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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2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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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책 뒤 작가 연보를 다시 훑어 보았다. 20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이 마지막 줄로 되어있기에 맨 아래 한줄을 적어넣었다. 2013.11.17 타계라고.

작가의 이력만 봐도 평범하지 않다. 부모 모두 영국인이었으나 도리스 레싱이 태어난 곳은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이다. 자라기는 아프리카의 로디지아, 지금의 짐바브웨. 그리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다시피한 도리스 레싱은 훗날 그래서 자기가 작가가 되었을거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결국 열다섯살때 집을 나와 변변치 않은 직업을 전전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이후로 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그리고 영국으로 터전을 옮겨 첫소설 <풀잎을 노래한다>를 시작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마사 퀘스트>는, <폭력의 아이들>이라는 5부작의 1부에 해당하는 소설로서, 청소년기의 마사가 집을 떠나 결혼 하기까지의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 모순, 비논리적 사고 방식, 편견, 불평등과 부딪힘, 그리고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의 부딪힘, 혼란, 통증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3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누가 봐도 작가 자전적 이야기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가 그러했듯이 이 책의 주인공 마사 역시 열다섯에 집을 나왔고, 딱히 사랑하는 것 같지 않은 남자와, 그리 성공적으로 잘 이어갈 것 같지 않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불안정한 사회상,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성장하느라 경험했을 복잡함은 주인공 마사의 정신 세계를 단순한 복종형으로 두지 않고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해가는데 영향을 미친다.

이 작품의 의의라면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와, 청소년기라는 개인적인 성장통 시기가 잘 맞물려 이야기를 끌어갔다는데 있다고 보는데, 자전적 소설의 한계랄까. 사실성과 경험에 충실하다보니 소설로서 기승전결 뚜렷한 이야기 전개면에서는 좀 아쉬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완전히 몰입해서 읽기 어려웠던 것은, 주인공이 던지는 말과, 주인공이 다른 이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척척 접수될 만큼 읽는 사람에게 그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 속 한 남자가 어떤 말을 하자 마사가 속으로 막 화가 났다면, 그게 왜 화가 나는 일인지 갸우뚱하며 넘어가야 하는 대목이 많았다는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 이후로 이 책이 두권째. 내친 김에 <풀잎은 노래한다>를 계속 읽어볼까, 책장을 열었다 덮었다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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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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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작가 이름이 귀에 익어, 잘하면 마치 읽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책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더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도 다른 리뷰를 참고하지 않고 내 느낌, 내 생각 그대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작가의 생각과 다를 수 있고, 잘못 해석한 것일 가능성이 분명히 있을 거란 것을 전제한다.

 

과연 되풀이 된 것은 인물들의 이름 뿐인가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린 느낄 때마다 새롭다. <사람은 다 똑같다>, 혹은 <사람은 다 다르다>.

내 경우엔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보다 사람은 다 똑같구나라고 느낄 때 가슴의 울림이 더 크고 오래 간다.

아들 이름에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딸의 이름에 고모, 할머니, 증조모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인물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인데 작가가 이것을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결국 인간이 지니는 본성, 특히 이들이 공유하는 유전자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기질과 본성은 달라져봤자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 아닐까. 이건 몇개의 사건, 혹은 인생의 어느 일정 기간만 봐서는 알기 어렵고 전체적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때 알수 있기에 우리는 이런 작가의 통찰을 빌지 않으면 모르기 쉽다는 점이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든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살며 웃음거리가 되든, 결국 인간이 돌아오는 지점은 처음 자리에서 그리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가. 결국 제목의 <백년의 고독>을 통해 결정체로 남겨진 사리 같은 진실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일지, 인정하기 앞서 다시 생각해보지만 별 소득이 없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호세 아르까디오 두 형제 모두의 정부였던 여자, 삘라르 떼르네라를 통해 작가는 이렇게 예외적으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주기까지 하는 걸.

 

그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라는 사실을 한 세기에 걸친 카드 점과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277쪽)

 

작가의 이러한 관점은 쌍둥이 형제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예에서도 나타난다.

둘은 아르까디오와 산따 소피아 델라 삐에닷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난다. 이들의 증조모이자 이 소설에서 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산 역사인 우르슬라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이 아이들의 이름을 역시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우렐리아와 호세 아르까디오라고 지으려고 하자 막연한 불안감을 숨길 수 없다. 가문의 긴 역사를 통해 볼때 똑같은 이름들을 되풀이해 씀으로써 거의 확실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내성적이었지만 머리가 뛰어난 반면,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충동적이며 담이 컸으나 비극적인 운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쌍둥이들은 자라면서 생김새 뿐 아니라 행동도 습성도 너무나 똑같아 주위 사람들을 모두 헷갈리게 한다. 그러다가 더 커감에 따라 점차 다른 성격의 인간으로 변해하는데 그때까지 조상의 습성과 반대로 키와 이름과 성격이 서로 교차되어 변해가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며 걱정했던 우르슬라 할머니는 아마도 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뒤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데, 2권에서 작가는 이 둘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시체들은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관에 넣어졌는데, 그 순간 쌍둥이 형제는 소년 시절까지 그랬던 것처럼 죽어서 다시 쌍둥이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장례식 마지막 순간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게 되고, 술 취한 조객들이 관을 혼동해 두 사람을 각각 다른 무덤에 묻고 만 것이다. 즉, 서로 상대방에게 지정되었던 무덤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름과 달리 뒤바뀐 행동과 성격을 보였던 형제들이 결국엔 죽어서라도 원래 가문에 내려져오던 본성과 이름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누구도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소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서로 사촌 지간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근친 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근친 상간의 결과에 대한 가공할 만한 공포로 인해 살인을 하게 되고, 마꼰도라는 고립된 도시를 설립하고 새로운 시작을 꾀해보면서도 근친 상간의 굴레는 영원히 바로잡지 못한다. 자매를 동시에 사랑하고, 정부를 공유하고, 이모와 조카가 서로 관계를 맺는 등.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역사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톱니 바퀴이며 순환될 뿐이었다.

 

인간은 능력 안의 일, 능력 밖의 일 관계없이 더 개선된 방향으로 올라가고자 계속해서 뭔가를 계획하고 도모하고 실행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성과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얼마나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가. 성공보다 실패가 많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실패의 경험에서 언제까지 당당하고 패기있고 자신감있을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백년을 넘어서 가문을 통해 전해 내려올때, 같은 이름의 고독 (Solitude)이지만 고독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게 되고, 그것이 한 나라의 역사, 대륙의 역사, 민족의 역사 속에서는 뽑힐 수 없는 뿌리로 깊어지게 된다.

 

고독과 사랑 앞에 인간은 무능하다.

나의 생이 끝남이 아쉽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인간 복제>라는 기술의 힘을 빌어 또 다른 나 라는 인간을 세상에 계속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들이여.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인간. 이 책에서는 근친 상간으로 비유되는, "타고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이기리라는 보장 없어도 그에 대항하려는 필사의 노력, 유토피아에 대한 버릴 수 없는 미련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인간. 약자도 강자도 아닌,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이 고독한 모습으로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주제를 말하려고 쓴 이야기인지, 이 소설 어디에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건지, 한동안 오리무중으로 읽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차 안에서 남편과 인간 복제에 관한 잡담을 주고받다가 불연듯 이 책에 대한 내 나름의 힌트를 잡아내게 되었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작품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일단락. 나머지는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했던가. 내 몫을 내 맘대로 꺼내다가 먹고, 씹고, 소화시켰다. 하지만 소화가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고,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필요성만 슬금슬금 느낄 뿐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 소설이 도대체 무슨 주제를 말하려고 쓰여진 것인지, 이 소설 어디에 노벨상의 가치가 있는건지, 오리무중은 아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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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7-1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차피 되풀이되는 것이라면...이라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물론 생각의 깊이는 제가 한참 모라자겠지만 )

˝넌 참 삐뚤어졌고 , 비관적이야˝ 란 날카로운 말을 들을까봐 입 밖으로는 자주 꺼내지 않는데 , 저는 가끔 생각해요.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아온 삶이 행복해서 , 아이들도 행복할 거라는 기대를 갖고 아이를 세상에 내 놓는 것일까 하는.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많이 없는데 , 아이들은 끊임없이 태어나요.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 내 색안경으로 세상을 해석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

계급이 없는 사회라지만 ,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자를 만들어 세상에 내 놓는 것 같고. 내 아이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크고.

엄마가 저를 잘 못 키운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 가슴이 그냥 찢어지는 듯 하더라구요. ( 그게 아닌데...)

마냥 행복한 사람들도 있겠죠. 내가 이렇다고 타인들고 나와 비슷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진 않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 늘어놓았네요. ( 일기장에 써야되는데 ㅎㅎㅎㅎ )


hnine 2016-07-12 21:21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만 제 경우엔 제가 살아온 삶과 다르게 키워보고 싶어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결코 순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네요.
저도 어릴 때부터 ˝넌 참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야˝ 소리 많이 듣고 자랐어요 ^^ 들을 땐 좀 억울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닌것 같으니 ㅠㅠ
이 책은요, 1권 까지는 별 재미 모르고 읽어가다가, 2권 읽는 중에 ˝오싹˝할 정도로 전율을 느꼈어요. 제가 문장으로 잘 표현을 못해서 못 썼는데, 작가의 통찰력의 끝자락만 겨우 맛보았다고 할까요. 그런데도 오싹했으니 몇번 더 읽어 작품의 의도를 제대로 꿰뚫게 되면 어떨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유명한 작품들중에 이 세상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본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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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서재에서 회자되던 소설 중 하나 스토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에 찜 해 놓고 기다리던 중 마침내 인연이 닿았다.

국내에 알려진 게 최근으로 알고 있는데 자그마치 1965년 작이란다. 번역되기 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나 싶어 알아보았더니 미국에서부터 사람들 주목을 받는데 오래 걸렸더라. 1994년 결국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도 10여년이 지난 2006,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판으로 다시 한번 출간됨으로써 전기를 맞게 된 것. 그럼 2006년 다시 출간되게 된 데는 어떤 배경이 있었기에 더 오래 묻힐 수도 있었을 책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인지 궁금해진다.

스토너라는 인물은 분명히 허구의 인물이라고 작가가 밝혔다는 것은 그만큼 책 속의 인물이 마치 작가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거나 나아가 본인의 얘기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일 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책 속의 스토너는 작가인 존 윌리엄스보다 더 일찍인 1891년에 태어나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나온다.

직업이 교수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한 사람의 일생은 모두 같기도 하고 모두 다르기도 하다. 똑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는, 그 틀을 벗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순서를 거꾸로 산다든지 하는 획기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비슷한 일로 기뻐하고 비슷한 일로 슬퍼하고 노여워하니까.

스토너의 일생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풍족하지 않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받고 대학 교수까지 지내며 살다 갔으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자신의 목표나 꿈이 먼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순서가 아니라 늘 상황이 먼저 마련해놓거나 누구에겐가 제안을 받은 후 순종적으로, 그러나 충실하게 밟아가는 삶은 어딘지 전체적으로 볼 때 밋밋하고 평이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토너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문장을 30쪽에서 처음 만났다. 스토너가 대학생일때 슬론 교수와 주고받는 대화이다.

그럼 지금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스토너는 침묵했다. 이것은 그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던 문제였다. 마침내 그가 약간 분개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또 다음 대목, 부인인 이디스가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집을 떠나있는 동안 집에는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만 남아 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집이 텅 빈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익숙해져서 점점 즐기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안 돼서 그는 자신이 몇 년 만에 최고로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든 반드시 돌아오게 돼 있는 이디스를 생각할 때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조용한 후회가 느껴졌다 (156).

드디어 후회의 시작인가? 스토너답게 조용히.

이름처럼 돌 같고 바위 같기만 한 남편에게서 이디스가 만족을 느낄리가 없다. 안치던 피아노에 매달리는가 하면 연극 연습에 몰두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다가, 스토너에게 찾아온 학생들이 있는 서재에 자리잡고 앉아 자기 얘기들 떠들기도 한다. 그런 아내의 행동에 스토너의 반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디스의 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묵인한다.

그는 이디스의 새로운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은 그에게 아주 조금 성가실 뿐이었고, 그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필사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167).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친, 죽어가는 스토너의 묘사는 너무 사실적이고 뛰어나서, 그동안 혹시 작가는 의도적이었으나 독자는 놓쳤을지 모르는 스토너라는 인물에 대한 것을 여기서 맘껏 느껴보시라 하는 피날레 같았다. 죽음의 피날레라니.

한 사람의 일생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

이 책이 뒤늦게나마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주인공의 일생 하나만을 놓고 볼때는 굴곡도 있고 이야깃 거리도 되지만, 이 세상 살다가는 모든 인생들 중 하나라고 볼때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의 확인, 그런 굴곡과 사연과 경험들을 우리 모두, 먼저 살다간 모두, 끌어안고 있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일생이 특별히 더 쓸쓸할 것도 없다. 사람의 일생이 원래 쓸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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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06-1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놓쳤습니다. 여러 리뷰를 읽는 걸로 대신했지요.

일생의 쓸쓸함... 저는 장례식장에 갔다오면 좀 마음이 가라앉더군요. 허망함 같은 게 느껴져요.


hnine 2016-06-13 06: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보관함에 담아놓고만 있었는데 우연찮게 인연이 닿았네요.
일생의 쓸쓸함. 전 이제 그냥 받아들여요. 전 그게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니 얼마전에 읽은 아모스 오즈의 <나의 미카엘>도 생각이 나고,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도 났답니다. 그러고보니 이 세 작품 속 인물의 직업이 모두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몬스터 2016-06-13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나절 꼬박 읽고 며칠 동안 마음이 쓸쓸했던 책이었습니다. 슬펐어요. 사람의 인생이 원래 쓸쓸하다는 말씀 ,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많은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하는 사람이거든요. ( 으...싫은 제 모습입니다만 ㅎㅎ ) , 그래서 가끔 지나치게 밝은 사람들을 보면 , 어찌 저리 삶이 즐거울까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가면을 쓰고 사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ㅎㅎㅎ )

나의 죽음은 나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지만 , 타인의 죽음은 내 삶에서 한 조각 떨어져 나가는 것 다름 아니니.. 한 사람의 인생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라는 말씀 , 맞는 말씀이세요.

아...이래도 저래도 주말이 끝나가는 건 싫습니다. ㅎㅎㅎ

hnine 2016-06-13 06:40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도 읽으셨군요. 쓸쓸하고 슬픈 느낌, 사실 저도 그랬어요. 다 읽은 후 이건 스토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삶에 공통적인 본질이라고, 그러니 특별히 슬퍼하지 말자고, 슬픔을 잠재우기 위해 내린 일종의 처방전인 셈이지요. 저도 어두운 면을 먼저 보고 부정적인 생각과 반응을 먼저 하는 성격, 그걸 또 부정적으로 보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 성격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안하기로 해버렸어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에도 나름 강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 또 나를 내가 맘에 안들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한 것 같다는 자기 연민이 발동하기도 했고요.
주말 끝나가지만 다음 주말이 금방 또 돌아오니 우리 웃어요~ ^^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 우리가 알고 싶었던 또 다른 눈의 세계
이은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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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리하라의 몸 이야기에 이어 이번엔 눈 이야기이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책 한권이 오로지 한 기관에 대한 내용. 저자 이름에 대한 신뢰도가 아니더라고 수박 겉핥기 식 내용은 아니겠다고 예상했다.

심장이면 심장, 뇌면 뇌. 신체에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 없지만 눈의 소중함은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 부터 잘 알려져 있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보다'라는 말이 꼭 눈을 통해 보는 행위를 떠나  확장적인 의미로 얼마나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지 (무려 28가지 용법이라고 한다).

이 책은 눈에 관한 과학적 이야기라기 보다는 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초보자의 서투른 관찰기라고 저자는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읽어보면 과학적 이야기로 손색이 없으며 책의 여기 저기서 저자의 성실한 집필 태도와 책임감, 한 문장도 허투르 쓰지 않겠다는 노력이 보여, 제대로 만들어진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요즘 같이 인터넷 상으로 자료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지만, 저자는 직접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을 찾아가 수업 참관을 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센터의 부검실을 찾았다. 별 다섯개가 결코 아깝지 않은 책, 전공에 상관없이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책 뒷껍데기에 책 내용 요약을 대신하는 질문이 아홉개 나와있어서 복습겸 답을 적어보았다. 물론 한번 읽고 내용을 다 기억해서 답을 적은 건 아니고, 문제를 보고 해당 부분을 다시 찾아보면서 답을 적어보았는데 이중 한 문제는 기억도 안나고 어디서 나온 내용인지 조차 찾지 못했다 ㅠㅠ 혹시 읽으신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좋겠는데.

 

사람의 눈은 왜 두 개인 걸까?

(뭐 이런 걸 다 묻냐고 하지 마시고)

눈의 개수가 늘어나면 각각의 눈이 수집한 정보들을 통합하여 의미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정보처리 능력이 뇌에 요구될 것이고, 그러려면 뇌가 지금보다 더 커지고 복잡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뇌라는 기관은 에너지 측면에서 본다면 꽤 비싸고 유지가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눈이 세개, 네개 되어 얻는 잇점 보다는 이걸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져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아마도 눈이 두개일때 최적의 타협수에 도달하는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48쪽)

 

TV를 많이 보면 정말 눈이 나빠질까?

확실한 증거는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다. 하지만 TV가 시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는데 이때 시력에 영향을 미치는 건 시청 시간보다는 TV와의 거리다. 즉 TV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시력에 악영향을 비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63쪽)

 

왜 하늘은 파랗게 보이는 걸까?

혼합광인 태양빛은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하는 중 대기 중의 작은 입자들에 의해 각 파장의 빛들이 부딪혀 산란된다. 파장이 짧다는 건 에너지가 높다는 뜻이기에 같은 각도로 부딪쳐도 더 강하게 반발한다는 뜻이 된다. 색깔 중에 파란 빛은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높기에 그만큼 대기 중 입자들과 더 강하게 부딪혀 산란하며, 이렇게 부딪쳐 나온 빛이 다시 다른 미세입자들과 부딪치며 하늘 전체를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다. (123쪽)

 

아기들은 우는데 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답 못 찾음 ㅠㅠ)

 

피곤하면 눈부터 피로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체에서 직접적인 움직임을 담당하는 것은 근육이지만, 근육이 제 할 일을 하도록 조정하는 것은 신경이다. 따라서 신경과 근육은 협동 관계에 놓여있다. 실제 신경섬유 하나가 10~1,000여개의 근섬유를 관장한다. 그런데 눈에서만은 다르다. 안근에 존재하는 신경과 근육의 비율은 1:1이며 많아도 1:5를 넘기지 않는다. 근육섬유 하나하나를 신경섬유가 하나씩 전담 마크해서 조절하기 때문에 안근은 우리 몸의 근육 중에서 반응 속도가 가장 빠른 근육 중 하나가 되었고, 이처럼 눈의 신경과 근육의 협업이 매우 미세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 눈 근육은 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해 매우 쉽게 피로해진다. (186쪽)

 

악어의 눈물을 거짓 눈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먹잇감을 물어뜯는 순간 흐르는 악어의 눈물은 자신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존재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턱에 강한 힘을 주면서 발생하는 반사작용일 뿐이다. (172쪽)

 

비둘기들은 왜 쉴 새 없이 머리를 움직이는 걸까?

답은 눈, 정확히는 눈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에 있다.

비둘기는 사람과 달리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안구를 움직일 수 없다. 안구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눈동자를 데굴데굴 돌릴 수 없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걷거나 움직이면서도 특정 대상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걸어가며 가로수를 본다고 가로수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의 평형 센서가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끊임없이 안근을 움직여 시야를 재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둘기는 다르다. 비둘기는 안구를 움직이는 근육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초점이 맞지 않아 시야가 흐려 질 수 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비둘기가 선택한 전략은 '눈 대신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면 비둘기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일차적으로 비둘기는 이를 피하기 위해 목을 뒤쪽으로 쭉 뺀다. 하지만 머리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어깨 위에 얹혀 있으므로 길게 늘이는 건 곧 한계에 부딪친다. 그럼 비둘기는 다시 고개를 재빨리 앞으로 잡아 당겨 몸과 같은 선에 가져다 놓는데 이 과정에서 시야를 재조정해 다시 뚜렷한 시야를 확보한다. 그래서 비둘기는 걸을 때마다 발걸음에 맞춰 리드미컬한 목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184쪽)

 

홍채주름이 개인을 구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까?

홍채의 1차적 역할은 동공의 크기를 적절히 조절하고 눈 안으로 들어가는 광량을 조절해 우리가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빛이 약하면 홍채를 열어 동공을 크게 하고, 빛이 강하면 홍채를 닫아 동공을 줄여야 눈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홍채는 이렇게 동공의 크기를 조절하기 위한 '주름'을 가지고 있으며 홍채 주름이 개인을 구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동공괄약근에는 무늬가 복잡하게 나타나는데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덟 살 정도가 되면 홍채 주름이 완전히 자리 잡히면서 그 패턴이 일정하게 정해진다.

지문은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개인 인식 방법이지만, 손을 많이 사용하거나 습진을 앓게 되면 마모되고 상처를 입기 쉽고 손의 특성상 흉터 등으로 인해 변형되기도 쉽다. 하지만 눈은 상대적으로 다치거나 변형되는 일이 적은 부위이므로 마모되기 쉬운 지문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홍채가 이처럼 개인의 구별 기준이 된다는 사실에 기반해 근래에는 홍채진단학이라 하여 홍채의 주름 패턴을 통해 건강 상태를 파악하거나 질병의 유무를 판단하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128쪽)

 

백내장이 모네의 그림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카메라의 렌즈에 해당하는 것이 눈의 수정체이고, 수정체의 얼룩짐과 혼탁함은 곧바로 시력 저하로 이어진다.

수정체가 투명성을 잃는 대표적인 현상이 백내장이다.

빛의 화가라고 불렸을 만큼 눈부실 정도로 다채로운 빛의 향연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았던 모네였기에 노년에 찾아온 백내장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매우 컸다. 가장 큰 변화는 그가 더 이상 다양한 빛과 색을 화폭에 담아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모네를 비롯한 안과 질환이 환자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한 스탠퍼드 대학교의 안과 의사 마이클 마머 교수는 같은 장소를 전혀 다르게 그린 모네의 화풍 변화를 심리적이거나 예술적인 변화 대신 백내장이라는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이 변화 때문으로 분석했다. 결국 모네는 실명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의사의 권유로 수정체 적출술을 받게 되었고 모네의 눈에서 안개를 걷어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느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수정체가 흐려지거나 수정체 적출술을 받은 사람은 마치 파란 선글라스를 낀 것 처럼 세상이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즉, 눈 내부에 파란색이 갇히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같은 장소를 그린 그림에서 백내장을 앓던 때 그린 모네의 그림이 이전에 비해 모두 붉은 색으로 바뀐것은 파란 색이 잘 투과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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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후반부엔 확대경의 발명으로 인해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의심이 생겨나게 되어, 지금껏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에 결정타를 날리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고찰까지, 참으로 성실하게 쓴 책이다.

정보나 지식 전달 목적의 이런 책들은 재미있게 읽히는게 일차적 목적은 아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조사하고 보여주었느냐 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즉, 이 책은 '눈'에 대해 알기 위한 '눈'이 되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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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않는 연습 - 불안.분노.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가르침
나토리 호겐 지음, 이정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이었을 때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다. 프랑스 친구였는데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나이 들며 바뀌는 점 중 하나가 accept, 즉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마음에 안드는 점을 발견하면 바꿔보려고 안간힘 썼으나 점점 받아들이는게 늘어간다고. 성격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몸매까지도 말이다. 그건 한편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지만 한편 무력해보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 책 껍데기에 써있는 이 한 줄 뜻을 모르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잊고 살 뿐이지. 내 욕심에 가려서,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그 마음에 가려서 말이다.

이런 책들을 가끔 읽어주는 이유이다. 모르던 것을 배우기 위해 읽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던 것,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마음의 덮개를 걷어내기 위해서. 비록 시간이 지나며 다시 때가 끼고 먼지가 쌓이겠지만 먼지가 다시 쌓인다고 청소를 안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

 

사실 모든 일은 처음에 마찰이 발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찰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참고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가 자신의 규칙을 주장하는 태도는 앞으로 잘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차차 서로 맞추어나가면 된다. (42)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자리를 나도 모르게 피하는 내 심리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음에도, 아니 오히려 사람에 관심이 많고 친구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잘 들어주는 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 중의 하나임에도,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 잘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마찰이 생길까봐 그걸 미리 피하려는 것이었다. 일단 마찰이 생기면 내 주장을 펴지 못하고 대부분 상대방의 의견에 따라가는 습성때문에. 그리고 돌아와서는 마음 불편해한다.

 

쓸데없이 긴장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다. (50)

긴장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용기.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은 사람은 심리학 수업을 듣기보다는 소설을 읽는 것이 낫습니다. (83)

저자가 대학에 다닐때 심리학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나아가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 군상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소설을 읽으며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소설보다 다른 책을 읽으라고, 소설 읽는 것을 다소 경시하며 말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대답과 같은 구절이라 반가왔다.

 

나는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왜 그런 걸 바라는 것일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에까지 '왜?'를 반복해보자. (151)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감정의 차원에서 끝내지 않고 이성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가 좋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라는 말은 지금의 자신이 완전하거나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나약한 자신을 자각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바꾸어보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평생을 그런 자기 규정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소중한 나를 너무 박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또한 행복에서 가장 멀어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수단(방편)이 사실은 깨달음이라는 목표 그 자체.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 (209)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것을 불교에서는 唯識이라고 표현한다. (218)

자기 중심 (유식, 唯識)과 자기 우선의 차이. 자기 우선으로 살게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도록 힘쓰라.

 

질투를 느끼는 것은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 (237)

바꿔 말하면 질투를 느끼지 않는 것은 지금 대체로 행복하고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을 잘 느끼지 않는 나 같은 경우는 아마 행복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위에 말한대로 대체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리 잘나봤자 인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삶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알고보면 회의적, 염세적 사고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화의 기본은 성실 (260)

대화의 기본은 말을 얼마나 조리있게 잘 하느냐 보다 성실이다. 그리고 인내. 성실과 인내는 서로 다르지 않은 덕목이긴 하다.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랴는 질문에 돈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마치 높은 장소에 있는 어떤 물건을 원하는 사람에게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사다리'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275)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많은 청소년들이 돈을 많이 버는 CEO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하는 것을 들으며 의아했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대답이 될것 같은데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가 장래 희망이라니.

 

인연

「가족 상호 간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애착이나, 친하게 사귀고 있는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끊기 어려운 일체감.

어떤 계기에 의해 발생한, 지금까지 비교적 소원했던 사람끼리의 필연적인 결합」

이렇게 정의를 내려놓고 있는 사전이 있는가 하면, 저자가 찾아본 또 다른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되어 있다고 한다.

『말의 다리에 얽혀 있는 끈. 또는 사람을 구속하는 의리, 인정 등의 비유.

묶어놓다, 묶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게 하다』 (291)

 

좋고 싫은 기호를 줄인다. 부처님은 좋고 싫은 기호가 없다. 무연 (無緣, 특정한 인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절대적인 평등)의 경지에서 우리를 상대해주신다. (295)

그런데 이 세상은 점점 좋고 싫은 것을 확실히 하는 쪽을 바라는 것 같다. 마음이 그렇게 확실하면 모를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좋은 점도 있고 싫은 점도 있고, 그렇지 않던가? 그럴 때 억지로 마음을 한쪽으로 정해야할 필요가 있나. 또한, 당장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게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줗고 싫다 확실하게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좋고 싫은 기호를 줄인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쉽게 말하지 않음을 뜻한다.

 

'소유한다'는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쁨보다는 '소유하지 않는 삶'이 더 큰 정신적인 해방감을 맛볼 수 있으며 인생을 더 낫게 만든다. 생활하면서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 (299)

정신적인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말에 완전 공감.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그게 풍요로움이 아니라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필요 이상 많은 옷, 잔뜩 들어차 있는 냉장고, 하다 못해 필요 이상 많이 차 있는 수납장의 물건, 그릇, 필기 도구 모두가 내게는 부담이다. 그보다는 어딘가 빈 공간이 느껴지는 상태가 가장 좋다. 그게 정신적인 해방감이라고 근사한 말로 포장되기 전에 이미 느껴지는 감정이다.

 

어떤 일을 떠맡게 되었을 때에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보답이 될 수 있는지, 인정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자신감 과잉은 아닌지, 이해득실이 얽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하고 용기를 내어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03)

시간이 더 필요해도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은 일종의 자신감, 책임감과도 통한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자비에 관한 설법은 해도 사랑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랑에 관해서 말한다면 부정적인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항상 미움과 함께 등장한다. '내 것'이라는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을 조심해야 한다고 설법한다. (313)

 

지금의 선택이 미래가 된다. (319)

지극히 불교다운 생각.

 

무의미하 하루는 없다. (324)

오늘은 아무일도 없었던 날, 시시한 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날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날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축복받은 날인지.

 

우리는 자기평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외부의 평가를 통하여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칭찬을 받는 것, 도움이 된다는 것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며 자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다. (331) 

 

각주구검 (刻舟求劍) 이야기.

강을 건너다가 실수로 칼을 물 속에 빠뜨리고는 칼이 떨어진 지점을 배에다 표시하고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말. (268)

배는 이미 칼을 떨어뜨린 장소로부터 이동했고 칼은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데도 강가에 도착해서 칼을 찾으려고 함은  시세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낡은 관습을 고수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인데, 과거의 가슴 아픈 추억이나 실패의 경험을 마음에 새겨두어보아야 부질없는 짓이라는 뜻도 된다. 배가 움직이듯 시간도 움직여 주변 상황이 바뀌기 때문이다.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칼을 인생이라는 강에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 "각주구검"을 참고해보라고 한다.

 

 

소제목만 쭉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마음의 때가 조금은 벗겨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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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6-05-31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저만의 착각일까요?^^
책을 읽는다는게 알아간다는거뿐 아니라 잊고 있던것을 되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말 좋아요
저도 많이 되살려봐야겠다는~~~
날이 덥네요 찬 거 넘 많이 드시지 마세요~~^^

hnine 2016-05-31 07:59   좋아요 0 | URL
푸른희망님, 밀린 리뷰 쓰느라고 지금도 다른 한권 리뷰를 막 쓰려고 하는데 세탁기 삑삑 소리가 들려서 빨래 널으러 가려던 참입니다 ^^
모르는 것도 아직 많지만 알면서 잊고 사는 것이 더 많지 않나 싶어요. 그동안 읽은 책에서 배운 것만 해도 얼마나 많겠어요. 지금 읽는 책도 수십년 전에 읽은 책인데 우연히 생각나서 헌책방 다 되져서 다시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요, 좀처럼 읽은 책 다시 읽는 법이 없는 저이지만 너무나 감회가 새롭네요. 이것도 곧 리뷰 올릴께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날이 더워도 예전만큼 찬걸 찾게 되지 않네요. 예전엔 따뜻한 밥보다 찬밥은 더좋아할 정도로 찬거 좋아했었는데 말입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푸른희망님 대문 사진 클릭!해서 저 고양이 얼굴 좀 다시 한번 크게 보고서 빨래 널러 가렵니다.

2016-05-31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몬스터 2016-05-31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nine님 , 건강하시죠?

.....과거의 가슴 아픈 추억이나 실패의 경험을 마음에 새겨두어보아야 부질없는 짓이라는 뜻도 된다. 배가 움직이듯 시간도 움직여 주변 상황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 구절이 참 좋네요.

머리로는 잘 아는데 , 도무지 , 마음도 행동도 잘 따라오지 않아서 스스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일례로 , 누군가에게 어떤 것이든 강요 받는 것을 절대로 싫어하는 전데 , 그런 행동을 제 이기심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하고 있을 때가 종종 있어서 이런 제가 싫어요.

hnine 2016-06-01 04:51   좋아요 0 | URL
저도 읽다가 그 구절에 시선이 좀 오래 머물렀답니다.
머리로 아는데 행동이 잘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머리로라도 알고 있는게 어디예요. 그게 출발점이 될거예요. 가슴 아픈 추억이나 실패의 경험이 현재를 지배한다 싶을땐 그냥 내 인생의 컨텐츠가 풍부해졌다 생각해요. 이거 다 언제 써먹을 날이 있겠지~ ^^ 이러면서요.
저 역시 누구에게 지시 받거나 강요받는 것 무척 싫어하고 그럴 것 같은 자리는 아예 피하기 까지 해서 좀 문제인데, 책에 의하면 그냥 그것도 내 성격으로 받아들이라네요.
저는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영국에 가서 우와좌왕 힘들어하며 겨우겨우 공부 마치고 돌아온 것 생각하면 몬스터님은 자기 관리 잘 하시고 참 꿋꿋하시다 생각하는걸요.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