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의 대지 ㅣ 펭귄클래식 9
생 텍쥐페리 지음, 윌리엄 리스 해설,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영화 <그래비티>를 보면서 절대고독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지구도 아닌 우주 한공간에 오롯이 혼자 유영하는 주인공을 보면서이다. 우주 공간까지는 아니지만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비행기의 조종사. 교신도 끊기고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그 상황 역시 보통 사람이 느끼는 고독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읽었다. 그것은 어쩌면 고독을 넘어서 공포감마저 주지 않을까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공포감 보다는 정제되고 날카로운 상념의 세계를 경험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욕망, 다툼, 갈등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그 너머의 것을 보는 경험한다.
인간의 증오, 우정, 기쁨이라는 위대한 연극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가! (66쪽)
우리의 삶이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연극과 같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글에서 읽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겠지.
그가 비행하며 예기치 않은 상황에 부딪힐때 그가 느낀 것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그냥 고독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나의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땅에 매여 있었고 그렇게 내 무게를 대지에 맡기는 데 일종의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중력이 나에게는 사랑처럼 절대적으로 다가왔다.
(...)
나는 내 처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해 있는 처지를. 모래와 별 사이에서 빈 몸으로 있는 처지를. 넘치는 침묵으로 내 생명의 극점에서 이리도 멀리 떨어져 나온 처지를 말이다.
(...)
나는 단지 모래와 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숨을 쉰다는 아늑함만을 의식하고 있는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이 꿈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꿈은 샘물처럼 소리도 없이 내게로 왔다. (72, 73쪽)
꿈. 그 '꿈같은' 느낌을 그는 다음과 같이 언어로 묘사한다.
거기에는 목소리도 이미지도 없었다. 다만 무엇인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느낌,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이미 반쯤은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우정 비슷한 느낌만이 있었다. 이윽고, 나는 이해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기억이 선사하는 매혹에 나 자신을 맡겼다. (73쪽)
아, 참 아름답게 문장을 쓰는구나 그는.
곧이어 그가 자기집 가정부 할멈에게 자기의 첫비행 경험을 말해주던 때를 추억하는 대목이 나온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며 늙어가는 그 가정부 할멈은 상상도 못할 세상을 그는 열심히 말해주지만 할멈은 열심히는 들어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그가 들려주는 그의 경험을 할멈이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생각과 믿음, 자기가 겪은 경험으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저자는 할멈을 딱하게 여긴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때의 그 할멈의 자리를 대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흑인 노예 바르크의 이야기는 조난당하여 거의 죽음까지 이르는 대목과 함께 이 책에서 잊지 못할 대목이다. 제발 자기를 고향에 데려다 달라는 흑인 노예의 간청을 들어주기 위해 그가 노예로 있는 부족으로부터 돈을 주고 노예를 일부러 사서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지만 그의 자유의 삶이 어떨거라는걸 예측한다. 노예 시절보다 결코 쉬운 삶이 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는 오히려 점점 더 허물어 가고 해체되어 갈거라는 걸.
자기의 목숨이 다한 걸 느낄때 노예들이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하는지도. 얌전하게 모래 위로 몸을 눕히고 움직이지 않은 채 서서히, 긴 임종을 맞이한다. 그렇게 대지와 하나가 되어가서 태양에 바싹 마르며 땅에 흡수된다. 잠과 땅에 대한 권리를 얻은 것이다. 그런 노예를 보며 쌩떽쥐베리는 생각한다. 한 인간의 죽음 속에서 미지의 한 세계가 죽어가고 있다고. 그의 마음 속에거 꺼져가는 영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한다. 점점 허물어가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책 제목의 의미가 점점 파악이 되어간다.
전쟁을 마다치 않는 사람에게 전쟁의 공포를 납득시키고 싶다면 절대로 그를 야만인처럼 대해서는 안된다.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해야 한다.(201쪽)
반대자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이해해야한다고. 그의 위에 서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와 함께 서라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그의 입장을 이해해야 그와 다른 나의 의견도 그에게 이해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대들의 진리가 지닌 증거를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 당신이 옳다 . 당신들 모두가 옳다. 무엇이든지 논리로 증명될 수 있다. 심지어는 이 세상의 불행이 곱사등이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옳다.
본질적인 것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잠시 분열을 잊어야 한다. 분열이란 일단 인정되는 순간 요지부동의 진리를 지닌 코란 한 권 분량의 경전을 끌어내고, 거기서 파생되는 광신도 만들어낸다. 사람을 좌익와 우익, 곱사등이와 비곱사등이,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 등으로 구분 지을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알다시피 진리란 세계를 단순하게 하는 것이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논쟁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반증 또한 될 수 있다. (203,204쪽)
긴 구절을 기꺼이 옮겨 적었다. 이 책을 다 읽은지 일주일도 채 안되었는데 이 구절을 벌써 대화중에 인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 같다.
별과 사막 사이의 공간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존재인가 생각하던 그가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 놓고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아무리 하찮은 역할일지라도 그 역할을 깨달을 때, 그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그때에만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니까. (208쪽)
그리고 결론과도 같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이 마지막 한줄의 문장은 앞으로 읽으실 분들을 위해 여기에 적기를 포기한다).
그는 삶을 무척 사랑했구나. 사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책 한권이 통째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계획도, 각오도 없이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으며 가라앉아 있는 나를, 이 책이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