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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ㅣ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1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단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이지만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차라투스트라'라는 생소한 단어에서 걸렸다. '말했다'라고 한것으로 보아 사람 이름인 것 같은데, 과연 차라투스트라는 누구일까. 가상의 인물일까, 실제 인물일까. 니체 자신을 일컬어 붙인 이름일까.
그 답은 책 중의 해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원래 태양숭배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교조 '조로아스터'의 독일어 이름이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가 선과 악, 신과 악마라는 이원론을 주창한데 반해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조로아스터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을 주창한다. 니체가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극복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를 극복하여 새롭게 변화한 존재이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니체는 왜 자기의 대변인으로서 조로아스터 교조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었다는 것을 고지하고 신 뒤에 오는 초인 (위버멘쉬)으로 그 자리를 대치시킨다.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던져주고 억누르고 현재를 희생하며 일생을 허비하게 한다. 반면 초인은 건너가는 자, 넘어가는 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자유정신이 반영된 존재이다. 스스로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초인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인간을 향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존재와 장소를 예로들며 설명한다. 1부 22개 소제목 붙은 글은 이렇게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제자들, 벗들에게 강연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강연을 마치고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을 떠나 산속으로 떠난다.
니체는 인간의 사상의 출발점이자 완결점, 중심점을 모두 "신"에게서 구하려고 하였고 그와 동시에 다른 각도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철학자들과 달랐다. 결국 신은 인간을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존재라고 결론, 신의 자리를 대신해 "초인"의 존재를 창조해낸다.
신이 요구하는 인간과 초인이 지향하는 인간상을 비교하며 읽는 동안 니체가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니체는 "복종"하는 인간이 아닌, "창조"해나가는 인간을 말하고 싶었다는 게 1부까지 읽으면서 잡은 나름의 감!
참으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96)
죽음을 설교하는 자는 곧 영혼의 결핵 환자, 살아있는 관. 이들은 병자나 노인, 시체와 마주치면 즉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정된 것은 그들일 뿐이고, 생존의 한쪽 얼굴밖에 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고통일 뿐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만 살도록 하라! 고통일 뿐인 삶을 그만두도록 하라! (102-103)
2부
동굴에서 한동안 사람들을 피해 홀로 지내다가 산속으로 귀환하는 차라투스트라.
2부 첫부분을 초인에 대해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찌기 사람들은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신을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초인을 말하도록 가르치겠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므로 나는 억측이 그대의 창조하는 의지보다 멀리 나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대들은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침묵하라!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을
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57)
신이란 반듯한 것을 모두 구부러지게 만들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모두 돌게 하는 사상이다. (158)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고,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159)
이제, 신과 인간과 초인의 관계가 더욱 선명하게 머리 속에 자리 잡힌다.
성직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누가 그들의 (성직자들) 구세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줄 것인가! (165)
‘구세주’로부터
‘구원’해내야 한다는 모순.
아, 세상에 동정하는 자들보다 더 어리석은 짓을 하는 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동정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보다 더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 자신의 동정심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언젠가 악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신에게도 지옥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은 죽었다. 인간을 동정하는 바람에 신은 죽어버렸다” 그러므로 동정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모든 위대한 사람은 동정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랑의 대상조차도 창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164)
다시 그의 제자들, 벗들과 이별하고 혼자 길을 떠나는 차라투스트라.
3부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대부분 홀로 있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우울하고 강렬하다. 상식과 질서에 반하는,
거침없는 반론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인간의 모든 미래가 어떤 자들 때문에 가장 위험한가? 선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선하고 의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이를 체득하고 있다. 아직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라고 말하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끼는 자들 때문에.
악한 자들이 아무리 큰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선한 자들이 끼치는 해가 가장 큰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비방하는 자들이 아무리 큰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선한 자들이 끼치는 해가 가장 큰 것이다. (333)
선이 지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표로 살아야 하는가.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선한 자들이란 ‘신’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인간의 의지는 무시된 일방적인 의미의 선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341)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고발하고, 자신을 ‘죄인’이니 ‘십자가를 진 자’ 니 ‘속죄자’ 라 부른다.
3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삶’을 ‘너’라고
부르면서 계속되는 문답을 나눈다. 즉 차라투스트라 혼자 묻고 답하는 형식이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지금까지 얘기한 ‘삶’과 결별하고 ‘영원’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면서 ‘오, 영원이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이
되풀이된다. 삶과 결별하고 영원으로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3부의
이 마지막 부분이 이 책의 클라이맥스이자 니체의 지적 열정이 최고로 표출된 곳이라고 하고, 초인과 함께 니체의
대표적 사상의 하나인 영원회귀이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때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히 혼자이다.
4부
원래 3부로 책을 끝낼 생각이었으나 일년 후 니체는 4부를 덧붙인다.
신은 죽었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 신이 그대들에게 가장 위험했다. 신이 무덤 속에 눕고 나서야 그대들이 다시 부활했다. 이제야 위대한 정오가 오고,
이제 보다 높은 인간이 주인이 된다. (433,434)
여기서 니체는 초인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건너가는 자로서 “보다 높은 인간”이라는 유형을 들고 있다.
4부의 마지막은 차라투스트라의 독백으로 끝난다.
“나의 마지막 죄로 남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동정이다. 보다 높은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491)
니체가 이 책의 집필을 마친 것이
1885년인데, 정신 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1888년이었다. 어쩌면 이 책을 쓸 당시 이미 미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정신이상과
신체마비로 투병하다가 2년 후인 1890년에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 한번 하지 않고 일생을 살다 간다, 즉, 니체가 "낙타"에 비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혼자의 머릿속에서 이러한 인간이었다가, 신을 이해하여 그에 근접하려 하였다가
신을 비판하였고, 초인을 창조해냄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다. 그는 어쩌면 인간과
신과 초인을 모두 경험하면서 ,이 많은 상징과 비유 속에 그가 경험한 세계를 설명하려고 몸과 정신이 부서지는 생을 살다 갔는지 모른다. 56년의 생애가 짧지만 길었을 수도.
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다시 시작점에 서있는 느낌이다. 마치 그의 영원회귀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