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아주 뜨겁지 않다면 이 용감한 아줌마는 모자, 양산 없이 산책을 한다.

얼굴 좀 타는 것에 대해 대범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차라리 얼굴 타는 것, 기미, 주근깨보다는 비타민 D 와 세로토닌이 더 절실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골다공증 예방, 우울증 예방. 햇빛 받아 부디 내게 부족함이 없는 비타민 D 와 세로토닌이 합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낮에 이렇게 돌아다니고 나서도 요즘은 저녁 때 또 한번 동네 산책 하는 버릇이 생겼다. 저녁 먹고 설겆이까지 하고 난 후. 해가 길어 아직 어두워지기 전, 저런 하늘을 보며 어제도 걸었다.

 

 

 

 

 

 

 

 

 

 

 

공작 단풍의 꽃.

저 볼록한 속에 씨앗을 담고 멀리 멀리 날아갈 것 같은 날개.

색깔이 예뻐서 찍어놓았다.

 

 

 

 

 

 

 

 

 

어릴 때 일이다. 나무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엄마와 나무 얘기를 하시는 것 같았는데 자꾸 목빼기롱이 어떻고 저떻고 하시는거다.

'나무 이름이 일본 이름인가?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나무구나'

그날 일기장에 난 '우리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는 목빼기롱'이라고 썼다.

나중에 엄마께서 보시더니 '목백일홍'이라고 고쳐주셨다.

요즘은 '배롱나무'라고 더 많이 부르는 것 같다.

연분홍, 진분홍, 연보라 색의 꽃을 흔히 보는데 흰색꽃이 피는 것도 있다.

 

 

 

 

 

 

 

 

안그래도 산책길에 배롱나무꽃을 보며 아버지 생각을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과일 가게에 들러 체리를 보니 아버지 생각이 또 났다. 나무도 좋아하셨지만 과일도 좋아하셨던 아버지. 예전에는 지금보다  체리 가격이 더 비싸서 일부러 사다 먹은 기억이 없다.

언젠가 나 미국에 있을때 아버지께서 오셨다가 마트에 가서 체리를 보시더니 여긴 체리가 싸다고 하시며 거의 매일 즐겨 드셨었는데.

이번 달 24일이면 아버지 돌아가신지 벌써 4주기. 이번엔 아버지 산소에 가서 체리도 한 접시 올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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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0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7-13 21:03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더 친해지지 못했던게 아쉬워요. 이렇게 종종 추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도 좋긴 하지만요.
기분이 가라앉아있다가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기운이 나기도 해요. 저도 제 본성을 잘 모르겠어요 ^^
 
사랑에 빠진 여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손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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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출판사들이 세계문학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지만 DH 로렌스의 이 <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오직 을유출판사의 을유세계문학전집에만 포함되어 있다. 출판될 당시 제목이 결정되기 까지 몇번의 변경 과정이 있었다지만 아무튼 원제도 Women in love이다.

DH 로렌스는 우리에게 이 작품보다는 <아들과 연인>,<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영국 작가이다. 1885년 영국 노팅엄 탄광촌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 형편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으나 교육열 있는 어머니 덕분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우수한 학생으로서 장학금도 받고 교사 자격증도 땃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교사직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살면서 여러 병을 전전하며 고생했고 몇번의 건강의 고비를 넘기다가 결국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구 세계를 변화의 급물결 속에 휘몰하치게 했던 산업화, 막대한 정신적 물질적 피폐를 초래한 세계 대전, 문명의 몰락, 개인적인 건강 등의 상황 속에서 복잡한 갈등과 고뇌 속에 탄생했을 로렌스의 작품들도 순탄한 출판의 과정을 겪지 못했다. 이 작품 <사랑에 빠진 여인들>만 해도 본국인 영국에서 출판사를 찾지 못해 1920년 미국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어슐라와 구드룬이라는 두 자매의 연애 이야기인데, 굳이 연애담이하고 한다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연애담이라고 할까. 제목만 보거나 책의 줄거리만 읽고서 만만히 보기엔 780쪽 분량 만큼이나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시대와 관습과 인간 관계, 삶의 방식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비판, 풍자, 주장, 개성으로 꽉 차 있는 소설이다.

등장 인물중 특히 버킨이라는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시키고 있다지만 버킨 뿐만이 아니다. 작품 속 모든 등장 인물의 심리를 꿰뚫어, 완전히 다른 타입의 인물과 다른 방식의 사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의 사고 방식이란 모르긴 해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입견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인물들이다. 작가의 생각을 한 인물에게 대변하게 하기엔 부족할 만큼 그는 생각이 남들과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에 대한 버킨의 생각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옛날식 사랑은 끔찍한 속박이요, 일종의 강제 징병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사랑이니 결혼이니 아이들이니 하는 것들, 그리고 만족스러운 가정과 부부 생활이라는 끔찍한 사생활 속에서 다 함께 부대끼는 삶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중략) 그것은 언제나 짝을 지어 사적인 집이나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불신 가득한 부부들의 공동체였으며,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다른 직접적이고 사심 없는 관계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쌍의 만화경이자, 결혼한 한 쌍이라는 단절되고 분리주의적인 무의미한 실체였다. (314, 315)

결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버킨 (남자)은 그러면 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대체로 성을 싫어했다. 성은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남자를 부서진 반쪽으로, 여자를 나머지 부서진 반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그 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신 안에서 독립된 하나이기를, 여자도 그 자신 안에서 독립된 하나이기를 바랐다. 성이 다른 욕구들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복귀하기를, 즉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인 과정으로 여겨지길 원했다. 그는 성에 입각한 결혼을 믿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갖는 그런 결합을, 두 개의 순수한 존재들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자유를 구성하면서, 마치 하나의 힘 속에 들어 있는 양극처럼, 두 천사처럼, 혹은 두 악마처럼 서로 균형을 이루는 그런 결합을 원했다. (315)

 

자매중 한명인 어슐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 자기의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어슐라에게 얘기하며 이런 결혼, 이런 관계여야 한다고 피력하는 버킨.

버킨의 생각을 종용받으며 어슐라는 그들의 관계를, '한쪽이 파괴되어 다른 쪽이 존재하거나, 한쪽이 무효가 되는 바람에 상대방이 승인을 얻는, 영원한 시소 상태'로 비유한다 (720). 어쩌면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을 수도.

어슐라와 구드룬 자매 역시 우리가 현실이나 소설 속에서 흔히 보는 결혼 적령기 여인들과는 다르다. 이들의 독특하고 주관적인 생각들은 780쪽 책의 끝까지 가도록 완전히 간파했다고 할 수 없어서 이해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었다. 이들은 나쁜 결혼의 예를 부모의 결혼에서 찾고 비판한다.

이 소설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은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 뿐 아니라 남자와 남자 사이의 애정 관계가 비교적 당당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어슐라와 커플이 되는 버킨과, 어슐라의 여동생인 구드룬과 연인 사이인 제럴드, 즉 두 남자의 관계이다. 읽다 보면 어쩌면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결혼, 사랑의 관계는 각자 다른 성의 연인보다 이 두 남자 사이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판이 쉽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획기적인 생각과 노골적인 묘사 등이, 저 단순해 보이는 제목 속에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 이 소설. 한번 도전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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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7-0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은 그래도 제목은 들어본 것 같은데, 이 책은 제목도 처음 듣는 것 같아요.
그런데 표지는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고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매일 더워요.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hnine 2019-07-09 04:43   좋아요 1 | URL
책은 낯설어도 표지 그림은 어디서인가 본 것 같으실 수 있어요. waterhouse 라는 사람의 그림인데 이 사람 그림이 많이 알려져 있거든요.
이제 드디어 30도를 넘는 날씨가 시작되었어요. 근래 여름이란 과거의 여름과 비교가 안되는 더위인지라 저는 이제 여름 날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해요. 아직은 열대야까진 아니라서 다행인데 그것도 곧 시작되겠지요.
피할 수 없으니 잘 견디는수밖에요 ㅠㅠ

페크pek0501 2019-07-1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획기적인 소설이었겠네요. 저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연애를 그린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고 슬펐어요.
많은 이들이 그 소설을 읽었으면 해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명작이죠.

을유문화사 책을 예전에 즐겨 봤는데 이젠 글자가 작아서 사게 되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글자가 작지 않나요?

hnine 2019-07-11 19:58   좋아요 1 | URL
전 솔직히 과거에, 또 현재에도 무슨 근거로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어요.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요? 이 소설에서는 동성애 자체를 옹호한다기 보다 버킨이라는 인물이 이상적으로 보는 관계가 이성의 연인에서보다 누구나 친구 사이로 알고 있던 동성 친구에게서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
브로크백 마운틴은 하도 들어서 마치 읽은 양 착각되는 소설, 그리고 영화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아직 못 읽었어요. 꼭 읽어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해야겠어요.
을유문화사 세계 문학 시리즈 책, 글자 큼직 합니다 ^^
 

 

 

 

 

 

 

 

 

 

 

 

 

 

 

 

 

 

 

 

 

 

 

엊그제 다락방님 덕분에 최영미 시인의 신간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배송된 시집을 비오는 오늘, 처음부터 주욱 읽고,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또한번을 주욱 읽었다.

최영미의 시는 시로 쓰여진 일기장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기를 쓰지 못하리라.

1990년대 중반, 서른 언저리에 낸 첫 시집으로 베스트 셀러 시인이 되었던 그녀의 나이 이제 오십대 후반이다.

열 다섯 살엔 가장 먼 미래였던 서른 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겼고 이제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쓰는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을 맞이하는 나이라고 ('낙원').

 

지난 사랑의 기억, 페미니즘, 미투 운동, 부친상, 요양원에 있는 모친 병간호 등 외롭고 고달픈 시간의 일기장이다.

힘 앞에, 권력 앞에, 거짓 앞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내느라 버티는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했을 시간들의 기록이다. 아마 시인은 시를 쓰며, 시로 풀어내며 스스로 위로하지 않았을까.

문제의 시 <괴물>도 이 시집에 다시 실었고, 재판 과정을 소재로 한 시들이 이 외에도 더 수록되어 있다.

시의 형태로 태어나면서도 여전히 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기록들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져오다가 정작 눈물이 차오른건 오랜만에 시 청탁을 받고 쓴 '원고 청탁'이라는 시를 읽을 때였다. 시인은 오랜만에 흥이 나있는데 그런 시인을 보며 나는 왜 참고 있던 감정을 터뜨렸을까.

 

시집은 두번 연달아 읽고, 시에서 언급된 노래 '미친 여자의 사랑 노래 (Mad girl's love song)'는 듣고, 듣고 또 듣고 했다. 아마 수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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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29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곧 읽을게요, 나인님.

hnine 2019-06-30 05: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바로 주문하고, 바로 받고, 바로 읽고, 그랬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제가 워낙 최영미 시인 팬이라서요.
최영미 시인 나이들어가는 모습 보는 것이 좀 서글프네요. 저도 늙어가면서 말이죠 ^^

Nussbaum 2019-06-3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 들렀다가 한 여름의 더위에 그늘진 곳처럼 잠시 쉬었다 갑니다 :)

hnine 2019-07-01 06:15   좋아요 1 | URL
점점 낮 더위가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왔어요.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한건 밤에는 그나마 서늘하다는거죠. 밤까지 더운 열대야가 오는 여름을 어떻게 날지 모르겠어요. 더위도 참고 공부하는 수험생들, 생활전선에서 땀흘리는 분들 생각하면 투덜거림이 좀 들어갈까요? 제 서재 들어오셨다가 더 더워지시면 안될텐데 말이죠 ^^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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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코스키라는 작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한재호라는 작가가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제목의 국내 소설을 발표했을 때였다. 제목이 특이하기에 소개글을 보고서 미국에 실제로 찰스 부코스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소설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온 이민 가정의 찰스 부코스키는 한때 문단에서 외면당하기도 했다지만 1994년 세상을 떠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발표된 그의 다른 소설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에서와 같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역시 헨리 치나스키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의 소년 시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민 가정의 궁핍함, 가족 구성원간 소통과 이해 부족, 친구들의 폭력과 비열함 등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해야했던 그는 일찍 부터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사회, 도덕과 질서보다 악덕과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의 실상을 보면서 자란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직접 가지 않고 꾸며서 쓴 글을 숙제로 제출했는데 잘 썼다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헨리. 더구나 가지 않고 썼다는 것을 나중에 선생님이 아시고도 칭찬하신 걸 되돌리지 않고 그냥 집에 가라고 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헨리는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거짓말이고 최소한 거짓말은 내 삶을 더 쉬워지게 한다고.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115쪽)

그 당시 쉬운게 나중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책 속의 헨리는 알지 못한다. 나중까지 후회없는 거짓말은 없다는걸.

이 나잇대는 한참 성에 눈 뜰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분량이 남자 아이들의 성적인 호기심과 실제 행동에 대한 내용이어서 아무리 어린 시절 이야기라지만 이 정도면 19금 수준 아닌가 생각하며 읽었다. 남자 아이들의 성장기란 99% 성에 눈뜨는 것 하고만 관련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더구나 헨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몸에 번지는 부스럼이다.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아보지만 치료가 불충분하거나 적절하지 못했는지 상태가 더 나빠져가서, 급기야는 학교를 휴학하고 집의 침대에 누워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별 오락 거리도 없이 침대에서 두문불출 해야했던 바로 그 시기에 헨리는 시간 보내는 방법으로 최초의 창작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다. 가지도 않은 행사에 갔던 것 처럼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았던 헨리 아닌가. 바깥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부스럼이 조금 낫기 시작하자 동네 공립 도서관 출입을 시작한다. 모든 책에 흥미를 느낀 건 아니었다. 몇권의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모두 흐릿하고 모호하고 지루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렇지 않은 책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DH 로런스의 소설이다.

피아노 치는 한 남자에 대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식적으로 보이던지. 그러나 나는 계속 읽어 나갔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둡고 기이한 것들이었다. 그 페이지의 대사는 한 인간의 절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지만, <조, 어디에 있어?>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 어디에 뭔가 있긴 한 거야?>에 가까웠다. 팽팽하고 피투성이인 대사를 쓰는 이 로런스. (214쪽)

저 두 문장이 가져오는 결과의 차이를 집어낼 수 있던 헨리. 이후로 헨리는 도서관에 있는 DH 로런스의 책을 다 읽어치웠고 흔히 그렇듯이 그 책들은 곧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헨리 치나스키가, 즉 찰스 부코스키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잡초더미 같은 세상을 딛고 헨리가 걸어가는 길. 결말이 쌈박하다.

 

한때 불행했던 시기는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가. 그런 시기를 거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작가로서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웠던 시기라는 그 구슬들을 그냥 구슬인 채로 두느냐 목걸이로 엮어내느냐의 차이일 뿐.

책 뒷편의 해설에도 언급했고 나도 궁금했던, 책의 제목이 왜 저 제목인지는 의견이 분분할 뿐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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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 삶의 긴 터널 입구로 들어가 언젠가 다시 터널을 빠녀 나올 것이라는 것.

잠시 어둡고, 조용해지겠지만 그렇게 가다보면 밝고 환한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희망.

요새 이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올리신 리뷰도 읽다보니 그런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비가 오네요. hnine님.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째 음악듣고 노트에 뭘 적고 있습니다. ^^

hnine 2019-06-28 10:27   좋아요 1 | URL
터널 말씀을 하시니 어쩌면 사는 건 말씀하신 그 터널의 연속이 아닐까 싶네요.
언젠가 순천에 가면서 터널 몇개를 지나는지 세어봤더니 30개가 넘더라고요. 생각보다 많은 터널을 거쳐서 목적지까지 가긴 갔지요. 그런데 인생의 터널은 그 터널 속을 통과하는 동안은 그게 터널 속인지, 끝이 있긴 있는건지, 믿음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왔어요 ^^)
어제 비가 오더니 오늘 여긴 비가 그쳤어요. 무슨 음악 들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벌써 금요일이어요.
 

 

 

 

 

 

 

 

 

 

 

 

 

 

 

 

 

 

 

 

 

 

 

 

 

 

 

 

 

 

 

 

 

 

 

 

 

 

 

 

 

 

 

 

 

 

 

 

 

 

 

 

 

 

 

 

 

 

 

 

 

 

 

 

 

 

 

 

 

 

 

 

 

 

 

 

 

 

 

 

아침 산책을 나가는 날은 대개 일요일 아침이다.

날이 훤해도 겁이 많고 길치여서 안가본 길을 못가고 매번 다니는 곳만 다닌다.

요즘 어디나 제일 흔하게 보는 꽃 중 하나인 개망초. 이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곳을 지나며 남편이 예쁘다고 하기에 무슨 꽃인지 아냐고 했더니

"그냥 잡초 아냐?" 라고 했다.

"이 세상에 잡초가 어디있어? 우리가 이름을 모를 뿐이지. 개망초야 개망초." 라고 알려주었는데 오늘 같이 걷다 또 물어보니 그새 이름을 잊어버렸네.

집 뒤에 작은 대학 캠퍼스가 있는데 뒷동산과 연결되어 있어 산책할때 들르곤 한다. 캠퍼스내에 감자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다. 자주색 꽃이 피었으니 자주 감자가 달릴까?

나무중 요즘 꽃이 한창인 밤꽃. 작고 기다란 솔 모양에 눈에 띄는 색이 아니다.

자 대고 그린 오각형 같은 도라지꽃도 보았고, 아파트 단지 내 노각나무에도 꽃이 한창 피었다. 차나무과 노각나무. 꽃이 나무에 오래 붙어있질 않고 쌩쌩할때 떨어진다. 나무에 달려있는 것보다 떨어져 있는 것들이 더 많아서 그중 몇개는 주워들고 집에 와서 물에 담가놓았다.

등껍데기를 어디서 다쳤는지 일부 부서져 잎 위에 앉아 있던 무당벌레. 날지 못하고 기어만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어찌 되었을까.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두 권 모두 처음 읽을 때와 다 읽고 난 후 느낌이 달라서 기억에 더 남을 것 같다.

 

 

 

 

 

 

 

 

 

 

 

 

 

 

 

 

DH 로렌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

제목 보고 대충 로맨스 소설로 넘겨 짚으면 안될 소설이다.

780쪽 분량 내용 전체가 시대, 사상, 종교, 관계에 대한 작가의 독특하고 날카로운 생각으로 가득 가득하다.

 

 

 

 

 

 

 

 

 

 

 

 

 

 

 

 

 

또 한권은 찰스 부코스키, <호밀빵 햄 샌드위치>

원제는 Ham on rye인데, 이 책 역시 제목 처럼 감칠 맛 나는 내용을 기대했다가는 충격받기 딱 좋게, 남자 아이들의 성장기는 이럴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성적인 관심과 행동 일색이라 놀라기도 했었다.

 

곧 리뷰를 올릴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리뷰를 올리기 전까진 다 읽은게 아니라는 건 나 만의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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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는 저녁 여섯시에 시작하는 한 라디오 방송을 매일 아침 여덟시에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퇴근 무렵이 마치 출근길 같고,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같은.

지난주 토요일이 하지였지요? 잠깐 밖에 나갔다가 여름이 꽤 가까이 있구나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봄 꽃은 가고, 여름 꽃이 오네요. hnine님 덕분에 여름이 꽤 가까이 다가왔음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

hnine 2019-06-26 04:45   좋아요 1 | URL
어제는 이제 올것이 왔구나 싶게 더웠어요. 몇년 전 부터 여름 나기가 좀 겁나는게 사실이지요. 너무 더워서요.
그래도 피할 수는 없고 덥다 덥다 하면서 또 한 계절 보내야지요.
어떤 방송 들으시는지 알겠는데 저도 저녁 여섯시엔 듣기 힘들더라고요. 그런 방송이 없지요. 그 분위기에, 그런 선곡에. 저도 좋아하는 방송이랍니다.
계획하시는 일들이 차근 차근 잘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답글 쓰고 있어요. 오늘 또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글을 올려주셔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