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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여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0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손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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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출판사들이 세계문학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지만 DH 로렌스의 이 <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오직 을유출판사의 을유세계문학전집에만 포함되어 있다. 출판될 당시 제목이 결정되기 까지 몇번의 변경 과정이 있었다지만 아무튼 원제도 Women in love이다.

DH 로렌스는 우리에게 이 작품보다는 <아들과 연인>,<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영국 작가이다. 1885년 영국 노팅엄 탄광촌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 형편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으나 교육열 있는 어머니 덕분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우수한 학생으로서 장학금도 받고 교사 자격증도 땃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교사직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살면서 여러 병을 전전하며 고생했고 몇번의 건강의 고비를 넘기다가 결국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서구 세계를 변화의 급물결 속에 휘몰하치게 했던 산업화, 막대한 정신적 물질적 피폐를 초래한 세계 대전, 문명의 몰락, 개인적인 건강 등의 상황 속에서 복잡한 갈등과 고뇌 속에 탄생했을 로렌스의 작품들도 순탄한 출판의 과정을 겪지 못했다. 이 작품 <사랑에 빠진 여인들>만 해도 본국인 영국에서 출판사를 찾지 못해 1920년 미국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어슐라와 구드룬이라는 두 자매의 연애 이야기인데, 굳이 연애담이하고 한다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연애담이라고 할까. 제목만 보거나 책의 줄거리만 읽고서 만만히 보기엔 780쪽 분량 만큼이나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시대와 관습과 인간 관계, 삶의 방식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비판, 풍자, 주장, 개성으로 꽉 차 있는 소설이다.

등장 인물중 특히 버킨이라는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생각을 많이 투영시키고 있다지만 버킨 뿐만이 아니다. 작품 속 모든 등장 인물의 심리를 꿰뚫어, 완전히 다른 타입의 인물과 다른 방식의 사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의 사고 방식이란 모르긴 해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입견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인물들이다. 작가의 생각을 한 인물에게 대변하게 하기엔 부족할 만큼 그는 생각이 남들과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에 대한 버킨의 생각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옛날식 사랑은 끔찍한 속박이요, 일종의 강제 징병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사랑이니 결혼이니 아이들이니 하는 것들, 그리고 만족스러운 가정과 부부 생활이라는 끔찍한 사생활 속에서 다 함께 부대끼는 삶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웠다. (중략) 그것은 언제나 짝을 지어 사적인 집이나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불신 가득한 부부들의 공동체였으며, 이를 넘어서는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다른 직접적이고 사심 없는 관계도 용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쌍의 만화경이자, 결혼한 한 쌍이라는 단절되고 분리주의적인 무의미한 실체였다. (314, 315)

결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버킨 (남자)은 그러면 성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대체로 성을 싫어했다. 성은 너무나 제한적이었다. 남자를 부서진 반쪽으로, 여자를 나머지 부서진 반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그 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신 안에서 독립된 하나이기를, 여자도 그 자신 안에서 독립된 하나이기를 바랐다. 성이 다른 욕구들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복귀하기를, 즉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인 과정으로 여겨지길 원했다. 그는 성에 입각한 결혼을 믿었다. 그러나 이를 넘어,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여자는 자신의 존재를 갖는 그런 결합을, 두 개의 순수한 존재들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자유를 구성하면서, 마치 하나의 힘 속에 들어 있는 양극처럼, 두 천사처럼, 혹은 두 악마처럼 서로 균형을 이루는 그런 결합을 원했다. (315)

 

자매중 한명인 어슐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 자기의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어슐라에게 얘기하며 이런 결혼, 이런 관계여야 한다고 피력하는 버킨.

버킨의 생각을 종용받으며 어슐라는 그들의 관계를, '한쪽이 파괴되어 다른 쪽이 존재하거나, 한쪽이 무효가 되는 바람에 상대방이 승인을 얻는, 영원한 시소 상태'로 비유한다 (720). 어쩌면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을 수도.

어슐라와 구드룬 자매 역시 우리가 현실이나 소설 속에서 흔히 보는 결혼 적령기 여인들과는 다르다. 이들의 독특하고 주관적인 생각들은 780쪽 책의 끝까지 가도록 완전히 간파했다고 할 수 없어서 이해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었다. 이들은 나쁜 결혼의 예를 부모의 결혼에서 찾고 비판한다.

이 소설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것은 남녀 사이의 애정 관계 뿐 아니라 남자와 남자 사이의 애정 관계가 비교적 당당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어슐라와 커플이 되는 버킨과, 어슐라의 여동생인 구드룬과 연인 사이인 제럴드, 즉 두 남자의 관계이다. 읽다 보면 어쩌면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결혼, 사랑의 관계는 각자 다른 성의 연인보다 이 두 남자 사이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판이 쉽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획기적인 생각과 노골적인 묘사 등이, 저 단순해 보이는 제목 속에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 이 소설. 한번 도전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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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7-0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은 그래도 제목은 들어본 것 같은데, 이 책은 제목도 처음 듣는 것 같아요.
그런데 표지는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고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매일 더워요.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hnine 2019-07-09 04:43   좋아요 1 | URL
책은 낯설어도 표지 그림은 어디서인가 본 것 같으실 수 있어요. waterhouse 라는 사람의 그림인데 이 사람 그림이 많이 알려져 있거든요.
이제 드디어 30도를 넘는 날씨가 시작되었어요. 근래 여름이란 과거의 여름과 비교가 안되는 더위인지라 저는 이제 여름 날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해요. 아직은 열대야까진 아니라서 다행인데 그것도 곧 시작되겠지요.
피할 수 없으니 잘 견디는수밖에요 ㅠㅠ

페크pek0501 2019-07-1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획기적인 소설이었겠네요. 저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연애를 그린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고 슬펐어요.
많은 이들이 그 소설을 읽었으면 해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명작이죠.

을유문화사 책을 예전에 즐겨 봤는데 이젠 글자가 작아서 사게 되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글자가 작지 않나요?

hnine 2019-07-11 19:58   좋아요 1 | URL
전 솔직히 과거에, 또 현재에도 무슨 근거로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어요.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닐까요? 이 소설에서는 동성애 자체를 옹호한다기 보다 버킨이라는 인물이 이상적으로 보는 관계가 이성의 연인에서보다 누구나 친구 사이로 알고 있던 동성 친구에게서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
브로크백 마운틴은 하도 들어서 마치 읽은 양 착각되는 소설, 그리고 영화 중 하나이지요. 그런데 아직 못 읽었어요. 꼭 읽어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해야겠어요.
을유문화사 세계 문학 시리즈 책, 글자 큼직 합니다 ^^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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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코스키라는 작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한재호라는 작가가 <부코스키가 간다>라는 제목의 국내 소설을 발표했을 때였다. 제목이 특이하기에 소개글을 보고서 미국에 실제로 찰스 부코스키라는 이름의 시인이자 소설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온 이민 가정의 찰스 부코스키는 한때 문단에서 외면당하기도 했다지만 1994년 세상을 떠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많이 읽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발표된 그의 다른 소설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에서와 같이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역시 헨리 치나스키를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의 소년 시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민 가정의 궁핍함, 가족 구성원간 소통과 이해 부족, 친구들의 폭력과 비열함 등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해야했던 그는 일찍 부터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사회, 도덕과 질서보다 악덕과 폭력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의 실상을 보면서 자란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직접 가지 않고 꾸며서 쓴 글을 숙제로 제출했는데 잘 썼다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헨리. 더구나 가지 않고 썼다는 것을 나중에 선생님이 아시고도 칭찬하신 걸 되돌리지 않고 그냥 집에 가라고 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헨리는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거짓말이고 최소한 거짓말은 내 삶을 더 쉬워지게 한다고.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115쪽)

그 당시 쉬운게 나중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책 속의 헨리는 알지 못한다. 나중까지 후회없는 거짓말은 없다는걸.

이 나잇대는 한참 성에 눈 뜰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분량이 남자 아이들의 성적인 호기심과 실제 행동에 대한 내용이어서 아무리 어린 시절 이야기라지만 이 정도면 19금 수준 아닌가 생각하며 읽었다. 남자 아이들의 성장기란 99% 성에 눈뜨는 것 하고만 관련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더구나 헨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몸에 번지는 부스럼이다.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아보지만 치료가 불충분하거나 적절하지 못했는지 상태가 더 나빠져가서, 급기야는 학교를 휴학하고 집의 침대에 누워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별 오락 거리도 없이 침대에서 두문불출 해야했던 바로 그 시기에 헨리는 시간 보내는 방법으로 최초의 창작이라는 것을 해보게 된다. 가지도 않은 행사에 갔던 것 처럼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았던 헨리 아닌가. 바깥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부스럼이 조금 낫기 시작하자 동네 공립 도서관 출입을 시작한다. 모든 책에 흥미를 느낀 건 아니었다. 몇권의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모두 흐릿하고 모호하고 지루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렇지 않은 책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DH 로런스의 소설이다.

피아노 치는 한 남자에 대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가식적으로 보이던지. 그러나 나는 계속 읽어 나갔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둡고 기이한 것들이었다. 그 페이지의 대사는 한 인간의 절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지만, <조, 어디에 있어?>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조, 어디에 뭔가 있긴 한 거야?>에 가까웠다. 팽팽하고 피투성이인 대사를 쓰는 이 로런스. (214쪽)

저 두 문장이 가져오는 결과의 차이를 집어낼 수 있던 헨리. 이후로 헨리는 도서관에 있는 DH 로런스의 책을 다 읽어치웠고 흔히 그렇듯이 그 책들은 곧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헨리 치나스키가, 즉 찰스 부코스키가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잡초더미 같은 세상을 딛고 헨리가 걸어가는 길. 결말이 쌈박하다.

 

한때 불행했던 시기는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가. 그런 시기를 거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작가로서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웠던 시기라는 그 구슬들을 그냥 구슬인 채로 두느냐 목걸이로 엮어내느냐의 차이일 뿐.

책 뒷편의 해설에도 언급했고 나도 궁금했던, 책의 제목이 왜 저 제목인지는 의견이 분분할 뿐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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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 삶의 긴 터널 입구로 들어가 언젠가 다시 터널을 빠녀 나올 것이라는 것.

잠시 어둡고, 조용해지겠지만 그렇게 가다보면 밝고 환한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희망.

요새 이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올리신 리뷰도 읽다보니 그런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비가 오네요. hnine님.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째 음악듣고 노트에 뭘 적고 있습니다. ^^

hnine 2019-06-28 10:27   좋아요 1 | URL
터널 말씀을 하시니 어쩌면 사는 건 말씀하신 그 터널의 연속이 아닐까 싶네요.
언젠가 순천에 가면서 터널 몇개를 지나는지 세어봤더니 30개가 넘더라고요. 생각보다 많은 터널을 거쳐서 목적지까지 가긴 갔지요. 그런데 인생의 터널은 그 터널 속을 통과하는 동안은 그게 터널 속인지, 끝이 있긴 있는건지, 믿음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왔어요 ^^)
어제 비가 오더니 오늘 여긴 비가 그쳤어요. 무슨 음악 들으셨는지 궁금하네요.
벌써 금요일이어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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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 집 대신 창고가 온가족이 머무는 집이었고 학교 아이들은 그런 루시를 손가락질했다. 부모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가슴에 쌓여있는채 어른이 된 루시 바턴은 마침내 작가로서 성공, 꿈도 못 꾸던 뉴욕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물질적 결핍은 벗어날 수 있었다 쳐도 정신적 결핍은 아마 그러질 못했었나보다. 함께 살지도 않고 아주 친한 관계도 아니었던 엄마를 작가가 이 소설 전반에 함께 등장시키며 루시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엄마와 딸의 관계, 즉 애와 증의 그 묘한 관계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주제로 삼기에는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번역자도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 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226)

그렇다면, 어린 시절 가난과 어려움 속에 살았지만 꿈을 접지 않고 작가로서 성공한 여성 루시 바턴이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라고 봐야할까? 리뷰 쓰기 전에 youtube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고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는 소설 쓸때 플롯(plot)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나 장면에서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잡아내어 구상을 시작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경우엔 나이 들고 몸집 큰 한 여인이 집 앞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일단 쓰기 시작하다보면 플롯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이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쓰기 시작할때 이 인물이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는 것으로 해야겠다고 계획한 적 없다고 한다. 다만 어릴 때 너무 가난하고 부모가 생계 전선에서 바빴기 때문에 혼자 시간을 보내야했던 루시가 좋아했던 것이 책 읽기였으니 나중에 그녀의 직업으로써 작가가 되는 것으로 하면 좋겠구나 하고, 쓰면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제를 꼭 가난했던 여성의 '작가'로서의 성공담으로 볼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주인공 루시의 직업이 작가였기에 혹시 루시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궁금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렇진 않지만 최소한 자기는 소설 중의 루시가 하는 말과 행동의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번역자는 해설에서 루시 바턴 보다는 오히려 소설 중에 나오는 세라 페인이 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일거라고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려 들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이제 겨우 두권 읽은 후라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두권에서 작가는 사건 중심, 서사 중심으로 소설을 쓰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런 저런 소소한 사건을 두루 보여주며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 아닐까. 삶에 대한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과 같을 것이다. 그녀 소설의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렵다는 것은.

 

거의 끝부분에 루시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의 의도,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216쪽)

이렇게 소설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언급한 후에 이어서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누가 등장하든, 누가 관계하든, 주체는 그들이 아니라 내가 되는 삶. 내 이름은 nobody 가 아니라 루시 바턴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런 삶이 꼭 독불장군 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라는 것. 그럴 때마다 꺾이거나 꺾기보다 루시 바턴이, 작가가 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움직였다. (211쪽)

마음을 한군데에 고정시키고 절대불변을 고수하기 보다는 양가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그 댓가가 없지 않으니.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생각은, 이 소설에서 뽑아낸, 나만의 뜬금없는 힌트라고 할까.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219쪽)

이 마지막 문장, 짧은 이 문장이 내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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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6-19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마음이 아니라 먼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맞는 것 같아요 내가 먼저 움직여지지 않는데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건 또 하나의 강제이고 강요인 듯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26   좋아요 1 | URL
주관을 가지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요즘 같이 가치관과 해석이 다양한 시대에 부러지지 않고 살려면 (!) 제 마음을 좀 말랑말랑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인가봐요. 물론 감동만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요. ^ ^

목나무 2019-06-1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은미 작가가 <어제는 봄> 집필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래서 궁금하던 차에 에이치나인님 글보니 저도 곧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
저도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30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께서 최은미 작가 만나고 오셔서 쓰신 페이퍼 물론 읽었지요. 두번 읽었어요 ^^
<어제는 봄>과 <내 이름을 루시 바턴>두 소설 모두 읽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에~~ ^^ 둘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둘 다 놓치기 싫은 작품이라는 것도요. ^^

뚜유 2019-06-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리뷰를 쓰고는 싶은데 섣불리 못 쓰겠더라고요.
잘 읽고 갑니다

hnine 2019-06-19 23:07   좋아요 0 | URL
섣불리 리뷰를 못쓰셨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었고요.
그래서 작가의 인터뷰 자료들을 찾아본것인데, 그렇게 작가가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나니 조금 알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완전히 알게 된건 아니지만요.
뚜유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
 
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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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그럼 오늘은?

그때가 봄이었는지 당시는 몰랐으리라. 지나간 후, 한 시절이 마감했음을 알게된 후, 우리는 쓸쓸한 노래로 그때를 회상할 뿐이다.

이 소설의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남편을 둔 서른 아홉의 여자이다. 누구나와 같으면서 누구와도 다른 그 나이때 여자. 10년 전 등단했으나 아직 자기 이름의 책을 내본 적 없는, 그래서 여전히 여기 저기 출판사에 소설을 투고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업은 없지만 매일 쓸 거리를 들고 동네 카페에 가서 아이 올때까지 글을 쓴다.

'경찰관은 나에게 2층으로 오라고 했다' 라는 첫 문장은 화자인 그녀가 작품을 위해 자문이 필요하여 동네 경찰서를 찾아가는 장면을 여는 문장이다. 그때가 3월 중순. 봄이 막 시작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후로 그녀는 하루에 하나씩 경찰관에게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로 질문을 보내고 경찰관은 답변을 보내는 식으로, 그렇게 한 경찰관과 그녀 사이에 대화창이 열리게 된다.

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제목에도 이용한 것은 작품의 주제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봄은 짧아서, 추위가 가셔서 봄인가 하면 어느새 여름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래서 봄은 잘 누려야 하는 계절인 것이다.

착실하게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남편, 소심하고 예민하지만 잘 크고 있는 딸. 그 봄은 최소한 가족이라는 이 두 사람에서 벗어난 봄이었고 여름이 막 시작할 무렵에서 끝을 맺고 있으니 짧은 시간 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자람 없이 다 쏟아내는 작가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소설에 꼭 서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쩌면 편견이고 착각인지 모른다. 대단한 사건 없이도 이렇게 단숨에 읽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힘. 이것은 무어라고 불러야할까. 나는 한편의 소설을 읽은 것이라기 보다 작가를 읽었나보다. 무심하게, 그러면서 솔직하게 써내려간 문장들. 작가는 이렇게 쓰느라 더 어려웠을까 덜 어려웠을까. 이건 작가의 이야기라고 자꾸 믿게 만드는 페이지 페이지 그 어디에도 과욕과 과장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 속 그녀가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 내용을 말해주자 듣고 있던 그 경찰관도 이거 혹시 그녀의 이야기 아닐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했고, 그녀는 지난 10년간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 그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은미 작가의 장편 <아홉번째 파도>를 읽고 나서 전작 <목련정전>이나 <너무 아름다운 꿈>도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어떻게 <어제는 봄>이라는, 중편 단행본을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로 다 읽어버렸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어서'

마지막 페이지의 이 문장이 자꾸 입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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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디자인 1 지식을 만화로 만나다 1
김재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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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디자인이라는 말은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가. 단순히 어떤 물체의 모양을 결정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나아가 건축물 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대형 프로젝트 기획, 인생의 행로 계획 처럼 눈에 안보이는 것에까지 두루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디자인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독점 영역이 아니라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이 되어 가고 있다. 디자인 분야 종사자도 아니고 디자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따로 갖고 있지도 않은 내가 이 책을 선뜻 구입해서 읽어보게 된 것도 그 예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놀라운 학습 능력은 짧은 기간에 디자인을 보고 읽는 방법을 체화했고 세세하고 전문적인 영역에서 다루어지던 것들까지 대중의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예전이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면 지금은 소비하던 대중이 생산과 설계까지 주무르는 전혀 다른 양상의 좋은 시절이다.(5쪽)

 

저자의 말처럼 이제는 대중이 소비뿐 아니라 생산과 설계까지 해내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동영상이라는 수단으로 검색부터 학습까지 쉽게 할 수 있게 한 시대가 된 것은 어쩌면 디자인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 대해 탈전문화를 부채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대에 부응하여 저자는 이전에 출간된 <디자인 캐리커처>라는 책을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하여 제목을 <더 디자인>이라고 바꿔 출간하였다고 한다.

 

먼저 출판된 <디자인 캐리커처>가 디자인이라는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갖거나 디자이너의 진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사전 지식을 요약하고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의미였다면 이번에 제목이 바뀌어 나온 <더 디자인>은 이제까지의 디자인이 각각의 항목에서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모양으로 명멸했는지를 더듬는 회상이 될 것이다. (5쪽)

 

상표, 의상, 디자이너, 건축, 가구, 조명, 자동차, 비행기, 이렇게 디자인 분야를 나누었고 각 분야에서 사람들이 들으면 알만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물건 혹은 사람에 대해 그림과 글로 설명하는 방식은 간단하고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긴 했다. 하지만 식상한 면도 있었다. 전문적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담겠다는 기획이고보니 누구나 다 아는 정도의 내용에 그림만 덧붙인 구성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텐데 다행히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디자인에 대한 저자의 지식이 어느 정도의 심도와 주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만들기 위해 수집된 지식이 아니라 디자인에 대한 연륜, 특히 현대 디자인에 대해 정리되고 고찰을 거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썼다는 느낌이 책 전체에서 전달되었다.

디자인에 관한 책이니만큼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을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르나 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들어있지 않다. 가구, 건축, 인물, 의상, 설명에 언급된 모든 디자인 제품을 철저하게 저자의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니 (기획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특별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을 것이다. 그림도 복잡하지 않고 특징적으로 그려져서 보기 편했고 내용 요약과 비유 설명을 잘 해놓아서 읽는 도중 몇번이나 저자의 이력을 펼쳐보게 되었다. 이런 점 덕분에, 너무 내용이 간단하다는 단점을 넘어서 읽기를 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니 다행이었다.

책의 대부분은 만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더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만화가 끝나고 난 후 P.S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그림 없이 글로만 채워진 삼십 여 쪽 분량을 통해 저자는 디자인의 기원과 윤리, 현대 디자인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써놓았다.

 

다음 인용 부분은 어떤 것이 좋은 디자인인가, 디자인과 예술은 어떻게 달라야 하고 구별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디자인 분야의 의미 있는 진보나 혁신에는 새로운 즐거움과 활력소는 있으되 눈살을 찌푸리는 충격은 없다는 점이다. 순수 예술의 아방가르드 전장과 달리 디자이너들이 대중과 비슷한 마음과 태도로 편리와 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일상과 가까운 곳이며 함께 느끼고 누린다는 원칙이 폐기 처분되지 않았기에 그곳은 아직 예측을 불허하고 서민들의 삶을 아랑곳하지 않고 튀는 경쟁만을 일삼는 전쟁터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73쪽)

순수 예술의 아방가르드에 있는 예술가들이 읽으면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자기의 생각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디자인과 순수 예술은 그 목적부터가 이렇게 구분되는 분야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었다.

 

이분의 다른 저서들을 훑어보니 관심이 커진다. 특히 이 책의 후속편 <더 디자인 2>, 그리고 <과학자들>은 읽어봐야겠다.

다만, 말했다시피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 때문에 정리 요약은 무척 잘 되어 있으나, 자세하고 심도있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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