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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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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5개국어로 출간되어 현재까지 800만부 이상 팔린 '아프리카'문학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이 더 많았던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소설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1930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다. 목사 아버지를 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미션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가 들어간 나이지리아의 이바단 대학교도 그당시에는 런던 대학교 소속이었다고 한다. 나이지리아 방송국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아프리카 여러 지역과 미국 등을 여행하게 되었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 그의 첫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발표한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28세때였는데 그때 나이지리아는 2년 뒤 1960년 영국의 식민지령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고 정권 이양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첫 소설 이후로도 출판을 거듭하면서 치누아 아체베는 출판사 편집자, 외교관 활동, 대학 선임연구원등의 활동을 하였고 문예지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2년 그의 나이 42세때 미국 애머스트 대학의 객원교수로 초빙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게 되고 이후 코네티컷 대학 객원 교수, 나이지리아 대학 교수를 거쳐 57세때는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고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나이지리아 최고문화훈장인 국가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2004년 그에게 주어진 나이지리아 연방공화국 지도자 훈장은 나이지리아 정치 상황에 대한 항의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아프리카와 미국, 유럽을 드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2013년 미국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작가가 활동한 시기는 나이지리아가 영국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 설립이라는 당면 과제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가치관 등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시대였고, 아마 그런 일종의 붕괴와 건립을 동시에 목격하면서 그는 아프리카의 이전 역사부터 되돌아보다가 영국 제국주의 체제의 침입이 이루어지던 19세기 말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읽어보면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나 고발성 강한 소설로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치 아프리카에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 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오콩코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 같기도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의 관혼상제를 비롯한 풍습, 설화, 민속, 규범 등을 소개해주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첫 페이지부터 주인공인 오콩코가 얼마나 용맹스런 사람인지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콩코는 아홉 마을과 그 너머까지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건실한 업적을 쌓고 명예를 일궈냈다. 열여덟 젊은 나이에 '고양이' 아말린제를 내던져 마을에 명예를 안겨 줬다. (...) 그가 '고양이'라고 불린 것은 그의 등이 한번도 땅에 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람을 오콩코가 시합에서 내던졌는데, 노인들은 이를 두고 마을의 시조들이 황야에서 일곱 밤낮 동안 귀신과 싸운 사건에 버금가는 격렬한 사건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11쪽)

용맹스러움을 표현하는 비유가 독특하다. 

젊을 때부터 용맹스러웠고 가족 부양에 책임감이 투철했으며 부족의 관습과 전통을 지키는데 충실했던 주인공 오콩코가 어떤 실수를 저지름으로 해서 마을에서 추방당해 일곱해를 지나야 돌아올 수 있게 된다. 그가 다른 마을로 유배가있는 동안 부족에는 서양에서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들어온 백인들에 의해 하나 둘씩 서양 문물이 들어오게 되는데, 평소 부족에서 낮은 대우를 받던 사람들과 여성들이 주로 합류하기 시작한다. 서양 백인들은 종교만 가지고온게 아니라 학교, 법원도 함께 들여와서 부족민들을 교육시키고 백인들 자국의 법에 따라 부족의 일을 재판하기 시작했다. 


"백인이 땅에 대한 우리의 관습을 알기나 하는가?"

"우리말조차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겠나. 그런데도 백인은 우리 관습이 나쁘다고 말하네. 게다가 백인의 종교를 받아들인 우리 형제들마저 우리의 관습이 나쁘다고 말한다네. 우리 형제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는데 어떻게 우리가 싸울 수 있겠는가? 백인은 대단히 영리하네. 종교를 가지고 즐기면서 여기에 머물도록 했네. 이제 그가 우리 형제들을 손에 넣었고, 우리 부족은 더 이상 하나로 뭉쳐 행동하지 않네. 그가 우리를 함께 묶어 두었던 것들에 칼을 꽂으니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네." (207쪽)

7년만에 유배에서 돌아온 오콩코가 부족 친구로부터 마을 상황에 대해 얘기를 듣는 대목이다. 주목할 것은 이 대목만으로도 작가는 부족의 붕괴와 해체는 외부 백인들의 침탈과, 거기에 더해서 부족 토착민들의 동조가 합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짚었다는 것이다.

자기 부족이 백인들의 지배하에 점차 넘어가고 있는 상태를 보자 오콩코는 도저히 두고 볼수 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이었고 지금까지 그의 가치관과 신념과 목표가 뿌리채 뽑히는 것 같았다. 그냥 참고 복종할 오콩코가 아니다. 그는 마침내 결심하고 단행하여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치누아 아체베의 이 소설이 의미있는 것은 오콩코라는 인물의 비극의 원인은 우선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에 가한 폭력과 침탈이었지만, 이런 세력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고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전통사회의 나약함에도 원인이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는데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분석이다. 전통사회의 대처 방식이라는 공식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런 서양의 문명의 혜택을 받고 교육받고 성장한 작가의 입장에서 한쪽으로만 보지 않고 다각적인 입장을 제시하려고 한 노력은 충분히 엿보인다. 그리고 붕괴되고 나면 끝이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세상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그것만이 이제 남은 돌파구이고 생존 통로임을 제시하고자한 노력도 볼 수 있다. 

제목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예이츠 (W.B.Yeats)의 시 "재림"에서 인용하였다고하는데 인용부분은 이 책 맨 앞에 소개되어 있다.

돌고 돌아 더욱 넓은 동심원을 그려 나가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은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에 풀어헤쳐진다.


-  W. B. 예이츠, "재림" -




 


이 책도 미국 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도서중 한권이다.




원서 첫 페이지인데 이미 우리말 책으로 다 읽고 봐서 그런지 아주 못읽을정도로 어려워보이진 않는다.











집에 마침 치누아 아체베의 다른 책이 한권 더 있다. 

<사바나의 개미 언덕>

이왕 시작했으니 이어서 읽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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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6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미언덕이 더 좋았습니다! 정성들인 서평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고요!! ^^

hnine 2020-12-16 22:17   좋아요 2 | URL
Falstaff님 이미 두권 다 읽으셨군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들던데 확실히 <암흑의 핵심>에서의 아프리카와 이 작품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그리는 아프리카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그곳에서 나고 자란 태생이 전하는 역사와 문화는 다르게 전달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요.
책 뒤에 나이지리아 이보족의 언어 단어 풀이가 나오잖아요. 유난히 이응 (ㅇ) 소리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은 것이 재미있지않으시던가요? ^^
<사바나의 개미언덕>도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0-12-17 09:35   좋아요 3 | URL
조지프 콘라드는 1970년대 들어서 아체베에게 코가 깨집니다. 아체베는 <암흑의 핵심>을 꼭 집어 완전히 서양인의 시각으로 쓴 전형적인 식민문학이라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세계문학에서 식민/반反식민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젊은 평론가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통해 신민문학 논의와 사회 각 분야의 반半식민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됩지요. <민족문학...>을 통해 아체베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고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저도 조지프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은 별로 인상깊지 않았습니다. <로드 짐>은 재미는 있었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그의 접근이 불편했고요. 오히려 영국 내의 고정간첩을 그린 <비밀요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혹시 마르케스도 콘라드가 맘에 들지 않아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산적 두령으로 등장시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ㅎㅎㅎ 농담입니다.)
아체베가 외교관을 했다는 건, 나이지리아 내에서 이보족이 독립을 선언하고 만든 비아프라 공화국에서였는데요, 다른 부족들에 의한 이보족 탄압은 아디치에가 쓴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에 잘 묘사되었더라고요.
ㅎㅎㅎ hnine 님께선 축구, 그것도 유럽 축구를 잘 보시지 않으셔서 이응(ㅇ)소리로 시작하는 이름이 낯설게 들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축구 팬들은 음바페, 인자기 등등 꽤 익숙하답니다.
답글을 길게 쓰고 읽어보니까.... 이거 괜히 잘난 척한 거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됩니다. ^^;;

hnine 2020-12-17 15:17   좋아요 2 | URL
저도 마침 <암흑의 핵심>을 얼마전에 읽고난 후라서, 치누아 아체베의 이 소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비교를 해보게 되더라고요.
이보족의 새로운 공화국 (비아프라 공화국)을 위해 외교관으로 일했었다는 것은 리뷰쓰느라고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이 사람 정말 민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정치, 사회, 문화, 문학, 교육 등 다방면으로 활동을 한 것 같아요.
나이지리아 출신으로서 탈식민지 문학으로 지금과 같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까지 유럽, 미국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적지 않았겠지요.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바나의 개미언덕> 읽기 시작했는데 비아프라 공화국 외교관으로 지냈던 경험이 이 소설의 바탕이 되었겠구나 라는 섣부른 짐작을 하던 중입니다.
잘난 척이라니요. 별것 아닌 리뷰를 읽어주신 것만해도 고마운데, 이렇게 시간내서 자세히 답글로 설명까지 해주시니 저는 더욱 감사드릴뿐입니다.
그런데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아직 못읽어서 댓글중 Falstaff님의 농담을 못알아들었어요 흑흑. 이렇게 자극까지 주시고.
아프리카 말에 이응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게 제가 잘못본게 아니군요. 재미있어요. 그 궁금증까지 완벽하게 풀어주셨습니다!

scott 2020-12-21 22:50   좋아요 0 | URL
팔라스타프님 대단!
(✯◡✯)

hnine 2020-12-22 12:04   좋아요 1 | URL
동감이요! ^^

scott 2020-12-2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영어 -번역서 번갈아가며 ~
식민지 지배 때문이지만 영어로 써서 영미권에서 더 폭넓게 읽게 되고 서구에 편협한 시각이 아닌 나이지리아인들에 삶이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지는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은 힘을 잃어,그저 혼돈만이 세상에 풀어헤쳐진다.‘예이츠에 시구절에서 뽑아올린 영토-부족-한남자에 일생이 처절하게 그려졌네요.
사바나 개미 언덕은 번역자가 다르네요 ㅎㅎ

hnine 2020-12-22 12:12   좋아요 1 | URL
예이츠의 시가 참 적절하게 인용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scott님이 한번 더 짚어주시니 더욱 그렇네요. 모든 것을 산산히 부서뜨린 주체가 누구일까요. 그 주체가 누구고 대상이 누구였던간에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인류 전체에 계속되고 있어서 여전히 세상에 풀어헤쳐진 혼돈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프리카 문학이라고 해서 다가가는데 시간이 걸렸는데 의외로 읽는데 그리 낯설고 어렵지 않았어요. 지금 읽고 있는 사바나의 개미언덕도 번역자는 다르지만 어렵지 않게 읽혀요.
(저는 자꾸 치누아 아체베를 치아누 아베체라고 읽는답니다 ㅠㅠ)

Falstaff 2020-12-22 13:43   좋아요 1 | URL
저는 주제 사라마구를 주제 사마라구...라고 읽는답니다. ㅠㅠ

scott 2020-12-22 14:42   좋아요 1 | URL
팔스타프님 전 치누아 아체베를
치누아체베로 검색하고 읽고 쓰고 다녔어용 ㅋㅋㅋㅋㅋ

주제 사라마구 사마라구 ㅋㅋ
입에는 주제 사마라구가 촥!

페크pek0501 2020-12-23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가 모르는 작가네요. 하긴 제가 모르는 작가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만은...ㅋ
민음사 책은 다 사고 싶더라고요. 이상하게 맘이 끌려요.
검색해 보겠습니다.

hnine 2020-12-24 04:35   좋아요 1 | URL
갈수록 아는 저자 아는 분야의 책만 읽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책은 읽되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 (편견)을 확인하고 굳게 하는 결과만 낳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생소한 이름의 책도 집어들어보는데, 이 책과 저자는 저에게만 생소했지 많이 알려진 작가이더라고요. 이 사람의 다른 책도 이어서 지금 읽고 있는데, 이 책도 좋네요.

서니데이 2020-12-2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제 서재에서 오늘부터 소소한 이벤트 합니다.
시간 되실 때 놀러오세요.^^

hnine 2020-12-24 04:35   좋아요 1 | URL
다녀왔어요. good idea~

scott 2020-12-2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미세먼지 최악인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
치누아! 아체베 원서 옆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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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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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rry ..:+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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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한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hnine 2020-12-24 15:13   좋아요 1 | URL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 그려진 카드 받아본 건 올해 처음이네요.
종교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카드를 주고 받고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나누는 풍습이 사라지지 말고 오래 갔으면 좋겠어요.
scott님도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요!!

scott 2021-01-0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치누아 아체베 !
만쉐^0^

hnine 2021-01-11 23:35   좋아요 0 | URL
아이쿠,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01-0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hnine 2021-01-11 23:36   좋아요 1 | URL
주말은 추웠는데 내일부터 조금씩 날씨가 풀린다네요.
봄도 멀지 않았겠지요?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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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끝말 잇기로 다음 책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의 기획이 재미있다. <영화와 시>라는 책이 있고 그 다음이 <시와 산책>, 그 다음이 <산책과 연애> 이런 식이다. 각각 다른 작가에 의해 쓰여져 시리즈로 묶였다. 

한정원.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소개글에 의하자면 시를 쓰고, 영화에 출연, 연출한바 있으며, 현재 열세살된 고양이와 함께 읽고 걷는 날들을 보내며, 수도자가 되진 못했지만 수도자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날들의 기록이다. 

-온 우주보다 더 큰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과일이 둥근 것은

-회색의 힘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등등,

책속의 소제목들만 읽어봐도 마치 싯구 같다. 

'온 우주보다 더 큰'이라는 제목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에서 따온 제목이다. 저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때의 사람의 마음이라고. 사랑을 잃었을때 사람의 마음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어서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고.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18쪽)

인용해놓은 시들도 그렇고 그 시를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도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드나드는 느낌을 준다. 삶에는 환상의 몫이 있고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라는 저자의 설명이다. 


눈 속에서 귀 기울이는 자, 

그 자신 무가 되어 바라본다.

거기 없는 무, 거기 있는 무를.

월러스 스티븐스라는 시인의 싯구인데 마치 동양의 선 사상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언 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운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 책의 느낌이 그런 것 같다. 언 강에서 듣는 겨울 목소리같은 느낌말이다.

산책이 일상이고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한 것 같은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안그래도 그 책을 떠올렸는데 마침내 인용이 되어 나온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이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산책을 사랑했고 산책하던 중 숨을 거둔 로베르트 발저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26쪽)


책 제목과 내용과 저자에 대한 느낌이 책 전반에서 이렇게 시종일관 어울릴 수가 없다.

나도 근래에 숲으로 야산으로 산책을 자주 다니지만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11월의 숲에서 이런 장면을 그려보기도 한다. 아주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모르고 살던 잎과 땅이 만난다. 잎은 땅에게 공중에서 사는 일의 위태로움과 새가 주는 떨림과 가지에서 떨어져 나오는 아픔에 대해 말해준다. 땅은 잎에게 짐승과 인간의 발밑과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피에 대해 말해준다. 소곤소곤한 이야기가 낮과 밤을 이을 동안, 잎은 썩어서 형태를 잃고 땅은 잎을 안고 기다린다. 마침내 하나가 될 때까지. (39쪽)

11을 살며시 눕혀보면, 하늘을 보고 나란히 누운 사람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11월에 읽으니 더 실감난다.

불처럼 화끈한 뜨거움은 없지만 불 대신 빛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 자신을 일컬어 보내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들이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을 하는 저자는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라는 세사르 바예호 시인의 싯구를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 (68쪽)


일부러 작정하고 쓴 글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방에 가면 이런 글이 가득한 노트가 쌓여 있을 것만 같다. 드러내고 싶은, 그러면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한.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지만, 언강에서 겨울의 목소리를 듣듯이 그녀가 어떤 글을 쓰든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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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5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11-24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인 님 덕분에 또 좋은 책을 알게 됩니다.
시와 산책, 이라는 책 제목이 내용을 짐작하게 해 주는 책 같습니다. ^^


hnine 2020-11-25 05:01   좋아요 2 | URL
저도 근래 산책을 자주 하다보니 예전에 읽었던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도 다시 들춰보게 되고 이런 제목의 책을 보면 읽어보고 싶고, 그런 것 같아요.
온 마음을 다해오느라고 늙었구나, 이 구절이 오늘 따라 뭉클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가슴 뭉클할 일이라 여기고 싶어요.
 
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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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앞서 작가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 

조셉 콘래드.1857년 그당시 폴란드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여덟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작가이자 번역가였던 아버지는 제정 러시아 치하에서 폴란드 민족 애국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 유배되어 고생하다 콘래드가 열두살때 세상을 떠났다. 외숙 아래서 자라다가 열일곱때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상선의 선원이 되었는데 밀수, 연애 및 도박 등에 연루, 빚을 지고 권총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영국 상선의 선원이 되어 항해 생활을 하고 스물 아홉에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이 해는 그가 첫 단편을 발표한 때이기도 하다. 서른세살때 아프리카의 콩고 강 항행을 하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1899년 그의 나이 마흔둘에 발표한 <암흑의 핵심> (원제 Heart of darkness) 이다. 항해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던 생활에서 이때부터 1924년 67세의 나이로 영국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

아프리카 항해는 콘래드의 어릴때부터 꿈이었기도 하였고 일자리를 위해서였기도 하다. 선장 자격증까지 있던 그는 30대때 아프리카로 떠났고 단지 몇 개월 머물다 귀국하긴 했지만 거기서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고 성취감보다는 식민주의의 잔학상과 문명과 야만의 현장을 목격하고 왔다고 한다.

그런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200쪽이 채 못되는 분량. 줄거리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선원 말로가 새로운 항해를 앞두고 같이 떠날 세명의 다른 멤버들에게 자기의 예전 체험을 들려주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바다를 좇아다니며 살아온 말로에게 바다는 고향이고 배가 집이었다. 

얼마나 위대한 것들이 저 강의 썰물을 타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땅의 신비를 찾아 떠내려갔던가! ......사나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땅의 신비를 찾아 떠내려갔던가! ......사나이들의 꿈이며, 여러 국가의 씨앗이며, 여러 제국의 싹이며 하는 것들이. (11쪽)

인간의 탐험심과 개척 의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은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별짓고 인간을 문명화 세상에 살게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작품 초반의 배경 묘사에서 이 작품의 취지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말로의 다음 대사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땅도 한때는 이 지구의 어두운 구석 중의 하나였겠지. (11쪽)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겠구나 짐작하며 읽어나갔다.


이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과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 행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행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못된다구. 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그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16쪽)

평생 배를 타온 뱃사람 말로가 하는 대사 맞나? 이 대목에서 나는 이 소설이 단순히 식민주의나 약탈 행위에 대한 고발이 전부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치는 대상은 신이나 종교가 아니라 바로 이념이라고 했고, 그 이념이라는 것의 명분은 인간의 불미스런 행위를 대속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말로의 체험담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어서 말로의 체험담이 시작된다. 

말로는 아프리카 콩고의 어느 회사 소속 배의 선장으로 취직하여 콩고 강 상류의 오지로 가서 거기서 아프리카 교역일을 하고 있는 그 회사 소속 주재원 커츠를 데리고 나오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항해 도중 배가 고장을 일으키기도 하고 원주민들의 공격도 당하면서 고생하며 콩고의 커츠에게까지 가는 동안 말로는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커츠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으며 어떤 인물인지 상상을 하게 되고 관심이 커져간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여 눈으로 목격한 것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고 커츠라는 인물의 정신적 타락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커츠는 본국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유능한 상아 수집상이었지만 그곳 원주민에게는 잔혹하기 그지 없는 원수 같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는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포악해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담론을 벌이기 좋아하고 도덕적 이념을 갖추고 있다고 자처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거처 둘레에 세워진 기둥 머리는 사람의 머리였고, 그의 타락적 행위 중에는 식인 풍습도 포함되어 있는 등, 커츠의 실체는 탐욕을 채우는데 이성을 잃어 자제력도 도덕성도 다 상실한채 타락적 행위의 나락으로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로는 그곳에서 일종의 지옥 체험을 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말로는 커츠를 적대시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자네들이야 믿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그의 이지력 (원문에서는 'intelligence') 은 완벽히 멀쩡했거든. 그 이지력이 놀라울 만큼 치열하게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멀쩡했던 것만은 분명했어. (151쪽)

커츠의 도덕적 타락을 보고 말로는 충격을 받지만 미쳐있는 것은 커츠의 영혼일뿐 이지력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커츠를 거기서 데리고 나올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이해력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한 부분이었다. 전혀 다른 인간형으로 보이는 말로가 커츠를 자기와 동일시함으로써 커츠의 도덕적 결함이 곧 자기 자신의 결함일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말로는 살아있는 커츠를 데리고 나오지는 못하지만 그의 최후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기자신을 재인식하게 된다. 

제목의 '암흑의 핵심'이란 아프리카 착취 현장의 잔혹함일수도 있지만 커츠라는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암흑의 핵심을 제대로 직시하여 말로는 자기 재인식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한가닥 빛을 암흑 속에서, 암흑을 피하지 않고 통과한 결과로써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거 정말 대단한 소설 아닌가?

지옥 체험후 다시 유럽의 백인 사회로 돌아온 말로에게 안전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눈은 예전과 같지 않다. 그들의 자기 인식 수준을 알기 때문이다. 콩고에 가기 전의 말로와 다녀온 후의 말로는 같지 않다. 그가 계속 백인 문명 사회에서 안온한 삶을 살았다면 그가 참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 과정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었을까?

편안하고 배부른 삶, 안전이 보장된 삶을 거부하고 나설수 있는 용기는 또하나의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외부를 향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성찰의 길로 향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서는 모험심과 다른 갈래로 이끌 수 있다. 정신적 탐구인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명쾌한 결론을 내리며 책을 덮지 못했다. 이 책에서 나는 어떤 결론도 찾지 못한다. 그렇게 정신적 탐구의 결과물이 인간에게 이념을 만들고 그것을 신봉하게 한다면 그것은 저 위에 인용한 이념의 명분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생각이 도착한 곳은, 이런 모든 고민과 생각은 결론을 내리기 위함이라기 보다 (결론을 얻는다는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이런 행위 자체가 삶의 과정이고 성장하려는 의지가 발동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며 나의 안온하지 않은 일상을 정당화시켜야하나보다 하는. 분명한 것은 어떤 일, 사람, 행위의 핵심을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말로는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했음에도 커츠의 핵심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커츠의 약혼녀는 커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함에도 사실 그렇지 못했다. 안온하지 않은 삶을 택하는 자 (말로)에게 내리는 댓가인가.








이 소설은 미국 대학 입시를 위해 고등학생들에게 추천되는 필독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집에 원서가 있길래 꺼내보았다.







두께가 별로 안되기에 '어디 한번?' 하고 들춰 보았다.







첫페이지 읽어보니 문장이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기에 바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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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2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만 나오면 기가 죽는 페크...ㅋ
한때 목표가 기차에 앉아 고전 소설을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이었다는... 아무래도 난 힘들 것 같아 그 목표를 큰딸에게 물려 줬다는...
ㅋㅋ

hnine 2020-11-25 12:12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도 원서가 옆에 있으면 번역본을 읽다가 관심가는 대목의 원문을 찾아 들춰보게는 되더군요.
 
고요는 어디 있나요
하명희 지음 / 북치는소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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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편의 짧고 또 긴 소설 모음집이다.

소설 한 편당 길이는 짧으나 동시에 긴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여운이 그만큼 오래 갈 것 같기 때문이다. 

하명희 작가는 2009년에 등단해서 <나무에게서 온 편지>, <불편한 온도>등을 출간한바 있지만 나는 이 책이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이다.


어느 동네에나 한 사람 있을 것 같은 바보 역할 영주 언니를 어린 아이의 눈으로 그린 <겨울 강>,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쪽방촌 청년들의 얘기 <삼월의 눈>, 세월호 이야기 <배가 들어오는 날>, 둥지를 지키려다 둥지를 떨어뜨린 새에 비유될 수 있는 아버지란 존재,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세월, 그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요해져가는 엄마의 기억을 그린 <보리차를 끓이며>,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에서의 일상을 그린 <우체국 가는 길>, 헤퍼보이는 웃음의 이유가 한없이 외롭고 처량한 사람이 있고 그런 이들을 알아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 <청자의 노래>의 두 여자가 그렇다. 두 사람이 가까워져 가는 관계를 마지막 문장으로 이렇게 표현했더라.

차지도 않은 공이 우리 둘 사이에서 출렁였다. (166쪽)

모든 뒷모습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파란 발자국을 남긴다는 <파란 발자국>은 어느 편집 교정자의 일상을 그린 단편이다. 불꽃놀이의 불꽃 터지는 소리이면서 자동차 타이어 터지는 소리 <펑>은 추석에 얽힌 작가 개인의 얘기인듯 읽혔고, 수녀가 된 친구와 그 친구의 초대로 가서 보게 된 소년들의 치유연극 이야기 <십일월의 연극>에는 자기 집에 불을 지른 소년이 나온다.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가족이 있는 슬픔을 안고 있는 엄마와 딸이 함께 제주도 종달리로 여행을 하는 <종달리>. 낯선 곳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그곳이 익숙해져갈 무렵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때로 친구 사이 같은 모녀의 대화로부터 가족을 잃은 가족끼리 서로 힘이 되어주고 위안을 주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집밖으로 떠도는 청소년, 시멘트 벽속으로 숨어들어간 소녀의 이야기 <시멘트 소녀>, 마지막 단편 <달빛을 만진 날>은 치킨 배달 도중 사고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배달소년과 개가 땅바닥에 누운 채로 받는 달빛의 어루만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겨울 강>, <보리차를 끓이며>, <청자의 노래>, <종달리>를 들겠지만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는 근소할 뿐이다. 

사실주의 소설의 느낌으로 보면 공선옥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이 들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일뿐 이 작가의 다른 소설을 더 읽어보고 말하고 싶다. 


새로운 한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동안엔 하나의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고, 내가 아는 세상도 조금씩 넓어가는 느낌으로 책을 덮는다. 그 세상이 늘 더 아름다운 세상은 아닐지라도 기꺼이 계속 넓혀가고 싶다. 

작가는 인간을 보는 눈이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구나 라는 발견이었다. 일상의 아주 작은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는 마침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마무리하는 것은 작가의 내공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할 것 같은 물건, 사람, 일상 등을 주워올려 의미와 가치를 읽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주는 마음과 눈은 모든 작가의, 신이 주신 능력일까. 다른 사람들이 눈길 주지 않는 것을 혼자, 오래 볼수 있는 사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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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1-10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나무에게서 온 편지 읽고 참 좋았는데 이 책도 보관함에 넣어두고 챙겨 읽어야겠네요.

hnine 2020-11-11 13:4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부터 읽었으니 작가의 다른 소설 읽어보려고요. <나무에게서 온 편지>부터 읽어야겠네요.
요즘 좋은 소설을 다시 많이 읽게 되어 신나요.
이 책도 추천드립니다. 더구나 한편 한편의 길이가 길지 않다보니 금방 읽어요.

서니데이 2020-11-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표지의 고래가 위에 있어서 깊은 바다속 같은 느낌이 들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hnine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hnine 2020-11-14 22:05   좋아요 1 | URL
잘 보셨어요. 고래, 등대, 검은 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두개의 눈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진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지요. 작가의 따님이 그려주었대요.
이번주에 제 아이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즐거운 주말 보내고 있는 중이어요. 서니데이님도 평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20-11-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란 단편집을 오디오북으로 반복해 듣곤 해요. 좋거든요.
이 책은 어떨지 기대가 되네요. ^^

hnine 2020-11-25 12:13   좋아요 1 | URL
읽었던 책을 반복해서 읽기가 쉽지 않은데 어떤 책이기에 반복해서 들으실까 저도 관심이 갑니다.
하명희님은 여기 알라딘에서 활동하시던 분이기도 해요.
 
잃어버린 이름에게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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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인물들이라고 할때 그들은 파격적 인물들일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책 속 네 여자는 파격적 성격도 아니고 파격적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범주에서 살아왔고 평범에서 지나치지 않는 미래를 계획했을 인물들이다. 네 여자는 각기 다른 인물들임에도 읽다보면 마치 한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과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휴지를 건네거나 건네받는 행위로써 작가가 이 여자들을 연결시켜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환」근주는 건강검진에서 자궁경부암 추가 검사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는다. 살던 곳을 떠나 지방 신도시로 이사온 후 적응하느라 불안과 초조,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갑자기 무섭게 살이 쪄버린 그녀는 정신과를 찾아가 항우울제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 자궁경부암 가능성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궁경부암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는 길, 잠시 들른 카페에서 카페 직원이 실수로 엎지른 커피 세례를 받은 어떤 중년 여성에게 자기가 가진 티슈 뭉치를 건넨다. 이 중년 여성이 다음에 오는 작품「기만한 날들을 위해」의 선혜이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선혜는 일찍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중년의 여자이다. 연년생 두 아이 키우는 일에 집중하며 보낸 세월이 어느 덧 23년째이다. 남편의 습관적 비정상적 생활을 알고서 속으로 분노가 쌓여가지만 이 분노를 남편을 향해 터뜨리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을 향해 터뜨릴 때가 많아 딸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아들이 입대하고 딸도 대학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후로 선혜는 우울증이 심해지고 감정 기복과 폭식의 문제 등으로 정신과를 찾아가게 되는데 마침내 선혜가 선택한 방법은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약물이 다가 아니었다. 훨씬 더 직격탄을 떠뜨리는 방법을 선택한 그녀가 정신과 진료 차례를 기다리던 어느 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옆자리 여자에게 티슈를 내민다. 그 티슈에는 어느 브런치 카페 로고가 찍혀있다 (앞의 작품「우환」에서 근주가 티슈를 건네주었던 사람이 이 작품의 선혜). 진료를 받고 한여름 뜨거운 햇빛 아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속에는 오늘 또 어떻게 남편과 지치지 않고 싸워야할지 막막한 심정이다.

「미아」소영은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이 있는 중부지방 신도시로 이사해왔지만 낯선 도시에서 고립감과 소외감은 웬만해서 해소되질 않는다. 아직 젊은 나이이지만 깜빡깜빡 잊는 일이 잦아지고 어떤 일에도 의욕이 없으며 남편과 공감대를 찾지도 못한다. 몇달 동안 온종일 집에서 한 일이라곤 과자만 먹으며 4백편의 영화를 본 일. 남편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기로 하는데, 의사의 처방은 어느 한편으론 효과가 있는 듯 하지만 증상이 재발되기도 하며 근원적인 소외감은 여전하다. 

남편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터져버린 눈물이 멈추지 않자 곧바로 다시 정신과를 향한 소영, 새로운 약을 처방받고 진료실을 나와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그것을 본 진료실의 중년 여성이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내 건네준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의 선혜가 티슈를 건네준 사람이 이 작품의 소영). 그리고 다 알겠다는 눈빛을 건넨다. 이후로 소영은 그 중년 여인이 건네준 카페 티슈를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해본다. 그리고 성실하게 약을 먹고 하루 세끼를 챙겨먹고 집안 일을 밀리지 않고 하며 집 안에 식물을 들여 키우기 시작하는 변화를 만들어간다. 

「경년」의 ''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은 둔, 소위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의 여자이다. 중학교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다가 자기의 중학생 아들이 사귀지도 않는 여자애들과 섹스를 일삼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나는 기겁을 한다. 하지만 정작 중학생 아들은 그것이 왜 문제가 되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하는 다른 행위들과 무엇이 다르냐, 오히려 숨기고 하는 짓보다 더 떳떳하지 않느냐며 당당하고, 남편 마저 그게 뭐 그리 호들갑 떨 일이냐, 정상적인 남자로 크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고 아내를 핀잔한다. 암담한 나. 마침 초경을 겪게 된 딸 아이는 초경이 뭔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배워서 다 알고 있지만 막상 닥치니 두렵다면서 엄마를 찾고, 그런 딸을 안고 나는 눈물을 흘린다. 


네 여자의 나이를 이미 지났거나 비슷한 나이인 입장에서, 그들과 똑같은 경험을 하진 않았어도 전혀 남의 이야기라는 느낌 없이 읽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수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이 네 여자는 어쩌면 한 여자일 수도 있다. 또한 나일수도, 작가일수도.

깊은 숨을 쉬게 하는 이야기들. 잃었다는 자각을 했으면 거기가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깊은 숨 쉬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겨우겨우 생각한다. 우환의 근주는 꿋꿋하게 치료를 받으며 다음을 위한 토대를 다져야 하며, 기만한 날들을 위하여의 선혜는 빈둥지 증후군 대신 이 시기야말로 주부로서의 꿀보직 기간이라 여기며 새로운 생활에 눈돌려보길 바라고 미아의 소영은 남편과의 소통 따위로 연연하기 보다 남편 외의 다른 것에 눈길을 돌려보며 보람을 찾는게 더 먼저라는 얘길 해주고 싶고, 경년의 나에게는 이제 시작하는 딸의 앞날을 위해 엄마인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각오를 다졌으면 좋겠다. 

잃었다는 그 지점이 곧 자각의 지점이 되어 더 큰 발걸음, 아니 작은 발걸음이라도 계속할 수 있으려고 우리는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살아온 것이니까.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들고 누군가와 건배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님들? 아니면 작가님?

우리 모두 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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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0-11-0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에 이어 이 책도 사게 될 것 같습니다.
저랑 건배해요! 아직 안 읽었지만.. ㅎㅎㅎ

hnine 2020-11-05 05:5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실린 네 작품 주인공들의 공통적 문제점 하나가 ‘소외감‘이 아닐까 싶어요. 소통의 상대로 가장 먼저 기대하는 남편이 일단 소통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았고, 나의 고유 영역 없이 가정과 자식들 중심으로 살면서 점차 나의 이름은 쓸모 없어져가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 없을거예요. 그래도 작가는 다시 출발하는 여지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맺더라고요. 작가에게 고마웠어요. 잃어버린 내 이름, 내 자아를 찾기 위해 작은 움직임이라도 해보는 주인공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마음은 바로 저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이겠지요?
함께 건배해줄 상대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저랑 건배하자고 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마음 따뜻해지고 용기가 생기는 새벽입니다.

2020-11-06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07 0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