의 글씨를 보면 볼 수록 그 의미와 가치는 매우 소중하기만 하다.산기슭,언덕받이,심산유곡,배산임수격인 풍수지리의 명당에 터를 잡아 위치한 현판들은 고색창연하다 못해 애잔하기 이를데 없다.수많은 외침과 불국토를 꿈꾼 당대의 위정자들의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시인 안도현의 시 <화엄사,내 사랑>에 나오는 구절은 무정한 세월과 고색이 짙어만 가는 화엄사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전.중략) 산은 슬쩍,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 주었습니다./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잘 늙은 절 한 채//...//화암사,내 사랑/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지는 않으렵니다." -P186

 

 내 본가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서인지 관심이 살아난다.화암사의 크기는 시골 여느집의 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는 화암사는 홀로 깊은 산 속을 지키며 불국토의 이상을 고고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누각이 입구인 것이다.그래서 맛들어지게 시인 안도현은 화암사를 가리켜 '잘 늙은 절 한 채'이고 화암사 가는 길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고 화암사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생기지 않았나 싶다.화암사 편액의 특징은 하앙식(下昻式)으로 한 판재에 한 자씩 새겨 세 개로 나눠 따로 걸었다.이것은 한국 유일의 하앙식 건물이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산과 평지에 산재해 있는 편액들의 사연과 역사성을 살펴 보노라니 불현듯 처져 있고 중심이 없던 내 마음이 무소유의 상태로 바뀌며 바람결에 그네타기 하는 풍경 소리만 멀게마나 들려 오는 듯 하다.길을 가다 마음이 동(動)하게 되면 사찰과 서원,정자를 찾아가 보련다.현판을 만나게 되면 지난 시절의 임금,사대부,명필도 조우할 것이라는 마음의 물결을 그려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내게 일본 교토는 해외체험 중 처녀여행지이다.꼭 교토를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일본인 친구의 초청방문에 의해 일본 교토에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1990년대의 방문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그런데 교토에 갔던 시기가 한여름날이었기에 무덥고 습한 날이 계속되면서 처음 교토를 밟았던 기분이 화롯가에 놓인 엿이 녹는 것과 같이 힘없이 풀리고 말았다.교토는 지형적으로 분지(盆地)여서 여름엔 한증막과 같이 무덥고 겨울엔 맹추위가 계속되는 곳이다.형식적으로는 일본인 친구의 초청방문이지만 실제로는 호텔에서 그릇 닦기,호텔 옥상의 비어 가든에서 요리를 직접 만들면서 비어 가든을 찾아 동반자와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맥주와 (비록 프랜차이즈 요리이지만) 내가 만든 요리를 정겹게 먹는 모습을 멀찌감치서 보니 뜨거운 열기가 시원한 청량감으로 바뀌기도 했다.

 

 일본 교토는 헤이안시대(794∼1185년)의 도읍지로서 수많은 문물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다.문화재를 애지중지하는 일본답게 교토를 비롯하여 나라,가마쿠라 등지는 건축과 조각물이 몇 백년의 풍상과 함께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그러고 보니 나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교토,나라,가마쿠라를 찾아 일본 문화를 직접 눈과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어 다행이다.1990년에는 오사카 신국제공항이 생기기 전이기에 오사카 근처의 이타미 국제공항에서 내려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를 맞이하러 온 일본인 친구와 오사카 위성도시 미노에서 몇 일 체류한 다음 아르바이트처인 교토 모호텔로 향했다.일본어를 할 줄 알기에 가는 방법과 연락처를 건네 받은 후 교토행 전차를 타고 교토에서 내려 다시 데마치야나기역행 전철을 갈아타서 데마치야나기역에서 내려 호텔로 향했다.풍경과 건물에서 다소 이국적인 모습이 군데군데 나타났다.시모가모신사가 보이더니 일장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에 '이곳이 바로 일본이구나'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교토는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과 비슷하다.거리와 거리사이가 잘 정렬되어 있고 가는 곳마다 신사와 사찰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교토는 일본 5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고층건물이 많지 않다.2,3층 높이의 고만고만한 주택이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눈에 띄이는 건물은 행정타운과 같은 공공장소이고 뾰족하게 솟은 건물들은 거의가 사찰 내지 신사였다.내가 교토에 있으면서 찾아 간 곳은 기요미즈사,킨가쿠사,류안사,옌략쿠사,아라시야마(도케스교)와 시죠거리,교토탑을 들렀다.옛스러운 건물들과 교토 특유의 방언은 일본 속의 색다른 일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간무(桓武)천황 의해 건립된 교토는 가마쿠라로 도읍지가 옮겨가기까지 역사,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당시 8,9세기는 불교가 교토에 발화를 하면서 천태종과 진언종으로 나뉘게 된다.사이쵸의 천태종과 고보대사의 진언종은 각각 옌략쿠사와 공고부사를 세웠다.유홍준저자의 이 글을 읽고 나서 이제야 옌략쿠지를 세운 분이 사이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옌략쿠지를 가는 길은 로프웨이를 타고 산자락 히노키가 즐비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오솔길 양쪽에는 아기보살과 같은 사리탑이 무심하면서도 을씨년한 분위기에 압도되기도 했다.옌략쿠사 근처에는 근본중당이 있는데 일본 원인스님과 장보고와의 인연을 기리는 의미에서 장보고 기념탑이 있다.교토는 동서북이 산자락으로 둘러 싸인 곳이며,남쪽은 완만한 구릉이 펼쳐지면서 남쪽으로 가다 보면 아스카시대의 도읍지 나라가 나온다.유홍준저자는 복잡다단한 교토의 유적을 다섯 갈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도읍지가 되기 전의 유적지 답사,헤이안시대의 개막과 함께 창건된 옌략쿠사 답사,교토 남쪽의 뵤도인 답사,기요미즈사 답사,끝으로 가마쿠라시대 창건한 사찰 답사로 꾸며져 있다.특별해서 놀라운 점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고류사는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가 세우고,야사카 신사 및 호칸사의 오중탑은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웠으며,백제계 도래인 후손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기요미즈사를 세웠다는 것이다.어찌되었든 고대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교코의 빛나는 유적을 세웠다는 점에서 자긍심을 갖어도 좋을 것이다.저자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다카야마사인데 그곳은 첩첩산중에 있는 사찰이다.그곳에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초상이 소장되어 있어 고대 한국과 일본간에는 종교와 문물,관계가 빈번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각 시대는 매 순간 개인의 삶이 있었고,집단적 문화가 있었다.어느 시대든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다.현재도 마찬가지다.그 과정에서 창조된 유물.유적들은 이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이런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문화사다. -P299

 

 아스카,헤이안,그리고 무사시대를 맞이했던 가마쿠라시대의 유적까지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 있는 일본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대면하고 있는 듯 하다.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육바라밀사는 12년에 한 번 꼴로 공개를 하고,삼십삼간당은 천수관음상이 웅장하고 도도하게 도열해 있어 관람객들에게 사열을 받고 있는 듯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삼십삼간당은 길이가 118미터에 달하고 있어 광대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또 하나 신안 해저에서 발굴한 유물과 가마쿠라시대 세워진 도호쿠사와의 인연은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교토시를 개발하느냐 보존하느냐를 놓고 시민과 갈등하던 일본정부는 밀려 오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교토역과 교토탑을 세우고 나머지는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고 한다.오래되어 낡은 문화재를 수리하고 보존해 가려는 일본의 문화정책은 개발위주의 한국정부와 극대조가 된다.이번 교토 답사기는 교토 유적을 중심으로 배열이 되었다고 하며,근간 교토 명소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기대와 설렘이 교차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