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는 시간 - "삶이 힘드냐고 일상이 물었다."
김혜련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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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고 보는 타인의 삶은 평범하고 순탄해보인다.

그러나 타인이 아닌 지인의 관계가 되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편하기만 한 삶은 없나보다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일상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래보였을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50쯤 되는 나이가 되면 사는 것이 타성에 붙을지언정 사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과 갈등은 없을 거라고. 해결되었든지 포기했든지,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안그랬다. 방향만 다를 뿐이지 사는 건 여전히 모르겠고 어렵고 확신이 없었다. 앞으로 남은 날이 더 줄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젊을 때보다 더 조급해지고 막막했다.

글쓴이는 산다는게 고통스러웠다.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 과거를 들여다보고 내 발이 닿고 있지 않은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고 갈망했다. 지금 여기와 다른 그 평화로운 곳은 어디이고, 그곳에 다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묻고 찾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은 곳이 어디일까. 이 책의 제목이 말해준다.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 하고 산책하는, 그 사소해보이는 일상 속에 평화가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온 '한 줌의 평화'앞에서 그것조차 누릴 수 없는 몸과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불안과 긴장에 길들여져 있다. 피해의식과 분노에 익숙하고 늘 초조하고 조급증에 시달린다. 자학과 갈등, 무기력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 삶이 전쟁터니 언제나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로 교감 신경만이 일방적으로 설쳐댄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지 못해 일탈한다.

일탈의 자유, 잠시 오는 해방감의 단맛을 보기 위해 일상을 파괴한다.

평화는 낯선 무엇이다. 전쟁에 길든 몸과 마음은 평화를 지루함이나 권태, 우울로 인식한다.

나의 쓸쓸함과 우울은 평화를 살아보지 못한 자가 치러야 할 당연한 삶의 몫이었다. (73, 74쪽)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불쌍한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거나, 욕망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면 권태로움에 못견뎌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그토록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평화에 이르면 그것을 지루함, 권태, 우울이라며 낯설어하고 벗어나고자 한다.

존재는 사유에 우선한다. 왜 사느냐는 물음 이전에 존재가 있었다. 그러니까 살아야 하는 것은 그 어느 사유의 결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넌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는 욕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로부터 듣고 자라고, 엄마로부터 안정이 아닌 불안을 배우며 자란 어린 시절은 글쓴이에게 늘 자기 결핍의 원천이었다. 그 지독한 자기 결핍이 내 안의 아귀가 되어 내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것은 어떤 명상 프로그램이나 수행 과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마음의 문제 뿐 아니라 몸에도 이상이 왔다. 그래서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내 몸을 위하고, 내 몸을 위해 밥을 짓고, 어떻게 하는 것이 몸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고 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상을 살기가 왜 그리 어려웠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단지 일상이 지루하고 단순 반복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몸의 감각을 잃은 것은 일상을 잃은 것이다.

밥하고 청소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감각의 리듬, 삶의 느낌을 잃은 것이다.

나는 일상을 모르는 사람, 일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 몸의 움직임을 통해 삶의 즐거움과 삶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일상의 즐거움과 든든함은 없고 일상의 부정적 측면만 있는 사람. 그런 기쁨 없이 고통과 무거움, 견뎌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늘 진지하기만 하고 재미없는 삶, 쓸데없이 처절한 삶,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무언지 모르는 삶. 몸을 통해 바라본 나의 삶이었다. (113, 114쪽)

 

저자는 몸의 힘을 보여주는 사람들로 일흔, 여든이 넘은 할머니들을 들었다. 이분들의 힘은 어떤 이론이나 관념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밥해 먹고 농사짓고 자식 기르는 그 일상이 전부인 사람들의 힘, 몸의 힘인 것이다.

일상의 힘. 슬프지만 매일매일 몸을 일으키고 밥을 챙겨먹는다.

 

좌절은 관념적 지식인들에게나 있는 거지 '밀양 할매들'같은 민초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다. 힘들지만 그냥 사는 거다. 밥해 먹다 나가 싸우고 또 밭 매고, 싸우다 울고, 울다가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해 나고, 비 오고, 바람이 불듯이 몸으로 사는 거다. '몸에 쌓인 힘'은 난세를 주파해가는 힘이 된다. (131쪽)

 

천지불인 (天地不仁). 자연은 내 감정이나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이 어떠하든 자연은 제 갈 길을 간다. 자연이 나와 무관하게 변함없다는 사실은 든든하다.

내가 아무리 고통과 슬픔 속에 있어도 자연은 그토록 생기롭다는 사실이 절대적 위로가 된다. 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 인간의 조건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209쪽)

 

세상 모든 것을 볼때 자기 결핍이라는 눈을 통해서 볼때 삶은 괴로움 자체였다. 지독한 자기결핍이 사라지자 아픔이나 분노를 투사해 세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 세상 그대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을 보며 으로 사는 것. 저자는 그렇게 평화를 찾는다. 인간 관계에 갇혀 생각으로 사는 대신 말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생명을 이어가려는 대전제를 쫓는다. 이어갈까 끝낼까 고민하지 않는다. 인간도 본성적으로 그렇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지리산에서 장마철이면 거대한 나무들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오곤 했다. 그 나무들이 계곡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웠다. 뿌리 뽑힌 나무가 잎을 틔우고, 다음해 봄에 꽃을 피웠다.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을 생명으로 피워내는 힘, 뿌리가 뽑히고 쓰러져 누웠어도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생명인 그것. 그것이 생명의 '근원적 명랑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노숙을 하며 빌어먹어도 한 끼의 밥을 먹게 하는 힘, 따뜻한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햇볕을 향해 저절로 몸을 돌리는 그 힘 말이다. (241쪽)

 

저자가 그토록 고민하고 수행하며 찾고자 했던 삶의 의미는 저 너머 밖에 있지 않았다.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를 개는 평범한 일상 자체였다.

 

온갖 관념의 세계를 헤맨 끝에 만난 게 '아무것도 아닌' 세계라는 역설. 그 역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직관. 그런 것이 글을 시작하게 했다. 그러니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관념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313쪽)

 

저자의 후기이자 이 책의 요점이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거든,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거든, 멀리서 답을 구하지 말고 내 일상을 그대로 살아가기를 계속 할 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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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9-19 05:03   좋아요 0 | URL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그런 소리를 퍼부어야 했던 그 엄마도 그 소리를 듣고 자란 저자의 삶 만큼이나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자의 자기 결핍은 보통 사람의 경우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수가 많을 것 같은데 저자의 경우는 거기서 자유로와질수 있어서 다행이어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댓가로 치르긴 했지만요.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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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재미있는 글일거라는건 짐작하고 읽었다. 김애란인데.

역시 재치있고 매끄러운 문장들.

대중적인 주제들을 대중적이지 않게, 작가의 예리한 어휘로 표현하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누구도 한번쯤 생각해봤으나 뭐라고 콕 집어 말로 표현되지 못했거나 아주 평범한 단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던 것들을 딱 맞는 단어와 비유로 버무려 읽는 사람의 공감을 마구 불러 일으키기.

그동안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자연히 생겨났을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에 있어서 정도를 넘지 않는 것 쯤은 아는 작가, 영리하고 분별력 있는 작가이다.

한국 문학은 왜 그렇게 다 칙칙한가. 그건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나보다. 김애란의 소설들이 다른 이들의 소설과 구별되는 점 중 하나라면 칙칙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데뷔 초, 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재치에 우쭐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152쪽)

지루한 사람, 무거운 사람이고 싶지 않은 작가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작가라고 해서 진지함이 지나쳐 늘 무겁고 심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구입한 헌책에 쓰여 있는 황진구라는 이름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이야기까지 지어내보다가 급기야는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서 바꿔달라고 한다. 누구냐는 물음에 고대 후배라고 둘러대기를 서슴치 않는 대목을 읽으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이래서 소설가가 된 것일까.

마치 좋아하는 작가의 일기장을, 죄책감없이 넘겨가며 읽는 느낌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것이 딱 일기장 정도였다는 것일텐데, 무거운 주제의 에세이를 기대하면 안된다. 작가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라고.

또하나. 소설처럼 집중된 노력과 시간에 의해 탄생한 책이 아니라 그동안 여기 저기 부탁받고 써온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라는 것도 조금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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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9-09-14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작가 글은 거의 읽지 않는 게 어느덧 습관처럼 되었는데 그래도 김애란 작가 글은 모두 찾아서 읽는 편입니다. 오랜만에 에세이집이 나왔다고 해서 좋아해서 읽다가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좋아하며 읽다가 어느 순간 시들해져서 뒷부분에 실린 글은 거의 훑듯 읽었어요. 저도 조금 많이 아쉽더라구요.

보물선 2019-09-14 20:07   좋아요 1 | URL
나두 딱 중간까지!

hnine 2019-09-15 22:32   좋아요 1 | URL
그래서 소설가가 산문집을 낼때는 소설가 자신도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네요. 그런 것 보면 하루키 같은 사람은 소설과 에세이 모두 성공을 거둔 사람인 셈이고요.
문장력과 표현력이 좋다는 것에 더해 좋은 산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통찰력과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니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가 김애란이라는 소설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의미도 되겠고요.
 
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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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관련된 일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또한 카톨릭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어느 특정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건축에 관심이 많고 종교에도 관심이 있다.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인간의 역사에 미친 영향,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가서 빌리러 갔던 다른 책보다 먼저 눈에 띠는 이 책부터 손에 넣었다. 검은 색의 두툼한 책.

건축가 승효상. 알고는 있지만 그가 쓴 책은 아직 한번도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언제: 2018년 6월 26일부터 7월 6일까지, 

누구와: 승효상의 인솔하에 동숭학당 조직원들 스물 여섯 명

어디를: 로마에서 파리까지 2,500여 km에 걸쳐 수도원 순례 루트를 따른다.

 

동숭학당은 2014년 승효상이 만든 강좌 형식의 모임이다. 건축, 미술, 문학, 영화, 음악, 공연, 사회, 역사, 과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주제를 정하고 적합한 강사를 선정해 1년 단위의 강좌로 운영된다. 주제에 맞는 해외 장소를 택해 열흘 가량 여름 기행도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2014년 주제는 거주, 2015년 주제는 장소, 2016년 주제는 풍경, 2017년 주제는 기억, 2018년 주제가 공간이었고 이에 맞는 여름 기행으로 수도원 기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임옥상, 공지영 등 이름을 보면 알만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행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을 얻고자 떠나는 것이다. 

힘은 진실로부터 나오며 진실은 늘 현장에 있어 현장에 가는 일인 여행은 그 장소가 가진 진실을 목도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현실로 돌아가 일상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한다. (23쪽)

 

여행스스로 추방당한 자의 순례라고 정의하는 그이다. 모든 걸 객관화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어야 그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진정한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저자는 믿고 있지만 이렇게 그룹으로 가야 하는때가 불가피할 때도 있는 법이다.

여행가기 전에 그가 어떻게 여행을 준비하는지, 막연한 준비가 아니라 얼마나 세부적이고 꼼꼼하게 가는 곳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된 상태로 떠나는지 책의 초입에 나온다. 반성했다. 비행기 티켓 사고 숙소 예약하고 어디 갈지 행선 짜는 것이 준비가 아니었다.

수도원 기행인만큼 로마에서 시작하여 파리에 이르기 까지 들르는 곳은 거의 수도원이고 그 수도원을 숙박 시설로 이용하기도 한다. 유럽에는 이제 수도하는 이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수도원을 숙박 시설로 전용해서 쓰거나 겸용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기도와 노동에 평생을을 바치는 곳 수도원. 광야의 동굴에서 시작되었다는 수도원은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공공 장소에서 교회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 건축 형식의 교회건축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8세기에 설립된 베네딕토파의 생 갈렌 수도원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도면에 근거하여 수도원의 구조에 대해서도 설명해놓았다.

 

수도원에서 가장 핵심적인공간은 네 변을 가진 정원이다. 열주가 있는 회랑, 즉 갤러리가 정원을 둘러싼다. 이 갤러리에 각각 다른 기능의 건물이 접하는데, 한쪽 면에는 성당이 접하고, 성당의 제단과 이어지는 다른 변에는 으레 2층 건물이 붙어 아래층에는 수도원 사무를 보는 공간과 수도 규칙서를 매일 한 장씩 읽는 챕터 룸 (chapter room)이 있고 위층에는 수도사의 숙소가 있다. 숙소는 열린 공간으로 창문마다 개별 침상이 놓이고 그 사이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다. 이렇게 한 방에 여러 수도사가 같이 기거하는 형식의 수도원을 공주 (共住)수도원 이라고 칭한다. 성당의 반대쪽 면에는 식당 (refractory)이 있기 마련이며 나머지 한 변에는 수도원의 물품을 제작하고 공급하는 작업장이 붙는다.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이 네개의 시설이 어떤 수도원이든 가장 핵심적 골격이다. (107쪽)

 

여기 말한 공주 수도원을 '클로이스터 (cloister)' 라고 하는데 '모나스터리 (monastery)'도 수도원이라고 번역되지만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 비로소 이해가 된다. 수도원을 왜 영어로 클로이스터라고도 하고 때로 모나스터리라고도 하는지. 그리고 수도원 건물에 있는 chapter room 이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지.

 

서양 건축의 양식사가 곧 교회 건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건축 기술의 핵심적 문제는 중력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건축의 기본적 목적이 내부 공간을 얻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지붕이 있어야 한다. 중력의 힘 때문에 늘 땅으로 떨어지려 하는 이 지붕을 지지하는 방법에 따라 건축 양식이 바뀐다. 이 양식을 스타일 (style)이라고 부른다. 스타일은 모양이나 장식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르기까지 1만년이 넘게 벽이 지붕을 지지하는 방식이 이용되었다면 고딕 시대에 이르면 이를 일거에 해결하는데 바로 건물의 외벽에 뼈대처럼 나와 있는 버트레스 (buttress)라는 시설물이 내부 기둥과 보 (flying girder)를 연결시켜주어 전체가 기둥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123, 124쪽)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으로 이어진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 바로크 , 로코코, 모더니즘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수도원이 있지만 아마도 하이라이트는 프랑스 르 토로네 수도원롱샹 성당이 아닐까 한다. 롱샹 성당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 유명한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쿠튀리에 신부의 부탁으로 1950년 꼬르뷔지에가 롱샹 성당의 설계를 맡았고 한창 지어지고 있던 중 1953년 쿠튀리에 신부는 이어서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역시 꼬르뷔지에에게 맡기게 되는데 프로방스 소재 르 토로네 수도원을 참조하여 설계해달라고 한다.

쿠튀리에 신부는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부탁하며 '조용하며 많은 사람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말했고, 프로방스의 르 토로네 수도원을 가보고 그곳에 흐르는 정신을 참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343쪽)

이미 세계적 거장이었던 꼬르뷔지에는 르 토로네 수도원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건축을 가리켜 '진실의 건축'이라고 하며 롱샹 성당의 성취를 버리고 원칙과 질서를 다시 끄집어 내어 라 투레트 수도원의 계획안을 제출한다.

 

 

 

 

 

- 경사로에 세워진 라 투레트 수도원 -

 

 

 

저자인 승효상도 라 트레트 수도원의 건축적 가치와 미학에 대해 강조해 마지 않았지만 아마도 범인의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아래의 롱샹 성당일거라는걸 부인하지 않았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며 완성자라고 불렸던 꼬르뷔지에. 기계 미학에 심취하여 직각만이 유일하고 불변한다고 믿었던 그의 건축은 직각의 육면체여야 했었다. 그런 그가 기계 문명이 인간 살육에 지대한 조력자임을 목격하고 직각의 기계를 떠나 원시 동굴 혹은 지중해의 조개처럼 둥글고 휘어진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모더니즘을 창시하기 전인 젊은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직관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지식의 총합'이며 '감정은 기억된 후천적 지식의 발산물'이라는 그의 말처럼 모든 이성의 최종 목적지가 감성일까. 어떻든, 이 롱샹은 그를 교주처럼 따르던 모더니스트에게는 뼈아픈 배반이어서 그의 변절을 통절히 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449쪽)

 

 

 

 

 

 

 

 

 

 

 

 

 

- 롱샹 성당 -

 

 

 

 

 

 

 

 

- 롱샹 성당 내부의 기도실 -

 

 

 

그는 롱샹 성당의 기도실 (↑ 위의 사진) 문을 열고 들어가며 느낀다.

아, 완벽하게 다른 세계 ...도무지 현실이 아니다. (451쪽)

 

어느 새 500여 페이지의 끝장까지 와있었다. 11일 동안의 여정. 내가 실제로 가본 곳은 한 군데도 없는데도 꼬박 이틀 동안 내 손에 있던 이 책을 놓기가 아쉬웠다.

 

이제 이 기행을 끝내는 시간이다. 모두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여행을 마친 사람은 항상 그렇다. 일상의 삶을 살며 알게 모르게 축적된 환상은 거짓이기 쉬워 힘이 없다. 힘은 진실에서 비롯한다. 그 진실은 늘 현장에 있으니, 여행은 이를 마주하는 가장 유효한 기회며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 현실에 복귀할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505쪽)

 

 

건축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설계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수백년 그 자리에 남아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러 오게 만드는 건축물이란 무엇일까.

마지막에 저자는 진리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자기로서는 건축을 수단으로 진리를 찾으려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이 책에서 여러번 한 말을 되새긴다.

현장에 진실이 있다는 말.

앞으로 내 여행의 목적으로 삼기로. 내 여행의 이유로 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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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9-1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에 쓰신 글.

영화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소설이나 산문 그리고 시도 그렇고 결국 진리를 찾고 싶은 마음에 그런 기록들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그 진리란 결국 자신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아닐까도 싶고요. 간단해보이지만, 그 수많은 인류가운데 답에 근접한 사람이 극소수인, 엄청나게 어려운 답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hnine 2019-09-11 19:57   좋아요 0 | URL
Nussbaum님의 이 말씀도 생각거리가 되네요.
성경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다는데, 그 말의 의미도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어요. 신이 정해놓은 진리의 바운더리 안에서 복종하며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진리가 무엇인지 방황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복종과 진리. 상상도 못해본 관계였어요.

서니데이 2019-09-1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추석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명절 보내세요.^^

hnine 2019-09-11 19:57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도요~

stella.K 2019-09-1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읽으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자 인터뷰 보고
읽고 싶었는데...
저자가 말한 무슨 수도원 다큐멘터리 필름이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인데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직접 가 봤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원래 신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건축계의 구도자란 생각이 들어요.
추석 잘 보내시길...^^

hnine 2019-09-12 00:0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그 영화 얘기 이 책에도 나와요.
기독교 가정에서 나고 자라 자연스럽게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더래요. 젊은 시절 방황을 많이 했더라고요.
외곬수 타입은 아닌 것 같은게 사회 여러 방면에 인맥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교류와 친분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카톨릭과 개신교에 대한 의견도 들어가 있고, 자신은 개신교이지만 불교 사상을 빼놓고 자기 건축을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종교간 장벽에 대해 개방적이기도 했어요.
stella님께도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초딩 2019-09-1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 님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hnine 2019-09-12 22:56   좋아요 0 | URL
이제 책상에 앉았네요.
초딩님도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 서재에 자주 와주시는거 감사드려요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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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의 과거, <호모 데우스>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면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21세기와 맞춰서 제목을 정하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21가지는 꽤 많은 항목이다.

<호모 데우스>에서 미래를 지배하는 두 가지 쌍둥이 개념으로 꼽았던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은 이 책에서도 항목 상관없이 공통적인 키워드로 언급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1. 환멸 : 역사의 끝은 연기되었다.

방향감 상실과 임박한 종말에 따른 불안감은 파괴적 기술 혁신의 가속으로 악화된다.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는 공통적으로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지 시험받게 될 것이다. 

 

2. 일 :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땐 일이 없을지도 몰라

인간의 고유 능력이라고 믿고 있는 '직관' 조차도 사실은 반복되는 패턴을 인식하는 패턴인식에 의한 것이고 보면, AI가 그동안 직관이 필요하다고 여겨져온 업무에서도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AI로 대체되고 나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인간은 생산자, 소비자, 착취 대상 그 어느것도 아니라 무관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3. 자유 : 빅데이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개인의 느낌과 자유 선택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로 대체될 것이다.

 

4. 평등 : 데이터를 가진 자가 미래를 차지한다

모든 부와 권력이  데이터를 가진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일 수 있다.

 

5. 공동체 :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없이 잘 연결된 지구상에서 더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이런 불안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이스북 등의 온라인 거인들은 인간을 시청각 동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열 손가락과 화면, 신용카드와 연결된 한 쌍의 눈과 귀를 가진 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인류를 통합하기 위한 결정적인 걸음은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것이다.

 

6. 문명 :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할 큰 도전들은 본질적으로 전 지구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7. 민족주의 : 지구 차원의 문제에는 지구 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

핵전쟁 외에도,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1964년 정치 레이더망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생태학적 붕괴다.

인류 공동의 적은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최선의 촉매제다. 인류는 이제 최소한 그런 적수 셋 - 핵전쟁, 기후변화, 기술적 파괴- 을 앞에 두고 있다.

 

8. 종교 :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기술의 발달과는 별도로 종교적 정체성과 의례에 관한 논쟁이 신기술의 사용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9. 이민 : 더 나은 문화를 찾아서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이론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제는 인류학자, 사회학자, 역사가, 행동경제학자, 그리고 심지어는 뇌과학자들도 인류 문화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지지하는 데이터를 풍부하게 축적해왔다. 그들의 DNA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일은 드물다. 문제는 이들의 문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10. 테러리즘 : 당황하지 말라

국가는 왜 테러범의 도발에 그토록 민감할까?

오늘날 정부는 국내 현안이나 성폭력에 대해서는 테러를 상대할 때보다 부드럽게 대응할 수 있다. 미투 같은 운동이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강간이 정부의 정당성을 약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1. 전쟁 : 인간의 어리석음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정복자들이 활개치던 시대에만 해도 전쟁은 손실은 적고 수익은 큰 사업이었다. 그에 반해 핵무기와 사이버 전쟁은 피해는 막대한 반면 수익은 낮은 전쟁술에 해당한다.

오늘날 주요 경제 자산은 밀밭이나 금광, 심지어 유전도 아닌 기술적, 제도적 지식으로 이뤄져 있다. 전쟁으로 지식을 정복할 수는 없다.

 

12. 겸손 : 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13. 신 :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어떤 사원도 찾아가지 않고 어떤 신도 믿지 않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굳이 신의 이름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가치를 얻을 수 있다.

 

14. 세속주의 : 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여기서 그늘은 실수, 맹점을 뜻하고 세속주의는 다른 말로 현세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조에는 그늘이 있다. 어떤 신조를 따르든지 불가피한 그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는 일어날 리 없다"라는 안일한 확신을 피해야 한다.

 

15. 무지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 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16. 정의 :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극도로 복잡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을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도와 무관하게 잘못된 일에 연루될 수 있다.

 

17. 탈진실 : 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18. 공상과학 소설 : 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매트릭스를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자아를 규정하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에 필요한 생존 기술이 될 수도 있다.

 

19. 교육 :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변한다는 것만큼은 유일하게 확실한 미래의 진실이다.

 

20. 의미 :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우리가 실제로 경허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21. 명상 : 오직 관찰하라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읽그면서 나 같은 범인은 더 나은 오늘이 가능하기는 할까 자꾸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했는데 나는 거기엔 해당하지 않는가보다. 이미 소수 엘리트 층에 지식과 결정권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 위의 내용들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당면한 문제들이니까.

 

부피는 꽤 되어 보이지만 이해하기 어렵게 쓰여 있지 않아서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읽어보길 권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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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9-10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으셨군요!

그의 책 <사피엔스>가 잘 나가다 갑자기 마지막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좀 갸우뚱했는데 그의 인류 3부작 가운데 나머지를 읽으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세월탓인지, 나이탓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건지, 20대보다는 확실히 내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책의 내용은 디스토피아인데 책에서 말하는 어조는 꼭 디스토피아가 아닌, 뭔가 희망적인 느낌을 받게 되네요.
찬반이 많겠지만 저도 이 책은 좀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nine 2019-09-11 04:37   좋아요 1 | URL
앞서 나온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읽고 난 후여서 그런지 이 책은 생각보다 빨리 읽히기도 했고 두 책의 내용이 중복된 것 같기도 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역시 유발 하라리라고 감탄하며 읽었어요. 전 감히 천재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랍니다.
 

 

 

 

 

 

 

 

 

 

 

 

 

 

 

 

 

 

 

 

 

 

 

 

 

 

 

 

 

 

 

 

 

 

 

 

 

 

 

 

 

 

 

 

 

 

 

 

 

 

 

 

 

 

 

 

 

 

 

 

 

 

 

 

 

 

 

 

 

 

 

 

 

 

 

 

 

 

 

 

 

 

 

 

 

 

 

 

 

 

 

 

 

 

 

 

 

 

 

 

 

 

 

 

 

 

 

 

 

 

 

 

 

 

 

 

 

전라남도 담양

 

 

 

국수거리에서 4,000원짜리 국수를 먹고,

해동문화예술촌, 죽녹원, 담빛창고라는 갤러리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걷는 길, 아름드리 나무들은 허리에 이름표를 차고 있었고,

담빛창고라는 갤러리겸 카페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고 있었다.

'네번 접힌 미래'라는 제목으로 네명의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바깥 마당의 설치물은 마종일 작가의 작품으로 대나무에 채색을 한 것이고, 실내 갤러리의 네모반듯 형태를 벗어난 캔버스그림은 엘리자베스 윈튼의 작품이다.

 

최소한 어제 들르며 본 곳들에서 받은 인상은 담양군에서 이모 저모로 관리를 잘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담양.

깨끗하고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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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9-0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녹원, 언젠가 딱 저자리쯤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 더운 날씨였는데 꽤나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 가을이 왔지만 아직은 조금 더운데, 쭉쭉 뻗은 대나무 보니 시원하게 느껴지네요 !

hnine 2019-09-03 00:27   좋아요 1 | URL
저도 사진으로는 많이 보았는데 가본건 어제가 처음이었어요.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멋있을 것 같은 풍경이더군요. 어제는 선선했지만 더운 날이라도 대나무가 우거져서 뜨거운 햇빛을 많이 막아주었을 것 같네요.
대나무 숲을 걷는 것도 좋았고 오랜만에 시멘트가 아닌 흙을 밟는 것도 좋았고 낮은 담장과 한적한 마을길을 만나는 것도 좋았답니다.
언젠가 또 가보시겠지요? 저도 또 가볼 것 같아요. 이번에 메타스퀘이어와 소쇄원은 못가봤거든요.

2019-09-02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3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9-09-02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7월 초 가족과 함께 담양 다녀왔었는데 죽녹원 사진을 보니 반갑네요^^
저흰 10년 전 아이들 어릴 때 가보고 올 해 두 번째로 갔었는데 그동안 많이 변해 있어 좀 놀랐습니다.
메타쉐콰이어 나무 숲길도 입장료를 받고 있어 놀랐지만 더 깨끗하고 예쁘게 가꿔진 듯 하여 나름 괜찮더라구요!!

담빛창고는 알았음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hnine 2019-09-03 00:38   좋아요 1 | URL
10년만에 가셨으면 많은 변화가 있었겠네요.
개발이 지금보다 덜 되었을때는 그대로의 멋이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번이 첫 방문이었는데 비교적 예전 흔적을 보존하면서 개발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것 같아 안심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담빛창고는 그냥 옛날 창고 건물인데 붉은 벽돌 벽도 요즘은 흔치 않은지라 외관부터 정이 갔어요.
이층 건물로 카페와 갤러리,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담빛이라는 이름도 예쁘지요?

순오기 2019-09-16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양 다녀가셨네요~^^
담양국수는 삶은달걀도 같이 먹어야 되는데~^^

hnine 2019-09-17 04:45   좋아요 0 | URL
예, 저는 한개, 남편은 두개 먹었어요 ^^
안그래도 담양 갔을때 명옥헌 가는 길 표지판 보고서 순오기님 생각했어요. 그날은 못갔지만 언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아참, 다린이는 올해 대학 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