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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 - 사랑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우리시대 가족의 심리학
한기연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왜 우리는 굳이 가족을 이루어 사는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내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성인이 되어 자기의 가족을 만드는 것은 충분히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도 꼭 가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가족만이 사회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최종적으로 기댈 곳,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생각에는 이의가 없기도 하다. 왜 가족은 이렇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가족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가는 가족에 대해서는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독이 아닌 약이 되는 보금자리로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 책의 저자도 말한다. 가족은 언제나 희망인 동시에 곧 고통이라고.

이 책의 전반부는 주로 사례 중심인데, 가족의 사례라는 것이 대개 좋은 예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익숙한 내용이기에 좀 진부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저자의 의견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책의 중반부터는 좀 더 집중이 되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가족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다른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에서 <한계설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

우리 나라 가족관계 형성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 있다.

"어디서 말대꾸야!"

 부모 말에 대해서 자식은 일단 복종해야하고 자식은 들어야 하는 것이 도리였음을. 부모에겐 편하지만 자식에게 그것처럼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은 없다. 그래서 자식 입장에서는 성인이 되어가면서 마음 속에 쌓이는 것이 많아져 간다. 이래야만 할까?

무기력하게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 아니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기대에 존중과 이해를 보내면서도 나의 상황과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 또한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48)

같은 말을 옆집 아저씨에게 들으면 넘어갈 수 있는 말을, 내 가족에게 들으면 불같이화를 내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

가족 간의 대화는 바로 그 순간만의 대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족은 그 누구보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의 말이나 행동은 단지 현재의 맥락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해 온 과거의 경험을 포함한다. (67)

오랜 시간 누적해 온 경험의 두께때문에 갈등의 크기도 클 수 밖에 없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현명할까. 어디서 말대꾸야라는 윽박지름 말고. 참는 게 최선이라는 최악의 수동성 말고.

갈등 상황에서 잘 빠져 나오지 못하는 가족들을 살펴보면, 늘 상처 입은 그 자리에서 맴돌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들지 않으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채 그런 상황에 빠진 현실 자체를 절망스러워 한다고 한다. 반면, 문제 상황에서 잘 빠져나오는 가족들은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며 누군가에게 상반되는 태도나 감정이 공존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즉, 가족 모두가 같은 감정일 수 없다는 것, 또 복합적인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고 가족의 부정적인 면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으로 해석한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어, 가족때문에 생긴 내면의 상처에 갇혀 사는 대신, 갈등을 해결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저자는 말한다. 인생을 멋지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별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부모는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도록 가장 많은 것을 베풀어 준 사람들이다. 하지만 부모에게도 실수는 있을 수 있고, 부모가 내게 준 것들이 사실은 매우 잘못되고 부당한 것일 수 있다. 부모가 내게 보낸 낡고 오래된, 부정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들과 과감히 이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태껏 돌아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 나만의 대륙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만족스럽지 않은 내 인생이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파고든 부모의 어두운 그림자를 인정하고 그 실체와 직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118)

우연인가. 얼마전에 이 서재의 다른 카테고리에 더이상 부모 탓 하는 걸 그만 두게 되었을 때가 비로소 어른이 되는 때라는 글을 올린 적 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남들만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시절 이후의 내 인생은 당연하게도 많은 부분이 내 책임이라는 뜻이다. 그 영향력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의 선택이다. 내게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그 기회가 있다.(262)

문제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것을 내 뜻대로 바로잡을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내 앞에 주어진 기회를 이용 못하면서 지나간 과거만 탓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과거에 머무른 사람, 아직도 자기의 세계, 자기의 인생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내 삶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잠재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키워드를 하나 뽑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한계설정>이라는 단어를 뽑겠다.

관계는 나 혼자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계까지는 상대방과의 갈등 해소와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으나 그것으로 내가 원하는 관계로 완전히 바뀌기를 기대한다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에게 나를 어디까지 관여 또는 간섭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그 경계를 설정하고, 필요한 상황에선 상대에게 그 경계를 알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상대방'이란 물론 가족의 한 사람을 말하는데 주로 부모를 말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 때 그 마음을 꾹 누를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곧바로 저항하거나 반대 의견을 쏟아낼 것도 아니고, 일단 상대방의 말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후 (예를 들어, 엄마 말이 뭔지 알겠어요. 엄마라면 그렇게 보실 수 있겠어요), 다음에 내 의견을 말하는데, '왜'라는 질문에 '때문에'로 답해야 한다는 데 집착하지 말고 그저 내가 알려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내가 어떤 생각의 과정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렸고, 그것이 아버지나 어머니와 관점만 다를 뿐 어느 쪽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자식된 사람들이 부모 앞에서 내 의견을 조목조목 말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부모와 반대 의견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말없는 동조로써 억지로 내 의견을 누르는 것보다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금은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내가 이 관계에서 무력하지 않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거절하고 난 후에 왜 내가 싫어하는지 어떻게 설명할까 바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싫다는 것.

 

식상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가족 간의 갈등 해결엔 대화와 소통, 그 외엔 답이 없다. 단,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와 갈등이 다 해결되리라는 오해만 하지 않는다면.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을 결국 설득 시켜 내 뜻에 동조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라고.

 

다소 무겁고 냉소적인 것 같은 내용 같지만 읽어가다보면 저자의 의도가 전해진다. 원하고 노력하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가족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기 때문에 잘못된 관계와 쌓이는 갈등을 두고 보기만 하여 그것을 지옥으로 만들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다 읽고 동생에게도 권해주었더니 배송된 책 제목을 보고 동생의 중학생 딸이 무슨 책 제목이 이렇냐고 놀라더란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라는 말. 다 커서도 부모의 그늘 아래서 못 벗어나고 내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지 말고 나만의 인생을 꾸려나가라는 뜻이다. 부모가 제공하는 울타리, 경제적이든 감정적이든, 그런 편리한 혜택도 내려놓아야 함은 물론이다. 혜택도 누리면서 간섭에서도 자유롭겠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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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8-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는 선택할 수 있지만, 맘에 안 들면 안 만날 수도 있지만,
가족은 선택할 수 없고, 맘에 안 든다고 안 만나고 살기가 어려우니 어려운 관계인 경우가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가족이란 이런 거죠. 내 아들 또는 내 동생을 때린 누군가가 있다면 가만 있지 못해서 복수해 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 이 순간이야말로 (평소 못마땅하게 여긴 가족이었더라도) 가족을 사랑하는 순간인 거죠.

hnine 2017-08-27 16:17   좋아요 0 | URL
오자 수정하고 있는 중에 댓글을 주셨네요 ^^ 가족은 저에게 언제나 피할 수 없는 화두 같아요. 내 가정을 편안하게 할 수 있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개인적인 업적을 이룬다 해도 저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사랑과 증오가 백짓장 차이인 것 처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 가족. 저절로 되는 건 아닌 것 같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서 늘 이런 책에 눈이 갑니다. 이건 내 얘기다, 밑줄 그으며 읽은 대목이 많네요.
 
유감이다 - 세상의 모든 찌질이들에게 바치는 헛소리 모음집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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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이라는 정도만 알았을뿐, 본명이 무엇인지, 뭐하시는 분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궁금은 했지요. 하지만 본명이나 직업이 무엇인지 보다는 그걸 내세우기 싫어하시는 이유가 뭘까가 더 궁금했습니다. 읽으면서 밝혀질거라 기대하며 읽으니 안그래도 빨리 읽히는 책이 더 빨리 읽혔습니다.

내가 보기로 인간은 모두 '찌질이'다. (8)

동감입니다. 신이 아니라면 찌질한 구석 없는 사람 있을까요. 찌질함엔 위계가 없다는 말씀도요. 단어가 좀 고급스러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찌질하다는 말 만큼 인간적인 단어가 어디 있을까, 이만큼 인간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고, 중대한 큰일보다 사사로운 작은일에 더 마음쓰고,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하고,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자기도 찌질하면서 남을 비난조로 말할때만 찌질하다 하는 인간. 우리 모두 그런 인간임을 인정하고 나면, 즉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겸손해져요. 패배감이 아니라 평화에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삶은 불가해하고 하루하루는 고통이고 내일은 불안이다. 이것이 삶이다. 의미 없다. 삶의 습관과 죽음의 공포가 하루를 연장한다. (9)

아니, 한 페이지 넘어가기 무섭게 이렇게 공감 백배 문장을 마구 날리시면 어쩝니까. 뒷부분에선 또 그러셨더군요. 사랑, 행복, 어쩌구 하는데 그거 본 사람 있냐고.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실체도 불분명한 것에 그렇게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는게 맞냐고요. 나중에 말 바꾸지 않으셔서 그것도 맘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게 중요해' 이 말을 비꼬는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로 알아들어야 하는 시대에, 마스칼러지 (Maskology) 라는 용어까지 만드시어 이 책의 한 챕터를 할애하여 쓰신 기발함에도 박수요.

생명을 탄생시키거나 키우고자 한다면 일찍 잃을 수도 있거나 필연적으로 잃게 될 결과를 생각하라. 우리가 베푸는 사랑과 보살핌의 대가는 언제나 상실의 고통이라는 것도. 그것도 사랑을 베풀기 이전에. 위대한 희랍 철학자가 가능태보다 현실태를 선행시켰듯이. 운명의 결과는 우리 노력과 상관없이 먼저 준비되어 있듯이. 이것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거나 키울 자격이다. 여기에 두려움은 없다. 사랑과 상실이 우리를 얼마나 성장시키는가. (110)

Wheeler 라는 개를 키우신 경험을 쓰신 글 중 한 대목이지요. 동물조차 죽음의 순간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데 인간만이, 찌질한 인간만이 호들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행기 만드는 공학자로 일하던 제자가 갑자기 판검사가 되기 위한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 일을 그만 두고 법대 진학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자격증의 비극에 대해 쓰셨지요.

자격증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비극은 삶에서 더 큰 가능성과 다채로움을 향하는 어떤 지적인 노력도 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재미없고 권위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안전과 안정은 개인의 인간적 가능성에는 자멸적 영향을 끼친다. 사람은 생각보다 관념적이지 못하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안정이 창조적인 역량을 부여할 시간과 부를 약속한다는 이상주의자의 논리는 언제나 깨진다. 인간이란 계속되는 노력만이 살아나갈 기반을 마련해줄 때 노력하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동물이다. 갱신으로 삶에 대응해 나가고 날카롭고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인생을 바라볼 때 거듭된 진보가 약속되는 것이지 이제 지위와 돈밖에 더 이상 바라지 않고 골프와 술이 그들의 여가를 차지해나갈 때에는 무엇도 약속되지 않는다. (204)

이렇게 인용하는 대목들은 최소한 저는 모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만, 현실은 글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감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연연하진 않으시겠지만요.

결점없는 인간 없고, 죄 짓지 않고 평생을 사는 인간 없으리라 봅니다. 남에게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요행이 따라준다고 해도 결국 덜미를 잡는 것은 남의 눈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양심'이더라고, 그게 어쩌면 남의 눈보다 더 무섭더라고,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양심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써주셨네요.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근거가 위장과 양심의 어디쯤 위치하는가에 대한 솔직한 자기인식이 중요하다. 이것이 위선을 막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희망을 주는 것은 인간은 때때로 자기 양심에 따라 자기 이익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의 근거이고 인간의 가치이다. 나는 거기서 심지어 신성의 번뜩임조차 본다. (210)

인간이 가끔 신성을 번뜩일때는 바로 그 양심이 작동하는 시간이군요.

본래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의 껍질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지성은 우리 의지의 노예이다. (220)

이 말도 정말 멋있습니다. 찌질한 인간이라는 말과 어찌보면 상통하는 말인데 이렇게 멋지게 표현될 수도 있네요.

 

만나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즐거운 얘기만 쓰신 것도 아닌데도 즐거웠어요. 필명을 쓰신 이유는 아마 이미 많이 알려진 본명이 주는 선입견을 주기 싫으셨던가요?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본인 스스로 느끼는 그 이름의 무게에서 자유롭게 쓰고 싶으셨는지요.

좋아하는것, 싫어하는것 목록 써보기는 저도 당장 해보려고요. 사실 이것 역시 저도 잠깐 생각했던 적 있답니다. 좋아하는게 뭐냐, 싫어하는게 뭐냐는, 단순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 의외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더라고요.

다른 저서들도 어쩐지 찾아 읽어볼것 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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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0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0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7-08-2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저자의 <원 맨즈 독>을 일부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는 기억입니다. 괜찮으셨나 보군요. 어쩐지 저도 좋아할만한 책인듯. 남의 은밀한 편지를 엿보듯 어쩐지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의 리뷰여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hnine 2017-08-21 11:53   좋아요 1 | URL
저자가 첫장부터 작정하고 막 삐딱하게 글을 써나가는 데, 사실 제 좁은 소견으로는 반감이 생기기도 했었는데 계속 읽다보니까 이 사람 내면은 참 소심하고 또 소심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반감 대신 이해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라고요. <원 맨즈 독>도 그렇고 이분의 적지 않은 저서들중 최소한 몇권은 더 읽어볼 참이랍니다.

조중걸 2023-10-3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롭게 소설 한 권 또 싸질렀습니다. 주소와 전화번호 geandna@naver.com 으로 보내시면 사인본 보내드릴게요.
 
어떻게 늙을까 - 전설적인 편집자 다이애너 애실이 전하는 노년의 꿀팁
다이애너 애실 지음, 노상미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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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소설 뒤에는 능력있는 편집자가 있다. 필립 로스, 존 업다이크, 잭 캐루악, 진 리스, 시몬느 드 보부아르, 마거릿 애트우드 등 세계 유명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작품을 다듬은 공으로 영국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편집자이자 출판사 사장. 이 책의 저자인 다이애너 애실 (Diana Athill) 이다. 요즘 말로 레전드급 편집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 1917년 생이니 올해로 100세. 이 책은 그녀 나이 아흔 되던 해인 2008년에 출판되었다. 90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얘기라면 그가 유명한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귀기울일만 하지 않나. 근래 비슷한 제목의 책이 많아서인지 번역된 제목인 <어떻게 늙을까>보다는 원제인 <Somewhere towards the end>가 더 피부로 와닿는 것 같다.

표지의 고사리 그림. 예사로 봤는데 첫꼭지 글에 이 고사리 얘기가 나온다.

우연히 종묘 회사 카탈로그를 보다가 나무고사리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이국적인 식물이라고 생각했던 나무고사리를 영국의 정원에서도 키울수 있다는 말에 전화로 주문했다고 한다. 막상 도착해서 풀어보니 겨우 10cm도 안되는, 작고 여린 이파리 네개 달린 고사리인 것을 보고, 내나이가 지금 몇인데, 카탈로그에 나온 나무고사리로 키우려면 도대체 앞으로 몇년을 키워야 할지, 고사리가 다 자란 모습을 볼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워 산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책의 마무리도 이 고사리 얘기로 하는 것을 보고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평생 결혼을 한적 없고 그래서 자식도 없지만 연애 경험은 모자라지 않아서 그 중 한 남자인 자메이카 출신 극작가와는 결혼만 안했다 뿐이지 결혼 생활 못지 않게 남편과 아내 처럼 오랫 동안 함께 살아오기도 했다. 결국 그 남자에겐 다른 애인이 생겼는데, 그 여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저자는 자기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고 권하기까지 하여 이른바 '삼자 동거'를 하기도 했단다. 이 정도의 쿨한 성격이다 보니 솔직히 이 책의 내용들이 다 내 얘기 같고 앞으로 나도 겪을 얘기 처럼 피부에 와닿게 공감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거침없고 주저함이 없다. 성, 종교, 인종, 가족, 낙태, 어느 것이든 그렇다. 자신감의 다른 모습일까? 아니면 자기 생각을 남에게 종용하는 것이 아닌 담에야 이렇게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겸손함이라고 봐야 할까. 최소한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쓰지 않는 것 같아 글에 신뢰가 갔다.

"나이든 여자에게 외모는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네, 동의합니다. 이유가 맘에 들어요.

한동안 사귀던 애인과 헤어진후 저자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주었던가?"

내가 손해였다거나, 네가 손해라거나, 그게 아니어야 한다. 연애를 할땐 그도 내 인생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도 상대방에게 뭔가 주는게 있고 그의 인생에 보탬이 되는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세련돼서 대다수가 우리 때보다 손윗사람들과 훨씬 잘 지내는 것 같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할 거라 기대하거나 동년배 친구에게 청할 일을 그들에게 청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된다. 그들이 너그러이 베푸는 건 뭐든 즐겁게 받으시라.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112)

이말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20대 학생들과 함께 할 일이 나보다 더 많은 남편에게 나도 종종 말하곤 한다. 더 있다 가시라고 한다고 끝까지 자리에 붙어 있으면 안된다고. 요즘 말로 '낄끼빠빠' 라고 하나? 낄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남의 책을 만드는 일만 해오다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야 자기 책을 내면서 늦은 감도 있지만 나이 들어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함으로써 좋은 점도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었다.

첫째, 뜻밖의 일이라서 더 가슴 벅차다. 아마 젊었을 때라면 당연한 결과로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둘째, 이젠 마음 깊이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는 것은 소소한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결과에 대해 담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째, 더 이상 수줍음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

 

에필로그로 거창한 얘기를 하거나 가르치려는 말로 맺지 않는 것도 좋았다. 앞에서 말한 그 고사리 얘기. 10cm정도 이던 고사리가 이제 30cm 정도 자랐다면서, 처음에는 천천히 자라지만 갈수록 자라는게 눈에 보일 정도로 빨리 자라더란다. 그것이 카탈로그에 나오는 것 처럼 나무고사리로 자라는 것은 보지 못할지라도 양치식물일 때의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과소평가했노라고. 사기를 잘했노라고.

살아있는 한 인생은 진행중인 것. 언제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면서 오늘 뭔가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중의적으로 읽히는, 멋진 에필로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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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7-08-13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젠 마음 깊이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요. 긴 글 덕분에 책 한 권 읽은 것같네요.^^

hnine 2017-08-13 19:37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가 이런 책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아이 키울땐 어린이책과 육아책이라면 뭐든지 눈에 들어오더니 언제부터인가 이런 책에 자꾸 눈이 가네요 ^^ 멋있게 늙어가고 싶어요.
책이 아담해서 금방 읽었답니다.
 
운명의 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3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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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목을 <소설로 읽는 페미니즘> 이라고 할까 하다가 과장인 것 같아 고쳐썼다.

두권으로 되어 있지만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는 소설. 그만큼 스토리텔링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채 키워지는 주인공의 행로도 흥미롭지만 칠레, 영국, 샌프란시스코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배경도 흥미롭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이민 역사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이 소설을 읽으며 얻은 덤. 등장 인물도 다국적이다. 주인공 엘리사는 영국인과 칠레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고, 엘리사를 거두어 키워준 소머즈 가족은 1830년대 영국에서 칠레로 넘어온 영국인이며, 엘리사의 절친 타오 치엔은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중국인이다.

이 책의 제목 <운명의 딸>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삶을 열어나간다는 의미로 읽혀져야 맞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결혼에 실패한 로즈 소머즈가 그것을 자기의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결혼한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독신의 삶을 사는 것도 그렇고, 친부모도 아니면서 친부모처럼 자기를 키워준 로즈 소머즈가 추천하는 번듯한 신랑감을 거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길고 긴 고생길을 걸어야했던 엘리사도 그렇다. 밥 먹기도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이름대신 네번째 아들로 불리며 자랐다는 중국인 타오 치엔 역시 남자이지만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삶 대신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스스로 닦아가며 살아간 경우이다.

이들은 사회적 체면, 인종, 관습, 종교, 성적 억압, 왜곡된 현실이 만들어낸 굴레를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운명이라는게 있다면 이런 굴레를 극복하며 사는 삶이 오히려 운명이랄까.  

이사벨 아옌데 작가 연보를 훑어 보니 그녀의 행로 속에 소설의 배경이 다 들어가있는 듯 하다. 페루에서 태어나고 칠레에서 성장했으며 결혼 후 유럽에서 살다가 다시 칠레로. 이후 스페인, 베네수엘라를 거쳐 현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한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는 세상을 보는 안목부터 다를 듯. 남미와 미국의 역사, 중국 사회와 풍습까지 실로 풍부한 지식이 이야기 속에 유감없이 드러나 있고 스토리텔링의 강점을 더해주는데는 아마도 과감한 에로티시즘 묘사도 분명히 한몫 하지 않나 싶다. 그녀의 소설이 영화, 연극, 발레등으로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해가 된다.

첫소설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게한 <영혼의 집>도 관심이 가지만 불치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큰 딸 파울라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라는 <파울라>에 더 관심이 간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쓴 작가들의 일생은 그 작품만큼이나 파란만장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경험한 사람의 얘기는 그만큼 생생하고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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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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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델라.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해오고 있었으나 그 바램이 그리 강하진 않아서, 아마도 훨씬 더 나중에 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을 대학생때 극장에서 보며 다른 건 다 잊어도 너무나 야한 영화였다는 느낌은이무려 이십 년 넘게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밀란 쿤델라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책을 읽기 전 기대였고, 결과를 말하자면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것은 내가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지녔고, 마르케타는 농담을 절대 이해 못 하는 치명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52)

 

농담이 농담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때는 농담을 듣는 사람이 농담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 할 수 있을 때이다. 그것은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쪽에서 미리 헤아리고 하는 것이 옳다. 농담엔 진담이 어느 정도 섞여 있기 때문에 농담과 진담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농담은 그런 개인적 성향 차이보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 시대적 상황이라는게 이 소설에서는 체코에서 있었던 1948년 2월 혁명으로 대표할 수 있을 텐데, 이 혁명을 계기로 체코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구 소련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좋아하던 여자 마르케타에게 쪽지에 써보낸 농담이 둘 사이에 변화뿐 아니라 루드비크의 이후 몇년 인생 행로를 바꿔놓게 되는 사건은 바로 이 1948년 2월 혁명이 있은 다음 해에 일어난다.

그 쪽지에 쓴 내용이란,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였다.

다만 장난치려고 했다는 루드비크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루드비크는 학교에서 추방당할 뿐 아니라 도로 작업, 탄광 노동 등의 강제 노역으로 몇년을 보내게 된다. 마침내 사회로 복귀된 그는 자기의 추방을 찬성했던 사람들을 찾아 복수심에서 비롯된 행동을 한다. 학생위원장이었던 제마네크, 그의 부인 헬레나와 육체적인 애정을 나누지만 정작 제마네크는 부인인 헬레나를 두고 다른 애인을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복수행위에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는 루드비크. 더구나 제마네크 역시 예전의 제마네크가 아니었다 (사람은 변한다!).

수용소 생활 당시 만난 루체라는 여인을 만나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끝내 육체적인 사랑을 허락하지 않고 루체는 떠나게 되고 이후의 루체를 거두어준 코스트카는 이 책의 4명의 화자중 한 사람이다. 루드비크의 옛친구이기도 한 코스트카와 야로슬라프와의 만남을 통해 루드비크는 지나간 날들의 진실을 알게 되고, 복수가 무의미하고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483)

도대체 우리의 인생에서 정작 우리가 관여하는 부분은 얼마나 되는가 다시 묻게 된다.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483)

 

고향친구 야로슬라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루드비크는 생각한다.

우리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종종 있다는 생각, 종말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532)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한 구절이다.

 

생각보다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으나, 농담이라는 제목 속에 담긴 저자의 대의에 비해 엉뚱하고 (마지막 헬레나의 자살 소동 헤프닝) 아쉬운 부분 (루체라는 여자의 심리에 대한 불충분한 묘사)도 있기는 했다.

저자 소개를 읽업보면 밀란 쿤데라 자신의 인생 행로도 그의 작품 속 인물들 못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국인 체코와 프랑스를 넘나들며 겪은 고초는 작가 자신과 함께 그의 작품들도 겪은 일이기도 하다. 이 작품 <농담>도 체코어로 쓰였었으나 고국에서 추방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고 나중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서야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중 일부는 아예 처음부터 프랑스어로 쓰였다고 하는데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의 어려움은 어땠을지. 또한 모국어만큼 작가의 역량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을지.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낸 농담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애정에 편중된 방식의 복수극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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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08-04 05:16   좋아요 1 | URL
아마 취소할 수 있다면 인간은 계속 취소만 하다가 생을 다 소모해버릴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힘과 제도에 의해 일이 결정되어 버리니 인간은 속수무책이고 벌어진 결과를 취소할수는 더군다나 없다는, 좀 절망적인 의미로 쓰여졌지요.
이런 심각한 주제에 비해 중간중간 너무 가볍게 넘어가거나 엉뚱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있어서 좀 이해가 안된다고 했더니 남편이 옆에서 ˝그러니까 제목이 농담이라잖아~˝ 그러더라고요. (참고로 남편은 이 책 안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