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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러시아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사람인 쇼스타코비치의 생애와 음악을 소재로 하여 영국의 대표 작가 줄리언 반스가 마음껏 예술론을 펼친 책이라고 보고 싶은, 소설로 소개되어 있지만 단순한 소설로 보고 싶지 않은 책이다. 소설로서의 재미를 기대했다면 기대와 빗나갈 것이고 예술론이라고 본다면 줄리언 반스와 쇼스타코비치 사이에서 혼돈을 겪을 것이다.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생각인가 하고 읽다보면 문장에서 '그'라고 칭하는 사람은 분명 쇼스타코비치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어렵다. 쓱쓱 읽어넘어가기엔 매우 주관적이고, 그래서 곰곰 생각을 해야 이해가 될 문장들이 넘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재미가 기대만큼 안되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줄리언 반스를 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 즉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를 이 책을 쓰기 위해 엘리자베스 윌슨이 쓴 <쇼스타코비치: 기억되는 삶>을 주요 참고 자료로 했다고 하고, 그래도 이 책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쓴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 윌슨의 책을 읽어주기 바란다고 했다.
예술가의 창작의 자유가 제한 받고 검열받고 조정되어야 했던 시대. 예술은 인민의 것이라는 레닌의 말에 부응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인민의 취향에 맞고 인민의 삶에 바람직하다고 보여지는 대로 작품 활동을 할 것을 러시아 정부로부터 강요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은 자연히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라는 문제를 안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통해 정작 줄리언 반스가 논하고 싶었던 주제는 그것이 아니었을지. 이 주제에 대해 잘 요약이 되어 있는 대목 중 하나로 135쪽의 다음 부분을 골라보았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가장 잘 즐겨주는 이들을 위해서 작곡을 했다.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고, 모든 시대의 것이면서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라는 말. 시대의 소음이 되는 것을 거부하지만 대신 역사의 속삭임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시대의 소음'과 '역사의 속삭임'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하는 구절이다.
예술가는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는다. 오로지 예술가 자신이 만족할때까지를 완성의 순간으로 삼고 그것이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호응 받기를 원하지만 그건 예술가의 바람이고, 일단 결과물로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의 음악은 누구의 호응을 받느냐 뿐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잣대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대목이 마침 이 책의 문장 수준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 같아서 옮겨 본다.
건물 공사 현장의 크레인 기사가 노래를 작곡해 그에게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답장을 했다. '당신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꼭 필요한 집들을 짓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당신이 하는 쓸모 있는 일을 계속하시라는 겁니다.' 크레인 기사가 곡을 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 작곡가 지망생이 보여준 재능이 그가 크레인 운전실에 들어가 레버를 조작하도록 지시를 받는다면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옛날에 귀족이 그에게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보냈다면 이렇게 답할 용기가 있기를 바랐다. "전하, 한 손에는 귀족의 품위를 유지할 책임을 지니고, 다른 손에는 전하의 영지에서 노동하는 자들의 안녕을 돌볼 책임을 지니셨으니 전하의 지위는 참으로 높고도 어렵습니다. 제가 전하께 드리고픈 조언은 전하가 하시는 쓸모 있는 일을 계속 하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작곡 수준은 당신의 본분을 뒤로 하고 계속할 수준은 못되니 원래 하던 일에 정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뭐 이런 뜻 아닐까.
스탈린이 좋아했던 음악가였던 베토벤. 이 책에서는 '붉은 베토벤'이라고 특별히 칭함으로써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예술가 상을 나타내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스탈린의 인정을 받았던 음악가였지만, 그래서 어쩌면 또 하나의 붉은 베토벤이 되기를 강요받았지만 그가 마음 속으로 추구한 음악은 시대의 소음과 맞서는 음악, 시대의 소음과 구별되는 음악, 작곡가의 순수한 의도로서의 음악이었다. 붉은 베토벤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81쪽)
앞서 나왔던 '시대의 소음'과 '역사의 속삭임'이 여기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윌슨의 책 외에 줄리언 반스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다는 또다른 책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은 2001년에 우리 나라에 번역본으로 나왔다가 절판되었는데 며칠 전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쓴 회상록은 아니고 솔로몬 볼코프가 그의 구술을 받아 적고 다시 엮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듣고서 금방 좋아지기 어려웠다. 당시 러시아 정부가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라고 지적했던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듯, 거칠고 도발적인 음악에 가깝다. 그 책을 읽어보면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까?
아예 서방으로 망명하여 유럽에서 성공의 모든 장식을 누렸던 프로코피에프와 달리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에 끝까지 남아 정부의 요구를 수용했으며 나중엔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한다. 분명 사회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시대의 소음과 역사적 속삭임 사이, 순응과 항거 사이에서 복잡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 줄리언 반스는 왜 하필 이 사람을 택하여 소설로 쓰고 싶어졌을까. 읽는 내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