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주 미술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취학 전에도, 그리고 초등 학교에 들어가서 미술이란 과목을 학교에서 배우면서도,
이것 저것 준비해 가야 하는 것도 자신 없었고,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그 막막함은,
하얀 지면을 놓고 무엇을 써야 할때의 그 의욕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사생대회 같은 것을 가는 날은
그 거추장스런 화판을 들고가는것도 맘에 안 들었고,
잔디 같은 곳에 털썩 앉아
시간 안에 무엇이든 그려내야 하는 것이 싫었다.
결정적으로, 중학교 1학년 미술 시간,
넌 공부는 잘하는지 몰라도 미술은 정말 별로라는
미술선생님의 말씀은,
그래, 난 공부나 잘 하자, 라는 쪽으로 마음을 먹게 했다.
중학교 3학년 미술 시간,
사군자를 가르쳐 주시던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 선생님께 귀염을 받으면서
동양화에는 애정을 가져보기로 살짝 마음먹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미술에 관한 지금까지의 편견을 깨는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보기에도 엉망 진창,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을 칠판 앞에 거시고는
그 그림과, 그 그림을 그린 학생의 마음까지 읽어내시는 것을 보고
그림이 그냥 그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표현해내는 한 방법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그렸다.
미술 교과서 외에 선생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책을 유심히 봐놓았다가
교보문고까지 가서 사가지고 와 흐뭇해하기도 했다.
나와 미술 사이의 관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뭐니뭐니 해도
영국에서의 3년 반이라는 유학 기간이리라.
주말을 이용해 한달에도 몇번씩 찾아다니던 런던의 미술관, 박물관들.
어느 장소는 갔던 곳을 생각나면 또 가고 (Tate gallery가 그랬고, Victoria & Albert Museum이 그랬다)
가보고 싶던 곳을 끝내 못가본 곳도 많다.
그 외롭던 시간들을 나는 그림을 벗삼아 버텨냈던 것 같다.
잠자러 침대에 들어 갈 때 으례히 같이 이불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던 그림책 'The Art Book'
두께는 좀 있지만 크기는 손바닥 보다 조금 큰, 아주 아담한 책이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림을 보고, 4-5줄 정도의 설명을 읽어 보고,
그러다가 잠들곤 했었다. 기차를 탈때, 여행을 갈때,
늘 가방에 가지고 다녔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나의 좋은 친구였던, 잊을수 없는 책이다.
지금도 그 책의 표지만 떠 올려도
가슴이 따뜻해지다가 뭉클해지기도 하는...
수년 전 부터는 최 영미의 미술 산문을 읽으며 신이 났었다.
특히 유럽 기행문의 형식을 빌어 쓴 미술 작품에 관한 책은 읽고 또 읽고...
오늘 또 오랜만에 좋은 미술 책을 만나 한참을 열심히 보았다.
'천년의 미술 여행'
그림을 보며, 그림 기법을 볼 지식은 부족한 나는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뭔가 그림과 내 마음이 통하는 느낌을 받을때
난 또 친구를 만난 듯이 기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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