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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9년 6월
평점 :
나는 건축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관련된 일을 해본 적도 없다.
나는 또한 카톨릭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어느 특정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건축에 관심이 많고 종교에도 관심이 있다.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인간의 역사에 미친 영향,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가서 빌리러 갔던 다른 책보다 먼저 눈에 띠는 이 책부터 손에 넣었다. 검은 색의 두툼한 책.
건축가 승효상. 알고는 있지만 그가 쓴 책은 아직 한번도 읽어볼 기회가 없었다.
언제: 2018년 6월 26일부터 7월 6일까지,
누구와: 승효상의 인솔하에 동숭학당 조직원들 스물 여섯 명
어디를: 로마에서 파리까지 2,500여 km에 걸쳐 수도원 순례 루트를 따른다.
동숭학당은 2014년 승효상이 만든 강좌 형식의 모임이다. 건축, 미술, 문학, 영화, 음악, 공연, 사회, 역사, 과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주제를 정하고 적합한 강사를 선정해 1년 단위의 강좌로 운영된다. 주제에 맞는 해외 장소를 택해 열흘 가량 여름 기행도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2014년 주제는 거주, 2015년 주제는 장소, 2016년 주제는 풍경, 2017년 주제는 기억, 2018년 주제가 공간이었고 이에 맞는 여름 기행으로 수도원 기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임옥상, 공지영 등 이름을 보면 알만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행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을 얻고자 떠나는 것이다.
힘은 진실로부터 나오며 진실은 늘 현장에 있어 현장에 가는 일인 여행은 그 장소가 가진 진실을 목도하게 하여 결국 우리에게 현실로 돌아가 일상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게 한다. (23쪽)
여행을 스스로 추방당한 자의 순례라고 정의하는 그이다. 모든 걸 객관화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어야 그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진정한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라고 저자는 믿고 있지만 이렇게 그룹으로 가야 하는때가 불가피할 때도 있는 법이다.
여행가기 전에 그가 어떻게 여행을 준비하는지, 막연한 준비가 아니라 얼마나 세부적이고 꼼꼼하게 가는 곳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된 상태로 떠나는지 책의 초입에 나온다. 반성했다. 비행기 티켓 사고 숙소 예약하고 어디 갈지 행선 짜는 것이 준비가 아니었다.
수도원 기행인만큼 로마에서 시작하여 파리에 이르기 까지 들르는 곳은 거의 수도원이고 그 수도원을 숙박 시설로 이용하기도 한다. 유럽에는 이제 수도하는 이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수도원을 숙박 시설로 전용해서 쓰거나 겸용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기도와 노동에 평생을을 바치는 곳 수도원. 광야의 동굴에서 시작되었다는 수도원은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공공 장소에서 교회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 건축 형식의 교회건축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8세기에 설립된 베네딕토파의 생 갈렌 수도원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도면에 근거하여 수도원의 구조에 대해서도 설명해놓았다.
수도원에서 가장 핵심적인공간은 네 변을 가진 정원이다. 열주가 있는 회랑, 즉 갤러리가 정원을 둘러싼다. 이 갤러리에 각각 다른 기능의 건물이 접하는데, 한쪽 면에는 성당이 접하고, 성당의 제단과 이어지는 다른 변에는 으레 2층 건물이 붙어 아래층에는 수도원 사무를 보는 공간과 수도 규칙서를 매일 한 장씩 읽는 챕터 룸 (chapter room)이 있고 위층에는 수도사의 숙소가 있다. 숙소는 열린 공간으로 창문마다 개별 침상이 놓이고 그 사이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다. 이렇게 한 방에 여러 수도사가 같이 기거하는 형식의 수도원을 공주 (共住)수도원 이라고 칭한다. 성당의 반대쪽 면에는 식당 (refractory)이 있기 마련이며 나머지 한 변에는 수도원의 물품을 제작하고 공급하는 작업장이 붙는다.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이 네개의 시설이 어떤 수도원이든 가장 핵심적 골격이다. (107쪽)
여기 말한 공주 수도원을 '클로이스터 (cloister)' 라고 하는데 '모나스터리 (monastery)'도 수도원이라고 번역되지만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 비로소 이해가 된다. 수도원을 왜 영어로 클로이스터라고도 하고 때로 모나스터리라고도 하는지. 그리고 수도원 건물에 있는 chapter room 이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지.
서양 건축의 양식사가 곧 교회 건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건축 기술의 핵심적 문제는 중력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건축의 기본적 목적이 내부 공간을 얻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지붕이 있어야 한다. 중력의 힘 때문에 늘 땅으로 떨어지려 하는 이 지붕을 지지하는 방법에 따라 건축 양식이 바뀐다. 이 양식을 스타일 (style)이라고 부른다. 스타일은 모양이나 장식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르기까지 1만년이 넘게 벽이 지붕을 지지하는 방식이 이용되었다면 고딕 시대에 이르면 이를 일거에 해결하는데 바로 건물의 외벽에 뼈대처럼 나와 있는 버트레스 (buttress)라는 시설물이 내부 기둥과 보 (flying girder)를 연결시켜주어 전체가 기둥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123, 124쪽)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으로 이어진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 바로크 , 로코코, 모더니즘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많은 수도원이 있지만 아마도 하이라이트는 프랑스 르 토로네 수도원과 롱샹 성당이 아닐까 한다. 롱샹 성당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 유명한 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쿠튀리에 신부의 부탁으로 1950년 꼬르뷔지에가 롱샹 성당의 설계를 맡았고 한창 지어지고 있던 중 1953년 쿠튀리에 신부는 이어서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역시 꼬르뷔지에에게 맡기게 되는데 프로방스 소재 르 토로네 수도원을 참조하여 설계해달라고 한다.
쿠튀리에 신부는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부탁하며 '조용하며 많은 사람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말했고, 프로방스의 르 토로네 수도원을 가보고 그곳에 흐르는 정신을 참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343쪽)
이미 세계적 거장이었던 꼬르뷔지에는 르 토로네 수도원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건축을 가리켜 '진실의 건축'이라고 하며 롱샹 성당의 성취를 버리고 원칙과 질서를 다시 끄집어 내어 라 투레트 수도원의 계획안을 제출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911/pimg_7149951632295134.jpg)
- 경사로에 세워진 라 투레트 수도원 -
저자인 승효상도 라 트레트 수도원의 건축적 가치와 미학에 대해 강조해 마지 않았지만 아마도 범인의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은 아래의 롱샹 성당일거라는걸 부인하지 않았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며 완성자라고 불렸던 꼬르뷔지에. 기계 미학에 심취하여 직각만이 유일하고 불변한다고 믿었던 그의 건축은 직각의 육면체여야 했었다. 그런 그가 기계 문명이 인간 살육에 지대한 조력자임을 목격하고 직각의 기계를 떠나 원시 동굴 혹은 지중해의 조개처럼 둥글고 휘어진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모더니즘을 창시하기 전인 젊은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직관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지식의 총합'이며 '감정은 기억된 후천적 지식의 발산물'이라는 그의 말처럼 모든 이성의 최종 목적지가 감성일까. 어떻든, 이 롱샹은 그를 교주처럼 따르던 모더니스트에게는 뼈아픈 배반이어서 그의 변절을 통절히 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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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911/pimg_7149951632295131.jpg)
- 롱샹 성당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911/pimg_7149951632295132.jpg)
- 롱샹 성당 내부의 기도실 -
그는 롱샹 성당의 기도실 (↑ 위의 사진) 문을 열고 들어가며 느낀다.
아, 완벽하게 다른 세계 ...도무지 현실이 아니다. (451쪽)
어느 새 500여 페이지의 끝장까지 와있었다. 11일 동안의 여정. 내가 실제로 가본 곳은 한 군데도 없는데도 꼬박 이틀 동안 내 손에 있던 이 책을 놓기가 아쉬웠다.
이제 이 기행을 끝내는 시간이다. 모두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여행을 마친 사람은 항상 그렇다. 일상의 삶을 살며 알게 모르게 축적된 환상은 거짓이기 쉬워 힘이 없다. 힘은 진실에서 비롯한다. 그 진실은 늘 현장에 있으니, 여행은 이를 마주하는 가장 유효한 기회며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 현실에 복귀할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505쪽)
건축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설계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수백년 그 자리에 남아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러 오게 만드는 건축물이란 무엇일까.
마지막에 저자는 진리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자기로서는 건축을 수단으로 진리를 찾으려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이 책에서 여러번 한 말을 되새긴다.
현장에 진실이 있다는 말.
앞으로 내 여행의 목적으로 삼기로. 내 여행의 이유로 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