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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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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겠지만 프루스트에 관한 책은 아니다.
신경과학 실험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가, 예술 각 분야에 이름난 여덟 사람을 들어, 그들의 작업이 어떻게 과학과 접목될 수 있는지 연관성을 탐구, 발견해낸 결과를 가지고 쓴 책이다. 월트 휘트먼, 영국의 여성 소설가 조지 엘리엇, 프랑스의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저자는 실제로 요리사로 일한 경험도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폴 세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버지니아 울프 등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그 여덟 명의 예술가이다.
월트 휘트먼은 시집 <풀잎>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시인.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 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육체와 영혼, 범속함과 심오함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 보고, 영혼 못지 않게 '몸'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했다. 인간의 느낌이라는 것은 뇌와 그 외의 몸의 다른 부위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란 것도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과학적인 시인'이 되고 싶어했던 조지 엘리엇은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지지했던 사람으로서, 진화론의 중심 개념중 하나인 유전적 변이, 무작위성을 들어, 이 세상은 정해진 답이 없고 우리 자신이 풀어가야할 문제라고 보았다. 우리의 상황 자체가 우리가 만들어가야할 길의 원재료를 제공하는 것이고, 마음이 자신을 바꾸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유의 원천이라는 그녀의 믿음에 공감이 간다.
맛의 정수를 찾고자 평생 노력했던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미각을 비롯한 우리의 감각은 경험과 기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오류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현재의 느낌과 판단은 현재 있는 그대로 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경험) 미래의 (기대감)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되겠다. 이 경험이라는 것을 과학이 풀 수 있던가.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개인의 뇌는 개개인의 욕망에 따라 조율되어 있는 것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내게는 무척 난해했던, 그러나 20세기 문학의 하나의 큰 표석이 된 소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의식의 흐름' 이라는 그의 소설 기법에서도 알수 있듯이 기억, 의식, 직관 등을 중요시했던 사람이다. 기계론적 우주관을 맹렬히 비판했던 베르그 송 철학을 내면화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사람이었던 그는 현실이란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가장 잘 이해되는 것이며 그 진실은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포착된다고 하였다. 마들렌과 차를 먹는 동안 느끼는 감각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직관적인 기억, 새로 일깨워지는 감각, 진실은 찻잔이 아닌 내 안에 있었다고 말하는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마들렌 일화도 함께 실려 있다. 기억은 뇌 속에 그냥 저장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회상하기 시작하는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창조되기도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음에도 '눈으로는 충분치 않다. 생각의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폴 세잔. 우리의 인상은 해석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즉 본다는 것보이는 것을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 회화는 더 이상 '카메라 옵스쿠라 (어둠 상자)'의 역할이 아니라, 즉 눈에 보이는 대상을 성실하게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세잔은 세상의 형태들이 무형의 혼잡으로 빠져 들어갈 때까지 오래오래 응시하고 해체하고 다시 드러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 자신의 주관과 소신에 의해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을 구분짓는 것 중의 하나 아닐까. 추상화의 발판을 마련한 세잔. 이후 회화나 조각에 그의 이런 생각이 미칠 막대한 영향을 그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실제로 몇몇 신경과학자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그것이 뇌를 거쳐 비어 있는 망막에 상으로 맺혀 어떤 형상으로 인식되기 까지의 과정은, 세잔이 대상을 응시하고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를 의식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안과 만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작곡하고 지휘했던 음악가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화음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온갖 불협화음의 충돌로 이루어진 곡들을 작곡하고, 새로 태어나는 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서 단순히 새로운 음악적 패턴을 창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이전 패턴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음악을 통해 역설적인 철학을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고, 청중이 무엇을 예견할지 예견했고, 그 예견한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새로움의 불확실성을 싫어하게끔 설게되어 있는 우리 인간의 뇌, 신경학적 덫이라고도 표현되는 이러한 본성에 그는 아무도 이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경험을 창조하려고 몸부림친 것이다. 책에 언급된, 뇌를 바꾸는 예술의 소리라는 표현은 그의 음악을, 그의 생각을 참 간단하지만 잘 표현한 말인것 같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인데, 사실 작품을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녀 역시 기존의 단어들의 조합 방식을 파괴하고, 문법을 파괴하여 어떤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어떤 클리셰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던  것 뿐 아니라 완전히 무의미한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읽는 사람에게 난해함을 던져줄 뿐이었음에도 그러한 작업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당시 통용되던 스키너의 행동주의에 반발하여, 우리의 언어 구조는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행동주의자들의 눈에는 앞뒤 안맞고우스꽝스러운 문장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에 대한 선천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싶었던, 자기만의 방에 우울하게 갖히기도 했던 그녀는 분열된 신경들의 교란 속에 정신 이상으로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오히려 그 덕분에 마음에 대해 알게 된 것들, 그 변덕스러움과 다중성에 대해 그녀의 작품 속에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했으며, 마음이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야릇한 조합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우리는 왜 분열되는가' 가 아니라 오히려 '왜 항상 분열되지 않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마음 속에 지녔던 것 같다. 마음은 단절된 여러개의 조각들의 합이고, 분열된 것이며, 산만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산만한 존재일 수 밖에 없고, 그 직접적인 증거는 뇌의 해부학상 구조를 들 수 있는데, 대뇌 피질이 하나의 두개골 속에 들어 있지만 좌반구와 우반구라는 두 개의 서로 일치하지 않는 덩어리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물이나 대상을을 보고서 우리 뇌에서 인식하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며 두 가지 상반된 것을 동시에 느끼고 이것이 곧 우리의 느낌이라고. 즉 모든 두뇌에는 적어도 두 가지 상반된 마음들이 북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울프의  에세이 <길거리 쏘다니기> 중의 한 구절이다; '나는 여기 있나? 저기 있나? 아니면 진정한 자아는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양하고 방황하는 것이라, 우리가 그 소망들을 마음껏 달려 나가게 해둘 때에만 진실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알고 싶었던 '자아'란 결국 환영이라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견해였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불명료한 전체이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며, 두뇌가 창조하는 허구일 뿐이라고. 이 결론에 도달하기 까지의 그녀의 고뇌가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혼자 짐작이나 하고 있으려니, 진실은 허구로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허무함 한 자락이 밀려 온다.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책 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과학이 우리를 해체한다면, 예술은 우리를 다시 통합시켜 준다고. 과학과 예술은 이렇게 서로 합의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학의 환원주의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았고, 궁금증에서 얼마나 헤어날 수 있었던가.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내게 되지 않았던가? 경험은 과학적 실험을 능가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고 찾고자 하는 자아는 객관적 사실로 취급될 수 없는 허구인 것을.
예술과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둘은 어떻게 서로 인간 탐구에 공헌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두 문화의 상호 몰이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자 제3의 문화라는 것이 조성되어 일반 대중과 직접 의사 소통하는 과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리차드 도킨스에서 브라이언 그린, E.O. 윌슨 등이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수 있다. 과연 이 제3의 문화가 예술과 과학이라는 두 문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충분히 견제해 줄수 있을 것인가. 제3의 문화란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차원들의 공존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라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고 공감하는 바이다. 예술은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시란 번역을 하면 상실되는 무엇이다. 신경과학은 뇌를 묘사하는데 유용하고, 예술은 우리의 실제 경험을 묘사하는데 유용하다. 현실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이 있으며 그 각각이 진리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 하는 제4의 문화의 탄생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과학이 밝혀 놓은)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우선 인문학은 과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예술가들은 과학의 부름에 귀 기울여야 하며, 과학의 현실 묘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동시에 과학은 자신의 진리가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떤 지식도 앎에 대한 독점권을 갖지 않는다면서.
이제 예술, 과학, 인문학, 그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개척되고 있고, 기존의 없던 새로운 학문의 길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임을 실감하겠다.

별점을 세개만 준것은 역시 번역의 매끄럽지 못함과, 여덟 편의 예가 주제와 꼭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간간히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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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포토 2008-08-1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학이 우리를 해체한다면, 예술은 우리를 다시 통합시켜 준다"
---> 아주 멋진 말씀!

hnine 2008-08-14 20:37   좋아요 0 | URL
읽기에 만만치 않았답니다 ^^
 
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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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즉 신라의 옛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몇몇 신라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옛 신라의 생활상을 보여주고자 한 연작 소설이다.
법흥왕의 부인이자 지증왕의 모친 되는 '연제태후'의 이야기가 그 첫번째. 키가 칠척 오촌이나 된다고 기록에 전해지는데. 과장이 섞였음직한 이 큰 체구는 신라 성골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사실, 첫번 이야기부터 당황스럽다. 이차돈의 순교가 소개되는 이야기라고는 하나, 정작 이차돈이 중국에서 들어온 비토속적 종교, 즉 불교를 신라에 전파하고자 순교를 하게 되는 그 장면보다 더 읽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그 적나라한 성(性)문화를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과연 이게 사실일까.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황제와 황후가 제단에 올라가 교합제를 드린다니. 그것도 신하들과 태자까지도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이다. 감히 요즘과 비교가 안되는 사회라고 할만하지 않은가?
화랑도의 이야기를 그린 두번째 '준랑의 혼인'에는 동성애적인 묘사도 서슴치 않는다. 혼사를 앞둔 어린 화랑 준랑과 이미 혼인을 하였고 나이가 지긋한 선배 화랑격인 영랑 사이의, 선배와 후배로서의 존경과 보살핌 차원을 넘어선 애정 행각 (이라고 해야하나?), 혼인날을 하루 앞두고 신부측 친구들끼리 나누는 술과 노골적인 성 묘사가 어우러진 지금의 파티 장면을 글로 읽으며 상상하기란 참 낯 설수 밖에 없었다. 글 중의 노래 가사에 '꽃사내'란 말이 나온다. 요즘말 '꽃미남'은 원조가 신라시대였나? 노래 가사중 '지궁지궁 하여이다, 애공애공 하여이다' 앞 뒷 가사로 미루어 뜻이 짐작이 되는 말.
선덕여왕을 남몰래 사모하여 한번이라도 가까이서 뵙는게 소원이던 미천한 신분의 지귀,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태종 무열왕의 말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세번째 이야기 '변신'은 무열왕의 차남 김 인문이 작중 화자이다. 과거의 위용과 업적이 그 사람의 말년의 모습과 꼭 일치하란 법이 없구나. 선덕여왕이란 인물은 그리도 비범한 인물이었던가 새삼 관심이 생기기도 한다. 신라 온 국민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던 이유가 아름다워서, 신통해서, 장대해서, 무서워서, 그 어떤 이유로도 딱 들어맞지 않았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이유가 되기도 했다는 말 아닌가?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그녀는 비천한 용모와 신분의 지귀의 뜻을 내치지 아니하고 위로해주는 선처를 베풀어 불귀신이 된 지귀의 영혼을 달래준다.
'혜성가'는 옛부터 상서롭지 못한 별로 알려진 혜성의 출현과 왜군의 침입을 잠재우려 실처랑, 거열랑, 보동랑의 세 화랑이 누이 노리혜와 더불어 신궁을 방문하여 신궁 제주의 제안에 따라 하늘에 제를 올리는데, 이것이 또 교합제라. 만인이 지켜보며 예를 올리는 가운데 제단 위에서 보동랑과 노리혜 사이의 교합제가 거행된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이런 교합제의 풍습을 들어 신라를 상스러운 국가라 손가락질했다는데, 실제로 글 중에 신라 토속 신앙과 중국에서 갓 들어온 불교와의 대립이 여기 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옛부터 우리 민족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위기감과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나보다.
삼국 통일의 일등 공신 김유신과 뜻을 이루지 못한 천관녀의 혼을 달래주기 위한 '천관사'의 설립 과정을 그린 다섯번째 이야기 '천관사'는 원효대사의 파격적인 설교 장면이 나오고, 일생의 어떤 큰 일을 경험하면서 한 인간의 성격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위의 제목을 '선데이 서라벌'로 붙인 것은, 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작가가 후기에서 그렇게 부른 것을 인용했을 따름이다. 신라 사람들의 토속성이란, 그리고 주체성이란 이렇게 표현 되는 것이었던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작가는 신라 사람들을 희화화 하거나 과장하려는 의도 없이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는 심정으로 소설화 헀다고 한다.
지금 우리들의 삶보다 훨씬 화끈하고 흐드러지고 숨김없었던 신라 사람들. 그것이 인간 본성이었다면야.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까. 지금의 우리들은 얼마나 인간 본성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성인용' 우리의 고전 책 한권을 읽은 느낌인데, 도대체 이 (젊은)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능청스러울만치 자연스럽게 우리 옛 언어를 이리 엮고 저리 엮어 소설로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여전히 나의 관심 대상 리스트에 올라 있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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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의 인턴십 - 프랑스의 자유학기제를 다룬 도서 반올림 12
마리 오드 뮈라이유 지음, 김주열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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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우, 대학 재학 중 2학년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적성과 기호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1년 동안 일단 학교를 떠나 현장 경험을 쌓은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남은 1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하는 제도가 있다. 일종의 인턴쉽 기간인데, 이런 기간을 둠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졸업하기 전, 자신에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후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의무 조항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공과 관련하여 회사나 기업체, 연구소 등에 파견되어 실제 그곳 직원들처럼 일하고, 낮은 급료나마 보수도 받게 되는 이 제도를 옆에서 보고 참 부러워했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3학년인 열 네살 때 학생들로 하여금 학기중 일주일을 학교에 등교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가서 일을 해보게 하는 제도가 있는 모양인데, 주인공인 루이라는 남학생이 이 기간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루이는, 외과 의사인 아빠, 주부인 엄마, 언제나 오빠 편인 깜찍한 여동생과 함께 사는, 특별히 잘 하는 것 없고, 학교 다니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은 열 네살의 남자 아이이다. 인턴쉽을 어디서 하나 생각하던 중에 우연히 할머니의 소개로 할머니가 다니시는 미용실에서 일을 하게 되고, 뜻하지 않게 미용 일이야 말로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계속 하고 싶은 일임을 알게 된다. 가족의 반대, 특히 아빠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지만, 그에 쉽게 무릎 꿇지 않고 은근하고 끈기 있게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가는 루이의 뚝심있는 모습에, 읽는 동안 흐뭇함을 느낌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보기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 사람이 속한 일터에게도 축복임을 이 책에서도 보여준다. 그리 나서는 성격이 아님에도 루이가 미용실에 있는 동안은 미용실 전체가 활기있고 즐거운 분위기였음은 루이가 미용실을 떠나고 없는 동안 드러난다. 결국 아들의 꿈을 인정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루이의 아빠,  뒤늦게 가정 주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일을 갖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 엄마. 어쩌면 꿈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찾고자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적이 우수하다 싶은 학생들은 모두 외고 아니면 과학고를 목표로 하는 우리 나라의 이 획일화되고 천편 일률적인 길찾기, 내가 선택하기 전에 부모나 선생님, 학교, 주변 상황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그들의 진로는, 언제나 진정한 의미의 꿈 찾기, 후회 없을 자기의 길 찾기로 바뀔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을 읽는 우리 나라의 독자라면 읽는 동안 다 한번씩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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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 죽음을 부르는 만찬
윌리엄 레이몽 지음, 이희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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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윌리엄 레이몽은 프랑스의 유명 기자이다.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이미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서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비만'을 일종의 유행병이라고 판단, 그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비만 문제를 파헤쳐 보고 그 심각성을 알리고자 이 책의 저술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갈수록 그가 발견한 사실은 비만의 심각성 자체보다, 그 뒤에 감춰진 복합적인 사회 현상임이 드러나, 비만은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다뤄야 할 생활 습관병이 아니라, 썩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정치, 상업 주의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드러나는 비만 인구의 증가는 빙산의 일각이었고, 감춰진 빙산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비만의 심각성이 알려지면서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탓인지, 몇 년전에 비해 1인당 섭취하는 열량은 크게 늘지 않았음에도 비만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만을 경고하는 한 편에서 여전히 눈 감고 비만을 부추키는 사회가 있다. 비만과 관련된 시장 규모는 어마어마하여, 비만 관련 의료 사업 뿐 아니라, 각종 미용 성형, 비만자를 위한 새로운 잡화 개발과 판매 등, 미국에서 매년 비만 관련 질환에 사용되는 돈만 해도 450억달러라고 한다. 물론 이 돈은 국민들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이다. 총기 사고로 죽는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매년 비만에서 비롯된 질병으로 죽어감에도 이 문제에 관해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한 국가의 속셈은 무엇인가. 비만과 관련된 사업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제약회사들이 선거때마다 정치인들에게 펑펑 쏟아붓는 기부금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제약회사의 가장 큰 재능은 '연구개발'이 아니라 '마케팅'임을.

실제로 저자는 미국을 '비만을 부추키는 사회' 라고 이름 붙이고, 미국의 식품산업을 낱낱이 파헤쳐 들어간다. 결론적으로 현재 미국의 식품 산업은 거대기업과 정치계가 좇는 어마어마한 돈벌이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고 간파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1970년대, 미국의 곡물 시장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닉슨 행정부는 농민들의 불만을 가라 앉히기 위해 소련과의 비밀 협정으로 막대한 양의 밀을 수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번엔 미국의 밀 가격이 급등하게 되었고, 따라서 미국의 식료품 가격과 물가가 상승하게 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미국내 식품 생산을 소수 거대 농업 위주로 중앙 집권화 한 것이다. 이것은 소수 거대 식품 회사에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을 집중적으로 지급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미극의 식료품 시장은 훨씬 더 수월하게 국가의 조절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식품가는 당초 목적대로 저렴해졌고, 남아도는 수백만의 저렴한 곡물들을 처치할 필요성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이때  발맞춰 개발된 것이 우리가 액상과당이라고 부르는 HFCS (High fructose corn syrup). 설탕을 만들려면 사탕수수를 수입해와야 하는데 반해, 액상과당은 당시 미국에 남아도는 옥수수를 재료로, 옥수수 전분을 가수분해하여 포도당 시럽을 얻어내는 방법으로서, 설탕보다 보존 기간이 길고 혼합하기 쉬우며 생산비가 적게 들어, 공산품으로써 만들어지는 식품에 제격이었고 남아도는 옥수수 처치에도 그만이었다. 이 액상과당은 햄버거, 잼, 과일주스, 케첩, 통조림, 과자, 냉동식품, 비타민에 이르기까지 각종 식료품 뿐 아니라, 1978년에는 코카콜라를 위시해서 각종 탄산음료의 단맛을 내는데 쓰이게 된다. 이제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단맛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빅 사이즈의 콜라, 무한 리필, 하나 사면 하나 더 주기 등, 마구 주어지는 음식물. 사람들의 건강은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가. 설탕과 달리 액상과당은 비슷한 단맛을 내지만, 체내에서 설탕이 하는 것 처럼 신경전달체계를 활성화시키지 않는다. 인슐린 분비와 렙틴의 생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같은 양의 단맛이 들어와도 정상적인 조절 작용이 체내에서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체중은 자꾸 불어날 수 밖에 없고, 사람들은 더욱 단 맛에 길들여지게 된다.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식품, 내 아이가 먹는 식품의 뒷면의 성분란을 살펴 보면, 어렵지 않게 액상과당이란 단어를 발견할 수 있을테니.

코카콜라 회사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초등학교는 교내 여기 저기에 콜라 자판기를 설치하고 있고, 미국의 유수한 의과대학의 한 연구실에서는 '신경마케팅' 이라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기업에서 제공된 연구비를 가지고 소비자의 구매욕에 영향을 주는 뇌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한 일을 하는 것. 자원자들의 뇌에 일정한 자극을 준 다음 어떤 반응이 오는지 MRI장치로 관찰하는 실험이 이루어진다. 그 실험 결과가 후에 어떻게 이용될 지. 확실한 것은 어떻게서든지 '이용'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 기업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과 관련한 목적으로.

대체식품이 개발됨에 따라 식료품값은 내려가고, 저렴해진 사료값과 육류 소비의 증가, 끊임없이 우유를 생산하면서 병에는 덜 걸리는 유전자변형 소의 개발 등으로 지구상에 넘쳐 나는 가축과 가축의 배설물을 비롯한 오물들은 다시 인간의 땅을 오염시키고 인간을 오염시킨다. 호르몬제를 1회 주입하는데 드는 가격은 1달러를 겨우 넘는 반면, 이렇게 함으로써 추가적으로 얻는 수입은 30~40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사람의 '입'이 아니라, 공장의 편의를 위해, 수익과 편리성을 위해 개발된 트랜스 지방의 문제하며, 도대체 지금 우리가 살기 위해 먹는 음식들이 과연 살기 위해 먹는 것들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수익이라는 제단 위에 우리의 건강은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불러 일으킨 이 흐름을. 이제 우리는 매일 먹는 세끼 식사를 투표하듯 선택해야 하는 시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들은 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시대는 가고, 환경과, 건강, 윤리를 생각해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구입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나마 이런 인식이 널리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사고 방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좋겠다.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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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2008-08-0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요 나인님.. 그래서 오래전부터 '두레생협'이라는 곳을 이용하는데요. 여기물건은 소비자 각자가 조합원이 되어서 생산자들과 직접 연계망을 맺어 샌산과 판매를 공동 관리 하는 곳이랍니다.
당연히 우리농산물이고 친환경제품들을 판매하고 있구요.
매년 소비자들이자 조합원들이 시골 각각의 생산지들을 찾아가요.. 어떻게 생산되고 배달되어지는지를 소비자가 직접 관리해가는 것이죠.

먹거리에 대한 생각..그건 생명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러가지 이유러 갈길이 먼게 사실이예요...
제작년부터인가요.. 두레생협에서는 유전자 조작 옥수수 반대를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써주신바대로 식품이라는 것에까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들어간 결과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또한 인간의 몫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여기서 음식재료들과 기타의 공산품을 구입하는데 사실 제가 몸도 별로 좋지 않았었는데 많이 건강해진걸 보면 여기 덕이 큰것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음식...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정말 좋은 음식들을 장기적으로 섭취해보니까 더욱 실감이 나더라구요..
우리가 할일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다린군의 세대.. 제 아이의 세대를 위해서라두요

hnine 2008-08-05 15:59   좋아요 0 | URL
두레 생협, 저도 알지요. 제 아이 경우 어릴 때부터 아토피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래서 제가 더욱 먹거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이 책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우리들 모르게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뒷거래, 물질 만능주의 등에 의해 우리의 먹거리가 농락당하고 있음을,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네요.
 
보미야 꽃다지에게 물어 보렴
김용택 / 생활성서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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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 사이에 묻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어떻게 어제는 내 눈에 들어왔을까.
가족이 함께 읽는 동화라는 작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조그마한 책을 나는 읽지 않은 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둘수가 없었다.
김용택, 안도현, 채인선, 곽재구, 공선옥, 한승원, 임철우, 박완서, 양귀자, 문순태, 김지원, 김태정, 박범신. 대부분 누구나 알만한 작가들이 쓴 동화 열 세편으로 채워져 있다. 이 중에는 김용택님의 <보미야, 꿏다지에게 물어 보렴>이나 김태정님의 <안 보여줘>처럼,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도 있지만, 채인선님의 <어떤 여행>, 곽재구님의 <하얀 배>처럼 어른에게 더 권해주고 싶은 동화도 있다. 공선옥님의 <엄마, 어렸을 적에>는, 작가가 아이를 재우며 잠자리에서 들려주는 작가 어린 시절 이야기인데, 아이의 잠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엄마가 아잇적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아이디어를 준 이야기였다. 곽재구님의 <하얀배>는 결말이 슬프게 끝을 맺어, 어젯 밤 실제로 아이를 재우며 읽어 주었더니 직접적으로 주인공 아이의 죽음이 말로 표현되어 있지 않음에도 "엄마, 그 아이 죽는거예요?" 하고 물어본다. "그래, 슬프지?"  채인선의 <어떤 여행>은 단순한 이야기 이지만,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이 개개인으로 보면 모두 특별한 삶이겠지만, 몇 대를 지내보면 사람의 한살이란 다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어떤 철학적인 느낌까지 전해져오는 이야기였다. 박완서님의 <보시니 참 좋았다>는 역시 통찰력있는 노작가의 원숙함이 느껴지는 동화였으며, 김지원의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명찰을 달고 살기 위해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오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역시 어른들에게 더 적합한 동화이다. 박범신님의 <새떼들의 동구길>은, 시선이 오로지 나 자신에게 향해 있을 새파란 젊음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다른 생명체에까지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와 겸손, 그리고 통찰의 나이가 되어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리고 있다.

간간히 들어 있는, 많지 않은 삽화마저 정겨운 책이었다. 삽화를 그린 화가중 '이우범'이란 이름과 그림을 보고 얼마나 반갑던지. 예전 어릴 때 읽던 동화책에서 많이 보던 그림, 그리고 이름이다.
작지만 충분히 따스하고 포근한 이야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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