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모든게 그렇듯이 어떤 책과 만나는데에도 타이밍이 있다. 알라딘에 이 책 폭풍이 휩쓸고 지나갈 당시에도 안읽고 버텼던 것은 더 적절한 타이밍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인지, 그때가 바로 적절한 시기였다고 생각해서 너무 빠져들까봐 피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1956년 생이고 이 책이 나온게 2008년이니 이 소설은 그녀가 50대 초반 즈음에 썼을텐데 그녀의 이력을 보니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글을 쓰고 싶어했지만 그녀의 세번째 소설인 이 작품이 2009년 드디어 퓰리처상을 받기까지 인생 행로가 단순하지 않아보인다. 작가에게 단순하지 않은 인생행로는 훗날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지만 말이다.
단편소설로 시작한 이력 때문인지 이 책도 길이로 보면 장편이라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배경과 인물이 한 축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 단편의 형식을 하고 있다. 배경은 모두 공통적으로 미국 메인주의 크로스비라는 마을이고, 등장인물은 올리브 키터리지와 헨리 키터리지 부부, 그리고 이들과 혈연, 지연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사람들이다.
<약국> 제목은 올리브 키터리지 이지만 첫 단편에서 주로 등장시키는 것은 남편 헨리 키터리지이다. 약사로서 마을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헨리 키터리지는 온건하고 책임감 있으며 도를 넘지 않는 성격이다. 그에 비해 올리브는 강하고 주관있으며 남편 헨리에 비해 인생을 덜 만족스럽게 사는 듯 하다. 이 부부 사이에 약국 점원 데니즈가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은 항상 작게 시작하여 커지는 법이다.
<밀물>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케빈이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회한까지는 아니고 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케빈은 아직 그정도로 늙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워하지 않을 만한 과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아노 연주자> 부모의 불안한 정서 밑에서 성장한 사람은 또 하나의 불안한 어른으로 자랄 수 밖에 없다. 마을의 바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는 앤절라의 불안한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그녀의 멍들고 낫지 않은 상처에서 나오는, 절뚝이는 소리이다. 그녀가 연주하는 바에 키터리지 부부는 잠깐 관객으로 등장한다.
<작은 기쁨> 이 단편을 쓰다가 이 책 전체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인 크리스토퍼 키터리지의 결혼식에서의 올리브 키터리지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직접적 묘사 없이 심리를 나타내고 전달하는 기법이 최소한 이 단편에서는 앨리스 먼로급.
<굶주림> 요즘은 책이나 소설 제목에 굶주림이라고 되어있으면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보다는 심리적인 굶주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도 그렇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아내 보니가 있음에도 빈둥지 증후군을 겪는 하먼에게 동반자가 되어 주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데니스였다. 하먼과 데니스는 소외, 외로움, 사랑의 실패로 먹기를 거부하는 소녀 니나를 함께 돌보지만 니나의 결말은 사랑없는 삶의 결과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네, 어머니를 미워하나?" 올리브가 말했다.
"아뇨." 니나의 대답이었다. "뭐, 우리 엄마는 한심한 데가 있지만 미워하진 않아요."
"그럼 됐어," 올리브가 그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럼 된 거야. 그게 시작이니까."
175쪽, 올리브가 니나를 도와주기 위해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여기 함께 있던 하먼은 올리브의 말에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그 반대일 수 있는 것이다. 니나의 문제를 도와주려다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 하먼이다.
<다른 길> 작가는 전반적으로 노년의 삶에 대해 우울하고 무겁게 그리고 있다. 이 단편 역시 그렇다. 치욕스럽고 당황한 순간,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헨리의 말 한마디에 강인해보이기만 한 올리브 가슴에 멍이 든다. 사람의 마음을 멍 들게 하는데는 꼭 긴 말과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야말로 '일격'으로 충분하다. 그 일격에는 오랜 세월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어야 한다.
<겨울 음악회> 노부부 제인과 밥의 이야기이다. 제인은 올리브가 수학교사로 있던 학교의 양호 교사였다. 예외적으로 이들 부부 사이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애틋하고 서로를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며 읽을 무렵, 예외가 아니게 하는 사실이 밝혀진다.
<튤립> 글이 통째로 다 슬펐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모든 노년의 삶이 이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바라지 않아도 그 길에 들어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게 늙는 일인 것 같다. 이제 올리브에게는 올해도 튤립을 심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 밖에 중요한 일이 없어보인다.
<여행바구니> 여행바구니를 채우며 노년을 함께 계획했던, 인생의 대부분을 공유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밝혀지는 비밀과 거짓들 앞에서 돌멩이를 던져 물수제비 짓을 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는 늙은 말린을 올리브 키터리지는 자신의 일인양 바라본다. 옛제자였던 말린을 위로하던 올리브는 누군가의 슬픔을 보면 자신의 슬픔이 덜 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병속의 배> 예외적으로 제목에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단편이다. 위니는 10대, 줄리는 20대, 애니타는 아마도 40~50대. 한 단편 속에 여러 세대가 동시에 등장하고, 각 세대다운 갈등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갈등을 각각 어떤 식으로 해결해나가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불안> 원제는 불안이 아니라 security 라고 역자가 밝히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흉보며 결코 닮고 싶지 않던 어떤 인물로 와있음을 발견하는 것, 자신의 전부이던 자식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 당신때문에 힘들었다는 폭로를 듣는 것. 이보다 더 깊은 상처가 있을까? 하지만 상처를 가지고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꿋꿋하게라고까지는 말 못해도. 상처보다 더 끈질긴 생존이다.
<범죄자> 여자의 어떤 행동에는 잠재의식, 과거, 성장과정, 꿈, 생존본능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행동 자체만 가지고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행동중 범죄행위도 예외는 아니다.
<강> 이건 통째로 베껴쓰고 싶었다. 위의 <튤립>을 최고로 꼽으며 읽어내려왔는데 베껴쓰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었다. <튤립>이 헨리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 혼자 남은 올리브의 이야기라면 <강>은 헨리가 죽고 진짜 혼자 남은 올리브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니 생존에 몸부림 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 것도 그녀 옆에 없다. 이것을 딛고 극복하며 오늘도 내일도 버텨내야 하는 올리브의 삶은 과연 올리브만의 삶일까. 천만 다행이랄까, 이제 이 세상에 내 존재가 필요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게 매일의 삶이 되어 가던 올리브에게, 여기에 아직도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감정을 잠시 느끼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본 리뷰의 제목은 <튤립>에서 빌려왔고, 나한테는 이 책 전체에서 제일 여운이 남는 문장이기도 하다.
"튤립은 터무니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삶은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기만 한데."
('삶은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하기만 한데' 이 부분은 실제 책에는 없는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