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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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앨범을 들춰봤다. 살림이 어렵던 시절이라 사진이 그리 많진 않지만 나의 유년 시절을 돌아볼 수 있을 딱 고만큼의 사진. 그것도 형제가 많아서 혼자 찍은 것보다 언니들이나 동생과 함께 한 사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있기에 매년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지난 시절을 잊지 않고 지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위로 두 명의 언니들(언니는 모두 5명이지만 어렸을땐 이상하게 1,2,3번째 언니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과 함께 세 명이 쪼로록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텔레비전에선 6백만불의 사나이와 원더우먼이 최고 인기였고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머슴애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 두 팔을 천천히 흔들면서 뜨드드드드..... 6백만불의 사나이가 달리는 시늉을 했고, 기집애들은 은박지나 두꺼운 종이에 별 모양을 그려 머리에 쓰고서 원더우먼 흉내를 내고 다녔다. 거기에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나는 정의의 사나이, 슈퍼맨이 가세하면서 서로 누가 최고냐를 두고 다투기도 했다. 영웅놀이, 고무줄 뛰기, 숨바꼭질, 다망구...쉴새없이 뛰고 구르면서(그때의 나는 혹시 백만돌이?) 놀았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때쯤, 동네에 불쑥 나타나 하얀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 뒤를 신나게 쫓아다녔다. 매일 똑같은 놀이가 반복됐지만 지겨운 줄도 몰랐다. 일찍 찾아오는 밤이 야속할 뿐이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작가’ 혹은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더 타임스)'라고 알려진 그 유명한 저자를 이제야 만났다.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고 그때를 회고한 글들이다. 우리나라가 한창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1950년대, 미국의 중부 아이오와 디모인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렸을 때 지하실에서 우연히 번개 무늬가 그려진 낡은 스웨터를 발견한다. 그것을 보고 저자는 그때부터 자신이 다른 별에서 온 초능력자 ‘썬더볼트 키드’라고 여기게 된다. 번개 무늬 스웨터에 망토를 두른 그는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고 장난꾸러기 말썽쟁이 친구들과 온 동네를 누비며 다니는데 태어난 시기도 나라도 다르지만 그의 어린 시절과 나의 유년 시절은 참 많이도 닮았다.







다른 아이보다 우월해보이고 싶은 욕심에 일단 도전하고 보는 그 대책없는 무모함, 머리에서 철철 흐르는 피도 두려워하지 않는 살짝 비껴나간 용감함, 하지만 어처구니 없을만큼 순진해서 때론 뒷마당의 딸기덤불과 작은 벌의 날개짓에서조차 죽음의 공포를 실감할 정도로  바보처럼 순진했던 저자의 어린 시절을 읽으면서 쿡쿡 웃음이 터져나왔다. 유쾌한 내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에서부터 식사하기 전의 음주를 비롯해 담배가 자신들을 더 건강하게 해준다고 믿었고 ‘의사들이 즐겨 태우는 담배’라며 광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 방사능 낙진이 몸에 해롭지 않다고 했던 미국 정부를 비꼬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가진 것은 언젠가 버려지기 마련이며 1950년대에 우리를 특별하고 남다르게 만들어주던 것들을 지키지 못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른 도시에는 없는 것으로 가득한 도시, 옛날의 디모인은 그렇게 멋진 세상이었는데 이제 그런 도시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두가지에 감탄했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변신시키는 저자의 유머넘치고  맛깔난 문장과 정말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놓은 엄청난 자료수집은 독자로 하여금 그 당시의 풍경을 저절로 떠올리게 했다. 어린시절 날 무지 괴롭혔던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섬머슴애가 떠올라 유쾌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다. 지금 내 아이들,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골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어노는 게 아니라 학원순례에 바쁜 요즘 아이들이 이담에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될지 생각하면 마음이 찌릿하게 아파온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행복하고 특별한 유년시절, 즐겁게 뛰어노는 놀이를 돌려줄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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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라는 것 - 아내들은 알 수 없는 남편들의 본심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구계원 옮김 / 열음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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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전에 표지부터 살피는 버릇이 있다. 표지그림이나 디자인에서부터 제목, 부제의 문구에서 전달되는 느낌을 포착하곤 하는데 <남편이라는 것> 이 책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표지의 남자가 취하고 있는 포즈부터 애매하다. 단순히 한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건지, 말하는 표정인지 정확한 구분이 어렵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행동심리 측면에서 보면 말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건 거짓을 말하고 있는 입을 무의식중에 가리려는 행동이라고 한다. 또 사람의 본심이 드러나는 왼쪽 얼굴이 표지그림엔 오른쪽 얼굴보다 살짝 실룩거린다. 살짝 힘을 주어 긴장감이 느껴지는 왼쪽 눈썹에 입술 끝도 왼쪽으로 살짝 올리고 있다. 미소 짓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는 건 얼굴과 다르게 푸른빛이 도는 손 색깔! 뭐야, 이건. 파충류도 아니고...도대체 무슨 의미야!!




<남편이라는 것> 이 책의 저자는 의학박사이자 에세이스트, <실락원>을 쓴 와타나베 준이치다. 그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주로 의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추적’ 하는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남자’ 특히 ‘남편’에 대해 얘기하겠다고 한다.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가? YES!!!




저자는 ‘남편이라는 것’에 대해 총 19장, 57(?)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 결혼은 왜 하는가...란 의문에 대부분의 남자가 ‘모름지기 남자라면 30까지는 결혼해서 번듯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라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통념이나 상식에 특히 남자들이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헉, 나도 신랑이 30살일 때 결혼했는데...-0-;;)는 것에서부터 결혼식장에서 달아나는(여자가 결혼식장에서 달아나는 영화는 봤지만 남자도?) 꿈을 꾸는 존재라는 것, 남자가 결혼하고 나서 달라지는 건 여자와 연애할 때의 심리상태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남자의 머릿속엔 섹스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상황과 조건만 따라준다면 섹스를 하려고 하는 존재니까 여자들이 이해해야 한다...등 초반부터 다소 충격적인 놀라운 사실, 여자인 입장에선 어이없는 얘기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난 물론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녀도 사랑해.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아” 이런 식의 남자들이 등장하는데 그건 남자가 복수지향적이고 외도하기 쉬운 성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들은 가정지향적인 존재이기도 해서 철새가 돌아오듯 가정으로 돌아오기 쉽지만(남편들의 회귀본능은 연어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수준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기가 살던 강(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93쪽) 아내들의 외도는 복귀율이 지극히 낮은 편이라 심각하다는 투로 써놓고 있어서 읽기에 다소 거북하기도 했다.




남편이 자신의 친가에 가지는 감정과 처가 식구들에 대한 느낌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남편의 귀가거부증의 원인과 이유를 비롯해 맞벌이를 찬성하지만 남편의 속마음은 아내가 전업주부이기를 바란다는 것, 아내와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남자들이 대화에 서툴기 때문이라는 것, 남편이 아내에게서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며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동시에 가장 큰 고민인 ED(발기부전)의 원인와 대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또 마마보이(정말 궁금했다)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남편이 마마보이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마마보이 기질은 남편이 태어났을 때부터 몸에 익혀온 모태신앙과 같은 것’(232쪽)이기 때문에 무너뜨리려고 하기 보다 마마보이 남편을 애처가로 변신시키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동안 마마보이 성향이 아주 강한 신랑을 보면서 언제나 불만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왜 독립, 자립하지 못하는지, 결혼한 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화목하게 사는 그 자체가 바로 효도라는 걸 남편과 시어머니는 왜 깨닫지 못하는지 답답했다. 내 아들들은 마마보이로 키우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결심하게 됐다.




이 외에도 남편이 아내보다 이혼을 결심하기 못하는 이유는 남자가 고독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립을 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찾아오는 초로(初老)기 우울증과 정년퇴직 후의 남편의 삶에 대해 저자는 ‘은퇴 후의 남편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의 여부는 아내의 손에 달려있다’며 ‘어느 정정한 노부인이 “남편은 대형쓰레기라고들 하지만 그건 틀렸어. 아직 살아있으니까 대형 쓰레기가 아니라 대형 음식 쓰레기야(264쪽)”라고 말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털어놓고 있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일본인 저자가 일본인을 통해 일본인 남편에 대해 적어놓은 책 <남편이라는 것>. 사실 초반엔  ‘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여자한테 이해하라고만 하고! 남자도 여자를 좀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라고!!’ 화를 내며 읽었다. 그러다가 중반쯤부터 ‘음...그래?’ ‘...그렇군’하며 조금씩 기분이 누그러졌다. 대상이 일본인에 국한된 게 아니란 생각이 들면서 어느샌가 책 속에서 언급되는 남편들이 내 남편이 아니길, 미래의 내 아들들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읽게 됐다.




아는 동생이 이런 얘길 한적이 있다. “내동생 핸드폰에는 즈그 신랑이 ‘내사랑’, 다른 동생은 남편이 ‘내편’, 근데 울신랑은 하도 내 편을 안들어줘서 ‘남~편’임다.” 그땐 ‘정말? 진짜네’하고 웃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길 문제는 아닌듯하다. 남편을 ‘남~편’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남편에 대해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이해하기도 쉬울 테니까 말이다. ‘우리 남편은 왜 그렇지?’ 고민하는 시간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차츰 바꾸어가야겠다.




올해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째 되는 해다. 결혼 25주년인 은혼식, 50주년인 금혼식을 넘어 부부가 혼인한지 60년째에 자손들이 부모들을 위해 베풀어준다는 회혼례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책, 의미있는 독서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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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 그때가 더 행복했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1
이호준 지음 / 다할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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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처럼 층층이 올라간 논둑길을 허리 굽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표지 사진 을 한참 들여다봤다. 여긴 어딜까. 요즘 같은 세상에 도대체 어디에 이런 정경이 남아있을까.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이란 책 제목 그대로다. 우리가 못 느끼는 사이에 조금씩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을 저자인 이호준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으로 찍어서 책 한권에 담았다. 그런 풍경들을 한데 모으면서 저자는 ‘그때가 더 행복했네’란 부제를 붙였다. 왜 지나간 옛 시절, 그때를 더 행복했다고 하는지 궁금했다.

 

 

책은 ‘청보리에 일렁이던 고향풍경’ ‘ 연탄. 등잔, 그 따뜻한 기억’, ‘술도가. 서낭당이 사라진 뒤’, ‘완행열차와 간이역의 추억’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모두 40개의 추억과 풍경을 풀어놓았다. 그 중엔 저자가 자신의 추억과 경험담이 담긴 것도 있지만 여행이나 취재, 혹은 가까운 이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사진과 함께 전하고 있다.

 

 

각각의 내용이 연결성이 없기 때문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달음에 읽기보다 틈나는대로 손에 들고 펼쳐지는 부분을 읽어도 좋다. 어떤 부분을 읽어도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서술방식에 있다. 저자가 자신의 추억담을 천편일률적으로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내용이나 소재, 장소에 따라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이 다르다.

 

 

소심한 소년이 참외서리에 대한 일화를 털어놓는가하면(원두막) 좀 모자란 대장장이 조씨의 아들 만복이와 친구인 아이의 눈을 빌어 대장장이가 쓸모없는 쇳덩이를 괭이나 칼로 만드는 광경을 보여주기도 하고(대장간) 총각선생님과 마을 누나의 결혼담(보리밭), 부지런한 바우영감이 몇 년동안 일한 새경 대신 받은 산자락을 다랭이논으로 만드는 고단한 광경(다랑논), 너른 바다에서 노는 게 질린 악동 멸치들이 엄마 멸치 몰래 밀물을 타고 들어와 숨바꼭질하다가 어부의 뜰채에 잡히기도 하고(죽방렴) 오줌싸개 아이가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소금 얻으러 가서 망신을 당하고(키질) 산만한 덩치에 힘이 장사인 선생님은 학교의 유일한 악기인 풍금 치는 게 서툴러 음악시간마다 아랫배가 아픈데 그걸 알기나 하는지 아이들은 킥킥 웃기만 했다고(풍금) 털어놓고 있다.

 

 

하나의 소재나 풍경에 따라 가슴에 와닿는 느낌도 달랐다. 사라져가는 시골의 풍경이나 정경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고 누구나 어렵던 보릿고개 시절, 배고픔에 허덕이던 때의 추억은 가슴 한켠에 아릿한 슬픔과 아픔을 남기고 어린 시절의 놀이나 동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에선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이 한 권의 책을 정말 쉬엄쉬엄 읽었다. 찐쌀을 입안 가득 넣고 불려서 천천히 꼭꼭 씹어먹듯 조금씩 한 두 개 꼭지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오늘 책장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그래, 그때 참 행복했지’. 살아온 세월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할 수 없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주위에서 하나씩 둘씩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이 땅 위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짐 같은 지고 살아온 저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하나둘 사진으로 찍고 기록한 저자가 너무나 고맙다. 덕분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시간의 회오리 속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도 십년, 혹은 이십년 후엔 그리운 날들이 될거란 생각을 하니 손에 힘이 들어가고 괜시리 설렌다. 내 아이들에게 언제든 돌아가고픈 푸근한 고향을 만들어줘야겠다.

 

 

* 지난 4월 시댁에서. 구비구비 돌아가는 골목길이 이곳엔 아직도 남아있다. 햇살이 좋은 한낮이면 골목마다 놀러나온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모처럼의 낮잠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 풍경도 곧 사라지게 된다. 몇 년전에 재개발이 확정되서 올해말이나 내년초가 유효기간인 이 풍경을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찾아간 구멍가게에서 사온 과자 한봉지의 추억을 내 아이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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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1 - 일타 큰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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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집주변 포교원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전시회'가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를 비롯해 아난존자, 용수보살, 쫑카바 라마, 성철 스님 등의 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고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찾았다. 주로 다니는 병원 건물의 한 층에 자리잡은 작은 포교원이 그날은 무척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사리는 법당 한 가운데 전시되어 있었는데 크기에서부터 모양, 색깔, 종류가 정말 가지각색으로 다양했다. 그걸 줄지어서 친견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과 법당안의 차분한 공기에 까불대던 큰아이도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인연>은 불교계의 큰 스님이신 일타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그동안 <산은 산 물은 물>을 비롯해 <하늘의 도> <만행> <야반삼경에 춧불춤을 추어라> <암자로 가는 길> 등 수많은 불교 관련 책을 집필한 작가 정찬주의 새로운 작품인데 1년 5개월이란 긴 시간을 거쳐 탄생했다고 한다.

 

붉고 노란 낙엽의 계절 가을, 평일이라 한적한 해인사를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고명인.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7일이 지났고 천주교와 유교형식의 장례를 치렸지만 그래도 뭔가 못다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던 모양이다. 어머니 생전에 함께 일타스님의 법문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고자 해인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혜각스님을 만나 일타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타스님의 행적지를 돌아보는 수행길에 동행하게 된다.

 

부모님 모두 불심이 깊었기에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불교의 교리에 젖어든 일타스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출가한 어머니를 따라 불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일타스님에겐 출가한 가족이 무척 많다.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어머니와 아버지, 외삼촌, 누나..등 사십명이 넘는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그런데 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나 계기는 저마다 달랐다. 가족 중에 진정한 불제자가 한명 나오기도 힘든데 사십명이라니...정말 대단한 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타스님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부분은 무척 안타까웠다. 보고 싶은 마음에 목이 메일 정도였는데 그런 아들을 너와 어머니의 인연을 끊은지 오래됐으니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며(79쪽) 냉랭하고 차갑게 대하는 스님. 세속의 인연을 끊는다는 게 이런 건가...싶기도 했다. 아들에게 자신의 다친 발을 보이며 우리 삶에 있어 인과란 게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것을 얘기해주는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불가에서는 전생에 쌓인 업이 현생으로 이어져 있기에 우리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 화두를 심고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는 것이 수레바퀴처럼 계속 돌고 도는 그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일타스님은 스스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연비하시고도 모라자서 다음생엔 미국에서 태어나서 불교를 전파하겠노라는 원을 세우셨을까...싶다.

 

일타스님의 행적을 따라 다니면서 생전에 머물었던 사찰과 일타스님이 모신 여러 큰스님, 성철스님이나 서암 큰스님에 대한 일화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벗어나 저마다 가슴에 품은 화두를 풀어내는데 서로 도움을 주고 애쓰는 모습들에서 인연이란 과연 무엇인가...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또 일타스님의 행적에 따라 그 분이 머무셨던 해인사라든가 내원사, 통도사, 광덕사와 같은 사찰의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내가 다녀온 사찰이 나오는 대목엔 유난히 반가웠다. 다음에 가면 일타스님의 자취를 한번 찾고 느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는 깨달음의 철학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읽는 불교서적인데다가 한없이 자비로운 관음보살 같은 일타스님의 일대기에 한동안 잊고 있던 불씨 하나를 다시금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불기 2552년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왔다. 해마다 이날이면 사찰을 찾는다. 어두운 세상을 연등의 불빛이 밝혀주듯 내 마음의 어둠에도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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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
달시 웨이크필드 지음, 강미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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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창에 ‘루게릭병’을 쳤다. 제법 많은 검색결과가 떴다. 공식병명은 ‘근위축성 측산경화증’. 척수신경이나 간뇌의 운동세포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이 위축되고 마비되는 질환이라고 한다. 193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즈의 루 게릭 선수가 이 병으로 숨지면서 ‘루게릭병’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브 호킹 박사를 비롯한 프로농구 박승일 코치가 앓고 있는 것 역시 이 루게릭병이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푸른 물 위를 달리는 다리가 그려진 표지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 이 책의 저자인 달시 웨이크필드는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나이인 33세에 ALS 진단을 받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던 활동적이고 씩씩한 여성의 삶이 바로 그 날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2003년 2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12월말까지. 그녀는 기록을 남겼다. 1년 10개월동안 ALS로 인해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병의 원인조차 파악되지 않은 불치병과 싸우면서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아름다운 용기가 이 한 권의 책에 담겨있다.

 

달시는 호수에서의 수영을 즐기고 달리기와 하이킹을 좋아하는 활달한 여성.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녀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아기를 절실히 원하게 된다. 정자은행을 통해 인공수정을 계획하던 중 운명의 반쪽, 스티브를 만난다. 3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사는 스티브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키워가고 있던 달시는 어느날 충격적인 얘길 듣는다.

 

“달시, 이건 심각할 수도 있어. 보스턴에 가면 ‘운동뉴런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게 될 거야.”.... 운동뉴런증후군이라고? “ALS지.”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ALS가 대체 뭐람? “루게릭병이라고도 해.” -33쪽.

 

루게릭병. 팔과 다리를 비롯해 얼굴의 근육이 마르고 굳어지면서 대부분 발병한 지 2~5년 사이에 호흡마비로 사망한다는 병에 달시는 절망한다. 그녀는 활달하고 개구쟁이 기질이 있는 아이들, 버릇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진흙탕에도 기꺼이 뛰어 들어가 놀 줄 아는 아이를 기르고 싶었고 딸이 있다면 언제나 조심할 필요없이 책임과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라고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상태를 더 악화시키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공수정을 하고 임신에 성공한다.

 

ALS로 인해 하루하루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몸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많은 걸 떠올린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지만 자신의 몸 안엔 달리는 사람의 영혼이 있음을, 잃어버린 것보다 아직 남아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감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쇼핑몰에서 허리가 고무줄로 된 청바지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한 나머지 기절할 지경이라니...

 

나도 안다, 사실 진실을 말하자면 ALS는 내게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아직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용기를, 웃음과 품위, 그리고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 132쪽.

 

우리 아기와 함께 점차 살이 져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잘 알고 있다. -168쪽.

 

그녀는 문득문득 그리워한다. ALS 진단을 받기 이전에 아주 활동적이고 건강했던 여성이었던 자신을 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간 배우자를 그리워하듯이 옛날의 자신을 그리워하고(134쪽) 거리에서 뛰거나 자전거를 탄 사람을 보면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소원한다.

 

내 아들과 함께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하이킹을 하고 싶다...스티브가 나이가 들면 그를 곁에서 보살펴주고 싶다. 어느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냥 평범한 서른 넷이 되었으면 좋겠다. 통증도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나는 영원히 살겠구나 하고 생각할만큼 순진한 서른 넷 말이다. - 202쪽.

 

달시 웨이크필드. 그녀는 지금까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만났던 불치병에 걸린 연약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가 왜,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길래 이런 몹쓸병에 걸렸느냐고 목소리 높여 하소연하거나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날을 언도받은 삶이 곧 죽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커다란 도전은 때로 소소한 일상의 고마움을 깨우쳐주는데 자신은 지금 그런 것들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치료법이 나올 시간은, 증세가 역전될 시간은, 기적이 일어날 시간은 아직 있다. 아직 시간은 있다. - 196쪽.

 

내가 말하고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사이 샘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과 미소짓는 법, 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샘을 안고 있을 때면 아이를 낳으면 인생이 바뀔거라고 말하던 사람들의 말이 종종 생각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ALS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지라도 말이다. - 206쪽.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호흡하고 음식을 먹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걷거나 뛰고 자전거를 타는 소소한 일상이 이렇게 소중할 수도 있구나...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끌어안고 산책을 하는 이런 일들이 애절하게 그리워질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로 인해 우리의 일상, 나의 삶이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란 걸 알게 됐다.

 

1년 10개월이란 기간동안 달시 웨이크필드, 그녀는 열심히 달렸다. 얼마남지 않은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용기를 보여준 그녀의 기록, 그녀의 달리기는 눈부시리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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