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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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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1,2 권으로 나뉠만한 분량의 책인줄 몰랐다. 

19세기 영국의 대표 작가중 한 사람 찰스 디킨스의 대표 소설중 하나인 올리버 트위스트는 주인공 소년의 이름에서 온 제목으로, 첫 장면은 구빈원에서 다 죽어가는 여자가 아기를 출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자는 출산이 임박한 몸으로 런던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급한대로 구빈원으로 옮겨져 힘들게 출산하고 곧 숨을 거둔다. 아기 올리버 트위스트의 인생은 이렇게 구빈원의 어둡고 누추한 방에서 부모의 따뜻한 손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시작되고 거기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못해 배급받은 죽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전보다 더 열악한 대우를 받게 되고 결국 구빈원장은 장의사에게 올리버를 팔아넘겨버린다. 장의사의 구박과 모욕은 훨씬 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장의사 일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올리버는 마침내 장의사 집에서 뛰쳐나와 런던으로 도망치게 되는데 그것이 올리버로 하여금 범죄 집단의 소굴로 들어가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장물아비 유태인 페이긴, 도둑놈 싸익스, 소매치기 쪼무래기 소년들, 창녀 낸시등과 관여하면서 올리버는 물건을 훔쳐오는 일을 강요받는다. 이들이 찜해놓은 어떤 집에 직접 숨어들어가 강도 짓을 해오도록 종용받던 올리버는 그 집 하인이 쏜 총에 총상을 입고 죽을 고비에 이르렀으나 전화위복으로 자비로운 메일리 부인과 로즈 아가씨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구사일생 살아나고, 양심의 가책을 따른 창녀 낸시의 도움과 다른 선량한 신사와 보호자들의 도움으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만나본적 없는 아버지의 유산까지 찾게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1. 소설이 이야기를 강조한 문학 장르라고 볼때 소설로서의 매력은 더할 나위 없다. 두권 합쳐 팔백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어내려갈수 있다. 

2. 주제가 확실하다. 우리 나라 고전에 권선징악이라는 공통주제가 있어 읽는 동안 안정된 흐름을 탈 수 있는 것 처럼 이 소설은 악의 위협과 꼬임이 도처에 널려 있어서 약자로 하여금 너무나 쉽게 발을 들여놓게 하고 우여곡절을 겪게 하지만 결국 선의 위력은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힘이 있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내용의 주제의 명료성에 더해서 당시 영국 사회를 재조정해가던 구민법등 공리주의에 입각한 개정이 실제 사회에 어떤 모순을 낳았는가 하는 작가의 사회의식도 확실하다.

3. 앞의 두가지 매력은 자칫 식상하고 뻔한 전개에 독자의 호기심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는데 작가는 적절한 수준의 복잡성을 플롯에 더하였고 결말 부분 올리버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은 추리소설 느낌까지 들게 하여 그런 위험을 피해가고 있다. 또한 악의 세계와 실상을 관념적이 아니라 사실적,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본듯이 그리고 있어 독자들은 좀처럼 식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갈 수 있다. 

4. 찰스 디킨스 특유의 풍자와 해학, 비꼬는 식의 문장 표현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음식물이 배 속에서 쓰디쓴 독으로 바뀌고 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심장은 쇳덩어리인 어떤 살찐 철학자님께서 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이 산해진미 요리를 올리버 트위스트가 허겁지겁 집어삼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굶주림의 화신처럼 사납게 달려들어 음식쪼가리를 정신없이 뜯어먹는 올리버의 이 끔찍한 식욕을 그 철학자님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철학자님이 이와 똑같은 종류위 식사를 올리버와 똑같이 맛있게 먹어 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70쪽)


원외 구제의 대원칙은 바로 극빈자들에게 그들이 원치 않는 것만 정확히 골라서 주는 것이라오. 그러면 그들은 진저리가 나서 찾아오지 않는다오. (327쪽)


- 이 소설의 아쉬운 점이라면,

소설로서의 매력만큼 문학성이 돋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찰스 디킨스가 스물 다섯살, 막 전업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초기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의 전개에 어쩔 수 없이 우연이 많이 개입하고 특히 결말 부분에 가서 우연에 의해 해결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찰스 디킨스는 그의 작품 만큼이나 그의 생애와 작품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많은 작가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악과 빈곤의 세계를 그토록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열 세살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과 떨어져 구두약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했을 정도로 어려운 성장 과정을 거쳐온 사람이고 부모와이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나중에 젊은 여배우와의 구설수, 아내와 불화, 별거 등은 작가 개인사적 얘기라고 해두어도 말이다.

살아생전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부한 그는 59세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하였고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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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06 15: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읽을 예정인데요, 한 권짜리로 골랐습니다.
디킨스는 이제 그만 읽겠다, 작정을 했습니다만, 참 그게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hnine 2021-04-06 21:44   좋아요 1 | URL
올리버 트위스트로 검색하니까 어린이용까지 50권이 넘는 책이 나오네요.
저는 이제 디킨스 시작이라서 집에 있는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내친김에 읽을까 하다가 결국 다른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머지 않아 읽게 되겠지요.
어릴 때 고생, 가난, 애정 결핍등이 찰스 디킨스의 경우엔 문학적 결과로 남겨졌으니 다행이지만 올리버 트위스트의 내용에 본인이 어려서 경험한 가난과 악의 세계가 적지 않게 반영되었다고 하니 개인사로 볼때 결과만 보고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찰스 디킨스의 다른 책을 읽어본게 없고 이 책이 처음이지만 Falstaff님은 디킨스의 다른 책을 이미 읽으셨고 이 책을 읽으신다면 올리버 트위스트가 아마 이미 읽으신 작품들에 못미친다고 보실지도 모르겠어요.

stella.K 2021-04-06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는 책으로 읽지 않고 영화로 봤는데
생각 보다 별로다 싶더군요. 특히 알고 봤더니 올리버가 귀족의 아들이었다는 게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건 아마도 그동안 복잡한 플롯의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봐와서
그렇겠단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디킨스의 시절엔 워낙에 살기 팍팍했을테니 이런 이야기로
대리만족 내지는 위로를 받았을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왜 우리 자랄 때도 괜히 나도 어쩌면 어디서 주워 오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하잖아요.
나만 그런가?ㅋㅋㅋ

hnine 2021-04-06 21:5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이거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저는 못봤지만 TV에서도 여러번 방영해준 것 같아요.
빈민구제법이라는게 있을 정도로 가난이 심각하던 시기였고 공리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구제법이 등장한 후라서 찰스 디킨스는 가난이 뭔지 쥐뿔도 모르는 철학자들의 공리주의가 과연 얼마나 가난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가를 풍자와 해학 정도가 아니라 더 신랄한 표현으로 맘껏 비꼬아주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독자들은 후련하기도 하고 재미를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요.
stella님 지적하셨듯이 우연이 너무 많이 작용한다는 것과 선과 악, 귀족과 빈민의 대립 구조로 끌고 가기 위한 약간 억지스러움은 옥의 티였다고 생각이 드네요.

페크pek0501 2021-04-1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2를 읽었죠. 인물마다 캐릭터가 개성 있고 반전이 있어요.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소설인데
이게 이 작가의 강점 같아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읽지 못했지만 작가의 소설 작법을 알 것 같아요.
충실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hnine 2021-04-11 16:03   좋아요 1 | URL
전 오래전에 <위대한 유산>을 영화로 봤거든요. 그런데 글쎄 내용이 생각이 하나도 안나네요. 기네스 팰트로가 나왔다는 것 외에는요 ㅠㅠ
위에 Falstaff님도 말씀하셨듯이 디킨스의 작품은 한권 읽고 말기에는 아쉬운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세익스피어 이후로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올리버 트위스트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소설인 것은 확실합니다.
적어도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읽을 생각이어요.

초딩 2021-05-15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것도 읽고 싶은 책!

hnine 2021-05-15 22:40   좋아요 0 | URL
페이지가 쑥쑥 넘어간다는 것은 보장합니다.
재미있어요.

그레이스 2021-05-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도시이야기>
프랑스혁명과 그것을 바라보는 두개의 시각.
그리고 모비딕과 함께 유명한 첫문장으로 손꼽히는
˝최고의 시간이면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로 시작하는 암시.
좋았어요~♡

hnine 2023-09-07 16:25   좋아요 1 | URL
저는 두도시 이야기 아직 안읽었어요.
최고의 시간이면서 최악의 시간이었다는 첫문장이 어딘지 찰스 디킨스 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Call me Ishmael. 모비딕 첫문장이지요 ^^ 짧은데 강한 인상을 팍 던져주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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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하는 말을 그런 경험 없는 사람의 상식과 선입관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될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의 결말은 보통의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에서 비껴가 있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고,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사람들이 묻는다면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며 맺는 주인공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식과 선입관을 넘어서야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저자는 열네살의 나이에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고 그로부터 삼십년이 넘은 마흔 다섯의 나이에 그 경험을 한권의 책으로 완성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열네살 죄르지는 아빠가 노동 봉사 명령을 받아 돌아올 기약없이 집을 떠난후 새엄마와 둘만 살게 되는데 아빠가 집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죄르지 역시 학교 대신 노동 봉사장으로 일을 하러 다니게 된다.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가던 어느 날 아침 영문도 모르고 버스에서 하차 명령을 받고 어디론가 이송된다. 그렇게 갑자기 소환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롤 끌려갔고, 이어서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렇게 1년 여 시간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 수용소에서 풀려나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작가 임레 케르테스가 13년 걸려 집필하여 1975년 출판되었고 이후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그의 첫 소설이자 자전적 대표작이 된 <운명>은 그 일년 동안의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고서도 자기가 어디에 와 있고 왜 그곳으로 이송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이던 죄르지는 하루만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가기 시작한다.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냄새에 심각하게 주목해야 했다. 딱히 무슨 냄새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달달하고 끈적끈적한 냄새에 우리에게 약간은 익숙한 약품도 섞인 듯 했는데 아무튼 그 냄새 때문에 조금 전에 먹은 빵이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올 것 같아 거북했다. (117쪽)


냄새의 출처는 굴뚝이 높게 솟아있는 가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고 그 굴뚝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냄새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가죽공장이 아니라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라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죄르지처럼 끌려온 사람들 중에 의사가 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린 사람들은 바로 소각처리 되는 곳이다. 

독일로 갈 사람에 지원하여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의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갔고, 거기서 급성결체조직염이라는 지독한 병에 걸려 다시 차이츠 수용소로 옮겨진다. 시키는대로, 주는대로, 죽은듯이 존재해야하는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가며 버텨나갔다고 하지만 존재로서의 생각과 느낌은 사라져간다.

고통을 호소해도 소용없는 상처 치료, 마취없는 수술, 그냥 흘러가듯이 겪어낼 뿐이다. 그러면서 수용소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간다. 그렇게 멈춘듯 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적응이라고 한 상태가 사실은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그날이 끝나갈 무렵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날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날이 마지막 아침일 거라고, 움직일 때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여전히 걷고 움직이고 있었다. (185쪽)


여기서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것은 물론 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는 느낌. 이제는 더이상 희망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다음은 이 아이가 수용소 생활에 적응해간 결과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도저히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많은 노력과 부질없는 시도 끝에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예를 들어 점호를 받다가 피곤해지면 진흙이나 웅덩이가 있는지 보지도 않고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추위나 습기, 바람이나 비도 나를 막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느낌조차 없었다. 배고픔마저 사라져 버렸다.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재미 삼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일할 때도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두들겨 팼지만 그래 봐야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나는 한 대 맞으면 바로 땅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187쪽)


이 아이가 말하는 평화와 안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있다. 아무 느낌없는 상태, 살아있음 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상태.


'시체'라는 표현을 그때까지는 죽은 사람에게만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고 완전히 꺼질 듯 말 듯 깜빡거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이른바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내 몸이 그곳에 있고 나는 내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9쪽)


여기까지는 그냥 읽었다. 정작 눈물이 나오려고 한 것은 몇 페이지 더 넘어가서였다.


어디에선가 쨍그랑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저 아래 쪽에서 솥단지를 지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어깨 위에 막대기를 멨고 막대기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단지가 올려져 막대기와 솥단지의 무게 때문에 끙끙댔다. 공기 중에 멀리 퍼져 있는 떨떠름한 냄새로 보아 순무 수프임에 틀림없었다. 이 광경과 향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미 굳은 가슴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갑자기 강렬한 감정이 일었고 나는 차갑고 축축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신중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때 가슴속에서 한 가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욕망의 비합리성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욕망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은 이 멋진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204쪽)


차라리 죽는게 나을 강제수용소이지만 그곳이라도 좋으니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꾸물거리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아직 붙어있는 목숨은 그래도 더 살아보고 싶다고, 아직은 죽은게 아니라고 마지막 몸부림치듯 일깨워주는 것을 알고 부끄럽고 가슴 아파 눈물을 쏟아내는 죄르지. 그의 눈물에 비할 것이 못되지만 죽으려고 포기하는 사람보다 그런 극단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이 꿈틀대는 것을 볼때 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왜일까. 


2차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죄르지는 살던 곳 부다페스트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보니 살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고 노동봉사로 끌려가다시피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으며 새어머니는 재혼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르지를 알고 있는 동네 노인들은 죄르지에게 끔찍했던 과거는 다 잊으라고, 그래야 네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죄르지는 왜 그래야하냐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여 동네 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길이 아닌 주어진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고 주장했다. (281쪽)


죄르지는 운명이란 따로 정해져있는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운명이라는 말 대신 나 자신의 걸음을 계속 걸어온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정직하게 계속 걸어온 나의 행보, 나 자신,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가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 사람들. 수용소를 겪고 나온 다음의 삶이 원래대로 복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시작이다. 


어찌보면 그곳 (수용소)에서의 삶이 더 순수하고 단순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84쪽)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안에 차오르는 각오가 점점 강해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삶을 지속해 가겠다는 각오였다.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면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불쌍한 어머니. 내 기억에 어머니는 내가 엔지니어나 의사 아니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원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난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285쪽)


저자는 그런 각오로 남은 생을 분투하며 힘겹게 살아왔을지 모르겠다.


이 책의 원제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없음'이라고 해설에서 번역자는 밝히고 있다. 고민하다가 제목을 그냥 '운명'이라고 했노라고. 

원제가 왜 '운명없음'인지 알겠다. 내가 걸어온 길. 살아있다는 느낌조차 없이 살아있는 시체로 존재하고 있던 순간에도 지속해갔던 걸음. 운명대신 그가 믿는 것은 그 경험이다. 운명대신 되돌아볼수 있는 그 경험을 믿는다. 

운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곧 운명이며, 어렵고 힘겨운 것은 과거의 끔찍한 경험에서 벗어나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를 지속해가는 문제이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전까지 헝가리 문학계에서도 문학가로서의 존재감이 미미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고 병마와 싸워야했으며 결혼 생활도 순조롭지 못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그는 2016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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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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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돌 깔린 길을 타박타박 걷는 여공들의 발소리였다. 나는 더 일찍 깨본 적이 없어 못 들어봤지만, 그보다 앞서 공장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침실에는 대개 네 명 정도가 함께 지냈다.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지독히도 불결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방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일반 주택이었던 이 집은, 브루커 부부가 인수하여 천엽 가게 겸 하숙집으로 바꿔놓았다. (11쪽)


우리 나라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없을 대목.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1936년 조지 오웰은 레프트 북 클럽이라는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책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당시 그는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활동을 하고 돌아와 그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파리와 런던에서 자발적 부랑자 생활을 하고, 그 경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으로 펴낸 후였다.     

기꺼이 제의를 받아들인 조지 오웰은 두달동안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등 잉글랜드 북부 탄광지에서 탄광 일에 참여하고 그들의 숙소나 집에 머물면서 취재를 위한 조사 활동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실 위건 (Wigan)은 내륙에 위치하고 있고 그가 머문 곳이 위건 지역만은 아님에도 제목이 위건 부두 (Wigan Pier)인 것은 위건 부두라는 명칭이 위건과 맨체스터 지역의 Leeds and Liverpool Canal 을 둘러싼 지역을 통칭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진짜 석탄 하역 부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었는데 부두가 붕괴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한다. 즉, 위건부두는 사실 위건 지역보다 훨씬 광범위한 북부 탄광 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Wigan Pier is an area around the Leeds and Liverpool Canal in WiganGreater Manchester, England, south-west of the town centre. The name has humorous or ironic connotations since it conjures an image of a seaside pleasure pier, whereas Wigan is in fact an inland and traditionally industrial town. (Wikipedia)    


맨위에 인용한 이 책 첫 문장은 조지 오웰이 묵었던 하숙집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방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을 하숙인 네명이 함께 썼는데, 지독히 불결하고 족제비 우리 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식탁에서 주인과 하숙인 모두 같이 식사를 하는데 식탁 위에 아침에 있던 부스러기나 소스 흘린 것이 저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예사이며 식사로 제공되는 빵에는 늘 집주인 남자의 시커먼 손도장이 찍혀있었다고 했다. 여기 머물면서 조지 오웰은 탄광 막장 일에 참여하는데, 막장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환경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지, 막장 안에서 그리고 막장 밖에서 광부들과 그의 가족들의 삶은 어떤지, 그들의 수입이 어느 정도되고 그 수입이 어떤 종목에 어떻게 지출되는지, 주택 구조, 주택 공급 현황은 어떠한지, 그야말로 기자가 보고서 쓰듯이 자세히, 숫자로 제시된 자료까지 첨부하여 보여주고 있다. 

침대 두개를 세 사람이 쓰는 등, 기본적인 주거 환경이 이루어지지 않고 슬럼가가 형성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지자체 주택을 지어 공급하기도 하였으나 노동자들은 지자체 주택으로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여 들어가게 되어도 곧 다시 슬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예도 나온다. 슬럼의 악취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쁘고 자녀들이 뛰어놀 공간이 있는게 더 낫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공동주택을 불결함과 혼잡함으로부터 유지하기 위한 지자체의 제제와 관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냄새나고 복잡할지언정 슬럼의 온기가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슬럼 거주민들을 번듯한 집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누려온 자유의 마지막 흔적까지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96쪽)


노동 계급 가정의 가장이 실업을 당한 경우, 가족 구조 문제성도 지적되었다.


노동 계급 가정에서 주인은 남자이지 중산층 가정의 경우처럼 여자나 아이가 아니다. 이를테면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는 남자가 가사의 일부를 맡아서 하는 경우를 도무지 볼 수 없다. 이런 관행은 실업 때문에 바뀌는 게 아니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좀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남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둥거려도 여자는 변함없이 바쁘며, 그것도 살림이 더 빠듯해졌으니 더욱 바쁘다. 그런데도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여자들이 반발하는 경우가 없었다. 아마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남자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줌마' 노릇을 한다면 사내다움을 잃는게 아닐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110쪽)


여기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뒤에 가면 경제가 나아진다고 꼭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것은 '학교에서 익힌 편견'이라는 장에서도 이어진다. 영국의 계급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돈이겠지만 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며, 돈으로 이루어진 계층 구조이지만 거기에 그림자 같은 계급 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조지 오웰 자신이 어릴 때 장학금 혜택으로 사립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서 장학금 없이도 입학할 수 있었던 다른 학생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던 경험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직업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5년 동안 인도 제국의 경찰의 신분으로 일하며 몸으로 체득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해 배우는데 더없이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염증을 느꼈고 비판하였으며 그것을 뿌리뽑고 그 자리를 대신해야할 주의와 제도를 찾고 알리기 위해 글로, 행동으로 활동하는, 죽은 지식인이 아닌 산 지식인이 되고자 하였다.


나는 경찰이었으니, 압제의 실행 기구의 일원이었다. 더욱이 경찰에 몸담고 있다 보면 제국의 악행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악행으로 득을 보는 것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형을 찬성하면서도 교수형 집행인 노릇은 하지 않으려 한다. (197쪽)


그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교수형을 언도하는 판사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정부는 악이며, 처벌은 언제나 범죄 자체보다 해로우며, 사람들은 믿고 가만히 내버려둬야만 점잖게 행동한다는 무정부주의 이론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는 그런 사악한 압제의 일원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양심의 가책때문에 속죄를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 스스로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처럼 보였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210쪽)


그런데, 그렇게 그가 영국의 노동 계급에 섞여들어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들 (영국의 노동계급)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 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201쪽)


이 책중 한 챕터는 제목이 아예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이라고 되어 있다.

역시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말한다. 간단히 부랑자가 될 수는 있었지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내용), 건설 인부나 광부 처럼 평범한 노동 계급의 경우에는 훨씬 끼어들기가 어려웠노라고 (「위건부두로 가는 길」 내용). 평범한 노동 계급과 자기 사이의 벽은 돌담이라기 보다 수족관의 판유리 같아서, 없는 듯 대하기는 쉽지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얼마나 예리한가. 

그가 무정부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신봉한 의도는 한가지이다. 제국주의, 파시즘에 대한 진저리치는 혐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국주의나 파시즘은 이미 흘러간 과거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다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제국주의나 파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섞여들어가 있을 수 있다. 세계를 어느 한 국가의 조절과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고도로 기계화 되어 있고 산업화 되어 있어서, 그런 단계가 오히려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저자는 생각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전체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으로부터 인간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 나라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마지막 장에서 기계화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어떻게 잠식해가는지 읽어가는 동안엔 절망스러웠다. 무분별한 기계화를 약물중독에 비유하여, 약이 조절되지 못하고 사용될때 어떤 결말이 올지 아는데, 기계화에 대해서는 그런 조절을 오히려 못하고 무한정 이용만 하려고 하며 발전의 척도로만 보려한다고 하였다. 1936년에 쓰여진 내용이 2021년 지금 이렇게 피부로 와닿을수 있는가.


다음엔 그의 어떤 책을 또 읽어야 할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말고 다른 책이 남아있던가 찾아봐야겠다. 기꺼이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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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2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버지니아 울프 시작했는데 조지 오웰을 다음 작가로 할까싶어요. hnine 님 조지 오웰 리뷰 글들 보다 보니까 자꾸 보고싶어져요. ^^

hnine 2021-03-02 09:02   좋아요 1 | URL
저도 한 작가의 책을 이렇게 연달아 읽어볼때가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지 오웰의 경우엔 집에 책이 있어서 있는 책들 읽기 시작해서 없는 책은 구입해서 찾아 읽게 되었네요.
비판적인 작가가 많지만 조지 오웰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다는게 다른 점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직접 간접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예시랄까, 그런 것이 지금 현대를 본 듯이 쓴 것 같음을 느낄때는 정말 오싹한답니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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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글을 남기기에 조지 오웰은 마흔 일곱 나이로 너무 일찍 죽었지만 소설 여섯편, 르포 세권에 비해 에세이는 여기 저기 수백편을 발표하여 생전에 두권의 에세이집을 출판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남은 글이 사후 지금까지 계속 이런 저런 에세이집으로 묶여나오고 있는 중인데 이 책도 그렇게 탄생한 책이라고 볼수 있다. 조지 오웰의 저작집 「The Collected Essays, Journalism, and Letters of George Orwell」1~4권 (Nonpareil Books) 에서, 번역자 이한중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울림이 클 만한 에세이 29편을 골라 번역하여 그중 에세이 한편의 제목인 'Why I write' 를 책 제목으로 삼아 출간한 책이 이 책 '나는 왜 쓰는가'이다. 

스물 아홉편 중에는 '스파이크',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같은 비교적 짧은 글도 있지만 '민족주의 비망록', '정치와 영어',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같은, 거의 소논문을 방불케하는 글도 들어 있다. 글의 길이가 어떻든, 주제가 무엇이든, 일관된 그의 문체, 자기 경험이 바탕이 되는 글이라는 것은 공통이라고 볼수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글 '코끼리를 쏘다'를 먼저 펴서 읽었다. 어느 날 일흔 다되신 노교수님께서 '내가 조지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를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십대에 읽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나서이다. Shooting an elephant. 말 그대로 코끼리를 향해 총을 쏜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로서 조지 오웰이 식민지 영국 경찰로서 버마에 주둔하던 시절의 경험담이다. 코끼리가 목격되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보다, 주위를 에워싸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는 군중을 의식하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저들이 나를 얕잡아보지 않을까에 근거하여 행동을 결정하고 코끼리에 총을 쏜다. 그것도 한발의 총으로 죽지 않아 여러발을.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되기에 (39쪽)


<교수형> 역시 버마의 경찰 간부로 있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인데 사형수가 교수대로 진행하던 도중 갑자기 형장으로 개 한마리가 뛰어든다. 사형수에게 달려들어 펄쩍 뛰어오르고 얼굴을 핥으려고 하는 개를 간수들은 형 집행을 위해 제지하여야 했다. 형 집행 전후 개의 행동및 상황묘사만 하였을뿐 작가 자신의 어떤 느낌과 감정을 직접 쓰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왜 이 글을 썼는지 읽는 사람은 알 수 있다.

조지 오웰의 글을 읽다보면 자연히 스페인내전에 대해 알게 된다.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원제가 재미있다. Spilling the Spanish Beans. 스페인내전 복습, 총정리용으로 읽기에 좋은 에세이이다. 

인도 아편국 관리였던 아버지때문에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돌이 되기 전에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인. 자기 모국인 영국에 대해 그가 얼만큼 객관적이고 얼만큼 주관적인지 우리야 정확히 알수는 없겠지만 <영국, 당신의 영국>은 다른 나라, 여러 주의, 여러 사상 속에서 영국을 들여다보고 쓴 글이다. 

영국에 대한 일반화 중에 거의 모든 평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 몇 가지를 들어보고자 한다.

하나, 영국인들이 예술적인 재능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영국인은 독일인이나 이탈리아인 처럼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회화나 조각은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영국에서 번성해본 적이 없다. 또 하나는 유럽을 기준으로 할 때 영국인들이 별로 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영국인은 추상적인 사고에 공포를 느끼며, 철학이나 체계적인 세계관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91쪽)

시대에 뒤떨어진 자질구레한 모든 것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태도, 분석을 허용치 않는 철자법 등에서 영국인들이 능률을 얼마나 중시하지 않는지 알수 있으며, 생각 없이 행동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영국인의 위선은 세계적으로 손꼽힌다고 까지 했다. 여기서도 유럽과 영국을 따로 분류해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영국이 지리적으로는 유럽에 속해있지만 유럽과 영국은 다르다는 인식은 Brexit이전에 이미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읽다보면 조지 오웰은 문학가라기 보다 기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같은 면모가 다분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어 나오는 <민족주의 비망록 (Notes on Nationalism)>에서는 애국주의 (Patriotism)와 민족주의 (Nationalism)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민족주의에 공통되는 심리적 습성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하여 강박증, 불안정,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 등을 들었다. 영국혐오증, 반유대주의, 트로츠키주의를 부정적 민족주의라고 따로 분류함으로써 이들 역시 민족주의의 한 계류로 본 것이 눈에 띈다. 조지 오웰은 한때 여기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었던가. 더 눈에 들어온 한 문장은 여러 종류의 민족주의가 심지어 서로 상쇄되는 종류들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도 있다 (203쪽)는 것이었다. 조지 오웰 자신도 비껴갈 수 없을 것이고, 어떤 한 주의로 사람을 분류한다는 것은 임시적이라면 모를까 지속성은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에세이는, 비과학자가 과학에 대해 쓴 글로 드물게 공감할 수 있는 글이었는데, 과학이 가진 객관성이 양면성을 가질 수 있음을 다른 누구보다 과학하는 사람 자신이 알아야 하고, 과학은 한 덩어리의 지식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개념이라는데 동의한다. 

<행락지 (Pleasure Spots)>라는 에세이는 2021년을 사는 이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인간의 한 사람으로써 얼마나 절실하게 와닿던지.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246쪽)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47쪽)


'정치'는 그의 글 여기저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중 하나일텐데 <나는 왜 쓰는가>에서 그는 '정치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내리기를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라고 하였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라면서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들어 정치 대 문학에 대한 생각을 쓴 글은 그야말로 한편의 논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세부적, 분석적이며 읽는데 집중을 요했다. 그의 예언자적 기질이 특히 두드러진, 조지 오웰의 대표 에세이 중 하나로 꼽아도 좋을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스위프트를 일컫기를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는데 그걸 알아본 조지 오웰 역시 그런 능력자가 아니었을까.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라는 글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읽는 내내 반감과 따분함을 불러일으켰다는 톨스토이의 셰익스피어 공격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톨스토이는 리어왕을 예시로 셰익스피어의 저급하고 비도덕적인 면을 지적하며,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선 인류의 삶에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야 하고, 저자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바를 표현해야 하며 바라는 효과를 낼 만한 기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셰익스피어는 세계관이 저급하고, 솜씨가 깔끔하지 못하며 한순간도 진지할 줄을 모르니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런 톨스토이 글에 대해 조지 오웰은 동조 혹은 반발이라기 보다, 그런 평가를 내리게 된 톨스토이의 인생, 인생관, 문학에 대해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를 뜯어본 이상으로 파고 들어가서 톨스토이는 왜 맥베스가 아닌 리어왕을 들어서 셰익스피어를 평하려고 했는가에 이르기까지 추정을 하고 있는데, 조지 오웰이 어느 주제에 대해 글을 쓸때 어떤 정도의 지식과 사고를 갖추고 쓰는지 읽으면서 오싹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의 얘기를 쓴 <정말, 정말 좋았지> 제목은 반어적인 제목이다. 어릴 때 자기는 약하고 못생기고 겁 많고 냄새나고 그럴싸한 데라곤 없는 존재였지만 그럴지라도 살고 싶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생존본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내가 근년에는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했다는 점만 밝히기로 하자. (299쪽)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밑줄을 그렇게 많이 치며 읽었는데, 남는 문장이 어디 이것 뿐이겠는가만은,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다. 기발하게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확하게 쓰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각 페이지에 실린 주석, 책 뒤의 작가 연보, 역자 후기까지 빠짐없이 읽은 것은 나로서는 예외적인 일인데, 읽어서 확실히 도움이 되도록 번역자가 기울인 성실성이 느껴졌고 실제로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1984>가 시작이었다. <1984>를 읽지 않았더라면 <동물농장>을 읽지 않았을것이고, <동물농장>을 읽고 나니 집에 있는 그의 다른 책 <카탈로니아 찬가>까지 읽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니 작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소설이 아닌 그의 에세이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왜 쓰는가>를 읽게되었다.

간결하고 분석적이고 예리한 문장에 더해서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어떤 예언자적 기질은 조지 오웰 글의 매력일 것이다. 그런 매력에 확실하게 끌려가고 있는 중, 이제 그의 또다른 작품 「위건부두로 가는 길」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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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장 마다 통찰력이 번뜻이네요.
오웰 디에센셜 장바구니에 넣어요.
에이치 나인 리뷰도 오웰 처럼 ‘간결하고 분석적이고 예리한 리뷰‘

hnine 2021-02-17 12:54   좋아요 1 | URL
디에센셜 조지 오웰 알라딘엔 품절이던데, 그야말로 에센셜이라 할 만한 작품 구성이네요.
수백편의 에세이를 다 읽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이나 르포는 몇편 안되니 다 찾아읽어볼만 한것 같아서 지금 위건부두로 가는 길 읽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명문 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스쿨에서의 혹독한 경험 이후로 너무 일찍 계급과 가난과 차별에 눈이 떳을까요. 대학 교육도 받지 않았고 대신 버마로, 스페인으로,모로코로, 영국의 변두리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체험한 바를 글로 끊임없이 써냈지요. 말도 글도,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란 참 부러운 능력이예요.
저의 리뷰는 감히 근접도 못하지만 노력은 하고자합니다. 그렇게 용기 북돋아주시니 감사합니다~

scott 2021-02-17 13:23   좋아요 0 | URL
교보+민음사 합작 한정판 출간이라서 알라딘에서는 팔지 않아요.
수록된 작품들이
1984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

정치와 영어

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
이렇게 수록되었는데 몇개는 새로 번역하고 소설+에세이 묶음 시리즈 1권이 조지 오웰 ^.^

hnine 2021-02-17 14:1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수록된 작품들을 보니 에세이 중에선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는 위의책 <나는 왜 쓰는가>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작품이네요.

바람돌이 2021-02-1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조지오웰의 책들 리뷰가 많이 올라오는데 다들 참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네요. 집에 있는 책부터 봐야하겠어요. 집에 있는 책은 1984 ^^

hnine 2021-02-17 13:03   좋아요 1 | URL
저도 1984로 시작했어요. 그 전엔 별로 관심없던 작가였고 심지어 미국 작가인줄로 알고 있었답니다.
아이 학교에서 필독서 리스트에 있었던가 그랬는데 아이가 제대로 안읽는 것 같기에 제가 한번 읽어보자고 읽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기대보다 훨씬 좋은거예요. 두께도 꽤 되는데 말이죠.
동물농장 읽기 까지 시간이 걸린 이유는 제가 동물들이 등장하는 얘기에 별로 끌리지 않아서인데 (동물은 좋은데 동물을 의인화한 얘기들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두께가 얇아서인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게 후딱 읽혔고 1984 만큼 깊은 인상을 받고서 조지 오웰에 대한 관심이 급등했어요.
호불호가 갈릴수 있는 작가이지만, 이 사람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꼭 한번 읽어볼만하다고 생각해요.
바람돌이님께도 추천드립니다.

scott 2021-03-0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나인님의 다음편 오웰리뷰도 다음달 당선작으로 예약 ㅋㅋ

주말에 볼더 먹을 간식 놓고 가여
  ∧_∧
 (´・ω・)
.c(,_uu 🍖

hnine 2021-03-08 04:26   좋아요 1 | URL
오웰 덕분이지요 ^^
감사합니다.
볼더가 좋아하는 간식이네요. scott님도 강아지 좋아하시나봐요.
 
기꺼이 오늘을 살다 -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
가토 다이조 지음, 이영미 옮김 / 나무생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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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를 모르니 원제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영어로 되어 있는 제목에 "40 HINTO"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40 hint 라는 말이 원제에 포함되나본데 실제 이 책은 40가지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 아래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학'이라는 설명으로 이 책 내용은 충분히 짐작이 될 것이다. 

저자 가토 다이조는 1938년 도쿄 태생으로 도쿄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와세다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심리, 정신건강 관련 저서를 여러 권 낸바 있다. 

삶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삶이란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의 힘듦도 인정하면서 회피하기 보다 당당히 맞서려는 노력이 우리의 삶을 자신감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 요점이다. 시지프스가 매일 밀어올리는 바위도 알고 보면 삶의 무게, 인생의 짐을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짐이라는 표현대신 의무, 책임, 도전이라는 말로 바꿔 생각해보라는 권유와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짐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태도, 회피하고 외면하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대신 당당히 짊어지겠다는 태도로 살아갈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행복이고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마지못해'와 '기꺼이'는 같지 않다. 어찌어지해서 결과물은 같게 나올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인생은 결과물로 판가름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거쳐온 과정에서 이미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제목 속의 '기꺼이'는 어쩌면 이 책의 키워드가 될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못해가 기꺼이가 되기 위해서, 마지 못해 사는 삶이 아니라 기꺼이 사는 삶이 되기 위하여 이런 책도 읽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번아웃 증후군 (Burnout syndrome)이라고 부르는 '탈진증후군'은 허버트 프로이덴베르거 (Herbert Freudenberger) 에 의하면 자기 자신보다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일하고는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바닥까지 탈진한 후 남을 원망하며 좌절하는 증상이다. 번아웃되기까지 온 힘을 쏟아붓는 대상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이라는 것이다. 자기애의 부족이고 나약함의 결과이며,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심리이고 집착의 결과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 대상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한다는 것은 능동적이고 자기 감정의 작용이지만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할수 없을때 다른 누군가의 인정으로 자기애를 메꿔보려는 심리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나를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 성공 여부를 결정짓겠다는 것이다. 비참함으로 끝나는 인생이 대부분이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베란 울프의 "고민은 어제 생긴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저자가 바꿔 표현한 "불행은 난데없이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말도 새겨들을만하다. 

자기애와 관련된 내용은 계속 나오는데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무리해서 일하고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맺고 끊음없이, 부탁을 받으면 무리해서라도 해내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가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나의 모습에 부합하기 위한 것인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이면에는 열등감이라는 심리가 작용할 수 있음은 미처 생각못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남이 뭔가를 부탁하면 기분이 좋다. 자기가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일을 하고, 결국 건강을 해친다. 건강을 해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원인이 자기 열등감에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 한, 평생 동안 무리해서 일을 하고 결국 삶이 허망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89쪽)

한순간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상대에게 낮게 평가받는게 두려워서, 무리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불행의 원인은 두가지, 외로움과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자기도 모르게 이것에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기꺼이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문제나 나의 짐을 피하지 말고, 현재의 편함은 미래의 비극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짐을 내가 지고 갈 각오로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갈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때는 나오지 않는 에너지가 나온다. 힘이 들면서 동시에 힘이 만들어진다. 

수동적인 성격, 수동적인 성향은 100% 타고 나는 것일까?

수동적인 태도는 애정 결핍증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수동적이지 않다. 수동적인 태도와 자기 비하의 감각은 서로 떼어놓기 힘들 만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82쪽)

'시켜서 했다'가 아니라 '스스로 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내가 짐이라고 여기며 내 인생을 불행의 삶이라고 스스로 단정시키지 않기 위해, 자각과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런 일을 당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그만한 일도 견뎌냈다"라고 말하면 원망이 아니라 자신감이 솟아난다.

당신의 경험을 잘못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경험을 '손해 봤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살아가는 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자기가 들인 노력은 자신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230쪽)

편안한 인생은 애당초 없다는 전제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러니 그 짐을 당당하게 내것화하라는 말이 설득력있다.

내용을 다 읽지 않더라도 40개 소제목속에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분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전자책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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