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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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각종 리뷰를 훑어보았다. 어디에고 똑같이 쓰여 있던 말은 이 이야기에 대한 결말을 듣지 말라는 것(옮긴이 또한 후기에서 줄거리만큼은 절대로 소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해 그런 평도 있었다. 이 소설의 저자는 말재간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소설을 아주 지능적으로 썼다는 얘기였다. 일단 읽고 나니 작가가 보통 똑똑이가 아니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고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에 보았던 니콜 키드만 주연의 영화 디아더스가 생각난다. 이런 류의 영화는 그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임에도 언급을 하자면 (벌써 개봉 한지 1년도 넘었으니, 볼 사람은 다 봤고, 그래 알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되어....)그 영화에서의 마지막 반전은 '네가 귀신이 아니라, 내가 귀신이란 말이더냐'였다. 귀신에게 그토록 시달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생지옥을 조성하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기만시켰다는 류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늘상 팔에 솟은 소름을 쓸어내게 된다.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촘촘한 대화의 그물망으로 엮어 내었다. 재밌다. 그리고 읽으면서 생각한다. 나 자신은? 또 다른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지옥불을 선사(?)받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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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링
쭝청 지음, 김미란 옮김 / 다섯수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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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링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던 것은 <천안문>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 여든 하나의 삶을 산 그녀의 인생은 독자가 보기엔 너무나 곡절이 많았다. 한 사람에게 인생의 희비의 순간이 그토록 천차만별로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일 정도였다. 그렇다. 딩링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던 것은 그녀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존경스러워서라기 보다는 그녀의 전설과도 같은 일생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딩링은 1904년 망해가는 청제국 말기에 태어났다. 상하이와 베이징을 전전하며 무정부주의 사상도 접해 보고, 스물에 만난 남편과의 신혼 시절(달콤한 신혼이라고 표현하기 뭣한 것이 이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생활의 실천을 위해 서로 떨어져 생활을 하는 둥 그립고 애틋한 시기 또한 보내게 된다.)에는 낭만적 감상주의 풍의 소설 < 소피의 일기>를 써서 세간을 집중시킨다.

그러던 중 1931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결렬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남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녀는 점차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바꾸어간다. 원래 혼자 있기 좋아하고 남과 어울려 움직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작가 딩링이었지만 점차 단체의 임원으로, 주임으로 직책을 맡게 되면서 상황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선전 집회에서 강연도 하고 통솔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어제의 문학 소녀가 오늘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는 어린 두 남매가 있었지만, 아이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그녀는 이제 투사가 된 것이다. 그렇게 대중 사업의 탁월한 간부로써, 바쁘게 시간은 흐르다가 1960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녀는 알량한 엘리트 작가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가혹하게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시골의 농장에 보내지게 되고, 예닐곱살짜리 소녀들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외양간에서 자는 둥 모진 고문과 탄압 감시의 나날을 십오여 년간 보내게 된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그녀가 우파로 몰리어 수모를 당하게 되었나. 그것은 그녀가 젊은이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발을 만드는 일이라면 백 켤레를 만들어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오직 한 켤러만 잘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창작은 다르다. 오직 한 작품이 좋은 것은 괜찮으나, 백 개의 작품이 모두 비슷해서는 안 된다.'

1976년 드디어 문화 대혁명의 기간은 끝나고 새로운 중국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면서, 딩링에게 입혀진 혐의도 벗겨져 다시 옛날의 주목받던 작가 딩링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나이 이제 황혼, 70살에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서방에서 그녀에게 인터뷰가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난받았던 작가 딩링은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는 대부분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신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딩링은 온갖 풍상을 겪은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이란 차라리 무명유실(無名有實)한 것이 낫지 절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명실상부(名實相副)한 것조차도 좋지 않다. 당시 나의 명성은 너무 눈부셨고, 그로 인해 재난이 뒤따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김진애의 에세이에서 보았던 구절이 생각나는 건 뭘까. 여자가 일을 일로써 하려면 넘어야 되는 몇 가지 고개들. 중에 이런 게 있다. 일단 일을 좀 한다 싶고 눈에 띌 만하면 '너무 크게 조명을 해서 더 크게 자랄 제목을 지레 말려 버린다.' 라는 구절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는 딩링이 겪은 그 모든 파란의 세월이 단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겪었다고 보여지지는 않지만, 웬지 내 눈엔 다소간의 의심의 소지는 있어 보인다. 문혁을 계기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여성 작가에게 내려진 비난과 죄목들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이 모진 순간(느닷없이 우파로 몰리는)에, 난리를 당하고도 의연하게 대처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가 힘들 때 정녕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모성'이라는 것을 또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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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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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대학 2학년 때이다. 사회학 개론 수업에서 레포트로 주어진 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억지춘향으로 읽었었다. 그 땐 학문이 도저히 즐거워질 리가 없던 시절이었다.(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그래서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흑심(?)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다시 꺼내 펼쳐든 이 책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밑줄이 팍팍 그어져 있다. '인간은 1백 40억개나 되는 뇌세포 중에서 보통 10퍼센트만 사용한다......' 같은. 당시엔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의 방법적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던 이즈음의 어느 늦은 밤에,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수학 <정석>의 저자 홍성대가 가요무대의 명엠씨 김동건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된다. 홍성대 님의 수학 정석의 인기는, 막말로 지금까지 팔린 <정석> 쌓아 놓으면 에베레스트산을 120번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가난했던 홍성대는 대학 재학 시절 등록금과 용돈 마련을 위해 수학 과외 지도를 했었고, 지금의 <정석>은 그때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만든 과외 지도 교본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어느 수학자가 학문을 하는 기쁨에 대해 써 놓은 책을 읽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학문을 하는 기쁨이 어떠했다고 했는지 다시 한번 그 수학자의 겸손한 일담을 회상하고자 학문의 즐거움을 찾아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지난 시절에 읽던 내용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행간이 읽히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그냥 가만히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즈음 나는 밤에 잠을 자다가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수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대다수가 회사 일 생각이다. 뭐 엄청난 업무를 한다고 이러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언제부터인지 나는 이렇게 회사일 때문에 조바심 쳐대는 버릇이 생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끈기를 발휘하는 일,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리는 일과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일상을 뒤돌아본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심각하리만큼 중심을 읽어버리게 되는 날이 몇 번인가 또 찾아올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때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씨의 이 책을 펼쳐 들게 된다면 .....?

그러나 딱 한가지 이 책에서 거슬렸던 것 4장 <자기 발견> 부분을 보면, 하버드에서 공부한 그가 미국의 학풍이 다양성을 중요시한 다고 목소리 높여 칭찬하는 부분이 있다. 다양성까지는 좋은데......... 미국과 일본의 학풍을 비교하고, 자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견지를 취다하보니, 조금은 친미론적인 글이 되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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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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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피에 비해 무척 가볍고, 종이질은 투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재생 종이인 모양이다. 이 책의 메시지를 반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된 미래'에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과연 뭘 배우게 되는 것일까. 글쎄, 특별히 뭘 배웠다기보다는 솔직히 이런 저런 씁쓸한 생각들이 들었다. 앞부분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라다크가 관광이다 뭐다 해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 이전, 제 1부 '전통' 읽을 때는 마음 속에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

저자는 라다크인들의 얼굴엔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토록 험악한 환경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다크 사람에게 웃음이 많고, 분노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점차로 그 사회를 형성하는 외부 구조, 규모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구조는 개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또 그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강화하며,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다른 마을 사람들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까지가 행복이다. 그 다음은?

그런 라다크가 개발과 관광 개방 따위의 정책에 노출되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렇다. 또한 교육의 패턴이 바뀌었다. 라다크의 교육은 아이들을 서구화된 도시 환경 속에서 좁은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었다. 결국 라다크인들은 점차로 그들의 문화와 자연으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 현대 교육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주위 상황을 거의 보지 못하도록 하는 눈가리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고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학교를 마친다. 그들이 받는 교육은 뉴욕 사람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빈약한 변형이다.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는 부모 세대를 부끄럽게 여기고, 농사가 아닌 도시에 나가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불안정한 현금 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리게 된다. 이는 곧 삶의 질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한다.

지구촌에서 떠받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화와 뿌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거기에 따른 소외는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폭력이 잔재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모습의 뒤에는 바로 소외가 있다.

라다크보다는 조금 더 산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 또한 상투화된 대중 매체가 주는 이미지의 피해자가 되어 있지만, 현실과 서구적 이상과의 간격이 훨씬 더 넓은 제 3세계에서는 절망적인 느낌이 그만큼 더 강한 것이다.

물론 개발 도상 국가의 사람들 또한 이런 현대화가 종족 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킨다던지 하는 악재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진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 부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17년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간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 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사회가 여러 가지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선진 사회보다 더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도의 기술 문명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인 생명력과 그것의 다양성이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잘 알며,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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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만든 카를로스 곤의 파워리더십
아타가키 에켄 지음, 강선중 옮김 / 더난출판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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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최고위 의사 결저자들은 대부분은 본국인이다. 그러나 카를로스 곤은 예외다. 거는 레바논계 브라질인이다.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걸지도....

현재 직장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성공한 최고 경영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꿈꿔 본 적은 없었다. 자질도 안 될뿐더러, 사명감과 책임감이 무지막지로 요구되는 최고 경영자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지는 꼭 그 자리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으니까. 그렇다. 억만금을 준대도, 못할 것 같다. 철저하게 비용을 삭감하여 자산 매각을 하거나 내부 구조 조정을 단행하는 따위의 성공했다는 경영자들이 행하는 일들을 과감히 벌릴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 못되니까.

얼마 전에 내가 아는 사람이 다니는 모 회사에는 공문이 하나 돌았단다. '2003년부터는 회사의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요지의 공문이었다고... 여전히도 순진한 당사자는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주변에서의 해석은 달랐단다. 그 공문은 '더 이상은 신규 채용은 없을 것이며, 필요하면 감원이라도 불사하겠단' 뜻이란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는 감원이 단행되더라도 그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잘리게 되면 잘림을 당하는 거지. 뭐. 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권고 사직 같은 거라면 적어도 실업 수당 내지 퇴직 위로금은 더 챙길 수 있어. 라는 생각과 함께.

이 친구 왜 이렇게 맥빠지게 직장 생활을 할까. 워낙에 열정 없는 천성이고, 시키는 대로 하고 공격하는 대로 당하는 성격이라 이 모양일까. 천성이 위와 같아서가 아니라면 이것은 잘못된 근무 환경이 위와 같이 친구를 만들어 놓은 것일 거다. 훌륭한 경영자는 회사를 사원이 재능과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데에 있을 거다. 이 친구가 어떤 경영자를 만났어야 지금보다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봄서 이 책을 읽는다.

이 책에 나오는 카를로스 곤은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닛산 자동차를 위기에서 구해 세계의 시장으로 거듭나게 만든 최고 경영자 카를로스 곤의 경영 전략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9년 6월 곤이 최고 경영자로 취임될 당시의 그의 의지를 제대로 피력하기에는 여러 가지 악재가 따랐다. 대기업병, 관료적인 체질, 파벌주의, 노사의 유착 관계 등이 그것인데, 지난 몇 십년 간 만연해온 닛산의 이런 폐해를 근절하고자 곤은 프랑스인 특유의 확고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밀어 부친다. (올해 중반을 강타하던 히딩크 열풍이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맨 먼저, 하청업체를 바꾸고, 업체 수를 줄이고 하는 둥의 노력을 통해 비용을 삭감하고, 자산을 매각하여 현금화한다. 대량 인원을 감원하여 구조를 조정한다. 이 와중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거센 저항이 없었다면 거짓말. 그러나 마치 냉혈한처럼 그에 이랑곳 않고, 의지대로 실행 해 나간다. 그리고 이전에는 그 어떤 임원들도 눈여겨 주지 않았던 닛산 내의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요소요소에 과감하게 간부급으로 기용한다. 이렇게 마련된 기반 내에서 최하 말단 사원과도 케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확고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원래 일반적인 경영자들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개혁을 실행하려 해도 너무 저항이 많아서 생각대로 전혀 되지 않는다는 한결 같은 목소리를 내곤 하는데, 카를로스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제목, '리더쉽' 앞에 '파워'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

후기에서 일본인인 필자는 '일본인들은 자기 개혁에 서툰 민족'이라고 시인한다. 외압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개혁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카를로스의 이런 단행이 잘 먹힌 걸 보면, 카를로스의 경영 철학이 너무나 특출나서라기보단 일본인들이 (한국인들 만큼이나) 외국인 특히 서구인에게 약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설하고, 진정한 리더쉽이란 직원들에게 일할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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