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3

 

 

 

 

외로운 것들이 갈수록 착해지는 게 싫어서

비명이 말랑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

버려진 것들은

낡아가지 않고 죽어버리라고

종일 휘파람을 불었다.

 

먹다 버린 빵처럼 떼어먹히고

세상 밖으로 자꾸 몸이 기울 때

이승이었던가

비가 오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맨드라미 붉은 목을 찾아

아무리 마음을 세워봐도

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건지 살라는 건지

다시 오더라도 이렇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죽더라도 온 힘을 다해 죽을 거라고 다짐했다.

 

 

 

- 이승희, 「110-33」전문 -

 

 

 

여름의 우울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 이승희, 「여름의 우울」전문 -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 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전문 -

 

 

맨드라미라는 꽃을 본지 오래되었다.

예전엔 동네 담벼락이나 집 마당 한쪽에 한여름 상징처럼 피어 있는 걸 종종 볼수 있었는데.

붉다는 말로는 모자랄 것 같은 강렬한 붉은 색, 두툼하게 주름잡힌 꽃잎은 마치 비로드 천으로 만들어 붙인 것같아보였던 꽃.

이름도 특이했다 맨드라미.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맨드라미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맨드라미는 단지 꽃에 국한된 것이 아닐수도 있다. 나의 어느 한때 모습일수도 있고, 나의 신념일수도, 사랑일수도, 절대의 가치일수도 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이 시인은 이름만 보면 여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남자 시인이다.

시집을 전자책으로 구입하는 적은 거의 없는데 배송일까지 못기다리고 빨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전자책으로 구입하였다.

좋은 시는 따로 노트에 적어놓기로 하고.

그러다가 시집 전체를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몽땅 워드로 타이핑 하고 말았다.

노트북 모니터 창에 e-book과 워드를 동시에 띄워놓고, 좋은 구절엔 회색으로 표시도 해가면서 한자 한자 타이핑. 이것도 필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사의 효과는 충분히 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집 뒤 이경수 평론가의 해설마저 눈으로만 읽고 지나가기 아까웠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정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살고 싶은 의지의 다른 표현임을 시인은 숨기지 못했다.

 

시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때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고백처럼 얘기했다. 우울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그것을 보는 시각도 여러가지이겠지만, 이승희 시인의 시에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잘 표현된 우울은 그냥 억눌러진 우울보다 어떻게 다른 효과를 낳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베껴쓰는 동안 다른 책은 손을 못댈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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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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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스로 붙였든 출판사에서 붙였든 작품의 제목은 의미있다. 친애하고, 친애하는.

'친애하는' 이란 말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친밀도를 가진 경우에 쓰지 않나 싶다. 핏줄로 맺어진 관계, 즉 가족, 부부, 자식에게는 잘 안쓰는 걸 봐서도 그렇다. 이 책에서 주인공 나의 입장에서 친애하는 대상은 엄마, 그리고 외할머니이다. 대상이 두 사람이기에 친애하고 친애하는 이라고 두번 연달아 썼다고 한다. 주인공 인아와 인아의 엄마, 인아의 외할머니 이렇게 3대에 걸친 이야기가 인아가 화자가 되어 펼쳐진다. 인아가 아직 아기일때 엄마는 어린 인아를 남겨두고 혼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느라고 인아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아빠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텐데 엄마가 아기를 남겨두고 혼자 유학을 간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상황이랄 수 있었다. 몇년 째 불화가 지속되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인아가 대학생이 된 후까지 이어지고, 외할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옆에서 보살펴드리기 위해 인아가 외할머니 집으로 가서 지내주었으면 하는 엄마의 말에 인아는 외할머니와의 각별한 정도 정이지만 엄마와 한집에서 안있어도 된다는 것때문에 기꺼이 짐을 싼다. 할머니의 삶을 보면, 부유한 집의 딸로 태어났지만 집에서 정해주는 집으로 시집을 가야했던 시절을 살았고,  교사였던 남편이 강화도 학교로 발령받아 홀로 가버리자 혼자 시댁에 남아 시부모를 모시며 아이를 키워야했다. 큰 맘 먹고 아이를 들쳐업고 찾아간 강화도의 남편 학교에서 할머니는 남편이 다른 여교사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학자 기질이 있고, 책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했던 할아버지였지만 그런 할아버니에게 할머니는 밥하고 시중드는 것, 아이를 잘 키우는 것 말고는 해줄게 없었다. 그런 할머니를 옆에서 보고 자란 엄마는 많은 딸들이 그렇듯 할머니의 삶을 한심해하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며 자랐으며, 지금 엄마와 딸인 인아 사이에 거리감이 있듯이, 한번도 떨어져 살아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할머니 사이엔 거리감과 벽이 존재한다.

할머니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상황이 예기치 않게 잠시나마 이 삼대가 한집에모여 지내는 시간대를 형성하고 인아는 자신과 엄마와 할머니의 삶, 그리고 이들 서로의 관계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160쪽 정도의 중편 소설이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도 어느 정도 들어가있는 것 같고, 외국의 다른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도 많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전통적인 관습의 영향속에서 감히 거스르지 못하고 살아왔으나 자기의 딸은 그렇게 살지 않기 바라는 할머니, 내 가정이 소중한 것 처럼 나의 삶과 나의 목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 엄마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지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엄마의 부담스런 기대보다 엄마로부터의 따뜻하고 진심어린 애정이었던 .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여름의 빌라>에 실려있는 단편 <폭설>에서도 나온다. 작가는 현대문학 PIN 시리즈 단행본 청탁 마감을 앞두고 무엇을 써야하나 고민 끝에 평소에도 관심있던 주제를 쓰기로 했다고 한다. 바로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 딸과 엄마의 이야기는 모두가 같으면서 모두가 다르다. 공통적인 부분이 있으면서 다 다르다는 것이다. 엄마는 할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자기의 삶에까지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것 같아 잊고 살고 싶다. 늘 자식인 자기보다 엄마 자신의 일을 쫓아 살아온 것 같은 엄마를 향한 인아의 마음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이다. 엄마의 기준으로 보면 엄마 기대만큼 성공적인 삶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으로 주눅든 삶을 살고 있는 인아에게 엄마는 한번도 따뜻한 보금자리였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던지는 엄마이다. 그런 엄마를 자식인 내가 이해하라는 내면의 소리를 인아는 들어야하는가? 결국 다 자기 몫이란 말인가?

 

화해와 용서는 말로도 쉽게 할게 아니지만 실제로 행하는건 더욱 어렵다. 마음만 너그러워서 용서와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백수린의 이 작품을 읽으며 배운다. 할머니, 엄마, 딸, 이중 누구도 악인은 없다. 악인이 될 가능성 조차 낮은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용서가 되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동시에 한가지를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상대에 대한 기대였다. 나에게 어떤 엄마였으면, 내 딸은 최소한 어떤 딸이었으면 하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관계의 벽, 원망의 벽은 더이상 단단해지지 않고 조금씩 허물어질 준비를 시작한다. 문제는, 기대를 내려놓는다는게 남남 사이가 아닌 이상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게 어디 엄마이고 딸이라고 할 수 있냐는 딜렘마.

욕심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역시 백수린 다웠다. 그러나, 3대에 걸친 역사를 통해 뭔가 뚜렷하고 일관적인 작가의 목소리를 담고 싶다면, 그럴땐 오히려 좀더 강한 필치와 서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다른 소설 <폴링 인 폴>이 이미 책상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 단편집인데 제목 폴링 인 폴은 아마도 영어 Falling in Paul을 소리나는대로 쓴 것일테고 여기서 Paul 은 사람이름이겠지? 배경으로 외국이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것도 그럴까. 상상해보며 책장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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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3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표를 세 개만 주셨네요.
저는 어제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그 소설집에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이란 소설도 담겨 있는데 오늘 이걸 들어봐야겠네요.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에요. 좋은 소설이 많으면 종이책으로도 사려고요. 꼭 오디오북으로 들어 좋은 건 종이책을 사게 돼서 지출이 많아지는 게 문제예요. ㅋ

추석 연휴를 달콤한 휴식과 함께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hnine 2020-10-01 00:45   좋아요 1 | URL
요즘 제가 별점 주는데 좀 인색합니다. ^^
박상영 작가 책도 한번 읽어보려고 찜해두고 있는지 꽤 되었는데 아직 못읽어보고 있어요. 작품 활동도 활발하고 대중매체에 출연도 자주 하더라고요.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은 제가 얼마전에 읽은 <여름의 빌라>에 수록되어 있어 읽어보았지요.
이번 추석엔 집에서 차례만 지내고 산소엔 나중에 가기로 했답니다. 산소에 안가는것만해도 마음의 부담이 훨씬 덜하네요. 준비하는 것도 덜 분주하고, 또 이번엔 제가 남편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어요.
pek님도 추석 잘 보내시고 또 만나요~
 
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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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진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겨우 스물네살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 3년 후인 스물일곱에 출판된 작품 <모렐의 발명>은 출판되고 바로 이듬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하었고 이후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1914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상류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대학에 입학할때는 법학 전공이었지만 문학에 전념하고자 학교를 중단하고 나온다. 젊은 나이의 비오이 카사레스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주고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소설계의 대부로까지 불려지게 한 <모렐의 발명>은 어떤 작품일까?

'모렐'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고 중심인물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화자는 아니다. 화자인 '나'는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후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빌링스 섬이라는 곳으로 도망쳐온 사람이다. 천신만고끝에 도착한 섬에는 과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곳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무도 살지 않던 섬에 갑자기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들 중 한 여자가 석양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반하게 되어 매일 그녀가 앉아있는 곳에 가서 그녀를 훔쳐보며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를 꿈꾸지만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친 사형수라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아무리 가까이 가도 그녀를 비롯하여 섬에 나타난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고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엿들음으로써 이들의 이름도 알게 되는데 내가 반한 여자의 이름은 '포스틴'이고 늘 포스틴의 가까이에는 테니스 선수 '모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질투심을 느낀 나는 모렐을 마치 살인자, 미친 사람 등으로 여기며 좋게 보지 않는다.

어느 날 모렐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설명하고 해명하는 것을 듣고 주인공 내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지금 섬에 있는 사람들 (포스틴 포함)과 이들이 섬에서 머무는 이 상황 모두가 모렐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대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영상으로 만들어놓은 결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영사기로 돌려서 재생해내는 것 정도로 표현되지만 다른 점은 이들이 시각적으로만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갖고 실제로 움직이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요즘의 가상현실 같은 것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원하는대로 완벽한 현실을 구성한 것이다.

모렐이 원하는대로의 현실이란 주인공 나도 반한 포스틴의 사랑을 얻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꼭 그렇게 국한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면 이 작품이 단순 로맨스 소설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대상이나 상황의 한 예로서 여인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렇게 보고 싶다.

제목의 모렐의 발명이란 이렇게 모렐이 발명한 영상 매체 기계를 의미할 수 있다 (너무 협의적 해석). 모렐이 설명하기를 그가 발명한 기계는 스크린이나 종이 없이 장면이나 대상을 재현할수 있는 것이 애초 기대하던 목적이었는데 힘든 작업 결과 기계의 여러 다른 부분들을 동시에 작동시키면 재구성된 인물을 얻을 수 있었고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면 영혼이 나타나더라고 했다. 이전에 없던 기계이니 발명인 것 맞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렐의 발명이란 모렐이 이 영상매체기계를 통해 존재와 사물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이것을 주인공 내가 모렐이라는 인물을 발명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점점 복잡해짐). 확실한 것은 이 소설 자체가 비오이 카사레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건 너무 일반화). 그것은 아마도 모든 소설이 소설가의 발명품인 것과 같을 것이다. '소설은 허구이다' 이것은 소설을 정의내릴때 명제처럼 배우던 말 아닌가?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현실 속 인물이며 주인공이 반한 여자 포스틴은 모렐에 의해 발명된 비현실적 인물이다. 주인공이 처한 배경은 현실이라면, 섬에 나타난 사람들, 이들의 임시적 거주, 박물관, 식물원 등의 건물 등은 모렐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요점이 여기 있다. 환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룬 문학세계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짐작할수 있듯이 아무 기초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면 이해하며 따라가기 쉽지 않은 내용의 책이다. 해설에 따르면 비오이 카사레스가 도입한 환상은 SF적 환상이 아니라 일상에 숨겨진 또다른 현실로서의 환상을 그렸다고 한다. 소설가다운 환상이고 좀더 친현실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아직도 의문점인 것은, 화자인 '나'와 '모렐'중 작가가 더 내세우고 싶은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하나 더. 만약 내가 모렐이 된다면 어떤 환상을 구성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건 아마 오늘 하루치 생각꺼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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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절대적인 기준이나 가치는 아니지만, 이렇게 이른 나이에 고전이라 불릴 작품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천재라는 건 존재하는구나 싶어요. 카사레스가 이 작품을 썼던 나이의 두배가 되었지만 저는 뭔가 이렇다할 글을 써놓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카사레스에게는 카사레스의 삶이 있고 제게는 제 삶이 있는 까닭이겠지요. 천재를 천재로 만드시고 평범한 사람을 천재 아니게 만드신 건 다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위로 합니다.

저는 소설이 너무 좋은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온갖 감정들을 겪으며 사건들이 벌어지기 때문인데요, 오늘 나인님이 리뷰하신 책안에서도,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면서 자신이 반한 여자의 근처에 있는 남자에 대한 질투심을 갖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좋게 보지 않고요. 이런거, 너무 한심한 감정 같아 보이지만 실상 누구나 다 느끼는 감정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책에서 보면서 아, 사람이란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존재이구나, 완벽하지 못한 존재야, 생각하는 순간들도 소설을 읽는 기쁨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모렐의 발명 어쩐지 제게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읽어볼래요.

hnine 2020-09-25 12:17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말씀처럼 저도 어느 분야에든 천재성 가진 사람 있다고 봐요. 천재로 태어나기란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니까 부럽기야하지만 천재가 모든 분야에 다 천재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어느 한 분야에 집중되어 보통사람의 수준을 넘어설때 천재라고 하는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거든요. 그러니 한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선 천재가 아니라 오히려 모자라보일수도 있을테고요. 그렇다면 천재로 태어나지 않길 잘했다 생각도 든답니다. 완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제 맘대로 위로하고, 그러죠? ^^
내가 나 답게, 나의 의지에 의해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위대한 삶일것 같아요. 많은 업적을 남긴 삶이 위대한 삶이 아니라요.
이책 쉽진 않아요. 그렇다고 심하게 어렵지도 않답니다. 읽어볼만해요. 사고의 확장과 탄력은 너무 술술 넘어가는 책보다 오히려 이런 책 읽을때 일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천재들은 일하고, 우리들은 그들이 해놓은 일을 누리면 되지요. ^^

Falstaff 2020-09-2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 좋은 리뷰를 쓰시느라 시간이 필요하셨군요! ^^

hnine 2020-09-25 12:22   좋아요 2 | URL
책 뒤의 해설도 읽고, 다른 분들 리뷰도 읽어보고, 그러면서 갈피를 겨우 잡았는걸요. 그렇게해서 어쨌든 리뷰를 올려야 비로소 책을 다 읽었다고 보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요. 읽은 책 리뷰 안쓰고 다음 책 읽고 있자면 웬지 마음이 불편해요. 그래서 좋은 리뷰 아니더라도 쓰긴 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나저나 Falstaff님 리뷰 아니었더라면 언제 읽을지 기약없었던 책이랍니다. 감사드려요.

바람돌이 2020-09-25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정이 흥미진진하네요. 이렇게 또 좋은 책과 작가를 알게됩니다.

hnine 2020-09-25 22:07   좋아요 0 | URL
말씀 그대로예요. 설정이 기발합니다. 해석도 다양할수 있고요.
잘은 모르지만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이런 쪽 문학은 특이한 것 같아요. 환상적 요소가 있다고 할까요. 복잡한 구성도 그렇고요.
한번 읽어봐주세요~

바람돌이 2020-09-25 22:46   좋아요 0 | URL
넵!!!
 
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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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인간이면서 과연 인간 본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다.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적이 아니라 바로 연인, 자기가 낳은 자식이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때이다.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어느 민족, 어느 계층에 국한된 일도 아니며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유가 뭘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성장과정에서 어떤 결정적 결핍 또는 회복안될 상처가 있었기에 이런 극단적 행동 이상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스웨덴에서 잘 알려진 여성 만화 작가인 오사 게렌발의 <7층>도 이런 생각을 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1973년생, 올해로 48세인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한다.

첫 장면은 주인공 '나'가 집을 떠나 예술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모 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혼자라는 새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날 파티에 참석했다가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이는 남자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그는 나의 모든 우울과 불안과 실패를 잊게 해주고 과거야 어떠했든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걸 도와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제목 <7층>은 나와 남자친구가 함께 살기 시작한 아파트의 층 수를 뜻한다.

그러던 남자 친구가 가끔 이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사사로운 행동을 지적하며 이유를 따져묻는가 하면 이런 건 하지 말라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의 비상식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더욱 잦아지고 신체적 폭력까지 가하는 일이 벌어지자 나는 점점 견디기 어려워지고 보이지 않는 족쇄에 채워져 그 끝을 남자 친구가 쥐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게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런 상태로 상당한 시간을 끌게 되는 것에 반해 주인공 나는 이대로 버티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용기를 낸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 선언하고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 부모님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혼자 견디고 삭히는데서 벗어나기 위한 이러한 행동은 좀처럼 여성들이 결단못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런 결단을 어렵게 해봤자 그것이 시원한 해결점이 되리라는 기대 대신 남들이 믿어주지 않는채 자신의 결점 폭로에서 그치고 말거라는 불안감, 즉 나의 행동이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과 불확신때문이다. 이런 의심과 불확신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책임을 나눠가지는 것이 맞다.

남자 친구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물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서 주인공 나는 또한번 시련을 경험한다. 반복되는 경찰 조사는 물론이고 스스로 재건의 고된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난 그야말로 난파선과도 같았다.

내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73쪽)

 

그동안 서서히 잃어온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쉽고 즉각적일리 없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그보다 더 노력의 가치가 있는 일이 있을까? 그녀는 서서히 스스로 재건되어 갈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노력 유무가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말해준다.

 

하지만 언젠가 또 어디에선가 계속해서 그를 마주치게 되리라. (79쪽)

 

이 사회에는 전 남자친구와 같은 남자가 어디든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지금도 주인공 '나'가 겪은 일을 겪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회에 아직 우리가 살고 있음을 일깨우는 저자의 경고의 말이다.

오사 게렌발은 개인적인 불행과 시련의 경험을 침묵으로 억누르지 않고 그 침묵을 깨고 나와 이후의 삶을 자신만의 방법인 그림과 글로서 사회를 일깨우는데 일조 하며 살고 있다. 사회에 일조는 물론이고 오사 게렌발 개인적으로도 훨씬 가치있는 삶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조금씩 바른 방향으로 전환해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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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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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은지 오래 되었지만 작품은 이번에 처음 읽어보았다. 한국소설에 대한 내 관심이 예전에 비해 수그러들어서 인기있는 신간도 놓치고 지나가거나 뒤늦게 겨우 읽어오고 있는데, 우연히 백수린 작가의 인터뷰를 몇개 듣다보니 이 작가는 한국의 비슷한 연령대 (30~40대)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뭔가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는 감을 잡게 되었다. 내가 어림짐작하는 한국 소설은 둘중 하나인데, 시종일관 진지하고 묵직하고 암울한 주제의 소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머러스, 시니컬 코드를 작정하고 쓴 소설.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백수린의 이 소설은 진지 모드로 일관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풍자적, 희극적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림짐작 한국 소설 분류는 이제 갖다 버려야겠다. 한마디로 백수린의 소설은 쓱쓱 잘 읽힌다. 읽어나가는데 막힘이 없이 페이지가 쓱쓱 넘어간다. 그런 책을 좀 읽고 싶어 고른 책인데 제대로 잘 선택했다 싶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았다.

첫째, 이야기가 대체적으로 시간순으로 진행된다. 현재 상황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새 20년전 장면으로 이동하여 진행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시제를 왔다 갔다 하며 진행되는 방식은 요즘 소설에서 많이 보는 구성인데 복잡하고 치밀해보여 작가들은 즐겨 쓰는지 몰라도 읽는 사람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읽게 되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백수린의 여기 포함된 작품들은 그저 평이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장면으로 넘어갈땐 모호하게 처리하지  않고 웬만해선 독자가 혼동하지 않을 정도의 언급을 하고 넘어간다.

둘째, 급반전이 거의 없다. 무리한 결말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평이하게 이야기를 맺는다. 긴장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읽는 동안 지루하거나 읽고난 후 시시하다고 느끼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끝까지 독자의 흥미를 붙잡는데 반전이 꼭 필요한건 아님을 오랜만에 깨우쳐주었다.

셋째, 주인공들의 성격이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라기보다 오히려 평범에 가까운 인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의 궤적>의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알게된 선배 언니와 한때 같은 궤적의 시간대를 보내지만 그 궤적이 영원히 같을 수는 없다. <여름의 빌라> 역시 타국을 배경으로 한다. 주아와 남편은 주아가 오래전 배낭여행할때 알게 된 독일인 부부의 초대를 받아 이들 부부가 머물고 있다는 캄보디아에서 잠깐의 여름 휴가를 함께 하는데, 캄보디아 빈민을 보는 독일인 부부와 주아 부부 네 사람의 입장은 같지 않다. 비록 빈민이지만 평화로워보이는 모습 앞에서 누구는 아름답다 느끼고 누구는 불편하다. 불편한 사람은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까지 불편하다. <고요한 사건> 이라는 제목처럼 백수린의 작품 속 사건들은 대체적으로 '고요하게' 벌어진다. 폭행당해 쓰러진 고양이 아저씨와 죽은 고양이를 보고 놀란 주인공은 자기의 아버지만은 그 상황을 해결해줄거라 믿고 달려와 도움을 청했지만 그것은 그저 고요한 사건으로 침묵 속에 지나가게 방치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아주 잠깐 동안에> 역시 <고요한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기대되는 행동과 실제 행동의 간격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하고, <폭설>에서는 폭설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모든 계획이 틀려져 버리고 속수무책이 되지만 성숙과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받는 것은 이런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다는 <흑설탕 캔디>는 독자 역시 오랫동안 인상에 남을 작품이 아닐까 한다. 화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화자의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화자는 다만 할머니를 기억하고 재해석하는 주체일 뿐. 단순히 노년의 연애 감정을 말하려고 한게 아니라 노년에도 인생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고요하게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관습과 통념으로 자신을 중무장하고 있지 않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어느 외국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쓰게 되었다는 백수린 작가 설명이 있었는데 한나절 잠깐 동안의 변화, 그 변화를 경험한 엄마를 어린 아가의 눈을 빌어 마무리하였는데, 평상시와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고 표현한 작가의 속마음을 독자가 읽어내고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도 알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소소해보이는 일들, 극적이지 않은 사건들인데 그것을 가지고 소소하지 않은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역량을 또한번 확인시켜준다.

우리의 삶은 시간의 궤적을 남기며 진행해가고, 잠시 머무는 여름의 빌라 같은 것이며 고요한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 이제 기대할 것 없다는 회의주의 틈틈이 흑설탕 캔디를 기대하며 살아도 좋은 인생이다. 여기 실린 모든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계, 작지만 전부인 세계를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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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2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못 읽어본 작가인데 hnìne님글 보니 또 관심이 가네요. 자꾸 보고싶은 책들이 늘어서 큰일이예요.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좋은 날 되세요

hnine 2020-09-22 22:52   좋아요 0 | URL
가독성 좋은 책이 필요한 시기에 읽으면 딱 좋을 책인 것 같아요. 무리없이 재미있더라고요.

난티나무 2020-09-2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록에 추가합니다.^^

hnine 2020-09-22 22:54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은 후 저도 이 작가의 다른 책 바로 한권 주문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