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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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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드디어 이문열의 『초한지』의 첫 편에 손을 댔다. 자신을 비워 세상을 담아낸 큰 그릇 유방과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뒤덮은 영웅 항우. 두 영웅이 중국 대륙의 패권을 위해 겨룬 난세의 영웅 이야기가 이문열의 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2002년부터 4년 동안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이문열의 『초한지』는 많은 독자들의 애탄 기다림을 유발시키며 금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이에 이미 『삼국지』와 『수호지』를 통해 이문열 특유의 이야기 재구성 능력에 적잖이 경도된 나는 금번 초한지의 첫 권을 펼치자마자 한달음의 속도로 막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목의 부제 '짧은 제국의 황혼'은 1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를 명확하게 함의한다. 혼란했던 중국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거대 제국을 탄생시킨 진시황제의 치세와 그 이후 전개되는 또 다른 성질의 혼란상을 그리고 있다. 영웅은 난세에 꽃핀다고 했던가. 훗날 천하를 두고 다투는 유방과 항우, 그리고 둘을 도와 영웅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수많은 사나이들의 소개가 흥미있게 펼쳐진다. 

  『초한지』의 본 이야기의 흥미로움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전면 '글머리에'에 남긴 이문열 자신의 소회다.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p. 21, 글머리에>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피로와 무력감을 느낀 작가 이문열. 그는 이를 극복키 위해 중국 고전문학으로의 도피를 실행한다. 이미 『삼국지』와 『수호지』의 평역을 통해 문학적 긴장으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했던 그는 동일한 의미의 연장으로 『초한지』를 손에 잡는다. 요컨대 고단한 한 세월을 넘겨 보려는 자신의 의지를 중국 최고의 고전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가로서의 기백과 강단은 한 소설가의 지독한 고독과 번민, 문학적 긴장과의 싸움, 이에 대한 회복과 열정에 대한 의지가 충만히 담겨 있어 독자의 가슴을 파고 든다.

  이문열의 내적 고뇌가 철저하게 반영된 야심작 『초한지』. 시리즈의 열 편 중에서 단 한 권의 막장만을 확인했지만 이문열 특유의 문체와 이야기 전개 능력은 단연 압권이다. 2편으로 연이어 계속해서 만나게 될 흥미진진한 중국 고대사를 생각하며 강렬한 기대감을 발산시킨다.

  『초한지』의 핵심 감상 포인트는 응당 유방과 항우의 리더십 차이일 것이다. 두 영웅의 지략과 용인술의 차이를 관조하면서 작금의 시대상에 견주어 보는 것은 매우 큰 흥미거리이다. 개인적인 능력에 있어 항우가 우위에 있었음은 대부분의 해석이 일치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리더십의 필요충분조건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초한楚漢의 역사는 명징하게 교훈한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로 인해 훌륭한 책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천하를 얻은 유방과 기세는 대단했지만 오만해서 실패했던 항우라는 두 인물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현실 리더십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초한지』 감상의 백미리라.

  『초한지』가 뿜어내는 매력의 폭은 더욱 넓디 넓다. 두 주인을 도와 난세를 헤쳐 나가는 수많은 영웅 군상들의 활약을 보면서 가슴을 두근거리고 손에 땀을 쥔다. 장량, 한신, 범증, 소하 등 난세의 영웅들이 초한楚漢 쟁패의 주인공이 되어 거대한 서사 속에서 용솟음친다. 과연 2편부터 이어질 본격적인 영웅들의 이야기를 작가 이문열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1편을 한달음의 속도로 마무리한 이 미천한 독자는 장장 10권에 이르는 장중한 초한楚漢의 역사 속으로 침투한다.

"삼국지와 수호지는 제가 단순히 평역했던 것이에요. 반면 초한지는 제가 중국 역사에 관해서 스스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죠. 그래서 매우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에요."   - 작가 이문열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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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지난 5년동안 노무현 정부는 많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양극화로 분열시켰다. 소득 5분위 배분율의 1분위와 5분위가 5년 전에 비해 5배나 증가한 경제적 양극화는 물론이요, 행정수도 이전과 부동산 문제로 인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적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와 위치에서 국민들을 갈라놓았다. 이러한 적지 않은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결과물들 중에 '이념'이란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소위 '보수'와 '진보'로 분리된 정치 이념 논쟁은 헌정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극적인 논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보수이며 무엇이 진보란 말인가? 

  220년 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웠다. '자유'와 '평등'의 인권의 절대적 기본 가치는 이후 민주주의의 태생과 발전을 통하여 더욱 공고히 다져지며 20세기 자유민주주의 만연의 핵심 아이콘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보수의 태생은 '자유'이며, 진보의 태생은 '평등'이다. 그렇기에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며, 진보는 사회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 사실 현재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각 나라마다의 정치적, 지리적, 민족적 특질로 인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조금씩 달리 읽혀지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하면 보수정권이 공무원 수와 국민세금을 줄이며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반면, 진보정권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우파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은 정부를 지향하고, 좌파는 크면 클수록 좋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의 가지를 추가하여 의문의 열매를 생산해보자. 과연 그렇다면, 국가와 개인은 어떠한 함수관계로 표현될 수 있을까? 국가가 개인에 간섭하고 통제하는 공권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행사되어야 할까? 한 사람의 인권은 그 어떤 사람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라는 점을 응당 인정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얼마만큼 누리며 만개할 수 있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보혁保革'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재차 역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해왔던 민주주의의 역사를 한 눈에 응시하게끔 하면서 깊이있는 사유의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19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적인 환경의식'을 지녔던 사람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시민의 불복종』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하고 있다. 이 책이 쓰여졌던 19세기 중반은 미국에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엄존하고 있었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이 그것이다. 소로우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의 비명분非名分에 항거하여 인두세를 국가에 납부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감옥에 투옥되면서 과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억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농밀한 사유를 전개한다. 소로우는 말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p. 13> 

  소로우는 계속해서 갈파한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이며, 결국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로우가 국가를 바라보는 냉소적 시각은 개인의 자유를 가치적으로 극대화하는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 더욱 차가워진다. 2,500년 전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을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의 질서와 수용을 강조한 것과는 철저히 배치되는 신념인 것이다.  

  누구의 주장이 정답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방점은 소로우가 생존했던 당시의 시대상에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라는 소로우의 주장이 작금의 시대에 펼쳐졌다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던 18세기 후반이 강력한 연방국가 '미국'의 태동기라는 점, 그리고 개인의 능력과 자유에 대한 진보된 사색이 없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소로우의 신념은 과히 혁신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어쩌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책이라 꼽히는 『시민의 불복종』이 갖는 문학적이고 사상적인 존재감은 19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적인 문학과 사상의 사유를 펼친 소로우의 영향력을 여가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작금과 같은 다양함의 시대에 소로우의 논지를 무조건 대입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 또한 중요한 시대이다. 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또 다른 <자유>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법과 질서의 유지, 국토와 국민에 대한 보위, 치안과 안전을 담당하는 등의 국가의 기본적 역할은 한 개인의 자유가 안고 있는 불완정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리라. 

  가장 좋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쌍방통행의 신뢰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은 애국심을 갖고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는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무던히 힘쓰는 것, 나는 그것이 선진국가를 추동推動케 하는 에너지임을 믿는다. 보수와 진보를 논하기 전에 개인에 대한 국가의 방향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방향이 신뢰 차원에서 공고히 일치할 때에 행복한 국민과 강건한 국가가 공존할 수 있음을 부언한다. 

  책 속에는 《시민의 불복종》 외에도 소로우 자신이 생전에 집필했던 자연 에세이가 몇 편 수록되어 있다. '낙엽'과 '사과'를 위시하여 식물 세계를 상찬하는 소로우는 자연에 대해 심히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월든』이 호숫가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생활한 2년간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소로우 자신이 자연을 얼마나 겸허히 경배하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자연은 그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을 거부하지 말라. 인간은 겨우 몇 가지 자연식품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각 계절은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127>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간섭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아낌없는 상찬을 소로우 자신의 메타포적 활자로 그려내고 있는 단편집 『시민의 불복종』은 19세기에 살았던 사람이 마치 21C 작금의 시대에 현현顯現하여 논설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역동적이며 강렬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소로우로부터 적지않은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외국에서는 소로우의 존재감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함석헌 선생은 솔깃한 추천사로 소로우의 세계를 안내한다. "《시민의 불복종》을 일반인에게 소개하는 것이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이었다. 소로우는 역시 위대한 인물이다!"라고. 아직 읽지 않은 독서가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p.   16> 

낙엽들은 우리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자신의 불멸성을 자랑하지만 낙엽만큼의 기품과 성숙함을 가지고 죽음에 임할 날이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자를 때처럼 '인디언 여름'과도 같이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의육신을 떠날 날이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p.   101> 

 

Thanks to 베로니카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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