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프롤로그 : 완독하기 힘든 소설

2013년 7월 뉴욕 브루클린의 북 라이엇(Book Riot)은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 속이는 책」이라는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828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조지 오웰의 『1984』 등의 거작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왜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을 할까 생각했지만 독서라는 행위에 내재된 기묘한 지적 우월의식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허세와 위선은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조사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단연 상위에 링크되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내 주변에서 소설 『전쟁과 평화』를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손에 꼽을 정도다. 책 제목은 워낙 유명해서 대부분 알거나 들어본 적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다. 과거 네이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북 카페 책모임을 운영했을 때에도 30명이 넘는 회원들 중 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다시피 나는 책 읽기를 취미로 하고 관련 분야의 파워블로거다. 이런 내 주변에 고전 『전쟁과 평화』를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소설이 재미없거나, 혹은 읽기에 힘들거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소설이 너무 길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길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관중의 『삼국지』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과 같은 시리즈가 있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 장르 자체가 다를뿐더러 문학사적 의의와 무게, 순문학적 가치와 심원성 면에서 견주기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2,3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559명에 달하는 등장인물과 한 사람당 대여섯 개의 별칭(애칭)을 가진 러시아의 호칭 관습을 감안할 때 1권부터 바로 시험에 드는 소설이다. 내용과 주제는 차치하고 수많은 등장인물과 어마어마한 분량에 압도되어 시작부터 쫄게 되는 소설이 바로 『전쟁과 평화』인 것이다. 

 

⑴ 너무 재미있는 소설

사실 『전쟁과 평화』는 너무 재미있는 소설이다. 많은 등장인물과 긴 분량이 작품의 본연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겁부터 주는 오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나폴레옹 전쟁(조국 전쟁)이라는 19세기 초 가장 뜨거운 유럽사의 정중앙을 다루었는데 재미없을 리 있겠는가. 더욱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 고통과 상처, 신앙과 성장 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한없이 부풀어 오르게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의 인물 수와 분량만큼이나 거대하고 방대한 작품이다. 요컨대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 과정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은 재미있고 웅대한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원한 숙적인 영국을 침공한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대패한다. 이후 '대륙봉쇄령'이라는 독특하고 기괴한 아이디어로 영국을 옥죄며 압박한다. 시선을 동부(내륙)로 향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유럽의 국경선을 놓고 한 판 크게 붙는데 그게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면서 제국의 영토를 점점 더 확대해나간다. 패전한 러시아는 황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지휘 하에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고 잠시 평화스러운 시기를 맞이한다. 바로 이 시기에 러시아 대귀족들이 사교계를 열어 교제를 나누는 장면으로부터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의 첫 장면부터 작가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교계 문화를 전면에 배치했다. 황태후의 여성 관리이자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실력자인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아네트)가 개최한 사교모임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이 모임에 안드레이와 피예르를 위시한 주요 인물들이 전부 등장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 귀족의 사교클럽이 여론과 정보를 공유하는 담론의 장이었다는 점을 전제하는 동시에 소설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독자에게 차분히 소개하는 안내적 기능의 역할을 한다. 소설은 크게 베주호프 가문, 로스토프 가문, 볼콘스키 가문. 이렇게 세 가문에 속한 주요 인물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⑵ 등장인물, 그리고 나타샤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일방적인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흔히 안드레이, 피예르, 나타샤를 『전쟁과 평화』의 세 주인공이라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일관된 개성과 진솔한 인간미를 올곧게 표출한 니콜라이를 왜 주인공에 넣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어느 누구도 독보적인 화자가 되어 작품을 지배하지 않는다. 사상의 전달과 성숙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피예르가 작가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평가되는데 그마저도 작품 자체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인물이 소설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각 인물이 가진 개별성의 합이 소설을 형성해간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톨스토이는 세 여자(마리야, 나타샤, 소냐)의 매력을 독립적이고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마치 세 인물에 대한 자신의 긍정을 독자에게 밀어붙이듯이 전달한다. '마리야'는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보잘것없는 여인으로 묘사되지만 끝내 자신이 사랑한 나타샤의 오빠 니콜라이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나타샤'는 시종일관 '밝고 건강한 생명력'이라는 마력을 발산하는 인물로서 여러 상실의 아픔을 겪고 종국적으로 피예르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소냐'는 니콜라이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일편단심의 여인으로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고 포기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세 여인은 각자의 독립된 개성과 존재감으로 소설을 밝게 비춘다.

 

나는 세 여자를 '사랑의 삼원성(三原性)'이라는 측면에서 탐구했다. 마리야는 지성과 이성이라는 여성의 지혜의 힘, 나타샤는 생기와 활력이라는 생명적 차원, 소냐는 헌신과 희생이라는 아가페적 측면을 표상한다고 생각해본 것이다. 이는 각 여성이 갖는 매력이 전부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톨스토이는 이를 부각하기를 원하는 듯 세 여성의 개별성을 자못 도드라지게 묘사했다. 아버지의 꼰대 기질과 유별난 구박을 잘 이겨내고 끝내 니콜라이의 사랑을 쟁취한 마리야는 순결하고 지혜로운 여성의 표본이다. 또한 단 한 남자(니콜라이)만을 사랑하고 기다리며 인내했지만 결국 그 남자(와 집안 전체)의 행복을 위해 온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소냐의 희생은 절대적인 사랑 아가페를 웅변한다. 마지막으로 나타샤가 남는데 그녀는 다른 두 여성과는 다른 힘으로 소설과 독자를 압도한다. 나타샤야말로 우뚝 솟은 단 한 명의 주인공이다.

 

나타샤의 매력은 소설 전체를 포괄하고 압도하며 흘러내린다. 『전쟁과 평화』의 단 한 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나타샤를 선택하겠다. 톨스토이가 묘사한 나타샤의 생명력은 과히 밝고 순수하고 활발하기 그지없어 작품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다른 주인공의 개성과 인간성을 담는 그릇의 역할까지 감당한다. 마치 모든 인물이 그녀를 통해 존재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남자가 없을 정도다. 『전쟁과 평화』의 세 남자, 즉 안드레이, 피예르, 니콜라이(나타샤의 친오빠)는 모두 나타샤를 사랑했다. 보리스는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아나톨은 그녀가 잠시 일탈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나타샤의 매력은 소설 말미에 가서 그 성격과 본질의 화학적 변화 과정을 통과한 뒤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톨스토이가 결혼 후의 나타샤를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자.

"이제는 얼굴과 몸이 보일 뿐이고,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하고 아름다운 다산의 암컷이 보였다. 아주 드물게 예전 같은 불꽃이 타오를 때도 있었다. ..... 중략..... 성숙한 아름다운 몸에 예전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런 드문 순간에는 전보다 한결 더 매력적이었다."

『전쟁과 평화』 4권 - 에필로그 1부, 문학동네

불편한 독자가 더러 있겠다. '암컷'이라는 제법 센 표현이 사용되었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를 여성을 향한 긍정과 찬양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결혼을 해서 네 아이를 낳고 자기 자신을 가꿀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육아에 매진하고 있는 나타샤를 '암컷'이라는 상징적 단어로 찬양하며 처녀 때의 생기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에 있음을 강조한다. 요컨대 가장 높은 수준의 여성미를 외모와 생기가 아닌 모성으로서의 책임의식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시대에 톨스토이의 고루한 묘사에 누가 감격하겠냐마는 적어도 나는 이 대목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톨스토이가 사용한 '암컷'이라는 단어는 동물적이고 번식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엄마가 된 나타샤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인 성숙을 이뤘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성숙'이라는 웅장한 테마와 직결되는데 처녀시절의 나타샤가 삶의 주연(나 혼자만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빛났다면,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된 나타샤는 인생의 조연(남편과 자식의 조연)이라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한층 더 심화된 주연으로 승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전의 단선적 자아에서 결혼과 가정이라는 숭고한 의식을 관통한 후 전혀 다른 차원의 자아의 진본에 이른 여성성의 찬탄스러움을 격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여성성을 모성에 귀속(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극도의 경기를 일으켜왔다. '엄마가 된 나'를 기존의 '단독자로서의 나'와 구별하며 자유의 범위와 이상(理想)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현존이 초라하다고 인식하며 서글픈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인생이 "무조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삶"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사람의 인생이란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삶 사이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긴장관계의 연속이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없는 것', '해야만 하는 것'을 인식하고 구분하며 실천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어른 됨의 본질이다. 인생은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장엄한 깨달음에 고독히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타샤의 달라진 매력(성숙)은 전보다 한결 아름답고 숭고하다.

세 여자의 대척점으로서 엘렌은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여성이다. 엘렌은 등장인물 중 가장 유려한 외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피예르의 첫째 부인이 되지만 수많은 남자들을 자기의 사교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남자가 있고 교태가 있고 위선이 있다. 남편 피예르와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는 결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랑은 집중력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피예르의 재력을 보고 아버지 바실리 공작이 계획적으로 추진한 결혼이었다. 엘렌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성의 비극적 외연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에 소설 초반부에 사교계의 큰 손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뒤로 갈수록 등장 빈도가 줄어들고 끝내 뒷부분에서는 '죽었다'라는 단선적 문장으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세 여자의 선한 영향력에 견주어 엘렌의 부정적 여성상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다.

⑶ 톨스토이 장광설

서평을 준비하면서 온라인상의 많은 후기를 탐색했다. 톨스토이의 장광설이 힘들었다고 평가하는 독자가 유독 많았다.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의 후속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비해 작가가 작품에 개입해서 이러쿵저러쿵 설교하는 대목이 꽤 많은 소설이다. 특히 3권부터 심해지는데 나는 그걸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톨스토이의 장광론 자체가 작품과 완전히 동떨어져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설교가 아니라 작품의 포괄적 관점에서 다른 디테일들과 잘 어우러져 유연하게 호흡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톨스토이의 설교가 부담된다면 이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있다. 소설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3권부터의 짤막한 형식의 작가적 개입은 피할 길이 없다. 자연스럽게 플롯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 말미를 장식하는 「에필로그 2부」는 웬만한 인내력 없이는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데 만약 부담된다면 그냥 패스해도 좋다. 소설은 「에필로그 1부」로 완전히 종결된다. 「에필로그 2부」는 지금까지 오래 참았다는 걸 한탄이라도 하듯이 톨스토이가 자신의 역사철학을 12장에 걸쳐 작정하고 강론하는 장이다. 굳이 읽지 않아도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비단 톨스토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독자로부터 비슷한 불만을 제기 받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비하면 훨씬 깔끔하고 세련됐다. 위고의 장광설은 사실 뜬금없는 면이 있다. 1권을 펼쳐들면 주인공 장발장은 나오지 않고 미리엘 주교 이야기가 90쪽이 넘도록 설명된다. 이를 어렵게 견디면 100쪽에 걸쳐 워털루 전투가 묘사되고, 결말을 기대할 즘이면 파리의 하수도 묘사가 80쪽이나 나와 독서 의지를 시험한다. 여기에 19세기 유럽 역사에 대한 작가 위고의 현학적인 강의는 끊임없이 끼어들며 독자의 호흡을 방해한다. 인간에 대한 심리묘사도 단선적이고 빈약하다. 이런 점 때문에 산만하다는 불평도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는 다르다. 앞서 언급한 「에필로그 2부」만 견뎌낸다면 어렵지 않게 산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이 출간되기 전 여러 번의 개정 작업을 통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자르고 수정했다. 특히 일련의 '군사적, 역사적, 철학적 고찰'을 과감히 들어내고 삭제했다. 그나마 톨스토이가 많이 참은 것이다. 오히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톨스토이의 개입이 작품의 광활한 서사와 문학적 상상력 앞에 용해된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작품과 연합해 있다. 그렇게 흉내 내고 싶어도 흉내 내기 힘든 작품이다. 모방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작가의 훈계는 어색하지 않고 작품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한 작가의 장광설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평화』가 『레미제라블』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작 바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세계가 스스로 글을 쓴다면 톨스토이처럼 쓸 것이다"

⑷ 톨스토이 vs 도스토옙스키

나는 이미 과거 여러 지면을 통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자주 비교했다. 두 작가는 동시대 러시아 작가라는 유사성이 있음에도 뼛속까지 다른 특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톨스토이의 글은 몸에 좋은 약을 먹는 것 같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마약과 같은 중독성 느낌이 강하다. 톨스토이의 문장은 아름답고 유려하여 책을 읽다 잠시 접어두고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싶게 만드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묘사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날카로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끝까지 한달음에 넘기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차이는 묘사의 관점에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내부에서 우주로 확장해가는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세계에서 인간의 심연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톨스토이의 인간 묘사가 주변의 넉넉한 여백을 포용하는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마치 관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숨 막힘을 옹호한다고나 할까.

가령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레빈이 매를 사냥하는 장면과 『전쟁과 평화』의 쇤그라벤 전투 장면을 읽어보라. 톨스토이 묘사력의 압권을 목도하게 되는데 인간과 배경 사이의 공간감,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입체성, 그리고 각 개인이 서로 간에 부딪히며 꿈틀거리는 생명력 등이 조밀하되 여유 있게, 간결하되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각 인물이 배경과 상황 속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직립해 있는데 이는 작가 톨스토이가 예술적 기량 면에서 최고 수준의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이다.

과거에는 마치 내 옆에서 결함 많고 모순된 인간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듯했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좋았다. 어둡고 침울하고 병적인 것들 속에서 인간의 내면과 본성을 보다 날카롭게 천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 말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급진성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정신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결국 태초적 신성함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려는 본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에서 좋은 것을 보고 나쁜 것에서 나쁜 것을 보는 것이다.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계를 보는 눈도 많이 변하는 것 같다. 건강한 것, 정신적인 것, 평범한 것에서 삶의 절정을 체험하곤 한다. 병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극단적인 것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삶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지향(추구)해야 하는 삶은 '정상적인 것들' 위에 놓여 있다. 톨스토이가 그의 불멸의 작품에서 성실하게 그려냈던 '아름다운 것들'의 본래성은 결국 '평범한 것들'의 다른 이름이다. 결론적으로 톨스토이만큼 인간을 잘 아는 작가도 드문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한낱 감정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⑸ 소설과 역사

소설과 역사는 어떤 관계일까. 소설은 허구를 토대로 만들어지고 역사는 사실을 지향하며 펼쳐진다. 그렇기에 역사소설로 불리는 텍스트는 항시 고밀한 긴장감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시공간적 사실의 장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허구나 치명적인 오류와는 양립할 수 없다. 문학평론가 로쟈 이현우의 말대로 역사와 소설이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사에서 이 경쟁의 장을 본격적으로 연 것이 바로 『전쟁과 평화』다.

물론 『전쟁과 평화』 이전부터 역사소설은 존재해왔다. 굉장히 많은 소설이 역사를 다루었고 역사와 씨름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가 이전의 소설과 다른 점은 가까운 과거의 연대기성 위에서 작가의 역사철학을 숨기지 않고 허구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특히 실제 있었던 근래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뒤따른다. 사실이 틀리면 안 될뿐더러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허구를 보탠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톨스토이가 나폴레옹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자.

"그는 둥그런 배 위에 걸친 하얀 조끼 위에 가슴이 열린 푸른 군복을 입고 짧은 다리의 살찐 허벅지에 꼭 끼는 흰색 사슴가죽 바지를 입고 기병 장화를 신고 있었다. 짧은 머리는 방금 빗은 듯하고, 넓은 이마 한가운데에 머리털 한 줌이 드리워져 있었다. 희고 통통한 목살이 군복의 검정 깃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 뚜렷이 보이고, 몸에서는 오드콜류느 향기가 풍겼다. 아래턱이 튀어나오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살이 찐 얼굴에는 은혜롭고 근엄한 황제다운 환영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전쟁과 평화』 3권 - 1부, 문학동네

 

기막힌 묘사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나폴레옹을 톨스토이는 어떻게 저렇게 자세하고 자신 있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실존 인물에 대한 저런 식의 세밀한 묘사는 사실과 상상력이 작가의 영혼 안에서 치열하게 씨름하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과히 문학적 상상력의 정수를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소설 체계를 창조하고 확립한 것이다.

 

 

『전쟁과 평화』와 유사한 골격구조를 가진 소설은 많다. 전술한 바 있는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위시하여 스탕달의 『적과 흑』,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도 비슷한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소설들이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줄기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 운명의 대서사시이다. 하지만 규모와 원조(元祖)라는 면에서 차이가 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원조가 바로 『전쟁과 평화』이다. 즉 『닥터 지바고』는 파스테르나크가 쓴 '전쟁과 평화'이고 『고요한 돈강』은 숄로호프가 쓴 '전쟁과 평화'인 것이다.

⑹ 역사의 동력은 무엇인가 : 역사 vs 영웅

『전쟁과 평화』의 주제를 얘기해보자. 이 소설의 주제의식은 의외로 간명하다. 영웅이 역사를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19세기 중반 당시 역사관의 대세로 자리 잡은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톨스토이의 장광설도 대부분 이 주제와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역사의 주체는 몇몇 위인(영웅)들이 아니며 각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자신의 현존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일반 개인들의 총체적 노력의 합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민중사관(民衆史學)과 연결된다. 사실 조국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을 톨스토이가 두둔할 리 없고, 예수의 신인성(神人性)과 부활(실제적 사건으로서의 부활) 자체를 부정한 그가 기독교의 신사관(神史學)을 옹호할 리 없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영웅사관을 작정하고 반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나폴레옹은 우왕좌왕하고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의 리더십도 밀도있게 표현되지 않는다. 또한 황제 알렉산드르 1세도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더욱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지시와 지휘가 군대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역사 앞에서 영웅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강변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작위적이다. 특히 나폴레옹이 러시아 농노 라브루쉬까와 대화하면서 농락당하는 장면은 영웅보다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슬기가 더 위대하다는 것을 진하게 웅변한다.

나는 두 사관(영웅사관, 민중사관) 모두를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특정 공식에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연역론과 양립할 수 없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다. 인간은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를 돌아보고 총알같이 날아가는 현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하는 논쟁은 시간의 흐름(과거/현재/미래)을 동시간대에서 통합할 수 있는 관점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인간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 수 없고 미래를 현재에 포갤 수 없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볼 수만 있을 뿐이다.

좀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역사는 영웅과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함께 만든다기보다 뒤섞여 있다는 표현이 낫겠다. 나폴레옹의 1812년의 러시아 침공은 나폴레옹의 꿈과 60만 대군의 위엄,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프랑스 민중의 결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나폴레옹이라는 한 지도자의 결단의 크기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류사에서 한 사람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진 주요한 역사적 장면들을 수없이 기억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고독한 결단이 루비콘 강을 건너게 했고, 스탈린의 독특한 인격과 공포정치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트루먼의 결단으로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반면 수많은 부르주아들의 여망과 의지로 루이 16세의 목이 잘려나갔고, 촛불을 든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지도자가 탄핵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역사에는 영웅과 민중이 뒤섞여 있다. 거기에 공식은 없다.

독실한 기독교도(개신교도)인 내가 역사관과 관련한 특정한 이론에 함몰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소위 칼빈주의를 기초로 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내 입장에서 본심은 신사관에 스탠스를 두고 있음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역사는 영웅도 민중도 아닌 오직 신(神)의 섭리와 전능이 이끌어간다고 믿는 입장이다. 그러면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과거 칼빈의 예정론을 공부할 때 수없이 제기되었던 이 논쟁의 핵심은 신과 인간이 동일한 수준의 과학(차원)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시간차가 존재한다. 차원(개념/과학)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은 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면서 동시에 신의 예정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⑺ 제목 '전쟁과 평화'

소설의 제목을 반추하자. 나는 소설의 제목사(題目史)에서도 이 소설은 한 획을 그은, 가장 매력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전쟁'과 '평화'는 마치 상치된 의미로서의 등가 언어로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자 박형규 교수는 「해설」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은 전쟁에 대립되는 상태로서의 평화, 인간적 공동성으로서의 평화, 세계로서의 평화를 다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 나는 보다 더 깊은 함의가 있다는 걸 포착했다. 평화를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의 문제로 풀이했다. 조국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참혹한 '전쟁'과 이를 겪어내며 성취한 인간들의 정신적인 '평화'를 함축한다는 걸 느꼈다. 즉 전쟁의 대척점 혹은 결락됨으로써의 평화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인간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평화를 해석한 것이다.

소설에서 전쟁은 참혹할 정도의 비극으로 묘사된다. 톨스토이는 전쟁의 참상을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쟁이 가진 야만성과 비인간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개별 인간의 희망 섞인 분투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안드레이가 나폴레옹과 높은 하늘을 오버랩해 바라보며 무언가를 깊게 깨닫는 장면, 피예르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다 농민 플라톤을 만나 삶의 본질을 천착하는 과정, 그리고 나타샤가 여러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며 끝내 피예르와 결혼해 행복의 원형에 도달하는 결론 등은 제목이 암시한 인간의 정신적 성숙, 즉 영혼의 평화를 그대로 방증하는 장면들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궁극의 감동은 바로 인간의 삶을 진하게 긍정한 톨스토이의 지혜에 있다. 그의 후기작 『안나 카레니나』는 죽음을 맹렬히 탐구함으로써 삶을 천착한 작품이다. 예컨대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불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써 삶을 마감한다. 작가는 안나와 다른 삶을 산 레빈의 존재(사랑, 가정, 행복)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는 다르다. 그녀는 약혼자 안드레이를 배반하고 잠시 불륜의 유혹에 빠져 깊은 절망에 함몰된다. 그러나 다시 구원할 기회를 얻어 훗날 안드레이와 재회하게 되고 그를 극진히 간호하며 진정한 용서를 받는다. 이후 안드레이는 죽고 나타샤는 종국 피예르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인간 삶의 구원의 맥락을 복잡하게 돌리지 않고 정면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데 소설 『전쟁과 평화』의 깊은 감동이 숨겨져 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대략 80년 남짓한 우리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실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물질을 조금 더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변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예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과 같이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이 말하는 '진정한 평화'였던 것이다.

* 에필로그 : 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

굉장히 긴 서평이 되었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서평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할 얘기가 많아졌다. 장황하고 만연하기 그지없는 형편없는 리뷰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쯤에서 서평을 정리하겠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이 소설 한 편으로 세계의 모든 소설들이 덮이고 커버된다. 소설을 보편을 초과하고 소설의 끝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은 다시 쓰여지기 힘들다. 흉내 내기도 힘들다. 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인 방대한 스케일과 심원한 주제는 결국 '인간의 삶(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웅대한 축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감히 외치겠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http://gilsamo.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읽자 읽자 했던 계획이 2년이나 연기되어 이제서야 읽는다. 1권을 끝내고 2권 첫 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읽은 이 방대한 소설을 다시 집어 든 이유는 '거대한 정신적 크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성숙은 인간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세상과 씨름하지 않는다. 내면의 크기가 큰 사람은 세상의 여러 고단함과 비루함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사람'은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서사시다.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주인공들(안드레이, 피에로, 나타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지 톨스토이는 유려한 문체와 거대한 서사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톨스토이 특유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안드레이와 피에르가 친구 같고 나타샤가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잔잔하고 명징한 영혼의 발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한없이 찬란하다.

   이제 갓 2권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작품 전체의 총평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범우사 번역(역자 동일 : 박형규 교수)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디테일을 모두 잊었다. 약간의 감상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독서를 제쳐두고 굳이 이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마당에 최대한 느리고 세밀하게 읽고자 했다. 어휘 하나 쉼표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력 있게 탐독 중이다. 완독 후 서평을 남기겠다. 과거 『안나 카레니나』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진지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특별한 서평으로 이웃들과 공유하겠다. 이 글은 훗날 서평의 프롤로그 정도로 이해해주면 되겠다.

   『전쟁과 평화』와 같은 대작을 완독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계획(다짐)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독서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사실 2년 전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역자 박형규 교수의 신번역 완간이 늦춰진 측면이 컸다. 또한 당시 회사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건강 문제가 겹쳐 수술 후 병상에서 한 달간 휴가를 보낼 때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잡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과거 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에 대해 가볍게 언급한 바 있는데, 솔직히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해 '나와 더 잘 맞는다'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물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매우 훌륭한 소설이며 그 작품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로 내 심연에 다가왔다.

   『전쟁과 평화』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내용은 물론 인물, 개성, 문체, 관점, 철학, 향기, 소재, 지향 등 모든 것이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인 것이다.

   사실 근래에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삶은 크게 세 개의 동선으로 구분된다. 가정과 회사, 그리고 교회. 최근 세 곳 모두에서 모두 인간성의 한계와 회복에 관한 웅대한 주제를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닌 타자의 문제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의 문제로 전이됐고 폭발됐다. 나이 마흔에 지나치게 진지 타령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가 점점 더 깊고 많아지는 현상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훗날 내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를 상상한다. 나의 전 일생을 하나의 점으로 축약하여 반추할 기회가 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삶의 번민 중 대부분이 사람 사이의 문제이며 그것들 중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크기의 문제'에 연원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이 세계는 어떤 측면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적 의지는 내밀한 형태로 가려져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각자의 자아를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는 상치, 오해, 태만, 격차 등이 발생하고 이로써 인간은 고통받고 상처받는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 웅변했지만 그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지나가버린 시간(과거)으로서만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논증이다. 나는 '마음의 크기'의 내실을 믿는다. 그저 단순한 웅장함이 아닌 실질적인 힘과 내용을 가진 마음의 크기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성장의 새로운 단층을 발견할 때마다 내 실존은 웃음을 짓고 긍정적 미래를 희망한다. 반면 '아직도 멀었다'는 탄식 또한 내 현존을 억누른다. 나는 좋은 남편일까. 좋은 아빠일까. 좋은 성도일까.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나는 '큰 사람'일까. 내 사위(四圍)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디테일들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속 항아리는 충분하게 클까. 아니라면 훗날이라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양한 질문과 사유가 용솟음친다. 이 현상의 동기 선상에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가 놓여 있다.

   문학작품으로서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나와 타인, 삶과 세계에 대해 탐구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세한 서평은 완독 후 특별판으로 남기겠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후기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http://glsamo.blog.m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와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러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드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의 하나다.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등 다채로운 영역을 탐구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살아생전에 40여권의 책을 남길 만큼 열정적인 집필가였다. 하지만 러셀에 대한 내 평가는 애증의 선상에서 출발한다. 솔직히 그의 사상과 저작들 대부분에 냉소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호도된 조롱, 뼛속까지 가득한 좌익적(무정부주의적) 세계관, 철학에 대한 성급환 주관화(일반화), 기존질서를 대하는 경박한 태도 등 내가 그를 멀리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무조건 까고만 볼 수 없는 학자로서의 '박력'이 그에게 있다. 특유의 파워풀한 문장력과 어마어마한 글쓰기력에 압도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그것이 나를 헷갈리게 한다.

   러셀에 대한 내 호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를 소개하자.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네이버에서 주최하는 큰 규모의 어워드가 있었다. 각 분야별로 우수한 콘덴츠를 생산해낸 블로거를 선정하는 행사였다. 당시 나는 책리뷰 부문에서 우승을 했다. 시상식에서 나는 러셀의 말을 인용해 수감소감을 말했다. 러셀의 자서전을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상당히 유명하고 매혹적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의 서문에서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고백한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다. 러셀은 이것들이 자기 삶에서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책읽기'였음을 역설한다. 러셀의 이 말을 인용해 나는 수상소감의 절반을 채웠다. 요컨대 나에게 러셀은 보편적 부정과 일면적 긍정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물인 것이다.   

   러셀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나는 『행복의 정복』을 최고로 꼽는다. 가장 유명한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갈린다. 철학책치고 재미있고 박력있는 문체로 유명하지만 러셀의 지나친 주관과 삐딱한 편견 때문에 철학전공자에게는 증오의 책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복』은 그런 불편한 호오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긴 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행복의 정복』은 보편적으로 두루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됐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수학, 철학, 과학 등 전문분야를 다루지 않았고 러셀 스스로 작정하고 쉽게 썼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행복'에 대해 20세기의 대학자가 논증한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이 활력있는 고전이 된 이유는 행복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 있다. 러셀은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고 노력해서 정복해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 행복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행의 원인을 아는 것이 필수다. 러셀은 책을 크게 '불행의 원인(Causes Of Unhappiness'과 '행복으로 가는 길(Causes Of Happiness)'로 나누어 설명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일반적인 불행의 원인은 어두운 인생관이나 세계관, 경쟁, 피로, 권태, 질투, 부질없는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의 횡포 등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타파하여 행복으로 이르는 길에 올라타야 한다고 힘있게 논증한다.

   행복을 가로막는 여러 원인들을 뭉뚱그리자면 그것은 바로 자기집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몰입은 자아를 바깥 세계와 단절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자기도취나 과대망상, 모두가 나만 미워한다는 합리적이지 못한 자기비하 등의 감정은 우리를 자기 안에 가두어 행복이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러셀은 '나'에 대한 관심을 멈추고 되도록 외부 세계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마흔인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 방의 충격이 있는 통찰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동일한 환경인데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행복에 관한 성찰은 일상의 편린이 아닌 삶의 총체성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생의 비루한 속성은 외면한 채 삶의 디테일 하나하나마다 행복의 공식을 적용하는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과 외연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자아에 구속될수록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은 시선을 외부로 향한다. 결국 행복은 학습과 환경이 아니라 자아와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내 주변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오래 사귄 사람들 중에도 여럿 있다. 자존감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자신의 현존을 엉뚱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경우라면 곤란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눈쌀이 찌푸려진다. 이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자기도취에 함몰된 사람은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자아의 실존에 묶어두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대화의 기결(起結)을 자기자랑으로 채운다. 하지만 내용은 빈곤하고 맥락은 부재하다. 뜬금없기도 하다.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른다. 더욱이 나이가 한참 어린 후배들이 이런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걸 보면 안쓰럽다. 정말 안타까운 건 대개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나르시시적 자존감은 열등감의 역설적 분출이라는 건 심리학계의 오래된 정설이다. 지나친 자기애를 불행의 본질적 요인으로 본 건 시대를 초월한 러셀의 통찰력이다.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건강한 에세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철학자다운 탄탄한 논리로 자신의 논증을 이끌어간다. 러셀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논거들은 백년 전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역사를 꿰뚫는 통찰이 있다. 시중의 천편일률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을 바에는 러셀의 행복론을 일독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다.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매번 다른 고전이다. 사상, 종교, 정치와 무관하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보편의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이 번역 논쟁에 휘말리며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는 역자와 출판사, 댓글러들 간의 치열한 토론이 전개 중이다. 출판사의 요란한 마케팅 방법과 역자의 공격적인 논조, 즉 '태도'를 비판하는 댓글이 주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이번 논쟁의 핵심인 '번역'의 디테일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댓글도 적지 않이 눈에 띈다. 긴 연휴 기간(어린이날-석가탄신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출판사 측에서 그간의 댓글들을 일괄 삭제하기도 했지만 당분간 이 논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리뷰어로서 다양한 주관적 해석을 엿보고, 그 와중에 간주관적(intersubjective)인 것을 추출하며, 종국적으로 가장 '카뮈적'인 게 무엇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을 생각할 때 역자의 논증과 새 번역본의 가치를 깊게 탐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한계 때문에 생산적이고 학습적인 책읽기에 더욱 열정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이방인> 탐구의 선순환적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본문과 긴 역자후기 모두 꼼꼼히 읽었다. 단어와 쉼표, 어느것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세밀히 살폈다. 느린 속도는 불가피했다. 물론 모든 책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이는 평소 내 독서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에 우선하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역자(이정서)가 지금까지 최고의 번역으로 꼽혀왔던 기존 번역(김화영 역)이 오역이었다고 지적하며 강렬한 논리로 비판하고 재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자가 자신의 번역이 카뮈의 의도와 <이방인>의 본래성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치열한 정독은 불가피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힌다. 문장이 매끄럽다. 낱말의 의미를 풀어내는 일차적인 해독력은 무난하다. 딱히 막히는 부분은 없다. 번역본이 매끄럽게 읽힌다는 건 일단 장점이다. 사실 기존의 김화영 역은 매끄러운 문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유의 밀도나 표현상의 의도와 무관하게 문장 자체만으로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맞춤법, 주술 호응, 문단의 전후 맥락, 단어 선택 등에서 김화영 역은 다소 투박한 듯 읽혔고 일부분에서는 조악한 느낌마저 들었다. 최소한 가독성에 있어 김화영의 번역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두 번역본(김화영 역, 이정서 역)을 비교한 결과 단어와 문장이 주는 외연상의 어감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화영 역은 마치 교정이 되지 않은 글을 읽는 듯한 단절성의 비문을 자주 사용한 데 비해, 이정서 역은 거침없이 미끄러울 정도로 유려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일관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매끄러운 문장이 무조건적으로 옳거나 좋다는 뜻은 아니다. 번역의 핵심은 원문을 얼마나 충실히 옮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카뮈의 문체가 본래적으로 가독성과는 거리가 먼, 투박함과 불명확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한 것이라면 그 고유성을 그대로 살리는 게 제대로 된 번역이다. 어려운 건 어려운대로 모호한 건 모호한대로 오류는 오류대로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최고의 번역인 것이다.

   선술했듯이 각 사건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정서 역이 보다 높은 가독성을 가진다. 또한 주인공 뫼르소를 위시한 소설 속 주요인물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데에도 이정서 역이 명확한 입장에 서 있다. 역자 이정서 씨는 이례적으로 긴 역자후기에서 김화영의 오역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무려 58개의 오역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오역으로 규정한 문장과 문단을 세밀게 해부하며 소설 <이방인>의 개별적 각론들을 주석한다. 역자의 논증은 구체성, 성실성, 일관성에서 부분적으로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그래서인지 출판계의 잡음과는 별개로 서점에서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기존 번역을 재단하는 역자의 논거 중 핵심은 단연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동기다. <이방인>이 부조리 문학으로 불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살인 동기와 법정 태도에 있었다. 기존 번역서들은 공통적으로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태양'에서 찾았다. 그러나 역자 이정서 씨는 '칼날'에서 찾고 있다. 태양은 칼날을 수식하는 형용적 위치에 있을 뿐이다. 역자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정당방위였고 사건 전후에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진행과 사건 전개가 명징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필연성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힘을 주어 강변하기도 한다. 즉 역자는 부조리 문학으로서 소설 <이방인>이 분출해왔던 특질에 대한 기존 통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해석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이다. 김화영 교수의 오역으로 한국인들이 여태까지 <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다,는 역자의 주장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뿐만 아니라 해외의 출판계와 비평가, 독자들도 역자와 비슷한 선상에서 <이방인>을 읽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쏟아낸 역자의 논증 중에서 이에 대한 디테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사르트르의 해설을 위시하여 <이방인>에 대한 해외의 권위있는 비평과 해석에 대한 대응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역자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김화영 번역본이지만, 논쟁의 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역시 핵심은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은 역자의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역자의 정당방위 주장은 철저히 역자 자신의 '해석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 실제로 역자의 번역이나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나 뫼르소의 살인 장면에서 보이는 사건 전후의 인과적 전개과정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의 문제로 볼 사안도 아니다. 위대한 소설은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역자는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뫼르소의 행동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뫼르소 당사자의 머리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이상은 불가해하다. 시종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1인칭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뫼르소가 가진 생명력을 외면한 채 소설 구조의 형식적 기제에 해당하는 우연과 필연을 연역적으로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뫼르소가 소설 속 가상인물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생명력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필연의 프레임은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는 번역을 넘어서는 영역, 즉 열려있는 텍스트로서의 '소설적 자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개별 수용자가 가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역자는 정당방위라는 연역적 결론을 상정하고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에 구속시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번역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역자가 카뮈의 세계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비롯한 카뮈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번역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필수적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부조리는 우리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를 카뮈가 어떻게 픽션화했는지, 그리고 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와 긴장이 어떻게 부조리라는 개념을 입체적으로 천착해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꼭 필요하다. <이방인> 한 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작가로서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거리두기로 수렴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르트 개인의 해석이지만 최소한 작가와 주인공, 즉 카뮈와 뫼르소 간에 존재하는 '객관적 여백'은 분명 존재해 있는 것이다. 카뮈도 이럴진대 이정서 씨의 주장은 타언어권 번역자의 입장치고 지나치게 일방적인 면이 있다.

   양비론을 싫어하지만 김화영 교수의 침묵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논쟁의 흐름상 가만히 있어야 할 단계를 넘어섰다. 물론 새움출판사와 역자 이정서 씨의 문제제기 방식과 태도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 선술했듯이 아무리 자신의 번역에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선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 오해를 살 만했고 비판 받을 만했다. 김 교수로서는 불편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논쟁의 핵심은 번역의 질이다. 어떤 번역이 카뮈와 <이방인>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정서 씨는 집요하고 일관되게 기존 번역의 오류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왔다. 또한 김 교수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응답은 없다. 개정판에 참고하겠다는 말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 중이다. 지식인의 참된 실력은 질문을 대하는 태도와 실력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성실한 답변은 지식인이라면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는 게 위대한 학자의 태도다. 이런 차원에서 김 교수의 적절한 답변을 기다리는 독자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이번 번역 논쟁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 하나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반으로 텍스트의 해석은 개별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심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내 책읽기의 부끄러운 현재상을 직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식이 있었다. 그랬다. 고백컨대 난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카뮈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를. 쉼표 하나도 무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뒤늦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새 번역본, 이정서 역)이 나에게 준 선물은 녹록지 않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aibal 2014-05-2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관적으로 쓰시려고 노력은 하신 것 같습니다만...

김화영에 대한 공격이 시정잡배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언 수준이라... 오로지 김화영을 매장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눈에 핏발 세우고... 그렇게까지 안해도 충분한 일이고, 오히려 더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인데...

문화, 출판 종사자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금도는 지키면서 사업을 했었는데, 이정서에 오면서 그런 금도가 최초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글을 쓰시면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는 셈이 됩니다.

정당방위인데 번역이 잘못 되어서 몇십년 동안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정서가 주장하고 대대적으로 마케팅하였는데, 이제 정당방위는 아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고...

정당방위가 잘못되었다는 반론에 이정서는 일체 재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 주장은 소설의 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엉뚱한 주장이고, 세계적인 코메디라 할 것입니다. 재반론을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잘못된 정당방위 주장에 사과를 하여야할 것입니다.


김화영의 반응은 그 다음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덧글을 달았더니, 고압적으로 글쓰지 말라고, 명령까지 하더군요. 부정적인 덧글, 리뷰글이 우리 문화계에 아주 안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훈계까지 덧붙여서.... 자기네는 아예 김화영을 물고뜯기를 살떨리게 하였으면서 말이죠... 정상적인 출판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전직 조폭들이 모인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윗 2014-05-21 10:12   좋아요 0 | URL
요청드린 마지막 문장 삭제는 바로 해주셨군요. 빠른 피드백, 고맙습니다.

서평에 기술했듯이 저도 이번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님은 제가 결과적으로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학문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예의와 태도를 보다 중요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정서 씨의 논리가 갈팡질팡하고 있고 궤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내용조차도 점차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제 서평이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님이 제 글을 잘못 읽으셨거나 제가 글을 잘못 쓴 것입니다. 글을 쓴 리뷰어로서 본 서평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각인해둡니다.

제가 이번 번역 논쟁을 보면서 경계했던 건 '불관용'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출판사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댓글 토론도 출판사측의 일괄 삭제로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댓글을 삭제하고 통제하며, 더욱이 법적 소송까지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첨예한 문제를 토론하다보면 나와 다른 너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인정하는 전제로부터 토론은 출발해야 한다고 보는데, 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상당히 씁쓸합니다. 물론 입장을 바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정서 씨와 일부 댓글러들 간의 싸움을 보면서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했던 저 같은 미천한 독자는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하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비통한 마음으로 루터파와 교황파에 관해 말했듯이,"말과 글의 전쟁이 오래가면 폭력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정확한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새움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 논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즉 생산적인 토론의 장으로 호출할 수 있는 당사자는 바로 김화영 교수로 본 것입니다. 이황 선생이 기대승에게 보인 대학자로서의 크기를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그것을 감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김화영 교수에 대한 제 입장의 취지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분이 번역하신 카뮈 전집을 통해 카뮈를 읽은 사람입니다. 물론 님의 분노하는 마음과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jaibal 2014-05-2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 님....
감사드리며, 고견에도 감사드립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크라이나 사태가 갈수록 험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크림반도가 난리다. 전 세계가 경악하며 연신 러시아와 푸틴을 비난 중이다. 물론 크림반도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참여한 투표를 통해 러시아 귀속을 원했다. 러시아는 자결권이라는 수사로 포장하며 크림반도에 대한 야욕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남의 나라에 군대까지 파견시키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건 어디서 얻은 명분인가.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함께 알아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과거 구소련의 스탈린 집권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600만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당시 스탈린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체제를 만들기 위해 농민개혁을 실시했다.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은 과히 대단했다.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모조리 불태워 고의적인 기근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600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아사로 죽어간 것이다. 이를 제 2의 홀로코스트, 즉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실로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라 하면 치를 떨고 스탈린은 악마와 같은 존재로 경멸해오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가진 악마성은 과히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악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국가적 고의성으로 희생된 사람을 적게는 1,2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1991년 소비에트 붕괴 후 스탈린 비밀문서가 속속 공개되면서 스탈린 체제의 악질성이 여실히 증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서 구소련의 스탈린을 친구로 신뢰하고 협력했던 루즈벨트의 낙천적 태도가 악랄한 스탈린 정권의 공고화를 부추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분단도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스탈린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전체주의 체제로 꼽힌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타민족도 아니고 자국민을 스탈린처럼 집요하고 단호하게 살육한 지도자는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당시에는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에 연합국 측에 속했던 스탈린의 악행이 구조적으로 묻혀버렸다. 더욱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공산유토피아의 대두로서 그에게 덮혀진 영웅적 신비성은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깡패를 잡기 위해 엇비슷한 다른 깡패의 악행을 허용한 것이다. 애당초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두 쓰레기 깡패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었다.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은 자신의 노동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하여 스탈린 체제의 지옥성을 고발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스탈린 체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처참한 단면을 극도의 세밀한 필치로 그려낸 걸작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거대한 생명력을 폭발시킨다. 작가는 참혹한 수용 생활의 일상성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양면적인 문체로 담담히 그려냈다. 과히 불멸의 작품을 인류에 남긴 것이다.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간명하다.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속성은 현실을 비틀어 픽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고발하고 천착하는 것이다. 작가 솔제니친은 반소反蘇행위를 했다는 누명으로 1945년부터 약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삶을 보냈다. 그간 자신이 겪은 고통과 어두운 세월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담은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노동수용소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허상에 대해 낱낱이 토로했다.

    소설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작가 솔제니친의 분신이다. 슈호프는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정부로부터 '반역죄'를 선고받고 노동수용소에 갇힌다. 소련 정부는 그가 이틀간 독일 포로생활을 했던 것을 꼬투리 잡았다. 반역죄의 내용은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됐으며,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한결같이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그들 모두 억울함으로 수용소에 갇힌 채 언제인지 모를 석방의 날을 기다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보낸다. 작가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상을 포착하면서 스탈린 체제가 수많은 약자를 억압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고 있음을 우회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가가 묘사한 수용소의 하루는 외면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같다. 주인공 슈호프는 하루 동안 몸이 아팠고, 요령을 피우며 작업을 했고, 감시원을 속이고 죽 한 그릇을 더 먹었고, 잎담배를 구했고, 줄칼 조각을 들키지 않고 숙소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 음식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저항하지도 않고, 탈출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는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담담한 일상성 속에 녹아있는 처참한 비인간적 삶의 단면들은 이 소설이 내재한 정치적 의미를 고결한 문학성 위에서 완성시킨 작가적 역량을 대변하는 장치들이다. 작가의 한 맺힌 분노, 혹은 고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이 문학적 목소리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의 삶은 위대한 작가의 정수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소련 정부의 보이콧으로 수상대에는 오르지 못한다. 결국 소련의 정치체제와 타협을 거부하여 1974년에는 반역죄로 추방되기에 이른다. 2008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전체주의를 비롯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 자본주의가 가진 물신적 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문학으로 살았고 문학으로 저항했다. 그의 삶 자체가 문학이요, 문학은 그의 인생 전체를 휘감은 열정이었다. 솔제니친은 작가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전 인생을 통해 보여준 가장 빛나는 예였다. 그토록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며 체제에 저항했던 그가 생전에 스탈린의 향수를 공유하는 푸틴을 지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정권이었던 스탈린 체제에 대해, 보다 넓게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정치구조적 기제에 저항했던 솔제니친의 삶은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위시하여 전 세계에 도사리는 반자유적 카테고리를 향한 숭고한 일갈이다.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며 텍스트를 낭비하는 이 땅의 얼빠진 작가들에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사실을 조언하는 강력한 울림이기도 하다.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와 '문학'은 러시아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프레임이다. 러시아는 미우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러시아가 스탈린과 푸틴, 공산혁명의 나라지만, 동시에 톨스토이와 푸쉬킨, 솔제니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