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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평점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고나서 이번엔 좀 가벼워보이는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에서 골라든 책이었는데, 큰코 다쳤다. 가벼운건 193쪽이라는 분량만 그럴뿐, 가볍게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 저자가 <나무를 심은 사람>의 그 '장 지오노' 맞나 할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책.
본문 들어가기 앞서 가계도, 마을 지도, 인물 소개 등이 나오는 책에 대해선 뭔가 복잡한 내용이 펼쳐 질 것 같아 불길한 예감부터 가지는 경향이 있다. 가볍게 생각했던 예상은 첫 장을 펼치자 마자 나오는 가계도를 보는 순간 아닌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차라리 그리 복잡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이 작가의 글 쓰는 스타일과 표현 방식이었다. 곱씹어야 하는 표현, 한번 읽어서 의미를 알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 쓰기가 특기인듯 즐기는듯, 사건의 전개를 따라 휙휙 읽어나갈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한 예를 들자면 148쪽 문장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무척이나 얼떨떨한 상태에서 그가 외투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비에 젖은 모직 외투는 여전히 무거웠고 손에 들어보니 꽤 무게가 나갔다. 그의 어깨까지 외투를 덮어주기 위해서 나는 발끝으로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챕터가 끝나는 문장이고 그냥 읽고 넘어가도 무리는 없지만 알고보니 여기서 외투는 의복의 한 종류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외투, 그리고 외투를 덮어주기 위해 발끝으로 서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순간이라니. 이 문장이야 어떻게 우연히 그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서 읽은 페이지에서 놓치고 그냥 읽어넘긴 부분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몇 페이지 다시 읽어보긴 했는데,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모든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첫 페이지, 이 작품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인 조제프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어느 겨울 날 이 도시에 도착했다. 그는 우리에게 그다지 예의바르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별로 돌아다니는 일도 없이 곧장 카페로 와 카드 놀이를 했는데, 말을 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는 늘 이곳의 유지들과 카드를 쳤지만, 자신이 상대를 고르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카드 상대를 골랐다면, 우리는 그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고르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이 문장에서 화자가 판단하듯이 '우리'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그의 착각이었다는 것도 읽어가다 보면 알게 되어 다시 되돌아와 이 문장을 확인해야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조제프의 의도대로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니까 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류마티즘 발작이 일어나 이 때문에 삼주 이상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발작이 끝나자 나는 문을 닫고 다시 화초를 돌보기 시작했다.
담담하고 무심한 듯한 마무리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발작과 발작후 다시 화초 돌보기가 의미하는 것 역시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화초 돌보는 생활로 돌아가 살다가 또 어느 날 발작이 찾아오겠지. 코스트가의 운명적 비극이 그렇게 내려오지 않았던가. 운명의 휘두름은 마지막이 없다.
조제프의 변호사이자 이 소설의 화자가 곱추라는 것도 저자는 마지막에야 밝힌다. 그것도 괄호안에 이렇게.
(내가 곱추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다음과 같은 시니컬한 대목도 나온다.
아내가 남편을 학대하기 위해 자식을 필요로 하듯, 그리고 자식이 없으면 똑같은 용도로 종교를, 나아가서는 자기가 주도권을 쥘 수 있게 하는 것 일체를 필요로 하듯, 그녀는 운명을 학대하기 위해 자크를 필요로 했다.
이기주의는 그 극단의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다. (76쪽)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기주의. 운명을 학대하기 위해 이용되는 사랑. 몇번을 읽고 다시 읽어 겨우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던 문장중 하나이다.
한 가문의 운명적 비극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과연 운명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운명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77, 178쪽)
이말은 곧, 운명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 삶의 허무함이라기 보다는, 운명을 피해가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결국 운명에 조롱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함을, 운명도 비극도 결국 인간이 지어낸 것임을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목 <폴란드의 풍차>의 유래는 책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 나오긴 나온다. 모른다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