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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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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앞서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은 것도 사실은 다락방님 서재에서 본 이 책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여기 저기 투고를 했었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저자의 이름을 널리 알린 시작이 되는 책이 <개인주의자 선언>이 아닌가 해서 그것부터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저자의 책 중독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주의자 선언>에서도 언급되었긴 하지만 이 책 <쾌락독서>에서는 본격적으로 저자의 독서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역시 읽고 쓰는 일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 저자인지라, 한 쪽도 지루하게 넘어간 곳이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하루 만에 후루룩 다 읽었다. 더구나 저자의 나이가 나와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 (나는 85학번, 저자는 88학번) 어린 시절 책 읽기는 물론이고 그 당시 유행하던 책들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얼마나 반갑던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다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 취미와 관심사가 비슷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름방학때 학교와 도서관에서 열리던 여름독서교실, 활자에 굶주려 더 읽을 책이 없으면 잡지, 광고지, 요리책까지 읽어야 했던 것, 몰래 몰래 아버지나 어머니의 책까지 침범해서 읽는 짜릿함, 그 예로 그 당시 미국판 막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시드니 쉘던의 소설 <깊은 밤 깊은 곳에>는 나도 그런 경로로 읽었단 말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이면 이해할 만한, 이문열을 거쳐야 했던 시절 등.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후련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삼국지와 무협지 대목에서 아쉽게도 갈라서야 했다 (저자가 열광했다는 삼국지를 나는 몇번이나 시도하다가 포기했으며 무협지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저자가 고등학생때 그 반 반장이 야간자율학습에서 빠지겠다고 한 것에 화가 나셔서 국어 담당하셨던 담임선생님께서 앞으로 국어 수업을 거부하겠다고 하셨고 그런 담임 선생님을 대신해 1등이라는 이유로 저자가 대신 수업을 담당해야했는데, 선생님이 가르치실때보다 반 평균 점수가 10점이나 올랐다는 등, 학교에서도 수업보다는 책과 만화 읽는 것을 좋아했고 사법고시 보기전엔 노량진 만화방에 틀어박혀 만화읽기를 즐겼다는 대목등, 나와 공감대가 급 축소되는 대목도 있었다.

책으로 노는 방법은 읽기 외에도 많다. 책 모임을 꾸려 책 수다 떨기,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책으로 잘난 척하기, 책 수집하기, 책을 테마로 여행하기......그런데 그중 끝판왕은 역시 직접 책을 쓰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는 성공한 덕후인 것이다 (으쓱으쓱)! (178쪽)

격식을 빼고 이렇게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은 성격도 성격이지만 일종의 자신감과 소신일 수도 있다고 본다. 겸손을 위해 겸손하려 하지 않았고 모자라는 것을 포장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글을 보면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고, 대개는 이렇게 말하는데 저자는 자기가 글을 써보니 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속단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를 가리고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쓰기 마련이며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또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183쪽)

나 역시 지금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그 소감을 나의 글로 써내려가고 있다.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이라니. 지금 이 끄적거림도 내 삶의 빛나는 조각들일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저자가 책과 함께 좋아하는 것으로 여행을 꼽았는데, 독서를 심각하게 하기 보다 쾌락의 목적으로 한다고 했듯이 여행 역시 숙제가 아니라고 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여행을 무슨 완수해야할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그런데 여행 경력을 보니 다섯살, 일곱살된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엄마 없이 유럽 여행을 데리고 떠난 것이나, 인도, 갈라파고스 등을 다녀온 곳이나, 이것도 책으로 쓰면 재미없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쓰고 있을지도.

책 읽기 좋은 공간으로 찾아낸 곳, 책 읽기 좋은 곳을 찾아 들고 다니기 좋은 의자라고 찾아낸 것을 좀 보시라.

저서 중 <판사유감> 을 손에 넣기 전에 TV 드라마 <미스함무라비>를 오늘 부터 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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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7-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어떤 책의 느낌일지 감이 옵니다. ^^

더위에 잘 지내고 계시지요?

hnine 2019-07-26 20:43   좋아요 1 | URL
아, Nussbaum님.
더위에 잘 못지내고 있습니다 ㅠㅠ
Nussbaum님의 시원한 푸른색, 보라색 그림 보면서 마음이라도 시원해지려고요 ^^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자가 쓴 극본이라는 TV 드라마를 지금 막 보기 시작했어요. TV와 네플릭스는 책의 강력한 라이벌이고 개미지옥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한번 보고 싶어서요.

Nussbaum 2019-07-26 21:03   좋아요 0 | URL
에구 왜 잘 못지내고 계시는지..

방학인지라 저도 넷플릭스랑 Pooq TV 영화 잔뜩 보고 있습니다. 밤이 새는줄도 모르게 보기도 하는데, 그래도 책이 끌릴때가 있긴 하더라구요.

책만의 매력? 이라고 해야 하나 ㅎㅎ

얼른 쾌차하셔요 !!

hnine 2019-07-27 05:34   좋아요 0 | URL
아픈거 아니고요, 제가 워낙 더위에 취약해서 이제 7월이고 아직 한 달 이상 여름이 남았는데 벌써 허덕허덕거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너무 엄살을 떨었나요?

다락방 2019-07-2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도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두 딸을 데리고 여행한 건 저도 참 인상깊었어요.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말예요. 솔직한 글이라 거부감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hnine 2019-07-27 05:33   좋아요 0 | URL
요즘 다락방님 서재에서 골라담는 책이 늘어갑니다. 최영미 시인 시집도 그랬고요.
문유석 판사의 책은 심지어 집에 <개인주의자 선언>이 있었는데도 안읽어보고 있었거든요. <쾌락독서>을 읽기 위해 결국 집에 있는 것부터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쾌락독서>는 그보다 더 가볍게 쓰여진 책인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한나절에 다 읽어버렸네요.
저자 말에 의하자면 다락방님도 책읽기 재미의 끝판왕을 달성하신 성공한 덕후!! ^^

책읽는나무 2019-07-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디오에서 문유석 판사님 초대손님으로 나오셔서 책 소개와 드라마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나게 하셔서(입담이 좋으시더라구요^^) 읽어봐야지!찜만 해놓구선 ‘미스 함무라비‘드라마 앞부분 조금 보다가 뭣때문인지?멈춰버렸네요ㅜㅜ
고아라가 참 귀여우면서 진지하게 연기했던 기억이 납니다.성동일 배우도 인상 깊었구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었네요...참 드라마를 보셨다면,곳곳에 문유석 판사님 책들 ppl보셨나요?ㅋㅋ
드라마에 등장하는 책들,특히 고아라 판사 개인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과, 페미니즘 책제목 기억하느라 눈이 바빴었어요ㅋㅋ
저도 여름 가기전에 ‘개인주의자 선언‘이랑 ‘쾌락독서‘얼른 읽고 싶네요^^

hnine 2019-07-27 11:5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말씀도 참 잘하시겠다 짐작이 되더라고요. 전 들어본 적은없지만 책읽는나무님 말씀 들으니 막 상상이 되네요.
드라마는 이제 막 1편 보기 시작해서 ppl 발견 못했는데 앞으로 주목해서 찾아봐야겠네요. 그것도 재미있겠는데요?
이렇게 더운 날엔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면서 촌철살인 같은 이런 책 읽으면 딱 좋은 것 같아요.
이 책도 그렇고, 최근에 본 ‘굿피플‘이라는 TV프로그램, 그리고 요즘 틈틈히 듣고 있는 민법 팟캐스트 등을 통해 저도 법이라는 분야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는 중이어요. 제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였는데 새로 알아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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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구분하려고는 한다. 제목 속 개인주의자 라는 말을 보며 이 말 역시 이기주의와 구분하여 사용되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면서 저자 자신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한 편력부터 토로하고 들어가니 이 책의 성격과 글쓴이의 성향이 초반부터 분명해졌다.

'너는 왜 집에 사람 오는 걸 싫어하니?'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듣던 말이다. '이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었을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아직 모를 때였다. 그 버릇 (!) 지금까지 개선 못해서 여전히 주류보다 비주류로 살며 집단으로 뭐 하는 것을 기피하는 비사회성 인간에, 외로움을 댓가로 치를 지언정 내 결정대로 밀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후련하고 위안이 되었는지.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25쪽)

혼자 살 수는 없는 세상. 어떤 집단에 일단 속하게 되면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튀는 경향이 보이면 불편해진다. 그 불편함은 한 소리를 내야한다는 그 무언의 억압이 느껴질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

이 획일적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일까. 일제 강점기를 거쳐 군사 정권 아래서 굳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까.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24쪽)

 

훨씬 근대로 내려와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말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전근대성, 근대성, 탈근대성이 공존하던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데 서로 다른 시대의 특징이 같은 시대에 나타난다는 말이라고 한다. 1980년대 한국사회 역시 그러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고도 성장기의 자본주의, 전체주의적인 군부독재, 전근대적인 가부장제 문화,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 이념인 20세기 초반의 러시아혁명 이론부터 20세기 후반 유럽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심지어 또다른 전체주의인 주체사상까지 혼재했던 것이다.

결핍되어 있던 것은 프랑스대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자유주의민주주의, 그리고 그 토대인 합리적 개인주의였다. (104쪽)

 

다수의견이 꼭 최선의 결정은 아니라는 것은 학교 수업 시간에도 배우긴 했다. 저자도 다시 한번 현실적인 예를 들어 상기시키고 있다. 개인주의를 말할때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거 아니면 다 저거라고 단정, 분류, 대립 구조 확정시키는 '좌우자판기'.

보수, 진보란 보통 정부의 역할, 복지정책, 조세정책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구별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사회에서 가장 열렬히 대립하는 사항은 실은 이념, 정책이 아니라 어느 대통령을 '사모'하느냐와 애향심 아닐까. 여기에 세대 문제가 결합된다. (206쪽)

 

삼인성호 (三人成虎). 몇몇이 떠들어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서 진짜 심각한 이념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 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209쪽)

 

몇군데 줄을 치며 읽긴 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마지막 몇장을 안남기고 읽은,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연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작은 책임부터 부담없이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나서는 걸 죄악시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누가 뭘 잘했을 때의 칭찬보다 그가 뭐 한 가지 잘못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려들어 돌팔매질하는 광기가 훨씬 뜨겁다. 당연히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을 맡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시도하고 실질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남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창작가보다 평론가가 많다고나 할까.

노력이라도 해보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안한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다 쇼일 뿐이라며. (267쪽)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Anyone can be cynical.

Dare to be an optimist.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268쪽)

 

쓴소리랍시고 떠드는 입은 많다. 그래야 자기의 똑똑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내 한계 안에서, 작은 노력이라도 해볼 용기와 정성이 없다면 최소한 그런 사람을 냉소하지 말기를.

 

합리적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나 하나 제대로 잘 챙기며 사는 것도 벅차다는 것이다. 평범해보이는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이고 일생동안 노력해야할 일인지 안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며 생각했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업 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가 다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지키기 위해. 그런 개인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또 그렇기에 얼마나 귀한 일인가. (279쪽)

 

제목과, 그리고 초반의 도입과 일관성 있게 맺기에 좋은 마무리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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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5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5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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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소설 자체를 읽는 것인지 작가를 읽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안될때가 있다. 그럴려면 일단 소설에 관심이 가는 일이 먼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다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을 것이고, 다음엔 그 작가의 소설을 읽음과 동시에 그 소설 속에 담긴 작가의 마음, 작가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도 작동을 시작하는 것이리라.

이전 작으로 <안녕 주정뱅이>를 읽었고, 그때 리뷰를 쓰면서 작가 관련 인터뷰를 좀 찾아봤고, 우연히 작가와 함께 하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생겨 코 앞에서 그녀가 자기의 작품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늘 뭐 먹지>라는, 소설은 아니지만 작가가 무척 사랑하는 책이라는 먹는 일과 관련된 에세이를 상품으로 들고 들어왔다.

최근 검은 바탕에 노란 색 선명한 표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읽어야지 생각하고 손에 잡은 순간, 두께는 얇고 200쪽 채우느라 그랬는지 글짜 간격은 널널했다.

원래 계간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호에 <당신은 알지 못하나이다> 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단편이었던 것을 개작하면서 50쪽 정도 늘려 단행본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더 늘려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무리였다는 작가의 소감을 들었다.

두께도 얇은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가독성마저 있어 손에서 몇번 놓지 않고 다 읽어버렸다. 가독성이 높은데에는 권여선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작품이 작가의 이전 작과 조금 다르게 추리소설 형식을 하고 있다는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미모의 여고생 김해언이 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사건이 소설의 발단이 되니까 말이다. 각 챕터마다 화자를 달리하면서 피해자의 동생이 나오고, 친구, 범인으로 지목받은 사람들, 그 가족 등이 등장한다. 살인 사건은 아니지만 또 하나의 사건이 도입되는데 범인으로 지목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 김해언이 죽은 날 함께 있었던 것이 목격된 남자 신정준이 나중에 결혼해서 낳은 아기가 유괴되는 사건이다. 소설이 끝나도록 이 두 사건의 범인이 누구라고 명확하게 밝히진 않는다. 독자가 추리하고 짐작할 뿐.

날때 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할때 여러 가지 잘못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정준이 그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일해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명을 쓰고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은 기회마저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고 마는 사람이 있다. 한만우가 그랬다. 죽은 언니의 미모는 따르지 못하지만 그보다 훨씬 똑똑했던 동생 김다언은 언니가 죽고 범인도 밝혀지지 못하고 지난 17년 동안 자신은 물론 엄마의 고통과 이상 행동을 봐오며 언니를 대체한 삶과 복수를 시도한다. 신정준의 아내이자 죽은 해언과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윤태림을 속물중의 속물이라고 마음껏 비난하기엔 거기엔 우리들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유괴당하고 종교와 시쓰기를 통해 괴로움을 벗어나보려는 윤태림이 심리상담사 앞에서 하는 독백 형식의 글은 그 어느 대목보다 숨죽이며 읽게 했다.

짧은 분량이라서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고 압축적인 효과가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작품 속에 너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죽은 사람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남겨진 사람들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댓가를 치르는지에 대해 작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에 세월호 문제, 종교, 신의 문제, 사회 부조리의 문제 까지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주제들이다. 너무나 무거운 주제들을 조금씩 조금씩 건드려서라도 짧은 분량 속에 다 집어넣고 싶어한 과도한 의욕이라고 말하면 너무한지도 모르겠다.

원래 제목이었다는 '당신은 알지 못하나이다'가 너무나 막연해보이듯이 바뀐 제목 '레몬'도 그 점에선 다르지 않다. 책 구매자의 눈길을 잡아끄는, 출판사 쪽 입장에선 분명 이전 제목보다 성공적인 제목이긴 하지만 작품 내용 자체와 연관시키기엔 무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관련 없진 않으나 주제를 꿰뚫는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장편소설이라고 내세우기엔 짧은 분량도 내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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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9-07-21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야지 하고 계속 미루다가 나인님 글 읽으니 조금 더 미뤄도 괜찮겠다 싶어져요.

hnine 2019-07-21 10:10   좋아요 0 | URL
제가 좀 쓴소리를 썼나요? ^^
그런데 미루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일단 손에 쥐면 금방 읽혀요. 어떤 작가나 그렇겠지만 권여선 작가도 작품에 들이는 애정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완벽주의랄까.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가서 느낀 점도 그러했지요. 되도록 결점 없는, 내놓아 부끄럼 없는 작품을 향한 의지가 대단하더라고요.

페크pek0501 2019-07-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출판사의 상술이 느껴질 때 반갑지 않지요.
요즘은 작가의 의도보다 출판사의 판매 전략에 좌우되는 현상을 느끼게 됩니다. 개선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hnine 2019-07-21 13:37   좋아요 1 | URL
페크님, 한번 읽어보셔요. 저는 좀 아쉬운 점을 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이 좋은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제목에 대해서는 나중에 작가도 동의했고 만족한다고 하더군요. 차기작도 이미 쓰고 있는 중이라니 곧 또 다른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답니다.
 
토지 20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0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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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재 20년 만에 끝냈다는 토지 20권의 마지막은 극적이지 않았다.

앞의 권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여러 등장 인물이 교대로 나오면서 서민들의 대화를 통해서는 가난하고 굶주려야하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지식인들의 대화를 통해서는 시대 상황, 그리고 시대상황을 위해 또는 그것을 틈타 어떻게 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가를 보여주고,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연인들을 통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은 시대, 신분, 국가의 개입을 보여준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 자리를 지킨 서희. 그녀의 삶은 예사롭지 않은 일생을 살다간 부모와 할머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서희를 중심 인물이라고 할때 그것은 소설 속 사건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뜻이라기 보다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을 직접 간접으로 그녀를 중심으로 관계 지어서 자칫 산만하고 일관성 없을 인물 관계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의미에서이다.

동학도, 항일운동도, 신학문도, 계속 언급되기는 하지만 어느 권에서도 크게 한번 터지는 일이 없다. 우리 역사가 그렇기 때문 아닐까. 민초들의 삶을 자잘하게 묘사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지루하지 않아 20권 까지 읽어가도록 그리 어렵지 않았고 초집중해서 읽어야할 필요까지 없었지만, 20권 결말이라고 해서 결말지어지는 것이 없다. 물론 일본에 드디어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대미를 장식하긴 하지만 아주 짧은 지면을 할애할 뿐이다.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어느 인물들에 의해 (누구라도 상관없다) 21권, 22권으로 계속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여섯 살때 부모의 사랑에서 격리되어 그 결핍을 독으로 품고 살아야 했던 서희. 어린 나이에도 어린 나이로 살 수 없었던 서희가 길상을 배우자로 선택하여 빼앗긴 토지를 되찾는 과정이 아무래도 이 소설의 중심 플롯일 것이다. 간도로 이주하였다가 마침내 조준구로부터 빼앗긴 토지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에서 끝났더라면 어땠을까 감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가 그러한 것을 작가가 어찌하랴. 강한 나라의 틈새에서 약자 역할을 해온 쪽의 얘기가 극적으로 소설화 될 수 있을 것인가.

20권을 통털어 그 많은 등장 인물 중에 아무리 봐도 서희라는 여인을 뛰어 넘는 인물이 없다. 서희가 신분 차이 따위 뒤로 하고 먼저 결혼을 제안하여 남편이 된 길상은 마지막 권에서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서희의 두 아들중 큰 아들 환국은 결단력의 소유자라기 보다 이를테면 햄릿 형 인물. 그보다 추진력 있던 둘째 아들 윤국은 학병으로 참전 중이다. 봉순의 딸이며 양딸인 양현을 슬하로 다시 데리고 온 서희는 늙어가면서 어쩌면 양현에게 더 의지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남편도 아니고 장성한 두 아들도 아닌.

한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본다. 내가 살아가는 길은 부모가 살아온 궤적을 크게 벗어날 수 없고 내 자식의 삶 역시 내가 살아가는 길과 완전히 상관없을 수 없다.

그러니 끝은 없다. 그래서일까. 20권까지 읽은 느낌은 19권 읽고 난 느낌이나 18권 읽고 난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속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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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한 여정을 끝내셨네요. 책 좋아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욕심만 품고 정복하지는 못하는 높은 산을...... 축하드립니다^-^

hnine 2019-07-19 14:58   좋아요 0 | URL
syo님 감사합니다. 여기 서재 지인님들로부터 격려의 덕이 커요.
한 작가의 일생이 담긴 작품이니 높은 산은 높은 산이지요. 재미와 의의를 떠나서 우선 마음이 숙연해지는 작품인 것 같아요. 마지막 부분을 쓸 무렵은 건강도 좋지 않으실 때인데 그야말로 작가의 피눈물이 들어가있지 않을까요.
갑자기 저는 살면서 어디에 그렇게 몰입해본 적 있었나 갑자기 자체 반성 모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ㅠㅠ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7-19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7-20 04:5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태백산맥은 예전에 읽었으니 양축을 건드리긴 했네요 ^^
읽는동안 제가 즐거웠던 것 같아요. 끈기가 없어 좀처럼 대하소설을 못 읽는데 토지는 제가 처음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기도 하고 작가가 워낙 필치가 두말할 필요 없는 분이라서 술술 읽힌 편이어요. 알라딘 서재 친구분들께서 많이 격려해주신 덕도 커요.

감은빛 2019-07-1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대단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소설의 짜임새나 완성도를 중심으로 생각하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토지를 되찾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오래전에 몇 권까지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읽다 말았을 뿐이지만,
hnine 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hnine 2019-07-20 04:56   좋아요 0 | URL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토지 아니라 더 한 것도 많이 읽으신 분들 많으실텐데 이렇게 소소한 완독에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주실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읽다 말았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어요. 토지라는 작품의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니까요. 저도 한권과 다음권 사이 시간 간격이 꽤 되었던 적도 있는데 좋지 않은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앞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되살려지더라고요. 그 덕에 끝까지 왔습니다 ^^
언젠가 다시 손에 드실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실거예요 ^^

책읽는나무 2019-07-1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글을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요..한국사람으로 토지를 안읽고도 읽은 척 하기가 부끄럽다!고 쓴 사람이 있었는데 맞구나!!생각했습니다.
아무튼 hnine님 부럽습니다^^

hnine 2019-07-20 04:59   좋아요 0 | URL
아이쿠, 부러워하실 일인가요. 무슨 책을 읽으시든 그동안 20권 안 읽으셨겠어요? ^^ 저는 어떻게 하다보니 그게 토지라는 책이었던거죠. 어떻게 저랑 코드가 맞았던 것 같아요. 20권 아니라 2권 짜리도 읽다만 경우가 허다한데 말입니다. 그래도 다 읽고 나니 뿌듯하긴 하네요. 토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고요.

목나무 2019-07-1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의 긴 여정을 마치셨군요!
축하드려요 에이치나인님^^
이런 대하 소설을 완독하셨으니 이제 제법 두꺼운 양의 책들에도 바로 덥석 잡으실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그저 부럽습니다. ^^~

hnine 2019-07-20 05:06   좋아요 1 | URL
토지 20권 긴 여정 마치고 다음으로 고른 책이 권여선의 <레몬>이랍니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어요 ^^ 생각보다 짧고 얇더라고요. 가독성 있기도 하고요.
말씀하신대로 길다면 긴 여정이었네요. 완독하리라 작정하고 읽은 것도 아니고 도서관 서고를 둘러보다가 토지 1권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보통은 1권은 이미 대출중일때가 많잖아요) 한번 읽어볼까 하고 빌려온게 어떻게 끝까지 오게 되었어요. 계속 그 도서관에서 한권씩 빌려다 읽었지요.
토지 소설도 그렇지만 읽으면서 집필하는 작가의 마음, 작가의 일생이 떠올려질때가 많았어요. 어제 남편에게도 그랬네요. 토지는 박경리 작가의 삶 그 자체라고.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딘 서재니까 이런 일로 이렇게 축하를 받네요. 그것도 토지가 제게 주는 선물 같아서 기뻐요.

페크pek0501 2019-07-2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으로의 긴 여행을 마친 것을 축하드립니다!!!

hnine 2019-07-21 13: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여행에 비유해주시니 더 멋진걸요. 길지만 후회없는 여행이었어요. 언젠가 그 길을 다시 밟게 되길 바라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지는 진짜 여행지에 다녀왔을때와 다름없이 자신 못하지요.
한권 한권 나아갈때마다 작가의 노고가 정말 글자 사이 사이에서 읽혀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TV에서 봉순이 역할을 했던 배우가 얼마전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더 안타깝기도 했고요.
페크님께 댓글을 쓰다보니, 꼭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지네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격려와 공감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홍진화 2019-07-3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완독을 축하 드립니다...
한국 근대사의 역사을 들여다 볼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 됩니다...저도 젊었을때 읽다가 놓고 읽다고 놓고 했던 책을 토지 문학관에서 재편집하여 20권으로 만들었던 2012년에 완독을 하면서 젊었을때 읽었던 느낌과 50代에 와서 읽은 느낌이 전혀 틀렸던 느낌을 받았읍니다...조정래 작가의 근대사 100年을 시대순으로 `아리람`,`태백산맥`,`한강`을 연이어서 보는 재미도 있읍니다...`역사를 알아야 현재을 직시하며 미래를 연다`라는 말이 작금의 현실에 정신 똑바로 차려 반복되는 역사를 안 만들려면 지난 근대사을 잘 알고자하면 `土地`을 읽기를 권합니다....

hnine 2019-07-30 13:21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끈기가 없어서 대하소설 잘 못 읽는데, 토지는 용케 완독을 하였습니다만 완독이라는 말보다 일독(一讀)이라고 하고 싶네요. 태백산맥은 오래 전에 읽긴 했는데 아리랑과 한강도 읽을 수 있을지. 추천해주시니 시도해보겠습니다.
 
토지 19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9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십을 갓 넘긴 나이, 아직도 그는 아름다웠으나 몹시 수척했다. 십여 년 동안 놓았던 수틀을 다시 매어놓고 수를 시작한 것만 해도 허약해진 자기 자신을 추슬러보려는 그의 심중의 일단을 넘볼 수 있었다. 벌써 삼 년이 넘어가려 하는 길상의 감옥살이, 어쩌면 서희가 길상보다 먼저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49쪽)

 

서희가 간도에서 진주로 귀향한 후 서희 집 일을 맡아해주던 장연학은 서희 집에서 독립하여 진주에 남강여관을 경영한다. 위의 구절은 장연학이 오랜만에 서희에게 들러 문안을 드리며 본 서희의 모습이다.

토지에는 워낙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어느 시점부터인가 딱히 서희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지만, 잊을만할때쯤 등장인물들이 서희를 중심으로 한번씩 엮였다 풀어졌다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항일 운동에 두드러진 역할로 행동을 보여주는 길상은 아니지만 아무튼 길상은 연달아 옥살이를 하는 것으로 나와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서희와 길상 사이의 두 아들 은 모두 장성하여 장남 환국은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고 차남 윤국은 기화의 딸 양현과의 혼인이 성사되지 못하자 학병으로 지원하게 된다. 양어머니인 서희와 윤국의 간곡한 뜻에도 불구하고 양현이 정작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는 백정 출신 송관수의 아들 송영광이다. 영광도 양현을 좋아하지만 신분 차이, 다리 불구, 번번한 직업을 못갖고 있는 처지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광은 양현의 뜻을 거부한채 양현이 있는 인천을 떠나 멀리 만주로 간다.

집나간 친엄마 양을례를 따라갔다가 거기서 알게 된 일본군 중위로부터 성병에 걸려 피폐해진 채, 자기가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할머니집을 찾아온 남희를 장연학은 병원에 데려가 비밀리에 치료를 받게하고 도솔암에서 요양을 시킨다.

토지 역시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이니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관계도 여럿 나오는데, 그중 한 쌍이 정신이 깨인 일본인 오가타와 동경유학생이며 항일의식이 투철한 신여성 유인실이다. 오가타 모르게 혼자 아이까지 낳은 유인실은 아이를 조찬하에게 부탁하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 유인실의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조찬하는 아이가 커감에 따라 아버지인 오가타를 만나게 해주는 기회를 만든다.

아직 마지막 한권이 남아있긴 하지만 19권까지 읽은 소감으로는, 토지라는 이 길고 긴 작품은 기승전결 구분되며 파도치듯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끊이지 않는 잔물결을 계속 만들어내며 큰 바다를 보도록, 그렇게 쓰여진 작품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작품의 말미에 오니까 더 그렇다. 마지막 한권, 400여쪽을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게, 언제나 그렇듯이 조상부터 이어져오는 자손들의 북적거리는 삶의 이야기가 흘러가듯 펼쳐진다. 부모 세대, 또 그 부모세대의 과보로부터 좀처럼 자유롭지 못한 자손들의 삶이다. 그건 최참판가의 서희도 그렇고, 백정의 자식이라고 차별받는 송영광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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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9-07-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장정의 끝이 이제 보이는군요!!
대단하십니다^^
라디오에서 모프로에서 4주년의 취지에 걸맞게 축하받고 싶은 사연을 보내달라고 했더니,어떤 청취자가 토지를 읽는데 4년이 걸렸다고 축하받고 싶다고 한 사연이 생각납니다.
hnine님은 4년이 아니어도,토지를 곧 완독한다는 것은 참...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미리 축하드립니다^^
아..저는 언제 읽으려나요??ㅋㅋ

hnine 2019-07-17 04:51   좋아요 1 | URL
1권부터 읽는 중간중간 다른 책도 읽어가면서 쉬엄쉬엄 읽어갔는데 어느 덧 마지막권을 읽고 있네요.
읽으면서 격하게 흥분한 때도 딱히 없고, 지루하게 읽은 적도 없고, 읽을만 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만난 제 친구는 제가 토지 읽는 것을 보더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 표지와 다르다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토지 두 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완독했고요.
책읽는나무님께서도 언젠가 읽게 되실겁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