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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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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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 필사, 나를 물들이는 텍스트와의 만남
장석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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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줄곧 마음속에 계획만 할 뿐,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필사’가 그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꼭 책을 읽는데 책읽기가 백 미터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속도가 붙는다. 그럴 때 예전엔 골을 목전에 둔 것처럼 막판 스퍼트를 냈지만 요즘은 되도록 잠깐이라도 책을 덮으려고 노력한다. 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행간에 담긴 의미를 놓치진 않았을까 고민하고 책 속에 담긴 문장을 몇 번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제일 좋은 것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직접 손으로 써보는 거지만 그럴 상황이 아닐 때도 많아서 나중에라도 옮겨서 쓸 요량으로 포스트잇을 붙여두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바로 이 단계에서 그치고 만다. 짧은 문장이라도 노트에 베끼어 쓰는 것, 필사(筆寫), 난 왜 이렇게 시작하는 게 어려운지...

 

이것도 일종의 트랜드인가? 싶을 정도로 필사를 위한, 필사하기 좋은 책들이 자주 출간되고 있다. 누군가가 여러 분야의 글 중에 일부를 추려내어 놓은 책이 있는가 하면 글의 분위기를 켈리그라피로 한층 끌어올린 다음 그걸 옆 페이지에 그대로 따라 쓰면 되도록 편집된 책도 있다. 오, 이거 괜찮네, 싶어서 솔깃해지지만 매번 이내 시들해졌다. 내 마음을 울린 글이 아닌 다른 이가 추려놓은 글이라는 것도 연필이 아닌 이상 한 번 쓰면 돌이킬 수 없는 공간에, 거기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나 아닌 다른 이가 볼 수도 있는 책에 무언가를 적고 싶진 않았다. 필사를 한다면 그건 오직 내 마음의 움직임이 느껴질 때 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석주’란 이름 앞에 서고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인이자 수필가이고 독서광이자 출판인이기도 한 그를 난 좋아한다. ‘누가 지금/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누가 지금/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애인’)처럼 그의 시는 수시로 가슴을 울렸고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글을 보면서 나태함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필사를 위한 책’을 출간했다. 장석주가 엮은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반가운 유혹이다.

 

필사는 느린 꿈꾸기이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며, 행복한 몽상이다. - 서두에

 

책읽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우아한 현실도피였다는 그는 힘든 시절을 보낼 때 니체와 단테의 문장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읽은 글을 모두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명문장은 지혜와 인생의 정수를 함축된 구조 속에 담아’내기에 때론 거울처럼 우리 내면을 비춰준다는 것이다.

 

명문장을 베껴 쓰는 일은 그 작가에 대한 오마주다. 베껴 쓰기는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아울러 문장에 깃든 정신과 기품을 닮으려는 능동적인 마음의 발로를 보여준다. - 10쪽. 머리말 중에서

 

책은 장석주가 읽었던 무수히 많은 시와 소설, 수필 등의 글 중에서 마음에 되새길 만한 명문장을 다섯 개의 부분(감정을 다스려주는, 인생을 깨우쳐주는, 일상을 음미하게 해주는, 생각을 열어주는, 감각을 깨우는)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한 페이지에는 그가 추려놓은 글이, 그 옆의 나머지 한 페이지는 여백이 있어서 책을 보면서 소개된 글을 직접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툴더라도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연필을 들고 써 보라고 옮겨 놓은 글에는 이태준의 [무서록], 함민복의 [미안한 마음], 신영복의 [처음처럼], 박형준의 [저녁의 무늬],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의 즐거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이 있다. 때론 짧은 문장, 때론 긴 문장을 만나기도 하는데 명문장에 주눅이 드는 걸까? 기억해야 할 것들을 되도록 빨리 메모하는 것에 오래 길들여져서일까? 빈 공간에 나의 필체로 쓴다는 건 솔직히 아직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내면을 비춰보고 마음을 돌아보듯 한 자 한 자 정성껏 꾹꾹 눌러쓰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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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아티스트
스티브 해밀턴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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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송프로그램에서 외국 출연자들에게 ‘투명 망토가 있다면 뭘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여탕에 가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은행에 가서 돈을 마음대로 갖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투명 망토가 있다면 뭘 하겠느냐’고 물었어도 아마 비슷한 대답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 속 상상의 이야기로 만나는 ‘하늘을 나는 카펫’이나 ‘투명 망토’처럼 만약 자신에게 다른 이와 다른, 매우 희귀한 특별한 물건이 있다면, 혹은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능력, 어떤 물건이냐에 따라 취하게 될 행동이 다르겠지만 그것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아직 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가 있다. 그는 1990년 여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주인공인 여덟 살 소년이 바로 자신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의 사건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기적의 소년’이라 불렀으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주는 편지와 카드를 보내주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주황색 죄수복을 9년 동안 입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는 문득 생각한다. 난 도대체 그동안 뭘 했던 걸까? 자신이 말문을 닫고 살아야했던 이유를 되짚어봐야겠다고. 

 

자, 정신 바짝 차리길.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이야기, 한때 '기적의 소년'이었던 내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까. '밀포드의 벙어리' '희대의 총아' '어린 유령' '새파랗게 어린 아이' '금고털이' '자물쇠 예술가'. 이것들은 전부 다 나를 따라다녔던 이름이다.

하지만 그냥 마이클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 13~14쪽.

 

마이클은 9년 전 끔찍한 사건에서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그 충격으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가족을 잃은 마이클은 삼촌과 함께 지내면서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받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삼촌의 주류점에 들어선 남자를 보자마자 마이클은 심상치 않은 일, 남자가 강도로 돌변하리라고 예감한 것이다. '의사소통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마이클은 제대로 적응하기는커녕 더욱 괴로워한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낡은 자물쇠였다. 녹슬고 낡은 자물쇠를 관찰하고 그걸 여는 방법을 터득해가면서 마이클은 희열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주류점 뒷방 문의 낡은 자물쇠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 드디어 자물쇠 여는 법을 완전히 익혔을 때…… 그 느낌이 어떤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 68쪽.

 

어린 시절의 엄청난 충격으로 말을 잃은 마이클. 그는 어떤 자물쇠라도 단번에 여는 재능이 있지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이클이 어밀리아라는 소녀를 마음속에 담고 그녀의 아버지가 사업이 난관에 부딪치면서 상황은 마이클이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범죄조직이 마이클의 능력을 알게 되면서 결국 금고털이 생활을 하게 되는데...

 

<더 록>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미국의 알카트라즈섬을 찾은 관광객을 인질로 삼아 살상가스를 발사하겠다는 무리를 제압하기 위해 생화학무기 전문가와 알카트라즈 감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이력이 있는 죄수가 팀을 이뤄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는 영화였는데 난 처음엔 이 영화가 락음악에 관한 건줄 알았다. 그런데 <The Rock>이라는 제목을 보고서야 처음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티스트’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처음엔 이 책 <록 아티스트>가 락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일거라 생각했는데 <The Lock Artist>라는 원제와 ‘세상 모든 자물쇠를 여는 손’이라는 부제를 보고서 아차, 했다. 하지만 재미는 때로 의도하지 않은 것에서 얻어지는 법. 이번이 그랬다. 스티븐 해밀턴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만도 큰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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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성사전 - 김용택 선생님이 들려주는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이마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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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진흥법이란 걸 아세요? 유치원은 물론이고 초,중,고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계획하고 실시하도록 하는 법안인데요. 지난달인 7월 2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반세기쯤 살다보니 별의별 희한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인성교육을 일정시간 정해놓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점수화해서 입시에 반영한다는 것도 그렇고. 한자에 해박하지 않아 여기에 딱 맞는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순 없는 게 아쉬운데요. 이것이 아이들의 인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오히려 이 어처구니없는 법 때문에 또 하나의 사교육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압니다. 아랫물이 탁하네, 더럽네 탓하기 이전에 우선 윗물이 맑아야 한다는 거.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님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린이 인성사전>인데요.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가슴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낱말을 선정한 다음 그 낱말과 어울리는 김용택님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의 시를 함께 수록해놓은 책입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너를 이해합니다’ ‘함께 라서 행복합니다’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구요. 하나의 주제마다 여러 개의 낱말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긍정, 당당함, 도전, 만족, 부끄러움, 성실, 솔직함, 양심, 여유, 자존, 절제, 책임, 후회, 걱정, 관용, 배려, 우정, 이해, 존경, 친절, 협동, 효도, 감동, 공존, 나눔, 소통, 용서, 인정, 진심, 화해, 희망... 낱말 하나하나마다 지닌 의미가 모두 깊지요?

 

이를테면 제일 먼저 소개된 ‘긍정’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시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달리기를 했다. / 다해 1등, 재석이 2등, 나 3등 / 우리 반은 모두 세 명이다.’ 이어서 김용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최선을 다하면, 있는 힘을 다하면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게 긍정입니다.’라고 말이지요. ‘절제’에 관한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누가 내 머리에서/ 컴퓨터 좀 꺼 주세요. / 눈 감아도 / 꿈 속에서도 / 꺼지지 않는 컴퓨터 화면 / 컴퓨터 화면 속 전사들은 계속 싸우고 있어요,’ 컴퓨터 게임에 빠지다보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머릿속에선 게임이 계속되곤 하는데요. 이렇게 하루에도 여러 번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려주고 스스로 절제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심리이해 감정표현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생각납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 여러 감정들이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그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희.노.애.락. 단순하게 네 가지로 끝낼 게 아니라 더욱 세분화해서 말이지요. ‘기쁘다’는 감정도 그것이 감동적인 기쁨인지, 반가움에서 오는 기쁨인지, 가슴 벅찬 뿌듯함인지 돌아보라는 건데요.

 

 

인성에 관한 낱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이해’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기 위해 언제나 가슴에 지니고 다녀야 할 낱말과 생각들이 책 한권에 가득합니다. 개중에는 어른인 저도 일상에 쫓겨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고 잊고 있던 것들도 있어서 부끄럽기도 했구요. 아이에게 읽혀주려고 마련한 책인데 오히려 제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성은 누가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것보다 아이들 스스로 깨달음에 젖어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란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각을 넓히고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다 보면 내가 생각하고 쓰는 말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을 주는 나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바르고 곧고 크게 자랍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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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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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 내겐 친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여기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 이름에 대한 친숙도에 비해 그의 작품과의 친숙도는 정반대라고나 할까? 집안 책장 어딘가엔 분명 그의 소설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작품은 겨우 두 개 정도? 그마저 승률은 1승 1패. 썩 좋지 않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대히트작이라고 손꼽히는 <악인>을 늘 노려만 보고 정작 읽지 않은 내가 그의 작품이 어떠하다고 평가할 순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난 해마다 여름이 다가오면 다짐을 한다. “올해는 꼭 보고야 말리. <악인>을!” 근데 올해야말로 정말 보게 될 것 같다.

자, 이제 <분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치오지 교외의 한 주택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낮 기온이 37도를 넘어서는 몹시도 무더운 날, 유치원 보육교사인 아내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입자에게 변을 당한다. 얼마 후 집으로 들어선 남편 역시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만다.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범인의 행각이다. 짧은 시간동안 순식간에 두 사람을 살해한 범인은 사건현장에 머물면서 간단하게 요기를 해결하고 피해자의 자전거를 타고 도주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물론 멀리가지 못해서 경찰의 검문을 받고 달아나는 바람에 범인의 몽타주와 함께 ‘야마가미 가즈야’라는 그의 이름이 밝혀져서 지명수배에 오른다. 그런데 그가 도주한지 1년이 지났지만 어디에서도 그가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대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 걸까? 사건당일 그가 피해자의 피를 묻혀 쓴 ‘분노’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풀리지 않은 의문만을 남겨놓은 채 소설은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 개월 전 가출한 딸 아이코가 심신이 망가진 채로 도쿄의 유흥업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고 마키 요헤이가 딸을 찾아 데려오면서 마키네 부녀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얼마전 동네에 왔다는 다시로 데쓰야라는 청년이 아이코와 가깝게 지낸다는 거였다. 후지타 유마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가까운 사람 몇 명을 제외하고는 가족에게도 감추고 지낸다. 호스피스 전문 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들른 사우나에서 나오토를 만나 관계를 갖는다. 툭하면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엄마 때문에 여고생 고미야마 이즈미는 어쩔 수 없이 야밤도주 해서 오키나와의 외딴섬에서 살게 되는데 전학 간 학교의 동급생 지넨 다쓰야와 인근 섬을 찾았다가 폐가에서 지내는 의문투성이 남자 다나카를 만나게 되는데...

한편, 경찰 수사팀은 사건발생 1년이 지난 시점에 텔레비전 공개수사 프로그램에 ‘하치오지 부부 살인사건’의 범인을 공개수배하기에 이른다. 이전과는 다르게 컴퓨터 크래픽으로 야마가미 가즈야가 변장하거나 여장한 모습을 내보내는데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경찰서의 제보전화가 계속해서 울리기 시작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불안한 파장을 불러왔다. 저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수배사진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이른다.

아이들의 여름방학과 함께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날에 만난 <분노>.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범인이 누구일까 짐작해가면서 읽었다. 살해동기도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라 자연히 관심은 무엇 하나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데쓰야, 나오토, 다나카 이 세 남자의 행적에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치오지 부부를 살해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알고 싶어서 끝까지 내달렸는데 정작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살인사건이나 범인 검거보다는 우리의 ‘삶’에 있었던 것 같다. 예전보다 편리하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현란함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우리가 얼마나 진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지, 오히려 독자들에게 되물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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