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네이버후드 어워드 시상식에 다녀왔다. 책리뷰 부문 WINNER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생각보다 꽤 큰 규모의 시상식이었다. 네이버의 위력을 실감했다. 큰 규모의 시상식장, 아이팟 터치를 비롯한 각종 상품과 기념품들, 적잖은 수상금액, 사회자 서경석을 위시한 각 파트별 심사위원들의 참석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규모'였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양보단 질이다. 나는 금번 네이버후드 어워드를 참석하며 느낀 두 가지 질적인 부분과 그에 파생된 개인적 소망을 논지한다.

  먼저 네이버후드 어워드는 탈권위적이었다. 모든 시상식에는 '권위'가 전제하기 마련이다. 권위있는 상을, 권위있는 수상자에게, 권위있게 수상하는 게 모든 시상식의 특질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모든 아마추어 리뷰어들이 꿈꾸는 상이자 대한민국 최대 포털에서 수상하는 상이라는 점에서 네이버후드 자체의 권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반면 수상자들이 권위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투표와 심사위원의 엄격한 심사에 의해 선정했다는 네이버측의 공지만 있었을 뿐 그것이 얼마나 공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가를 받아들이는 경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건 시상식 내용의 권위에 관한 것인데, 시상식 내내 탈권위를 지향한 진행 내용에 내 얼굴은 미소를 지었고 마음은 편안했다. 

  21세기는 소위 탈권위의 시대다. 각 계의 모든 분야에서 권위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권위'와 '무게감'이 유사한 느낌으로 인식되던 시기는 끝났다. 예컨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라. 사회자는 유머로 일관하며 수상자는 온갖 개성을 뽐낸다. 작은 규모의 상에도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고 소소한 이벤트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카데미 영상 그 어느곳에도 권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평온하고 유머러스한 인간미만 존재할 뿐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현재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 흐름은 권위 타파로 자유의 무한대로 간다를 지향한다. 시상식의 준비와 내용을 통해 네이버후드가 전해준 정서적 평온함은 대한민국 최대 포털사이트의 존재감을 방증한다. 편안한 인상의 코미디언 서경석의 재치있는 사회는 이를 뒷받침했고 본래 일정을 다소 빗나갔음에도 시기적절하게 유연성을 발휘한 스텝들의 운영력에서 기분 좋은 시간의 초과만이 허락되었을 뿐이다.

  또한 네이버후드 어워드는 열린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수상자는 물론 최종후보자, 기수상자, 동반인들까지 넓은 홀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서 자리를 빛냈다. 만약 수상과 관계된 사람만이 자리를 채웠다면 네이버후드는 그저 그런 밋밋한 이벤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EL타워는 지성만 있고 사랑과 인류애는 결락된 건조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버 이용자가 아니더라도 동반인이라는 명분으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게 한 네이버의 배려는 블로거와 비블로거와의 간극을 좁혔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의 경직성을 순화시켰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공공의 이익과 평화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다양성은 절대선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는 문화에서 다양성은 만개하며 '창조'는 범람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단지 온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프라인과 구별짓는 행태는 무의미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구별되면서도 동일하다. 둘 다 창조와 운영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교집합을 가진다. 네이버후드 어워드가 위대했던 것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 그리고 그 둘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현장 그 자리에서 생생히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시상식에 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했다. 그곳에서 온라인 '다윗'과 오프라인 '어머니'는 동일한 인간으로 함께 존재했다. 열린 공간 네이버후드 어워드는 곧 '인간'이었다.

  네이버후드 어워드를 통해 얻은 두 가지 좋은 느낌은 곧바로 네이버의 역할론으로 치환된다. 한국을 IT 강국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하드웨어 코드로만 IT 한국을 읽었을 때다. 한반도 지하를 관통하며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광랜과 인공위성으로 전파를 조달받는 인터넷 무선 서비스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인프라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반면 콘텐츠는 매우 빈약하다. 100메가 광랜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1인칭-3인칭의 '정보'가 아니라 1인칭-2인칭의 '교류'다. 미국을 보라.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라도 콘텐츠가 매우 깊고 풍부하다. 지식과 정보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들에게 블로그는 도서관의 다른 이름이다.

  인터넷 예절 또한 한국의 수준은 심각할 정도로 저질이다. 생각없이 쓴 네티즌들의 덧글에 상처받은 일류 여배우는 종내 목숨을 끊었다. 익명성의 모순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책임지지 못할 독문장을 뿜어내며 인터넷 사디스트가 된다. 사실의 호도, 욕설과 비방의 난무, 글쓰기 수준의 저급성, 공인의 민감한 대응 등 KTX의 속도가 퍼나르는 것은 인간과 정보가 아닌 다량의 쓰레기뿐이다. 심각한 현실이다.

  네트워크 소프트웨어의 빈곤과 인터넷 예절 문화의 저급성이라는 현실 앞에 초거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역할과 의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네이버는 분명 일위다. 현재 네이버의 아성을 무너뜨릴 포털은 없다. 2위 다음과의 격차는 아직도 산너머 산이다. 당분간 네이버의 헤게모니는 굳건할 것 같다. 중요한 건 '일위位'와 '일류流'는 다르다는 점이다. 네이버가 일위를 넘어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작금의 한국 인터넷 콘텐츠와 예절 문화가 갖고 있는 가난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질 좋은 콘텐츠 생성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고 매너있는 온라인 문화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 상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는 기업이야말로 일류가 되는 전제조건임은 100년의 자본주의사는 잘 보여준다.

  3년째 지속되고 있는 네이버후드 어워드는 바로 이러한 의지를 담은 NHN의 열정일 것이다. 네이버후드가 지속되길 바란다. 매년 양질의 우수한 콘텐츠를 창조하는 훌륭한 블로거들을 많이 발견하여 소개해주길 기대한다. 이땅의 수많은 블로거들이 지식 탐구와 정보 전달을 위해 무던히 수고하고 있으며, 그들의 노력이 모여 한국의 인터넷 콘텐츠가 거대한 도서관으로 변혁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전달해주길 바란다. 네이버후드 어워드가 열 번째 정도 열리는 즈음에는 우리의 인터넷 문화가 몇 단계 차원 상승을 이룰수 있지 않을까. 그 강력한 기대감 앞에 내 열정 또한 담보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9-01-22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작년 이맘때 어떤 분의 수상소감 비슷한 걸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읽은 시상식장의 느낌과 비슷하네요.
 

  모든 리뷰어들의 꿈인 네이버후드에 제 미천한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이 시대의 대중지성을 만들어가시는 훌륭한 분들과 함께 설 수 있어 기쁩니다.

  블로그라는 공간에 서평을 써온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되어갑니다. 가진 지식의 일천함과 깊이없는 성찰력을 피부로 느끼면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들과 지성있는 블로거들과의 교류를 통해 내게 결핍된 앎과 지혜를 충전하기도 합니다.

  책읽기는 타인의 머릿속의 소우주와 조우하는 것입니다. 내 머리가 남의 머리가 되어 사유하는 일입니다. 책을 읽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랑을 알고 배우게 되며, 지식을 축척케 되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고양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아를 향한 역동적인 질문과 자기 확인을 쉬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책은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입니다. 세계 속에서 작동하며, 세계를 비틀고, 세계를 만들어내는 책이지요. 그런 책이 많아질수록 지구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 많아지고, 많이 발굴되고, 많이 읽혀져서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좋은 책을 발굴하고, 읽고, 소개하겠습니다. 좋은 서평 쓰겠습니다. 

  일천한 책벌레에게 큰 영광을 주신 네티즌들과 네이버측에, 그리고 심사위원으로 수고하신 공지영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네이버후드 링크주소 : http://campaign.naver.com/naverhood2008/main4.html


 
bY David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9-01-1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축하드립니다. ^^ 큰거 하셨습니다.

진주 2009-01-1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네이버에 이런 제도도 있었군요~
잘은 모르지만 다윗님은 상 받을만한 장한 분이시리란 느낌 들어요^^*
축하드립니다~
 

1.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2008  

  2008년도 올해의 책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선정했다.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작가 신경숙은 이 소설을 작정하고 썼다.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이 소설 안에서 『깊은 슬픔』을 읽었고, 『외딴방』을 읽었으며, 『리진』을 읽었다. 이 소설이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는 단선적 평을 거부한다. 단언컨대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인류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찬연한 오마주다.

  신경숙의 모든 문학적 연대기가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합일되고 집대성되었다. 더이상 수식이 필요없는 올해 최고의 책이다. 강추한다! 

 
 

  

 

 

2.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열림원, 2007

  할레드 호세이니 만큼 소설을 소설답게 쓰는 작가는 드물다. 문학적 감동을 위해 활자는 굳이 난해할 필요가 없고 무거울 필요 또한 없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여성성의 위대한 아가페적 가치를 찬탄한 서사라면 이 소설은 두 남자의 우정과 의리를 그린 서사다. 혹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여성들이 읽어야 할 소설로, 『연을 쫓는 아이』를 남성들이 읽어야 할 소설로 가름하곤 한다. 하지만 굳이 읽을 대상을 나눠 구분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두 권 모두 세상 모든 아들딸들이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텍스트라는 점이다.

  훗날 내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 소설 만큼은 반드시 읽히게 하고 싶다. 좋은 책은 아무리 곱씹어도 질리지 않고, 활자는 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불변한다. 그럼으로써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과 가치관에 주관적 언론을 선사한다. 그게 문자문화의 위대함이며, 문학의 힘이다.

 

3.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경향신문특별취재팀, 후마니타스, 2008 

  칼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의무로 세계의 반영과 해석이 아닌 세계의 변혁을 주문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지식인이 바뀌어야 세계가 변화한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성한 이 대한민국 지식인 보고서는 한국 지식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잘 담아냈다. 서구 선진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식인 도형을 가진 한국 지식사회의 단면을 파헤침으로써 과거의 굴곡진 역사와 오류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현재상을 궁구한다.

  새로운 시대다. 민주화는 이미 달성됐다. 다른 의미와 가치를 향해 나아갈 때다. 과연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급변하는 시대에서 20세기와 21세기의 변화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4.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문학동네, 2008

  작가 황석영은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의 텍스트에는 작가로서의 기백과 문학적 역량, 공감할 만한 주제와 작가 의식이 웅숭깊게 배어 있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황석영 자체가 텍스트며 문학이다.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의 문학적 연대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그가 출감 이후 쏟아낸 작품들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오래된 정원』, 『심청』, 『손님』, 『바리데기』는 모두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의 무대로 이슈화시키며 고민한 작품들이다. 개인보다 사회를 고민하며 궁구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개인 황석영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 황석영의 문학적 공간은 배로 넓어졌으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노벨문학상은 한국에 언제 돌아오려나. 개인적으로 고은 시인보다 황석영을 노벨문학상에 더 근접한 작가로 꼽는다.

 

5. 붉은 비단보, 권지예, 이룸, 2008 

  한국문단에는 훌륭한 여류작가들이 많다. 그래서 행복하다. 공지영이 있고, 신경숙이 있으며, 은희경이 있고, 조경란이 있다. 정이현도 있다. 그리고 권지예. 그녀도 있다.

  금년에 만난 소설 중 권지예의 장편소설 『붉은 비단보』는 단연 인상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온전한 서사로 한 여인의 뜨거운 예술혼과 웅숭깊은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너무 잘 쓴 완벽한 소설이다. 

  요 몇년간 여성성의 위대함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국내에 많이 출간됐다. 약속이라 한듯이 전부 잘 쓴 소설들이다. 하나같이 찬연하고 아름답다. 그러면서 난 느꼈다. 여성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인내'와 '아가페'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찬란한 태양을 찬탄하며, 매우 잘 쓴 소설 『붉은 비단보』를 추천목록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bY David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치유 2008-12-3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밥바라기별을 빨리 읽고 동감하고 싶네요.
새롭게 붉은 비단보 보관함으로 담아갑니다.
 

한바탕 울고 난 뒤에 바라보는 풍경은 늘 울기 이전과 다르다. 맺혔던 것이 울음으로 대신 터져 가슴속에 후련한 여백이 생기는 까닭이다. 여백을 지닌 가슴으로 바라보면 같은 풍경도 그 흐름이 완만해진다. 완만함 속에 순순히 몸을 맡기게 된다. 그 순간 버리지 못할 것은 없다.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p. 36>

그런 사람들이 있다. 주변상황이 자신을 위해 빈틈없이 봉사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 잘 구획된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보다, 엉성하더라도 스스로 시스템을 구축해나갈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안정과 명성보다는 새로움과 호기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절대 다수가 세상을 존속시킬 때,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p. 48>

우리가 언제, 무엇을 입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타고, 어디로 향해 가는가 등에 따라 풍경은 전혀 다른 정서를 전한다. 풍경은 늘 그곳에 같은 모습으로 있으나 작은 변화에도 이리저리 들썩이는 우리의 유동적인 마음이 전혀 다른 해석으로 풍경을 건져올리는 것이다.   <p. 109>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오직 그 순간의 무게만큼만 짊어진 공기처럼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p. 221>

어떤 것이 먼저 오고 어떤 것이 나중에 오느냐의 차이일 뿐, 모든 순간은 동등하다.   <p. 236>

우리가 심장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사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절제'나 '인내'라는 고무적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억압'이나 '위선'이란 어두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과정. 그러나 모두가 다 육중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심장에 정직한 이들의 경박함을 만날 때 막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심장에 정직한 이들은 적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은 심장 박동을 '안정'적으로 뛰게 하기 때문이다.   <p. 275>

나이가 들수록, 사랑의 정의는 단순해진다. 십대에 빚는 사랑의 정의가 거대한 금빛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다면, 이십대에는 거기서 금빛을 벗겨내고 날개를 떼어낸다. 그리고 삼십대가 거의 다 끝나는 중년의 지점에 이르면, 천사의 척추만이 남는다. 서로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지고 다시 정중해지며,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을 주고받더라도.   <p. 277>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속에 깨달았다. 그동안 한 번도 '완전한' 세상을 보지 못했음을. 내가 보았던 것은 인간의 세상이었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일정 부분 거세되고 손질되고 격리되거나 치장된 것들의 세상. 그토록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인간'이라는 긴장을 조성하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이 흩어져 거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이 "보기에 참 좋더라" 하셨던 '보기 좋은' 태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p. 318>

지평선이란 우리의 시각적 한계일 뿐, 그 어떤 지평선도 기어이 둥근 지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잇는 그물망의 한 획일 뿐임을. 달리고 또 달린다는 것은 닿고 또 닿아 있는 일임을.   <p. 332>

미래란, 그리로 다가갈 구체적인 수단과 목적이 주어질 때만 존재하는 시제인지도 모른다. 수단과 목적을 찾지 못해 암담한 이들에게 미래란 허공과 다름없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다만 어두운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나 한줄기 빛을 잡고 나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는 길이다. 발밑에 놓인 단단한 길, 한 발자국이 다음 발자국을 이끄는 길.   <p. 403>

어떤 여행지는 도착하자마자 여행자를 손아귀에 움켜쥔다. 반면, 어떤 여행지는 여행자가 정지한 채 기다려야 한다. 이동을 거듭하던 여행자에게 더 차분해질 것을 명한다. 고여 있을 것을 명한다.   <p. 446>

모든 여행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 주기가 있다. 방전될 때 여행자는 길 잃은 미아가 되고 충전될 때 이름 없는 철학자가 된다.   <p. 521>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89976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배 질서를 깨는 일에 지식인들은 왜 흥분할 줄 모르는가. 사르트르는 또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갈등은 해소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지식인은 이렇게 조용히 죽어 가고 있는가.   <p. 14>

실제 법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 모두 테크노크라트라는 겁니다. 행정 고시에 합격하면 해외 유학도 지원해 주잖아요. 정말 열정을 갖고 공부합니다. 도덕적으로 테크노크라트를 의심하지 않는 편입니다. 밤새 기획안을 짜며 나라를 어떻게 설계하고 디자인할까 하고 애국심에 불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테크노크라트의 지배가 실제로 시민운동까지 장악하고 있고, 지식인 위기의 어떤 중요한 측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표상이나 대의 질서로부터 테크노크라트는 이탈하고 대중은 추방되고 있습니다. 지식인이 서있는 자리는 모두가 떠나 버린, 실제로는 지식인 스스로도 떠나 있는 텅빈 자리입니다.   <p. 37>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p. 53>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라는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p. 54>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p. 56>

인문학의 존재 이유는 대중과 소통해 대중에게 좀 더 나은 진보적 세계관을 이야기해 주고,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대중의 생각과 욕구를 대신 표현해 주는 겁니다. 자본주의로 인해 상실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인문학의 힘입니다.   <p. 83>

현대인은 모두 자기기만의 모순에 빠져 있다. 그래서 단순한 쾌락이나 사회적 요구에 의한 가식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기만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벗어던지고 윤리와 총체적 인격 완성으로 이끄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지향하는 것이 시민운동 지식인의 본질이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일정한 발전 곡선을 그리는 역사·계급을 포함한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 본질의 원형 또는, 우주적 실재로의 영원회귀를 갈망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가슴속에 품어 왔던 진정한 삶의 본질로서 인간의 존재 의의를 되찾는 근원이다.   <p. 171>

지배계급을 대변하든 피지배계급을 대변하든 나는 이제 그런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상황을 보건대 지식인은 더는 자기 계급의 지배를 위해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식은 권력과 자본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곧바로 권력과 자본이고, 대중의 투쟁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대중의 투쟁 자체다. 지식인들은 한편에선 곧바로 통치자와 자본가일 것이고, 다른 한편에선 대중들의 지적 네트워크일 것이다. 나는 지식인의 죽음이 찾아온 이 시대가 결코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 높은 파수대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현자는 잃었지만, 저 넓은 세계에 걸쳐 있는 무수한 익명의 현자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p. 222>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27935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