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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다 읽은지는 꽤 되었다.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책을 다 읽었어도 리뷰를 쓰지 않으면 책 읽기를 마치지 않은 기분이어서, 어쨌든 리뷰를 쓰기는 써야겠다고 큰 맘 먹고 책상위 책받침대위에 고정석으로 차지하고 있는 두꺼운 매뉴얼을 내려놓고, 그보다는 두껍지 않지만 나름 700여쪽 되는 이 책, <몰락의 에티카>를 올려놓는다. 아주 길거나 아주 짧은 리뷰를 쓰게 될 것을 예상하며.
같은 책을 읽었다고해서 읽은 사람 모두가 같이 받아들이고 비슷하게 느끼고 흡수하는 건 아니라는 걸 예전에 몰랐던 것도 아니건만, 이 책을 읽는동안 만큼 그것이 살에 새겨지듯이 느껴진 건 처음이다. 이 사람의 머리 속 바탕은 도대체 어떤 깊이, 어떤 두께이기에 이런 분석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99%, 아니, 95%쯤의 문장들이 전혀 식상한 데가 없이 읽힌단 말인가.
읽으면서 메모하기를 그만 두고 그냥 줄을 죽죽 긋고, 접기까지 해버린 책. 이제 다시 한장 한장 들춰보려 한다. 이미 읽을 당시의 느낌은 많이 가라앉았겠지만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처음 밑줄 그은 곳을 찾으니 23쪽. 프롤로그 다음 본문의 첫페이지이다. 첫페이지부터구나 이런.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라는 문장이다. 김영하, 강영숙, 박민규의 장편을 통해 본 '소설과 현실'이라는 부제를 붙인 평론이다. 현실을 그리는데서 끝나는 소설이 있고, 거기에 긴장을 더하는 소설이 있다면, 그보다 더 나아간 소설은 어떤 형식을 하고 있을까.
김훈 소설에 대한 단상에서는 "그(김훈 작가)의 소설이 품고 있는 그 막막한 무상함"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58쪽). "무상함을 통하지 않고는 초월성에 대한 어떤 기억도 불가능하다. 영원성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덧없는 것을 통해 파손된 상태로 나타난다"는 뒷따라 나오는 문장과 함께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막막한 무상함이란 표현을 김훈의 작품과 연결지으니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라는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말을 인용하고는 여기서 목적어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고 했다. 저자의 다른 책 <느낌의 공동체>도 그렇듯이 이 책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도 참 어렵다. 읽기 전에도 생각했고, 읽으면서도 줄곧 놓지 않고 있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도 뚜렷하게 이해가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몰락의 에티카라는 의미에 관해서.
윤리를 도덕과 같은 뜻으로 떠올리는 것 부터 그만 두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142쪽). 도덕이란 말에 강제성이 더 포함되어 있다면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썼다. 윤리 역시 개인보다는 공동체 차원에서 추구하는 '선(good)'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여전히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강제적 규준 보다는 내재적 규준이라는 스피노자의 얘기를 보태니 좀 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알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상태가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
문학을 몰락의 에티카(윤리학)라고 한 이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은 다음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상(ideal)' 혹은 '선 (good)'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학들은 속임수가 아닐까 하고 라캉은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선한 것들은 과연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말이다. 윤리에 대한 질문은 실재와 관련하여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라는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 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문득 일어난다. 그와 더불어 '나'의 삶이 고장나고 '세계'라는 현실이 붕괴한다. 그러나 그 고장과 붕괴 속에 진실이 있다면? 그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일이 윤리적인 것이다 (165-166쪽).
문학을 몰락의 에티카라고 이름 붙인 이유이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허윤진의 평론집에 대한 그의 단상에서도 드러난다. 고통이 인간을 "가장 윤리적인 상태"로 데려간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은 "나의 자족적 세계"가 파괴되는 사태를 경험하게 되고, 이는 인간이 본래 "타인과 상호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175쪽).
뉴웨이브 시의 특징으로 탈-고백 화법 (고백하지 않고), 반-계몽 화법 (계몽하지 않으며), 무-질서 화법 (질서를 도모하지 않는다)이라고 정리한 것 처럼, 때때로 긴 설명보다 더 확실하고 간단명료한 정리도 있다.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을 일러 에로스라 했고,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을 일러 타나토스라 했다 (410쪽)'. 이병률의 시 해설 중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두 마음이 오고 가며 생의 리듬을 이룬다고.
남진우, 김행숙, 이민하, 문혜진, 이병률, 장석남, 김근 시인의 시를 평하며 하나로 묶어 "열세번째 사도들"이라고 제목을 붙인 재치. 재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김수영과 이상의 시에 대한 그의 긴 글은 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한 적 없는 나 같은 독자에게도 시인을,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물론 저자만의 예리한 해부도구로 가능한 일이다. 학교 다닐때 처음 읽어보고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던 이상의 시 "오감도"에 이렇게 금방 감정이입이 되는 건, 그동안 내가 보낸 세월이 가져다준 댓가인가, 아니면 이 대체불가능한 평론가의 대체 불가능한 해석 덕분인가. 이상과 김해경은 그저 본명과 필명으로만 알았지, 그것이 어떤 다른 세계, 다른 이상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가.
기형도 시에 대한 오생근의 평론에 대한 저자의 또한번의 평론을 읽으며, 오생근의 글을 '에피큐리언의 초상'이라고 부른 저자의 단어 선택력은 탁월하다는 것을 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생근의 해석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를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펴나가는 전개 방법은 감히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소개한 다른 평론가 김영찬의 평론집 제목이 <비평극장의 유령들>이란다. 제목의 난해한 정도가 <몰락의 에티카> 못지 않다. 그가 극찬한 이 평론가의 책도 언젠가 읽어보게 될까?
문학 분야의 책에서 이렇게 과학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방법론이라고 하나? 느낌을 느낌의 차원에서 써나간 것이 아니라 분석의 정도, 깊이, 넓이가 이렇게 광대하게 펼쳐졌다가 통합, 그리고 다시 하나의 구심점으로 집약하기까지 그 작업을 해내는 평론가라는 사람의 작업이란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일런지.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바로는 무엇보다 그가 최소한 에피큐리언적 입장이 아니라는 것, '몰락'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 치우친 의미, 배척하고 싶을 수도 있을 단어를 철학적, 상징적 의미를 담아 최고의 위치로 격상시켰다는 것이 읽는 나를 더 책 속으로 끌어당겨, 생소한 분야의 이 두꺼운 책을 지루하지 않고 몰입하여 읽어 내려가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봄날, 벚꽃, 그리고 너'를 들으며 쓰려고 했다가, 귀찮아서 그냥 올려져 있는 CD를 틀어놓고 썼다. Schubert의 Fantasy F minor, 4 hand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