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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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다. 문화와 시대가 바뀌어도 훼손되지 않는 궁극의 메세지를 담아낸 텍스트를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그렇다. 고전은 시대를 뚫는 힘이 있다. 시간의 흐름과 다양성의 폭풍우를 이겨내는 힘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고전이 갖는 본질이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한 데서 발단된 대공황은 순식간에 세계를 잠식시켰다. 전무후무한 파괴력을 가진 세계적 대공황을 극복할 해결책은 당시로서는 케인즈주의(Keynesian economics)밖에 없을 것으로 보였다. 불황은 유효수요 부족의 탓이며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쾌한 케인즈 이론이 만병통치약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케인즈의 처방대로 뉴딜정책을 실행하며 국가를 거대한 괴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해괴망측한 악마를 경험할 때까지 케인즈식 총수요관리정책이 지닌 내밀한 한계를 감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소수의 사람 중 하이에크라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있었다.

   세기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불멸의 저작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을 통해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 <노예의 길>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어마어마한 책이다. 좌·우파 할 것 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로 꼽힌다. 하이에크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을 통해 자유의 속성과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파했다. 자유가 얼마나 올곧고 가치있는 것인지 대중을 향해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강변했다. 자유의 속성이 정치, 경제, 법 등 우리사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질서와 체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숨쉬고 작동돼야 하는지 냉철하고 명확하게 논지했다. 저자의 논설이 가진 생명력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불태울 정도로 강력한 울림을 선사한다.

   하이에크는 케인즈와 대척점에 서 있던 경제학자다. 하이에크가 옳았냐 케인즈가 옳았냐 하는 식의 경제사상의 이념구도를 펼칠 생각은 없다. 내가 하이에크에게 손을 들고 경외를 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천착했던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 견해와 방법론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케인즈는 '작은 정부·큰 정부'라는 외연적 개념을 논하기 이전에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철학적 입장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견지했다. 애초부터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경제학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라 연구의 방향과 천착의 초점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선하거나 악하게, 혹은 유동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프레임으로 보는가는 모든 경제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가 된다. 4대 경제학서를 집필한 스미스(Adam Smith),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밀(John Stuart Mill),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전제했다. 이 차이에서 촉발된 각기 상이한 경제론의 천착과정은 그들만의 경제학을 세우는 깃발이 됐다. 그렇다면 하이에크는 어떤 깃발을 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다. 그리고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다. 건강하고 활력있는 경제적 동력은 집단의 중앙시스템이 아닌 각 개인이 자유롭게 부딪히며 생성되는 지식과 정보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하이에크 경제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은 사회와 다르다. 서구사회는 기독교가 물려준 유산으로 개인주의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그러나 동양은 다르다. 적어도 동아시아권은 유교공동체사상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어 선의를 따져보는 과정을 결락시킨 채 '협동'과 '공동체'라는 의미를 절대선으로 포장해버리는 의식이 존재해왔다. 그 결과, 가장 극단적인 일본의 예처럼,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라는 20세기의 참혹사를 규정지었던 악독한 마약이 폭넓게 스며들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놓게 되었다. 20세기의 수많은 직업정치가들은 그 여백 안에 자신의 권력의지를 채워넣기 위해 발버둥쳤다. 나라와 국민이 불행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상보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변증법적 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둘은 서로간의 특별한 모순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강조되면 사회는 줄어든다. 반면 사회가 강조되면 개인은 위축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현대사는 이를 명징하게 증명한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항상 그랬다. 한 번 커져버린 '사회적 체계'가 다시 기존의 '원자적 개인'으로 분해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20세기의 우울한 교훈은 일단 국가가 팽창하면 다시 부피를 줄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역사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 싸움의 소용돌이 가운데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이 놓여 있다.

   하이에크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참 벌어지는 1944년에 이 책을 썼다. 히틀러의 독재와 소련에서 벌어진 전체주의의 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색채로 물들어가는 영국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결의로 펜을 잡았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힘을 빌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에 대해 그는 경고한다. 그 믿음과 그에 기반한 계획은 비효율적이고 퇴행적일 뿐 아니라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사람들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노예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계획이나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위적 질서'로 바꾸려 들면 애초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향력이 커져 막강한 힘을 지난 정부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국가를 항상 지상의 지옥으로 만들어온 것은 인간이 그것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결과였다"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휄더린의 풍자를 일용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꼬집는다. 하이에크는 훗날 이를 인간의 '치명적 자만'이라고 명명했다. 말년에 펴낸 그의 또 다른 역작 <법, 입법 그리고 자유, Law, Legislation and Liberty>도 이 같은 자생적 질서론에 기초한 독창적인 사회 철학을 펼쳐 보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경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자유주의적 철학을 내놓는다. 저자는 주장한다. 경쟁과 시장이 긴요한 것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정의를 생산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경쟁이란 서로간에 다투는 과정이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인간 내면에 체화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국가는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만 개개인이 가진 잠재성과 그것의 부딪힘으로 발산되는 내밀하고 고차원적인, 무엇보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발생되는 숨겨진 정보와 지식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정보의 부족 내지는 결락, 바로 이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예외없이 실패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책을 소환한 이유는 간명하다. 개인의 자유가 가지는 소중함이 점점 외면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 내 지성과 양심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유의 의미는 '경제적 자유'로 통합되어 표상된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자유'의 범위로 밀어넣었다. 즉 현대적 의미의 자유는 사유재산권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법률과 체계로 정의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복지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국가 크기의 확대를 어디까지 상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시끄럽다. 그에 따라 당연히 대두될 수밖에 없는 '증세', '국가재정', '국민분열'의 문제는 끊임없이 정국을 요동시킨다. 국민을 선동하며 시끄럽게 인기몰이했던 무상시리즈는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무상급식 논쟁과정에서 당선된 현서울시장은 돈이 없다고 징징대며 중앙정부를 두들기고 있다. 현정부의 야심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방향성을 잃고 오락가락 하고 있다. 노인복지의 보편성을 담보한 기초연금법도 시끄러운 논쟁 속에서 축소 개정되었다. 중앙정부의 부채 중 갚을 여력이 없는 적자성 채무가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섰다. 공기업 부채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국민세수는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 과연 이 나라가 정상인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가 커질수록 개인의 재산권(자유권)은 위협받는다. 플라톤식 유토피아와 헤겔적 국가주의는 항시 자유주의를 공격한다. 국가가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면 독일의 나치즘이나 소련의 전체주의와 같은 괴물이 만들어진다.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가 모든 생활을 통제하여 개인의 자유보다 구속력 있는 법률을 우선시하는 이상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대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예의 길>은 바로 그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것은 역사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패턴은 국가와 민족을 옮겨다니며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글프다.

   케인즈는 <노예의 길>에 깊은 공감의 뜻을 전했다.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당신의 견해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느새 내가 당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책장 구석에서 하이에크의 명저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케인즈의 말대로 도덕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의 견해는 명징히 옳다. 그 어느때보다 하이에크의 외침을 되새길 시점이다. 진보·보수, 좌파·우파 할 것 없이 머리맡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반드시 찾아서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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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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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쓰기가 유독 어려운 책이 있다. 난독難讀이나 난해難解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읽기와 쓰기는 다르다. 쓰기는 읽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자기의 주관을 적용시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힘들게 하는 책을 만날 때면 리뷰어는 번민한다.

   사실 이런 경향은 장르를 불문하고 발생한다. 그러나 유독 문학에서 발생빈도가 높다.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은밀한 긴장관계에 기인한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은 부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렬하게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독자의 승리로 끝난다. 작가는 독자를 이길 수 없다. 문학은 독자의 내면에서 재해석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작가의 의도 또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유명한 소설을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량이 소소하고 내용 또한 간략하다. 그러나 막장을 덮은 후 머리속을 정리하고 카뮈의 숨결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즉 카뮈의 <이방인>은 나에게 사유를 정리하고 후기를 남기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지불하게 한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본래 서평을 쓰기 전 타인의 후기를 둘러보지 않는 편이다. 내 감성과 정리가 미세하나마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충분히 천착되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는 고전만큼은 종종 들여다보는 편이다. 온라인상에서 <이방인>의 여러 후기를 훑어보면서 나는 일관된 흐름을 확인했다. 리뷰어 본인의 뚜렷한 입장과 독립된 해석이 밑바탕 된 창조적 텍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르트르나 역자 김화영의 작품해설을 인용하거나 미디어에 공개된 평론가의 것들을 스크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왠만한 시도나 작정이 아니고서는 <이방인>의 서평을 남기는 것은 녹록지 않은 부담과 적지 않은 작업량을 필요로 하는 고달픈 일인 것이다. 감히 누가 <이방인>을 논한단 말인가.

   소설 <이방인>은 문체, 인물, 주제 등 소설을 이루는 거의 모든 면에서 확고한 개성을 확립한 작품이다. 우선 카뮈의 문체는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독특하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실로 무서운 문체를 구사한다. 그의 문체는 시크하고 무심하며 수수하다. 그러나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간결한 문장 가운데 묵직한 무게를 담아낸다. 감정을 절제해서 거의 행동만을 드러낸다. 그래서 공허하고 심심하며 다분히 건조하다. 이런 문체는 주인공 뫼르소의 개성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살인과 법정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핵심적인 서사를 더욱 단단하게 견인하는 요소가 된다.

   사실 카뮈의 문체는 언제나 화두였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작가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대한도의 거리두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체도 문체지만 <이방인>이 묘한 여운을 주는 소설이 된 데에는 주인공인 뫼르소의 존재가 큰 몫을 담당한다.
카뮈는 세계 문학사에 손꼽힐만한 독특한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뫼르소는 매우 특색있는 인물이다. <이방인>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뫼르소를 평가함에 있어 심하게 엇갈리는 경향을 띤다. 그 대극점은 '매우 매력적인 인물', 혹은 '또라이'다. 중간은 없다. 뫼르소에게 '전형성', '평범성', '일상성'을 발견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수많은 텍스트를 탐색한 결과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되거나 아니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라이로 치부되거나, 하는 것이다. 세계의 독자들은 뫼르소를 바로 그렇게 양극단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우선 뫼르소의 행동을 보자. 그는 엄마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최소한 외적으로는 그렇다. 엄마가 죽었다. 근데 울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의 장례식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잠을 잔다. 뫼르소의 이같은 행동은 기존 사회가 갖고 있는 보편적 전통과 질서의 자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장례식에서 꼭 울어야 할까. 우는 것이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그것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걸까. 장례식에서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 안될까. 즉 작가는 주인공 뫼르소의 관점을 통해 사회의 당위성에 대해 질문하며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이 실존주의라는 거대한 철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
실 <이방인>은 카뮈의 타작품들과의 연계성과 실존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힘든 작품이다. <이방인>의 입체적 수용은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를 함께 읽을 때 가능하다. 본래 민음사 구판은 사르트르의 해설이 실렸는데 신판은 역자 김화영 교수의 해설로 갈음됐다. 사르트르의 <이방인> 해설은 널리 읽혀진 유명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실존주의 카테고리 안에 묶어둔 일방성과 해설자 특유의 난해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다. 카뮈와 사르트르 사이의 사상적이고 현실적인 투쟁과 해석의 번역자적 측면을 고려하면 역자 김화영의 해설로 갈음한 것은 출판사의 멋진 용단으로 보인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방인>을 놓고 '실존주의 작품이냐 아니냐'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고백컨대, 나의 이십대는 실존주의에 흠취된 시기였다. '신의 예정'이라는 교리 안에 철저하게 갇혀 있었던 기독교도(장로교)인 나에게 인간의 실존에 방점을 찍은 카뮈와 사르트르의 철학은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순간을 두고 행위와 행동으로 결의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싶고 역동적으로 살아숨쉬고 싶은 젊은 시기에 실존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화두였고 매혹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허상을 알게된 후 굴곡되고 망가진 내 신앙의 상흔에 치를 떨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의 본래성과 순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신 존재의 부정을 향해 달려가는 명징한 불신앙의 통로였던 것이다.

   두 실존주의의 거장도 결국 두 갈래로 갈라서게 된다. 카뮈의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분단'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결국 카뮈가 옳았다는 것을 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갈렸다. 반공주의자를 수없이 일갈했던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서 가해지는 폭력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련과 중국을 위시한 수많은 독재자들의 나라를 찬양했다. 반면 카뮈는 자신의 식민지 조국을 바라보면서도 어떠한 경우의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고 오직 '반항'만 할 뿐이라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이 갈라섬으로 보여준 각기 다른 삶의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존주의의 본질에 대해 의문하게 했다.

   카뮈가 우려했던 건 사르트르식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잘못된 양태였다. 사실 사르트르가 죽은 뒤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행동하지 않는 지성'에 불과했다.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을 찬양했고, 유고에서는 티토를 미화했으며, 쿠바에서는 카스트로를 치켜세웠다. 보부아르와 평생에 걸쳐 보여준 계약결혼의 행태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쓰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사상의 연약성과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사르트르 철학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폐기처분됐다. 도대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하이데거와 후설이 사르트르 사상의 절정기와 시대를 공유했다면 "현상학을 표절 혹은 호도하지 말라"며 사르트르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 얘기를 길게 하는 건 카뮈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실존주의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문화인류학, 카프카의 소설 등을 소재로 해서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은 독특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내는가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화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엄연한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 많은 독자들이 스토리는 이해하면서도 무언가의 찝찝한 여운으로 카뮈의 메시지를 받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이방인>을 재탐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방인>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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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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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이 대단한 작가임은 분명한 것 같다. 단편이라 할 수도 없는 짧은 에피소드만으로 구성된 얇디 얇은 그의 신간 소설집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2위권까지 진입했으니 말이다. 만약 이번 신간을 신경숙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숙이니까 가능한 것이고 그게 바로 신경숙의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경숙은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의 힘은 크게 두 군데서 발현된다. 하나는 '문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게'이다. 그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자기 자신조차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고백할 만큼 섬세하고 세련된 문체는 소설가 신경숙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질이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소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를 명징하게 관통하면서 인간 삶이 가진 내밀한 무게를 끊임없이 측정해내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기존의 무겁고 진지한 것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신경숙의 신간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스물여섯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일상과 상상에서 다양한 소재를 선택해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각 에피소드들은 각기 독립적인 주제와 울림으로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이 짤막한 소설집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신경숙 소설의 '농담'과 '가벼움'의 색다른 세계로 독자를 편안하게 일탈시킨다.

   작가는 제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전달 대상을 규정했다. 작가에게 달은 어떤 존재일까. 인류의 발이 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발현시키는 달의 존재감은 유한한 친근성과 무한한 신비성의 합일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우주적 비밀이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달을 향한 방향성으로 전제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약동이 마치 달에서는 전혀 다른 기적과 신비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이야기 저변에 깔아놓는 작가적 장치가 된다.

   '달'로의 도피는 신경숙이 소설가로서 그간 지향해왔던 자신만의 창작세계의 고유개별성을 잠시나마 일탈하고자 하는 독특한 방식의 아이러니다. 이는 '작가의 말'에서 그가 고백한, "삶의 변화나 재발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끝이 어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허망함을 등에 진 채로 기어코 저 너머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유한한 행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그의 집필철학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한다. 즉 신경숙은 자신의 문학사를 배반하는 이 가벼운 소설집을 친근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지구의 위성인 달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그의 기존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유도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이런류의 짧은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단문장의 힘은 믿는다. 문체와 문단의 간결함과 명확함을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서사와 이야기의 짧은 호흡은 되도록 외면하고 있다. 단편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단편의 한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궁극적인 힘은 장편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의 분량도 못 되는 극히 짧은 에피소드 모음집을 내가 손에 든 이유는 간명하다. 그것은 순전히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텍스트로만 읽혀져야 한다는 내 신념이 가끔 굴곡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항시 작가의 존재성에서 발생된 문제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이 대목에서 묻는다.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서 평가해야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작가와 텍스트 사이의 역사성과 개별성의 합일을 독자만의 주관적인 원리로 화확화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궤변인가. 궤변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조악한 상대주의에 빠져도 될 만큼 나에게 신경숙은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가볍게 돌아온 신경숙이 마냥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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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2013-04-11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 이라서 였을겁니다. 형식을 경쾌하고 가벼운 쪽을 택했을뿐 읽고 난 여운은 어느 긴 소설보다 크더군요. 내겐 모처럼의 힐링이었습니다.
 
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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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 누군가 와서 '무인도에 단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책들을 가져갈 것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무런 고민 없이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그 리스트와 순번이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 보편의 의미와 가치를 장대한 서사 속에 그려낸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그중 첫 번째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진보적 힘은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 추동한다고 역설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두 번째로 꼽힌다. 인간의 속성을 낙관적으로 인식하며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창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마지막 세 번째 순번에 놓인다. 요컨대 이 세 편의 걸작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보물과 같은 고전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밀의 주장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자유'와 '개별성'이야말로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의 가지와 같은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발전과 행복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밀은 무조건적인 자유를 지지하지 않는다. 밀이 자유를 주장한 밑바탕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교육 받고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자유 못지 않게 개인의 사회적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상치(相値)가 아닌 조화(調和)의 원리에서 개인의 개별성을 사회성과 긴밀하게 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밀이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밀의 철학에서 '개별성(個別性, individuality)'과 '사회성(社會性, sociality)'에 대한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개별성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했을 때, 그것이 본래적으로 품고 있는 독창성과 신비성으로 사회적 진보를 추진시키는 원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다양한 타자의 개별성과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 즉 사회성과 결합되었을 때 인간 사회는 궁극적인 행복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밀은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긍정하며 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밀의 낙관주의적 태도는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희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그의 사상 전체를 휘감고 있는 특질이다.
이 특질은 그의 사상이 벤담이 창시한 고전적인 것과 구별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도덕성의 쾌락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밀의 그것은 쾌락의 질적 고상성(質的 高相性), 즉 인간의 지성과 고귀함의 영역을 긍정하며 이를 최우선적인 전제로 상정한다. 이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데,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치며 쾌락의 양적인 면을 강조했던 벤담의 입장과는 분명하게 배치돼 있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밀의 명언은 인간 정신의 철학적 태도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를 잘 압축한다.

   내가 분명한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150년 전에 쓰여진 <자유론>을 다시 꺼내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지닌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형식의 엄연성에 비해 법률과 제도권, 언론과 다수 국민의 선진적인 의식 수준은 꽤 많이 결핍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표현하자면,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너'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관용은 '다름'과 '틀림'을 혼동한다. '다른(different)'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틀린(be wrong)' 것은 곧바로 악(惡)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밀은 분명히 말한다. 설령 잘못된(옳지 않은) 의견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억압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심각한 문제와 위험을 담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버젓하게 살아있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 사건' 같은 촌극이 다시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이는 좌파·우파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해온 내가 '국가보안법'과 '미네르바 사건'을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보안법 논쟁은 국가안보의 문제가 아니고 미네르바 촌극은 허위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사상과 표현에 대한 자유의 문제'인 것이다. 비록 당치도 않은 오류투성이의 의견이거나 귀담을 가치가 부족한 극소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을 주장하고 표현하는 자유 만큼은 전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닌 지성과 상식의 힘으로 충분히 분별하고 자정(自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은 사상 및 출판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매우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참된 것은 참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참된 것은 그 자체로서 진리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거짓된 것은 참된 것과 대비됨으로써 진리를 더욱 명징하게 빛낼 수 있는 원료로서의 가치를 띠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다. 즉 개인이 잘못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행위와 이를 보장하는 공동체적 관용은 오류 그 자체를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국가보안법 존폐 논쟁'이나 '미네르바 사법사건'을 위시하여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불관용의 카르텔은 바로 이 대목에서 새삼 곱씹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유가 모든 것을 구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분명 유한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다른 가치가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보편적 선을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일시적으로, 혹은 특수적으로 잠시 역행하거나 굴곡된 적은 있었지만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조망에서 인류사는 개인의 자유가 뻗어나가는 역사였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장려되지 않는 사회는 발전이 없고 기대가 없으며 진보가 없다. 이는 역사가 명징하게 증명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고도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대중(大衆)'이라는 이름으로 평준화하고 획일화시킨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마저도 대량생산으로 일원화시키는 현대사회의 조악함은 개별성을 바탕로 하는 인간의 독창적인 진보와 발전을 저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체주의적이고 산술적 평등의 사고를 고착시켜 결국 인간의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비자유의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 더 나아가 포스트 현대사회를 내다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우려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밀은 150년 전에 이미 작금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밀의 고민이 분명한 현실로 드러난 이상, 우리에게 다른 해결책은 없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살아숨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인 사회성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애쓰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150년의 시간차를 넘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야 마는 우렁차고 핵심적인 일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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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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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중편소설 <설국>은 읽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량 자체가 짧을 뿐더러 극도의 매력적인 문체가 읽는 동안의 '일시정지'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어의 운율과 일본인의 혼을 모르고서는 오롯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설국>의 번역자는 고통스럽다. 일본어 원문이 아닌 번역본으로는 본래의 가치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리는 태동적 한계를 지닌 소설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설국>의 첫 문장은 매우 유려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雪國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는 가장 유명한 명문장으로 꼽힌다. <설국>은 국내에서 다양한 출판사로 번역됐다. 이 소설은 자못 독특한 신비함을 갖고 있는데, 첫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는지에 따라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즉 <설국>의 첫 문장은 소설 전체의 문체적 조망성을 규정하는 신비한 마력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문체상의 독특함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됐다. 1968년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문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문학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유명작은 의외로 짧은 소설들인데 <설국> 외에도 단편 <이즈의 무희>가 대표작이다. 두 소설 모두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문체를 가졌다. 플롯은 없고 이야기 전개도 단순하다. 인물 사이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이 작가 특유의 세밀한 문체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설국>의 내용은 간단하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주인공 시마무라가 나가타현의 온천 마을의 기녀妓女 고마코를 만나는 이야기다.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다. 소설이라면 으레 갖추고 있을 만한 이렇다 할 이야기의 전개展開나 절정絶頂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애소설이 분명한데도 전혀 연애소설 같지 않다. 가와바타는 단 한번도 소설에서 사랑이 어떠니 이별이 어떠니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지루할 정도로 사소한 변화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그저그런 일상적 행위들을 묘사한다.

   나는 <설국>의 주제를 '아름다움'으로 갈무리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니카타 현의 눈 덮인 묘사는 과히 압권이다. 작가는 발군의 감성적 묘사로 눈의 고장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독자는 각 문장이 빚어내는 하얀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자기 머리속에서 재해석하여 가슴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이는 배경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표현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시마무라의 시점인데, 그가 살피는 시선과 내면의 심리는 이야기를 추동하는 근력이 된다. 시마무라가 목도하며 관심을 갖는 두 여인(고마코, 요코)의 모습은 '생기'와 '절제'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아름다움에 닿아 있다.

   가와바타가 그려낸 여성성의 아름다움은 중첩된 미美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즉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시마무라가 열차를 타고 가며 잠긴 상념과, 이야기 전개상으로 그 어떤 적절성도 가진다고 볼 수 없는 엔딩 장면, 혹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들어오는 장면에서 풍기는 분위기 등은 문장을 읽어내는 자체만으로 미의식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미지적인 장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설로서만 구사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결국, <설국>은 여성에 대한 찬사다. 눈 덮힌 풍경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성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순간을 두고 타오르는 여자의 마음을 매우 감각적으로 포착했다. 특히 고마코가 내뿜는 활력이야말로 여성성의 원형적原形的 정열情熱에 닿아 있는데 이는 작가의 절묘한 여성심리 묘사가 추동한다. 순간에 끊어오르는 여자의 열정이란 그런 것일까. 작가가 그려낸 여성 내면의 아름다운 형용은 '과감'이고 '생동'이며 '진실'이고 '절제'였다. 소설을 깊이 읽어 내려가다 보면
, <설국>은 결국 고마코의 스토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국>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시마무라가 아닌 고마코다. 물론 소설의 시점은 분명 시마무라의 시선에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를 흔드는 생명력에서는 '모든 미美의 흡수'를 발현한 고마코에 보다 높은 밀도가 부여된다. 사실 두 남녀는 서양과 동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아름다운 일본'을 주창한 가와바타의 작품세계를 집약한 인물구도가 된다. 시마무라가 서양적인 교양을 익힌 지식인이라면, 고마코는 산천초목, 삼라만상, 사계절의 미를 나타내는 일본의 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겨울, 고마코를 다시 찾아온 시마무라의 마음은 한없이 얼어붙어 텅 빈 동굴과 같이 되었다. 바로 그때, 고마코의 애정이 시마무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동굴을 메워가게 된다. 맨 처음 고마코는 시마무라의 눈에 비치는 환상이었지만, 이윽고 시마무라의 시선을 초월하여 일본의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가와바타의 이러한 미의식은 일본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해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그것이 동력이 되어 노벨상까지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을 공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동아시아권에 노벨문학상을 주어야 하는 기류가 흐르는 와중에 그나마 제대로 영문으로 번역된 소설이 <설국>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했다는 소문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소문의 진위여부와는 별도로 <설국>은 인상적이고 훌륭하며 매력적인, 지극히 문학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가와바타와 노벨상을 두고 어쩔 수 없는 경쟁을 펼쳤던 미시마 유키오의 평은 이를 잘 압축한다. '여인의 단정한 의상을 연상케 하는 문체에 의해 묘사된 대낮의 신비세계는 가와바타씨의 절묘한 동화이며, 동화란 또한 가장 순수한 고백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미시마 유키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공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사제의 자살은 많은 풍문을 낳았다. 당시 일본문단은 노벨문학상이 두 사람의 일본작가를 죽였다고 떠들어댔는데, 한 사람은 받지 못해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받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미시마의 자살동기를 좌절된 노벨상의 꿈에서 찾거나 가와바타의 자살을 노벨상의 중압에 기인된 것으로 해석하는 상상력은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흥미로운 소문과는 무관하게, <설국>은 노벨상에 값하는 문학세계를 충분히 구축한, 과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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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페딘1T 2017-08-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번역본으로 읽으면 좋을런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