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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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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더 빨리, 더 잘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우리가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럭 저럭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이런 공감과 위로를 주고 받을 사람이 늘 주위에 있어왔기 때문 아닐까.

여기 키 190cm, 몸무게 250kg의 남자가 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갈수도 없어 칩거 생활 10년째인 아서. 대학 교수였으나 오래 전에 학교를 그만 두고 은둔생활을 한다. 더 이상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다. 하루 종일 그는 예전에 자기에게 다정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 사람들이 다시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먹거나 자거나 TV를 본다.

그리고 샬린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아서가 아직 대학 교수였던 시절 그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하나였다. 어렵게 어렵게 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아서의 수업을 들으며 그에게 호감을 느껴 아서를 찾아가게 되고 그런 샬린에게서 아서는 대번 그녀의 외로움을 읽어내고 친절하고 따뜻하게 그녀의 말을 들어준다. 그녀가 결국 한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후로도 아서와 샬린은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지내다가 어느날  편지 연락 마저 끊기고 만다.

그리고 샬린의 아들 켈. 고등학교 졸업반. 몸이 많이 아픈 엄마 샬린이 직장마저 잃게 되어 어려운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엄마였다.

이 세 사람의 연결 고리는 한동안 연락이 끊겨 있던 샬린이 어느 날 불쑥 아서에게 전화를 걸어옴으로써 이 세사람 사이에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샬린은 아서에게 자기 아들 켈의 대학 진학 문제를 좀 도와달라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고, 이런 전화를 받고 아서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지럽고 지저분한 집안 정리를 시작하며 그녀의 다음 연락을 기다린다.

아서에게는 심각한 체중의 문제, 거기서 비롯된 은둔 생활이라는 무게가, 샬린에게는 건강의 문제, 생활고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 같다는 무게, 그녀의 아들 켈은 결국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문제, 엄마를 그렇게 보내야 했다는,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라는 무게가 있다.

작가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해나갔다. 어떻게 보면 모두 loser들. 그렇게 생을 마쳤거나 앞으로 남은 인생도 loser로서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인생이지만 작가는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만은 않는다. 이런 사람들끼리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무엇을 어떻게 주고 받는지를 담담하지만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만약 이들이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 아니 이미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가 되어 있는 삶의 무게를 적극적으로 헤쳐나감으로써 삶의 다른 면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결말이었다면 이 소설은 비현실적이고 그 가치는 반감되었을 것이다. 영국 타임즈지는 이 책을 "가장 감성적이면서도 비감성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감성적인 내용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두번이나 눈시울을 적시지 않았을 것이다.

담담한 분위기, 장황하지 않은 문체로도 작가가 작품 속의 인물들을 얼마나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써나갔는지 충분히 느껴진다. 작가는 이들을 잠시라도 세상으로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가능할지 어떨지, 그것까지 작가가 결정하여 보여주지 않은 것은 실제로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겠지.

이런 작고 힘겨운 몸짓이 이 세상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짓, 몸짓으로 오늘도 버텨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인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각자 느끼고 있는 삶의 무게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용히 알려주었고, 독자는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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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1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작품도 있었군요! 누군가의 리뷰로 부터 내용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낯설지가 않네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듯 해서 저도 구해야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작품 모으는 취미가 있는지라..^^;;

hnine 2016-03-13 23:54   좋아요 0 | URL
저는 보관함에 한동안 담아놓았다가 좀 뒷북 치는 셈이고요, 2,3년 전에 이 책 리뷰가 꽤 많이 올라왔었어요. 그래서 낯설지 않으실거예요.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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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자. 시몬느 보봐르와의 계약 결혼. 노벨문학상 거부.

사르트르 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 책은 1905년 생 사르트르가 1964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59세때 펴낸 그의 자서전이고 우리나라엔 2008년에 처음 번역본이 나왔다.

처음 몇 페이지에 걸쳐 자서전 답게 가족 계보 설명이 나오고, 버릇처럼 그림으로 가계도를 그리면서 읽다가 알았다. 의사이자 철학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사르트르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사르트르의 외할아버지와 슈바이처의 아버지가 형제지간이다.

그가 태어난 다음 해 아버지를 여의고, 이후로 유년 시절을 온순하고 사랑이 넘치는 엄마와 함께 외가에서 외할아버지의 기대와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성장한다.

그의 명상의 대상은 나였다. 그는 정원의 간이 의자에 앉아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맥주잔을 놓고서는 내가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무슨 예지를 찾아보려고 하고 실제로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33쪽)

여기서 "그"는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대신 주위에서 자기 처지가 불쌍하다면서 존중하고 떠받들어주어 기뻤다고 썼을 정도로 그는 큰 결핍을 못느끼고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보통의 아이와 좀 달랐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달랐다. 내가 하는 말에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해석하여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 이후로 이 당찬 어린이는 그것을 의식하여 어른들에게 말을 한다. 그의 나이 일곱살때 일이다.

나는 전도유망한 강아지였다. 나는 예언을 한다. 내가 어린애다운 말을 하면 어른들은 그것을 명심해두었다가 내 앞에서 되풀이한다. 나는 또 다른 말을 하는 기술도 배운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할 줄도 알게 된다. 시치미를 떼고 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숙성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가 곧 시(詩)가 된다. 비결이라야 아주 간단하다. 귀신과 우연과 허공을 믿고 어른들의 말들을 그대로 빌려 와 그것을 서로 뚜들겨 맞추고 건성으로 되풀이하면 된다. 요컨대 나는 진짜 신탁(神託)을 내리는 것이 되며 듣는 사람들은 가각 내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35쪽)

그러고보니 이 자서전의 제목이 "말"이로구나. 어릴때부터 그는 말로 자기를 보여주는 방법, 말이 가지는 가치와 허상, 즉 말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뛰어놀며 클 나이에 그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보냈고, 그 속에서 온갖 상상을 다하기를 즐겼다. 책속의 어떤 인물이 그에게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친구였고 때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어낸 신(神)이 자기에게 내리는 임무를 듣기도 했다. 다름아닌 글을 쓰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 성령으로부터 그런 계시를 받는 "상상"을 한 그는 왜 자기가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냐고 따져 묻기까지 한다. 내가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이냐고. 그러자 성령은 대답한다. 그건 아니라고. 그렇다면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어찌 책을 쓸 수 있겠냐고 되묻자 성령은 대답한다. 정진을 거듭하면 된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스스로 정한 것이다.

나는 선택되고 지명되었지만 재주가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모든 성공이 나의 기나긴 인내와 불행으로부터 태어나리라. (201쪽)

 

그는 왜 쉰넷의 나이에 이 자서전을 쓰게 되었을까.

읽다보면 그가 단순히 글 쓰는 일에 대한 만족스런 회고를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오히려 문학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정신착란, 신경과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글 쓰는 일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다고, 습성이요 본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을 알아감과 동시에 고질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무렵 사르트르의 사회주의 단체 활동, 저항운동, 지하잡지 기고 등, 현실 참여 활동 범위를 넓혀가면서 정치 참여와 문학과의 갈등이 커져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은 일종의 가면이며 기만 행위라는 자성, 자신과 문학과의 관계를 정리해보고자 하는 자성 행위의 일환으로 이 자서전을 쓰게 된것이 아닐까라는 짐작이다.

그래서 그는 문학과 결별을 하였는가?

습성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는가보다.

 

좁은 의미의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문학에 더욱 깊은 뜻을 부여하게 한 것이다 (290쪽, 작품 해설 중에서)

 

나이 일곱살에, 말이 자기를 존재하게 하리라는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평생 그것으로 자기 존재를 세워온 실존 주의자.

이렇게 매혹적인 자서전도 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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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2-2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목도 그렇고 h님 이렇게 쓰시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사르트르 지금까지 읽어 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hnine 2016-02-26 19:53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소설인줄 알았어요. 제목이 전혀 자서전 제목같지가 않잖아요?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 그리고 책이 가까이 있었다는 것. 두 가지 조건이 사르트르라는 특별한 천재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릴만 합니다!

2016-02-29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2-29 17:21   좋아요 1 | URL
넵~ 영광입니다~ ^^
 
인체극장 - 제대로 풀어낸, 해부학 교과서 10대를 위한 지식만화 1
마리스 윅스 글.그림,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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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들의 장단점을 이 책 역시 보여준다.

인체의 가장 기본 구조인 골격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해골이 등장, 친숙하고 쉬운 말로 사람 몸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는 아이디어는 좋다. 우리가 옷을 입을때 속옷부터 겉옷의 순서로 입어가듯이 뼈대 즉 골격계를 시작으로 '조립식'설명을 해나간다.뼈에 살을 붙이고 (근육계), 사람은 산소 없인 살 수 없으니 숨쉬기 장치 (호흡계)들을 갖추게 한다음, 숨쉬기를 통해 들어온 산소 배급 시스템 (순환계)를 갖춘다. 활동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음식을 연료로 에너지를 만드는 장치 (소화계)를 설명한다음, 에너지 만들면서 나오는 찌꺼기 처리 시스템도 갖춰야지 (배설계). 이런 일들이 시기 적절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절하는 배후조절장치도 필요하다 (내분비계). 모든 생명체는 영원히 살 수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자식을 만들어야 한다 (생식계). 이렇게 하나하나 갖춰가는 순서대로 진행되는 방식이 참 좋았다. 각각의 장기 (위, 폐, 신장, 심장, 등)별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렇게 기관계 단위로 설명하니 전체적으로 개념을 잡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반면, 단순화된 그림과 축약된 설명은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정리하고 보충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기초부터 이해를 쌓아가야 하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설명 부족의 단점으로 작용한다 것은, 이 책만의 한계가 아니라 이런 그림식 해설서의 한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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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2016-02-18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들을 정말 많이 읽으시는데 제가 궁금한 책들을 여기서도 발견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혹시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 내용을 떠나서 가독성도 뛰어나고 정말 완벽한 문체와 문장력을 가지고 있는 책이 있었나요? 그런 책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는 것 같아요 카스테라 라는 책 아세요? 박민규씨의 카스테라 제가 읽은 작가들 중에 내용은 솔직히 재미는 없었으나 문체나 이런 면에서는 참 괜찮다고 느꼈어요 혹시 쓰니님도 정말 완벽하다고 싶은 책이 있었다면 어떤 책이었는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까요?

hnine 2016-02-18 06:32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제가 완벽을 얘기할 자격도 없지만 완벽하다고 꼽은 책도 아직까진 특별히 없네요. 재미있었던 책, 영향을 받은 책들은 많지만요.
 
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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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고나서 이번엔 좀 가벼워보이는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에서 골라든 책이었는데, 큰코 다쳤다. 가벼운건 193쪽이라는 분량만 그럴뿐, 가볍게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이 저자가 <나무를 심은 사람>의 그 '장 지오노' 맞나 할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책.

본문 들어가기 앞서 가계도, 마을 지도, 인물 소개 등이 나오는 책에 대해선 뭔가 복잡한 내용이 펼쳐 질 것 같아 불길한 예감부터 가지는 경향이 있다. 가볍게 생각했던 예상은 첫 장을 펼치자 마자 나오는 가계도를 보는 순간 아닌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차라리 그리 복잡하지 않았으나 문제는 이 작가의 글 쓰는 스타일과 표현 방식이었다. 곱씹어야 하는 표현, 한번 읽어서 의미를 알기 어려운, 상징적인 표현 쓰기가 특기인듯 즐기는듯, 사건의 전개를 따라 휙휙 읽어나갈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한 예를 들자면 148쪽 문장에 이런 것이 있다.

나는 무척이나 얼떨떨한 상태에서 그가 외투를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비에 젖은 모직 외투는 여전히 무거웠고 손에 들어보니 꽤 무게가 나갔다. 그의 어깨까지 외투를 덮어주기 위해서 나는 발끝으로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챕터가 끝나는 문장이고 그냥 읽고 넘어가도 무리는 없지만 알고보니 여기서 외투는 의복의 한 종류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외투, 그리고 외투를 덮어주기 위해 발끝으로 서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순간이라니. 이 문장이야 어떻게 우연히 그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서 읽은 페이지에서 놓치고 그냥 읽어넘긴 부분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몇 페이지 다시 읽어보긴 했는데,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모든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첫 페이지, 이 작품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인 조제프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어느 겨울 날 이 도시에 도착했다. 그는 우리에게 그다지 예의바르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별로 돌아다니는 일도 없이 곧장 카페로 와 카드 놀이를 했는데, 말을 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그는 늘 이곳의 유지들과 카드를 쳤지만, 자신이 상대를 고르지는 않았다. 만일 그가 카드 상대를 골랐다면, 우리는 그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고르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이 문장에서 화자가 판단하듯이 '우리'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그의 착각이었다는 것도 읽어가다 보면 알게 되어 다시 되돌아와 이 문장을 확인해야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조제프의 의도대로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니까 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류마티즘 발작이 일어나 이 때문에 삼주 이상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발작이 끝나자 나는 문을 닫고 다시 화초를 돌보기 시작했다.

담담하고 무심한 듯한 마무리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발작과 발작후 다시 화초 돌보기가 의미하는 것 역시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화초 돌보는 생활로 돌아가 살다가 또 어느 날 발작이 찾아오겠지. 코스트가의 운명적 비극이 그렇게 내려오지 않았던가. 운명의 휘두름은 마지막이 없다.

조제프의 변호사이자 이 소설의 화자가 곱추라는 것도 저자는 마지막에야 밝힌다. 그것도 괄호안에 이렇게.

(내가 곱추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다음과 같은 시니컬한 대목도 나온다.

아내가 남편을 학대하기 위해 자식을 필요로 하듯, 그리고 자식이 없으면 똑같은 용도로 종교를, 나아가서는 자기가 주도권을 쥘 수 있게 하는 것 일체를 필요로 하듯, 그녀는 운명을 학대하기 위해 자크를 필요로 했다.

이기주의는 그 극단의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다. (76쪽)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기주의. 운명을 학대하기 위해 이용되는 사랑. 몇번을 읽고 다시 읽어 겨우 의미를 헤아릴 수 있었던 문장중 하나이다.

한 가문의 운명적 비극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과연 운명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운명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77, 178쪽)

이말은 곧, 운명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 삶의 허무함이라기 보다는, 운명을 피해가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결국 운명에 조롱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함을, 운명도 비극도 결국 인간이 지어낸 것임을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제목 <폴란드의 풍차>의 유래는 책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 나오긴 나온다. 모른다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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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2-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려워라. 그래서 더욱 읽고 싶어지는군요.
예전엔 작가의 의도를 중시해서 알고 싶어하며 책을 읽었다면
요즘은 그냥 읽혀지는 대로 제 방식대로 읽습니다. 문학의 다의성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느낀 게 답이다, 하는 것이죠.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인간에 대해 어떤 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소설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더군요.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셈이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완독을 축하합니다. ^^

hnine 2016-02-17 14:3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든 책 마다 작가의 의도를 읽으려고 하지 않고, 읽으려고 한다고 다 읽히지도 않고요 ㅠㅠ
그런데 우연히 작가와 코드가 만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처럼요.
pek님께서도 이책 한번 읽어보세요. 보기보다 만만하지 않은 책이거든요. 작가가 표현하는 방식도 좀 특이해서 독자가 이해하든지 말든지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시니컬한 것 같기도 하고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기로 한 것을 끝까지 다 읽어냈다는 것이 저에게는 제일 큰 의미이고요, 동시대 작가라고 하는데 톨스토이 소설 읽었을때 더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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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여쪽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1,2,3권중 제일 가독성 있었다고 꼽고 싶다.

마지막까지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어떤 서평이나 정보를 의도적으로 안보려고 했다. 책 읽을 때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고 이 작품도 만약 1권 시작하고부터 대작의 느낌에 서서히 젖어들어가며 읽어갔더라면 굳이 끝까지 나 자신의 느낌을 지켜보려고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숨겨 놓은 보석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런 보석이 숨겨져있기는 한것인지, 등장 인물중 작가가 자기의 아바타로 내세운 인물이라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읽었다.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즉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죽음으로 시작된 1권의 내용이, 3권은 누가 죽였는지를, 왜 죽였는지를 밝히기 위해 혐의 인물을 심문하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누가 봐도 의견이 크게 갈리지 않을, 속물의 표본 같은 인물이다. 양심보다는 탐욕과 욕정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 돈으로 원하는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의 세 아들과 한 명의 사생아는 각각 성격도, 처지도 같지 않아서 작가는 과연 이 다섯 인물중 누구에게 가장 비중을 두어 썼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다 읽고서 드는 생각은 도스토예프스키 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들 인간 모두 이 다섯 인물들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성격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중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한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는 소설이 아닐바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성향은 작품 속에선 프리즘에 의해 빛이 분산되어 여러 색으로 나타나듯이 여러 인물들로 나뉘어져 묘사되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탐욕과 이기심과 조시마 장로의 신앙심 투철한 삶을 양 극단에 놓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쪽과 저쪽을 왔다갔다 하는 인간의 심리가 네 아들을 통해 나누어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의 불안정하고 감정적이고 나약함, 둘째 아들 이반의 냉철하나 계산적인 면, 세째 알렉세이의 순수하고 동정적이고 신앙심 깊음,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의 겉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세계.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누가, 왜 살해했는지가 혐의자 당사자보다는 갑자기 등장한 검사와 변호사의 입을 통해 대부분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결말에 알렉세이와 소년들의 교훈적인 마무리는 많이 아쉬웠다.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횟수를 늘려가며 방영되던 드라마의 급마무리도 아니고 말이다. 이런 실망스런 결말이 이 작품의 결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때문에 또 한번 실망스러웠다. 죽기 일년 전에 완결된, 작가의 모든 사상과 철학이 집대성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책 표지글의 문장이지만, 꼭 마지막 작품이 가장 가치있고 비중있는 작품이란 법은 없다고 믿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분량이 길어도, 아무리 이런 저런 곁가지 이야기와 인물들이 등장하여도,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지는 않아야 할 것 같은데, 뜬금없이 이 내용이 여기 왜 이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들어가있지? 하는 것들이 지나치지 않았나 싶은 것도 유감스런 점의 하나이다.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를 인간 중심으로 파헤쳤다기 보다, 신의 존재를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내 인생을 지배하도록 두어야 할까 하는 쪽으로 두드러져 보였다. 니체처럼 신의 존재와 신의 위력에 반기를 들지도 못했고,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의 교훈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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