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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개성이 넘치는 시대인 것 같지만 의외로 모두 획일화 되어 가는 것 같은 시대이기도 하다. 타인의 소망을 소망한다는 말 처럼,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살아가는 용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기준과 소망을 쫓아서,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대로 살고자 하는 안이함이 더 우세해져 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마루야마 겐지 같은 사람은 어쩌면 이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적어도 '각오'를 하고 살아갈 것 같은 사람. 그 각오가 궁금했다.
과연 이 책은 궁금하던 것들을 충분히 해소시켜 줄 만 했다. 자라난 환경, 우연처럼 시작된 소설 쓰기가 인생에 걸쳐 몰두할 과업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어떻게 몰두하는지, 어떻게 버리고 사는지, 어떻게 욕망하며 사는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어떻게 삶을 단순하게 하는지. 그러면서도 현실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그는 적어도 자기의 각오나 소신으로 '벽'을 만들어 숨어버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사람은 활자의 세계에 탐닉하는 것보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자신의 눈으로, 귀로 온몸으로 현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위에 언어의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환상의 테두리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서려 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하여 코멘트를 일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도 없지 않다. 더럽다고 하면 더럽기 짝이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의 감동이야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246쪽).
고독은 역시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할 강 같은 것.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 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싷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강물 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250쪽).
서른 넘으면 절대 건널 수 없다고 말하는 고독의 강. 여기서 '서른'이란, 절대적인 시점을 말한다기 보다 그 전후 시기, 즉 확실한 자기의 길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그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젊음에 부여된 그칠 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251쪽).
불안과 고독이야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 그 보물을 스스로 내동댕이쳤다고 해서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문학은 이미 장난이다 (333쪽).
모름지기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개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거기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 좋은 쪽 보다는 결함있는 쪽으로. 그럼 소설가들은 이런 인물상을 지향하는 것인가. 결함과 불행의 인생을 그리는 것이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결함이 있는 인격을 관리하여 소설로 향하게 하는, 모순된 또하나의 재능을 갖고 있어야 돌파구를 찾지 못해 자살하고 마는 비극을 맞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274쪽).
그는 적어도 자살로 생을 마치진 않겠구나, 안심해도 되겠다.
마루야마는 알려져있는 것 처럼 자식 없이 부인과 둘이서 일본의 한 조그만 산 마을에 틀어박혀 살고 있다. 자연 속에서 자기 각오대로 사는 삶.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집중력과 지구력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면, 단조롭고 평범한 나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빼어난 작품이 튀어나온다는 식의 신화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바보다. 그런 타입의 예술가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조사해보면 좋은 작품을 집필중일 때는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활했다. 정도에 어긋날 만큼 흐트러진 생활을 했다 해도, 작품을 쓸 때만큼은 명백하게 자립과 독립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335쪽)
그의 작품 속에 산, 달, 물 등이 배경 이상의 의미와 상징을 가지고 많이 등장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심중을 알았으니 이제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소설로 돌아가 읽기를 계속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