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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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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유해 세균의 침입은 물론, 내 호르몬 균형에 교란을 가져오는 어떠한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있을 모체 적합성 여부 테스트를 통과하여 최상의 DNA 전달자로 선발만 되면 내 몸과 정신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나의 생명이 끝난 이후에도 나의 DNA가 이 지구상의 어느 호모 사피엔스 몸 속에 계속 전달되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특혜가 있을까.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내 육신은 끝이 있어도 끝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내 DNA는 계속 남아있을테니."

내가 가끔 상상해보는 미래이다. 가임기의 여성이 배우자를 만나 2세를 낳는 일. 이것이 앞으로는 가임기의 여성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 2세 생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여성을 선발하여 선택된 유전자로 구성된 2세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가에서 귀인 모시듯이 모시게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 여성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양질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생산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성이 일정 나이가 되면 누구나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따라, 또 특수화된 교육과 선발 과정을 거쳐 모성 적합성 테스트를 통과한 특수 계급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심심할때 나 혼자 꾸는 백일몽 이라서, 어떤 근거도 논리도 없다.

 

호모 데우스. 이 책 속 유발 하라리가 제시한 미래 사회, 미래 인간을 읽어보니 그는 앞으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걸어가게 될 길을 예측하느라 현재뿐 아니라 아주 과거에 우리가 걸어온 길까지 정말 공부를 많이 했더라.

신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만들어내야 했던 존재. 그런데 이제 인간이 그 신의 경지에 가까와지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신이라고 믿고 있던 그 자리는 무엇이 대치하게 될 것인가. 두가지. 인공지능생명공학. 이 책의 내용을 두 단어로 요약하라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서론, 인류의 새로운 의제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왜 썼는지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인상적인 두 구절을 가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역사가 불변하는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미래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면 왜 역사를 연구할까?

-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91쪽)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이다. (100쪽)

인본주의를 이렇게 간단하게, 그러나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을 처음 본다. 즉, 인본주의의 최종 목적지는 인간이 신과 같아지는 지점이라는 말.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에서는 미래를 얘기하기 전에 우선 지금까지 사피엔스가 걸어온 길, 즉 과거를 얘기한다. 당연히 전작 사피엔스 내용이 많이 나오고 , 드디어 이 책의 키워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알고리즘' 개념 등장. 저자는 이 알고리즘이 이 책의 핵심개념일뿐 아니라 21세기를 지배할 개념이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대놓고 얘기했다.

알고리즘이란, 같은 방법이 계속 반복되는 단계를 밟아 계산을 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이용되는 것을 말한다. 즉 일종의 방법론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들을 포함해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99퍼센트는 감각, 감정, 욕망이라고 불리는 매우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126쪽)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다음 세가지였다.

1. 사피엔스만이 영혼을 가진다.

2.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3. 쥐, 개, 여타 동물들이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달리 자의식이 없다. 즉 사피엔스만이 자의식,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다.

1번의 영혼은 상대성 이론, 진화론과 같은 과학에 의해 반증된다.

2번의 의식적인 마음은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의해 의식이 결정된다는 사실에 의해 반증된다.

3번의 자의식은 동물과 인간이 차이가 없다는 실험에 의해 반증된다.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없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 시스템의 의식, 감정, 감각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영혼이나 의식 같은 특별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을 누르고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이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더 능란한 손재주나 큰 뇌 덕분이 아니라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여럿이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의해 인간의 믿음이 반증되었다고 해서 과학이 최종 결정 역할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유발 하라리가 펼치는 일종의 반전이랄 수 있는데 이미 앞에서 과학과 종교의 범주와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언급된 적 있으나 여기서 한번 더 확실하게 짚어주고 간다.

다른 어떤 동물들도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이념이라는 허구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쓸 것이고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기후를 재설계할 것이고 산과 강 같은 지리적 공간이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들이 유전암호와 전자암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를 삼키고, 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허구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214, 215쪽)

 

하! 과학 위에 있는 허구.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216쪽)

 

허구를 어떻게 해독해야하지?

 

 

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피엔스가 그 우월성을 어떻게 펼쳐왔고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리하여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지, 현재까지의 상황 점검이다. 사피엔스가 그 우월성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가지 때문이었다. 문자성경.

2부에서 가장 마음에 새기고 싶었던 내용은 일전에 다른 페이퍼로 남긴 적있는 실제와 허구는 서로 배척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 관계라는, 또한번의 유발 하라리식 반전이었다.

실제(예. 과학)가 허구(예. 신화)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할 것이다.

 

과학이 부상함에 따라 적어도 몇몇 신화와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매우 난처한 질문 하나. 근대 과학은 종교와 어떤 관계일까? 과학과 종교는 500년 동안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남편은 여전히 신데렐라 같은 아내를 기대하고 아내는 계속 완벽한 남편을 갈망하면서, 쓰레기 버릴 차례가 누구냐를 놓고 싸운다. (250쪽)

 

과학과 종교는 쓰레기 버릴 차례가 누구냐를 놓고 싸우는 부부 사이라지 않는가. 싸우긴하지만 아무튼 부부 사이라는 것. 친구가 아닌 부부이다. 친구와 달리 부부는 일종의 계약에 의해 묶여 있는 관계이다. 과학과 종교가 일종의 계약 관계라는 것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아서 초집중해서 읽고는 아슬아슬하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과학에 의해 종교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대상이 되었던 신의 영역-그 영역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설정해놓은 것이니까-에 인간이 도달하게 됨에 따라 이제 인간은 예전의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신의 자리에 인간이 앉혀놓은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다음 3부의 내용.

 

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계약 관계가 깨지게 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알려진 사실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도달하게 된 지점을 종교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데 있다. 당대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 없이 이제 종교는 어떠한 선지자적 방향 제시도 해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을 신의 경지로 업그레이드하고자 했던 인본주의는 21세기에 이르러 기술 발전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된다. 핵무기와 인공지능이 그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행동의 지침 역할을 해주는 신의 자리를 대치하게 될 것은 생명공학인공지능이라고 저자는 결단력있게 주장한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인공지능이란 다름 아닌, 알고리즘을 기본 방법론으로 하고 있는 기기이다. 그가 알고리즘을 21세기의 핵심 개념이라고 처음부터 강조한 이유가 있었다.

이미 생명공학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결정과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얼마나 큰 신뢰를 얻어가고 있는지, 저자가 든 예들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전문적이라서 또한번 놀라며 읽었다. 아마도 그는 역사 만큼이나 생명공학 분야의 공부를 해오고 있지 않을까.

인공지능에 의해 인본주의, 자유주의 철학이 무용지물이 되고 알고리즘에 밀려나면 인간 사회에는 새로운 계급 형성이 이루어지는데, 소규모 엘리트 집단, 즉 '초인간' 계급과, 쓸모없는 대중이다. 전자의 초인간 계급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모 데우스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알고리즘과 생명공학이 근간이 되는 신흥 기술종교는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 (데이터교)가 될 것인데,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단어가 익숙하지 않아서일 뿐이지 사례를 읽어보면 이미 우리 생활에 들어와 있는 것들이다. 차를 운전할때 우리는 우리의 순간적인 판단보다 네비게이터를 더 신뢰하지 않는가?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사소한 흥미거리를 즐기기 위해 우리의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동의한 덕분에 공짜로 축적된 무지막지한 데이터는 알고리즘을 거쳐 막대한 양의 정보의 흐름을 형성하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려주고 판단을 내려준다. 나 한 사람의 경험을 근거로 한 결정을 신뢰하겠는가 아니면 막대한 양의 정보를 토대로 내려진 결정을 받아들이겠는가. 여기서 잠깐 장난스런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만약 이 단계에서 막대한 데이터를 근거로 제시된 결정을 거부하고 오로지 나의 경험에 근거한 결정에 의존하겠다고 한다면?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백만배 더 정확한 데이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럴 인간이 있을까.

 

미래라고 하기엔 너무나 눈 앞에 가까이 보이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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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7-30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정작 이런 논쟁적인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해서는 왜 댓글이 하나도 없는 거죠??? 요즘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와 인공지능이 가장 뜨거운 화제이고 생각거리 풍부한 논제라 할 수 있는데요. 알라딘 사람들/블로거들은 왜들 이렇게 조용한 것이죠? 자기 의견 제시에 너무들 소극적인 건 아닐까요? 누가 좀 논쟁의 불씨를 당겨줬으면 하고 기대했습니다만... ―.― ^^

hnine 2017-07-31 05:02   좋아요 1 | URL
그냥 인공지능에 대해 논쟁을 하자면 가능할텐데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토론을 하자면 아마 저자 만큼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상태여야 할 것 같고, 그러려니 저부터도 벌써 움찔 해져요. 그 정도의 충분한 지식이 없거든요. 읽으면서 그저 조용히 공감하는 정도였다고 할까요.
생각거리가 풍부한 논제라는데는 저도 동감입니다. 이제 대세는 이미 인공지능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가 충분해야 할 것 같고요.
저는 qualia님께서 이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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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나 감미로운 생각이었는지. 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무모한 무용수처럼 내 방으로 불쑥 뛰어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8)

8쪽의 이 대목부터 였다. 버스 속에서 읽고 있었는데 연필도 아니고 가지고 있던 볼펜으로 밑줄을 주욱 긋기 시작한 것이.

다 읽고 나서도 역시 마음에 제일 남겨두고 싶은 부분, 역시 여기다. 이 책의 내용을, 그리고 로베르트 발저라는 사람을 제일 처음 느끼게 해준 이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어본다. 입으로. 소리내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듣게 된 EBS 책 소개 프로그램이었는데 마침 진행자와 이다혜 기자가 이 책을 소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다혜 기자 말이, 누군가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책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이 책 아주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 흥미로와 계속 듣다가 어찌어찌 해서 청취자 몇사람에게 이 책을 보내준다는데 걸리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는 말을 듣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나는 읽자 마자 책 속으로 빠져들고 만걸. 뭐든 억지로 좋아하려고 할 필요 없는 것이다. 노력 없이도 좋아지는 것들이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하므로. 책도 그렇다.

 

로베르트 발저. 1878년 스위스 태생. 금수저는 아니었고 굳이 비유하자면 흙수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를 중단했어야 했고, 나중에도 그럴 듯한 배경이 될만한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한때 배우가 되고 싶어 했으나 그러지도 못했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글쓰는 일을 생계 수단으로 삼게 되는데 독일과 스위스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긴 했지만 문학인들의 사회에 끼지 못하고 점차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였고, 형제중 한명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다른 한 형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 자살 시도, 마지막 날까지도 집없이 떠돌다가 자신은 조롱만 당하고 성공하지 못한 작가라고 알고 세상을 떠났다.

 

삶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순간처럼 아름다웠다. 조용히 나는 그곳을 떠나 거리로 나섰다. (17)

<빌케 부인>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하숙하던 집의 늙은 여주인 빌케 부인이 죽었고, 며칠 지난 후 그녀가 쓰던 방을 들어가본 그는 허무함과 덧없음때문에 꼼짝없이 서서 한참을 마비된 듯 서있어야 했다. 허무함과 덧없음을 느끼게 하지만 거기서 끝나게 하지 않고 그래도 내 어깨를 붙잡아주는 삶.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다른 곳도 아니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는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수십편의 짧은 글 모음집이라지만 어떤 글은 정말 짧고 어떤 글은 꽤 길다. 어떤 글은 짧은 소설 같고 어떤 글은 일기 같다. 어떤 글에서는 동물이 의인화되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림이 주인공이 되어 말을 하기도 한다. 가령 <세잔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에서는 그는 이렇게 그만의 그림 보는 방식, 태도를 보여 준다.

그가 과일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겼을 것이 분명하고, 그런 다음에는 문득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들었을 것이며,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드는지 그 이유는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244)

그가 마법을 써서 종이 위로 옮겨놓은 꽃들은 식물 특유의 흐느적거림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여전히 이파리를 떨었고, 방종한 몸짓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식물의 살덩어리, 특별한 천성에 깃든 불가해한 비밀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248)

 

식물의 살덩어리, 불가해한 비밀의 정신이라니.

그는 세잔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보기 시작하다가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읽어보았고, 나아가 그림 자체와 그림을 보는 자신을 일치시켜 교감하였다. 그는 모든 지나간 것, 옆에 없는 존재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었다. 그것들과 교감해보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느 미술 평론가라 한들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길이로 보면 이 책에서 가장 긴 글에 해당하는 <산책>에서 묘사되는 산책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 처럼 그저 여유롭게 길을 따라 걷는 행위가 아니다.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비탄, 자신의 용기와 결핍, 자신의 모든 궁핍을, 산책자는 마치 용감하고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모든 자질이 입증된 군인이 전쟁터에서 그러듯이, 전부 무시하고 개의치 않고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행위, 모든 사물과 현상에 품는 열렬한 애정은 마치 의무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수행하는 일이 내면의 큰 기쁨이자 충만함인 것처럼 그렇게 큰 행복감을 산책자에게 안겨줍니다. 그저 그런 산책자 이상의 존재로 상승시킵니다. (342)

산책이란, 자신이 무책임한 그저 그런 산책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행위이며,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관찰하면서 다양한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349)

 

로베르트 발저. 그에게 산책은 곧 삶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의 생의 마지막도 눈내린 산책길에서였다니까.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만큼 매혹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번역가 배수아의 말이다. 그녀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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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7-07-13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매혹적인 글이에요.^^
로베르트 발저, 모르는데, 궁금하네요.

hnine 2017-07-13 07:25   좋아요 1 | URL
오타도 수정하지 않고 그냥 올려버렸는데 벌써 읽어주셨어요 ^^
매혹적인 책이랍니다.
산책은 누구와 같이 하기 보다 혼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산책을 택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이 책으로 로베르트 발저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문장이 독특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프레이야 2017-07-1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갑니다. 특히 세잔의 정물화를 보고 쓴 문장이 마음을 잡아끌어요. 세잔의 아뜰리에를 찾았던 햇살 가득한 날이 생각납니다. 정물로 재현되어있던 과일들도요.

2017-07-13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07-13 08:18   좋아요 0 | URL
정물은 사실 죽어있는 사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 처럼 거기서 다시 생명을 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 책의 저자 같은 사람이요. 살아있는 것 뿐 아니라 죽어있는 것들에조차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글을 읽으며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으로도 행복했어요.
세잔의 아뜰리에 직접 가보면 어떤 느낌일까요. 저는 상상의 즐거움을 누려봐야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을 함께 좋아해주셔서 좋고, 오자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햇빛이 벌써 힘부리기 시작한 아침입니다 ^^

꿈을 향해서 2017-08-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한 번쯤 읽어보고 싶네요 우연히 이 책이 내 눈에 또 들어온다면 부러 읽어봐야겠어요!

hnine 2017-08-20 22:45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꿈을 향해서 님 눈에 또 들어온다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다 여기고 읽어 주시길~ ^^
 
한국에서 심리학자로 살아 보니 - 대한민국 상처 치유 심리 에세이
이나미 지음 / 유노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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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의 말이나 글이라면 혹시 지나간 세대의 일침으로 여겨질 때도 있겠지만 이 저자는 나보다 연배이긴 하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는다. 최근에 나온 책이기도 하고, 신문 컬럼 등에 기고했던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근래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 현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평상시 사람들과 이런 내용들로 충분한 의견 토론의 기회가 없이 혼자 생각만 해오던 나로서는 내 생각과 공통점, 차이점들을 발견해가며 읽어가는 맛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 보는 눈도 깊어질 줄 알았는데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내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 그렇게 온 정신을 사로잡던 고민중 이제 더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러면 뭐하나, 예전에 하지 않던 새로운 고민들이 나이와 함께 밀고 들어오는걸. 그중 대표적인 것이 노년의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하나, 이것이다. 다람쥐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어떻게 보람있게 살까 고민하더냐, 그냥 눈 떠지면 주어진 하루를 사는 것이다, 라는 어느 스님 말씀도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람쥐가 아니라 사피엔스이니 어쩌냐. 인생, 허무하지만은 않다는 쪽으로 마음을 몰아가려는 노력을 하다가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자체가 인생은 허무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자문하는 하루, 한달, 일년. 그러다보니 이 책 중에서도 다음 구절이 눈에 쑥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노인들이 정신 치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으려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젊은 의사들이 인생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생각으로 아예 치료를 거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이가 들면 정신분석을 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고 프로이트가 토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은 오히려 중년을 넘겨야 참된 자기 개성을 찾아간다고 강조한다. 외부와의 관계, 또 외부에 보여 주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젊은 시절과 달리,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융 심리학적 용어를 쓰자면 작은 자아 (ego)를 버리고 완성된 큰 자아 (self)를 지향하기 위한 정신의 축 (Egp-self axis)을 다시 회복해 보는 것이다.

노인이 되어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노화와 죽음의 문제인간의 현세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우주의 영원성에 대해 묵상하게 만든다. (56,57쪽)

 

이건 부의 정도와도 상관없고, 학식의 정도와도 상관없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한번 쯤 주어지는 문제이고 죽을 때까지 지고 가는 문제가 아닐까. 이 문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영성의 영역에서 가치를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저자는 제시한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 화려한 옷차림, 멋지게 꾸며 놓은 살림살이, 남들에게 과시할 만한 성취 같은 것을 훌쩍 뛰어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영역에서 나와야 한다. (57쪽)

 

저자의 이 말을 특정 종교 여부를 뛰어 넘어 이해한다. 나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 안될 문제들을 붙잡고 있구나, 그래서 뒤늦게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는거구나 하는 생각.

남을 화나게 만드는 이들은 사실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평소 내 생각과 같다. 남을 화나게 만드는 이들치고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없다고. 본인이 혼자 불행하면 억울하니까 남까지 화나게 만들어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전가하려는 무의식적 소망에 휘둘리는 것이라고 했다. 내 경우엔 남을 화나게 만든다고 해도 내 속의 화가 조금도 해소 되지 않던데.

상처는 상처다. 마음의 상처는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변환돼야 회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고 그렇게 소중히 잘 다루어져 회복된 상처와 고통은 에너지라고 했다. 

인공지능의 영역은 점차 늘어나고 사람이 필요한 영역은 점차 줄어갈 미래가 눈에 보이고 있지만, 인공지능보다 사람에게 우월한 영역이 공감과 상상력이고, 사람의 성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한다. 지능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창조적인 에너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라는 말은 사람에겐 아직도 정신이 중요하다는 말로 해석된다.

항상 행복하고 풍요롭게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아침저녁으로 연속극 꼬박꼬박 챙겨 보고 쇼핑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쓰는 삶은 창조적이기 어렵다, 창조적이려면 외로워야 한다는 말에 공감, 아니 위로받았다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늘 외로워야 한다는 말이 아닐 것이며, 고립된 생활을 한다고 모두 창조적이라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하지 않고서는 창조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앉아서 사유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좀 더 구체적인 예로, 앉아서 책만 많이 읽는다고 해서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노동은 영성의 지름길이다"라고 했다. 예전에 불가에서는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일 같지만 일정 시간 열심히 청소하는 것부터 하게 했고 간디, 테레사 수녀, 혜능조사,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은 모두 몸을 아끼지 않는 근면성을 보여준 분들이라고 한다.

자신의 상처와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고 인정하여 잘 보살핌으로써 회복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 안의 어두운 면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작은 자아를 뛰어 넘어 큰 자기로 나아갈 수 있고, 아픔을 웃음으로 이끄는, 진정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서 뻗어나오는 따뜻한 기운, 곧 에너지. 물질적으로 더 갖고 외형적으로 더 갖춰서 뿜어나오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저자의 책을 꽤 읽어왔지만 저자 본인의 얘기는 간혹 할지언정 가족 얘기를 풀어놓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간간히 저자 가족 얘기도 하고 있었다. 남들이 걷는 길은 꽃길, 내가 걷는 길은 가시밭길, 이렇게 오해하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서일까? 내 경우엔 내가 걷는 길이 꽃길이 아닌 것을 물론이고 남들이 걷는 길도 꽃길이 아니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으니 더 중증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도 말랑말랑한 뇌, 고무공 같은 사고 능력, 세포막같은 semi-fluidity를 잃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그런 사람으로 사는 예시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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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7-0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티비에서 성신제씨 스토리를 보았습니다. 나이 70 에도 여전히 새로운걸찾아서 시도하고 열정이 넘치더군요. 잘 지내시죠 나인님.

hnine 2017-07-03 12:36   좋아요 0 | URL
그분 저랑 나이를 바꾸셔야겠네요 ㅋㅋ 저는 70될려면 멀었는데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데 말예요.
저는 고만고만 지낸답니다. 거의 매일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니까 제 친구들이 저보고 너 그러다가 치매온다고 걱정하기도 해요.
프레이야님 어찌 지내시는지도 궁금해요.
 
[eBook]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 서툴면 서툰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지금 내 마음대로
서늘한여름밤 지음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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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란 말을 되도록 자제하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그말을 자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 좋은 경우에 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의 다른 말 아닌가. 어차피 내 할 일 입니다, 어차피 내 가족 입니다, 어차피 내 나라 입니다, 어차피 내 몫입니다...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물론 저자가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인지는 안다. 끝까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주어야 할 내 마음이라는 뜻일 것이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지내고 나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을, 겪고 있는 동안 담담하기란 참 어렵다. 계획대로 가던 길을 수정해야 할땐 마치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이 일어난 양,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자책하고 분석하고 후회하면 안된다 스스로 억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할 일은 살아가다 보면 몇번이고 있을 것이고 그게 곧 사는 과정이라는 걸 나도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심리학을 전공해서 전공분야에서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되리라 생각했다가 궤도 수정. 주위의 걱정. 그것보다 더 한 자기 반성 모드. 정체성 흔들림. 그러다가 그림 일기라는 것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저자가 꼭 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기 마음을 다독이고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 같다. 이렇게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보는 융통성, 저절로 생겨나는 자신감이라기 보다 만들어가고 다져가는 자신감. 투덜거리리고 걱정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만 그게 어느 선 넘어가지 않게 되돌리는 능력. 어차피 내 마음이라고 하기 보다 기특한 내 마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덧붙이고 싶은 말 첫째. 이 모든 능력이 지금의 남편, 즉 남자 친구를 만나고서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기를 바란다. 남자 친구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공감은 갔으나 그가 해주는 듣기 좋은 말. 영향은 물론 받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정도는 아니었으면. 남자 친구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기를.

둘째, 그림보다 글이 낫다. 심심하지 않아 좋긴 하지만 내용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고, 그림과 같이 있는 글씨는 너무 작아서 보기에도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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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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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기 시작하자마자 사피엔스가 인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출현하여 현생하는 종이 아니라고 하는데서부터 충격이었다. 최종 진화종이 아니라 다른 Homo 속의 종들과 공존했다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종이라니. 6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을 읽으면서 지루할 새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런 작은 놀람이 계속 터져주었다는 것이다. 내용도 그렇고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글쓰기, 고리타분하지 않은 역동적 표현. 내용과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번역이 제대로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은 그 점에서도 아쉬움이 없었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세개의 혁명은 다음 세가지였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인지혁명이 70,000년전, 농업혁명이 12,000년 전에 발생한데 비해 가장 나중 일어난 과학혁명은 불과 5백년전. 그리고 이 과학혁명은 어쩌면 역사의 종말을 불러오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 모른다. 이 세 혁명이 인간에게,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 가면 생태계의 다른 생물들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 더 나아가 진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사피엔스의 미래가 아닐까 한다.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이 역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며 유발 하라리의 의도도 그것이 아닐지.

 

진화와 멸종. 반대의 사건으로 볼 수 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변화가 없는 평형 상태에서는 진화도 멸종도 없겠지만 생명체가 있는 계에서 이런 상태가 가능할리는 없을 것이고, 기존에 없던 변화에 시기를 맞아 어느 종은 진화의 길을, 다른 어느 종은 멸종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인 셈이다. 나아가, 진화가 꼭 발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학 서적에서보다 더 실감나게 이 책을 읽는 동안 알게 될 줄 몰랐다. 예를 들어 소는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성공한 종 가운데 하나지만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동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종교의 발생과 의의. 인간에게 종교가 왜 필요하고 종교는 인간에게 무엇을 주었나. 인간은 왜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되었던가에 대한 그의 설명은 분명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모여사는 인간의 집단 크기가 커졌고 이런 구조를 유지시키 위해 역할을 한 것은 종교와 돈과 제국주의. 이중 취약한 구조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은 종교 말고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취약한 구조로 인류의 질서를 유지시켜야 했던 인간. 거기까지만 얘기하면 인간은 그야말로 취약한 인간에서 끝났겠지만 기어이 초월적이고, 도전을 불허하는 종교라는 체계를 탄생시킨 이상 인간은 취약하지 않다. 유태인으로서 일신교를, 기독교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저자의 시각에 또 놀람.

 

밈 (meme)이라는 용어를 막연하게 알듯 말듯했는데 (이것은 즉 모르고 있다는 말), 유기체의 유전자와 대응하여 설명한 저자 덕분에 깨끗하게 머리 속에 정리할 수 있었다. 문화적 구성요소라는 정의만큼 새로왔던 것은 유전자가 유기체 진화의 기반이 되듯이  밈 역시 문화적 진화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즉 복제의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진화라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내 머리 속에 그것이 유전자와 같은 구성요소를 기반으로 복제되고 진화가 된다는 설명에 또 하나의 눈이 열리는 느낌.

 

근대 초기 유럽이 제국주의로 세력을 뻗쳐갈 당시 아시아의 대국이랄 수 있는 중국이나 페르시아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 중국이나 페르시아가 세력 확장에 실패하게 된 원인은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기술적 낙후성도, 역사가 짧아서도 아니었다. 바로 현대과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잠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명쾌한 설명. 중국도 다른 대륙으로 세력 확장을 위해 배를 보내어 시도는 하였으나 그야말로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유럽의 스페인이나 영국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러 갈때 그곳의 정복뿐 아니라 그곳에 대해 배워오기 위해 군사들 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을 동참시킨데 반해 중국은 땅을 정복할 생각만 했지 새로운 곳에 대해 뭔가를 배워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배에는 군사들이 전부. 이런 사고의 차이는 유럽에서 현대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하였고 자본의 축적을 불러왔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결론이 무엇이든 그것을 유추하는 과정과 근거의 논리성과 통찰력에 설득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주의를 넘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대대적인 변화를 겪어 왔는지, 페이지를 넘겨가도 흥미진진한 내용은 계속 된다. 부자가 소비의 주체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 부자는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투자하여 확장하는데 쓰고, 오히려 부자가 아닌 계층이 소비에 열올린다. 소비가 미덕이라며, 부자들의 부를 더 쌓아주는 것에 목숨 거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가 굴러가게 하는 근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오고 있고 그러다보면 곧 에너지가 고갈될 것을 염려했지만 그런 일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를 개발해 낼 것이므로) 정작 더 위협적인 것은 생태계의 전환이라는 주장을 위해 근거로 제시하는 것들을 읽어보면 저자가 과학적인 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책의 마무리로 저자는 당연히 사피엔스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생명공학, 인간성, 행복, 삶의 의미 운운하며 마친 것은 단순히 <운운>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고 본다. 행복, 삶의 의미 등은 그가 앞에서 실체 없이 개념만 있는 것이라고 하던 것들이 아닌가. 생물학적 행복, 화학적 행복, 계산된 행복 등을 언급하며 실체없는 행복을 실체화 하려고 하는건 사피엔스가 종말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체없는 것들이 결국 물질적 실체들 위에 있을지도.

 

호모데우스를 안 읽을 수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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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6-22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다시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호모데우스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겁니다!

hnine 2017-06-22 08:18   좋아요 2 | URL
저도 제가 읽은 책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리뷰 찾아 읽어보기 좋아해요. 더 와 닿더라고요 ^^
호모데우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읽으신 분이 추천해주시니 의욕이 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