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만인가. 헤세의 불멸의 작품 <데미안>을 다시 만난 지가. 이십 대 초반 처음 만난 <데미안>은 나에게 지독한 소설이었다. 융의 심리학과 소설의 멀티구조를 알 리 없었던 그 시절의 <데미안>은 무의미한 관념과 철학의 산더미로 내게 다가왔다. 그 산더미가 무너지고 내 속에서 '새로운 <데미안>'이 세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새로운 <데미안>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면서 내 머리와 가슴을 내 진본 속으로 하염없이 밀어넣었다.

   <데미안>은 신비한 소설이다. 성장소설이 분명한데도 청소년이 읽기는 부담되고 벅차다. 초반은 어려움 없이 읽힌다. 그러다가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는 지점부터 헤세의 문장은 쉽지 않은 사유의 심연 속으로 잠수한다. 선악의 이중성, 신성神性의 양면적 고찰, 자아로의 끊임없는 침잠,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등 소설은 적지 않은 소재를 관통하면서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주지하다시피 <데미안>의 핵심주제는 '자기탐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내면에서 샘솟는 울림을 경청하고, 그것을 통해 '참 나'를 찾아가며, 그 찾아감 속으로 실제 나아가는 삶, 을 지향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은 싱클레어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철저히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플롯 구도 가운데 데미안을 위시하여 싱클레어가 흠모하고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맺기를 통해 이야기를 생성시킨다.

   싱클레어의 관계맺기는 유의미성 측면에서 세 인물로 연결된다. 친구 데미안, 오르간연주자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시종 싱클레어의 정신세계를 압도하며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에서 제기된 종교, 관념, 철학, 사유, 의식 등의 모든 실타래들은 이 세 인물을 통해 제시되고 공유된다. 싱클레어와 그들 사이의 묘한 종속성과 신비한 거리감, 그리고 약동적 피드백성은 소설을 이루는 주요한 뼈대가 되고 있다.

   내가 <데미안>에서 가장 깊게 고찰한 부분은 '신성의 양면적 천착'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야 할 궁극은 '아프락사스'라는 신"이라고 얘기한다. 이전까지 싱클레어에게 신성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선'으로서의 통속성·관습성·교조성의 의심없는 수용이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이 엄연하게 공존하는 신이다. 요컨대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실제의 나'가 되어가는 과정은 병립적竝立的 관계로서의 선악세계를 받아들임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헤세의 이단적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는 소설 속에서 '카인과 아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야곱의 씨름'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미안의 풀이를 통해서도 은연히 드러난다. 기존 진리의 불변성을 전복시키는 데미안의 해석은 기독교에 대한 헤세의 반항적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헤세의 의지를 추론해보건대, 소설 속의 데미안 식 해석은 본질적으로 신성 모독을 통한 교리의 파괴가 아닌 신성 재해석을 통한 인간 내면의 명징화·개성화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은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본체가 아닌 이상 전제적前提的으로 악의 일면을 내재한다. 심리학자 융의 말대로라면 아프락사스는 선악을 공유하면서도 엄연한 '창조주의 본질本質'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신성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병립했다는 것이다. 융의 이 말은 절반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신의 허용 속에 악함이 없었다면 창세 후 인간이 행했던 죄의 근원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반은 논리적 생명력을 잃는다. 신과 악의 상관관계는 '신의 불가해성不可解性' 안에서 용해되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프락사스는 신비주의적 전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가지고 있는 신성"이다. 소설 전반부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적 관점의 양극성의 문제를 후반부에서는 아프락사스라는 신비주의적 신성의 상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일원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이 아프락사스는 <데미안> 이후 헤세가 일생 동안 지향하는 양극성 너머의 전일사상 및 일원론적 신비주의 종교사상을 보여 주는 문학적 상징인 것이다. 소설 <데미안>이 헤세의 '영혼의 전기'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 <데미안>의 보다 정밀한 주제가 추출된다. "'완전한'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선악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선의 무조건적 지향은 상대성 안에서 궤멸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했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는 것을. 문학과 철학을 넘어 보다 넓은 카테고리에서 '정의'와 '선'의 의미를 조망하게 되면 둘이 동의적同意的 성격을 띤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일갈은 자연스럽게 선악의 병존성으로 연결된다. 헤세가 하나님(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 아닌 아프락사스라는 고대 희랍의 신으로 후퇴(혹은 갈음)하여 자신의 세계를 전달한 것도 바로 이런 의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끝맺음된다.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데미안과 대면한다. 이제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싱클레어에게 키스하는 데미안의 마지막 현현顯現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싱클레어의 '참자아眞我'였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참자아를 찾았던 싱클레어의 지독한 여행에서 데미안의 존재는 독립된 실체 이전에 오롯한 내면화 과정으로서의 싱클레어의 진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합일은 다시 한 번 이 소설의 메세지를 가감없이 표출한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스스로 자기 실존의 내용과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꼭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을.

   성장이라는 테마를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방식으로 이렇게 깊은 곳까지 언어로 표현해낸 헤르만 헤세는 과히 대작가답다. <데미안>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고전이 됐다.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은 헤세의 이 보석같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연을 관통적貫通的으로 사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헤세의 신비로운 문장을 통해 뜨거운 감동의 열정을 담아냈는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작 한없이 감화된 사람은 바로 헤세 자신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인생은 '<데미안> 전'과 '<데미안> 후'로 정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헤세야말로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본을 찾았던 것이다. <데미안>은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시기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나는 이십 대 이전에 이 두 권의 짧은 소설을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데, 그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데 내 명예를 걸겠다. 두 소설은 공히 '성장'을 주제로 한다. 다만 독자와 호흡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데미안>이 내포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건강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선악善惡의 공유성을 탐구하는 데 비해 <수레바퀴 아래서>는 외연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인간 삶의 내용과 목적을 질문한다.

   십 대는 어떤 시기일까. 이 대목에서 문학평론가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 이십 대가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시기라면 삼십 대는 애써 찾은 자아를 거부하고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시기이다. 그렇다면 십 대는 무엇인가. 나는 감히 말하겠다. 자아의 최소한의 개념조차 상정하지 못한 채 인생의 수레바퀴 아래서 외롭게 살아가는 위험천만한 비형성적 존재라는 것을.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부조리한 전통에 허덕이며 망가져가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한스는 작가 헤세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한스에게 자신을 짓누르는 바깥 세계의 모든 교조적 전통은 공포이자 폭력이다. '바깥'에 의해 한 소년의 '내면(자아)'이 굴곡되고 짓밟혀가는 소설의 줄거리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수구적守舊的 관습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점점 망가져가는 한스의 삶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은 전혀 없었던 걸까.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한스의 내면을 공유했던 세 친구의 존재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던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난다. 고향의 소꼽친구 레히텐하일, 수도원에서 만난 문학소년 하일너, 이성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한 하일브론의 소녀 엠마, 이들은 각기 다른 존재성으로 한스의 내면을 촉촉하게 적셨던 인물들이다. 한스는 이들과 있을 때 만큼은 자기의 삶을 살았고 자기의 내면에 정직했다. 세 인물과 이별할 때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리며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한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고 쓰라리다.

   행복한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행복하기 위해'라는 무언無言의 전제가 깔려 있다. 불행을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꿈, 공부, 일, 사랑, 취미 등은 모두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이 밝게 빛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우울한 것은 이마저도 호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십 대는, 그 시절은, 그 애매한 시기는, '자기자신'을 잘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 대는 정형성定型性과 비정형非定型性이 대립하는 시기이다. 정형은 고착화와 교조화의 폐단을 가진다. 반면 비정형은 무개념과 비정의의 한계를 지닌다. 자아를 명확하게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형과 비정형 사이에서 헷갈리며 고뇌하는 어린 시절의 삶의 무게은 분명 고약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숭고한 무게이기도 하다. 그 무게는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가 되며, '내'가 '나'로 사는 과정 속에서 점점 '질량'이 되어 보존의 법칙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량을 알고 체감할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헤세의 이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한스에게 엄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엄마는 오래전에 죽었다. 엄마라는 존재의 결락缺落은 한스의 짓눌린 삶이 종내 회복되지 못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감당하는 모든 내면적인 고통에는 사랑의 부족과 결여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랑의 가장 거대한 원형인 모성의 결핍은 소설의 시작점부터 치유의 가능성을 파괴해놓은 작가 헤세의 의도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한스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아빠의 실존은 궁극적 사랑의 현현顯現인 엄마의 부재를 더욱 간절히 각인시키고 만다. 이로써 독자는 한스가 가진 고통의 사회성과 결핍의 본래성을 더욱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메시지를 모성과 연결짓는 사유는 유의미하다. 동시에 이 책의 필독을 청소년으로 한정해서 권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성장의 테마를 생산적으로 관통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주인공적 입장도 중요하지만 기성세대라는 권위로 전통의 벽을 만들어놓은 일차적 '피의자'로서의 부모의 입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부의 모든 권위에 맞서 싸운 한스의 치열한 삶은 본질적으로 가정에서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비극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결고리는 항시 가정이었다.

   그 어떠한 해석이든 <수레바퀴 아래서>는 위대한 고전이다. 쉽고 간결하며,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만으로 어린 시절이 갖는 보편적인 질문을 처연하게 담아낸 걸작이다. <데미안>이 주는 철학적 무게와 관념적 천착이 싫은 독자들에게 <수레바퀴 아래서>는 가장 훌륭한 성장소설로 갈음될 수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 먹는 걸 마냥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고 그만큼 잃어버릴 것이 많다는 것이며 삶의 끝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보편적인 상식에서 사람들은 나이먹는 걸 꺼려하고 젊음을 갈망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 또한 하나의 생명체로서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그것이 우주의 이치이다.

나도 그랬다. 나이 스물아홉의 시절을 나는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서른이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젊음을 표상하는 스물을 졸업하기 싫었고 어감부터 부담스러웠던 서른의 입학에 소름을 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은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지만 당시 서른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내면에서 샘솟는 현실 부정을 주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부질없는 고민이었는지 모른다. 내 힘으로 어쩔수 없는 명확한 우주의 섭리에 대해 시위하고 반발한 것이 공허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본질은 '늙어가는 것'에 있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늙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품위있고 매력있게 늙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신의 축복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노인을 만들어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헤밍웨이표 주인공으로서 강렬한 문체만큼이나 힘있는 인물이다. 망망대해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고 상어와 혈투를 벌이는 산티아고의 집념이야말로 늙음의 본질적인 기준은 나이가 아닌 정신의 문제임을 일깨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포인트를 한 노인(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면적 감상은 헤밍웨이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 산티아고가 지닌 근본적인 매력은 며칠동안 청새치와 씨름하고 그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데 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 듯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 여정 가운데 특별한 것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동경하며 자기체면에 걸림으로써 비현실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젊은이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삶의 몇몇 순간이 기적이 되고 이벤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삶 전체를 기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건 환상이자 탐욕이다. 그것은 기적의 본질에 무지한 이들의 일탈이다. 삶 전체를 송두리째 기적으로 인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망상이 결국 건강한 인생궤도를 이탈하게 만든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전적으로 평범한 것이다. 삶의 기적은 시간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작동되는 일상성의 재발견이다. 결국 보편과 일관一貫이 진정한 삶의 기적을 완성시킨다. 산티아고가 가진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리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라는 소설 속 명문장은 헤밍웨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인생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과정과 결과를 만난다. 삶의 과정과 결과는 종속적으로 얽혀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되기도 한다. 인과관계로 풀이될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역동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요동친다. "파괴는 있되 패배는 없다"는 말은 결국 정신적 가치의 승리를 웅변하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승리는 정신의 세계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설령 파괴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닌 승리의 영역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유독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사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포기하는가. 그리고 결과만을 중시하는가. 학업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젊음의 가장 큰 힘은 도전과 모험으로 대변되는 과정의 영역에서 나오는 법이다. 최소한의 개척정신마저 결락된 젊음은 이미 죽은 젊음이다. 만약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젊은 사람이었다면 소설의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노인이었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메시지가 독자에게 보다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고 적확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이 소설을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자아 가운데 자신의 진본을 찾아헤매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고전 『노인과 바다』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작년까지 헤밍웨이의 작품은 검증되지 않은 번역본들로 적지 않이 쏟아져 왔다. 올해부터는 사후 50년 저작권법이 풀리면서 역량있는 번역가와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간 영미문학을 많이 번역해온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여전히 깔끔하다. 번역자로서 김욱동 교수의 장점은 자신의 번역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평소 빠른 개역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3년을 준비했다는 민음사판 『노인과 바다』 번역은 부족함이 없을 만큼 깔끔했다. 헤밍웨이 특유의 강건체를 무난하게 번역한 느낌이다. 문장의 호흡을 짧게 처리하고 문체의 건조함을 잘 살렸다. 성실한 각주와 해설작업 또한 훌륭한 부분이다. 문제없는 번역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노인과 바다』는 강력한 소설이다. 주인공의 매력과 특유의 강건한 문체는 독자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고 명확한 주제의식과 강인한 흡입력은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또한 헤밍웨이는 역시 헤밍웨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Written By David

http://blog.naver.com/gilsam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인류 문학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톨스토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톨스토이의 포스를 넘어서는 이는 없을 듯하다. 물론 동시대의 천재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주 비견되곤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철학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은 별도의 논설이 필요하다.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건강한 세계와 아름다운 사랑론, 인간의 섬세한 묘사와 신을 향한 진지한 성찰은 그의 문학적 깊이와 밀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그는 바로 톨스토이다.

  레프 톨스토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세 편의 텍스트가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톨스토이 문학을 관통하기 위한 필독서다. 세 작품 모두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독자를 압도시키는데 각기 고유의 작품성으로 서로 독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톨스토이 인생의 총체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어떤 특별한 힘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 초기작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쓴 가장 예술적인 소설로서 <전쟁과 평화>와 함께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장편소설로 우뚝 서 있다. 인생의 노년기에 쓴 <부활>은 문학성과 예술성에서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신에 대한 톨스토이의 진지한 천착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세 장편을 읽지 않고 톨스토이를 논한다는 것은 '거짓' 혹은 '교만'이다.


  생각이 다듬어지지 않았던 이십대 때 나는 톨스토이의 세 편의 명작을 힘들게 읽어냈었다. 역자가 누구이고 출판사가 어디이며 완역본인지 여부도 몰랐던 때였다. 심히 힘들고 고통스럽게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과 빈번하게 출몰하는 톨스토이의 장광설(?)에 내 전두엽은 혹사되었고 작품이 지닌 본래성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톨스토이의 필요성이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역동했다. 이에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진중하게 읽어보고자 했다. 문장 하나 쉼표 하나까지 톨스토이의 숨결을 느껴보길 원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잡은 것이 톨스토이의 불멸의 저서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 집대성된 걸작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형태의 보편들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작품 중 이 소설을 가장 완벽한 텍스트라고 주장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한치의 흠도없는 완전무결한 작품, 이라고 평가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분명 '완벽한'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완벽한 장편소설이라는 데에는 소설을 이루는 여러요소들이 하나같이 모두 완벽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대담한 주제, 등장인물의 생명력, 인간과 배경 사이의 균형 잡힌 입체성, 담담하지만 세밀한 묘사, 당대를 훑고 있는 역사성, 문장·문단의 유려함, 작품 자체의 문학성과 예술성 등.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신적인 안정감으로 갖춘 흠결없는 작품이다. 소설가로서의 웅대하고 탁월한 기본기. 그것이 톨스토이 문학의 주춧돌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중심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한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녀의 정부 브론스키가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에서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투영된 레빈과 그의 아내 키티의 이야기가 흘러간다. 네 인물들이 각기 두 명씩 독립적인 서사를 펼치는 듯 보이지만 각자는 관심과 애증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외연적으로는 안나가 가정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지만 내포적으로는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톨스토이식 관찰과 항변이라 할 수 있다. 즉 톨스토이는 가정소설이라는 형태 속에서 당시 러시아가 고민했던 여러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음으로써 엄연한 사회소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워낙 유명하기에 다루지 않기로 하자. 나는 이번 서평에서 작품의 주제와 톨스토이 소설의 특징, 그리고 등장인물의 매력만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등장인물의 분석만으로도 서평의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가 창조한 인물들은 모두 완전하게 살아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성 없는 인물이 등장하고 플롯에 맞추어 인물을 유형화시킨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인물이 플롯에 맞춰져가는 게 아니라 플롯이 인물을 뒤따라간다. 완전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기실 '생명력'은 톨스토이 소설의 명징한 특징이다. 대부분의 소설은 플롯에 따라 사건의 전개를 알 수 있는데 톨스토이 소설은 예상이 많이 빗나간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의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소설을 읽는다. 톨스토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살기 때문에 소설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린다. 실제라면 그렇게 진행되겠구나, 가 아니라 완전히 현실적이다. 그런데 그 현실적인 성격을 아주 탄탄하게 전개시키면서 작가 자신이 의도한 결말 쪽으로 몰아간다. 요컨대 톨스토이 소설의 매력은 너무나 현실적인 인물성격을 가지고 너무나 완벽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톨스토이를 리얼리즘의 거장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은 생명력과 동류성을 띠는 톨스토이의 또 다른 마력에 기인하는데 그가 우리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심리를 끄집어내서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주인공 안나를 살펴보자. 안나는 세계 문학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는 최고의 매혹적인 여성을 창조했다. 안나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여성성만큼은 가히 고혹적이다. 그 매력은 카레닌(안나의 남편)과 브론스키를 넘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문화와 인종을 넘어, 현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여 빛을 발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브론스키가 안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던 바로 그 '무도회'와 그때 안나가 입었던 '검은색 드레스'를 생동감 있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안나보다 키티의 매력에 더 매혹되었다. 사실 안나는 책임감 없는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불륜의 늪에 빠져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종국엔 그마저도 지켜내지 못하고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대책없는 무책임성의 극치다. 반면 소설의 초반부터 종결까지 레빈의 사랑을 독차지한 키티는 비록 자신이 처음 사랑했던 남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뜨겁게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룬 행복한 여성의 전범이 된다.

  가정의 행복은 절대로 대가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논함에 있어 '희생'이 근본 사랑의 본체가 된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정의 성공은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사랑의 완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희생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대로 불행하다, 는 소설의 첫 문장은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명문장이다.

  부부로서 많은 것이 다르고 부딪혔지만 결국 레빈의 사랑을 사로잡아 행복한 가정의 원형을 건설한 키티의 매력이야말로 '미모'와 '열정'의 일차원적인 매력보다 우위에 있는 '지혜'와 '연합'이라는 여성성 최고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레빈의 형 니콜라이의 임종 전에 찾아간 병문안에서의 키티의 행동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이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듯하지만 행위의 목적과 결과는 결국 남편 레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키티의 현명함이 있다. 실로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의 매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안나의 활력을 지나치게 흘러넘치도록 그려냈다. 그것이 내게는 불편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매력을 발산하는 키티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보다 편안하게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레빈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톨스토이 자신의 소설 속 투영이다. 톨스토이는 전지적작가시점의 완벽한 실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레빈이 갖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사상을 독자에게 일직선으로 전달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 속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 시대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예술, 건축, 음악, 공연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견해와 입장은 철저히 레빈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안나 카레니나>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종합예술작품으로서의 위대한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빈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안나보다 레빈에 가깝다.

  사실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으로 시작해 레빈으로 끝이 난다. 특히 소설의 종결은 안나의 죽음 이후에도 꽤 많이 흘러가는데 그 분량은 철저히 레빈의 독백이 점철하고 있다. 형 니콜라이의 죽음과 아내 키티의 출산과정을 목도하면서 레빈은 삶과 죽음에 대해 전회轉回에 가까운 충격적 깨달음에 휩싸인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삶에서의 선善의 이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 삶의 우선순위로서의 신앙 등을 깊이있게 사유하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느끼고 기대하는 레빈의 변화는 소설의 말미를 매우 웅숭깊게 독점한다.

  레빈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제로 연결된다. 나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삶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갈무리했다. 톨스토이는 지속적으로 귀족사회에 대해 농도 높은 조소를 던지고 있는데 이는 레빈을 통해 드러냈던 농촌사회에 대한 애착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사교계 모임을 통해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귀족들의 모습은 돈과 명성에만 매달렸던 당시 러시아 귀족의 겉치레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외에도 톨스토이는 당시 상류층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 사랑과 결혼, 정치와 예술, 더 나아가 습관과 음식까지 비웃는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침잠하여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함을 넌지시 교훈한다. 요컨대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삶에 대한 인간의 책임있는 태도를 유도한다. 초기작 <전쟁과 평화>는 끊임없이 '삶'을 말했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는 니콜라이의 죽음에 번민하는 레빈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자못 진지한 고뇌를 드러낸다. 전작과의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은 톨스토이 문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대목이 톨스토이가 소설가에서 성자로 변화하는 동기점이자 그의 만년작 <부활>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생관은 명징하다. 인간은 죽음을 통제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초월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통해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는 사상이다. 삶과 죽음은 동일한 것이며 본질에 벗어난 모든 요소들을 버림으로써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역설은 깊이있게 천착할 만하다.

  톨스토이가 제기한 삶과 죽음의 동일성에는 사랑과의 동류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즉 삶과 죽음과 사랑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 예찬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말년이 되면 될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둘은 분명 사랑했지만 결국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의 '도입'에는 성공했지만 사랑의 '완성'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비극적이었다. 사랑은 본래적으로 시공간성의 무의미함을 담보한다. 부재하지는 않지만 분명 무의미하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은 변질되지 않으며 시작점에서 발현된 에너지는 몇 개의 우주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질량에는 변화가 없다. 불변성과 고유성이야말로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원리인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엄연한 하루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사랑타령만 주구장창 늘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도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일과 사람을 만난다. 삶의 복잡다단한 관계망 가운데 울고 웃고를 반복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삶과 행복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사고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선善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은 그것을 판가름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이 소설의 막장을 확인함과 동시에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결국 톨스토이는 삶과 선의 함수성과 그것에 대한 농밀한 이해를 통해 진정으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춰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만큼이나 생명력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게 더욱 느린 속도를 요구했다. 톨스토이가 글을 어렵게 쓰는 작가가 아님에도 한 문장 한 문장을 정독하다시피 했다.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깔끔하고 유려한 번역이 가독의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지만, 장장 한 달에 걸친 <안나 카레니나>의 여정은 내 안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느꼈다. 생명력에도 '수준'과 '밀도'가 있다는 것을. 대범한 주제의 생동감과 흘러넘쳤던 안나의 활력, 발군의 은유와 묘사로 대변되는 톨스토이 문장의 맛깔남과 길지만 격렬했던 호흡은 걸작 <안나 카레니나>가 나에게 선사한 찬탄스러운 생명력의 본질이었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가졌던 신적인 생명력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100년의 시간차를 넘어 나에게까지 흘러넘쳤던 것이다. 고백컨대, 난 지금 톨스토이로 인하여 무한한 생명력 가운데 놓여 있다. 미치도록 뜨겁고 강렬한. 아. 톨스토이여.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천재를 가늠할 잣대를 제시한다. 먼저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를 얼마나 성취했나 따져야 한다. 이 기준을 통과한 작가들에게 재차 서열을 매기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생명력이다. 블룸은 최고의 천재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가르는 지점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단테는 <신곡>을 넘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로 건너오지는 못하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문학을 삶에 적용한, 즉 문학을 통해 인식의 수준을 높이려 한 최고의 사례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며 찬탄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블룸의 말은 틀렸다. 셰익스피어와 우리 사이에는 바로 톨스토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베르터의 고통 을유세계문학전집 3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현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번역본을 추천해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다양한 역자들에 의해 출판사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민음사를 위시한 여섯 출판사의 번역본을 읽어본 바로서 나는 을유문화사의 것을 일 순위로 꼽는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안그림자 2011-03-1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있는 분석까지 곁들여 놓은<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잘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불후의 명작이 되어지는 괴테의 작품이 더 가치 있게 와 닿는 코드라면... 남녀간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 처럼 보여지지만 필요 충분조건에서 파생되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는 괴테가 아가페적 사랑의 원형질을 남녀간의 사랑 속에서도 찾고자 고뇌했던 흔적들 때문이 아닐까요! 형 이상학적 사랑을 꿈꾸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해서 자살로 생을 버린 베르테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거부해 버린 로테, 그런 그녀의 사랑이 비난받을 것 까지 있을까? 물음표를 조금 달아 봅니다. 로테, 그녀는, 어쩜 현실적인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계급이 모든 것을 함깨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평등사회가 아니라 계급과 신분이 절대시 되었던 독일이라는 문화권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여인의 모델이 도었을테니까요^^ 남자 주인공 베르테르의 자살은 현실에서는 희박한 이상적 사랑을 자살로 승화시킴으로써 현실이 따라 주지 않는 사랑 뒤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암시적 장치 역할을 해 주는 것이겠지요^^ 통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처럼 말입니다.귀족제도의 부패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어진 현대에 들어 서서도 여전히, 사랑은 현실과 이상을 이분법식 접근법으로 경계선을 그어 가고 있습니다.베르테르와 안나 카레리나가 살았던 세상은 선택자체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상적 사랑에 대한 선택권은 선택자의 몫이 되어졌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 그런대로 준 선물인 것 같습니다.. 평생, 선택의 댓가로 후뢰를 할 지라도.... 어디에서 본 듯한 "우리가 살고 잇는 세상은 신이 살아 가고 있는 영지의 모습을 그대로 투사한 곳이라고, 이데아는 우리들의 세상 속에라고... 음미를 해 보면 해 볼 수록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의 의미 심장한 말들,철학자이고 과학자이고, 소설가였던 괴테도 모순과 권력으로 비틀비틀 해지고 있는 조국의 민중들에게, 귀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직간적으로는 전달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선동자라 칭하며 언어를 통해,전달 해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