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어찌 글을 이리 잘 쓸까, 하는 탄성이 나올 때가 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세계의 역량있는 작가들은 발군의 필력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특히 몇몇 작가는 글에 신성을 불어넣은 듯 마법적인 힘으로 읽는이의 심장을 뒤흔든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멋지고 아름다운 글로 인해, 그리고 그것이 주는 삶의 교훈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책 속에 파묻혀 산다.

  책 관련 블로그를 오픈한 지 어느덧 사 년 차가 되었다.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은 내 부족한 책읽기를 보완하고 정리하기 위함이요, 타인의 사유와 견해를 참고하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깊고 풍성한 책읽기를 견인한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총체적 의미와 부분적인 가치에 대해 글을 쓰며 정리하게 된다. 더 나아가 블로그라는 공간에 오픈함으로써 내 생각이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고 타자를 통한 다양성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독서에 왕도는 없기에 고집을 꺾고 보다 겸허한 자세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블로그 이웃님들로부터 글쓰기와 관련된 문의를 종종 받는다. 서평의 왕도나 글 잘쓰는 비법에 대해 물어올 때면 나는 한없이 민망해진다. 내 자신조차 미천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어찌 타인에게 조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님들의 질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잘 쓰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과연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온라인상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불편해진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글은 필자의 창조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창조적 행위이다. 필자의 생각과 경험과 철학을 필자만의 필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글에는 필자의 사상과 개성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누군가'의 개성이 글의 존재성을 결정한다. 최소한 '논설'의 규격을 갖추고 있는 모든 글은 철저히 필자의 주관에 의해 창조된다. 필자의 주관은 논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다.

  서평을 포함한 모든 리뷰는 하나의 논설문이다. 논설문이라 함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먼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그것을 '조리있게 풀어 밝히는' 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피력하는 것이 논설문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뼈대가 되는 것이다. 즉 글은 '주관'의 목적을 '객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글은 타자에게 읽힘을 전제로 한다. 더욱이 온라인에서 씌여지는 모든 글은 불특정다수가 읽는다는 것을 염두한다. 그것은 필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글이란 것은 내 생각의 갈무리를 넘어 타자를 향한 메시지이자 소통이다. 태동적으로 글은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필자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태도를 이끌어낸다. 동일한 소재라 하더라도 필자에 따라 글의 논지와 색깔은 분명 다르다. 다른 만큼 빛나고 개성이 있을수록 멋지다. 다양성은 선善이 된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글에 대한 최소한의 규격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기본이고 명확한 주관 피력, 조리있고 논리적인 서술, 합리적인 논거, 풍부한 어휘력, 매끄러운 문장력 등은 글과 읽는 이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그것은 필자의 주관적 개성과 함께 좋은 글을 완성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온라인상의 적지 않은 블로거들이 바로 이 부분을 망각한 채 리뷰라는 카테고리를 마치 자신의 일기나 낙서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며 읽는 이에게 가져야 할 신성하고 묵직한 최소한의 책임감조차 결여된 모습도 눈에 띈다. 물론 솔직한 건 좋은 것이다. 글에서 정직은 매우 중요하다. 솔직함이 언어를 힘있게 한다. 하지만 솔직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어휘와 문장을 넘어 하나의 완성된 글까지 텍스트는 다듬어져야 한다. 잘 써야 하는 것이다. 잘 쓴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글은 언제나 잘 쓴 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글은 타자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악한 문장을 솔직함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가리면서 큰소리 치는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들의 오해가 너무 불편하다. 노력과 예의가 결락된 자신의 혼잣말 수준의 낱말 조합을 좋은 글이라고 호도하며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조언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건 없는 듯하다. 글쓰기는 철저히 훈련으로 발전될 수 있다. 언어에서 말하기는 선천의 영역에 기대지만 글쓰기는 후천의 영역에서 다듬어진다.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채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형편없는 문장에 담아내면서 자신이 괴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솔직'과 '충격'이라는 요행보다 깊이있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책과 벗하고 인간과 소통하기를.

  솔직함으로만 작가가 된 이는 없다.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필력을 손보고 다듬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언어의 정수를 걸러낸다. 어떨 때는 하루 내내 한 문장도 쓰기 어려워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집필한 글을 수 년 동안 탈고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거듭된 탈고도 맘에 들지 않아 세상에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고통이다. 신성한 것이다. 나를 보는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고 의식하는 행위이다. 글을 향한 이러한 경외한 마음이 없다면 좋은 글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글쓰기의 '집중中'과 '성의意'를 의미한다.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는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좋은 글에는 반드시 필자의 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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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책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 장르와 목적이 결락된 채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책 추천 문의를 감당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이웃님들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진정성을 무시할 명분 또한 없다. 이에 나름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몇 차례로 나눠서 카테고리별로 선정하여 책을 추천해보는 것이다. 본래 미천한 리뷰어이기에 수준있고 깊이있는 책 추천은 힘들다. 그저 읽은대로 아는대로 느낀대로 정리할 뿐.

  일전에 '책좋사(네이버 독서카페)'에서 한 가지 테마를 정해서 책을 추천해달라는 문의를 받은 적이 있다. 어떤 테마를 선정할 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운영행태가 가관도 아닐 때였다.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선배세대가 피와 땀으로 쟁취해왔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에까지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 이런 되돌아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와 통찰'이라는 테마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와 관련된 책들을 소개하게 되었다.

  최근 황석영 작가의 『강남몽』을 통해 오욕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들을 훑어봤다. 다시 한 번 분노했다. 화가 나고 쓰라렸다. 그 책을 읽던 시기에 한국은 미국과 동해안에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중국은 뿔이 났다. 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적 발언과 위협은 꾸준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의 식민지배 공식사과 담화문이 연일 계속해서 핫뉴스로 방송을 타고 있었다. 불과 얼마전의 일들이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우리는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가. 과거의 역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알 수 있는 혜안과 용기는 어디서 공급되는가. 그리고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내적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순간, 한 시대에 한 획을 그었던 주옥같은 명저들이 있음을 생각해냈다.

   -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 『태백산맥』, 조정래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 『해방전후사의 인식』, 송건호 外 
   -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
   -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 『제 3의 길』, 엔서니 기든스


  위의 책들은 한국사회에 가장 영향을 준 책들로 손꼽히는 명저들이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금서 목록으로 올랐던 책들도 있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으로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미국의 추악함을 드러냈다. 동시에 중국 사회주의 속에 내재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리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도 읽어볼 만하다. 기존 지식에 고착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도전하게 하는 힘있는 책이다.

  읽든 안 읽든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거대서사 또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영향을 준 소설이다. 조정래의 강한 저력과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는 이 소설은 또 다른 대하소설 『아리랑』, 『한강』과 궤를 같이 한다. 역사의 주인이고 원동력인 민중의 발견, 민족의 비극인 분단과 민족의 비원인 통일의 자각, 민족의 현실을 망치고 미래를 어둡게 한 친일파 문제. 조정래는 세 작품을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여러 지식인들이 함께 공저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다. 송건호, 진덕규, 오익환, 백기완, 유인호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지금까지 대략 50만 권 정도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 손꼽는 불후의 저작이다.

  현상을 이해하고 학습하는데 내부보다 외부의 시각이 더 객관적일 때가 많다. 그런 차원에서 해외 저술을 살피는 것은 응당 필요하다. 그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놓쳐서는 안 될 책이다.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 중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공개되지 않았던 미국정부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했다. '침략 야욕으로 가득찬 북한의 남침' 일변도의 기존 6.25 해석에 '수정주의'라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당시 사회를 뒤흔들기도 했다. 냉전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있던 한국 학계에 전회에 가까운 쇼크를 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또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기든스는 이 책에서 사회주의의 처절한 실패와 자본주의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한다.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 '중도론',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대안적 진보이념의 목마름을 상당 부분 해갈해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등도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저서들이다.

  상기 추천했던 것들 외에도 눈여겨볼 만한 책들은 많다.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에서 엮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홍구 교수의 『특강』 등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고찰하는데 필요한 책들은 두루두루 추천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통찰력 있는 명저들을 통해 보다 명확한 사고와 지성있는 행동을 실행할 수 있다. 인간 삶의 기준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감각에서 의미로 전환시키는 일은 비단 지식인만의 의무는 아니다. 바로 '내'가 알고 '내'가 느끼며 '내'가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야만이 비로소 우리 사회는 변혁될 수 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 앎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속담은 종언을 고해야 한다. 과거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 국민은 아는 만큼 행복했고 모르는 만큼 불행했다. 제대로 알아야 비판할 수 있다. 올바른 앎이 정의를 만든다. 지성있는 국민이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무엇이 진실이었으며, 어떤 통찰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다시는 그 자유를 뺏기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는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유의 주체자로서 우리는 과거를 알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엿봐야 한다. 추천한 책들이 그것을 위한 앎과 용기의 전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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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Q84,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09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73289193

  

  2009년 '올해의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로 선정했다. 고심의 고심을 거듭했고 어쩔 수가 없었다. 올해, 하루키의 이 찬란한 두 권짜리 장편소설보다 더 강렬한 각인을 내게 선사한 책은 없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풍성하며, 가장 입체적인 소설이었다. 하루키는 '이야기'를 뛰어넘어 '소설'을 쓸 줄 아는 작가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시작된 그의 모든 비블리오 그래피는 <1Q84> 안에 역동적으로 춤추며 압축되어 있다.

  모든 것은 텍스트가 말한다. 다양한 소재를 결국 '사랑'이라는 거대한 테마 위에 올려놓는 하루키의 거대서사는 인간의 존재 토양이 결국 실재적이며 구체적인 사랑의 형태로 채워진다는 웅숭깊은 진리를 추출시킨다. 사랑 위에 사랑이 없으며 사랑 아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될 수 없는 사랑의 방정식을 천재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방대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내년에 3권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2권의 결말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독자들이 적잖은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완결은 곧 소설의 죽음이다. 해석의 다의성이 문학에서 절대선은 아니라 하더라도 독자의 진지한 사유를 끄집어내는 하루키의 의도는 충분히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3권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때 그것 나름대로의 평가와 의미를 부여하면 될 것이다.

  <1Q84>는 2009년 최고의 책이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2.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세계사, 2009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64366129


  인간은 항상 신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의 실존을 의문하며 탐구한다. 어쩌면 인간의 이러한 결벽증과 같은 신에 대한 호기심은 있는 그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반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등등 신에 대한 주인공의 강력한 의문은 결국 '오두막'이라는 공간에서 풀어지며 해소된다. 오두막은 주인공의 아픔이 극대화된 공간인 동시에 신이 그를 치유하고자 직접 나타나신 시공간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두막은 슬픔과 치유가 동시에 발생되며 공존한 곳이다. 인간 삶의 고통과 영광은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곳에서 작동하며 호흡한다. 작가는 그 명징한 진리를 삼위일체의 감탐할 만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그려냈다.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 소설을 꼽은 것은 아니다. 철저한 문학적 관점에서 선정함을 밝혀둔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꼭 읽어볼 만한 소설로 지인들에게 많이 선물했다. 자신있게 2009년 '올해의 책' 명단에 올려놓는다.

 

3. 청춘의 독서,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74529134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다섯 권 중 유일한 비문학도서다. 비문학에서 문학으로 점점 옮겨가는 내 독서패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책이다. 이 책은 노무현의 죽음으로 발생된 유시민의 고독이 현실세계에 대한 허무로 연결된 배경을 내밀하게 밑바탕에 깔고 있다. 책 속에서 물밖으로 팽개쳐진 물고기와 같다고 고백한 유시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 절대고독의 자장에서 저자는 도스토옙스키를 찾았고 마르크스를 찾았으며 푸시킨을 찾았던 것이리라.

  유시민의 수많은 저작 중 이 책을 최고로 꼽는다. 이 뛰어난 고전 예찬론을 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4. 누란, 현기영, 창비, 2009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68858251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묵묵하게 사실적으로 써내려갈 때 그 사실은 더욱 사실적이 된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나 과도한 형용이 부재하다 하더라도 사실은 사실 그 자체적인 방법으로 사실의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현기영의 소설이 그렇다. 그는 아픈 역사를 묵묵히 사실적으로 얘기한다. 꾸미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그저 '서술'할 뿐이다.

  1980년대로 대변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처를 소설가 현기영은 매우 건조하고 직선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우리 선배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대가는 어떠했는지 극도의 건조한 문체를 통해 독자의 가슴을 일렁케 한다. 역사는 후세에 기억되어야만이 비로소 진정한 '역사'가 된다. 현기영의 소설이 반드시 읽혀져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5.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2009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64129090


  한국문단에 박민규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기쁨이다. 박민규의 상상력과 발칙함은 한국문단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김애란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미래에서 가장 조명받는 소설가로서 박민규가 갖는 위치는 과히 대단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를 잘 설정했다. 잘 읽히지만 가볍지 않으며 흥미있지만 대중적이지만은 않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핵심 권력인 '외모'를 소재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이끌어냈다. 더욱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도와 멀티 엔딩을 통한 반전 효과는 수준급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독특한 소재를 통해 중량감 있게 전달한 박민규식 서사에 박수를 보낸다. 술술 잘 읽히면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박민규이기 때문에 가능한 소설이다. 응당 '올해의 책'으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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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보다."


  오랜 시간 동안 잊혀져 있던 책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책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울림을 선사한 책이라는 사실을 또한 깨달았다. 어쩌면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을 전회에 가깝도록 바꿔주었던 가장 소중한 책으로 내 무의식 속에서 지금껏 존재해왔을지도 모른다.

  유시민의 신간 <청춘의 독서>를 통해 나는 내 잠재의식 안에 자그만 방을 만들어 숨쉬고 있던 불멸의 고전 한 권을 끄집어냈다. 오래전 처음 그 책을 만났을 때 놀라고 전율했던 기억까지 함께 끌어올렸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버트런드 러셀과 카를 마르크스가 동일점에서 통합되는 것을 확인했다. '책읽기에 대한 열정'과 '세계를 변혁하는 힘'은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이다. 에드워드 헬릿 카(Edward Halle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는 다시 이렇게 내 손에 안착했다.

  모든 문명과 모든 시대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며 정신 문명이 진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카는 이 불멸의 저서를 통해 논증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는 카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게는 내 인생의 30년에서부터 크게는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드시 진보했다. 이 명징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소망있게 한다.

  기존의 번역본과는 다른 것을 찾았다. 처음 읽었던 책은 범우사의 것이었고, 수년 전에 읽은 책은 김택현 씨가 번역한 까치출판사의 것이었다. 금번에는 권오석 씨가 번역한 홍신문화사의 것으로 선택했다. 가장 최근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현대인이 읽기에 가장 무난하고 평이하다는 평에 따른 것이었다.

  유시민은 인생의 고비마다 이 책을 집어들었다고 고백했다. 그와는 입장과 처지가 다른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내게 '인생의 고비'라는 거대한 수식어구가 이 책을 다시 읽는 명분으로 배치될 필요는 없다. 다만 유시민의 50년 인생에서, 그리고 30년이 조금 넘는 내 인생에서 이 한 권의 책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동일한 기호가 작용되었을 따름이다. 요컨대 그저 다시 읽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오늘, 불후의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는다.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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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인기가 녹록지 않다. 출간 10개월 만에 100만 부를 달성, 국내 순문학 단행본으로는 최단 기간 100만 부 돌파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다. 많이 팔린다고 해서 좋은 책은 아니다. 평소 베스트셀러에 주관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기에 오히려 대중적인 문학에 대한 나름의 편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책에 대한 평가는 종내 '텍스트' 자체로 귀결된다. 텍스트가 곧 진리요 본질이다. 바로 그 기준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참 잘 쓴 훌륭한 소설이다.

  이미 나는 지난 두 번의 서평을 통해 이 소설에 대해 전례가 드문 찬탄을 선사한 바 있다. 신경숙만이 쓸 수 있는 완전한 문체로 엄마라는 소재에 대한 기존의 통속성을 완벽히 무너뜨린 찬란한 텍스트에 대해 나는 별 다섯 개로도 모자라다며 징징대었었다. 정말 잘 쓴 완벽한 소설이었기에 책의 막장을 덮은 후의 좋은 느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평評은 객관 위에 주관을 올려놓는 작업이다. 동일한 작품일지라도 각 사람의 기호와 판단에 따라 평가는 엇갈린다. 어떤 사람에게 셰익스피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재가 된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영국에 의해 과대포장된 범상한 극작가에 불과하다. 사람은 각기 다르다. 다양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다양성에 대한 깊은 지성과 이를 관용容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가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을 인정할 때 위대하다. 다름은 곧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문학을 보는 잣대와 기준에서도 적용된다.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각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소설이 잘 쓴 소설임에는 대부분이 공감한다. 하지만 보다 디테일한 문학적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잖다. 어떤 사람은 <엄마를 부탁해>가 잘 쓴 소설임은 인정하지만 평단과 대중의 과도한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소설은 범상의 영역에서 창조될 수 있는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아마 그들은 이 소설이 모성母性이라는 식상한 소재를 반복했다는 점 자체를 전제적으로 꼬집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아직도 특별하고 예민하며 뜨거운, 하지만 동시에 진부한 '감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대한 내 찬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대목에서 발산된다. 소위 '엄마 서사'로 명명될 수 있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진부하지 않게 철저히 문학적으로 썼기 때문이다. 즉 통속성의 파괴와 섬세한 문학미가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거기다 신경숙의 발군의 문체는 보너스다.

  질문하자. 한국 문학사에서 이 소설 만큼 장편소설의 형태에서 모성의 내면과 외면을 동시적으로 깊이있게 조명한 작품이 있었던가. 만약 있다면 한 권 추천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성의 성질을 일면적 조명이 아닌 다면적 조망으로 풀이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엄마라는 주제에서 우리의 사유를 보수화했던 "여성女性 = 모성母性 = 성모= 신성性"이라는 전통적 공식을 일거에 거부한 신경숙의 '마지막 한 방의 충격'은 과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또한 나는 신경숙 만큼 완벽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물론 소설가마다 갖는 문체의 특징은 다양하다. 문체의 개성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섬세함으로 풀이되는 신경숙 문체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각각의 문장들이, 조사 하나하나의 쓰임새까지도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소설의 각 단어와 문장이 갖는 함축적 속성과 비유적 울림이 곧 시詩라는 천재적 영역에 닿아 있다. 소설의 형태에서 시적 효과를 담아내는 발군의 문장력을 가진 작가다. 요컨대 신경숙은 소설로 시를 쓰는 소설가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한 말들은 좋아한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피로 쓰라'는 니체의 주문은 곧 성의를 다해 쓰라는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신경숙은 성의를 다해 문장을 완성하는 작가다. 소설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본질에서 신경숙은 자유롭다. 성의와 집중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아마 니체가 지금 살아있다면 신경숙의 소설을 탐독하지 않았을까.

  너무 잘 쓴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흐뭇하다. 한국 문학사를 다시 쓴 소설가 신경숙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싸인 양장본 소장을 위해 지갑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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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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