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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평점 :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누가 묻는다면 나는 아직도 뭐라고 대답할지 준비해놓지 못했다. 준비해놓지 못했다기보다 아직 내 머리속에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말은 곧 그것에 대해 충분히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
사랑은 "진실도(眞實度)"라고 생각한다며, 억지로 만든 것 같은 말을 편지에 써서 보내주었던 대학교때 친구 생각이 난다. 상대방에게 얼마나 진실하고자 하느냐, 그게 곧 사랑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는 설명을 읽으며 무슨 소리야, 건성으로 읽었던 나.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한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있는 나에 비해 그 애는 그때 벌써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거지.
저자에게 사랑은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보이고자 함'. 이 책의 제목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내 나름대로 풀어서 써본 것이다.
웬 사랑 타령이냐고?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들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26쪽)
미성숙한 소년들이었구나 나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다. (26쪽)
이 구절은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라는 제목으로 쓴, 영화 <러스트 앤 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대한 비평글에 나온다. 이 영화를 나는 아직 못봤지만 중간에 영화의 내용을 살짝살짝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에, 아니, 영화 내용을 몰라도 글 속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에, 읽는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하든지 저자는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말하지 않는다. <케빈에 대하여>를 그렇게 자세히 파헤쳐 분석하고 있음에도 영화 속의 엄마 에바나 아들 케빈, 그 어느 한쪽을 더 공감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에바가 케빈에게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라고,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말을 했다는 인용글 (51쪽)을 읽으면서, 또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것,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에게 지독하게 구는 나쁜 아들이 되는 것이 더 견딜 만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해석 (53쪽)을 읽으며, 저자는 어쩌면 케빈의 소시어패스적인 행동 뒤에는 엄마가 있다고 해석하는구나, 라고 느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무르>라는 영화를 보지 않길 잘했다고,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죽어가는 자에게 정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정서적 고립이다 (59쪽)
죽어가는 자란 꼭 죽음을 눈 앞에 둔 주인공 안느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는거니까. 늙어가는 과정은 곧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나는 얼마나 한참동안 이 영화의 기운에서 헤어나지 못했을것인가.
이 영화에 대한 비평 속에 '왜 서사(이야기)라는 것이 필요한가' 라고 시작하는 구절은 문학의 역할에 대한 멋진 비유이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하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65쪽)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대한 글에서 저자는 시야말로 마음과 특권적인 관계를 맺는 장르라고 했으며, 시는 마음의 투명한 재현을 추구하는 1인칭의 독백이기 때문에 시에 어떤 화자가 등장하건 그는 곧 시인 자신이라고 했다. 그가 문학 중에서도 시 (poem이 아니라 poetry)에 얼마나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의 전작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는 있을 것이다.<시>란 영화에서 주인공 양미자 씨가 시가 아니라 소설을 썼더라면? 이 영화에 대한 글의 소제목이기도 하다.
<그래비티> 웅장하고 광활한, 그래서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던 그 영화.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허무함 속에는 사실 '왜 지구로 돌아가려 하는가'라는, 단순히 허무감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질문이 있었고, 그것은 '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이것이 철학의 유일한 근본문제라고 했다는 물음까지 이어지게 한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라이언 (샌드라 블럭)은 남편도 없고 자식도 사고로 잃어 그 충격으로 그저 매일 운전하듯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꼭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라는 물음. 영화를 보며 그냥 허무함을 느꼈을 뿐 이런 문제까지 생각 못했다가 책 속에서 만나는 이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저자는 물음을 던져만 놓고 답없는 질문이라며 글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신형철이란 사람은,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책임있는 글, 사유의 결과로 글을 쓴다는 믿음을 주는 이유가 있다. 생명을 그 자체로 긍정하기. 이것도 하나의 가능한 대답으로 생각한다는 겸손함과 함께 내놓은 결론이다. 삶이 아니라 생명. 그것은 그 자체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얕은 감정만 발달한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글을 읽으며 그저 울컥하는게 전부이다.
<노예12년> 2013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 감독의 이름이 스티브 매퀸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가 이 스티브 매퀸은 내가 아는 그 스티브 매퀸이 아님을 알아내고 내 연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영어도 Steve McQueen으로 똑같다니.
한편의 글을 쓰기 위해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1000억개의 뇌세포 중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10억개 정도라는데, 이 사람이 한편의 글을 쓰는 동안 사용하는 뇌세포는 일시적으로나마 폭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해본다. 문학에 대한 애정, 애정에서 비롯한 책임감, 책임감있는 사유, 한줄의 글도 건성으로 대충 쓰지 않겠다는 책임감. 그것은 곧 그가 말한 다음 구절과 일치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뽑은 부분이다.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문법적으로 틀린 데가 없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을 말한다. (27쪽)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라고 말한 그는, 자기의 그 생각을 '문학'에서도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글 중 212쪽 아홉번째줄, '라이언을 태운 소유즈가 우주선의 파편들과 함께 지구를 향해 착륙하는 장면은 무심코 봐도 지구라는 난소를 향해 정자가 돌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림이 그려지는데 '난소'가 아니라 '난자'가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