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법칙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법칙이라고 하니 딱딱하게 들릴지 몰라도 쉽게 말하면 어떤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즉

규칙적이고 반복적이어서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서 이것은 물질에도 존재하지만 생명현상에도 존재한다.

이렇게 말로 하면 과학이 아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보편성을 증명할 수 있을때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자손이 부모 세대를 닮는 현상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일어난다는 것, 그래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도 미리 그 형질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아내었고 그 규칙성을 숫자의 형태로 구체화하여 발표한 사람, 오스트리아의 수도사 그레고르 멘델이다. (그 당시는 오스트리아였으나 지금은 체코땅 브르노 -Brno- 이다).

 

막연하게 꿈꾸고 있다가 체코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게 된 마지막 방아쇠는 우연히 보고 있던 EBS 교육방송이었다. 과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마침 멘델에 대한 것을 하는 날이었나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학자 멘델. 이유는, 유전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애정도 있지만 멘델이 걸어온 평탄치 않은 길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넉넉치 않은 가정, 처음부터 탄탄대로 과학 교육의 혜택을 받을만큼 눈에 띄지 못했던 사람. 오히려 시험에 자꾸 떨어지자 시험 노이로제까지 있었던 심약한 사람. 집안에선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돌볼 책임까지 있었던 사람.

당시 교육의 기능까지 일부 담당했던 수도원의 기능에 따라 수도사가 되면 성직자로 봉직하면서 원하던 공부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판의 돌파구로 들어간 수도원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수도원 한 구석에서 식물을 재배해가며 관찰하고 기록하며 혼자 수십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발견한,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결과들을 정리하여 학회지에 발표했으나 아무도 눈여겨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멘델은 자신이 평생 해온 일이 훗날 전 세계에 어떤 큰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채로 눈을 감았다.

 

갈수록 돈이 되는 연구, 상업성이 있는 프로젝트, 결과 중심의 연구에 치우쳐가는 현대 과학의 트렌드를 보면서 (물론 모두 그렇진 않다) 멘델의 저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끌고간 연구를 본받고 싶었다. 과학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저런 마인드여야 한다고.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더라도 저런 순수한 마음이 포기하지 않는 길잡이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과학자가 비단 멘델 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 당시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TV에서는 마침 멘델이 살고 일하던 수도원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가서 직접 봐야겠다!" 불현듯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날로 체코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게 되었다.

 

그렇게 떠난 체코 여행이었다. 그런데 왜 브르노 가는 일정을 하필 여행 마지막 날로 잡았던 것일까. 숙소가 있던 프라하에서 브르노까지는 기차로 약 3시간 거리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트램을 갈아타면서프라하 중앙역까지 가서, 프라하 중앙역에서 브르노행 기차를 탔다.

브르노는 프라하 다음으로 체코 제2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는 곳인데, 나는 멘델이 일하던 수도원 이외엔 어디에도 관심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브르노는 프라하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대학 도시라서 그런지 어딘가 더 활기 있고 젊은 도시 느낌이랄까. 역시 시내를 가로질러 다니는 트램.

 

 

 

 

 

 

 

St. Thomas Abbey 라고 구글맵에 치고 찾아갔는데 정작 도착한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사진으로 본 그 수도원 모습이 아니었다 (↓). 하얀 벽의 그야말로 보통 보는 성당의 형태를 한 건물이었고, 멘델이 있었다던 그 붉은 벽돌의 수도원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았다. 멘델이 있던 그 수도원은 지금은 Mendel Museum으로 아예 이름이 바뀌어 그 명칭으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10분 정도 갔더니 거기에 내가 찾던 그 붉은 벽돌의 수도원이 있는 것이다. 멘델이 수도사로 있었고 그가 완두를 재배해가며 실험을 했던 정원이 있는 그 수도원이다 (↓).

 

 

 

 

 

 

반가운 마음이 가시기도 전, 어째 이상하다. 사람들도 없고 분위기가 썰렁해서 보니 내가 간 월요일이 하필 휴관일.

 

 

 

 

 

 

 

 

 

아, 내가 왜 체코엘 왔는데.

그때부터 내 입이 댓발은 나왔지만 누구를 탓하랴. 미리 그 정도 정보도 없이 간 내가 모자랐지.

 

멘델이 실험하던 정원과 기념관엔 들어갈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수도원 둘레만 돌아보았다.

 

 

 

 

 

 

 

 

 

 

 

아직도 낯설다. 영어가 맨 앞이 아니라 체코어 설명이 맨 앞에 나오는 모든 안내판. 독일어까지 설명이 있는 경우엔 심지어 독일어 다음, 맨 끝이 영어이다.

 

 

 

 

 

익숙한 저 그림.

 

 

 

담쟁이 덩굴로 덮인 위의 저 건물은 Mendel's Orangery인데 이를테면 멘델이 연구실로도 쓰고 손님도 맞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난로, 책상, 접이식 테이블, 의자, 그림 등이 있다고 설명에 나와있었다.

 

아래 사진은 예전의 모습이다.

 

 

 

 

멘델은 순전히 노력형 인물이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날 돌아보면서 여러가지 기록과 포스터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노력도 했지만 이 사람 역시 영재 기질이 다분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전학 뿐 아니라 과학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 알아주지도 않는 연구를 평생 해온, 그야말로 타고난 학자 타입이었던 것 같다.

아래 기록은 그의 기상학자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손글씨 기록인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 쓰듯이 기록을 했다고 한다. 단정한 손글씨.

 

 

 

 

 

 

멘델 박물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으니 시간이 남아 브르노의 다른 곳을 가봐도 좋았을텐데, 실망감이 커서 그냥 프라하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겨우 오후 2시 7분.

 

 

 

Perseverance and immense dilligence in whatever he did helped him achieve extraordinary results in a number of areas.

 

멘델에 대한 안내글 중 일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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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8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8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날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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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촉망받던 건축가였으나 정작 기대만큼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무기력함을 느껴가는 아버지 엘슨. 결혼과 함께 육아과 살림으로 자기의 커리어를 맘껏 펼져보지 못하고 보낸 30년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제안한 엄마 케이던스. 시인으로서의 재질이 있음에도 한번도 자기의 능력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노력을 해본적 없고 낮에는 커피샵에서 일하고, 밤에는 파티에 참석하는게 일상인 게이 아들 리차드. 집을 떠나 대학에 다니고 있다가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어쩌면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며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딸 클로이. 이 네명으로 구성된 가정이 있다. 아버지는 와중에 젊은 여자를 만나 새로이 사귀고 있는 중이고, 엄마 역시 새로운 상대방을 만나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이들 부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동성연애자임을 알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은 아버지를 절대 용서 할 수 없어 아들은 아버지와 남남 같은 사이가 되어 있고, 학교에서 정학당하게 된 그 사건 이후 남자 친구와 가출하여 행방을 알수 없는 딸의 문제를 두고 엘슨과 케이던스는 이혼을 했음에도 외면하고 지낼 수만 없는 상태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힘을 모아 어떤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갈등만 깊어가는 답답한 상황이다. 이 가정의 미래는 어찌 될것인가.

가족 구성원 각각의 문제에 더해서 500여쪽이 되는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중심 사건은 역시 딸 끌로이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족을 묶어주고 있는 유일한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끌로이는 정확히 어떤 사건에 어떻게 연루된 것일까. 학교에서, 혹은 법정에서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인가. 그녀는 과연 이민자 출신 남자친구와 어디까지 함께 할 것인가. 이에 따른 가족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 궁금해하며 끝까지 읽어가게 된다.

장편 소설이지만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작가 앤드류 포터의 작가로서의 능력 덕이고, 번역자도 한몫 했으리라 본다. 읽으면서 번역본을 읽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 못하고 읽을 수 있었다.

독창성이라든가 작품 고유의 메시지가 있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읽고난 후에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던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크게 두드러지다고 보여지지 않아서 별 세개로 마치려고 하다가, 내용의 흐름이 매끄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하는 재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장편 소설로 출판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건은 갖추었다고 보여, 또한 재미있게 읽어놓고 그러긴 미안하지 않은가 생각하여 별 네개로 올려놓았다. 의미없는 행동이지만 이런 가늠해보는 것도 리뷰 쓰며 갖는 소소한 행복이 아닐까.

옮겨 적어 놓고 싶은 페이지가 있는데 (538쪽), 결말 부분이라서 옮겨놓으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모두 위기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가족들. 결말로 가면서 나름의 방식대로 그 위기의 시기를 넘기도록 시간은 그들을 어딘가로 데려다 놓았다. 좋아보이지도 나빠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시기를 '넘겼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언제 그런 위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시기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days 와 days 사이, In between days. 이 소설의 원제이다.

쉽게 행복과 불행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고, 행복한 삶, 불행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끝까지 가봐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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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12-22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써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닌 올리신 글처럼 작더라도 의미를 찾는, 혹은 의미가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이 있네요.

요즘은 영화, 책, 삶 모두 조금 멀리서 보고 있는데 마지막 문단처럼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기를 쓰니 어제의 일이 또 며칠 후 비슷하게 일어나고 오늘의 일이 몇 년 전 어떤 일과 연관이 있고.

뭐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과 나에게 일어나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방식을 잘 관찰해야겠다 생각을 해 보는 밤입니다.

hnine 2019-12-23 05:28   좋아요 0 | URL
in between days 라는 말의 뜻을 한참 생각했어요.
순탄한 삶 사이에 거치는 힘든 고비 같은 시기를 표현한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번역한 제목은 ˝어떤 날들˝이라는 평범한 제목이 되어버렸지만 그래서 더 원제목이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서있는 곳만 보고 전체를 다 본 것 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고요.
단편 모음집 하나로 확! 뜬 작가인데, 뒤이서 장편을 냈어요. 다음 작품은 단편이 될까 장편이 될까 은근히 기다려지네요. 전작인 단편 모음집이 더 좋았다는 리뷰가 많던데, 장편도 잘 쓰는 것 같아서요.

서니데이 2019-12-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hnine 2019-12-25 04:5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실버스타 스탤론 주연의 '데몰리션 맨'과는 다른 영화)





데몰리션 Demolition (2015, 미국)


  • 감독: 장 마크 발레
  • 주연: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 왓츠
  • 내가 주는 평점: ★★★★★









(사진 출처: Daum 영화)








(사진 출처: Daum 영화)










(사진 출처: Daum 영화)







가족중 누군가를 잃게 되면 잃은 직후 허무함과 슬픔의 정도가 가장 컸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옅어질 줄 알았는데 경험해본 바로는 그게 아니었다. 막상 그 사람을 보낸 직후엔 뭐가 뭔지 실감이 안되고 그 사람이 없는 상황에 적응이 안되어 무슨 감정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가, 일상 속으로 돌아와 어찌어찌 지내던 중 불현듯 그 사람의 부재가 피부로 느껴질 때가 오는데 바로 그때부터인것 같다. 그 사람이 없는 현실에 적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할 때.


아내와 함께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가 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운전하던 아내는 죽고 옆자리에 타고 있던 데이비스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멀쩡하게 살아남는다. 사랑했던 아내를 잃었는데도 데이비스는 바로 직장에 복귀하여 일을 하는 등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무 슬픔도 못느끼는 것처럼 일상을 계속해나가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감정을 알수가 없다. 

'정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것일까?'


아내가 마지막 순간을 보낸 병원에서, 자동판매기 고장으로 돈만 먹고 물건을 내놓지 않는 일이 생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 일에 데이비스는 자동판매기 회사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이것이 아마도 감정 표현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항의 편지에 대한 답으로 새벽 2시에 자판기 회사 고객센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계기로 고객센터 여자와 직접 만나게 된다. 그여자 캐런, 그리고 그녀의 십대 아들 크리스와 만나 아무 생각없이 자기 얘기를 털어놓게 된 데이비스는 비로소 출근도 안하고 거리를 헤매다니고 막노동판에 달려들어 잘 알지도 못하는 노동일을 하다가 다치는가 하면, 뭔가를 고치려면 다 분해하여 중요한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며 부수는 도구를 사다가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다 때려부수기도 한다 (→물리적인 의미의 demolition). 


다 때려부수어 남겨진 것은 물건의 잔해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 


여기에 줄거리를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단순히 아내를 잃은 후 남자의 애통함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살면서 파괴, 파탄의 순간을 맞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파멸까지 몰고갈 일은 아니기도 하고, 파멸에 가까운 결과로 이끄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까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에겐 그럼 무기력하게 당하고 파괴되는 길 밖에 없는 것일까?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나서 나의 삶이 산산조각 난 것 처럼 보일지라도, 부서진 조각 더미를 딛고 결국은 다시 일어나는 것. 극복하고 내 삶을 계속해나가는 것.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닐까. 계속 노력해야 하는.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에서 다시 떨어져내릴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위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말이다. 돌을 굴려올리는 시지프스의 삶을 형벌이라 보아야만 할까? 돌을 밀어올리면서 형벌, 운명에 대한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시지프스는 끊임없이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돌을 제 자리에 되돌려놓는 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 행위에 형벌 이상의 어떤 의미는 없는 것일까?' 같은. 


파멸, 파괴가 끝이 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극복하려는 몸부림과 노력으로 채워가는 삶을 수행해나가는 것이, 옳은지 어떤지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최소한 그렇게 삶을 계속해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겪는 과정을 보았다.


영화 중간에 느닷없이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쇼팽의 녹턴은 또 어떤가. 느리고 섬세한 영화의 또다른 OST도 다시 들어야한다.


슬픈 영화이다. 아내를 잃는 사건 때문이 아니다.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힘겹게 결국 일어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슬프고 또 고맙다.





"LIFE: Some disassembly requ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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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12-1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보고 슬픔의 자각과 표현은 사람마다 다르구나, 다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ost중 warmest regards란 노래가 너무 좋아 한동안 그 노래만 듣고다녔어요.
이 리뷰보니 간만에 이 영화 다시 보고싶어지네요.

hnine 2019-12-12 21:42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도 이 영화 보셨군요.
말씀하신 warmest regards도 찾아서 들어봤어요. 일단 warmest regards라는 말이 참 좋네요. 기억해놓았다가 저도 써보고 싶을 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detachment라는 영화를 네플릭스에서 보고났더니 계속 비슷한 영화를 추천해주는데, 저와 코드가 맞아서 추천해주는대로 잘 보고 있답니다. 이 영화 다시보시면 또 어떨까요?
혹시 다시보시게 되면 데이빗이 집으로 찾아온 카렌에게 그릴드치즈를 권하며 멋적게 웃는 장면을 한번 보아주세요. 매력적! ^^

프레이야 2019-12-2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놓친 영화네요. 바로 찾아 봐야겠어요. 좋은 영화 소개해 주셔서 고맙구요.
나인 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주인공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군요.
겨울날씨답게 싸한 날이에요.
감기조심하시구요.

hnine 2019-12-21 12:56   좋아요 1 | URL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은 어떤 관점으로 보실지 궁금해요. 한 인간의 일상이 붕괴되는 과정이 상영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저는 마지막 몇 분에서 결론을 찾고 싶었어요. disassembly 와 reassembly 를 왔다 갔다하며 사는게 인생이 아닐까요.
새로운 책 출간을 축하드려요. 또 하나의 자식을 낳은 셈이라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나 뿌듯하세요.

프레이야 2019-12-21 13:52   좋아요 0 | URL
그럼요 그렇구말구요. 그 과정이 우리 삶인 것이겠지요. 축하 감사드려요. 세번째 아이 출산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또 느끼는 점들도 있고 그렇게 또 하나의 마디를 긋고 한발짝 가볍게 나아가려구요. 나인님 마음에 늘 평안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중 죽음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침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제 밤 눈 감고 잠이 든 이후로 다시 살아있음을 깨닫는 첫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그렇다. 이 책의 저자가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근거는 죽음을 적어도 두가지 종류로 보기 때문이다.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고 했다. 육체적 죽음은 아직 맞지 않았을지라도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은 상태, 즉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를 '사라지는 중'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죽음을 개인 차원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사회, 국가, 공동체, 제도, 사상 등에도 적용하였다. 개인의 육체는 살아있을지라도 개인이 속한 사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죽음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은 계속된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23쪽)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잠깐 기분 좋음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새해 목표로, 인생 목표로 계획하고 바라게 되면 그 덧없음을 깨닫고 났을때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게 할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독특하나 공감 못할 바도 아니다. 아니, 내가 말로 표현 못하던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우리가 에세이를 읽는 목적을 이렇게 달성시켜주고 있다.

<위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다른 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된 계기가 된 일에 대해 썼는데, 처음으로 논문 심사를 받던 날, '해탈에 재차 실패한 부처 지망생들처럼' (이 표현을 보시라) 앉아 있던 심사를 맡은 교수들의 첫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자, 자네 논문을 한번 간략하게 요약해보게."

요약이 끝나자 몇 가지 질의응답이 오가기 시작했고, 난 곧 깨달았다. 이 선생님들께서 내 논문을 읽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선생이 논문을 채 다 읽지도 않고 심사를 하려 드는 것은 학생이 논문을 채 다 쓰지도 않고 심사를 받으려 드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웃는 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국권 피탈의 순간에도 시간은 유유히 흘렀던 것처럼. 나는 목례를 하고 걸어 나왔고 마침내 논문은 심사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날의 일은 오랫동안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130쪽)

'아무튼 논문은 통과했으니' 라고 안심하기 보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수치스럽고 분노를 일으키는 기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을 더는 삼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다른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에 안주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이 책을 읽기 전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저자를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한 글이 있었나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지난 해 인터넷과 SNS에서 유명해진 칼럼이라고 한다. 이 책에도 실려있어 읽어보니 이 책의 다른 글들에 비해 특별히 더 튀는 편도 아니다.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 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61쪽)

저자의 글쓰는 공력이 벌써부터 평범한 에세이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은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경력으로도 짐작되거니와 실제로 이 책에 실려있는 그의 영화평론 글들을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 깨달음은 깨달은 자를 한층 더 좌절케 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그는 햄릿처럼 자기자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인식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오한 통찰에 근거하여 행동의 불가능성을 확인한 이에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재량하여 성취해나가는 기획자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인생의 심오한 인식에 이른 자는 더 이상 행동할 수 없다. 성격의 우유부단함이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는 자는 행동하지 않고, 모르는 자는 돌진한다. 이것이 인생 아니던가? (296, 300쪽, 영화 '고스트독' 평론 중에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위의 인용문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제일 오래 마음에 남을 문장 같다. 행복을  목표로 해서 사는 것의 모순,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면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는 모순. 죽음을 생각하여 살 힘을 얻는다는 모순. 모순이 진리가 되는, 이 또한 모순이라고 해야할까?

뭐니뭐니 해도 극점은 전도연과 짜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켜 쓴 '책이 나오기까지'라는 후기 아닐까?

사회과학 교수로서 인문과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김민정 시인과의 인터뷰를 보면 <논어>를 새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더니 얼마전 새로운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전 중의 고전인데,  나와있는 여러 판본을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새로이 번역할 생각을 했다니, 누가 시켜서 할 일은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양분된 의견 중 한쪽을 택하고, 일상적으로 떠먹여주는 무기력에 안주하여 살던 중 이런 논객들의 튀는 글을 읽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즐거운데서 그쳐야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무거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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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2-1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는~. 이런 책이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nine 2019-12-19 15:08   좋아요 1 | URL
이미 많은 분들이 읽으셨고 저는 늦게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요.
물질은 다양화되어가는데 인간의 사고방식은 왜 획일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심해져가고요. 이분의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참 자신있고 소신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다 읽을 무렵엔 자신있음이 곧 자유로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고를 바라보는 시선의 자유로움이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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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단편이라 시작부터 반가운 마음이었다. 저자 앤드루 포터는 데뷔부터 단편집으로 시작한 작가 아닌가. 1972년 미국 태생. 2008년 36세 되던 해 데뷔작으로 발표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그는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 출간된 책이 우리 나라에선 2011년에 번역본으로 나온바 있고 올해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으로 재출간 되었다.

모두 열편이 단편을 모았는데 책의 제목이 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이중 한편이다.

 

구멍, 친구의 죽음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십이년전 일을 기억하며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양심의 가책을 담아 매번 조금씩 다르게 각색된 악몽을 꾸며 괴로와하지만 막상 죽은 친구의 형으로부터 그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쓴 답장을 부치지 못한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는 것은 법도, 신도 아니고 내 마음속 양심의 잣대이다. 극히 주관적이면서 솔직한.

코요테, 서로 사랑은 하지만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를 충족하지 못해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는 부부. 그런 부모를 둔 주인공이 다 커서 관찰자 입장일 수 밖에 없었던 어렸을때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주인공은 그때는 부모 사이의 일을, 특히 집을 나가 살고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나중에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과 본심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주인공이 해질 녂 지붕 위에 올라가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시간을 보낼때 들려오곤 하던 것이 코요테 소리이다.

아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폴과 캐런 부부는 중학생 아술을 교환학생으로 한집에 데리고 있다. 폴과 캐런 각자의 문제에 더하여, 동성연애를 비롯 일탈의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아술을 어떻게 대하고 지도해야할지도 확신이 없어 갈등을 겪는다. 개인적인 문제와 아슬의 문제까지, 어쩌면 과도기를 사는 건 십대의 아술이나 사십대의 폴, 캐런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지나간 행동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결말은 앞의 두 작품과 공통적인 방식의 결말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빛과 물질에 관한 방정식을 시험문제로 낸 물리학 교수 로버트와 그 시험을 치러야했던 학생중 하나인 헤더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바로 그 시험에서 비롯되었다. 결국은 연애담인데, 섬세하고 격조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처음엔 로버트라는 교수의 성격과 심리에 집중하며 읽다가 읽어나갈수록 점차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일인칭 화자인 헤더의 무심하고 담담하여 가려져있던 매력을 발견하게 되고, 과연 로버트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겠다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역시 여자가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 결혼후 예상되는 안정화 정도가 또 한 요소로 보태져서 결정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본다. 물론 모든 여자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행복한가는 또 다른 얘기이다.

강가의 개, 제목이 중의적으로 쓰였다. 주인공이 어릴 때 목격한 형과 그 친구들의 비도덕적 행동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성폭력, 범죄의 씨앗이 되는 잘못된 음주문화 등, 개로 상징되는 이 모든 행위는 미래의 문제로도 지속되어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며 회상될 것인가.

외출, 외출의 뜻 속에 주류에서 벗어난 삶까지 확장시켜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머킨, 동성애, 양성애를 용어화해서 불러야하는 당위성에 대해 나는 아직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 대상이 동성일수도 있고 이성일수도 있는 것이지, 낮은 확률로 일어난다고 해서 아웃사이더로 소외시키고 심지어 죄악시해야하는가. '머킨 (merkin)', '비어드 (beard)'가 동성애자가 공공장소에 데리고 가는 이성 상대를 뜻하는 단어임을 이 작품을 읽기전엔 알지 못했고 들어본적도 없다. 화자인 '나'는 진정 몰랐을까? 린이 처음부터 좋아한 상대는 자기였음을.

폭풍, 밖에서 폭풍이 치는 것과 집안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풍을 병렬식으로 대비하여 서술하고 있다.

피부, 이 책에서 가장 짧고 간단한 작품이었음에도 연속해서 두번 읽어야 했던 이유는 제목이 왜 '피부'인지 처음 읽을때 놓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라던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떤 불행이 가능할수도 있었는지를 굳이 떠올린다. 하지만 떠올린다고 한들, 누워있는 배우자의 매혹적인 피부처럼 눈 앞에 보이고 당장 느낄 수 있는 것들 만한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코네티컷,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가 요양차 코네티컷 연안의 별장에 머무르고 있을 시기에 '나'는 열세살이었고 그때 어머니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그때를 회상하고 비로소 그 일의 전말을 제대로 이해한다. 아버지가 요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후 모든 상황은 제자리로 돌아와 평화로운 상태로 보였지만 어른이 되어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겉으로 보여진 것과 매우 다른 이미지이다.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277쪽)

이 작품의 마지막이자, 작가의 섬세한 글쓰기 방식이 잘 드러나는 곳 중의 하나라서 인용해보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앞날을 계획하는 시간 대비 옛날을 회상하는 시간의 비율이 증가한다. 과거의 어떤 일들이 기억에 남고 어떻게 회상될지 당시엔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그 상황에서 이만치 떨어져나온 후, 한번 저 기억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떠오른 후이다. 그걸 이렇게 섬세한 통찰을 거쳐 소설로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살아온 세월에 대한 선물이다. 어디에 비길바 없는.

아직도 외국작가의 단편소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앨리스 먼로. 그녀의 단편보다는 읽기가 수월하다. 독자에게 친절할 정도의 구체적인 서사가 있다는 뜻이겠고, 덜 함축적이고 더 흥미있게 썼다는 뜻도 될 것이다.

아직 많은 작품을 낸 작가가 아니라서 국내에 알려진 그의 다른 소설 <어떤 날들>을 바로 주문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망설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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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12-0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파리 리뷰 인터뷰 모음집인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다 남기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저마다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라는 동일한 단어를 품고 있더군요. 소설이 어느 때부터 참 멀게 느껴졌는데 조금씩 다시 소설이 좋아지는 것은 그런 일상의 과정, 삶의 과정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아차 싶은 실수 하나를 벌이고 저의 보편과 개성 사이에서 조금 고민을 했네요. 관련해서 일기도 한 장 썼는데 그 내용이 올리신 글의 마지막 문단과 어쩐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앤드루 포터도 읽은 책 본문에 나왔지 싶은데, 언제 서점에 들러 조금 읽다 와야겠습니다.

hnine 2019-12-10 05:26   좋아요 0 | URL
열심히와 꾸준히, 보편과 개성 사이. 모두 생각해볼 말들이네요. 저는 열심히보다는 꾸준히가 좋고 (열심히는 어딘지 자발적이지 않고 의무적으로 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어서요 ^^), 보편과 개성은 둘다 좋아요. 지난 주 현대 미술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개성이 전부인 것 같은 현대 미술에 있어서조차도 어떤 것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고 어떤 것은 그저 개인의 취향에서 그치고 마는 기준이 되는 것은, 개성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보편성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더군요.
앤드루 포터는 적정 수준을 잘 잡아서 작품을 쓴 것 같은데, 지금 배송중인 그의 <어떤 날들>을 읽어보면 더 잘 알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