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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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그렇듯이 어떤 책과 만나는데에도 타이밍이 있다. 알라딘에 이 책 폭풍이 휩쓸고 지나갈 당시에도 안읽고 버텼던 것은 더 적절한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인지, 그때가 바로 적절한 시기였다고 생각해서 너무 빠져들까봐 피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1956년 생이고 이 책이 나온게 2008년이니 이 소설은 그녀가 50대 초반 즈음에 썼을텐데 그녀의 이력을 보니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글을 쓰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세번째 소설인 이 작품이 2009년 드디어 퓰리처상을 받기까지 인생 행로가 단순하지 않아보인다. 작가에게 단순하지 않은 인생행로는 훗날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지만 말이다.

단편소설로 시작한 이력 때문인지 이 책도 길이로 보면 장편이라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배경과 인물이 한 축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 단편의 형식을 하고 있다. 배경은 모두 공통적으로 미국 메인주의 크로스비라는 마을이고, 등장인물은 올리브 키터리지와 헨리 키터리지 부부, 그리고 이들과 혈연, 지연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사람들이다.

 

<약국> 제목은 올리브 키터리지 이지만 첫 단편에서 주로 등장시키는 것은 남편 헨리 키터리지이다. 약사로서 마을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헨리 키터리지는 온건하고 책임감 있으며 도를 넘지 않는 성격이다. 그에 비해 올리브는 강하고 주관있으며 남편 헨리에 비해 인생을 덜 만족스럽게 사는 듯 하다. 이 부부 사이에 약국 점원 데니즈가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은 항상 작게 시작하여 커지는 법이다.

<밀물>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케빈이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회한까지는 아니고 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케빈은 아직 그정도로 늙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워하지 않을 만한 과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아노 연주자> 부모의 불안한 정서 밑에서 성장한 사람은 또 하나의 불안한 어른으로 자랄 수 밖에 없다. 마을의 바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는 앤절라의 불안한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그녀의 멍들고 낫지 않은 상처에서 나오는, 절뚝이는 소리이다. 그녀가 연주하는 바에 키터리지 부부는 잠깐 관객으로 등장한다.

<작은 기쁨> 이 단편을 쓰다가 이 책 전체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인 크리스토퍼 키터리지의 결혼식에서의 올리브 키터리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직접적 묘사 없이 심리를 나타내고 전달하는 기법이 최소한 이 단편에서는 앨리스 먼로급.

<굶주림> 요즘은 책이나 소설 제목에 굶주림이라고 되어있으면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보다는 심리적인 굶주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도 그렇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아내 보니가 있음에도 빈둥지 증후군을 겪는 하먼에게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데니스였다. 하먼과 데니스는 소외, 외로움, 사랑의 실패로 먹기를 거부하는 소녀 니나를 함께 돌보지만 니나의 결말은 사랑없는 삶의 결과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네, 어머니를 미워하나?" 올리브가 말했다.

"아뇨." 니나의 대답이었다. "뭐, 우리 엄마는 한심한 데가 있지만 미워하진 않아요."

"그럼 됐어," 올리브가 그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럼 된 거야. 그게 시작이니까."

175쪽, 올리브가 니나를 도와주기 위해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여기 함께 있던 하먼은 올리브의 말에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그 반대일 수 있는 것이다. 니나의 문제를 도와주려다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 하먼이다.

<다른 길> 작가는 전반적으로 노년의 삶에 대해 우울하고 무겁게 그리고 있다. 이 단편 역시 그렇다. 치욕스럽고 당황한 순간,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헨리의 말 한마디에 강인해보이기만 한 올리브 가슴에 멍이 든다. 사람의 마음을 멍 들게 하는데는 꼭 긴 말과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야말로 '일격'으로 충분하다. 그 일격에는 오랜 세월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어야 한다.

<겨울 음악회> 노부부 제인과 밥의 이야기이다. 제인은 올리브가 수학교사로 있던 학교의 양호 교사였다. 예외적으로 이들 부부 사이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애틋하고 서로를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며 읽을 무렵, 예외가 아니게 하는 사실이 밝혀진다.

<튤립> 글이 통째로 다 슬펐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모든 노년의 삶이 이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바라지 않아도 그 길에 들어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게 늙는 일인 것 같다. 이제 올리브에게는 올해도 튤립을 심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 밖에 중요한 일이 없어보인다.

<여행바구니> 여행바구니를 채우며 노년을 함께 계획했던, 인생의 대부분을 공유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밝혀지는 비밀과 거짓들 앞에서 돌멩이를 던져 물수제비 짓을 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는 늙은 말린을 올리브 키터리지는 자신의 일인양 바라본다. 옛제자였던 말린을 위로하던 올리브는 누군가의 슬픔을 보면 자신의 슬픔이 덜 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병속의 배> 예외적으로 제목에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단편이다. 위니는 10대, 줄리는 20대, 애니타는 아마도 40~50대. 한 단편 속에 여러 세대가 동시에 등장하고, 각 세대다운 갈등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갈등을 각각 어떤 식으로 해결해나가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불안> 원제는 불안이 아니라 security 라고 역자가 밝히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흉보며 결코 닮고 싶지 않던 어떤 인물로 와있음을 발견하는 것, 자신의 전부이던 자식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 당신때문에 힘들었다는 폭로를 듣는 것. 이보다 더 깊은 상처가 있을까? 하지만 상처를 가지고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꿋꿋하게라고까지는 말 못해도. 상처보다 더 끈질긴 생존이다.

<범죄자> 여자의 어떤 행동에는 잠재의식, 과거, 성장과정, 꿈, 생존본능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행동 자체만 가지고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행동중 범죄행위도 예외는 아니다.

<강> 이건 통째로 베껴쓰고 싶었다. 위의 <튤립>을 최고로 꼽으며 읽어내려왔는데 베껴쓰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었다. <튤립>이 헨리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혼자 남은 올리브의 이야기라면 <강>은 헨리가 죽고 진짜 혼자 남은 올리브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니 생존에 몸부림 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그녀 옆에 없다. 이것을 딛고 극복하며 오늘도 내일도 버텨내야 하는 올리브의 삶은 과연 올리브만의 삶일까. 천만 다행이랄까, 이제 이 세상에 내 존재가 필요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게 매일의 삶이 되어 가던 올리브에게, 여기에 아직도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정을 잠시 느끼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본 리뷰의 제목은 <튤립>에서 빌려왔고, 나한테는 이 책 전체에서 제일 여운이 남는 문장이기도 하다.

"튤립은 터무니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삶은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기만 한데."

('삶은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기만 한데' 이 부분은 실제 책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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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0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아무 데나 펼쳐보기를 여러번 했는데요, 나인님의 리뷰를 보니 또 그래야겠어요.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hnine 2019-06-05 16:12   좋아요 0 | URL
아무데나 펼쳐보기로 어느 단편을 제일 여러번 읽으셨을까요.
사람마다 다른 여운과 감회로 읽었을텐데 만약 20대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저와 비슷한 감회와 소감을 느꼈다면 반가와해야할까, 걱정을 해야할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면 더 좋겠고요. 하지만 제가 위에도 썼듯이 상처나 허무보다 더 강한게 인간의 생존력이니까요. 모든게 아직도 진행중. 내 인생은 진행중 ^^
요기까지 쓰고,
다락방님의 페이퍼들, 다시 읽고 왔습니다 ^^
 

 

 

 

 

 

 

 

 

 

 

"모든 논쟁이 다 이겨야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어느 병원 암환자 지침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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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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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러시아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사람인 쇼스타코비치의 생애와 음악을 소재로 하여 영국의 대표 작가 줄리언 반스가 마음껏 예술론을 펼친 책이라고 보고 싶은, 소설로 소개되어 있지만 단순한 소설로 보고 싶지 않은 책이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기대했다면 기대와 빗나갈 것이고 예술론이라고 본다면 줄리언 반스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서 혼돈을 겪을 것이다.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생각인가 하고 읽다보면 문장에서 '그'라고 칭하는 사람은 분명 쇼스타코비치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어렵다. 쓱쓱 읽어넘어가기엔 매우 주관적이고, 그래서 곰곰 생각을 해야 이해가 될 문장들이 넘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재미가 기대만큼 안되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줄리언 반스를 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 즉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이 책을 쓰기 위해 엘리자베스 윌슨이 쓴 <쇼스타코비치: 기억되는 삶>을 주요 참고 자료로 했다고 하고, 그래도 이 책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쓴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 윌슨의 책을 읽어주기 바란다고 했다.

예술가의 창작의 자유가 제한 받고 검열받고 조정되어야 했던 시대. 예술은 인민의 것이라는 레닌의 말에 부응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인민의 취향에 맞고 인민의 삶에 바람직하다고 보여지는 대로 작품 활동을 할 것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강요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은 자연히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라는 문제를 안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통해 정작 줄리언 반스가 논하고 싶었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을지. 이 주제에 대해 잘 요약이 되어 있는 대목 중 하나로 135쪽의 다음 부분을 골라보았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고, 모든 시대의 것이면서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라는 말. 시대의 소음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만 대신 역사의 속삭임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시대의 소음'과 '역사의 속삭임'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하는 구절이다.

예술가는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술가 자신이 만족할때까지를 완성의 순간으로 삼고 그것이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호응 받기를 원하지만 그건 예술가의 바람이고, 일단 결과물로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의 음악은 누구의 호응을 받느냐 뿐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잣대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대목이 마침 이 책의 문장 수준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 같아서 옮겨 본다.

건물 공사 현장의 크레인 기사가 노래를 작곡해 그에게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답장을 했다. '당신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꼭 필요한 집들을 짓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당신이 하는 쓸모 있는 일을 계속하시라는 겁니다.' 크레인 기사가 곡을 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 작곡가 지망생이 보여준 재능이 그가 크레인 운전실에 들어가 레버를 조작하도록 지시를 받는다면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옛날에 귀족이 그에게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보냈다면 이렇게 답할 용기가 있기를 바랐다. "전하, 한 손에는 귀족의 품위를 유지할 책임을 지니고, 다른 손에는 전하의 영지에서 노동하는 자들의 안녕을 돌볼 책임을 지니셨으니 전하의 지위는 참으로 높고도 어렵습니다. 제가 전하께 드리고픈 조언은 전하가 하시는 쓸모 있는 일을 계속 하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작곡 수준은 당신의 본분을 뒤로 하고 계속할 수준은 못되니 원래 하던 일에 정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뭐 이런 뜻 아닐까.

스탈린이 좋아했던 음악가였던 베토벤. 이 책에서는 '붉은 베토벤'이라고 특별히 칭함으로써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예술가 상을 나타내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스탈린의 인정을 받았던 음악가였지만, 그래서 어쩌면 또 하나의 붉은 베토벤이 되기를 강요받았지만 그가 마음 속으로 추구한 음악은 시대의 소음과 맞서는 음악, 시대의 소음과 구별되는 음악, 작곡가의 순수한 의도로서의 음악이었다. 붉은 베토벤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81쪽)

앞서 나왔던 '시대의 소음'과 '역사의 속삭임'이 여기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윌슨의 책 외에 줄리언 반스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다는 또다른 책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은 2001년에 우리 나라에 번역본으로 나왔다가 절판되었는데 며칠 전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쓴 회상록은 아니고 솔로몬 볼코프가 그의 구술을 받아 적고 다시 엮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듣고서 금방 좋아지기 어려웠다. 당시 러시아 정부가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라고 지적했던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듯, 거칠고 도발적인 음악에 가깝다. 그 책을 읽어보면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까?

 

아예 서방으로 망명하여 유럽에서 성공의 모든 장식을 누렸던 프로코피에프와 달리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에 끝까지 남아 정부의 요구를 수용했으며 나중엔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한다. 분명 사회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시대의 소음과 역사적 속삭임 사이, 순응과 항거 사이에서 복잡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줄리언 반스는 왜 하필 이 사람을 택하여 소설로 쓰고 싶어졌을까. 읽는 내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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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산딸나무 역시 밤에 보니 낮에 보는 것과 달라보인다.

꽃은 더 하얗고,

잎은 초록이라고 하기 망설여지게 검푸렀다.

 

 

 

 

 

 

 

 

동네 꽃집 간판,

그 옆에 수국 화분.

 

 

 

 

 

 

 

 

한창이던 이팝나무 꽃 다 졌고

쥐똥나무가 활짝이었다.

말 그대로 '만발 (滿發)'

 

이름과 달리 향기가 좋은 꽃

 

 

 

 

 

 

 

 

 

만발인 꽃이 있으면

벌이 바쁘다.

 

 

 

 

 

 

 

 

 

두어 달 전

벚꽃 있던 자리

 

 

 

 

 

 

 

 

(이름 찾아봐야하는데) -> '자주달개비꽃'이랍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저 수련꽃을 나처럼 그냥 흰색 한가지 색이 아니라

대여섯 가지, 아니 그 이상의 색을 써서 그리는 것을 보고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어디다 숨기고 싶었다.

 

 

 

 

 

 

 

 

이미 핀 수련

아직 봉오리인 수련

 

 

 

 

 

 

 

 

 

 

 

 

 

 

앞쪽엔 수련, 뒷쪽엔 노랑붓꽃

 

 

 

 

 

 

 

 

 

 

 

 

 

 

 

오리 세마리가 유유히 수영하고 있다가

사진 찍고 나니 푸드득 일제히 날아가 버렸다.

 

 

 

 

사진에 담을 재주가 없는

새소리,

여름 기운,

내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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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19-05-2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수국을 보면서 참 비현실적인 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꽃이 어떻게 파랑색일 수가 있어.. 하면서. ㅎㅎ
첫번째 사진은 산수유가 아니라 산딸나무;; 하얀게 꽃처럼 보이지만 진짜 꽃은 그 안에 쬐끄만애들이구요. 꽃처럼 보이는 하얀색은 사실 꽃을 싸고있는 포라는 잎이에요. 그나마 겨우 하나 알고 있는 식물이름이라.. 아는체 하고 갑니다 ^^*

hnine 2019-05-26 20:31   좋아요 0 | URL
산수유가 아니라 산딸나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하지도 않은 꽃들인데 저도 모르게 산수유라고 써버렸네요. 산딸나무가 알면 서운하겠어요 ^^
무식쟁이님, 닉네임 아닌걸요. 꽃잎과 포 구분도 해주시고. ^^


minee 2019-05-2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섯번째 사진은 ‘자주달개비꽃’ 이랍니다.

hnine 2019-05-26 23:03   좋아요 0 | URL
우앙, 고맙습니다.
그러고보니 달개비꽃이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꽃이 좀 더 크고 잎도 더 크더군요.

페크pek0501 2019-05-2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홉 번째 사진이 참 좋네요.

hnine 2019-05-26 23:06   좋아요 0 | URL
페크님, 2주 전에 갔을때 몇송이 안피었더니 오늘 가니까 제법 많이 피었더라고요. 좀 더 있으면 꽃이 더 많이 피거든요. 그때 또 사진 찍어올릴께요.
물 속에 큰 물고기도 지나다녔고 오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가까이서 보니 멋있었어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못이 있어서 저는 해마다 좋은 구경을 하고 있어요.
 
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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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번역본이 소개된 것이 2017년이니까 아주 신간은 아니라서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가 눈에 익다. 우연히 즐겨듣는 팟캐스트에서 이 책이 소개되는 것을 듣고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제목의 소설, 에세이가 적지 않은데 이 책은 미국 작가 켄트 하루프의 장편 소설이다. 1943년에 태어난 그는 이 책이 미국에서 출판된 다음해인 2014년, 지병인 폐질환으로 71세의 나이를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니까 책 제목은 축복이라고 되어 있지만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내용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제목이 왜 축복일까.

 

미국 콜로라도 주 한 마을에서 철물점을 하고 있는 대드 루이스. 77세 나이에 의사로부터 이제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병원에서 치료받을 단계도 아니고 이제 집에서 쉬며 조용히 생을 정리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의사의 선고를 듣고 흥분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없다. 그가 우는 장면은 뒤에서 딱 한번 나오는데 177쪽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후이다. 어떤 특별한 상황은 아니었다. 자기가 경영하는 철물점을 차를 타고 지나가던 중이었다. 손님이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고 점원이 돈을 받고 영수증을 떼어주는 것을 본 것 뿐이었기에 옆에 타고 있던 아내는 남편이 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못하고 울기만 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야 말한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아까 상점 앞에서 내가 울었던 것 말이오. 나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게 한 그 일 말이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 앞쪽 카운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오간 사소한 거래 말이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요. (182쪽)

사소한 일상,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순간이 바로 죽음을 앞두고 나를 울릴 시간들이라니.

대드 외에 여섯 명의 여자가 나온다. 대드의 아내 메리, 대드의 딸 로레인, 오랜 이웃 버타 메이와 버타 메이가 돌보는 손녀딸 앨리스, 그리고 윌라 존슨과 그녀의 딸 에일린이다. 버타 메이는 암으로 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은 노부인이고 자기 외에는 혼자 남은 어린 손녀딸을 맡아 돌볼 사람이 없다. 윌라 존슨은 오래전에 과부가 되어 혼자 살아 왔었고 지금은 사십년 교직에 있다 은퇴한 그녀의 딸 에일린과 함께 살고 있는데 에일린도 이미 육십이 넘은 나이.

대드가 죽음을 맞는 과정이 큰 줄기를 이루지만 큰 줄기와 더불어 외로운 아이 앨리스의 마음을 열어주고 가족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주려고 이웃들이 마음 쓰는 이야기, 마을의 젊은 목사와 주민들 사이의 대립, 수십년전 집을 나간 대드의 아들 프랭크,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혹시 프랭크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 등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려 진행된다.  이 이야기들이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게 엮여있는지.

사람의 심리를 풍경 묘사로 대신하는 것은 켄트 하루프의 강점 중 하나가 아닌가 할 정도로 책 여기 저기서 눈에 띄었다. 특히 300쪽부터 시작되는, 네 여자가 개울에서 함께 수영을 하는 장면은 무심한듯 객관적인 기술로 보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감에 따른 육체의 변화 묘사를 통해 불가항력적인 세월의 흐름, 수영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앨리스에게 처음 수영을 가르쳐주는 과정을 통해 나이든 세대가 이제 자라나는 세대에게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작가의 의도가 보이는 명장면으로 꼽고 싶은 부분이다.

후반부에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배척받고 목회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목사 라일에게 대드의 가족은 대드를 위한 마지막 기도를 부탁한다. 바로 benediction, 축복의 기도이다.

저희의 마음이 이 자리에 계신 대드 루이스와 더불어 평온하기를 비옵니다. 이 방안에 평온함과 사랑과 조화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집 바깥의 저 모든 힘들고 충돌하는 세상도 똑같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이 더는 고통이나 후회나 불행이나 가책이나 스스로에 대한 회의나 걱정 없이 이 육신의 세계를 떠나실 수 있기를, 모든 시련과 곤경과 근심을 놓아두고 떠나실 수 있기를 빕니다. 오로지 당신이 평온하시기를 빕니다. 이 방안에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평온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저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모든 축복을 구하나이다. 아멘. (425) 

대드 루이스가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듣는 말이다. 굳이 종교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는 순간을, 이렇게 축복을 구하며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죽기 전까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작가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어떤 이야기도 아니고 어찌 보면 지루하고 결말이 이미 다 밝혀져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했을까. 대단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한 노인의 죽음을 통해, 본인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의 의미를 채우려 했던 것일까.

 

 

 

 

 

* 영어의 "benediction"은 우리말로 "축복" 보다는 "축복의 말, 축사"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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