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Need Social Science, Not Just Medical Science, to Beat the Pandemic

Human behavior and social inequity are huge confounding factors


by Nicholas Dirks on March 20, 2021






미국에서 발행되는 과학잡지 Scientific American 2021년 3월호에 실린 기사이다. 

저자는 미국 UC Berkeley 역사, 인류학과 교수이자 뉴욕 과학학술원장으로서, 전세계적유행병을 퇴치하는 답은 과학이나 의학이 쥐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하는 제가 위의 기사를 발췌 번역해본 내용입니다.)

===================================================================




백신이 나왔어도 바이러스 제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느냐는 인간의 대응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의학적 도구만 가지고는 바이러스 제압이라는 크나큰 도전을 수행해나갈 수 없다.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이 과학과 함께 자리해줘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는 과학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역사적인 예나 인류학적인 예를 보나 요즘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유행병에 대응하는 일치하지 않는 반응을 보나 그렇지 않다. 

1918-19년에 스페인 독감때의 경험에서 우리는 배웠어야 했다. 그때 어떤 도시는 바이러스 전파 제압이 더 잘 이루어진 반면 어떤 도시는 그렇지 못하여 결국 지구상의 오천만이 사망하였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과학에 대한 불신이 합쳐진 결과 마스크착용으로 독감을 제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큰 혼란을 겪었고, 의학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은 마스크 쓰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1950년대 소아마비 유행병은 또하나의 가르침을 주는 예이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정책, 의학정책의 성공적 사례로 보기 쉽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COVID에서 보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했다.

1954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모든 어린아이들이 개발 진행중인 폴리오 백신을 접종해야한다고 선포는 했지만 실제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그것을 실행할 어떤 일관적 계획도 없었다. 더구나 백신 제조 과정의 질적 수준에 대한 감독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부 어린아이들이 아프거나 사망하였다. 전 국가 규모로 접종하기에 제한된 재원도 문제였다. 1955년 아이젠하워가 소아마지 예방접종 강령에 서명하고 나서야 충분한 연방 기금이 확보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혼란은 이후 대중의 불신을 완화시키는데 수년이 걸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회학자인 Alondra Nelson이 새로이 과학기술정책국의 부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말하기를 전세계적유행병은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허용하고 있는 사회 불평등의 고착화를 반영해주고 있으며 과학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라고 하였다. 이말이 의미하는 것은 과학은 그것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현실적 통찰력을 요구할 뿐 아니라 과학은 또한 사회적인 힘과 의미와의 관계에 따라 위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우리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사회적 반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사회과학은 과학이 사회적 편견과 이해관계를 알고 있도록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함께 발전하고 진화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해석하는 각자의 방식의 지배를 받는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팽배해져가면서 새로운 지식은 종종 잘못된 정보에 의해 압도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려 음모론이나 대체사실 (alternative facts)에 쉽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의약을 만들어내는 것 뿐 아니라 더 건강하고 더 정당한 세상으로 이끌수 있도록 과학과 사회과학이 서로 상부상조할수 있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21-03-24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참 인간은 안 바뀐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페인 독감의 예를 봐서라도 이번엔 세계가 공조하면
잘 넘길 수도 있을텐데 여전히 과학과 정부를 의심하고
마녀사냥이나 하고 앉았으니...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미국이 코로나 때문에 혐오범죄만 늘어가고 있으니
어떻게든 극복할 생각은 안하고.
이게 모두 트럼프 때문이어요. 흐~ㅋ

hnine 2021-03-24 23:14   좋아요 4 | URL
과학이 아무리 잘 드는 칼날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결국 과학이 아닌 다른 실체일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과학자는 과학자로서의 할일만 다 함으로써 끝나는게 아니라 과학이 제대로 이용될수 있도록 사회과학등 다른 분야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의도에 깊이 공감하여 기사를 옮겨보았어요. 이번 코로나에 미국이 보여준 대응방식은 너무나 상식 밖이었는데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미국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니 코로나가 아니라 다른 어떤 재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과학, 종교, 사회과학, 역사, 인류학, 등등 인간이 관련된 모든 분야는 적대할것이 아니라 협력을 해야한다는 마무리가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런 경험 없는 사람의 상식과 선입관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의 결말은 보통의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에서 비껴가 있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고,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사람들이 묻는다면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며 맺는 주인공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식과 선입관을 넘어서야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저자는 열네살의 나이에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삼십년이 넘은 마흔 다섯의 나이에 그 경험을 한권의 책으로 완성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열네살 죄르지는 아빠가 노동 봉사 명령을 받아 돌아올 기약없이 집을 떠난후 새엄마와 둘만 살게 되는데 아빠가 집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죄르지 역시 학교 대신 노동 봉사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게 된다.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가던 어느 날 아침 영문도 모르고 버스에서 하차 명령을 받고 어디론가 이송된다. 그렇게 갑자기 소환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롤 끌려갔고, 이어서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렇게 1년 여 시간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 수용소에서 풀려나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가 13년 걸려 집필하여 1975년 출판되었고 이후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그의 첫 소설이자 자전적 대표작이 된 <운명>은 그 일년 동안의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고서도 자기가 어디에 와 있고 왜 그곳으로 이송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이던 죄르지는 하루만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가기 시작한다.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냄새에 심각하게 주목해야 했다. 딱히 무슨 냄새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달달하고 끈적끈적한 냄새에 우리에게 약간은 익숙한 약품도 섞인 듯 했는데 아무튼 그 냄새 때문에 조금 전에 먹은 빵이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올 것 같아 거북했다. (117쪽)


냄새의 출처는 굴뚝이 높게 솟아있는 가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고 그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냄새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가죽공장이 아니라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라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죄르지처럼 끌려온 사람들 중에 의사가 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린 사람들은 바로 소각처리 되는 곳이다. 

독일로 갈 사람에 지원하여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갔고, 거기서 급성결체조직염이라는 지독한 병에 걸려 다시 차이츠 수용소로 옮겨진다. 시키는대로, 주는대로, 죽은듯이 존재해야하는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가며 버텨나갔다고 하지만 존재로서의 생각과 느낌은 사라져간다.

고통을 호소해도 소용없는 상처 치료, 마취없는 수술, 그냥 흘러가듯이 겪어낼 뿐이다. 그러면서 수용소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간다. 그렇게 멈춘듯 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적응이라고 한 상태가 사실은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그날이 끝나갈 무렵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날이 마지막 아침일 거라고, 움직일 때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전히 걷고 움직이고 있었다. (185쪽)


여기서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것은 물론 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는 느낌. 이제는 더이상 희망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다음은 이 아이가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간 결과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도저히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많은 노력과 부질없는 시도 끝에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예를 들어 점호를 받다가 피곤해지면 진흙이나 웅덩이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추위나 습기, 바람이나 비도 나를 막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느낌조차 없었다. 배고픔마저 사라져 버렸다.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재미 삼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일할 때도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두들겨 팼지만 그래 봐야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나는 한 대 맞으면 바로 땅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187쪽)


이 아이가 말하는 평화와 안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있다. 아무 느낌없는 상태, 살아있음 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상태.


'시체'라는 표현을 그때까지는 죽은 사람에게만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고 완전히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몸이 그곳에 있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9쪽)


여기까지는 그냥 읽었다. 정작 눈물이 나오려고 한 것은 몇 페이지 더 넘어가서였다.


어디에선가 쨍그랑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저 아래 쪽에서 솥단지를 지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어깨 위에 막대기를 멨고 막대기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단지가 올려져 막대기와 솥단지의 무게 때문에 끙끙댔다. 공기 중에 멀리 퍼져 있는 떨떠름한 냄새로 보아 순무 수프임에 틀림없었다. 이 광경과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미 굳은 가슴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신중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204쪽)


차라리 죽는게 나을 강제수용소이지만 그곳이라도 좋으니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꾸물거리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붙어있는 목숨은 그래도 더 살아보고 싶다고, 아직은 죽은게 아니라고 마지막 몸부림치듯 일깨워주는 것을 알고 부끄럽고 가슴 아파 눈물을 쏟아내는 죄르지. 그의 눈물에 비할 것이 못되지만 죽으려고 포기하는 사람보다 그런 극단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이 꿈틀대는 것을 볼때 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왜일까. 


2차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죄르지는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보니 살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고 노동봉사로 끌려가다시피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으며 새어머니는 재혼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르지를 알고 있는 동네 노인들은 죄르지에게 끔찍했던 과거는 다 잊으라고, 그래야 네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죄르지는 왜 그래야하냐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여 동네 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길이 아닌 주어진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고 주장했다. (281쪽)


죄르지는 운명이란 따로 정해져있는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운명이라는 말 대신 나 자신의 걸음을 계속 걸어온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정직하게 계속 걸어온 나의 행보, 나 자신,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 사람들. 수용소를 겪고 나온 다음의 삶이 원래대로 복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시작이다. 


어찌보면 그곳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84쪽)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안에 차오르는 각오가 점점 강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면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불쌍한 어머니. 내 기억에 어머니는 내가 엔지니어나 의사 아니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원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난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285쪽)


저자는 그런 각오로 남은 생을 분투하며 힘겹게 살아왔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원제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없음'이라고 해설에서 번역자는 밝히고 있다. 고민하다가 제목을 그냥 '운명'이라고 했노라고. 

원제가 왜 '운명없음'인지 알겠다. 내가 걸어온 길. 살아있다는 느낌조차 없이 살아있는 시체로 존재하고 있던 순간에도 지속해갔던 걸음. 운명대신 그가 믿는 것은 그 경험이다. 운명대신 되돌아볼수 있는 그 경험을 믿는다. 

운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곧 운명이며, 어렵고 힘겨운 것은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벗어나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를 지속해가는 문제이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헝가리 문학계에서도 문학가로서의 존재감이 미미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고 병마와 싸워야했으며 결혼 생활도 순조롭지 못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그는 2016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월 중순이었으니까 지금은 또 많이 달라졌을 풍경입니다.





2월에 아들이 군입대했어요.





집을 나서고 있는 모습인데 제가 수십년전 집을 떠나며 한 행동과 똑같네요. 강아지 쓰담쓰담.






철원 훈련소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드라이브 스루 방식. 

입소자만 하차하라고 하여 저와 남편은 차에 있고 아들만 내려주고 차는 계속 가던 길 가는 방식입니다. 






지난 주말엔 경주 남산에 다녀왔습니다.

경주는 몇번 갔었지만 경주 남산은 1998년에 가고 처음이어요 (신혼여행으로 경주를. 제가 제안해서요.)

들어가자마자 소나무숲. 경주 남산 소나무숲은 유명하지요.

배병우 사진 작가의 소나무 사진이 탄생한 곳.

정말 멋지더라고요.

















보물찾기 하며 산을 오릅니다.







마을이 저 아래로 보이니, 꽤 높이 올라왔지요.








바위 틈을 뚫고 나온 소나무 좀 보세요.













저도 엽서를 한장 썼습니다.

(메고 있는 배낭은 남편 배낭. 저는 짐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지갑과 휴대폰, 손수건만 주머니에 넣고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이것 저것 챙겨 배낭을 메고 출발한 남편이 중간에 덥고 힘들어해서 제가 대신 메고 올라가는 중입니다.)







하산길.

앞서 내려가고 있는 모녀 모습이 예뻐서요.


저에게 경주는 여전히 매력있고 더 알고 싶은 곳이네요.





다음 일기엔 아마 꽃 사진 잔뜩 올리게 될까요?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03-04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4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파피필름 2021-03-04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사진과 글 늘 잘 보고 있습니다~~사진보니 경주 다시 가보고 싶네요. 군입대한 아드님도 건강하게 잘 생활하길 빕니다 너무 늦었지만 올한해도 좋은 책들과 함께 행복하세요~~^^

hnine 2021-03-04 15:58   좋아요 1 | URL
스파피필름님도 경주 좋아하시나요? 제가 한때 경주에 관심이 많아가지고, 계기가 딱히 생각은 안나는데 책도 읽어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그랬었거든요. 날씨 좀 더 풀리면 스파피필름님도 한번 나들이 삼아 가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 아이 군생활 잘 하고 오라고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대학 입학하며 이미 집을 떠나 생활했기 때문에 별로 새삼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학교와 군대는 다르긴 하지요. 차에서 내려주면서 너는 이제 나라지키는 군인이라고 악수하고 내려주었어요.
올 한해도 서재에서 자주 뵙길 바라겠습니다. 감사드려요~~

scott 2021-03-04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 억새풀 ! 강아지풀 그리고 에이치 나인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볼트 쓰담 쓰담 아드님 건강하게 군생활 잘하길 바래요!봄의 향기를 가장 먼저 품고 있는 꽃사진 기대 만발 ^.^

hnine 2021-03-04 16:10   좋아요 2 | URL
강아지풀은 그냥 보고만 지나치질 못하겠어요. 꼭 한번 손으로 만져봐야지요. ^^
꽃은 아직 눈에 많이 안띄어도 나무들 색깔이 달라졌어요. 푸릇푸릇.
scott님 서재글에 곧 수선화 핀다고 쓰셨었지요?
영국 같으면 벌써 수선화가 여기 저기 피었을것 같네요. 우리 나라 개나리 만큼이나 영국에선 흔한게 수선화지만 언제 봐도 예뻤어요.
우리 강아지 이름은 볼트와 비슷한 볼더 (Boulder)랍니다. 볼트라는 강아지 나오는 영화가 있었지요.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저희 집 강아지 이름이 좀 특이하긴 해요 ^^

막시무스 2021-03-04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와 구름이 옛날 시조에 등장할 만 분위기네요!ㅎ 아드님께서 건강하게 제대하시길 기원합니다.

hnine 2021-03-04 16:13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 말씀대로 진짜 분위기 있더라고요.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하늘, 그리고 구름까지요. 배병우 작가의 사진이 괜히 탄생한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요. 그런데 남산이 생각보다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돌이 많고 올라가는 코스가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서요. 그래도 또 가고 싶은 ^^
제 아들 군 생활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째깍째깍...국방부 시계 가는 소리요. ^^

페넬로페 2021-03-04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드님 군대 보내서 마음 허전하고 보고프겠어요~~
저 엽서는 나중에 도착하는건가요?
손편지를 써본지가 오래되었네요^^

hnine 2021-03-05 05:10   좋아요 1 | URL
요즘 군대는 휴대폰도 가지고 들어가게 하고요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주말엔 집으로 전화도 오고, 네이버 밴드도 만들어져있고 해서 예전같진 않더라고요. 그리고 워낙 대학 입학하면서 이별의 세러모니를 한번 겪은지라 생각보다 서운하진 않았어요. 무사히 건강하게 의무를 다 하고 오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네요.
엽서는 며칠 후 도착한다는 말이 안써있어서 모르겠어요. 뭐, 안들어가도 괜찮을만한, 만만한 상대에게 그냥 재미로 썼으니까요 ^^
저도 손편지라고 할 수 있는건 생일에 생일카드 정도였네요. 오랜만에 써본다면 누구에게 써볼까 생각해보니 금방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요 ㅠㅠ

stella.K 2021-03-05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벌써 군대를...!
아드님 강아지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입소했을까요?
강아지도 한동안 어떨떨하겠어요. 형이 매일 저녁이면 집에 들어왔는데
왜 안 들어오지 갸웃거렸을 것 같네요.
무엇보다 h님이 허전하시겠네요. 더구나 코로나라서 걱정이 많으시죠?
그저 무탈하게 잘 있다 돌아오길 저도 빌어봅니다.^^

hnine 2021-03-05 05:14   좋아요 1 | URL
그쵸? 엄마인 저도 내 아들이 벌써 군대를!! 딱 이런 기분이랍니다.
코로나라서 오히려 군대 보내는게 마음에 놓인다면 이해하시려나 ㅋㅋ
군대 가기전에 집에 잠깐 와있는 동안 얼마나 여기 저기 돌아다니던지.
훈련소 들어가자마자 코로나 검사부터 하더라고요.
대학 들어가느라 집 떠날때 한번, 이렇게 군대보내면서 또 한번. 이렇게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는가봐요. 군대 같다오면 이제 정말 어른 대우를 해야할 것 같아요.
무탈하게 잘 있다 오길 빌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1-03-0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군대....
건강히 지내기를 저도 바랍니다~

hnine 2021-03-05 05: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것만 바랄 뿐이어요. 건강히 18개월 잘 지내고, 많이 커서 돌아오기를.
훈련소에 내려주고 걸어가는 아들 뒷모습 보니 참 많이 컸구나 싶고 키울때 생각도 나면서 나도 그냥 놀면서 세월보낸건 아닌가보다 위안도 되고말이지요 ^^
요즘은 현역 18개월인데 예전에 비하면 많이 짧아진 셈이지요. 그동안 휴가도 나오고 전화도 쓰고 밥도 맛있대요 ^^
건강히 지내기를 바라주시는 마음, 감사합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이면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돌 깔린 길을 타박타박 걷는 여공들의 발소리였다. 나는 더 일찍 깨본 적이 없어 못 들어봤지만, 그보다 앞서 공장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침실에는 대개 네 명 정도가 함께 지냈다.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지독히도 불결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방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일반 주택이었던 이 집은, 브루커 부부가 인수하여 천엽 가게 겸 하숙집으로 바꿔놓았다. (11쪽)


우리 나라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없을 대목.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1936년 조지 오웰은 레프트 북 클럽이라는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책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당시 그는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활동을 하고 돌아와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파리와 런던에서 자발적 부랑자 생활을 하고, 그 경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으로 펴낸 후였다.     

기꺼이 제의를 받아들인 조지 오웰은 두달동안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등 잉글랜드 북부 탄광지에서 탄광 일에 참여하고 그들의 숙소나 집에 머물면서 취재를 위한 조사 활동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실 위건 (Wigan)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고 그가 머문 곳이 위건 지역만은 아님에도 제목이 위건 부두 (Wigan Pier)인 것은 위건 부두라는 명칭이 위건과 맨체스터 지역의 Leeds and Liverpool Canal 을 둘러싼 지역을 통칭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진짜 석탄 하역 부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었는데 부두가 붕괴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한다. 즉, 위건부두는 사실 위건 지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북부 탄광 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Wigan Pier is an area around the Leeds and Liverpool Canal in WiganGreater Manchester, England, south-west of the town centre. The name has humorous or ironic connotations since it conjures an image of a seaside pleasure pier, whereas Wigan is in fact an inland and traditionally industrial town. (Wikipedia)    


맨위에 인용한 이 책 첫 문장은 조지 오웰이 묵었던 하숙집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방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을 하숙인 네명이 함께 썼는데, 지독히 불결하고 족제비 우리 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식탁에서 주인과 하숙인 모두 같이 식사를 하는데 식탁 위에 아침에 있던 부스러기나 소스 흘린 것이 저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예사이며 식사로 제공되는 빵에는 늘 집주인 남자의 시커먼 손도장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여기 머물면서 조지 오웰은 탄광 막장 일에 참여하는데, 막장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지, 막장 안에서 그리고 막장 밖에서 광부들과 그의 가족들의 삶은 어떤지, 그들의 수입이 어느 정도되고 그 수입이 어떤 종목에 어떻게 지출되는지, 주택 구조, 주택 공급 현황은 어떠한지, 그야말로 기자가 보고서 쓰듯이 자세히, 숫자로 제시된 자료까지 첨부하여 보여주고 있다. 

침대 두개를 세 사람이 쓰는 등, 기본적인 주거 환경이 이루어지지 않고 슬럼가가 형성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지자체 주택을 지어 공급하기도 하였으나 노동자들은 지자체 주택으로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여 들어가게 되어도 곧 다시 슬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예도 나온다. 슬럼의 악취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쁘고 자녀들이 뛰어놀 공간이 있는게 더 낫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동주택을 불결함과 혼잡함으로부터 유지하기 위한 지자체의 제제와 관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냄새나고 복잡할지언정 슬럼의 온기가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슬럼 거주민들을 번듯한 집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누려온 자유의 마지막 흔적까지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96쪽)


노동 계급 가정의 가장이 실업을 당한 경우, 가족 구조 문제성도 지적되었다.


노동 계급 가정에서 주인은 남자이지 중산층 가정의 경우처럼 여자나 아이가 아니다. 이를테면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는 남자가 가사의 일부를 맡아서 하는 경우를 도무지 볼 수 없다. 이런 관행은 실업 때문에 바뀌는 게 아니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좀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남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거려도 여자는 변함없이 바쁘며, 그것도 살림이 더 빠듯해졌으니 더욱 바쁘다. 그런데도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여자들이 반발하는 경우가 없었다. 아마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남자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줌마' 노릇을 한다면 사내다움을 잃는게 아닐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110쪽)


여기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뒤에 가면 경제가 나아진다고 꼭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것은 '학교에서 익힌 편견'이라는 장에서도 이어진다. 영국의 계급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돈이겠지만 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며, 돈으로 이루어진 계층 구조이지만 거기에 그림자 같은 계급 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조지 오웰 자신이 어릴 때 장학금 혜택으로 사립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서 장학금 없이도 입학할 수 있었던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던 경험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직업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5년 동안 인도 제국의 경찰의 신분으로 일하며 몸으로 체득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해 배우는데 더없이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염증을 느꼈고 비판하였으며 그것을 뿌리뽑고 그 자리를 대신해야할 주의와 제도를 찾고 알리기 위해 글로, 행동으로 활동하는, 죽은 지식인이 아닌 산 지식인이 되고자 하였다.


나는 경찰이었으니, 압제의 실행 기구의 일원이었다. 더욱이 경찰에 몸담고 있다 보면 제국의 악행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악행으로 득을 보는 것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형을 찬성하면서도 교수형 집행인 노릇은 하지 않으려 한다. (197쪽)


그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교수형을 언도하는 판사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정부는 악이며, 처벌은 언제나 범죄 자체보다 해로우며, 사람들은 믿고 가만히 내버려둬야만 점잖게 행동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는 그런 사악한 압제의 일원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양심의 가책때문에 속죄를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 스스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210쪽)


그런데, 그렇게 그가 영국의 노동 계급에 섞여들어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들 (영국의 노동계급)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 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201쪽)


이 책중 한 챕터는 제목이 아예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이라고 되어 있다.

역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말한다. 간단히 부랑자가 될 수는 있었지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내용), 건설 인부나 광부 처럼 평범한 노동 계급의 경우에는 훨씬 끼어들기가 어려웠노라고 (「위건부두로 가는 길」 내용). 평범한 노동 계급과 자기 사이의 벽은 돌담이라기 보다 수족관의 판유리 같아서, 없는 듯 대하기는 쉽지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얼마나 예리한가. 

그가 무정부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신봉한 의도는 한가지이다. 제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진저리치는 혐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국주의나 파시즘은 이미 흘러간 과거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다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제국주의나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섞여들어가 있을 수 있다. 세계를 어느 한 국가의 조절과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고도로 기계화 되어 있고 산업화 되어 있어서, 그런 단계가 오히려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저자는 생각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전체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간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 나라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마지막 장에서 기계화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어떻게 잠식해가는지 읽어가는 동안엔 절망스러웠다. 무분별한 기계화를 약물중독에 비유하여, 약이 조절되지 못하고 사용될때 어떤 결말이 올지 아는데, 기계화에 대해서는 그런 조절을 오히려 못하고 무한정 이용만 하려고 하며 발전의 척도로만 보려한다고 하였다. 1936년에 쓰여진 내용이 2021년 지금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수 있는가.


다음엔 그의 어떤 책을 또 읽어야 할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말고 다른 책이 남아있던가 찾아봐야겠다. 기꺼이 읽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3-02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버지니아 울프 시작했는데 조지 오웰을 다음 작가로 할까싶어요. hnine 님 조지 오웰 리뷰 글들 보다 보니까 자꾸 보고싶어져요. ^^

hnine 2021-03-02 09:02   좋아요 1 | URL
저도 한 작가의 책을 이렇게 연달아 읽어볼때가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지 오웰의 경우엔 집에 책이 있어서 있는 책들 읽기 시작해서 없는 책은 구입해서 찾아 읽게 되었네요.
비판적인 작가가 많지만 조지 오웰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다는게 다른 점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직접 간접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예시랄까, 그런 것이 지금 현대를 본 듯이 쓴 것 같음을 느낄때는 정말 오싹한답니다.
 



















 

메리 올리버, 특색없는 평범한 이름.

천 개의 아침, 어디서 본 것 같은 제목.

그래서였는지 다른 분의 이 책 리뷰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걸 보면서도 직접 읽어볼 생각까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읽었다.

1935년 미국 태생 메리 올리버는 서른 권이 넘는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시집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녀의 책들은 모두 산문집이었다. 짐작컨대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산문과 같은 느낌이듯, 산문집에 실린 글들도 시 같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2012년 Penguin press에서 출판된 A thousand mornings」를, 민승남 번역으로 우리 나라에선 2020년에 출간되었다. 36편의 시가 원문과 함께 실려있는데 번역된 시도 그렇지만 원문을 읽어도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쓰여진 시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이 분명하고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일관성있게 분명히 내고 있다면 독자로서 더 반가울 것이 없다.

자연의 변화, 매일 일어나는 단조롭고 시시해보이는 일, 함께 사는 개, 주위의 식물과 동물 들에서 삶을 발견하고, 깊은 생각보다 그런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준다.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라는 시에서, 아침 바다로 내려가 파도가 밀려오고 물러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신세가 비참하다며 나 어쩌면 좋지? 라고 한탄하는 말에 바다가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라고.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아침에 바닷가로 내려가면

시간에 따라 파도가 

밀려들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지,

내가 하는 말, 아, 비참해, 

어쩌지.

나 어쩌면 좋아? 그러면 바다가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비참해하지 말고 현재 눈 앞에 있는 너의 일에 충실하라는 파도의 대답은 곧 시인이 자신에게 가르치는 말이다.


'마침 거기 서있다가 (I happened to be standing)' 라는 시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일들로 가득 차서 나에게만 집중하며 세상을 걸어 다닌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진실로 살아 있다고 부를 수 없는 상태일지 모른다면서, 고양이가 햇살 속에서 토막잠 자는 것, 주머니쥐가 길을 건너는 것, 굴뚝새가 쥐똥나무에서 노래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 고양이, 주머니쥐, 굴뚝새의 기도가 아니겠는가, 기도보다 의미있는 것은 일상, 시시해보이는 일상일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충분히 살았을까, 나는 충분히 사랑했을까, 나는 충분히 감사하며 행복을 누렸을까, 나는 우아하게 고독을 견뎠을까,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정원으로 걸어 들어간 시인은 거기서 정원사가 장미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본다. 자기 할일을 하고 있는 정원사를. 그는 단순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 ('정원사')

이렇게 시인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보다는 단순한 일상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있다. 


'허리케인'에서는 끝장을 본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자연의 경이로운 현상을 노래하고 있다.

나는 내 잎들이 포기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어. 

허리케인의 손등이

모든 것들을 후려쳤지.

하지만

진짜 나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봐,

허리케인들이 다 후려치고 지나간 나무들에서 봄도 아닌 여름 끝 무렵, 새잎이 돋아나는걸 보았다. 잎이 돋아날 철이 아니었는데, 다 끝장난 것 같아보였는데.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맺는다.

어떤 것들에겐 철이 아닌 때가 없지. 

나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고 있어.


바닥까지 내려간 후 다시 시작되는 내용은 '어둠이 짙어져가는 날들에 쓴 시'에서도 나타난다.

해마다 우리는 목격하지

세상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풍요로운 곤죽이 되어가는지.


존재했던 것의 원기가 존재할 것의 생명력과 결합된다 (The vivacity of what was is married to the vitality of what will be.)는 것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실이라면서, 세상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오늘 우리는 쾌활하게 살아가야지 않겠냐는 시인의 말에 혼자 고개 끄덕거렸다. 


'썩은 그루터기에서, 무언가 (Out of the stump rot, something)' 라는 시에서도 같은 맥락을 발견한다.

예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오지 마.

대신 그림을 봐, 

아니면 수선화를 기다리든지.


지금은 봄, 

어수선한 숲속, 소란스러운 연못가

봄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위의 연은이 우리가 상상하는 예쁜 그림같은 봄이라면, 아래 연은 실제의 봄,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기 위해 어수선하고 소란스런 실제의 봄이다. 생명은 치열한 것, 어수선하고 소란스런 과정을 통해 시작되고 또 유지되는 것.


1984년 퓰리처상, 1992년 전미도서상을 받았고 책 뒤에는 메리 올리버에 대한 유명인사들과 각종 출판사의 찬사가 실려있다. 자연을 교과서 삼아 가장 단순한 언어로 삶의 가장 밑바닥 진실을 말하고자 한 메리 올리버. 중요한 것은 단순하게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simple, yet sufficient. 단순하지만 충분한.

어쩌면, 삶의 가장 중요한 진실은 많이 배우고 많이 읽고 많이 말하고 많이 쓰는 것보다 매일 반복되는, 아주 단순해보이는 그 일상 속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하찮아보이는 그 일상 속에.

이 시집에서 내가 발견한 일관된 목소리는 그것이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2-28 0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hnine님 덕분에 좋은 시들을 얻어 가네요. 전 시집 전체를 읽는 것보다 이렇게 누군가가 좋다고 뽑아준 시를 읽는게 더 좋더라구요. ㅎㅎ 아 시인들이 저같은 사람은 싫어하겠죠? ㅠ.ㅠ

hnine 2021-02-28 05:44   좋아요 2 | URL
좋은 시라고 공감해주시니 저도 기뻐요. 시인을 알게 되는 과정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다 알게 된 시 한편에서 시작해서 그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어보고, 그 시집에서 공감가는 다른 시를 발견하기도 하고 발견못하기도 하고요. 이 시집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메리 올리버에 대해 소개해주는 것을 듣고 구입하게 되었어요. 미국 현대시에 대해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듯, 어떻게 보면 동양적이기도 하고 어려워서 머리써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는 충분히 단순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시인의 생각이 시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메리 올리버의 산문도 한번 읽고 싶은데, 산문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 않네요. 그래서 읽어보고 싶어요.

scott 2021-02-2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누군가 발췌한 시구절이 더좋은 1人!
[고양이가 햇살 속에서 토막잠 자는 것, 주머니쥐가 길을 건너는 것, 굴뚝새가 쥐똥나무에서 노래하는 것}
이런 자연의 모습을 목격한 시인의 천개의 아침은 도시인들의 아침과는 차원이 다를것 같아요.

원래 메리 올리버가 노벨상을 받았어야 하는데 ,,,
시인 메리 올리버의 반려견도 시인의 머리색과 같은 함께 늙어가는 모습까지 닮은
시인이 사랑하는 강아지 모습 그자체 였어요.

hnine 2021-02-28 23:00   좋아요 1 | URL
알라딘의 똘똘이 scott님! 메리 올리버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군요.
반려견 percy 가 시에 자주 등장하는데, percy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 한 마디 없이도 떠난 친구 그리는 내용의 시를 얼마나 뭉클하게 썼던지 몇번을 읽고 또 읽었어요.
책과 사람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참 많지요. 책을 읽을수록, 사람을 알아갈수록 생각이 가지치기를 하고 더 복잡해져가는 것 같은데 (배움이 부족해서이겠지만), 자연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저절로 단순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21-02-2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가 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시가 무척 좋네요, 나인님. 저도 이 책 봐야겠어요.

hnine 2021-02-28 23:03   좋아요 0 | URL
바다가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는 뜻을 금방 파악하셨네요. 저는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야? 했답니다.
다락방님도 메리 올리버 마음에 들어하실듯해요. 오늘 이누아님과 하이드님 서재에 들렀다가 거기서도 이 시집을 만나 반가왔답니다. 저는 산문집도 한번 읽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