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철학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행복론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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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돈과 물질,권력과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 필살기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그지 멀지 않은 시기에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사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방정식도 아니다.설령 어떠한 조건이 개인에게 부합하여 잠시 만족감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평생을 행복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나는 중학교 도덕시간에 난사람,든사람,된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쉽게 얘기하여 돈이 많은 부자는 난사람이고,학식이 풍부한 사람은 든사람이며,인격을 두루 갖춰 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을 된사람이라고 했다.순진한 생각에 든사람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최고인 줄로만 알고 노력 여하에 따라 든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그런데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한국사회에서 인격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의 규정과 시스템에 맞춰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 밥벌이 준비를 하는 청년층들에게 있어 현대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각박하기만 하다.바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피터지고 박터지는 나날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세대간 갈등까지 곂쳐져 있으니 청년들은 세상을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마저 든다.부모가 몇 십년을 허리가 휘도록 교육지원을 해주었건만 자식에게 돌아온 것은 비정규직,취업재수 등 본인을 비롯하여 가족 전체가 울상이다.한편 때깔나는 직장에 들어가고 소위 사(士)자로 불리는 직업을 갖은 부류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고충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삶에 윤활유를 부은 듯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자본주의 사회이고 능력에 따라 살아가는데 누가 뭐라고 간여할 사항은 아니지만 고용 유연화로 인해 양극화 및 소득 불균형 양상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어서,자본주의의 대모순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꼴이다.

 

 한국사회는 소위 연고주의에 경도되어 있다.학연,지연,혈연을 비롯하여 계보,계파,당파 등으로 끼리끼리 유유상종하고 있다.그중에 부자는 부자들끼리,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권력층끼리,돈이 많은 사람은 움크려 쥐고 내놓으려 하지 않는 등 소수의 계층과 다수의 피지배층은 남과 북의 휴전선보다도 더 팽팽하게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다.시대는 21세기이고 OECD국가이면서 자살율 1위,행복 지수 밑바닥을 기고 있는 한국이 아무리 외형적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고 한들 사회구성원간의 위화감과 양극화,그리고 두터운 보수층의 담넘어 기어가는 구렁이식의 정치패턴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만 하다.소수계층만을 위해서 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든다.길게는 조선시대의 사색당파부터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의 친일세력,해방후 반공을 외치고 유신을 찬송했던 세력들이 현재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이다.그래도 삶은 흘러가는 것이기에 (좋은 의미에서 체념을 하고) 내 갈 길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마광수작가는 매체 및 도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그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1993년 <즐거운 사라>가 사회풍속을 저해하는 퇴폐적이다는 이유로 기소가 되었다.지금도 그러하지만 한국사회는 성과 관련한 표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성애표현에 관해서는 동북아권 중에서 가장 치졸하고 대담하지를 못하다.게다가 중.고교생들에게 성교육을 제대로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제2의 성징기가 나타나는 사춘기 시기에 학생들이라도 해서 성욕이 없을까.옛말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사람의 심리가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막으면 더 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다.인간의 본능은 식욕,성욕,수면욕이 있다.그중에 성욕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소화를 시켜 배설하듯 몸에 고인 액체를 정기적으로 배출해내야 건강한 몸과 가뿐한 마음이 들 것이다.마광수작가는 이러한 차원에서 성애와 관련하여 자유스럽게 표현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한다.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과 장점,자부심이 넘쳐 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자신의 성 취향에 맞는 섹스를 즐기는 것,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놀이가 바로 행복의 3대 요건이라고 한다.일종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소신형의 인간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 글은 수미일관 마광수작가만의 기존의 사회구조,사회의 잣대라는 통념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수긍이 가는 점도 있지만 세상을 삐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는 약간의 괴리감도 느끼게 한다.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은 한국사회가 아직도 유교주의의 사상과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시대는 21세기이지만 사회를 이끌어 가는 계층은 사고의 틀이 유연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마광수작가는 시의적절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어 가슴이 후련하기도 하다.한편 지나친 마작가식의 생각과 감정의 틀이 편협되어 있다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이야기의 주류가 성의 자유화,쾌락주의로 일관되어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솔직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과연(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음란,음탕,문란,퇴폐,향락 등을 일삼는다면 한국사회는 야한 나라의 천국의 도래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몇 명의 작가가 필화에 휘말리고 법정까지 간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인간은 말 못하는 동물과 다르지만 본능에도 충실할 때는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사랑도 궁합이 맞는 사람끼리라야 멋진 성애가 가능할 것이다.사회가 만들어 놓은 도덕의 잣대로 인해 사랑을 사랑답게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아낸다면 그 보다 더 큰 정신질환이 어디에 있을까.이기적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때로는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용기와 담대함도 필요하다고 본다.재능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속궁합이 맞는 사람과 성애를 나누고,기호에 맞는 일에 몰입하여 재미있고 즐거운 인생을 펼쳐 나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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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역습 - 행복강박증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병들게 하는가
로널드 W. 드워킨 지음, 박한선.이수인 옮김 / 아로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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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는 돈걱정 안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일이 아닐까 한다.하는 일도 잘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살 맛 나는 날이 오랫동안 계속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 문제가 기본이 되지만 생활고,삶의 지수의 낮음,스트레스의 과다,불균형적인 음식 섭취,운동부족,탐욕과 그릇된 욕망 등 개인을 둘러싼 부조리한 사회환경과 사회구조가 개인의 심신을 지치게 하고 있다.반면 개인의 잘못된 생활습관 및 불정확한 정보,소문만 믿고 병원을 들락달락하는 사람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그런데 현대인의 질병은 신경과 감정을 많이 소비하는 감정노동에 치우치다 보니 그에 따른 질병이 생기게 마련이다.과다한 업무량과 제어하기 힘든 스트레스,우울증과 같은 질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병이 나으면 모두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삶의 과정은 만족이 없는 법이다.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려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라고 생각한다.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는다고 해도 스테로이드제와 같이 일시적인 진정작용을 줄 뿐 근본적인 완치는 쉽지가 않다.현대는 의학 및 의료기계가 발달하여 형편만 된다면 고가의 MRI 등 조직검사를 통해 인체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세세한 병까지도 찾아낼 수가 있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발생하는 질병은 마음 속의 원망,응어리,미움,배신,복수심 등을 없애려고 부단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본다.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 개인의 체질과 성향의 차이로 인해 마음을 다스리고 호전되는 시간이 다를 것이다.우선 잊어도 될 것은 어떻게든 잊어 버리도록 노력하고,누군가와 상담하여 좋은 방향으로 문제해결을 해야 할 사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즉 심인성 질병은 의사가 완치시켜 주지도 않고 그저 조언을 해 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요즘에는 병원이 상업메커니즘에 의해 조그마한 질병도 우선 다양한 조직검사부터 강요를 한다.환자측은 혹시라도 인체 내에 커다란 질병이라고 있을까 싶어 의사의 반강요에 의해 이것 저것 검사를 받게 되며,중환자의 경우에는 병원규정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기존의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도 한다.실제 그러한 꼴을 경험했던 사람이다.병원은 제약회사와 연결고리가 견고하게 형성되어 처방전도 해당 제약회사의 것을 사용하도록 제휴가 되어 있는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그렇다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질환의 경우에는 꼭 병원의 문턱만 제일일까.반드시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이러한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대체요법과 같은 방법도 있으니 스스로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한방의 사혈(寫血)과 같은 침뜸도 묵은 피를 맑게 해주면서 심신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그외 꾸준한 운동을 하면서 세속의 시름을 모두 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명상,요가,음악감상,(불교의)영가의식 등도 정신건강을 회복하게 위해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인공행복의 특징은 삶을 부정하는 힘이다.인공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도 비참하게 여기지 않는다.실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기분은 여전히 유쾌하다.그 누구도 그들을 슬프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P17

 

 이 글은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는 '인공행복 미국인'이라는 사회계층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일과 종교생활 모두 정상인과 같지만,자신의 행복만큼은 약물에서 얻으려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뿐이다.프로작과 졸로프트와 같은 항우울제를 통해 행복감을 성취한다는 것이다.그외 코카인과 같은 향정신성 약물에 의존하는 부류도 있다고 하니 진정한 행복감이 무엇인가를 그들은 알고서나 약물에 중독이 된 것일까.항우울제,향정신성 약물은 자주 복용하다 보면 중독이 될 것이다.담배를 피우다 끊은 사람이 금단현상으로 인해 다시 담배를 입에 대듯 항우울제,향정신성 약물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피폐시키지 않을까 우려가된다.이와는 별도로 종교의 힘을 빌려 마음의 병을 고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안수와 같은 영성의 힘을 빌려 치유를 보았다는 것이다.그런데 과학적인 평가가 불가하다.경쟁,성취지향적인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사회구성원은 심신의 고통이 커져만 간다.외로움,지루함,혼란스러움을 넘어 무력감까지 느끼게 한다.

 

 행복을 찾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는 미국사회의 인공행복 계층자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현상황에서,한국인 역시 건강과 행복을 찾기 위해 아프지 않아도 건강식품을 비롯하여 약물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평소 조급하지 않은 생활습관과 적당한 운동,원만한 대인관계,그리고 폭넓은 교양의 함양을 통해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려는 노력과 의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약물은 스테로이제와 같아 일시적인 진정작용과 평온함을 안겨 주지만,병원,제약회사,보험회사의 상술에 의해 병은 완치가 되지를 않고 의료비용만 증가할 우려가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약물에 의한 인공행복을 쫓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신체건강과 내적인 건강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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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사전 -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적 인민 실용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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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고, 알아야 면장을 살아 먹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가 아닐까 싶다.전자는 가혹한 독재정권과 같이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가 봉쇄되었을 때 속편하게 입닫고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일 것이고,후자는 요즘과 같이 밥 벌어 먹을 기술과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소위 다양한 스펙을 쌓고 남들 앞에서 무식하게 보이지 않는 지식인의 행세를 해야 하는 것과 등가치가 아닐까 한다.인류 역사 이래 소수의 지배계층과 다수의 피지배계층이 존속되어 왔건만 소수의 지배계층이 다수의 지배계층을 위해 보편적이고 실질적인 시혜를 얼마나 베풀었던가.선거 문화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후보자로 나선 이들 모두가 유권자들을 위해,지역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겠다느니,머슴과 같이 유권자의 뜻과 의견에 따라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등의 선심성 말들을 늘어 놓는다.그들이 선출된 후 과연 유권자,지역주민들에게 몇 퍼센트나 공약을 실천했고,얼마나 주민들과의 정례적인 대화,소통,간담회 등을 밀도 높게 했는가는 정치가에 따라 차이는 나겠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모습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정치가는 고도의 수사학적 레토릭이나 자신에 대한 홍보,선전 등의 프로파간다는 강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명예,권력상승에만 머리로 계산하는 모리배(謀利輩)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실상이다.

 

 1960년대 태어난 내가 1970년대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초.중시절 아니 고교시절까지도 국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국가관이나 철학,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관심은 커녕 당장 학교 성적,수능준비로 정치와 경제의 함수관계,역사관,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자본가와 노동자 등에 대해서도 무지몽매했다.당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농사를 지어 식솔들의 배를 채워야 하는 부모님이 사회,나라의 동향 등을 들려 리가 만무했다.대학에서도 잠깐 사회학 서클에 가입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에 중도에 그만 두게 되었다.그리고 군대,대학졸업을 거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학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과 비판능력을 배양할 겨를이 없었지만,다행히 잡학(雜學)수준이나마 어떠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꾸준히 책과 가까이 하고 있는 점이 내게는 정신적 자산이고 교양수준을 고양할 수가 있어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책과 가까이 하는 가운데 사회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창시절 내 머리 속에 주입되었던 선과 악,흑백논리에 치중한 나머지 사물,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되었다는 자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며,신자유주의시대를 맞이하면서 수많은 고급인력들이 조직에서 배제되고 비정규직,임시직,파견근로자,아르바이트 등의 직종이 많아지면서 사회 양극화,소득 불균형,최고의 자살율,삶의 질 꼴치 등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 사회를 바로 보자는 내 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사회성이 있고 지배층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가고 본의가 와전(訛轉)되기도 한다.단어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겉뜻과 속뜻이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예전에는 몰랐던 것이,애매한 의미로 자리잡은 것이 이번 《어용사전》에 실린 215가지의 단어에 함축된 비의(秘意)가 박남일저자의 논리정연한 뜻풀이와 해석,해설로 말미암아 진의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다.이 도서에 담긴 215가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가 시대 및 주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의해 독자가 받아들이는 의미전달이 바뀔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신자유주의 즉 자본주의 시대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어용사전에 실린 단어가 제시하는 의미는 오래도록 개인과 사회를 분탕질하리라 예상된다.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를 오고 가는 의미와 해설을 음미하다 보니 문득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과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라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게 한다.신자유주의는 분명 소수의 돈과 물질을 갖은 힘있는 자들이 떵떵거리면서 살아가도록 제도화되고 천착된 구조라고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이번 정부가 경제민주화니 복지수준 향상이니 공약을 내걸고 있지만,실상은 지배계층은 지배계층끼리만 물질적 부와 사회적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실정이며,국가 통치자가 대다수 피지배계층과 소통은 커녕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만 하다.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자 하는 고지능 수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한국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이며 대기업 위주(줄푸세),공기업의 민영화,노동의 유연성,비정규직 천국의 상징국이 아닐 수가 없다.

 

 저자는 국민 대신 인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인민이라는 말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먼저 사용하다 보니 인민 대신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및 길들이기의 의도하에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서 일제잔재물이 아닐 수가 없다.저자의 말대로 국민 대신 사람이라고 사용하면 어떨까 한다.일제잔재의 색채가 강해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마당인데 국민이라는 단어 역시 전제국가의 이미지가 강렬하기만 하다.소수의 지배계층,소수의 지배권력이 다수의 피지배계층을 지배,착취하고 있다.개인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려면 (인색하고 수전노와 같이 행동하지만)소수지배층이 다수 피지배층의 피와 땀에 의해 얻은 경제적 부를 사회에 환원하려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하다.사회에 환원된 부와 재산을 힘없고 소외된 계층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이에 중요한 한국사회의 과제는 정치,경제가 미래를 위한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변혁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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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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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조직 어떤 직종에서 일을 해도 보람과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일이 고역스러워지면서 삶의 노예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몸으로 움직이는 노동이든 두뇌와 감정의 노동이든 보람과 가치를 느껴야 비로소 일이 즐거워지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일에 매진해 나갈 것이다.부모의 물질적 지원으로 대학 아니 대학원을 마치고 들어갔던 직장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조직 및 직종이 아니라면 굳이 몸과 마음을 썩일 필요가 있겠는가.그것을 빨리 간파하고 재기를 하는 사람이 때로는 현명하고 자신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현실적으로는 다양한 여건과 사정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시간과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전세계는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 들면서 사회와 기업의 조직,문화의 토양이 바뀌어 가고 있다.종신고용제,서열제라는 말은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하고,능력,성과위주로 바뀌어 가면서 고용문제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및 일용직,임시직,파견직과 같이 생계를 위협하는 양극화를 낳고 있다.학벌도 비슷하고 하는 일,노동시간도 비슷한데 손에 들어 오는 보수는 정규직과 그외의 직과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만 있다.대기업은 신자유주의의 특혜 및 비호하에 거액의 수익을 창출하여 창고에 가득 채워 놓는 반면,중소기업이하의 기업은 대기업과 커다란 대조를 보여 주고 있는 상황이다.소득의 불균형,사회구성원의 양극화는 현재 및 향후 초미의 현안이 아닐 수가 없다.'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처럼 돈과 물질이 풍족한 일부 계층은 부패하지 않는 돈이라는 신비한 물질의 혜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리고 있다는 것이 상생과 복지문제차원에서 바라볼 때 기형적이고 사회구조를 낳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학자인 아버지의 후광과는 무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가는 일본의 중년부부의 흐믓하고 당당한 빵굽는 이야기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직접 탐방해 나서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우주의 모든 생물은 자연의 섭리,순환에 따라 생사가 한 번으로 정해져 있는데 종이든 동전이든 돈은 썩지 않는 자연의 반하는 현상에 염증을 느낀 와타나베 이타루저자는 한때 유기농산물 도매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자신이 나아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직장 동료였던 마리와 결혼을 한 뒤 치바현 이스미(夷隅)에서 빵가게를 개업하고 장사를 하게 되지만 2011년 후쿠시마현 쓰나미 및 원전사고로 인해 와타나베씨는 물맑고 공기 좋으며 친환경적인 장소를 물색한 끝에 오카야마현 가쓰야마(勝山) 지방으로 이사를 한다.와타나베저자는 4년 여간의 제빵 기술을 체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빵을 만드는 전과정을 재래식에 가까울 정도로 손과 두뇌,아내와의 업무 분담에 의해 '다루마리'라는 제과점을 열게 된다.와타나베는 빵을 만들고 아내 마리는 손님들에게 빵을 판매한다.빵을 만드는 원료는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은 가쓰야마 인근의 농부들과의 연계에 의해 재료가 조달되고,와타나베는 빵의 원료인 천연 누룩의 제조부터 발효,숙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 하나 체득해 나간다.제대로 된 효모만을 고르고 배양하여 효모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쓴다.일체 첨가물 및 방사선을 쏘이지 않기에 돌연변이도 생기지 않는 건강식이 아닐 수가 없다.비록 빵값은 타제과점과 비교하여 비싼 편이지만 인체에 유익한 빵이다 보니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도 늘고,인터넷 주문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와타나베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깨닫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의하면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하고,부속물로서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기술만이 요구된다"고 한다.기계에 의한 양산화가 가능하면서 판로가 확보된다면 수익창출에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인간은 기계의 부속물이고 기계가 사람을 조종하고 마는 것이다.또한 자본주의의 열쇠는 노동력에 있는데,노동력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자본가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윤이 생기니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래서 와타나베는 친환경적이면서 농약,비료를 사용하지 않은 일본밀을 고집하고 있다.대부분 외국에서 밀을 수입하는데 출하 전에 대량의 살충제를 뿌리고 있는 실정이다.국내에 통과작업이 끝나고 수입업체에서 제분하는 과정에서 과연 살충제의 잔류물이 완벽하게 제거되었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가 든다.'다루마리'제과점은 일본 술 양조에 쓰는 효모로 만든 주종 빵,통밀에서 효모를 발생시킨 전립분 효모 빵,호밀을 발효시킨 유산균종으로 만든 호밀빵,건포도를 발효시킨 건포도 효모 빵,맥아를 발효시킨 맥주 효모 빵을대표 메뉴로 삼고 있다.3일은 근무하고 3일은 휴무라고 한다.

 

 먹거리는 통째 먹는 것이 좋다는 매크로바이오틱(macrobiotic)이나 홀 푸드(Whole Foods)의 개념은 음식 전체에 생명이 깃들어 있기에 식품은 있는 그대로를 통째로 먹어야 비로소 생명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채소나 과일을 껍질째 먹고,생선을 빼째 먹고,쌀이나 밀을 정백하지 않은 현미(玄米)나 전립분의 형태로 먹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건강하게 키운다는 생각인 것이다  -P188

 

 가슴 찡하고 훈훈한 에피소드가 있다.단골손님이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께 빵을 보내달라는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아버지는 빵을 참 좋아하셨거든요.돌아가시기 전에 꼭 빵을 대접하고 싶어요.다루마리의 빵을 드시고 편안하게 눈을 감으시면 좋겠다"라는 의뢰였다.평소보다 더 진심을 담아 빵을 구워 정성을 쏟아 보냈는데,얼마 후 단골 손님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저희 아버지는 다루마리의 빵을 드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입에 문 빵 한 조각을 맛있게 천천히 음미하면서,미소를 띤 채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그 댁 빵이 저희 아버지의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쫄깃쫄깃하고 자연의 숨결이 살아 있는 향이 가득 배인 빵 조각을 입에 물고 행복하고 편안한 자세로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다루마리 제과점의 옹골찬 장인정신과 인체의 건강을 우선시 하는 인본정신이 소리 소문없이 퍼져 나갔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고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 현상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개인창업도 만만치가 않다.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세운 뒤 특화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와타나베 부부와 같은 빵만들기는 새벽잠을 설치면서 해야 하는 중노동이지만 아침 식사로 빵을 찾는 손님들의 기대와 설렘에 부응하고,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와타나베부부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보니 숨가쁘게 살아 가는 현대인의 삶과는 대조적인 모습에 상큼한 감동을 받았다.비록 수입은 적고 느리게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자본주의 속의 또 다른 자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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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 세계를 지배하다 - 종자는 누가 소유하는가
KBS 스페셜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 제작팀 지음, 정현덕 기획, 장경호 엮 / 시대의창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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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 '신토불이'라는 식당이 있어 점심 때는 회사 동료들과 자주 이용했다.그 가게는 두부를 만들고 난 뒤 남은 콩비지로 만든 음식인데 넓은 사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비지찌개는 구수한 맛과 우리 농민이 직접 경작한 콩으로 만든 음식이기에 든든하고 자부심마저 생겼다.그런데 수입농산물 개방(FTA)과 우루구아이 라운드 협정으로 농민들이 분실 자살하는 소동이 일어나고,대대손손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 왔던 농민들이 농협으로부터 빌린 빚과 농작물의 수확가의 수지타산이 맞지를 않아 농사를 아예 포기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면서,돈이 되는 환금작물로 대체하고 있다.비단 쌀,보리,밀과 같은 곡류만이 아니다.가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단기간 안에 시장에 판매해야 하기에 비좁은 공간에서 항생제 및 곡물사료를 먹여 성장시켜야 수지가 맞는다는 것이다.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농촌은 이제 피난 떠난 집,마을과 같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농촌에는 일한 젊은이들이 대거 도회지로 몰리면서 힘없는 노인들만 남아,근근히 삶을 꾸려 가고 있는 실정이다.한편 일반 서민들의 입맛이 서구화로 바뀌면서 햄버거,샌드위치 등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게 되고,불에 구운 육류를 선호하다 보니 어린이들의 신장 및 체중은 늘었으되 건강지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대대로 농부들에 의해 가꾼 곡물,과일,야채,가축 등이 수입개방화되면서 토종 식자재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과연 수입농산물,육류,과일 등을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을까.나 역시 비록 마트에 가서 생산지 등을 따져 보기는 하지만 과연 식자재에 농약 잔류가 얼마나 되고,교배종인지 유전자 조작 생산물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종자(種子), 이 단어는 그지 멀지 않은 과거의 봄날이 떠오른다.겨우 내내 곳간에 저장한 볍씨를 소금물에 담가 보리타작이 끝난 뒤 바로 논에 볍씨를 일정 면적에 심는 광경이 엊그제와 같다.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면서 시골에서 도회지로 이사오면서 시골의 논은 일부는 도지인이 짓고 나머지는 환금작물로 재배하고 있는데,듣기로는 씨앗,농약 등을 도회지에 가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농부가 생산한 볍씨로 농사를 지을 경우에는 볍씨에 맞는 비료,농약을 사용해야 해충,병충,멸구를 제대로 퇴치할 수가 있다고 한다.내가 청소년 시절에는 흥농종묘,중앙종묘 등의 농화학 회사가 있었는데 현재는 초국적 종자 기업 및 초국적 농화학 기업에 인계된 상황이다.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초국적 종자기업 대표적인 회사가 몬산토,듀폰,산젠토 등인데,이들은 각종 곡류를 교배하고 유전자 조작을 거쳐 전세계에 유통 판매하고 있는 실정이다.그 대표적인 기업이 몬산토인데 그들은 농약잔류에 대한 일일허용치의 권장량(?)을 영업비밀이라는 명목으로 공표를 하지 않고 있다.그런데 거의 모든 농작물과 가축 등이 농약,유전자 조작,항생제 남용을 일삼고 있는데 과연 인체에 무해할까.초국적 종자기업과 농화학기업은 과연 누구를 믿고 후안무치하게 상행위를 하는 것일까.아마 미국 정치권력과 기업가 간의 이익 상충이라는 함수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이 글은 2011년 KBS스페셜 <종자,세계를 지배하다>편을 내보낸 뒤 3년이 지나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초국적 종자기업의 종자 지배는 종의 단일화로 인해 초국적 종자기업의 배만 불리게 하고 인류에 끼칠 가공할 위험을 경고하는 의미가 크다.농민들은 자신이 뿌리고 가꾼 농작물을 소중히 여겼다.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종자만큼은 소중히 다루고 저장하여 동일한 토양에서 대대로 재배되어 왔던 것이다.그런데 이제는 씨앗의 주인이 초국적 종자기업의 손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초국적 종자기업은 '꿩 먹고 알 먹는 식'으로 씨앗도 팔고 농약도 파는 횡재를 부르고 있다.씨앗의 단일화가 과연 안심할 수만은 없다.만일 이로 인해 특정 질병이라도 발생한다면 초국적 종자기업이 책임을 질 것인가.그들은 이런 저런 변명과 핑계거리를 치밀하게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즉 오리발 내미는 식일 것이다.농산물에 생산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수확물의 시장가격이 낮아 농민들은 늘 빚더미에 앉게 되고,감당 못하는 빚으로 인해 삶을 마감하는 사례가 인도 농민들의 자살의 주원인이 되는 것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2009년 농촌진흥청이 관찰한 한국에서 재배되는 재래종 작물의 수가 재배되어 온 종자의 74퍼센트를 잃어버렸다고 한다.그많던 토종 씨앗들은 어디로 갔을까.식물 유전자원이 사라져가는 유전자 침식 조사 결과 고추,수수,기장 등은 더 이상 재래종이 재배되지 않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이다.밀려 오는 수입개방과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농작물의 수확가로 인해 농민들은 더 이상 천직을 내팽기고 말았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대신 돈이 되는 환금성 대체작물을 재배하고는 있지만 이것 역시 경제적인 면에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씨앗은 자연 상태에서 다양한 변이를 통해서 기후의 변화와 토질,병해충 같은 조건과 어울려 살아남거나 진화해 왔다.그런데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재래 씨앗도 초국적 종자기업에 넘겨 주게 되면서 복잡한 변이,유전자의 이동,염색체의 재조합 등의 교차 과정이 벌어지고 있다.보릿고개의 시절을 겪은 1세대 윗분들은 녹색혁명을 경험하면서 생산량 늘리기에 공을 쏟았는데,이제는 녹색혁명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고 말았다.참고로 현재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고작 22.6퍼센트이다(2011년).

 

 계절에 관계없이 전 세계를 상대로 생산되며 소비되는 시대가 되었다.이를 세계농식품체계라고 한다.다양한 먹거리를 계절과 상관없이 얻을 수 있는 점은 일견 좋아보이지만 세계농식품식품체계가 산업형 농업과 자유무역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은 농업의 미래를 위해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특히 세계농식품체계는 안전한 먹거리가 안정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될 수 없는 구조적 원인이 된다. -P106~P107

 

 종자를 판매하는 초국적 종자기업들은 생명체와 생물자원에 대한 특허가 허용되도록 하기 위해 종자와 식물들이 자신들의 '발명품'이고,자신들의 재산이라고 주장한다.특히 경악할 만한 사안은 몬산토는 자연의 재생 순환에 기반을 둔 농민의 파종이 오히려 자신들의 재산을 '절도(竊盜)'하는 행위라고 공표하기 시작했다.몬산토는 대표적 초국적 종자기업으로서 아르헨티나에 처음 종자가 들어 갔을 때 로열티를 거론하지 않고 밀수를 허용했는데,3년이 지난 뒤 그간 사용한 종자에 대한 특허사용료를 모두 보상하라고 아르헨티나 정부를 압박했다고 한다.아르헨티나의 농민들은 격력하게 저항했지만 자본력과 특허라는 제도를 앞세운  몬산토의 승리로 돌아갔다는 전언이다.'병 주고 약 주는 꼴'이 아닐 수가 없다.

 

 한국의 GMO 표시제는 검출 기반을 기준으로 한다.현행 식품위생법은 변형된 유전물질(DNA)이나 외래 단백질 성분이 남은 식품에만 GMO 표시를 의무화하고 있는데,원료의 가공 과정에서 DNA가 파괴되거나 검출이 불가능한 식품인 간장,식용유,녹말당(전분당) 등을 표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식용으로 수입되는 GMO 옥수수,콩이 대부분 녹말당과 식용유에 쓰이는데 표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기에 소비자는 GMO 식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먹고 있는 것이다.반면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사료로 재활용할 때는 'GMO 사료'표시를 해서 판매하도록 되어 있다.정작 인간의 몸이 중요할텐데 GMO 표시의 애매모호한 기준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유전자 조작 생물 문제는 이제 인체 위해성을 넘어 환경 문제,종자에 대한 특허권,자본 종속 등 사회경제 문제로 비화될 조짐이다.아니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토종 종자인 콩이 20세기 초 미국인과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유출되었다.이렇게 유출된 대두가 어떻게 교배되고 변이되었으며 유전자 조작이 행해졌을까.특히 세계무역기구인 WTO는 GMO 확산을 강제하고 있다.놀라운 점은 1992년 미국 부시정부는 GMO가 본래의 생물자원과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판정을 바탕으로 GMO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이는 유전작조작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똑같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것이다.이제 초국적 종자기업,농화학기업은 종자,농약,비료,곡물 수집,운송,축산,식품 가공,유통에 이르기까지 먹거리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유전자 조작에 의한 종자로 인해 생태계 오염과 유전자 조작 작물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이에 반기를 들고 토종종자운동을 펼치는 운동가 및 단체들이 늘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식량 주권,종자 주권 되찾기 위해 정부차원에서도 실질적이고 지원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기업과 자본 앞에 종자마저 주권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인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종의 단일화가 아닌 종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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