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다락방님 덕분에 최영미 시인의 신간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배송된 시집을 비오는 오늘, 처음부터 주욱 읽고,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또한번을 주욱 읽었다.

최영미의 시는 시로 쓰여진 일기장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기를 쓰지 못하리라.

1990년대 중반, 서른 언저리에 낸 첫 시집으로 베스트 셀러 시인이 되었던 그녀의 나이 이제 오십대 후반이다.

열 다섯 살엔 가장 먼 미래였던 서른 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겼고 이제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쓰는 나이가 되었다고 했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을 맞이하는 나이라고 ('낙원').

 

지난 사랑의 기억, 페미니즘, 미투 운동, 부친상, 요양원에 있는 모친 병간호 등 외롭고 고달픈 시간의 일기장이다.

힘 앞에, 권력 앞에, 거짓 앞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내느라 버티는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했을 시간들의 기록이다. 아마 시인은 시를 쓰며, 시로 풀어내며 스스로 위로하지 않았을까.

문제의 시 <괴물>도 이 시집에 다시 실었고, 재판 과정을 소재로 한 시들이 이 외에도 더 수록되어 있다.

시의 형태로 태어나면서도 여전히 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기록들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져오다가 정작 눈물이 차오른건 오랜만에 시 청탁을 받고 쓴 '원고 청탁'이라는 시를 읽을 때였다. 시인은 오랜만에 흥이 나있는데 그런 시인을 보며 나는 왜 참고 있던 감정을 터뜨렸을까.

 

시집은 두번 연달아 읽고, 시에서 언급된 노래 '미친 여자의 사랑 노래 (Mad girl's love song)'는 듣고, 듣고 또 듣고 했다. 아마 수십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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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29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곧 읽을게요, 나인님.

hnine 2019-06-30 05:5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서재에서 보고 바로 주문하고, 바로 받고, 바로 읽고, 그랬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제가 워낙 최영미 시인 팬이라서요.
최영미 시인 나이들어가는 모습 보는 것이 좀 서글프네요. 저도 늙어가면서 말이죠 ^^

Nussbaum 2019-06-30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 들렀다가 한 여름의 더위에 그늘진 곳처럼 잠시 쉬었다 갑니다 :)

hnine 2019-07-01 06:15   좋아요 1 | URL
점점 낮 더위가 본격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왔어요.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한건 밤에는 그나마 서늘하다는거죠. 밤까지 더운 열대야가 오는 여름을 어떻게 날지 모르겠어요. 더위도 참고 공부하는 수험생들, 생활전선에서 땀흘리는 분들 생각하면 투덜거림이 좀 들어갈까요? 제 서재 들어오셨다가 더 더워지시면 안될텐데 말이죠 ^^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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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코스키라는 작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한재호라는 작가가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제목의 국내 소설을 발표했을 때였다. 제목이 특이하기에 소개글을 보고서 미국에 실제로 찰스 부코스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소설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온 이민 가정의 찰스 부코스키는 한때 문단에서 외면당하기도 했다지만 1994년 세상을 떠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발표된 그의 다른 소설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에서와 같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역시 헨리 치나스키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의 소년 시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민 가정의 궁핍함, 가족 구성원간 소통과 이해 부족, 친구들의 폭력과 비열함 등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해야했던 그는 일찍 부터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사회, 도덕과 질서보다 악덕과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의 실상을 보면서 자란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직접 가지 않고 꾸며서 쓴 글을 숙제로 제출했는데 잘 썼다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헨리. 더구나 가지 않고 썼다는 것을 나중에 선생님이 아시고도 칭찬하신 걸 되돌리지 않고 그냥 집에 가라고 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헨리는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거짓말이고 최소한 거짓말은 내 삶을 더 쉬워지게 한다고.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115쪽)

그 당시 쉬운게 나중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책 속의 헨리는 알지 못한다. 나중까지 후회없는 거짓말은 없다는걸.

이 나잇대는 한참 성에 눈 뜰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분량이 남자 아이들의 성적인 호기심과 실제 행동에 대한 내용이어서 아무리 어린 시절 이야기라지만 이 정도면 19금 수준 아닌가 생각하며 읽었다. 남자 아이들의 성장기란 99% 성에 눈뜨는 것 하고만 관련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더구나 헨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몸에 번지는 부스럼이다.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아보지만 치료가 불충분하거나 적절하지 못했는지 상태가 더 나빠져가서, 급기야는 학교를 휴학하고 집의 침대에 누워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별 오락 거리도 없이 침대에서 두문불출 해야했던 바로 그 시기에 헨리는 시간 보내는 방법으로 최초의 창작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다. 가지도 않은 행사에 갔던 것 처럼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았던 헨리 아닌가. 바깥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부스럼이 조금 낫기 시작하자 동네 공립 도서관 출입을 시작한다. 모든 책에 흥미를 느낀 건 아니었다. 몇권의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모두 흐릿하고 모호하고 지루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렇지 않은 책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DH 로런스의 소설이다.

피아노 치는 한 남자에 대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식적으로 보이던지. 그러나 나는 계속 읽어 나갔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둡고 기이한 것들이었다. 그 페이지의 대사는 한 인간의 절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지만, <조, 어디에 있어?>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 어디에 뭔가 있긴 한 거야?>에 가까웠다. 팽팽하고 피투성이인 대사를 쓰는 이 로런스. (214쪽)

저 두 문장이 가져오는 결과의 차이를 집어낼 수 있던 헨리. 이후로 헨리는 도서관에 있는 DH 로런스의 책을 다 읽어치웠고 흔히 그렇듯이 그 책들은 곧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헨리 치나스키가, 즉 찰스 부코스키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잡초더미 같은 세상을 딛고 헨리가 걸어가는 길. 결말이 쌈박하다.

 

한때 불행했던 시기는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가. 그런 시기를 거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작가로서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웠던 시기라는 그 구슬들을 그냥 구슬인 채로 두느냐 목걸이로 엮어내느냐의 차이일 뿐.

책 뒷편의 해설에도 언급했고 나도 궁금했던, 책의 제목이 왜 저 제목인지는 의견이 분분할 뿐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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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 삶의 긴 터널 입구로 들어가 언젠가 다시 터널을 빠녀 나올 것이라는 것.

잠시 어둡고, 조용해지겠지만 그렇게 가다보면 밝고 환한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희망.

요새 이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올리신 리뷰도 읽다보니 그런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비가 오네요. hnine님.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째 음악듣고 노트에 뭘 적고 있습니다. ^^

hnine 2019-06-28 10:27   좋아요 1 | URL
터널 말씀을 하시니 어쩌면 사는 건 말씀하신 그 터널의 연속이 아닐까 싶네요.
언젠가 순천에 가면서 터널 몇개를 지나는지 세어봤더니 30개가 넘더라고요. 생각보다 많은 터널을 거쳐서 목적지까지 가긴 갔지요. 그런데 인생의 터널은 그 터널 속을 통과하는 동안은 그게 터널 속인지, 끝이 있긴 있는건지, 믿음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왔어요 ^^)
어제 비가 오더니 오늘 여긴 비가 그쳤어요. 무슨 음악 들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벌써 금요일이어요.
 

 

 

 

 

 

 

 

 

 

 

 

 

 

 

 

 

 

 

 

 

 

 

 

 

 

 

 

 

 

 

 

 

 

 

 

 

 

 

 

 

 

 

 

 

 

 

 

 

 

 

 

 

 

 

 

 

 

 

 

 

 

 

 

 

 

 

 

 

 

 

 

 

 

 

 

 

 

 

 

아침 산책을 나가는 날은 대개 일요일 아침이다.

날이 훤해도 겁이 많고 길치여서 안가본 길을 못가고 매번 다니는 곳만 다닌다.

요즘 어디나 제일 흔하게 보는 꽃 중 하나인 개망초. 이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곳을 지나며 남편이 예쁘다고 하기에 무슨 꽃인지 아냐고 했더니

"그냥 잡초 아냐?" 라고 했다.

"이 세상에 잡초가 어디있어? 우리가 이름을 모를 뿐이지. 개망초야 개망초." 라고 알려주었는데 오늘 같이 걷다 또 물어보니 그새 이름을 잊어버렸네.

집 뒤에 작은 대학 캠퍼스가 있는데 뒷동산과 연결되어 있어 산책할때 들르곤 한다. 캠퍼스내에 감자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다. 자주색 꽃이 피었으니 자주 감자가 달릴까?

나무중 요즘 꽃이 한창인 밤꽃. 작고 기다란 솔 모양에 눈에 띄는 색이 아니다.

자 대고 그린 오각형 같은 도라지꽃도 보았고, 아파트 단지 내 노각나무에도 꽃이 한창 피었다. 차나무과 노각나무. 꽃이 나무에 오래 붙어있질 않고 쌩쌩할때 떨어진다. 나무에 달려있는 것보다 떨어져 있는 것들이 더 많아서 그중 몇개는 주워들고 집에 와서 물에 담가놓았다.

등껍데기를 어디서 다쳤는지 일부 부서져 잎 위에 앉아 있던 무당벌레. 날지 못하고 기어만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어찌 되었을까.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두 권 모두 처음 읽을 때와 다 읽고 난 후 느낌이 달라서 기억에 더 남을 것 같다.

 

 

 

 

 

 

 

 

 

 

 

 

 

 

 

 

DH 로렌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

제목 보고 대충 로맨스 소설로 넘겨 짚으면 안될 소설이다.

780쪽 분량 내용 전체가 시대, 사상, 종교, 관계에 대한 작가의 독특하고 날카로운 생각으로 가득 가득하다.

 

 

 

 

 

 

 

 

 

 

 

 

 

 

 

 

 

또 한권은 찰스 부코스키, <호밀빵 햄 샌드위치>

원제는 Ham on rye인데, 이 책 역시 제목 처럼 감칠 맛 나는 내용을 기대했다가는 충격받기 딱 좋게, 남자 아이들의 성장기는 이럴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성적인 관심과 행동 일색이라 놀라기도 했었다.

 

곧 리뷰를 올릴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리뷰를 올리기 전까진 다 읽은게 아니라는 건 나 만의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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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는 저녁 여섯시에 시작하는 한 라디오 방송을 매일 아침 여덟시에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퇴근 무렵이 마치 출근길 같고,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같은.

지난주 토요일이 하지였지요? 잠깐 밖에 나갔다가 여름이 꽤 가까이 있구나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봄 꽃은 가고, 여름 꽃이 오네요. hnine님 덕분에 여름이 꽤 가까이 다가왔음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

hnine 2019-06-26 04:45   좋아요 1 | URL
어제는 이제 올것이 왔구나 싶게 더웠어요. 몇년 전 부터 여름 나기가 좀 겁나는게 사실이지요. 너무 더워서요.
그래도 피할 수는 없고 덥다 덥다 하면서 또 한 계절 보내야지요.
어떤 방송 들으시는지 알겠는데 저도 저녁 여섯시엔 듣기 힘들더라고요. 그런 방송이 없지요. 그 분위기에, 그런 선곡에. 저도 좋아하는 방송이랍니다.
계획하시는 일들이 차근 차근 잘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답글 쓰고 있어요. 오늘 또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글을 올려주셔서 좋아요 ^^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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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 집 대신 창고가 온가족이 머무는 집이었고 학교 아이들은 그런 루시를 손가락질했다. 부모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가슴에 쌓여있는채 어른이 된 루시 바턴은 마침내 작가로서 성공, 꿈도 못 꾸던 뉴욕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물질적 결핍은 벗어날 수 있었다 쳐도 정신적 결핍은 아마 그러질 못했었나보다. 함께 살지도 않고 아주 친한 관계도 아니었던 엄마를 작가가 이 소설 전반에 함께 등장시키며 루시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엄마와 딸의 관계, 즉 애와 증의 그 묘한 관계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주제로 삼기에는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번역자도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 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226)

그렇다면, 어린 시절 가난과 어려움 속에 살았지만 꿈을 접지 않고 작가로서 성공한 여성 루시 바턴이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라고 봐야할까? 리뷰 쓰기 전에 youtube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고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는 소설 쓸때 플롯(plot)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나 장면에서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잡아내어 구상을 시작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경우엔 나이 들고 몸집 큰 한 여인이 집 앞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일단 쓰기 시작하다보면 플롯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이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쓰기 시작할때 이 인물이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는 것으로 해야겠다고 계획한 적 없다고 한다. 다만 어릴 때 너무 가난하고 부모가 생계 전선에서 바빴기 때문에 혼자 시간을 보내야했던 루시가 좋아했던 것이 책 읽기였으니 나중에 그녀의 직업으로써 작가가 되는 것으로 하면 좋겠구나 하고, 쓰면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제를 꼭 가난했던 여성의 '작가'로서의 성공담으로 볼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주인공 루시의 직업이 작가였기에 혹시 루시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궁금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렇진 않지만 최소한 자기는 소설 중의 루시가 하는 말과 행동의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번역자는 해설에서 루시 바턴 보다는 오히려 소설 중에 나오는 세라 페인이 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일거라고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려 들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이제 겨우 두권 읽은 후라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두권에서 작가는 사건 중심, 서사 중심으로 소설을 쓰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런 저런 소소한 사건을 두루 보여주며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 아닐까. 삶에 대한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과 같을 것이다. 그녀 소설의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렵다는 것은.

 

거의 끝부분에 루시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의 의도,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216쪽)

이렇게 소설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언급한 후에 이어서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누가 등장하든, 누가 관계하든, 주체는 그들이 아니라 내가 되는 삶. 내 이름은 nobody 가 아니라 루시 바턴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런 삶이 꼭 독불장군 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라는 것. 그럴 때마다 꺾이거나 꺾기보다 루시 바턴이, 작가가 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움직였다. (211쪽)

마음을 한군데에 고정시키고 절대불변을 고수하기 보다는 양가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그 댓가가 없지 않으니.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생각은, 이 소설에서 뽑아낸, 나만의 뜬금없는 힌트라고 할까.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219쪽)

이 마지막 문장, 짧은 이 문장이 내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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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6-19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마음이 아니라 먼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맞는 것 같아요 내가 먼저 움직여지지 않는데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건 또 하나의 강제이고 강요인 듯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26   좋아요 1 | URL
주관을 가지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요즘 같이 가치관과 해석이 다양한 시대에 부러지지 않고 살려면 (!) 제 마음을 좀 말랑말랑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인가봐요. 물론 감동만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요. ^ ^

목나무 2019-06-1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은미 작가가 <어제는 봄> 집필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래서 궁금하던 차에 에이치나인님 글보니 저도 곧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
저도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30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께서 최은미 작가 만나고 오셔서 쓰신 페이퍼 물론 읽었지요. 두번 읽었어요 ^^
<어제는 봄>과 <내 이름을 루시 바턴>두 소설 모두 읽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에~~ ^^ 둘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둘 다 놓치기 싫은 작품이라는 것도요. ^^

뚜유 2019-06-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리뷰를 쓰고는 싶은데 섣불리 못 쓰겠더라고요.
잘 읽고 갑니다

hnine 2019-06-19 23:07   좋아요 0 | URL
섣불리 리뷰를 못쓰셨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었고요.
그래서 작가의 인터뷰 자료들을 찾아본것인데, 그렇게 작가가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나니 조금 알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완전히 알게 된건 아니지만요.
뚜유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
 

 

 

 

오랜만에 만들어본 당근케이크 옆에 두고

찍어놓은 사진들 훑어 본다.

사람 사진 보다 사람 없는 사진들이 더 많다.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알 품고 있는 새, 꽃 피기 시작한 노각나무, 작아도 색깔 때문에 금방 눈에 띄는 산딸기, 이름 모를 나방, 전방 주시하고 있는 까치, 아직 애기인 초록색 감.

 

 

 

 

 

 

 

 

 

 

 

 

 

 

 

 

 

 

 

 

 

 

 

 

 

 

 

 

 

 

 

 

 

 

 

 

 

 

 

 

 

 

 

 

 

 

 

 

 

 

 

 

 

 

 

 

 

 

 

 

 

 

 

 

 

 

 

 

 

 

 

 

 

 

 

 

 

 

 

 

 

 

 

 

 

 

 

 

 

 

 

 

 

 

 

 

 

 

 

 

 

원래 당근 케이크에 들어가야하는 크림 치즈 프로스팅 생략.

설탕도 조금 줄였다.

호두 같은 견과류도 넣어야 하는데 그것도 뺏다.

집에서 먹을 거니까.

귀찮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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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6-18 22:36   좋아요 1 | URL
비주얼이냐, 건강이냐. 저는 비주얼 포기하고 건강을 선택했지요 ^^
아주 소박하고 꾸밈없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케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