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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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서른'은 두려운 숫자였다. 나이 서른이 된다는 것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순수성에 대한 대한 의심이자 우려였다. 주변에서는 나이가 서른이 넘으면 몸과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과 빠른 속도로 쇠퇴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십 대에 그토록 반복해서 읽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와 닿지 않는 나이. 인간과 사물을 관찰하는 내면의 감도가 보다 '세상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나이. 경험의 축적으로 청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노련함을 갖게 되는 나이. 바로 서른. 그랬다. 나는 서른이, 두려웠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서른을 한참 넘겼다. 돌아보건대 서른은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내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서른을 관통하면서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자세와 경각에서 비본질보다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내면과 정신을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경험화를 통해 고양된 인간의 사회적 성장방식의 산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우 놀랄 만한 매혹적인 진화가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것이다.

  천재 시인 괴테의 명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몇 번이나 읽었던가. 젊은 시절 나는 괴테의 심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괴테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 책을 썼다. 그의 자전적 고백이 투영된 책이었기에 나는 스물다섯의 나이 즈음에 수차례를 반복해서 읽었었다. 당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 후 그녀를 잊지 못한 그리움으로 삶을 둥개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의 내 사랑이 버겁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조차 없던 때였다. 그렇기에 이백여 년 전 문학으로 봉인된 베르테르의 사랑을 내 가슴에 담아낸다는 것은 과히 역부족이었다. 괴테를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다. 서른이 넘었고 그토록 날 힘들게 했던 첫사랑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괴테의 명작을 다시 손에 잡았다.

  괴테가 그려낸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 이전에 희극이며 희극이 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한 대상이 세계의 전부이자 자신의 실존 근거가 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사랑. 그 열정적 사랑에 베르테르는 숨이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자신의 전존재全存在를 혹사시킨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사랑이다. 사랑의 최고 수준 '아가페(agapē)'는 자아의 실존을 부정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궁극은 아가페이며, 아가페의 속성은 절대선絶對善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사랑하는 행위는 희극적이다. 세계의 어떤 사랑이든 본질의 선상에서는 희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서 절대선을 유지한다. 요컨대 사랑 자체는 분명 '희극'이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사랑은 결국 비극이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순전했지만 끝내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도덕적 일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참혹한 것은 일방성이다. 작품 속에서 로테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베르테르의 팬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만약 둘의 사랑이 쌍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불멸의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는 과히 슬펐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보다 더 슬픈 슬픔이었다. 그것은 인간 심연의 처절한 괴로움이자 실존을 파괴하는 매머드급 고통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지시킴으로써 로테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종결시킨다.

  나는 베르테르의 연인 로테에게 불만이 많다. 정말 화가 나는 인물이다. 시종일관 불분명한 태도와 애매한 감정처리로 베르테르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로테는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에 의해 꽤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되지만 애정관계라는 측면에서 가장 저급하고 위험한 존재의 전형이다. 로테의 불명확성은 작품 속 갈등의 동기이자 전부이다. 괴테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베르테르의 말을 빌어 이를 암시한다. "오해와 태만이 간교함과 악의보다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로테의 사랑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의식하는 사랑이다. 타자와 외부로부터 발현된 모든 사랑을 종국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의 충전으로 대체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런 태도와 이와 동류적同類的인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행태들을 혐오한다. 정말 싫다. 사랑에 불분명한 여자가 발생시키는 갈등의 악마성을 나는 철저히 증오한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 해석한다. 사실 괴테가 그렸던 베르테르의 열정과 성실은 한 개인의 애상愛想을 넘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맹렬한 분투로 은유된다. 괴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봉건 질서의 염증과 새로운 인간상의 기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르테르의 헌신적이고 순교적인 사랑은 기독계 세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오롯한 사랑의 일방성과 그 대가로 지불되는 죽음의 운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자적 삶과 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사회적 혹은 종교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한다. 로테를 향한 베르테르의 슬프고 치열하며 열정적인 사랑만으로도 눈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문학적 밀도와 중량은 충분하다.
  
  전세대를 감동시킨 불후의 명작이지만 번역의 문제만은 넘어서기 어려운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국내에 제일 많이 번역된 고전 중 하나다. 각 출판사별로 다양한 역자들의 손을 통해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민음사판으로 이 책을 만나는 것 같다. 하지만 민음사판은 번역과 교정에 흠결이 많은 편이다. 예전에 <파리대왕>, <암흑의 핵심>, <나사의 회전> 등을 읽을 때에도 조악한 번역과 형편없는 교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바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쳇말로 '발번역'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고백을 일기형식으로 전달하는 편지글이다. 이런 방식은 전달받는 상대가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반응은 하지 않는 경청자의 입장에 머무르기 때문에 전달자의 고독이 더욱 애절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괴테는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타인과의 대화로 변화시키는 것을 즐겼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네"와 "~다"를 규칙없이 마구 섞어서 번역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간혹 눈에 띄는 오타를 발견할 때면 작품의 몰입도는 급하락된다. 민음사판은 정말 추천하기가 힘들다. 

  번역에 민감한 독자를 위해 추천하자면 나는 을유문화사 번역본을 일 순위로 꼽고자 한다. 을유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있는 번역본으로서 제목부터 독일어의 본래성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배치했다. 이미 잘못된 발음으로 검증된 '베르테르'를 올바른 표기법의 '베르터'로 수정했다. 또한 원어가 담은 의미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슬픔'을 가장 적합한 단어인 '고통'으로 대체했다. 베르테르의 고통이 개인적인 연애사를 넘어 봉건 질서 내에서의 사회적 번민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외면적 함의에서 더욱 적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문장 또한 전반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통속적 관행을 타파하고 독일어 본래의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용단이 멋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반드시 을유판으로 만나보길 바란다.  

  서평을 정리하자. 글이 좋은 것은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고 책이 위대한 것은 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성공한 글'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불멸의 고전들이 있다. 고전의 공통점은 시대를 초월해내는 저력에 있다. 작품이 만들어질 당대의 인간 삶의 다양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천착은 시대를 넘어 후세에까지 변질되지 않고 오롯하게 당도한다. 그것이 고전이 갖는 근원적인 힘이자 존재성이다. 

  괴테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임이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시인은 천재라 했다. 하물며 인류사에서 가장 강렬한 획을 그은 시인 괴테의 작품을 어찌 만나지 않을 수 있으랴. 서두에 언급했지만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 사랑의 본질에 더욱 진지하게 접근해가고 있다. 사랑의 모든 동기와 형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찬란하다. 서른 이전에는 사랑의 현상에 주목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사랑 자체에 경도된다. 나이차가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역설적 수용은 매우 흥미롭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청춘시기에 한 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꼭 한 번 읽어야 한다. 반드시.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이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것은 삶과 사랑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독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원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랑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을 기점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재독하고 고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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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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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농장>은 지금도 있고 미래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역작 『동물농장』을 번역한 도정일 교수의 평이다. 이 문장은 고전 『동물농장』의 문학적 생명력과 시의적 초월성을 정확하고 명징하게 말해주는 명문장이다. 『동물농장』의 가치를 굳이 60년 전의 소비에트연방이라는 시공간에 구속할 필요는 없다. '전체주의'로 명명되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억압은 21세기의 현실에서도 엄연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동물농장』이 풍자하는 세계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명확한 오독이다. 본래 조지 오웰이라는 인물 자체가 사회주의자였다. 오웰이 적으로 규정한 것은 '전체주의'였다.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서만 존재한다는 이름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 전체주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보여준 행태와 이에 대한 오웰의 냉소적인 풍자는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지 오웰은 개혁의 배반과 실패에 대해서 혐오를 보내고 있다. 민중을 위해 시작된 개혁의 방향이 지배계층의 욕심과 부패의 덫에 빠질 경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지를 잘 풍자했다. 특히 오웰은 부패 권력을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아부는 그 사회를 파시즘 공동체로 만드는 연유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지배층의 올바른 인식 못지 않게 피지배층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수 노력은 인류사가 말해주는 민중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동물농장』을 읽는 내내 유독 눈에 띄는 캐릭터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권력자의 '입' 노릇을 하며 피지배 동물들의 이견과 토론을 잠재우는 스퀼러라는 존재다. 소설 속에서 스퀼러는 전형적인 귀족 언론의 모습으로 권력자를 대변하며 대중에게 사실을 호도한다. 뛰어난 언변과 번뜩이는 설득력으로 나폴레옹(소설 속 권력자) 파시즘 국가를 만드는 일등공신이 된다.

  강력한 독재 부패와 아첨하는 언론, 그리고 무지한 대중이 만들어내는 동물농장의 풍자를 보며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실'들은 미디어라는 프레임을 통해 공급되는 것들이다.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지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미디어의 의지와 기호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의 사실성 여부가 결정된다.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언론의 핵심은 '진실'이다. 진실하지 않은 정보를 대중에게 공급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언론은 항상 정확한 사실을 가장 빠르게 대중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서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서 권력의 형성과 연장에 사용되는 도구가 될 때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이는 세계 민주주의사가 명징하게 알려주는 진리다. 고전 『동물농장』의 캐릭터 중에서 내가 유독 스퀼러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20년 전의 프랑스 혁명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다. 그것은 '자유'였고 '평등'이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유와 평등은 절대불가결한 가치다. 이는 절대선絶對善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에게 부와 권력의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운 삶, 국가와 개인의 상관관계, 언론의 역할과 의무, 부와 권력에 약한 인간의 본성 등 시대를 막론하여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 날카롭고 깊이있게 풍자한 조지 오웰의 명작 『동물농장』은 반드시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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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동물농장을 읽어볼려고 하는데, 역시나 번역문제가 좀 있어 보입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drasys&artSeqNo=7471675

여기를 참고해 보면 몇몇 부분에서 번역의 문제가 있다곤 하는데요... 솔직히 저같은 초보자는 어떤 책을 읽어도 큰 상관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그나마 잘 된 번역서로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욱동 번역을 추천하던데요, 다윗님은 추천해 주실 번역본은 없으시나요?
 
홍길동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
허균 지음, 김탁환 엮음,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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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200권째를 맞았다. 한국에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로는 처음이다. 1999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시작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11년간 600만부 가량의 판매성과를 올리며 한권 한권을 늘려나가고 있다. 더욱이 국내 최초로 세계의 거장들과 직접 계약하고, 번역의 오류를 대폭 교정한 완역판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한 출판사의 쾌거이기도 하지만 한국 출판계의 장밋빛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의 소식이기도 하다. 11년 동안 지속된 민음사의 노력과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고전을 많이 번역 출간해주기를 기대한다.

  출판사에서는 200번째 책으로 국내소설 『홍길동전』을 선택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거대한 형용문구로 강렬히 각인되어 왔던 허균의 『홍길동전』은 이미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고전소설이다. 『홍길동전』 자체의 분량이 많지 않기에 완판 36장본과 경판 24장본을 함께 실었다. 그 외에 부록으로 완판 36장본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영인본을 수록하기도 했다. 그만큼 풍성하다.

  『홍길동전』의 스토리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저자 허균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금기의 내용을 간명한 서사에 기백있게 표현했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을 그렸다. 더욱이 홍길동이라는 한 영웅의 출현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조선 내 산적한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사회소설의 형태도 띄고 있다. 불교계의 부정부패, 위정자들의 무능, 신분제와 적서 차별의 모순성, 탐관오리의 횡포 등 그 당시 조선사회를 병들게 했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금번 민음사 버전의 『홍길동전』은 완판과 경판이 함께 실려 있어 두 가지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본래 완판은 조선 말기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이다. 전라도 지역 사투리가 돋보이고 긴 묘사를 사용함으로써 경판에 비해 내용이 풍부한 특징이 있다. 그에 반해 경판은 서울본으로서 묘사가 간략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홍길동전』의 경우도 이러한 완판과 경판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완판이 구체적인 내용을 구수하고 감칠맛 나게 표현해내고 있다면, 경판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무엇보다 우리시대 최고의 역사소설가 김탁환의 손끝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새롭다. 수많은 역사소설로 역사에 대한 재미와 감동을 문학적 차원에서 접근해온 김탁환이야말로 고전 『홍길동전』을 21세기 버전으로 다듬는 데 가장 적확한 작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역량을 충분히 입증시키듯 옛문장을 매우 매끄럽게 풀어 옮겼다. 또한 백범영 화백이 그린 20여점의 삽화는 소설 읽는 재미를 돋운다. 완판 36장본 곳곳에 글을 수식하고 보완하는 삽화가 적절히 배치되어 고전 『홍길동전』의 재미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어느 시대나 고전은 만들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훗날 '고전'이라 불릴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되고 있다. 이권우의 주장대로 고전은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다. 이것이 없는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그러기에 고전은 뜨겁다. 또한 열정적이다. 개인과 사회에 대한 뜨겁고 열정적인 고민과 성찰은 모든 고전이 갖는 교집합이다. 한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근본적 모순과 오류를 용기있게 꼬집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홍길동전』이 읽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시대가 혼란스럽다. 조선시대와는 또 다른 고통과 번민이 한민족族 후손들을 힘들게 한다. 국가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커져만 가고, 행복지수는 시대의 흐름과 반비례하며, 우리사회에 관용과 배려는 실종되고 있다. 400년 전의 천재 소설가 허균은 절망 속에서 영웅과 유토피아를 그림으로써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다. 과연 작금의 시대에서 '율도국'은 어떤 세상으로 풀이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가운데 행복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천국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현재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며 400년 전의 고전 『홍길동전』의 존재성을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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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세트 - 전10권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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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 이문열의 史記이야기 / 이문열 / 민음사


[ 프롤로그 ]

전 10권인 이문열의 『초한지』를 완독했다. 1권부터 8권까지는 한달음에 달렸지만 9권·10권의 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8권과 9권 사이의 연결 공백이 다소 벌어진 점을 제외하고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삼국지』와 함께 중국사에서 가장 많이 천착한 역사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다양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었기에 신간이 주는 신선함의 흥분은 녹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문열'이라는 희대의 이야기꾼의 존재감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권을 깔끔하게 완독하게 되었다.

  이문열의 『초한지』는 2002년부터 4년 동안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것을 전 10권으로 완간한 것이다. 10권에 이르는 장중한 초한楚漢의 역사 속에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겨루는 두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이문열 특유의 발군의 스토리텔링으로 새롭게 부활했다. 작가 이문열은 《사기》를 원전으로 하고 《자치통감》과 《한서》를 보조자료로 삼아 한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시황제 암살을 기도하는 기원전 218년부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한나라 효문제가 나라의 기틀을 세울 때까지 약 30년간의 이야기를 담담히 담아냈다.


[ 유방과 항우 ]

『초한지』를 읽는 핵심 포인트는 응당 한왕 유방과 패왕 항우의 리더십 차이일 것이다. 두 영웅의 지략과 용인술의 차이를 관조하면서 작금의 시대상에 견주어 보는 것은 매우 큰 흥미거리이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것이라고들 하기 때문에 유방은 많이 미화됐고 항우는 폄하됐을 것이라 추정하는 안목이 지배적이다. 사실 개인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항우가 우위에 있었음은 대부분의 평가가 일치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리더십의 필요충분조건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초한의 역사는 엄중하게 교훈한다.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유방의 리더십은 항우보다 빛났는데, '용인술'이 그 첫 번째며, '포용력'이 두 번째요, '넓은 시야'가 세 번째다. 정치는 장량에게, 내정은 소하에게, 군사의 일은 한신에게 전권을 위임한 유방의 용인술은 적확한 인사의 배치와 신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신하에게 항상 의심의 날을 세운 항우는 자신의 유일한 책사 범증마저도 이간계에 속아 내쫓는 우를 범하고 만다. 번쾌를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맹장과 용장을 거느렸던 유방과는 달리 이름에 꼽힐 장수로 고작 용저와 종리매뿐이었던 항우의 초라한 인재풀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서의 두 영웅의 대극적 차이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포용력에서도 항우는 유방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항우는 절대로 항복한 군사들을 살려주지 않았다. 또한 정복한 땅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탄압하는 병사들의 잔악함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실례로 항복한 진군秦軍 20만을 신안에서 생매장한 사건은 항우의 비포용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승리 후 정복한 땅의 군사와 백성들을 여차없이 생매장시키는 항우의 잔인함은 훗날 중국대륙의 모든 제후국과 백성들이 자신을 외면해버리는 업보가 되기도 한다. 반면 항복한 장졸은 흔쾌히 받아 주고, 타지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강도를 엄히 다스렸던, 그리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유방의 덕은 천자가 되어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전쟁을 보는 시야에 있어서도 유방과 항우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기실 전투력에 있어서 유방은 항우를 당해내지 못했다. 굳센 강동병 8,000명을 주축으로 한 항우의 초군은 초한전쟁의 최후인 '해하垓下전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적불패의 군사들이었다. 거록에서 유민군軍 5만으로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대군 20만을 오래된 기왓장 부수듯 쳐부수었고, 수수가에서는 정병 3만으로 유방이 이끄는 다섯 제후의 56만 대군을 깨뜨려 그 시체로 강물을 막은 게 항우였다. '집중'과 '속도'로 갈음되는 항우의 고도의 전투력은 오강烏江에서 자신의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 매번 유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적 의미의 '전투'에 한했을 뿐이다.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길고 넓게 시야를 고도화하는 안목에는 유방이 한 수 위였다. 중원의 지도를 넓게 훑으면서 도읍지 역양轢陽을 소하에게 맡긴 것은 물론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을 넓게 분포시켜 항우의 근거지를 조이며 뒷날의 싹을 자른 것은 넓은 시야로 초한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유방의 높은 안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 패왕 항우.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물론 유방의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방 또한 적잖은 실수와 소인배와 같은 행동으로 어려움에 빠질 때가 많았다. 오강에서 항우를 죽이고 초나라를 평정,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의 유방에 대한 아쉬움은 차치하자. 승리한 자의 승리하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이미 승리 그 자체로 용서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위에 오른 뒤 유방이 보인 신하에 대한 지나친 의심과 핍박, 소위 '공신억멸책功臣抑滅策'으로 불리는 무자비한 그의 뒷모습이다. 더욱이 황후 여태후의 조작에 의해 자행된 한신의 죽임과 유방 사후 전개되는 피비린내 나는 외척의 살육전은 유방이 외척관리에 얼마나 미천했는지를 그대로 입증하는 사건들이다. 3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제위를 전후 외척인 여씨 일족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기까지 제국의 아침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 다른 사람들 ]

나는 『초한지』 전권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한신韓信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초한전쟁은 유방과 항우의 대결 이전에 한신과 항우의 전투였다. 한왕 유방을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른 한신은 팽성에서의 어의없는 패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 진적이 없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사실 한신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결코 항우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유방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고의 일등공신은 단연 한신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신의 존재감을 유방은 위험하게 생각했고, 소소한 역모의 혐의로 그를 탄핵한다. 끝내 여태후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살해당한 한신의 종국은 그의 공과 능력과 충심을 감안하면 매우 서글프다. 큰 위인을 담을 수 있는 자라면 더 큰 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담아내지 못한 채 토사구팽兎死狗烹한 유방의 그릇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애수일까. 만약 유방이 한신을 내치지 않고 끝까지 믿고 자신의 사후를 맡겼더라면 여태후를 위시한 외척세력에 의해 자행된 피비린내 나는 제국 초기의 혼란상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신 외에도 유방 주변에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많았다. 내정과 보급을 담당하며 한군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준 소하蕭何, 유방의 꾀주머니로 매 위기마다 좋은 계책으로 한군을 도운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패현시절 때부터 따랐던 번쾌樊快와 노관盧튷, 한군 최초의 기마대장 관영灌嬰, 그 외 조참曹參, 주발周勃, 왕릉王陵 등 많은 영웅들이 유방을 도와 한제국을 건설했다. 유방은 소하를 매우 신임했다. 비록 전쟁터에서의 눈에 보이는 활약은 없었지만 소하가 뒤에서 도읍지 역양을 잘 관리하고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제때에 받쳐 주었기 때문에 유방은 마음 편히 항우와의 혈전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제국을 세우자마자 공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하를 상국으로 삼는다. 장량 또한 유방의 총애를 많이 받았는데 유방은 매사에 장량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물었고, 모든 것을 따랐다. 장량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비해 항우의 사람으로 거론할 만한 이는 딱히 범증范增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항우의 지나친 의심병으로 인해 내쫓겨 죽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항우의 삼촌인 무신군 항량을 주군으로 섬길 때부터 범증은 초한지 내 최고의 책략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장계취계將計就計(적의 계책을 미리 알아채고 그 계책을 역이용하는 전술)'의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범증은 초나라의 초중반 역사에서 찬란한 활약을 보여준다. 항량은 범증의 말을 잘 따라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무패를 이어간다. 항우도 처음에는 범증을 '아부'라 부르며 그의 계책과 조언을 잘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군왕으로서의 자신감과 교만이 뒤섞여 점차 범증의 책략을 귀기울이지 않는다. 한신을 아끼라는 범증의 말을 무시해서 유방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홍문의 잔치에서도 범증의 조언을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보내 훗날 천추의 한이 되기도 한다. 결국 진평의 이간계에 속아 범증을 내치고 죽게끔 만드는 항우. 만약 범증이 끝까지 살아서 항우를 보필했더라면 초한의 주인을 결정지었던 해하전투의 향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이문열 ]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p. 21, 글머리에> 

  1권 '글머리에'에 소개된 이문열 자신의 고백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피로와 무력감을 느낀 작가 이문열. 그는 이를 극복키 위해 중국 고전문학으로의 도피를 실행했다. 이미 『삼국지』와 『수호지』의 평역을 통해 문학적 긴장으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했던 그는 동일한 의미의 연장으로 『초한지』를 손에 잡았다. 요컨대 고단한 한 세월을 넘겨 보려는 자신의 의지를 중국 최고의 고전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가로서의 기백과 강단은 한 소설가의 지독한 고독과 번민, 문학적 긴장과의 싸움, 이에 대한 회복과 열정에 대한 의지가 충만히 담겨 있다.

  현재 이문열은 다음 작품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초한지』 이후 한국의 역사물을 쓰고 싶다는 작가 이문열. 
  "1980년대 이야기는 예전부터 구상했었지만 아직 쓰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가 지금도 유효할지 의문이 드네요. 그 밖에 새롭게 생긴 쓰고 싶은 이야기도 있구요.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할 지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그의 고민이 빨리 끝나 좋은 작품으로 독자를 찾아가길 바란다. 더욱이 문학 외적의 공간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로서의 문학적 존재감으로 승부하여 자신의 피로와 무력감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갈구한다.


[ 에필로그 ]

나라가 시끄럽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리더십의 부재에 시달려 오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대통령', '일 못하는 정부', '싸움쟁이 국회'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현주소는 많은 국민들을 힘들고 답답하게 한다. 어떤 나라는 대통령을 화폐에 인쇄하여 기념하고, 또 어떤 나라는 국회를 가장 신뢰하는 집단으로 국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외계에서 일어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때에 위기에 봉착한 국가적 리더십을 점검하고, 민심에 경청하며, 국민을 통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리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새것과 함께 옛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을 반추하며 현재를 냉철히 분석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며, 꿈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힘이 필요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등장하여 서로 상반된 리더십으로 역사의 인과성을 결정지은 두 영웅의 이야기는 2000여 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결국 무엇이 승리하고, 무엇이 강국을 건설하며, 무엇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장엄하고도 장중한 초한의 역사를 담은 중국 불멸의 고전 『초한지』의 존재성을 곱씹으며 리더십과 소통의 부재에 시달리며 번민하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주소의 희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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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초한지』 - 이문열의 史記이야기 / 이문열 / 민음사


[ 프롤로그 ]

전 10권인 이문열의 『초한지』를 완독했다. 1권부터 8권까지는 한달음에 달렸지만 9권·10권의 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8권과 9권 사이의 연결 공백이 다소 벌어진 점을 제외하고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삼국지』와 함께 중국사에서 가장 많이 천착한 역사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다양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었기에 신간이 주는 신선함의 흥분은 녹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문열'이라는 희대의 이야기꾼의 존재감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권을 깔끔하게 완독하게 되었다.

  이문열의 『초한지』는 2002년부터 4년 동안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것을 전 10권으로 완간한 것이다. 10권에 이르는 장중한 초한楚漢의 역사 속에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겨루는 두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이문열 특유의 발군의 스토리텔링으로 새롭게 부활했다. 작가 이문열은 《사기》를 원전으로 하고 《자치통감》과 《한서》를 보조자료로 삼아 한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시황제 암살을 기도하는 기원전 218년부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한나라 효문제가 나라의 기틀을 세울 때까지 약 30년간의 이야기를 담담히 담아냈다.


[ 유방과 항우 ]

『초한지』를 읽는 핵심 포인트는 응당 한왕 유방과 패왕 항우의 리더십 차이일 것이다. 두 영웅의 지략과 용인술의 차이를 관조하면서 작금의 시대상에 견주어 보는 것은 매우 큰 흥미거리이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것이라고들 하기 때문에 유방은 많이 미화됐고 항우는 폄하됐을 것이라 추정하는 안목이 지배적이다. 사실 개인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항우가 우위에 있었음은 대부분의 평가가 일치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리더십의 필요충분조건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초한의 역사는 엄중하게 교훈한다.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유방의 리더십은 항우보다 빛났는데, '용인술'이 그 첫 번째며, '포용력'이 두 번째요, '넓은 시야'가 세 번째다. 정치는 장량에게, 내정은 소하에게, 군사의 일은 한신에게 전권을 위임한 유방의 용인술은 적확한 인사의 배치와 신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신하에게 항상 의심의 날을 세운 항우는 자신의 유일한 책사 범증마저도 이간계에 속아 내쫓는 우를 범하고 만다. 번쾌를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맹장과 용장을 거느렸던 유방과는 달리 이름에 꼽힐 장수로 고작 용저와 종리매뿐이었던 항우의 초라한 인재풀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서의 두 영웅의 대극적 차이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포용력에서도 항우는 유방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항우는 절대로 항복한 군사들을 살려주지 않았다. 또한 정복한 땅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탄압하는 병사들의 잔악함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실례로 항복한 진군秦軍 20만을 신안에서 생매장한 사건은 항우의 비포용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승리 후 정복한 땅의 군사와 백성들을 여차없이 생매장시키는 항우의 잔인함은 훗날 중국대륙의 모든 제후국과 백성들이 자신을 외면해버리는 업보가 되기도 한다. 반면 항복한 장졸은 흔쾌히 받아 주고, 타지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강도를 엄히 다스렸던, 그리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유방의 덕은 천자가 되어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전쟁을 보는 시야에 있어서도 유방과 항우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기실 전투력에 있어서 유방은 항우를 당해내지 못했다. 굳센 강동병 8,000명을 주축으로 한 항우의 초군은 초한전쟁의 최후인 '해하垓下전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적불패의 군사들이었다. 거록에서 유민군軍 5만으로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대군 20만을 오래된 기왓장 부수듯 쳐부수었고, 수수가에서는 정병 3만으로 유방이 이끄는 다섯 제후의 56만 대군을 깨뜨려 그 시체로 강물을 막은 게 항우였다. '집중'과 '속도'로 갈음되는 항우의 고도의 전투력은 오강烏江에서 자신의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 매번 유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적 의미의 '전투'에 한했을 뿐이다.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길고 넓게 시야를 고도화하는 안목에는 유방이 한 수 위였다. 중원의 지도를 넓게 훑으면서 도읍지 역양轢陽을 소하에게 맡긴 것은 물론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을 넓게 분포시켜 항우의 근거지를 조이며 뒷날의 싹을 자른 것은 넓은 시야로 초한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유방의 높은 안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 패왕 항우.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물론 유방의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방 또한 적잖은 실수와 소인배와 같은 행동으로 어려움에 빠질 때가 많았다. 오강에서 항우를 죽이고 초나라를 평정,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의 유방에 대한 아쉬움은 차치하자. 승리한 자의 승리하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이미 승리 그 자체로 용서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위에 오른 뒤 유방이 보인 신하에 대한 지나친 의심과 핍박, 소위 '공신억멸책功臣抑滅策'으로 불리는 무자비한 그의 뒷모습이다. 더욱이 황후 여태후의 조작에 의해 자행된 한신의 죽임과 유방 사후 전개되는 피비린내 나는 외척의 살육전은 유방이 외척관리에 얼마나 미천했는지를 그대로 입증하는 사건들이다. 3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제위를 전후 외척인 여씨 일족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기까지 제국의 아침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 다른 사람들 ]

나는 『초한지』 전권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한신韓信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초한전쟁은 유방과 항우의 대결 이전에 한신과 항우의 전투였다. 한왕 유방을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른 한신은 팽성에서의 어의없는 패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 진적이 없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사실 한신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결코 항우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유방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고의 일등공신은 단연 한신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신의 존재감을 유방은 위험하게 생각했고, 소소한 역모의 혐의로 그를 탄핵한다. 끝내 여태후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살해당한 한신의 종국은 그의 공과 능력과 충심을 감안하면 매우 서글프다. 큰 위인을 담을 수 있는 자라면 더 큰 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담아내지 못한 채 토사구팽兎死狗烹한 유방의 그릇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애수일까. 만약 유방이 한신을 내치지 않고 끝까지 믿고 자신의 사후를 맡겼더라면 여태후를 위시한 외척세력에 의해 자행된 피비린내 나는 제국 초기의 혼란상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신 외에도 유방 주변에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많았다. 내정과 보급을 담당하며 한군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준 소하蕭何, 유방의 꾀주머니로 매 위기마다 좋은 계책으로 한군을 도운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패현시절 때부터 따랐던 번쾌樊快와 노관盧튷, 한군 최초의 기마대장 관영灌嬰, 그 외 조참曹參, 주발周勃, 왕릉王陵 등 많은 영웅들이 유방을 도와 한제국을 건설했다. 유방은 소하를 매우 신임했다. 비록 전쟁터에서의 눈에 보이는 활약은 없었지만 소하가 뒤에서 도읍지 역양을 잘 관리하고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제때에 받쳐 주었기 때문에 유방은 마음 편히 항우와의 혈전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제국을 세우자마자 공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하를 상국으로 삼는다. 장량 또한 유방의 총애를 많이 받았는데 유방은 매사에 장량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물었고, 모든 것을 따랐다. 장량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비해 항우의 사람으로 거론할 만한 이는 딱히 범증范增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항우의 지나친 의심병으로 인해 내쫓겨 죽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항우의 삼촌인 무신군 항량을 주군으로 섬길 때부터 범증은 초한지 내 최고의 책략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장계취계將計就計(적의 계책을 미리 알아채고 그 계책을 역이용하는 전술)'의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범증은 초나라의 초중반 역사에서 찬란한 활약을 보여준다. 항량은 범증의 말을 잘 따라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무패를 이어간다. 항우도 처음에는 범증을 '아부'라 부르며 그의 계책과 조언을 잘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군왕으로서의 자신감과 교만이 뒤섞여 점차 범증의 책략을 귀기울이지 않는다. 한신을 아끼라는 범증의 말을 무시해서 유방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홍문의 잔치에서도 범증의 조언을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보내 훗날 천추의 한이 되기도 한다. 결국 진평의 이간계에 속아 범증을 내치고 죽게끔 만드는 항우. 만약 범증이 끝까지 살아서 항우를 보필했더라면 초한의 주인을 결정지었던 해하전투의 향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이문열 ]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p. 21, 글머리에> 

  1권 '글머리에'에 소개된 이문열 자신의 고백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피로와 무력감을 느낀 작가 이문열. 그는 이를 극복키 위해 중국 고전문학으로의 도피를 실행했다. 이미 『삼국지』와 『수호지』의 평역을 통해 문학적 긴장으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했던 그는 동일한 의미의 연장으로 『초한지』를 손에 잡았다. 요컨대 고단한 한 세월을 넘겨 보려는 자신의 의지를 중국 최고의 고전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가로서의 기백과 강단은 한 소설가의 지독한 고독과 번민, 문학적 긴장과의 싸움, 이에 대한 회복과 열정에 대한 의지가 충만히 담겨 있다.

  현재 이문열은 다음 작품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초한지』 이후 한국의 역사물을 쓰고 싶다는 작가 이문열. 
  "1980년대 이야기는 예전부터 구상했었지만 아직 쓰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가 지금도 유효할지 의문이 드네요. 그 밖에 새롭게 생긴 쓰고 싶은 이야기도 있구요.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할 지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그의 고민이 빨리 끝나 좋은 작품으로 독자를 찾아가길 바란다. 더욱이 문학 외적의 공간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로서의 문학적 존재감으로 승부하여 자신의 피로와 무력감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갈구한다.


[ 에필로그 ]

나라가 시끄럽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리더십의 부재에 시달려 오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대통령', '일 못하는 정부', '싸움쟁이 국회'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현주소는 많은 국민들을 힘들고 답답하게 한다. 어떤 나라는 대통령을 화폐에 인쇄하여 기념하고, 또 어떤 나라는 국회를 가장 신뢰하는 집단으로 국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외계에서 일어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때에 위기에 봉착한 국가적 리더십을 점검하고, 민심에 경청하며, 국민을 통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리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새것과 함께 옛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을 반추하며 현재를 냉철히 분석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며, 꿈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힘이 필요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등장하여 서로 상반된 리더십으로 역사의 인과성을 결정지은 두 영웅의 이야기는 2000여 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결국 무엇이 승리하고, 무엇이 강국을 건설하며, 무엇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장엄하고도 장중한 초한의 역사를 담은 중국 불멸의 고전 『초한지』의 존재성을 곱씹으며 리더십과 소통의 부재에 시달리며 번민하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주소의 희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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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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