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으로 '링''주온''디아이'로 이어지는 아시아 '특급 공포'의 뒤를 이어갈만하다,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링, 주온, 디아이, 셔터로... 갈수록 그 힘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정도면 굉장히 잘 만든 공포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 오랜 시간동안 구상을 해왔고 '제대로 된 호러'를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던데, 과연 그 노력의 면면이 보였습니다.(이미 헐리웃에서 리메이크 결정이 났음)

 

귀신 찍는 카메라, 라는 익숙하지만 신선한 아이디어가 우선 영화 전체를 힘있게 이끌어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촘촘한 복선으로 꽉 짜여져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공포영화가 절대적으로 본받아야 할 부분이지요. 조금은 익숙한 설정이라고 할 지언정, 각본상에서 대충 '공포로 때우기'식의 전개가 나오면 영화는 아주 망쳐버리죠! 우리나라 공포영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최근 유행하는 성공한 '공포영화'들의 '공포장면'을 차용해 오는 것 만으로 어깨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셔터가 좋았던 이유는 공포영화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아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몇 몇 장면은 감독의 호러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진짜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지요) 적어도 감독은 관객이 어느 때에 지루해할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객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감각적인 연출력을 보였고 '아주 걸작'이 아닌 이상 그정도면 관객은 대게 만족하는 편입니다. 복선은 치밀하게, 반전은 단 한번의 스트레이트로, 플롯은 복잡하지 않고 타이트하게, 공포는 화끈하게, 대략 이정도면 호러 매니아들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할 겁니다. 간단해보이지만 사실 이게 쉬운 게 아니죠! 복선은 산만하게, 반전은 시시한 잽으로, 플롯은 복잡하고 늘어지게, 공포는 짜증나게,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기 십상이죠!

 

특히 마지막 반전과(물론 예상 가능한 반전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앞뒤가 딱맞아 떨어지는 반전은 그 자체로 충분한 카타르시스를 안겨다 줌) 함께 이어지는 최후의 공포는 역시 이 작품이 꽤나 수작일 수 있는 이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질질 짜면서 슬픈 호러, 감동 호러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각본상으로 안 되면 꼭 이런 식으로 한국인의 눈물 정서를 자극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공포 같지 않은 공포, 많이 봐 왔죠...!

 

크게 기대하고 본다면 크게 만족할 만한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편차에 따라 시시하네, 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링, 주온, 디아이도 시시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주관적, 객관적인 평을 종합적으로 아우러 볼때 '셔터' 정도면 상당히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섬뜩했고, 으스스했고, 이야기가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 귀신이 무서웠으니까요!  

 

-> 남자 주인공이 '리마리오'를 닮았다고들 하던데, 조금 닮긴 닮았더군요. 리마리오가 조금 더 샤프해지면... 검색해보니, 이제 겨우 81년생의 태국 영화계 스타더군요. 어쨌거나 남녀 주인공이 상당히 잘생기고 예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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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빌 2
Kill Bill: Volume 2

 

 

복수의 끝은 비애!

 

 

타란티노는 분명 90년대가 탄생시킨 최고의 감독이다.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은 천재 감독의 탄생을 알렸고 타란티노 이전 영화, 이후 영화라는 큰 획을 긋게 했다.(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전은 고루함, 이후는 답습) 서부극, 홍콩 쿵푸영화, 일본 애니메이션과 사무라이 영화, 오우삼의 느와르, 드 팔머의 스릴러등 다양한 문화적, 장르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 타란티노는 기존의 장르 관습을 해체, 재구성 하면서 잔혹하고 감각적인 테크닉으로 포장하며 헤모글로빈을 분출케 했다.

그런 그가 <킬빌>이라는 신작을 내놓았을 때 필자는 타란티노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을 짐작하게 했다. 우선 그가 전작인 <재키 브라운>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었을 것이라는 것. 또 한 가지는 그렇기 때문에 <킬빌>을 만들어 보여 복수를 하고 싶었다는 것. <재키 브라운>은 타란티노가 밝혔듯이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보다 재미 없는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가장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였다. <재키 브라운>은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이 보여준 시간의 재구성과 거미줄같은 캐릭터의 구성이 한층 치밀하고 복잡해진 영화였다. 전작들에서 보여진 현란한 잔혹 영상미가 줄어든 대신 서로 얽히고 설키는 뒷골목 인생들의 시니컬한 스토리가 꼼꼼하게 스케치된다. 타란티노의 많은 재능 중 필자가 가장 최고로 꼽고 싶은 것은 놀라운 입담이다. 그에 의해서 창조되는 무수한 캐릭터들은 그들이 내뱉는 불꽃튀는 대사들의 향연으로 생명력이 결정되어질 정도다.(헐리웃 내에서 그의 대사 처리 능력은 '특A급'으로 정평이 나있다. <크림슨타이드>의 경우 토니 스콧 감독이 완성된 각본을 일부러 타란티노에게 손보게금 했을 정도. 물론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크림슨 타이드>는 보석같이 빛나는 대사들의 향연으로 품격이 올라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뒷골목 3류 인생들의 저급한 농담에서부터 시니컬한 비애까지 훤히 꿰차고 앉아 자유자재로 캐릭터를 뽑아낸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들은 스스로 살아숨쉬고 스토리를 만들어나갈 정도다. 그러한 살아 숨쉬는 캐릭터와 꽉찬 스토리의 힘은 <재키 브라운>에서 가장 미끈하게 뽑혀나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키 브라운>은 타란티노가 가장 애착이 갈만한 작품이고 그래서 가장 타란티노 다운 작품인 것이다.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의 아쉬움을 6년 후 마침내 <킬빌>로 풀어낸 것이다. 정말로 그가 하고 싶어서 온 몸이 근질근질했던 이야기, <재키 브라운>으로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그가 몸살 날만큼 보여 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애너지를 <킬빌>로 분출시킨 것이다.

그는 <킬빌>에서 <재키 브라운>과의 차이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승부수가 되었다. 전작이 관객과의 소통에서 실패를 한 원인을 그는 재빠르게 캐취해낸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만의 전매특허 헤모글로빈의 시가 부족했던 탓이리라. 분명 <킬빌>은 <재키 브라운>과 일면 닮은 부분이 있다. 느와르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 그 여자 주인공이 거대한 세력에 휘둘리면서도 재치있고 당당하게 맞선다는 것.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느와르, 이것이야말로 타란티노가 오래도록 가슴 속에 품어왔던 이야기일런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완성된 <킬빌>을 두 조각으로 나눈다. 1부에서는 관객들이 자신에게서 그토록 목말라하던 헤모글로빈의 시를 현란한 테크닉으로 마음껏 분출시킨다. 피가 낭자하는 청엽옥의 결투씬, 오렌 이시이의 머리가 날아가는 충격영상으로 관객들의 얼을 빼놓은 후 그는 살며시 2부를 내보인다. 빌은 왜 그녀를 죽여야만 했는가, 그녀는 왜 빌을 죽여야만 하는가, 빌은 누구이고, 그녀는 누구인가? 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비밀의 조각들이 하나 둘씩 끼워지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타! 란티노는 <킬빌 1>을 통해 관객들을 강렬하게 끌어당긴 후 비로소 <킬빌 2>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간다. 자극적인 영상미에 이끌려 흘려보낸 무수한 수수께끼들의 답은 오직 <킬빌 2>에 있는 것이고 관객들은 '상'권을 읽은 지금, 반드시 '하'권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 챕터를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

이러한 전략은 탁월했다. 타란티노는 다시한번 장르적 특성을 활용해 자유자재로 관객들을 쥐고 흔든다. 전편에 암시되어졌던 브라이드의 살아있는 딸이 등장하고, 어째서 빌이 브라이드를 암살하려 했는지에 대한 배경이야기가 나오고, 브라이드가 페이 메이로부터 무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나오고, 브라이드가 빌을 떠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빌과의 최후의 대결이 그려진다. 재미있는 것은 숨겨진 사연들에 대한 타란티노만의 놀라운 입담이다. 술집에서 해결사 노릇이나 하며 보스로부터 온갖 구박을 당하는 3류 건달로 전락한 버드의 사연이나, 한쪽 눈을 잃게 된 엘 드라이버의 사연, 브라이드가 조직을 떠나게 된 사연 등. 그들이 뿜어내는 대화의 힘은 전편의 청엽옥 결투씬 만큼이나 압권으로 와닿는다.(그만큼 살아있는 대사의 힘은 너무나 훌륭했다) 특히 빌의 사연이 절정을 이룬다. 잔인무도하고 얼음같이 차갑게만 비쳐졌던 전편의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애수짙은 빌의 모습은 가히 놀랍다. 브라이드의 결혼식장에 악기를 연주하며 나타난 빌, 자신을 찾아온 옛여인 앞에서 딸과 함께 노는 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브라이드를 향해 모든 진심을 얘기하는 빌, 그러한 빌의 진면목들은 전편의 관객들을 정서적으로 공략한다. 이처럼 계산된 감독의 연출에 관객들은 보기좋게 빠져들며 빌과 브라이드 두 캐릭터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게 되버린다. 결국 피할수 없는 최후의 대결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복수의 끝이 남긴 가슴저린 비애만이 관객들의 정서를 지배한다. 그리고 대서사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강렬했던 두 권짜리 펄프 픽션은 막을 내린다.

우리가 <킬빌 2>에서 기대할 것은 청엽옥 결투나 오렌 이시이와의 진검승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1편을 한번더 보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 복수의 서사시는 vol 1과 vol 2 즉, 상, 하권으로 나누어진 하나의 이야기다. 총 10개의 챕터를 가진 한 편의 소설이다.(장르는 느와르 혹은 하드보일드쯤) 싸구려 소설 제목 같은 '피의 복수를 다짐한 여자'가 있고 그녀의 잔혹한 복수극이 있고 후반부로 갈수록 숨겨져 있던 비밀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무수히 읽어 보았음직한 이런 류의 소설들, 그 틀을 우리는 알고 있다. 타란티노 역시 알고 있고 그는 그러한 소설들을 헤밍웨이나 포크너보다 숭배시한다. 이점을 잊지 말자. 우리모두 헤밍웨이나 포크너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장르에 충실했다. 혀를 내두르는 잔혹함으로 책장에 몰입하도록 만들었고 유려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과시하며 다음 챕터가 끊임없이 궁금하도록 만들었다. 챕터가 거듭될수록 비밀은 밝혀지고 최후의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적재적소에 배치한 음악과 현란한 영! 상미 감각적인 테크닉으로 포장했다. 이제 <킬빌 2>에서 복수는 마침표를 찍었고 우리들은 vol 3이 나오기를 혹은 그의 신간이 출간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테다.

장르를 충실하게 활용하면서 그것에 변칙을 가하는 것, 그러면서 그것을 멋지게 포장하는 것, 이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공식을 타란티노만이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펄프 픽션은 언제나 유쾌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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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와 막대사탕을 든 희극지왕

 

 

성치 형님의 영화는 무.조.건. 극장에서 봐 주어야 한다,는 '주성치 열혈 매니아'로서 이번 신작을 열렬히 기다려왔었다. 매스컴을 통해 주성치가 '소림축구' 이후 한 단계 업그래이드 된 대작 '쿵푸허슬'로 3년만에 돌아온다는 기사를 접했을때 우리 시대 최고의 '희극지왕'이 이번에는 과연 어떤 '물건'을 만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더구나 그가 그의 인생이라고 표현했던 '쿵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니 그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내한과 함께 개봉된 '쿵푸허슬'은 성치매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지난주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2년전 국내 개봉한 '소림축구'의 오프닝 성적을 능가하는 수치다. '소림축구'가 최종적으로 78만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아마 '쿵푸허슬'이 그 기록을 깨지 않을까 싶다. 이미 홍콩에서는 5천5백만 홍콩달러를 돌파하며 '무간도'의 흥행기록을 넘보며, 나아가서 역대 최고인 '소림축구'의 6천만 홍콩달러 기록까지 갈아치울 기세다. 물론 대만, 중국에서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흥행기록을 다시 쓰는 중이다. 아울러서 3월에는 전미 1500개극장에서 일제히 개봉한다고 하니 헐리웃 박스오피스도 귀추가 주목된다.(이번에는 성공하리라고 본다!)

이야기로 들어가서,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설픈 건달 싱은 구태여 '악당'이 되고자 한다. 이유는 '선'해서는 결코 세상의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라도 그의 이러한 가치관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처가 아닌 이상. 때문에 악인인 척 하는 싱은 사실 진정한 악인이라 할 수 없다. 그저 현대인을 대변하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악당 '도끼파'의 일원이 되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포부는 '돼지촌'이라는 빈민마을에서부터 막히기 시작한다. 별볼일 없어보였던 돼지촌에는 사실 숨은 고수들이 강호를 떠나 조용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벌집을 들쑤신 꼴이 된 싱은 약삭빠르게 '도끼파'에 붙게 되고, 마침내 '돼지촌' 고수 대 '도끼파'의 전면전이 시작된다. '도끼파'는 '돼지촌'을 멸하기 위해 계속해서 킬러들을 보내고 건드려서는 안 되는 절대 악 '야수'까지 불러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싱은 어린 시절, 자신이 구해주었던 벙어리 소녀와 재회를 하게 되고, 무공의 참 진리도 깨닫게 되어, 잠자고 있던 내공에 눈을 뜨게 되고, 여래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다.

시각적 효과는 '소림축구'에서 몇 단계 업그래이드 되었다. '쿵푸'액션은 이제껏 보아왔던 '최고'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롬비아'측의 막대한 제작비가 낳은 현란한 CG와 '원화평', '홍금보' 콤비의 무술 액션이 환상적 조화를 이루어내니 현존하는 '최고'의 '쿵푸액션'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과 귀의 즐거움은 충만했다. 생각보다 '액션'은 엄청 거대하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대신 상대적으로 '코믹'이 조금 줄어든 것은 아쉬움이었다. 또한 주성치의 전작들에 비해 '주성치'의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액션'이 '주성치'마저 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동안의 영화들이 주성치의 압도적인 원맨쇼였다면 이번에는 골고루 분배를 한 주성치의 전략이자 배려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필자가, 주성치의 매니아가, 주성치의 영화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 '쿵푸허슬'에는 있었다. 3년간의 기다림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희극버라이어티로 그는 팬들에 보답을 한 것이다. 확실히 그는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고'의 희극지왕이다. 이번 영화에서 필자가 정말 좋았던것은, 개인적으로, 벙어리 소녀와의 짧지만 강렬한 여운이 남는 로맨스였다. 특히 극 중반에 우연히 마주친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명.장.면.이.었.다. '구원자'소년이 '약탈자'건달이 되어 나타난 그 절묘한 상황에서의 물결치는 듯한 음악과 영상의 조화는 말못하는 벙어리 소녀의 애틋한 심정만큼이나 보는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주성치가 정말로 '감동'의 깊이를 조절을 할 줄 아는 명장의 반열에 들어섰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패러디 장면들도 영화를 보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극 초반에 '소림축구'를 의식한 듯한 대사나, 김용의 소설 '신조협려'를 패러디한 설정들, 뮤지컬 고전 '탑햇'의 명장면을 연상시키는 극적인 재회장면.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은 '샤이닝'의 한 장면을 '공포'스럽게 패러디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개인적으로 과연 주성치다운 허를 찌르는 발상이었다, 라고 생각한 장면. 주성치가 호러영화에도 관심을 가졌을 줄이야, 하는 감탄과 함께)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악인'이 어떻게 '선인'으로 거듭나느냐 하는 이야기다. 그것을 주성치는 '도끼'와 '막대사탕'으로 대치시켜 절절하게 '인생'이야기를 그려낸다. '소림축구'는 물론 '식신''파괴지왕''희극지왕'등에서 무수히 다루어졌던 힘없고 나약한 '서민'들의 애환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처절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이 이 영화속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도끼'를 주형하는 금속액처럼 뜨겁고 강렬하게, '막대사탕'을 만드는 설탕과 색소처럼 달콤하고 아름답게!

이런 영화라면 정말로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세속의 '악'에 찌든 현대인 누구라도 '싱'처럼 아련히 간직하고 있을 어린 시절의 순수한 '선'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마법같이 자극하는 '라스트'의 특별한 여운은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삭막한 가슴'에 뿌려지는 '단비'같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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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수난이 보여준 무서운 감동!

 

 

우선 이 영화의 대한 개인적인 평을 하기에 앞서 몇 가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필자가 종교에는 완전 문외한이라는 사실과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종교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영화 자체의 작품적인 면만을 두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부터 쓰게 될 영화 평으로 인해 종교적인 공방이 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정치와 종교만큼 대립간의 접점을 찾기 힘든 문제도 없을 것이니, 모두 자신의 믿음을 마음속으로 깊이 간직하고 그것에 신념을 가지면 그만일 것이다)

예수 최후의 12시간을 다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이제껏 만들어진 무수한 종교영화와 분명 판이하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이 영화만의 고유한 장점이 될 수도 비난의 여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끊임없이 논란의 축이 되어 온 여러 문제들, 이를테면 반유대적 영화라느니, 배경 설명의 부재라느니, 성서의 왜곡이라느니 등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앞서 말했 듯 그런 문제들에 입장을 밝힐 만큼 필자 스스로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부족한 지식으로 나름의 입장을 내세워 본들 속사포같은 반박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입장 표명은 별로 재미도 관심도 없다.

그러니 이제 불필요한(혹은 필자가 잘 알지 못하는) 외적 파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멜 깁슨의 세 번째 연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고어 영화를 방불케하는 잔혹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못할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된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까지 12시간의 수난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가시 회초리와 채찍으로 멀쩡했던 예수의 몸이 서서히 짓이겨지고 피로 물들며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여과없이 내보낸다. 또 거대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도중 계속되는 매질과 고문, 마침내 당도한 언덕 위에서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창에 찔려 확인 사살까지 당하는 참혹한 모습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예수의 잔혹한 수난을 보여주는 것에만 영화는 80퍼센트 이상을 할애하며 관객들을 괴롭게 한다. 그 시각적 잔혹함에서 오는 살떨림은 필자가 본 그 어떤 강도높은 고어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관객들은 그러한 장면들에 압도되어 예수의 고난에 감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예수의 살점이 파헤쳐질때마다 관객들의 마음 속에도 무시무시한 금속 채찍이 날아와 박힌다. 피와 살점이 엉겨붙은 예수의 몸은 그 자체로 관객들, 즉 관망자들을 죄인으로 만들며 그들(죄인들)을 바라보는 죽어가는 예수의 눈빛은 고통스런 속죄의 대못으로 치환되어 우매한 군중들의(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심장을 파고든다.

여기서 멜 깁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는 헐리웃 내에서 3천만 불에 달하는 최고의 몸값을 받는 특급 배우이다. 동시에 성공한 감독으로서 헐리웃 시스템을 주도하는 최고의 파워맨 중 한 사람이다. 필자가 본 멜 깁슨은 대단히 매력적이며 또한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전작 <브레이브하트>로 아카데미 상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등극했다. 그것은 그의 영화적 열정에 대한 오랜 땀과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의 감독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시스템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상업적으로 성공할 영화를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멜 깁슨에게 세계적 거장이라는 명성을 안겨준 <브레이브하트>는 여러가지면에서 파격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기존의 시대극에서 볼 수 없었던 빠른 전개와 드라마틱한 영웅담, 무엇보다 사실적이고 잔혹한 전투장면은 기존의 시대극 모두를 잊게 만들었다. 칼로 목을 깊게 베어버리고 철퇴로 머리를 짓이기는 잔인한 장면들의 연속은 관객들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고 스크린 속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과도한 폭력 위에 멜깁슨은 감정에 호소하는 고전적 장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감동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어쩌면 그러한 감동은 과도한 폭력으로 인해 감정이 극도로 치솟아 오른 관객들을 쉽사리 감화시켜버리는, 강요되는 감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는 휴머니즘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적인 감동이 아닌 진짜 생활속의 감동을 원한다면 TV에서 방영하는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다큐 프로그램 같은 것을 봐야 할 것이다.
영화는 시대의 반영이기도 종합예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장사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러한 상업적인 면이야 말로 영화 산업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른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종교 영화가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나의 영화가 성공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낳는 데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 것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딱부러지는 공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두고 단지 잔혹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말 할 수 있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멜 깁슨은 놀라운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기획할 당시 '성령이 나에게 임했으며 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복음을 전파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고 이 영화를 자비 2천 5백만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분명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진 독실한 신자임이 분명하다. 한편으로 그는 예수라는 인물의 신화성을 상업적으로 활용한 능숙한 헐리웃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내내 관객들을 괴롭게 만들었던 예수의 고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멜 깁슨의 전작 <브레이브하트>에서 공개 처형으로 죽어간 윌리엄 월레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예수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 말은 곧 윌리엄 월레스의 최후의 외침 '자유 freedom'와 일치하는 듯했다.
또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가장 심금을 울린 부분인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마리아의 곁을 지나치다 넘어지는 장면, 여기서 어린 시절 예수의 모습이 교차되며 고통과 추억, 슬픔과 안식이 대비되는 이 명장면 역시 <브레이브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죽기 직전 죽은 아내의 환영과 평온한 조우를 하는 극적인 대비를 연상시켰다.
이는 멜 깁슨이 이제 관객들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줄 아는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치밀한 상업적 전략가로서의 기질을 엿보게 했다.
필자에게 있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바로 이런 양면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게 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양면적인 재능이야 말로 수년 전 만들어진 파졸리니의 <마태복음>, 스콜세지의 <예수 최후의 유혹>이 이루어지내지 못한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으리라.

멜 깁슨은 4대 복음서를 기초로 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수 마지막 12시간을 장중하게 그려냈다. 그는 따분한 배경 얘기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모든 죄를 덮어쓰고 살이 파헤쳐지는 예수의 신체에 카메라를 밀착시켰다. 또 적재적소에 회상씬과 교차편집을 넣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메시아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멜 깁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육체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며 이제껏 그 어떤 종교 영화도 이루지 못했던 극적인 부분들을 이끌어낸다. 묵묵히 고통을 인내하는 예수의 초인적인 한계가 그러했고, 미치광이 처럼 보여진 광폭한 집행인들이 그러했고, 예수가 흘린 피를 닦으며 내내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러했고, 처절한 고통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악마의 유혹하는 눈동자가 그러했고, 우매한 군중들의 야유가 그러했고, 십자가를 등에지고 클로즈업으로 느리게 쓰러지는 예수의 모습이 그러했고, 뿜어지는 피의 비가 그러했고, 그 공포에 전율하며 죄인이 되어버린 듯한 관객들의 압박감이 그러했다. 이러한 극적인 장치들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어떤 식의 비난이 될지에 대해서는 필자로서 별로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란들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그리스도의 가혹한 수난이 보여준 무서운 감동 앞에 그저 시시한 말장난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으니.

어떤 구구한 논란도 이 영화의 위력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피범벅이 되어 죽어간 예수의 모습과 교차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은 심장에 와서 박히는 묵직한 대못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종교인이든 무교인이든 그 근본주의적인 가르침에는 모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가르침이야말로 전쟁, 테러, 정치분쟁 등으로 얼룩져 서로를 헐뜯기에 급급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니!

p.s 아주 개인적인 느낌 하나 - 시종일관 극적인 리얼리티로 감정을 뒤흔들던 영화는 오히려 예수의 죽음 이후 뭔가 엄청난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필자의 기대를 착 가라앉게 만들었다. 때문에 마지막에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도 경외롭기 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살아나서 다행이다, 라는 느낌 혹은 마리아가 이제 울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느낌이랄까...(필자가 무신론자라 그런 식의 인간적인 해석만을 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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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거울 속의 몬스터 죽이기!

 

 

<올드보이>는 필자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울 속의 몬스터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복수를 테마로 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전복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올드보이>가 일본의 동명 원작 만화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애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윌리엄 윌슨'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이쯤에서 미리 경고한다! 리뷰에서 반전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필자도 모르게 암호나 힌트가 나갈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당부한다. <올드보이>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적게 알고 볼 수록 충격의 파장이 커지는 영화이므로!!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의 '윌리엄 윌슨'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설에 대해 간략히 설명부터 하자면 윌리엄 윌슨이라는 가명(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가명을 쓴다. 이는 곧 <올드보이> 속에서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몬스터로 지칭하는 것과 흡사하다)의 주인공이 자신과 이름이 같고 얼굴도 거의 흡사한 인물과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끝없는 혼란과 자아 분열을 겪게 되다가 마침내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자신의 대칭과도 같은 인물과의 조우이다.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작은 난동을 부리는 등 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잠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거는 사이 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15년 간의 감금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15년 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랬듯,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조롱하고 파멸시킨 자에 대한 복수의 일념 하나로 이를 갈며 버텨낸다. 15년 후 풀려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청년 실업가 이우진의 정체를 추적하며 어째서 그가 자신을 15년 동안 가두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영화는 바로 이 '누가', '왜'에 관한 긴박한 퍼즐게임이다. 라스트에 가서야 오대수는 자신이 그토록 복수하고자 한 이우진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대칭점 상에 놓인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전 영화의 특성상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겠다. 그래서 '윌리엄 윌슨'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자 한다.

'윌리엄 윌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손바닥 안에 놓고 조롱하듯 간섭하고 좌지우지 하는 대칭의 인물에게 마침내 분노어린 응징을 가한다. 그 순간 그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며 혼돈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고자 했지만 사실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거울 밖의 자신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비틀린 복수의 알고리즘은 결국 자신의 목줄을 조이게 만드는 이율배반으로 전복되고 만 것이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거울 속의 상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누가 진짜 '윌리엄 윌슨'(혹은 몬스터) 인지를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알고리즘을 허물어버린다. 또 오대수는 유리창이나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때마다 오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할 시간이다'라고 말한 이우진의 말처럼 그는 거울의 표면을 구석구석 면밀히 닦으며 자신의 상을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깨뜨려 버리고자 고뇌한다. 결국 <올드보이>는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돌아보고 면밀히 살피며 대칭점에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자신의 얼굴 조차 잊고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 모두에게 감독은 작은 티끌 하나도 상세히 보이는 커다란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바윗돌이건 모래알이건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이우진의 말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비수이다. 이 영화의 엄청난 반전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입김을 불어서라도 거울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자 하게 한다.

사실 '윌리엄 윌슨'은 포우의 워낙 유명한 단편 소설 중 하나라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읽어 봤으리라 짐작한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윌리엄 윌슨'이 <올드보이>와 표면적으로 비슷한 스토리를 가졌거나 결말이 유사하다라는 것은 결코, 전혀 아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내적인 이미지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적인 닮음은 포우의 또다른 단편 소설 '아몬틸라도 술통'과도 연관이 있다. 이 소설에서 복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길, '복수는 벌로 다스린 이에게 보복이 온다면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벌을 저지른 자가 자신이 처벌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역시 진정한 복수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복수자는 자신이 복수한 것에 대해 어떤 응징도 받지 않아야 하며, 처벌을 받는 이는 그 자신이 지금 벌을 내리는 자로부터 복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속 최후의 복수자의 심리를 절묘하게 대변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가주의를 절묘하게 오가며 색다른 스타일과 박력으로 관객들의 혼을 뒤흔든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 최민식이 장도리를 들고 싸우는 복도 액션씬의 박력과 리얼함은 한국 영화사상 유례가 없을 명 액션 씬으로 꼽힐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반전은 충격적이다 못해 장도리로 심장을 후벼파는 것만큼 전율적이다. (정말 세다 못해 지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민식의 연기는 <파이란>에서 그가 보여준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함에 손색이 없다. 유지태와 강혜정의 연기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감독의 완벽한 연출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주 개인적인 견해 하나를 말하자면 극단을 달리는 이런 식의 설정, 이런 식의 분위기는 필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올드보이>는 올해 <살인의 추억>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살인의 추억>이 그러했듯, <올드보이>도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근래 보기 드문 한국 영화 수작이다.

끝으로 계속해서 이 영화와 비교한 포우의 소설 '윌리엄 윌슨'의 도입부 문장을 올리며 리뷰를 마칠까 한다. <올드보이>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극중 오대수의 심정을 이해함에 있어 더 없이 좋은 문장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선 내 이름을 윌리엄 윌슨이라고 해 두자. 내 앞에 놓인 이 흰 종이를 나의 본명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경멸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분노의 폭풍이 불어 그 유례 없는 오명이 지구 끝까지 닿았다. 아, 모든 사람들이 저버린 추방자! 대지조차 너를 영원히 저버렸느냐? 대지의 명예와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꽃들과 눈부신 대기도 너를 저버렸느냐? 짙게 드리워진 끝없는 구름이 너의 희망과 천국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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