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작가의 말>

소설은, 무대의 이전과 무대의 이후에서 씌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쓰는 이를 영원히 무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다. 무대의 뒤편, 혹은 무대의 한복판. 이 아이러니가 소설가에게 비애인지 쾌락인지 환멸인지 잘 모르겠다.   <p. 33>

누군가를 배신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p. 84>

세상에 같은 바다는 없다. 늘 변함없는 망망대해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오늘 마주하고 있는 이 바다는 어제 지나온 것과는 다른 바다다. 시간의 움직임이라는 마법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바다를 건너는 항해가 닮았다면 소소한 시간의 매듭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마디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p. 112>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인지도 모른다.   <p. 120>

모든 것은 사라지고 시들고 썩어버리도록 운명지어진 것 같았다. 시작은 아무 의미도 없다. 시작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P. 139>


『풍선』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P. 19>

두고 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P. 21>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크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낙차의 폭이 너무 클 때, 꿈 너머의 실생활에 대한 거짓 믿음과 진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살다 보면 판타지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성찰하게 하거나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판타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P. 47>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은 권력관계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한 게임이 사랑이다.   <p. 49>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 51>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중에서)   <p. 66>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인가, '나쁘다'인가? 주지하건대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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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어쩌면 로마 황제 앞에 서 있는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함성과 비슷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라고 하면 그는 살 것이요, 죽이라고 하면 죽을 것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강해진 경우도, 히틀러처럼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한 파시스트의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사안들은 이러한 대중들의 함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의 어느 날, 지금의 십대가 "전쟁, 전쟁, 전쟁!"을 외친다면, 결국 우리는 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더 많은 지금의 십대들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친다면, 우리는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 41>

경제학의 기본 모델에는 "인간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서 움직인다"라는 하나의 가설만 존재하는데, 최근에는 여기에다 경제학자들이 "가끔은 이상한 짓도 한다"라는 보조명제를 넣기도 한다. 사실 이는 엄청난 고급 이론의 영역이다. 왜 사람들이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지 나름대로 경제학적 설명을 해낸 이들은 지금까지 전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계산 자체가 어려워서 못한다고 얘기했던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진즉에 노벨상을 받았고, 명품 라벨에 속아서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애컬로프(George Akelof)도 정보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종교 때문에 가끔 배고파도 행복하다고 여기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얘기한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도 1990년대 중반에 노벨상을 받았다. 신념 때문에 이상한 일을 한다는 사람으로는 19세기 후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불행히도 그 시대에는 노벨상이 없었다. 사랑 때문에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는 분석은 아직 비어 있는데, 독자 여러분 가운데 이를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다면 한번 도전해보시기 바란다. 성공하면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단어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증오이다.   <p. 170>

국가와 국가 사이에 '애정'을 얘기하는 것은 일상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이보다는 '우정'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이 좀더 사실적이다. 그러나 증오는 다르다. 증오는 구조 안에서 탄생하고, 경제를 따라 확산되고, 문화를 따라 재생산되며, 정치에 의해 폭발한다.   <p. 171>

만약 1세기 전에 발행된 유럽의 신문들과 지금의 한국 신문들을 찾아서 비교해본다면, 놀랄 정도로 유사한 구절이 많다는 데 독자 여러분들도 놀라실지 모른다. 당시의 '새로운 식민지'라는 단어를 지금의 '수출'이라는 단어로, '새로운 자원 개발'을 지금의 '자주 개발'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오페라'를 '한류'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그 당시 신문의 기사들 상당수가 요즘의 기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p. 196>

상투적 수법이기는 하지만, 이즈음에서 나름대로 유용한 질문이 하나 있다. "노아가 방주를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는가, 비가 오고 나서 만들었는가?" 물론 답은 뻔하게도 비가 오기 전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평화라는 매우 특수한 조건 혹은 매우 특수한 '공공재'도 이와 같다.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운 시기에 만들어야 한다.   <p. 223>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단 한 문장을 자신의 파토스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마케팅 사회에서는 아주 어려운 미션이다. 그렇지만 '미션 임파서블'은 아니다. 평화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잘 잊지 못한다. 그래서 평화는 파토스를 요구하고,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특수한 속성을 갖는다.   <p. 261>

한국 자본주의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저질 악마 자본주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평범한 한국 십대의 1년간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디스커버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보다 보존 가치가 훨씬 높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고비용 노예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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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때로 거꾸로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특이한 사건이나 우연한 만남 같은 것이 마치 종이 위에 번지는 잉크처럼 크게 떠오르기도 한다.   <p. 91>

그녀의 커피잔 속에 떨어진 달을 보았다. 커피잔 속에서 나방처럼 꿈틀대는 날. 그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없이 그 달에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식히기 위해 그 표면에 입김을 불어 골을 낼 때 달이 폭파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p. 103>

사랑을 받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다. 똑같은 열기였지만 다른 방에서 나오는 열기였다. 똑같은 소리였지만 내 가슴이 아닌 높은 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p. 106>

열일곱에 우리에겐 가슴이 없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펄떡거리는 어떤 성스러운, 잔뜩 부풀어 오른 그 무엇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것이 가슴은 아니다. 비록 가슴이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마음과 몸과 미래, 심지어 최후의 외로운 시간까지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 때, 그것은 가슴이 아니었다.   <p. 120>

사람들이 똑똑하거나 신중해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사랑은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들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p. 302>

나는 냇물을 따라 천천히, 여러 날에 걸쳐, 그 냇물이 강을 만날 때까지 흘러갈 것이오. 나는 아직 살아있고, 다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이기에. 매 시간 나는 더 젊어질 것이오. 강이 부풀어 오른 그 중심을 따라 나를 싣고 가는 동안 나는 한 소년이 되고, 어린애가 되고, 계속 작아져 마침내 별빛 아래 떠다니는 갓난아기가 될 것이오. 어떤 꿈도 꾸지 않는 오들오들 떠는 갓난아기, 바다의 어두운 자궁 속에서 태어난 갓난아기가 될 것이오.   <p.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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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더이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지 않듯이. 그 소설이 인상적이었던 어떤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미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미와 밤비 사이에는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일본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혹은 한국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선은 더이상 없었다.   <p. 89>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게 됐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번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다.   <p. 100>

나는 "Our destination is fixed on the perpetual motion of SEARCH. Fixed in its perpetual EXILE"을 보자마자, 그 문장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고 여겨 내 책상 앞 벽에다 붙여놓았다. 뭔가를 찾아 영구 운동하지 못하는 문학, 영구 망명을 꿈꾸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 될 수 없었으니까.   <p. 159>

그런 까닭에 작가는 씸퍼사이저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이 되는 경우, 작가는 사상가로 바뀌면서 '국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국내란 중심을 향해 응축되는 공간이다. 진지한 문학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자아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게 만드는데, 국내용 문학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아는 세계에 맞게 자아를 만들어내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고 나면 경계선 바깥은 모두 타자가 된다. 국내용 문학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p. 169>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p. 201>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p. 290>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p.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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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해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새삼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자기중심적인 꿈을 통해 그 사실을 학습한다.   <p. 46>

신의 이름이라도 부르고 싶은 장소였다. 영혼을 신의 선반 위에 얹어두고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포근할까. 하지만 나는 아버지 신을 찾기 전에 인간인 아빠를 찾아야 했다.   <p. 107>

낮과 밤은 서로 잘려진 단면이 얼마나 아플까? 해 뜰 때나 달이 뜰 무렵이면 무한히 긴 절단면이 아파하는 경련을 나는 느낀다. 삶을 위해 나누어진, 누구의 아픔도 아닌 이 세상의 본질적인 아픔이 내 마음에도 사무쳐 해와 달 사이에서 눈이 아프다.   <p. 116>

진실은 실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데,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그 많은 진실들을 다 놓쳐버리고, 우린 무지와 오해 속을 살아간다.   <p. 176>

"우리가 사랑이라는 개념의 자를 가지고 들이대는 순간, 사랑은 없단다. 어디에도 없어. 지금이라면, 난 사랑에 억압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꿈꾸지도 않고 기만당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하는 게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네 아빠와 헤어지지 않고 세상의 높은 곳과 낮은 곳을 흘러갔을 거야. 사랑이든 아니든,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든 혹은 사랑을 지나가버렸든, 사랑이라는 개념 따윈 버리고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믿을 거야. 네 아빠와 난, 그것에 실패했어."   <p. 206>

가슴이 뻐개지도록 밀고 들어오는 진실들을 받아들이고 또, 승낙 없이 떠나려는 것들을 순순히 흘려보내려면 마음속에 얼마나 큰 강이 흘러야 하는 것일까. 진실을 알았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가혹한 진실마저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인 것이다.   <p.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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