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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 (Sigmund Freud; Mourining and Melancholia)

 

 

저자 자신이 우울증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꼭 어머니의 자살 직후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슬픔을 극복한 후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우울증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고, 생각보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저자는 잡지사에 특집 기사를 투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울증에 대한 책을 본격적으로 써볼 것을 제의한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의 전공이 무엇인가, 읽으면서 저자 소개 다시 들춰보기를 몇번을 했을 정도로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마치 해부하듯이 우울증을 파헤치고 분석하고 정리해놓았다.

참고문헌과 주석 리스트만 70여쪽, 본문이 65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으며 과연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이 고통에 이른 것을 환영하노라. 그대는 이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으리니" (오비디우스) (59쪽)

 

우울증을 정도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면 경증 우울증과 중증 우울증이 있다. 경증 우울증을 이루는 것이 삶의 덧없음과 한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라면 중증 우울증은 붕괴의 원인이 되는 정도의 우울증을 말한다. 그렇다면 중증은 아니더라도 경증 우울증으로 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울증이란 과연 삶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인가. 한번 빠지면 평생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 올가미 같은 것일까. 우울증은 결국 자살이나 그에 준하는 상태로 가는게 맞는가. 우울증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우울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과 싸울 능력도 있는 것이고,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며 사는 경우도 있고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은가.

우울증에서 벗어났다고 할때 재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급함을 버리고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유전자에 의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른 대부분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요소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반적인 우울증의 경우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비율은10~50%라고 한다). 하지만 우울증의 요인들은 오랜 세월에 거쳐 대개는 평생 동안 누적된 것이라고 하는게 맞다 (75쪽).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한 과정 중 하나이며,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1년 이내 재발률이 80%, 약물 치료를 하면 회복률이 80%라고 한다 (123쪽).

전체 열두장 중 두 장에 걸쳐 저자는 실제 이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치료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하여 정리해놓았다. 네가지 그룹의 항우울제는 물론이고 ECT (electroconvulsive therapy), 수술, 최면 요법, 아프리카 줄루 족의 민속적 요법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법이 최적이고 최선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떤 치료 방법이든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질병의 치료 방법들과 마찬가지 이다. 치료 방법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좋은 치료사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좋은 치료사를 찾으려면 우선 여러 치료사들을 만나볼 것을 저자의 경험에 바탕하여 권하고 있다.

우울증 치료 방법을 개발하는데 어려움은 예상하다시피 우울증이 일어나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아직 외부 조작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의학적 치료에 대한 연구가 신경전달물질에 집중되는 이유도,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나마 외부 조작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발병율은 성별, 계층, 나이에 따라 골고루 분포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는 것은 호르몬의 든든한 (!) 배경이 있다는 생물학적 이유 외에도 사회적인 차이도 있다. 즉 남성보다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고, 산후우울증, 남녀 성 역할 차이 등 사회적인 압박을 더 받고 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신 질환은 오랫동안 남성들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는 점도 주목하자). 하지만 미국 대학생의 경우 최근엔 남녀 우울증 발병율 차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어린이의 우울증 치료는 곧 부모의 치료가 수반된다는 것과 어린이 우울증은 성장, 성격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노인 우울증은 발견이 쉽지 않은데 (당연시 하는 경향때문에), "감정실금"이라는 용어가 등장! 감정의 조절 기능 장애로 사소한 일에도 웃거나 울기만 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은 곧 사람들의 수 만큼 다양한 우울증이 존재한다는 뜻도 될 것이다.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는 것. 그래서 환자들의 케이스 얘기를 읽다보면 아무리 읽어도 중복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중독와 우울증 사이의 관계도 빠뜨릴 수 없다. 둘 중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가. 아니면 서로 독립적으로 걸리는 것인가.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중독 하면 도파민, 우울증 하면 세로토닌. 이렇게 알려져 있는게 일반적이고 이 둘이 각자 독립적인 수용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수용체 이전, 혹은 이후의 어떤 단계에서 얽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알콜 중독자에게 항우울제를 투여하면 알콜을 끊기가 더 쉬워진다는 최근 연구 결과들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최근이란 이 책이 출판된 2004년일테니 지금은 얼마나 더 업데이트 된 결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살에 대한 것이 한 장 (chapter), 그것도 다른 장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라는 것이 오히려 의외다. 실제로 자살 성향은 우울 성향과 독립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맞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그저 공존할 뿐이라고. 우울증의 심각성과 자살 가능성 간에는 커다란 상관 관계가 없음에도 왜 이 둘이 독립적으로 진단되지 못하고 서로 중복되는 것일까 물음으로 시작한다. 앨버레즈라는 수필가는 삶을 통해서는 점차적으로 무디어질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귀신을 쫓아내듯 몰아내려는 시도가 자살이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했다.

지루할까봐 그랬을까? 우울증의 역사가 책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반 이후에 한 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혔다. 우울증을 지칭하는 말이 지금은 Depression (디프레션)이지만 이것은 19세기 중반부터 쓰였고 이전에는 Melancholia (멜랑콜리아)라고 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울증의 역사,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고 우울증 환자들을 사회에서 어떻게 처우하고 치료해왔는지 설명해놓았다. 이 책의 제목 <한낮의 우울>은 원제는 <한낮의 악마>, The Noonday Demon 인데 이것은 성경 시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자신이 있는 곳을 싫어하고 타인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한낮의 악마" 라고.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중세는 우울증을 신과 관련지어 도덕적으로 설명했다면 르네상스기는 우울증이란 곧 심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미화하였으며, 그런 경향은 17세기에도 계속 되다가,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18세기에는 우울증과 정신장애자를 가혹하게 대접하였다. 18세기 말, 낭만주의가 들어서면서 우울증을 수용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으며 19세기는 원인별, 증세별, 분류의 시대. 20세기는 중요한 두가지 운동이 일어났는데 우울증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정신분석학과 생화학적 설명을 하려는 정신생물학이다. 현재 (역시 이 책이 쓰여진 2004년 상황) 정신의학계에서는 이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뒷장에 빈곤과 우울의 관련성에 관한 내용은 그야말로 우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극복한 사례들이 있다는게 놀라울 정도. 빈곤층을 대상으로 우울증 검진을 하는 것은 광부들 대상으로 폐기종 검진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우울증에 관한 진화론적 설명들도 충분히 일리있고 재미있다. 결국 이기적인 댓가가 발생하니까 우울증도 유발한다는 것인데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설득력 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희망. 리뷰의 시작에 인용한 프로이트의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진실을 보는 눈이 더 날카롭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셀리 테일러는 가벼운 우울증을 지닌 사람들은 정상인들에 비해 자신과 세계와 미래를 정확하게 보는데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고 실패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환상>이라고 했다. 즉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라고 (639쪽).

저자는 우울증을 긍정적으로 이용한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이며 (저자 입장에서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생산적 우울증이라는 얘기도 한다. 이 모든 긍정적인 예는 우울증을 잘 치료하고 극복했거나 최소한 극복하는 중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건 어쩔까. 저자도 말한다 나는 우울증이 지나간 뒤의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누구도 우울증 체험중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시 A winner takes it all 인가.

쇼펜하우어의 "인간은 둔하고 무딘만큼 만족을 느낀다", 테네시 윌리엄즈가 행복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하자 "무감각"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에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 아니 쓰기로 결정했을때 저자는 자기의 프라이버시는 포기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자기의 우울증이 어떻게 시작, 진행되었는지, 어떤 방법들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자기 가족에 관한 이야기까지, 모두 공개해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우울증 에피소드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왜 아닐까. 이런 방대한 내용과 분량의 책을 쓴다는 것이 어디 보통일인가. 이런 댓가만 있다면야 우울증도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다는 예를 그가 보여주었다.

 

 

 

 

 

그가말하는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 찾아본 영상. 책에 소개된 내용들과 많이 겹친다.

 

 

https://www.ted.com/talks/andrew_solomon_depression_the_secret_we_share?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tedspread

 

 

 

https://www.ted.com/talks/andrew_solomon_how_the_worst_moments_in_our_lives_make_us_who_we_are?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ted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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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6-1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네시 윌리엄즈가 행복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하자 ˝무감각˝이라고 대답했다는 말~~~˝

동의하게 되는 말이군요. 예민하면 할수록 불행해질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근심이 있어도, 남들이 공포가 느껴지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은 무감각할 수만 있다면
불행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불면증도 없겠지요.

hnine 2017-06-20 19:42   좋아요 1 | URL
살아있으면서 무감각할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고, 결국 테네시 윌리엄즈의 대답은 <행복이란건 없다>와 같은 급의 말이구나 생각했지요.
행복이란 그냥 어느 한 순간의 느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갈 순 없는 것, 오래 가지려고 해도 안되는 것.
이 책도 참 정성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 책이더군요.
 
아메리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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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1843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요즘도 그러기 어려운데 그 시절에 10대의 한때를 파리, 제네바, 런던 등에서 보냈고, 하버드 법대를 거쳐 또 다시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20대를 보냈다. 이 책 <아메리칸>은 그의 나이 겨우 34세 발표한 장편이며 그의 또다른 소설 <데이지 밀러>는 한해 뒤인 35세때 발표한 작품이다. 그외에도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70세가 넘은 나이에 영국으로 귀화, 영국 국왕으로부터 명예훈장까지 받았다.

재산도 많고 지적으로도 풍요로운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배경,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사업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는 것은 이 책에서 주인공 뉴만의 자수성가 스토리와 연관지어진다. 제도권 내 교육보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요즘 말하는 글로벌 차원의 교육을 받게 했다는 것에서 그만한 재산의 뒷받침 외에도 자식을 또는 손자를 교육시키는 부모와 조부모의 가치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역시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지식인으로서 당대 유명 지식인 에머슨, 소로우, 카알라일 등과 친교를 맺었고 자유 교육을 지향했으며 자식들에게 토론을 통한 자유분방한 사고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후에 헨리 제임스 역시 파리로 건너가 투르게네프, 플로베르, 모파상,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등과 친분을 맺으며 4,50대를 태어난 미국보다는 런던과 파리에서 주로 보낸다. 자연히 유럽과 미국을, 유럽 사람들과 미국인들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해보는 눈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 결과들이 그의 수많은 작품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총 22편의 소설과 113편의 단편,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비평, 여행기, 희곡, 자서전, 전기 등. 

흔히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읽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것에 비해 이 소설 <아메리칸>은 비교적 내용이 분명하기 때문에 제임스 소설의 입문서가 되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내용 자체로만 보면 기승전결,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그가 배경으로 삼은 파리,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특성, 이것들을 꼼꼼히 따져가며 읽으면 이 소설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읽힐 것이다.

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아 돈 걱정 필요 없는 젊은 사업가 뉴만 (이름에도 의미를 담은 듯, Newman). 돈은 충분히 벌어놓았으나 그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무엇이 있어 새로운 환경을 경험 (그리고 소유)하고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편으로 그는 미국과 다른 세계, 유럽, 파리로 향한다. 미국에는 없는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뉴만은 미망인 백작 부인 클레어를 만나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급변한 상황으로 결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백작부인의 집안에서 갑자기 반대를 한것이다. 귀족 사회로의 진입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로써 물질적 성공과 용기, 의욕은 신분과 계급, 전통보다 하위에 있음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작가는 이 귀족 사회의 "숨겨진" 탐욕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노력으로 이룩한 물질적 성공보다 나을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 결말에서 결혼에 실패한 클레어가 선택한 길은 귀족 사회의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세계, 물질적 성공을 상징하는 미국 그리고 귀족과 신분의 벽이 존재하는 유럽은 끝내 융화되지 못했고, 백작 부인과의 결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좌절의 과정에서 미국인 뉴만은 한단계 더 정신적 성장을 한 셈이다.

이보다 두께는 얇았지만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는 헤매면서, 느린 진도로 읽었던 반면 이 책은 위에도 말했지만 비교적 분명한 기승전결 구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아서인지 쉽게 읽혔다.

생전에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삶의 궤적과 어울리는, 그래서 쓸 수 있었을 작품이다. 뉴만이 벨가드 집안의 비밀을 폭로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결말에서 작가는 유럽이 아닌, 미국쪽의 손을 들어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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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4-2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는 ‘영국에서 살면서 간간히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고 좋은 식당에서 외식을 많이 하면서 한평생을 보낸‘ 사람인데도, ‘19세기 인물들 중 가장 정력적으로 살아간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평을 받더군요. 에머슨과의 인연을 부자(父子)가 동시에 맺은 것도 흥미롭고요. 최근에 읽었던 헤럴드 블룸의『교양인의 책읽기』에서는 『여인의 초상』을 10쪽에 걸쳐서 상세히 ‘강의‘해 놓았던데,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의 작품을 에머슨과 연관지어 설명한 다음 대목이 도리어 눈에 띄더군요.
* * *
자립은 에머슨의 주된 원리라는 점에서 이사벨 아처(『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는 에머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제임스도 틀림없이 인식했을 것이다. 제임스의 아버지가 에머슨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제임스가 에머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구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 열망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렇듯 꾸준하고 지속적이며 무엇보다도 그렇듯 자연스러운 비전을 가진 이는 없었다.˝

˝에머슨을 있게 한 그의 희귀한 천재성은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그리고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다.˝

첫번째 문장은 이사벨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녀의 비전을 보여준다. 두 번째 문장은 제임스의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에머슨의 산책 친구였던 나다니엘 호손을 좋아했다. 내 생각엔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은 이사벨보다 더 에머슨적인 여주인공으로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

hnine 2017-04-27 05:52   좋아요 0 | URL
Emerson이라는 이름을 몇개 잘 알려진 싯구나 문구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영향은 후대의 작가와 학자들에게 무지막지하더라고요. 영국의 세익스피어처럼 오래동안 그나라를 대표하는 작가가 없는 미국에서 에머슨은 미국 지성의 뿌리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헨리 제임스의 이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 뉴만에 헨리 제임스의 행적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것을 느낄수 있답니다. 미국과 유럽이 그냥 나라와 대륙으로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요. 비록 소설에서는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 그리고 가문으로 나타냈지만 그걸 다 찾아 읽는 것은 어쩌면 저도 그냥 이야기 줄거리만 쫓아서 혼자 읽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거예요.
인용해주신 문구도 감사합니다.

oren 2017-04-26 18:55   좋아요 0 | URL
‘미국과 유럽을 넘나들며 크나큰 차이를 느낀 사람들‘ 가운데 ‘보스턴의 먹물들‘이 싫어서 영국으로 건너갔던 T.S. 엘리엇의 경우가 생각납니다. 물론 드보르작 같은 음악가가 미국에서 느꼈던 ‘신세계의 분위기‘도 문득 떠오르고요. 그런데, 에머슨은 ‘미국적 전통‘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기 힘든 (유럽을 모방하기에 바쁜) 척박한 분위기에서「미국의 학자」라는 탁월한 연설로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을 이뤄냈던 인물이니(불과 34세의 나이에..), 그 비범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고 봐야겠지요. 저도 에머슨은 ‘명언‘을 무지 많이 남긴 인물로만 알았는데, 그의 글들을 읽어 보니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더군요. 헤럴드 블룸의『교양인의 책읽기』라는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책 한 권‘ 안에서도 ‘에머슨‘이 그렇게나 많이 언급되는 걸 보며 새삼 에머슨의 깊은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더랬습니다. 나중에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어떻게 느꼈는지도 꼭 알아봐야겠습니다^^

qualia 2017-04-29 03:13   좋아요 0 | URL
˝에머슨을 있게 한 그의 희귀한 천재성은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그리고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다.˝

→ 윗글을 인용해주신 oren 님께는 좀 외람되지만, 저는 위 인용문을 처음 읽었을 때 정확히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더랬습니다. 즉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란 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더랬습니다. “희귀한 문자”라니, 또 그런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엇일까요?

그래서 영어 원전 해당 부분을 찾아 비교/대조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잘못 번역한 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판단하기에)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해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를 일종의 문학비평서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저런 식의 부정확한 번역은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위 인용문 중 마지막 단락도 문맥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즉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은 이사벨보다 더 에머슨적인 여주인공으로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는 문맥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은 대표적인 열정적 여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 그녀가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고 정반대로 기술하고 있으니 십중팔구 잘못된 번역문인 것으로 의심된다는 얘깁니다.

제가 원문과 비교/대조해봤는데요. 위 번역문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oren 님께서 위 인용문을 여기에 옮겨 적으면서 편의상 약간의 편집을 한 듯 보입니다. 번역본 본래의 내용엔 손을 대지 않았지만 몇 개의 사소한 어구만 편의상 바꾸거나 첨가한 것 같은데요. 영어 원본에 있는 해당 구절들과 비교해볼 때 위에 인용된 번역문은 부분적으로 생략되거나 축약된 형태로도 보입니다. 번역본이 원래 그런 것인지 옮겨 적느라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한테는 해럴드 블룸의 『How To Read and Why』의 번역본인 『교양인의 책읽기』가 없기 때문에 위 해당 번역문이 어떤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내린 제 판단은 전적으로 oren 님께서 옮겨 적어주신 인용문에만 근거해서 내린 것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번역자 분께서 잘못 번역한 부분을 분석 · 정리해서 블로그 글로 올리려고 하는데요. 위 해당 인용문을 정확한 인용문으로 봐도 되겠는지요?

hnine 2017-04-29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qualia님, 저도 교양인의 책읽기는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란게 뭘 말하는지 짐작은 되어요. 여기서 희귀한 문자라고 한것은, <문자>가 희귀하다는 뜻이라기보다 <문자로 된것>이 희귀하다는 뜻 아닐까요? 정신은 대개 눈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전해려 내려오는게 보통인데 에머슨의 저술들은 미국의 정신이 <문자화>되어 있는, 많지 않은 것들 중 하나라는 뜻, 전 그렇게 이해했어요. 원전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호손이나 헨리 제임스 모두 에머슨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기 그들의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 그 사상을 표현하려 했을텐데 에머슨의 본래 사상이 후대 작가들에 내려오면서 조금씩 나름대로 변형되었겠지요. 이사벨이 나오는 여인의 초상 역시 저는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사벨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라는 문장에서 <열정>이란 일반적 의미의 열정과 다른, 문학 사조나 경향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하는데요.

qualia 2017-04-29 19:30   좋아요 0 | URL
˝에머슨을 있게 한 그의 희귀한 천재성은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그리고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다.˝ ― 문제의 번역문

qualia님, 저도 교양인의 책읽기는 안읽어봐서 모르겠지만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란게 뭘 말하는지 짐작은 되어요. 여기서 희귀한 문자라고 한것은, <문자>가 희귀하다는 뜻이라기보다 <문자로 된것>이 희귀하다는 뜻 아닐까요? 정신은 대개 눈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전해려 내려오는게 보통인데 에머슨의 저술들은 미국의 정신이 <문자화>되어 있는, 많지 않은 것들 중 하나라는 뜻, 전 그렇게 이해했어요. 원전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 hnine 님 견해

→ 위 hnine 말씀이 맞습니다. 위와 같은 hnine 님의 이해는 정확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위 번역문을 읽고 처음엔 직독직해가 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나중에 번역문을 자세히 ‘뜯어읽으면서’ hnine 님과 같은 이해에 도달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과연 위 번역문을 읽고 모두들 hnine 님처럼 직독직해할 수 있을까요? 즉 원저자가 해당 원문에서 말하고자 했던 의미 그대로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게 의문이었던 것입니다. 저 번역문을 읽자마자 단박에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처럼 혼란을 겪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요컨대 영어 원문을 살펴보면 아무런 혼란없이 직독직해가 가능한 것을 애매모호하게 번역함으로써 쓸데없는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서툰 번역, 미흡한 번역이란 것이지요. 즉 “최초의 그리고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라는 번역문에서 보듯 수식 어구를 애매모호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이런 뜻으로도 저런 뜻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해서 원문을 모르는 독자들은 그 정확한 의미가 뭔지 헷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 . the rarity of Emerson‘s genius, which has made him so, for the attentive peoples, the first, and the one really rare, American spirit in letters . . .
― 『How To Read and Why』, p. 174

애머슨의 천재적 희귀성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한데, 주의 깊은 사람들한테는 문학의 형태로선 최초이면서, 게다가 아주 희귀한 미국적 정신으로 보일 것이다. ― qualia 번역안

대략 저는 위 원문을 위와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 oren 님께서 인용해주신 『교양인의 책읽기』에 나오는 번역과 그닥 크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혼란 가능성은 훨씬 줄어든 번역안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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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장은 제임스의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에머슨의 산책 친구였던 나다니엘 호손을 좋아했다. 내 생각엔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은 이사벨보다 더 에머슨적인 여주인공으로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 ― 문제의 번역문

호손이나 헨리 제임스 모두 에머슨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기 그들의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 그 사상을 표현하려 했을텐데 에머슨의 본래 사상이 후대 작가들에 내려오면서 조금씩 나름대로 변형되었겠지요. 이사벨이 나오는 여인의 초상 역시 저는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사벨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라는 문장에서 <열정>이란 일반적 의미의 열정과 다른, 문학 사조나 경향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하는데요. ― hnine 님 견해

→ 위 hnine 님 말씀 중 《아마도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라는 문장에서 <열정>이란 일반적 의미의 열정과 다른, 문학 사조나 경향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하는데요.》하는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 의미의 열정”과 “문학 사조나 경향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열정]”이 실제로 존재하는 각각의 개념인지, 그것들이 각각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해당 원문을 읽어보고 판단한 바에 따르면 원저자는 상기의 두 열정 개념을 따로따로 상정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요컨대 원저자 문맥에서의 열정(passion)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일반적 의미의 열정 개념과 그닥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인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아래에 해당 원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 Whether James really meant the third extract, I rather
doubt; he preferred Hawthorne, Emerson‘s uneasy walking companion.
The passionate Hester Prynne, in Hawthorne‘s The Scarlet
Letter, seems to me even more an Emersonian heroine than does
Isabel Archer, who flees passion, as did Henry James. [···]
― 『How To Read and Why』, p. 175

셋째 인용문에서 제임스가 진심으로 말한 것인지, 나는 좀 의심스럽다. 예컨대 그는 에머슨의 편치 않은 산책 친구인 호손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호손의 『주홍 글씨』에 나오는 열정적인 헤스터 프린은, 헨리 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열정에서 피해나가는(달아나는) 이사벨 아처보다 훨씬 더 에머슨적인 여주인공인 것 같다. ― qualia 번역안

[주의 : 위에 oren 님께서 인용한 번역문에선 “두 번째 문장은 ~” 하고 시작되고 있죠. 반면 해당 원문에는 “the third extract(셋째 인용문)”으로 나와 있고요. 이 차이는 제 추측에 oren 님께서 인용하시면서 약간의 편집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이런 사소한 차이 때문에 원문의 내용이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이죠.]

위 원문과 qualia 번역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oren 님께서 인용해주신 해당 번역문은 원문과 결정적으로 달라 보입니다. 빼놓은 부분도 있고 분명히 잘못 번역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죠. 거의 정반대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자세한 고찰을 통해 『교양인의 책읽기』에 나타난 오역이 어떠한 정도인지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위에서 언급한 부분만큼은 오역이 분명한 듯합니다.



hnine 2017-04-30 11:08   좋아요 0 | URL
와, qualia님, 능력자!! ^^
원문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7-04-30 14:16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하신 의문점들이 ‘원문 대조‘를 통해 명쾌하게 해명되었군요. qualia 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인용했던 부분은 사실 ‘헤럴드 블룸의 평론‘과 ‘헨리 제임스의 언급‘이 번갈아 가면서 뒤섞여 있어서 ‘명쾌한 이해‘에 도달하기 힘든 요소가 처음부터 내재해 있는 데다가, 번역 또한 ‘헨리 제임스의 문장‘과 ‘헤럴드 블룸의 문장‘ 모두에서 애매한 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인용‘하기를 살짝 주저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제가 주저했던 문제점이야말로 qualia 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해 주신 그대로입니다.

저는 ‘에머슨의 희귀한 천재성‘에 대해서는 hnine 님처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최근에 에머슨의 책들을 거듭 비교하면서 읽은 덕분일지도 모르겠지요. 그래도 qualia 님께서 올려주신 원문을 보니 원래의 번역문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다가오는 건 분명합니다.

문제가 된 두 번째 번역은 제가 봐도 ‘오역‘이 맞는 듯합니다. 원래의 번역문은 qualia 님의 지적대로, ‘헤스터 프린이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로 읽히기 때문입니다.(저도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려려니‘ 하고 대충 넘어간 기억이 납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인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되기도 했고요.) 원문을 보니, ‘헨리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벨 아처가 열정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인물‘임이 틀림없네요.

헤럴드 블룸이 쓴 『교양인의 책읽기』는 번역된 우리말로 읽어보더라도, 문학평론 특유의 ‘함축과 비약‘이 난무하기 때문에 ‘다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심지어 정반대로 곡해할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이 ‘번역상의 오류‘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건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네요. 더군다나 이 책의 역자도 ‘옮긴이의 말‘에서 ‘번역의 한계, 그리고 내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면서‘ 번역했다고 토로해 놓았더군요.

참고로, 이 책은 내용이 훌륭한데도 너무 일찍 절판되는 바람에 쉽사리 구입하기 어려운 책이 된 점이 아쉽더군요. 2011년 4월에 운병우 번역으로 나온『헤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도 같은 원서를 역자와 출판사를 달리 해서 번역한 듯한데, 그 책도 어느새 절판되고 말았고요.

oren 2017-04-30 14:18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이미 제가 맨 처음 인용했던 부분의 ‘해당 원문‘을 보셔서 아셨겠지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 대해 ‘미세한 편집‘이 있었다는 걸 고백해야 겠군요. 그건 제가 일부러 ‘불필요한 혼동‘을 피하고, 인용의 주목적이었던 ‘헨리 제임스와 에머슨의 관계‘에 초점을 더 맞추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맥락없는 인용‘이 자칫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인데, 제가 인용을 생략한 부분은 도리어 ‘인용함으로써 그나마 있던 맥락도 무너뜨리는 듯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이 없었던 건 제 불찰입니다. 어쨌든 ‘제가 생략한 부분‘까지 전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 *

자립은 에머슨의 주된 원리라는 점에서 이사벨 아처는 에머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제임스도 틀림없이 인식했을 것이다. 제임스의 아버지가 에머슨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제임스가 에머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을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머슨의 저술 전반에 대해 그것들이 전혀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건 너무 지나치거나 혹은 너무 모자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 열망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렇듯 꾸준하고 지속적이며 무엇보다도 그렇듯 자연스러운 비전을 가진 이는 없었다.˝

˝(…) 에머슨을 있게 한 그의 희귀한 천재성은 주의 깊은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그리고 진실로 희귀한 문자로 된 미국의 정신이다.˝

첫번째 문장은 지나치게 압축되어서 어색하다. 에머슨의 에세이「경험」을 읽어 본 독자들은 제임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이사벨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녀의 비전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제임스의 진심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에머슨의 산책 친구였던 나다니엘 호손을 좋아했다. 내 생각엔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은 이사벨보다 더 에머슨적인 여주인공으로 헨리 제임스처럼 열정에서 벗어나 있다.

에머슨은 두 아내 엘렌과 리디안 모두를 사랑했다. 아마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엘렌을 더 사랑한 것 같다. 별로 소설을 읽지 않았던 에머슨은 『주홍글씨』를 읽긴 했지만 과소 평가했다. 내가 볼 때는 『여인의 초상』도 그리 썩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261∼262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3_장편소설

qualia 2017-04-30 16:50   좋아요 0 | URL
hnine 님, 의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hnine 님께서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셨기 때문에 제 나름으론 좀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ualia 2017-04-30 18:07   좋아요 0 | URL
oren 님, 상세하고도 친절한 도움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oren 님 덕분에 여러 가지를 깨닫고 공부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oren 님께서 ‘미세한 편집 인용’ 건에 대해 oren 님 자신의 불찰이라고 하신 것은 너무 지나친 자책인 것 같습니다. ^^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원전을 인용할 때 여러 가지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원전의 내용을 변경하지 않는 선에서 미세하게나마 일부 단어나 문장을 수정 인용할 수도 있고, 생략 인용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래서 oren 님의 저 위 인용 방법은 오히려 oren 님의 애초의 목적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번역자 분의 번역문에 오역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의식이 들었고, 그 때문에 oren 님께 여러 가지 관련 질문을 했던 것이었죠. 아무튼 oren 님 덕분에 영어 원전 『How To Read and Why』와 그 두 가지 번역본인 『교양인의 책읽기』와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과 같은 좋은 책들도 (재)발견하게 되었고요. 번역 혹은 번역비평과 관련된 몇 가지 소득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oren 님과 hnine 님께 무척 감사한 마음입니다.

(oren 님과 hnine 님은 물론이고) 혹 번역과 번역비평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oren 님께서 위 댓글에 새로이 추가 인용해주신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래에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참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Self-Reliance is Ralph Waldo Emerson‘s
prime doctrine, and Isabel Archer is one of Emerson‘s children,
as James, on some interior level, must have been aware. Since
Henry James Sr. never achieved independence from Emerson, his
son‘s comments upon the Sage of Concord require wary reading:

It is hardly too much, or too little, to say of Emerson‘s writings in
general that they were not composed at all.

But no one has had so steady and constant, and above all so natural,
a vision of what we require and what we are capable of in the
way of aspiration and independence.

. . . the rarity of Emerson‘s genius, which has made him so, for the
attentive peoples, the first, and the one really rare, American spirit
in letters . . .

The first remark is absurdly condescending; read Emerson‘s
essay ˝Experience˝ and you may not agree with Henry James.
But the second excerpt is pure Isabel Archer: that is precisely her
vision. Whether James really meant the third extract, I rather
doubt; he preferred Hawthorne, Emerson‘s uneasy walking companion.
The passionate Hester Prynne, in Hawthorne‘s The Scarlet
Letter, seems to me even more an Emersonian heroine than does
Isabel Archer, who flees passion, as did Henry James. Emerson was
in love with both his wives, Ellen and Lidian; perhaps more passionately
with Ellen, who died so young. James, not Emerson, is
responsible for Isabel‘s repression of her sexual nature. Never much
of a novel reader, Emerson read The Scarlet Letter but underesteemed
it; and I doubt that he would have admired The Portrait
of a Lady.

―『How To Read and Why』, pp. 174-175

oren 2017-05-02 16:30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구절 때문에 qualia 님께 괜스레 불편을 끼쳐드린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qualia 님께서 수고스럽게 찾아 주신 ‘원문‘ 덕분에 번역의 문제점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qualia 님께 거듭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Classic Starts(r) Moby-Dick (Hardcover)
Melville, Herman / Sterling Pub Co Inc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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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 곤충기, 시이튼 동물기 등등, 제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고 해도, 그리고 내가 동물을 사랑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웬지 동물이 떡 하니 전면에 나오는 책은 잘 안 읽는 습관이 있다. 모비딕도 초등학교때 <백경>이라고 번역된 책이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 읽지 않고 던져 놓은 이후로 지금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 주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어야 할 일이 생겼다. 듣고 있는 강의 <서양 고전> 이번 주 주제였기 때문이다. 급기야 강의 하루 전날, 집안 어디서 본 기억이 있어 방방마다 뒤져보았더니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모비딕이 아들 책 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이거라도 읽어야지 펼쳐보니 글자도 큼직, 두께도 140여쪽.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 원본을 가볍게 줄여 써놓은 축약본이었다 이런. 오히려 잘 되었는지 모른다며 저녁 먹고 나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다 읽고야 말았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흥미 진진할 줄이야.

고래가 상징하는 것, 고래를 잡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 고래를 잡는다는 같은 목적으로 배에 탔지만 사람마다 다른 태도. 고래를 끝까지 잡아야 했는가. 어디까지가 정당한 목적이고 어디부터가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목적 추구인가.

생각할 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솟아 나오게 했다. 자기의 다리 한쪽을 잃은데에 대한 복수심,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린 함장 에이합을 우리는 과연 자신있게 비난 할 수 있을까. 거기서 혹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진 않는지.

자연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공격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의 이기심. 자기의 능력을 증명할 대상으로 자연을 선택하고는 우쭐해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오히려 인간의 성취가 아닌 한계가 보였다.

모비딕은 자기를 공격하는 대상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본증적인 행위를 했을 뿐이다. 얼마전 본 영화 LIFE에서 화성생명체가 먼저 인간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듯이. 지구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듯이 화성에도 생명체가 존재했던 것이고, 그것을 채취해와서 시험해보고 제한된 조건에서 키워보고 어떻게 반응하나 실험해본 것은 인간이었다.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있고 그들, 즉 모비 딕이나 화성생명체가 그에 대한 어떤 반응을 보이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공격 행위가 되는 것인지.

배에 탄 선원중 스타벅의 신중함은 고래 잡기를 어느 시점에서 그만 두어야 하는지 알았다는데서 나온다. 함장 에이합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포기가 쉬웠을리 없다.

이 모든 여정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는 이 책의 화자 이슈마엘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때로 에이합의 태도로 삶을 살기도 하며 스타벅이기도 하다가 이슈마엘이기도 하다.

본문 중, 고래를 성공적으로 포획했다해도 그것을 제대로 배에 장착하여 끌고 올 수 없을 때는 그냥 바다에 버리고 온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슈마엘의 한마디. 그럴 것을 왜 저 큰 덩치의 고래를 죽여야 했을까 생각하면 안타깝다는 독백같은 한 문장.

이 책은 고래잡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고래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번 읽는 것으로 결코 충분치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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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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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제목 같기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 제목 같기도 한 이 책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원제는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이다. 제목이 친숙한 이 책에 대해서 언제 처음 들어봤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마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서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리라. 과연 이 책을 읽어보니 얼마 안 가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 어떤걸 말하는지.

1882년 아일랜드 태생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문학사적 의미나 가치에 비해 기대만큼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가족 구성원과 친구들 그리고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그의 예술관이 어떻게 자리잡아 가는가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성격이 각양각색인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대립을 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주입해주는 지식에 대해 반항하여 반항적 경향의 문학가가 최고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성장기 소년인만큼 마음에 두는 여학생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사창가의 여인을 찾기도 했던 일로 인해 깊은 고뇌를 겪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는 기법이라는게 어떻게 보면 얘기가 옆길로 수시로 빠졌다 돌아왔다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옆길로 빠지는 과정이 무작정 뜬금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감각의 연상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문장으로서 매끄럽고 문학적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66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운동장에서 스티븐 친구들이 크리켓 경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저기서 크리켓 방망이 소리가 부드러운 잿빛 공기를 통해 들려왔다. 방망이들은 픽, 폭, 퍽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분수대의 철철 넘치는 낙수반 위로 물방울들이 천천히 떨어지며 내는 소리 같았다.

어! 그런데 크리켓 방망이 소리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로 연결되는 이 구절이 91쪽에 다시  나온다.

애들은 크리켓 공으로 멀리 던지기라든가 커브 공 및 느린 공던지기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잿빛 공기의 정적 속에서 그는 공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조용한 공기를 뚫고 크리켓 방망이 소리가 들려왔다. 픽, 팩, 폭, 퍽. 분수대에서 철철 넘치는 낙수반 위로 물방울이 조용히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크리켓 방망이 소리와 분수대 물 소리는 작가에게 확실한 어떤 연상 고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인 5장에 가면 스티븐의 예술에 대한 가치관과 주관이 거의 성립되어 있음을, 그가 친구에게 하는 말을 통해 알수 있는데 친구에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엔 매우 진지하고 깊은 내용들이 많아 줄을 치며 읽었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은 동적이 아니라 정적이어야 하는데,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욕망을 즉각적으로 충동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초월적인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서 과거 여러 철학자나 사상가의 생각들을 인용해서 친구에게 주장한다. 아퀴나스가 미(美)의 정의를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해서 즐거워지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것을 인용하고 거기서 나아가 스티븐, 즉 제임스 조이스의 예술에 대한 정의는 "미적인 목표를 위해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진실의 광채라고 하여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서로 비슷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해 가능한 것들의 가장 원만한 관계에 의해서 충족되는 지성이 포착하는 바가 진실이요, 반면에 지각 가능한 것들의 가장 원만한 관계에 의해 충족되는 상상력이 포착하는 바가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이런 정의들은 한번 읽어서 머리에 바로 들어오진 않지만 반복해서 읽어보면 결코 이해 못할 말들은 아니다. 마치 대학때 미학 시간에 배운 것들을 미학 책이 아닌 문학 작품 속에서 다시 복습하는 듯한 읽기가 수십 페이지에 걸쳐 계속 되었다. 같은 사람의 주장이나 말들이라도 이렇게 문학 작품 속에서 읽으면 더 맛있고 멋있다.

이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 시도된 정도이고 본격적인 기법은 그의 또다른 작품 <율리시스>에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번역자가 예전의 번역을 전면 개편하다시피 다시 내놓은 것이라서, 페이지마다 해설이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이 때로는 도움도 되고 방해도 되었다. 하지만 번역자가 한 문장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한 기색은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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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해서 배송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e-book으로 다운받아 읽었다. 아주 옛날 우연히 TV 주말의 명화로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으나 흑백 영화였고 밤에 혼자 보는데 아주 무서웠다는 것 밖에 생각나는 게 없을 정도로 옛날이었다. 그래도 읽으면 내용이 생각날거라고, 원서로 도전을 했다. 60쪽이 좀 넘는 단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웬걸. 모르는 단어도 의외로 많이 나오고, 문장의 길이가 긴 것들이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읽고 났는데 내용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번엔 되도록 사전을 찾아가며 두번째 읽었더니 비로소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단편이었기에 망정이지.

하지만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이 작품의 문학적 의의까지 이해된 건 아니다. 내일 강의를 더 호기심을 가지고 듣고 싶어서 다른 해설은 보지 않고 참기로 한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다른 대표작 <검은 고양이> 역시 <어셔가의 몰락> 처럼 미스테리하고 괴기스런 내용이다. 그는 시인으로도 유명해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시로 <애너벨 리>가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읽으며 어디에서 감동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린 부인을 생각하며 쓴 것일까?

에드가 앨런 포도 그리 오래 살지 못했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별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문장들 속에서도 옮겨 적어두고 싶은 표현들이 꽤 있었다. 내일  이 작가에 대해 어떤 강의를 듣게 될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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