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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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 작. 작품 배경은 1900년대 후반 영국이다.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났고 키워지는 이야기를 이렇게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 복제가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 소설이 발표될 당시 2005년에도 이미 복제에 대한 소재가 소설의 주제로 쓰인 것이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작가는 복제인간, 장기 기증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기보다 그것을 소재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은 물론 처음엔 자기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 학교에 모여 교육을 받는지 모른다. 한 교사에 의해 기증에 대해 처음 언질이 주어지는 시기는 학생들이 열 세살때, 성교에 대해 가르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타이밍을 맞추면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기를 삼가해야할 어색한 주제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함께 주입시킨다. 소위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식.

기증할 후보 학생들의 성향 추적 자료로 다른 것이 아닌 이들이 그려온 그림을 선별하여 보관한다는 아이디어는 예술적이고 문학적이라는 차원에서 남과 다른, 가즈오 이시구로다운 발상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로이한테 그림이나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고 말이야." (245)

등장하는 아이들중 가장 어리숙해보이는 토미가 그것을 추론하여 캐시에게 야기하는 대목에선 '이 아이가 토미 맞나?' 했다.

나중에 루스가 토미의 이런 추론을 캐시로부터 전해 듣고서 토미 앞에서 일축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루스의 미묘한 심리, 즉 속마음과 다르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심리, 그걸 바라보는 캐시의 심정, 당황하는 토미의 마음 등을 끄집어 내어 루스와 토미, 토미와 캐시, 루스와 캐시, 이 각각의 관계를 작가는 매우 섬세하게 묘사했다.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이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작가의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벽,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연민이 이 셋을 어떻게 끌어안게 하고 어떻게 멀어지게 하는가를 표현하는 방식 말이다.

결말이 가까와오면서 (장기기증)집행 연기에 대한 희망의 뭉개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온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357)

난 여기서 나름대로 가닥을 잡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이 단지 만들어진 기계같은 존재, 소모품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

그러면서 괜히 북받쳐 오른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장기기증이라는 그들의 존재 목적을 학생들이 알게 해야한다는 루시 선생님과, 학생들이 알게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의 대립을 통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과연 어떤 쪽이 나은지 스스로 물어보게 한다.

너희는 멋진 추억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교양이 있어. (358)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367)

 

이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가히 숨을 참고 읽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끝까지 침착하게, 마지막 숨을 고르는 심정으로 절제하여, 그러나 아름답게 써낼 수 있을까.

 

눈물이 나오는대로 내버려둔채 책장을 덮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393, 이 책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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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2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노벨상 작가의 작품은 잘 안 읽는데
이번엔 일본 작가라 관심이 좀 가더군요.
일본 문학은 좀 읽을만 해서.
그런데 이 작가도 호불호가 있는가 보더군요.

이 작품 영화로 나와서 얼마 전 봤는데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책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ㅋ

hnine 2018-01-24 19:2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노벨상 작가 작품 특별히 챙겨 읽지 않고 더구나 일본 소설은 가뭄에 콩 나듯이 읽어요. 그런데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은 그냥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가즈오 이시구로 책은 일본어로 쓰이지도 않았고 작가가 어릴 때 일본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해서 지금은 영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아요. 작품도 일본 문학에 포함시키지 않고 영미권 문학에 포함시키더라고요.
영화로 만들어진건 알고 있는데 저는 아직 못봤어요. 책은, 저는 참 좋던데요 ^^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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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가 생각해본다. 예전에 시드니 쉘던 이라는 작가의 소설도 생각나고 근래 몰아서 읽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도 생각한다. 전자는 비슷한 계열에 놓아보기 위해, 후자는 대조적이라는 이유로.

600 쪽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염려 필요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설사 다 읽고 별점 3점 주는 사람에게도 읽는 동안엔 흥미를 놓치지 않게 한다는 점.

통속적이고 드라마 같은 줄거리라고 쓸까, 사는게 그럼 통속 드라마 같은 것이지 뭘 더해야 하느냐, 어떻게 포장되길 바라느냐 라고 쓸까? (이 리뷰를 말이다).

그해 최고의 소설이라고 극찬했다는 오바마에게 실망했다는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었을 오바마의 그 한마디에 낚이고, 그것을 앞에 내세운 출판사의 기획에 낚여 책 구매 결정한 나는 또 뭔가 싶어 하지 말기로 한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한풀 꺾였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등장인물들의 센스있고 축약적인 대화 방식, 세익스피어 작품 속 문구의 재치있는 인용등도 돋보인다는 것도 인정.

소설은 크게 두 파트, 운명과 분노로 나뉘어져 있는데 운명은 남자인 로토 편에서, 분노편은 여자인 마틸다 편에서 기술하는 방식이다. 책 소개글을 보면 운명과 분노라는 제목의 단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관련지어서, 그리고 두 인물 로토와 마틸다의 성격과 행동, 걸어온 길과 관련지어 설명을 해놓았던데 나는 읽으며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고 다 읽고 나서도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그래도 다음 처럼 읽으며 표시해놓은 구절도 있기는 했다. 로토가 다른 여자 극작가에게 여성의 창의성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부분이다. 이 말을 하고서 장내의 웅성거림과 분노를 일으킨 그 구절. 길지만 옮겨적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수명이 제한되어 있듯 창의성의 양도 제한되어 있어요. 만약 여자가 자신의 창의성을 가상의 삶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창작하는 데 쓰기로 한다면 그건 영예로운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건 종이 위에 허구의 세상을 써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창작하는 겁니다. 단지 삶의 복제품이 아니라 진짜 삶을 창작하는 거니까요. 세익스피어가 어떤 작품을 남겼건 그건 같은 나이의 평균적이고 학식 없는 여자가 아기를 낳은 것보다 훨씬 못한 일입니다. 그 아기들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상이니까요. 어느 누구도 연극 한 편이 인간의 한 생명만큼 가치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진 못할 겁니다. 무대의 역사가 지금 이 말을 뒷받침합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창의적인 천재성을 덜 드러냈다면, 그건 여자가 창의적인 에너지를 삶 그 자체에 쏟아부어 그들의 창작을 내면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58)

 

남자 주인공의 입을 빌어 얘기했지만 여자인 작가의 생각이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다. 저자가 작품 전반적으로 세익스피어를 자주 인용하긴 했지만, 그리고 실제 그리스 신화와 세익스피어에 빠져 산 시간이 있었다고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얘기하기도 했지만, 아기 낳는 일을 세익스피어에 비교하여 지지하고자 한 글은 여기서 처음 본다.

 

그녀 주변의 이 여자들은 그런 유령 같았다. 얼굴 피부는 팽팽했다. 그들은 주방장이 만든 맛좋은 요리를 세 입 야금거리고는 배가 부르다고 선언했다. 백금과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그것들은 자아의 종기였다. (519)

 

마틸다가 주위의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 혼자 생각하는 대목인데, 자아의 종기라는 표현이라니. 외워두고 싶었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아티스티티스 (Artistitis)' 라는 말도 나오는데 (521), 늘 더 커지고, 더 요란해지고, 헤게모니의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가려고 떠밀고 다투는, 이 나라 (여기선 미국을 말함) 에서 남자들이 예술을 하겠다고 덤빌 때 걸리는 일종의 병이라면서 어느 여자 평론가가 신랄하게 꼬집는 말이다. 접미사 -itis 는 염증이나 병의 이름에 붙이는 어미인데, 아티스트에 이 접미사를 붙여 만든 말이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우연인지, 실제 병 이름 Arthritis (관절염) 와 철자도 비슷하다.

 

결혼 전 뿐 아니라 결혼하여 부부가 된 후에도 로토와 마틸다의 관계는 육체적인 끌림이 전부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비공감 이유였다. 결혼 후 발견된 배우자의 결혼 전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소설 속에 담는 방법이 한가지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깊은 성찰의 결과물로 전달되는 소설도 있지만 줄거리의 전개, 인물의 행동, 거듭되는 반전을 통해 전달되는 소설도 있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내 경우엔 후자의 경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왜 썼을까?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작가가 인간의 삶을 꿰뚫어보는 통찰의 흔적은 어디서? 리뷰를 쓰는 중에도 여전히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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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1-22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아침에 일찍 하루 시작하시는 hnine님, 오늘도 기분좋고 즐거움 가득한 하루 되세요.^^

hnine 2018-01-22 06:47   좋아요 1 | URL
요즘 서니데이님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는 것 같아요 ^^
저희는 일단 아들을 6시 30분에 깨워야 하기 때문에요.
우리 같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기로 해요!
 

 

 

 

오늘 새벽 커튼을 걷어올리며 본 새벽달은 높았고 바투 깎은 손톱마냥 간신히 보였고 가지런했다.
겨울이니 추운 건 예상하는 일인데 어제 오늘 방송이나 지면에서 필요 이상 화제를 삼는 것 같다.
추위 속에도 하루 하루, 조금씩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있다는게 좋아서 곰실곰실 웃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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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12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투요! 물론 춥긴 춥죠.
그런데 지난 달 초에 되게 추위를 느낀 후
그동안 추위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견딜만 한 것 같은데
좀 호들갑이다 싶기도 해요.
하긴 눈 많이 오는 지역은 좀 심난할 것 같긴해요.ㅠ

해는 정말 조금 길어진 걸 느낄 수 있더군요.
다음 주면 얼추 동지가 지난지 한달 정도가 되오기도 하는데
더 좀 확연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겨울인 것 같아도 겨울은 우리도 모르게 물러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요.

hnine 2018-01-12 17:45   좋아요 1 | URL
밖이 아무리 추워도 우리 나라는 일단 실내에 들어오면 대부분 따뜻하게 몸이 녹을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 좋지요.
해가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 기분 좋게 하더라고요. 반대로 겨울이 가까와져 올때는 해가 점점 짧아져서 6시만 되어도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괜히 마음도 무거워지곤 하거든요. 자연은 제가 할일을 이렇게 정확하게 해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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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 책으로 세권째 책 <녹턴>이다.

왜 제목을 녹턴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본다. 녹턴이란 우리말로 야상곡, 세레나데라고 번역되는 음악의 한 갈래이다. 밤중에 연인의 창 아래서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낭만적인 곡.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황혼"이라는 단어가 힌트를 준다. 다섯 편의 이야기 모두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구성이기도 하고, 녹턴-밤-낭만 (녹턴은 낭만파 시대 음악) 이라고 연결이 지어지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 <크루너>. 녹턴이 음악곡의 한 갈래인 것 처럼 크루너란 부드러운 콧소리가 가미된 나지막한 창법 ('크룬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를 말한다. 여기서 화자는 야네크란 이름의 폴란드 연주자이고, 토니 가드너라는 크루너 가수와 그의 부인 린디 가드너가 등장한다. 토니의 유명세에 힘입어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토니와 린디 부부는 올해로 결혼 27년을 맞는다. 세월이 흘러 토니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자 다시 인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이혼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27년전 신혼여행지를 찾아 여행을 와서 아내인 린디에게 토니는 노래를 선물하고자 야네크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한다는 설정. 몇달 후 야네크는 토니와 린디의 이혼 소식을 듣게 되고 예전의 그 날 일이 생각나 서글퍼진다.

결혼과 이혼이 성립하게 되는 이유도 아니러니지만, 아직도 아내를 위해 낭만적인 노래 헌사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토니가 아직도 린디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크루너 가수로서의 인기, 명예와 사랑 중 토니와 린디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두번째 이야기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이 제목은 우리 말의 '비가 오나 눈이 오나'와 같은 의미라고 한다. 오랜만에 뭉친 대학 동창 셋 레이먼드, 찰리, 에밀리. 레이먼드와 에밀리는 대학 시절 음악을 취미로 한다는 공통점때문에 친했던 사이인데 에밀리는 일찌기 찰리와 결혼을 하여 런던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이들 부부의 런던 집에 초대되어 간 레이먼드는 둘 사이에 벌어진 일에 관여하여 중재해주기를 부탁받는데, 에밀리 모르게 일을 꾸미고 수습하려는 찰리와 레이먼드를 읽고 있노라니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킥킥거리게 되면서, 작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부부 일에 레이먼드를 관여시키는 찰리의 진짜 본심을 무엇이었을지. 이것을 보는 에밀리의 생각은, 진심을 무엇일지. 일종의 오픈 엔딩이다.

사라본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게 만드는, 역시 음악이 배경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세번째 이야기 <말번힐스>. 말번힐스는 영국의 한 지명. 남편과 함께 카페를 경영하고 있는 화자의 누나 매기가 살고 있는 곳이다. 싱어송 라이터인 화자는 오디션에 계속 탈락하여 생계가 막막해지자 매기누나에게 전화하여 여름을 말번힐스에서 머물며 일을 도와주기로 한다.

여기에서 화자는 틸로, 소냐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두 사람이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보이나 이야기 해 볼 수록 세상을 보는 눈과 성공에 대한 가치관이 매우 다르고, 그것이 이들 사이에 갈등을 빚어내고 있으며 화자에게 각기 다른 조언을 해준다. 화자는 과연 자신의 앞으로의 진로를 잡아가는데 어떤 쪽을 택하게 될지.

이 이야기 역시 작가에 의해 결말이 제시되고보다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네번째 이야기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녹턴>. 원래는 임시직 테너 색소폰 연주자이지만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연주하는 생계형 뮤지션 스티브가 화자이다. <크루너>에 나왔던 린디 가드너가 여기에도 등장하는데, 스티브와 비슷한 시기에 얼굴 성형 수술을 받게 되어 회복기 동안 같은 호텔 옆방에 투숙하게 된 것. 성형 수술의 결과로, 또는 린디의 유명세에 힘입어 스티브의 지지부진한 행적에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을지. 린디가 칠면조 속에 감춘 트로피를 찾아 한밤중에 벌인 소동을 밤에 연주하는 음악 '녹턴'에 비유해서 붙인 제목일까? 그러면서 잠시 반짝 했던 스티브와 린디 사이의 낭만적인 감정선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일까.

다섯번째 이야기는 <첼리스트>.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와 미국여자 엘로이즈 맥코믹의 이야기이다. 배경은 이탈리아. 스스로 첼로연주의 대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로이즈의 관심을 받는 티보르는 그녀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되지만 엘로이즈는 한번도 스스로 첼로를 연주해보이지 않는다. 잠시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티보르의 잠재력을 한껏 띄워주고 격려해주는 엘로이즈를 거역하고 싶지 않은 티보르의 마음은 그녀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며 끝이 나고 티보르 역시 다른 도시로 떠난다. 이야기는 7년이 지난 후 이것을 회상하는 다른 길거리 뮤지션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읽는 사람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서사가 돋보이는 이야기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오픈 엔딩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서는 읽고나서도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등장 인물들의 심리를 직접 묘사하기 보다는 그들의 사소해보이는 행동, 배경 설명, 음악, 상황 등을 무심한 듯 세심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택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장편에 비해 오히려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묘미, 혹은 어려움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한때 음악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음악에 대한 한때 열정을 이렇게 한 톤 낮추어, 배경인듯 주제인듯 짜넣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인정해주고 싶다. 이 책을 쓰는 가즈오 이시구로 역시 이 책의 화자들과 같은 한 사람이라고 봐도 될까.

지나간 로맨스. 그것은 단순히 남녀 사이의 로맨스뿐 아니라 지나간 꿈, 열정, 목표에 대해 품었던 연정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을 다시 살려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어쩌면 아주 젊은 세대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권째 읽었지만 그에 대한 흥미는 사그러들지 않으니, 다음엔 어떤 작품을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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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4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4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1-04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이 모두 나와
있어 다행입니다.

지난 가을에 열심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hnine 2018-01-04 21:36   좋아요 0 | URL
노벨상 수상 결정 이전에 그의 작품들이 다 나와있었다는 걸 알고 저도 의외다 했어요. 생전에 10권만 쓰는 것이 목표라는 말도 했다는데 다작에 중점을 두지 않아서일수도 있고 아무튼 독자에겐 기쁜 일이고 출판사도 그랬겠고요 ^^
제가 좀 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작품 <남아있는 나날>이 너무 좋아서 계속 읽고 있어요. 레삭매냐님께서는 지난 가을에 벌써 경험하셨으니 제 기분을 아시겠어요 ^^.

유부만두 2018-01-0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떠나지마....읽으시면? ...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좋지요? 쓸쓸하고 따뜻하고.., 맘도 아프고 ...
(좋은데 표현을 못하는 바보 마음입니다;;;;)

hnine 2018-01-08 05:51   좋아요 0 | URL
누군가 추천해주시면 좋겠다 했는데 유부만두님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책, 다음 차례로 읽어봐야겠어요.
쓸쓸, 따뜻하다는 말씀에 공감입니다. 누구든 사람이 산다는 일 자체가 그런가봐요 쓸쓸하기도 하지만 따뜻하기도 한.
따뜻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

수이 2018-01-07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를 떠나지마_ 요 소설만 읽었는데 작년에 읽은 소설 중에 제일 좋았어요. 유부만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쓸쓸하고 따뜻하고 아 사는 게 뭐 이따위람_ 하면서도 사는 게 좋아지더라구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힘이겠죠.

따뜻한 일요일 보내세요, hnine님.

hnine 2018-01-08 05:51   좋아요 0 | URL
무려 이 책이 작년에 읽은 소설 중 제일 좋았다고 하시니 꼭, 반드시, 기필코 읽어보고 싶어요.
저도 쓸쓸하고 따뜻하다는 말이 한참 동안 제 머리 속에 맴 돌것 같아요. 쓸쓸하기만 한게 아니라,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는 말이 참 좋아서요.

페크pek0501 2018-01-0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즈오 이시구로의 팬이 되셨나 봅니다. 행복한 일이죠.
이 꼼꼼하게 쓰신 리뷰에서 님의 성실성을 새삼 확인합니다.
저는 한 권도 읽지 못했는데, 저 세 권 중에서 한 권을 제게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책이 될까요?

hnine 2018-01-08 05:51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세권 중에서는 단연 <남아있는 나날>이고요, 제가 아직 안읽었지만 <나를 보내지마>도 다른 분들께서 추천해주시네요. 저도 다음 책으로 이걸 읽어보려고 해요. 언젠가 방송에어 정여울 작가는 <우리가 고아였을때>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고 하더군요.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행복한 일 같아요. 특히 그 대상이 작가일땐 더욱더 그렇지요 ^^
 

 

 

 

 

 

 

 

 

 

 

 

 

 

 

 

 

 

 

어제부터 이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첫 페이지, 첫 예문으로 이런 것이 나왔다.

 

The youngster who reads voraciously, though indiscriminately, does not necessarily gain in wisdom over the teenager who is more selective in his reading choices. A young man who has read the life story of every eminent athelet of the twentieth centry, or a coed who has steeped herself in every social-protest novel she can get her hands on, may very well be learning all there is to know in a very limited area. But books are replete with so many wonders that it is often discouraging to see bright young people limit their own experiences.

 

단어를 연습시키는 책이라서 voracious, indiscriminate, eminent, steeped, replete 이렇게 다섯 단어 학습을 위해 준비된 예문인데 단어는 둘째 치고 내용이 새길 만 하다.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해한대로 옮겨본다.

 

 

책을 선택적으로 골라서 읽는 십대보다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많이 읽는 젊은이가 꼭 더 지혜를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유명 운동선수의 일대기를 다 찾아 읽은 젊은이, 혹은 사회저항소설에 푹 빠져 손에 들어오는대로 다 읽어온 남녀공학 출신 여학생은 제한된 어느 한 분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거기서 배우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책 속에 너무나 많은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이유로 종종 똑똑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경험해볼 기회를 제한하게 되는 걸 보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다. 

 

 

아 참, 이 예문의 제목은 Reading wisely (현명하게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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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1-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삶이 복잡... 일도 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많고 운동도 해야 하고 친정에도 가야 하고 에너지는 모자라고 해서
책을 열심히 읽지 못한 2017년이었어요.
2018년엔 바보 같이 책 읽기만 하고 보낸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불가능한 희망사항임.)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쌓여 있는 책을 보면 한숨이...ㅋ

제 경험으론 요즘 ‘현명한 책 읽기‘는 속도 내서 책을 많이 읽기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꼼꼼히 보는 것입니다.
예전엔 다독이 현명한 책 읽기였죠. 내가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므로 이것저것 봐야 했으므로.

hnine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nine 2018-01-03 06:21   좋아요 1 | URL
일 하시고, 운동도 하시고, 친정 보살핌, 집안일...저라도 책 읽기보다 이것들을 제대로 잘 하는 것에 더 우선할것 같아요. 위의 인용문에서도 책이 너무 재미있고 유용하고 만족감을 주다보니 그 속에 빠져서 실제로 부딪히며 얻을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간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듯이요.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읽은 책의 권수가 아니라 어떤 한 권의 책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질적인 책 읽기에 저도 동감합니다~ ^^
어쩌면 책 읽기라는 행위는 복잡한 삶에서 한발 물러나와 여유를 누리고 나 자신으로 침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더 갈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삶이 복잡할 수록 책이 고픈지도...
pek님,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nama 2018-01-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는데 저도 hnine님 따라서 공부하고 싶네요.^^

hnine 2018-01-04 21:39   좋아요 0 | URL
nama님께서는 저보다 더 수월하게 책장을 넘기실지 모르겠어요 ^^ 그러면 그런대로 해볼만 할 것 같아요. 인용된 문장들 읽는 재미로요.
원래 제 아들 녀석이랑 같이 하자고 그러려고 사놓은 책인데 아들은 쳐다도 안보고 저만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