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거짓말 : 금기 속에 욕망이 갇힌 여자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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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일라 슬리마니'가 모로코에서 살고 있는 여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듣고 기록한 책.

지금 여기의 내가 읽기에 특별할 건 없지만, 그러나 '이런' 모로코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말하여지고 읽혀지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여자들의 처녀성이 중요한 나라, 결혼 전까지 처녀성을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연애하면서 섹스를 하지 않으면 쿨한 여자가 아니라, 삽입 외의 섹스를 시도하고(항문과 오럴), 쳐녀막 재생 수술도 받는다.

너랑 결혼할거니까 섹스하자~ 라고 해놓고는, 결혼은 정작 섹스를 허락하지 않는 여성과 하려는 남자들이 있는 나라.


우리는 더 이상 두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출산을 위한 목적 이외에 모든 성적 욕구가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여성들에게 만연한 재난과도 같은 상황, 결혼 전엔 반드시 처녀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의무, 결혼 후엔 수동적이며 순종적이어야만 하는 여성들의 처지를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다. 자기 몸을 이처럼 불합리한 사회적 규약에 저당잡혀야 하는 여성이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으리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렇게 ‘성적인‘ 관점에서 침묵과 속죄만을 강요당한 여성들은 한 개인으로서도 철저히 부정된다. - P20

"열여섯 나이에 단지 이성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경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경찰서로 끌고 가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해본 적 있는 사람들, 그랬다간 가족들에게 경찰서에서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한 일을 당할 거라고 빌며 매달려본 사람들, 독재 권력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나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 P21

사춘기가 되면 세상이 두 그룹으로 나뉜다. 섹스를 하는 그룹과 하지 않는 그룹. 여기서 하는 선택은 서구 세계 사춘기 소녀의 선택에 댈 바가 아니다. 모로코에서는 거의 정치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처녀성을 잃음으로써 여성은 자동적으로 불법의 세계로 떨어지는데 이것도 물론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욕망 실현의 문제가 있고, 거기에 제약이 너무나 많다. 젊은 연인들은 어디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하나?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호텔에서? 돈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한 방을 쓰고자 하는 한 쌍에게 혼인 증명서를 요구할 권한이 호텔에게 있다. 그러므로 갈 수 있는 곳이란 자동차 안, 숲 속, 해변, 공사장이나 황무지다. 그런 곳에서 발각될지 모른다. 경찰에게 연행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감을 가지고 사랑을 나눈다. - P35

가장 많은 잉크를 흘리게 만든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아미나 엘피랄리 사건일 것이다. 2012년 3월 탕헤르 부근 라라슈에서 열여섯 살 소녀가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 집안끼리 친구 사이로 지내던 남자에게 강간당한 소녀는 가족과 강간범 가족의 주선으로 강간범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피해자와 결혼할 경우 강간범은 더 이상 법의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는 형법 475조의 실체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법에 따르면 미성년자 유린의 경우 1년에서 5년의 징역형 또는 200에서 500디르함의 벌금형에 처한다. 문제가 된 것은 다음 구절이었다.
"납치되거나 유린된 결혼 적령기 미성년이 가해자와 혼인하는 경우, 가해자는 혼인 무효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의 제소가 있는 경우에만 기소될 수 있으며 혼인 무효가 발효된 후에야 처벌을 받을 수 있다." - P59

사건은 새벽, 모하메디아의 해변가 낡은 벤츠 승용차 안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주인공은 62세의 파티마 네자르, 그리고 63세의 오마르 벤하마드. "성행위 체위"가 경찰의 눈에 포착된 두 사람은 "명백한 간통 혐의"로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모로코뿐 아니라 북아프리카 다른 나라에서도 매일같이 목격되는 이 장면은 주인공이 누군가에 따라 아주 달콤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이날의 주인공 커플은 PJD의 이데올로기적 분파인 개혁과 단일 운동당의 존경받는 간부들이었다.
히잡을 단단히 여민 파티마 네자르는 엄정하고 근엄한 얼굴로 세간에 각인된 인물이었다. 미망인인 그녀는 특히 매우 보수적인 연설을 하기로 유명했다. 가령, 자료 비디오 속 그녀는 여학생들에게 육욕을 금할 것을 권하고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시선과 웃음은 간음을 유발하니 피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 P65

그녀의 파트너, 이슬람학 박사 물라이 오마르 벤하마드는 유부남인 데다, 2013년 페이스북에 사랑과 관련된 글들을 금지하는 파트와를 발표하여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악행과 일탈에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선 인물들이었다. 둘은 간음, 동성애를 격렬히 비난하며 모로코 사회에 병적인 엄격주의를 주입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자유와 음악의 축제의 존폐 여부마저 공격해온 인물들이었다. 지나칠 만큼 신실한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되듯 성은 두 사람에게 오히려 강박관념으로 자리 잡아, 그들은 한번도 법을 거스른 적 없는 이들이 으레 지니는 후안무치로 호색가들을 향한 위협, 인간 혐오, 각종 증오를 양산하게 되었다. - P66

까놓고 말하면, 이 모든 게 사실은 돈에 대한 거라고 해야 맞을 게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안된 일이지만, 매춘굴을 단속할 때 대가를 치르는 건 매춘부들이지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야. - P111

"프랑스 학교를 다닌 전 남자 친구는 대체로 개방적이고 쿨한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결혼은 어리고 처녀성을 간직한 여자애하고 하고 싶어 했죠. 그러면서도 규칙적으로 매춘부를 만나러 다닌다고 우쭐댔고요. 좀 놀라는 기색을 보이는 내게 이렇게 말하던군요. ‘ 왜 이렇게 이해심이 없어? 이건 내 권리야. 나에겐 섹스할 권리와 처녀와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그에게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죠. 다른 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완전히 미숙한 녀석이었어요."
말리카가 이미 몇 번이나 거듭 말했듯이, 남자들에게는 선택권이 많다. 바로 이 위선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남자들에겐 메뉴판이 있어요 . ‘메뉴‘에서 먹고 싶은 걸 쏙쏙 고를 수 있죠. 한쪽으론 같이 자고 싶은 여자를, 그리고 또 한쪽으론 결혼할 여자를요." - P124

아랍 위성 방송에서 이슬람교 율법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이름난 정통 이슬람교 설교자 셰흐 알 카라다위는 알자지라 방송국의 [이슬람교의 법과 생활]을 진행하는데, 시청자가 수천만 명에 달한다. 그는 이따금 성적 문제들에 접근하기도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가령,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어떻게 해소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자위행위를 권한다. 2008년, 네덜란드의 한 이맘은 무슬림 여성들에게 자전거를 금지했다. "자전거 안장에 걸터앉는 것이 여성들에게 성적 욕망을 부추기므로 자전거는 금지되어야 할 물건"이라는 의견이었다. 2007년, 알아자르 대학의 두 교수가 이런 제안을 했다. "여성은 동료에게 하루 다섯 번씩 모유 수유를 함으로써 그와 가슴으로 유사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엄마와 젖먹이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지극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사무실에 둘만 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 P138

관련 기록에 따르면, 최근의 파트와는 여성들에게 바나나와 오이를 만지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그것이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 P139

카사블랑카나 다른 큰 도시에서는 독립적인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자기 것으로 보장받아요. 거짓 순수함 속에 감추지 않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죠. 하지만 절대 다수는 여전히 껍질뿐인 관계, 삽입이 없는 관계예요. 많은 여성들이 처녀막 재생 수술을 받으며 가부장 중심 사회가 요구하는 체제로 편입하고 말죠. 이 여성들은 끝없이 거짓말과 위선을 반복해가며 성행위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수많은 여성들이 이런 말을 하죠. "그가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에 관계를 가졌어요." 하지만 말이죠, 남성들은 성관계를 허락한 여성과 결혼하는 걸 ‘특히‘ 싫어해요. - P184

언젠가 성추행을 주제로 텔레비전 방송에 출현한 적이 있어요 추행 가해 남성들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죠. "본능을 조절할 수 없다면 당신들은 짐승과 다름없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오자마자 상황이 걷잡을 수 없더군요. 페이스북 페이지에 각종 공격과 욕설이 흘러넘쳤죠. 사람들은 나를 매춘부로 취급하고 입에 담기 힘든 욕을 쏟아냈어요. ‘네가 감히 성적 자유를 옹호하면서 추행에는 반대할 수 있느냐?라는 게 요지였어요. 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데엔 눈을 감고 싶은 거겠죠. "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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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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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결혼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 남자는 그녀를 애인으로 두고

또다른 남자는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말한다, 애인은 따로 두고.

도처에 결혼이 널려 있었으나 그 누구도 결혼으로 인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호텔 뒤락에 오기 전에도 그랬고

호텔 뒤락에 오고 나서도 그랬다.


"차도 줄 거요?" 그러나 차를 마시는 순간 몸놀림은 점점 빨라지고 단호해진다. 그가 서두르고 있음을 그녀는 알게 된다. 그의 손이 짙은 붉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때면 이디스는 그가 이제 떠나리라는 것을, 곧 옷을 입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나면 이디스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프스단추와 시계, 이런 것들은 그의 또 다른 삶에 속한 것, 그의 아내가 학교에 늦는다고 아이들을 불러대는 그 아침마다 그가 하는 일인 것이다. 급하게 차로 달려나가 밤을 뚫고 요란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커픈 뒤에 서서 지켜보노라면 끝내 이디스는 그를 거의 알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늘 마치 아주 영원히 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돌아왔다. 데이비드는 곧 돌아왔다.
낮 시간은 순전히 그를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라 느껴졌다. - P35

아이리스 퓨지가 호텔 뒤락에 매년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쇼핑을 하러 오는 것이었다. 사별한 남편이 사려 깊게도 스의스 은행에 부인 명의로 꽤 많은 돈을 예치해놓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 P44

"전자 기술에 관한 겁니다. 꽤 큰 규모의 전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놀랄 정도로 잘되고 있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저절로 굴러가지요. 내 밑의 사람들이 잘 맡아서 해주는 덕분에요. 모든 일에 책임은 내가 지지만 일에 쓰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어요. 그 덕에 좋아하는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 P109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왜 내가 로맨틱한 사람이 되는 거죠?"
"당신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 잘못 끌려가고 있으니까요.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완전한 조화란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요? 단순히 감정의 단계가 서로 잋리하지 않는 탓에 많은 시간과 추측을 낭비하며, 끊임없이 고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요? 가볍게 알고 지내는 것이 깊은 열정보다 언제나, 실제로 더 유효하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 P111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디스." - P114

"당신은 더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게 없는 편이 더 좋죠. 이디스, 당신에겐 사랑이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사랑이 당신을 비밀스럽게 만들고 감추게 만들고 게다가 아마도 정직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 당신을 이 철 지난 호텔 뒤락으로 보냈고, 여자들과 앉아 옷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죠. 이게 당신이 바라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 P117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네빌 씨나 그의 돈을 좇지 않아요. 돈은 내 손으로 직접 벌어요. 돈은 어른이 되면 누구나 버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후보자를 탐색하는 여자들의 시각이 나는 싫어요."
"그게 왜 나쁜지 모르겠네요." 모니카가 열의 없이 대꾸하더니 조금 쉬었다 덧붙여 말했다. "남자들도 그러는데요." - P171

데이비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낵 돌아가면 과연 기쁘게 맞아줄까? 아니, 그의 진심을 알기까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만일 그가 거기 없다면? 어디서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디스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길 수 있었다. 휴가를 갔을 수도, 병에 걸렸을 수도, 죽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이디스는 괴로움 몸짓으로 머리핀을 빼냈다.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흩어졌다. 그게 사실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그의 관심을 잡아두지 못하는 그저 얌전하고 충실한 여자일까? 그저 다른 여자와 다르고 신중한 여자라 소동을 피우지 않을 거라 믿고, 까다롭고 환상적이고 도발적인 자기 아내에게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때 만나는 그런 여자인 걸까? 그냥 잠시 마음을 움직인 막간의 여흥일 뿐일까? 아니면 나를 경험 많은 여자라고 생각한 걸까? 내가 자기와 똑같은 이기심으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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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브러더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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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만의 개인적 이유와 사회적 원인, 비만 혐오와 다이어트 산업의 엉망진창까지 날카롭게 이야기해준다.
그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인간관계와 본성에 대한 이야기, 재능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는 훌륭한 덤이다.
아, 사적인 갈등과 고민, 허영심, 죄책감 같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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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매일 피곤하다. 피로를 잘 느낀다. 지난 주에 친구를 만나 내 증상을 얘기했더니 '어, 그거 갑상선 항진증 증상같은데' 했다. 이미 갑상선 치료약을 먹고 있던 친구인데 아마도 내가 느끼는 증상과 비슷했는가 보았다. 마침 오전에 방문한 한의원에서도 갑상선이 안좋단 얘기를 했다. 6월의 수술 때문에 피검사라면 질리도록 많이했고, 그 때 갑상선 이상에 대한 얘기는 없었는데.. 하는수없이 주말에 갑상선 수치 검사를 해봐야겠구나, 생각하는 참이었다. 그러던 어제 오후, 아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 아빠."

"밥 먹었어?"

"응."

"오늘 일찍 올거야?"

"아마도?"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 요즘 예전의 너같지가 않아."

"응."

"그래서 얘가 요즘 왜이러나, 왜이렇게 기운이 없나, 비염 때문인가..했는데 그렇다고 이런가 싶어서. 생각해보니까 너 수술하고 나서 그런 것 같아."

"응, 그것도 일리가 있네. 그럴 수 있겠다."

"야, 니가 장기 하나를 떼냈잖아. 그래서 맥을 못추는 것 같아. 넌 돼지처럼 돌진하는 애였는데.."

"응.....응? 뭐라고? 돼지?"



그러나 더 따지지는 않고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렇지만 갑상선 검사는 해봐야겠다, 하면서 아빠랑 전화를 끊었다.


돼지라니.

돼지라니.

아니 돼지라니.

무슨 .. 돼지람?

아니, 돌진..하는게 무슨 돼지야. 돼지가 돌진해? 불도저지, 불도저, 불도저가 돌진하지. 돼지가 왜 돌진해. 돌진도 넣고 싶고 돼지도 넣고 싶어서 돌진하는 돼지 만들어버린것인가, 아빠여...



하아-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자신의 책 《빅 브러더》에서 고도비만인 남자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리고 조금 비만인 여성의 얘기와.



'판도라'는 4년만에 만나는 오빠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엘 갔다. 오빠는 어린시절 잘생겼고 인기가 많아 사람들이 지나가다 뒤를 돌아보는 타입이었다. 그런 오빠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너의 오빠가 내 집에 머물고 있지만 빡치니 데려가라' 했던 것. 재즈 음악 연주자인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걸까?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마음으로, 다음 공연 스케쥴이 있다는 때까지 약 두 달간 판도라는 오빠랑 함께 살기로 한다.

판도라의 남편은 다른 누군가 이 집에 와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게 달갑지 않지만, 어쨌든 그에게 손님방을 내어주기로 한다.

공항에 가 기다리는 판도라. 드디어 오빠가 탔을 비행기가 착륙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오는 가운데, 그 비행기에 탑승했던 것 같은 사람들이 누군가 험담하는 얘기를 듣게 됐다. 너무 뚱뚱해서 불편했다 좌석을 따로 줘야 하지 않느냐, 냄새도 지독했다, 하는 것.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흘려지나가는 것일뿐, 판도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나저나 오빠는 언제 나오지, 하고 있는데, 자신의 앞에서 오빠도 못알아보냐며 휠체어에 탄 신사가 말을 건다. 응?




공항이 가까워지자 오빠를 다시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드디어 '식욕'을 가진 식구가 생기는 셈이었다. 오빠는 내가 갖지 못한 재치와 재능, 정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대담했고, 제프 브리지스처럼 잘생긴 아버지의 얼굴을 빼닮았지만 우리 아버지 트래비스 씨의 흠이었던 느끼함은 닮지 않았다. 더 젊었을 때는 곱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아름다웠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마흔 살이 되면서 얼굴이 조금 넓적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광대뼈는 여전히 튀어나와 있었다. 짙은 금발 머리를 늘 조금 길다 싶게 잘라서 정수리 부분으 헝클어진 머리칼이 마치 광환처럼 너울거렸다. 건반을 연상시키는 활짝 핀 미소는 먹잇감을 노리는 커다란 고양이처럼 조금은 사악해 보였다. 내가 10대 초반일 때 학교에서 별 볼일 없었던 내 친구들은 늘 오빠 때문에 남몰래 속앓이를 했다. (p.43-44)




오빠 에디슨은 보지 못했던 4년간 100킬로그램이 더 쪘다. 원래 몸무게가 75킬로그램이었으니 지금 175킬로그램인거다. 걷는 속도며 행동이 느릴 수밖에 없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출구로 가는 속도가 너무 더뎌 공항 직원들이 휠체어를 대여해줬던 것.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몰라볼 정도로 살찐 걸 보고 판도라는 심란해진다. 집에 가기 위해 차를 탔는데, 주머니에서 도넛을 꺼내먹는다. 아,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이 책의 1부는 <up> 이란 소제목을 달고 있다.

에디슨은 여동생의 집에 얹혀 지내면서 여동생네 집의 식재료를 금세 탕진한다. 판도라의 남편은 식이생활을 극도로 제한하는 사람이었기에 에디슨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고 에디슨을 보며 터져나오는 화를 억눌러야만 한다. 에디슨은 다른 식구들에게도 고칼로리의 음식을 잔뜩 만들어주지만, 혼자 있을 때면 숫제 크림을 퍼먹는 지경에 이른다. 입가나 옷이 다 지저분할 정도로.



이 책의 2부는 <down>이다. 짐작하는 것처럼, 판도라는 오빠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생각한다. 오빠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거라고. 마침 자신도 결혼전보다 10키로이상이 더 쪄서 살집있는 몸매가 된 터라 함께 다이어트를 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남편과 떨어져서. 2개월이상 함께 사는 것도 식구들이 간신히 참아줬는데, 장장 1년을 목표로 하는 이 다이어트를 가족들이 모두 있는 집에서 할 순 없다. 마침 사업도 잘 되고 있던 터였으니 판도라는 집을 얻어 오빠랑 함께 살면서 막강 다이어트에 돌입한다. 단백질 쉐이크와 박하사탕만 먹으며 지내다가 차츰 음식 먹기를 시도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렇게 해서 살을 뺐지만 둘 모두 섭식장애에 걸린다. 힘겹게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단백질 쉐이크로 버티기를 오래하니, 수프를 앞에 두고는 냄새도 싫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 그러나 그들은 살아야했고 몸 속에 영양을 공급해야 했기에 반드시 그 음식을 먹어야 했다.




책에서는 비만에 대한 개인적인 이유와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언급한다. 물론, 비만인에 대한 혐오까지도.

인종차별은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해서 조심하려 하면서도 비만인 앞에서는 혐오를 당당히 드러낸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비만을 마치 악처럼 취급한다는 것도. 상대적으로 날씬한 것은 선인것처럼.

나 역시 내 안의 비만인 혐오를 본다. 너무 부끄러웠다.

오래전에 누가 싫은 남자에 대해 물었을 때 뚱뚱한 남자란 답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떠오른거다.

이 책에서 비만인 혐오에 대해 지적할 때 아아, 나였구나, 나였어..나였다... 했다. 내가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대체 무슨 짓을 한거람. 하아-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는 점점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혐오와 맞닥뜨린다. 내 안에 비만에 대한 혐오가 있었어... 

남자들이 뚱뚱한 여자 싫다고 하면서 '그건 자기 관리 못하는거라 싫어'하는 것과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뚱뚱함은 게으름의 상징인듯 여겨졌으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 욕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 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는거야. 혐오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안에 혐오가 있었어... 내 안에 혐오가 있다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빠한테 '돼지같이 밀고나간다'는 말을 듣는 나인데, 비만 혐오를 가졌다니... 아아,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의 모순, 나의 고통, 내 영혼의 슬픈 눈...




"하지만 오빠 말도 일리가 있어. 당신을 보면 자기가 도덕 개혁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살이 찌면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수는 있지. 재혼할 가능성도 낮아질 거고, 건강도 크게 영향을 받을 거야. 하지만 살찐 게 '악'은 아니잖아. 마찬가지로 당신이 운동하는 것도 '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런데 당신은 그게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거든. 운동을 하면 기분은 좋겠지. '뿌듯'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사람보다 우월한 느낌이 들 거야.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 낭비에 불과해." (p.168-169)




좋을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좋은 책이었다. 2부 다운 편을 읽을 때는 이 책을 나의 다이어트 바이블로 삼자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들의 다이어트 방법을 따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책이 하는 비만에 대한 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비만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그저 게으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비만하면 실제 생활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잘 얘기해주어서. 판도라는 예상치 못한 비만인 오빠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상황에 몇 번이나 맞닥뜨린다. 게다가 가족 중에 그토록이나 고도비만인 사람이 있을 때 가족 관계도 어떻게 미묘하게 달라지는지도. 판도라의 남편은 식이 조절을 하고 운동도 해 군살 없는 몸을 유지하는 사람이었고 판도라의 오빠는 크림과 설탕을 퍼먹고 고도 비만인 사람이었다. 판도라는 그 사이에서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좀 통통해진 사람이었고. 함께 사는 사람이 비슷한 식욕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아닌가. 이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 좋아서 뭔가 내가 '더'비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책이 내게 필요할 것 같은 거다.




그렇다면 이 책이 다운 편에서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즐겁게 끝맺었을까?

놀랍게도 이 책에는 3부가 있다.




나는 이 책에 나온 다이어트 방법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이제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나 역시 지방을 분해해준다는 '먹으면서도 살빠지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사먹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그걸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돌진하는 돼지다. 내 주변에도 다이어트에 도움된다는 보조제나 프로그램을 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인스타에 들어가면 다이어트에 대한 광고가 얼마나 많은지, 보노라면 '이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또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지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보다 체중을 줄이고 싶다면, 살을 빼고 싶다면, 덜 먹고 더 운동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다이어트 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지는 말자.



인터넷의 미로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했다. 이런 웹페이지의 대다수가 상업적인 미끼였고 그 안에는 초콜릿칩을 넣지 않은 쿠키 등이 매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거대한 산업을 잠시 건드려 보고 정말 기가 막혔던 것은, 이 모든 방안들과 프로그램들, 보조물들, 약품들이, 우리 미국 소비자들이 절실하게 원하지만 결코 살 수 없는 하나의 제품을 팔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해당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한 봉지의 결단력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마치 1회용 저지방 샐러드드레싱처럼 팔고 있었다. 지방 흡입술처럼 값비싼 시술을 받아도 관절경자국이 없어지곧 전에 다시 무분별하게 먹어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의사들이 침대 옆 양동이에 뽑아낸 그 노랗고 질퍽한 덩어리를 다시 흡입하는 셈이었다. 비싼 돈을 내고 전문가에게 식단에 대한 조언을 받아도 그 사람이 나를 대신해 컵케이크를 먹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기만적으로 포장된 상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도 실제로 진열대에 늘씬한 사람은 놓여 있지 않았다. 내가 방금 마주한 것은 4,300만 개의 돌멩이 애완동물이 전시된 자갈 채취장이었다. (p.237)







이 소설이 참 좋은데, 작가들은 진짜 짱인 것 같다. 어떻게 비만과 비만혐오로 소설 한 권을 써냈을까? 어떻게 이런 소재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진짜 짱인 것 같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와 이 책 두권을 읽어봤는데, 이 작가의 책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아니 어떻게 이런 얘기를 이렇게 날카롭게 잘하지? 소설 진짜 대박 만세야..





음.. 생각해보니 돼지 돌진하는 거 맞는 것 같다.

멧돼지..돌진하잖아?



내가 근면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조금 느긋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특히 미디어 장치들 덕분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못마땅했다. 나는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후를 통째로 보낼 수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마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 쉽게 익힐 수 있는 재주인 듯했고, 마치 감기 바이러스처럼 집 안에 숨어서 내가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P106

"체중이 얼마나 나가는지 말씀해 주세요."
내가 말했다.
의사는 허락을 구하는 의미로 환자 쪽을 흘끗 보았다.
"국가 기밀도 아닌데요, 쳇."
에디슨 오빠가 말했다.
"175킬로그램입니다."
그러자 오빠가 얼른 덧붙였다.
"팬티 입고 잰 거야." - P243

태너는 자신이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문학적 재능을 보태 주기만 하면 곧바로 인정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무지한 오만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10년 동안 커피를 나르면서 지금은 아무도 자신의 대본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밤을 새워 대본 쓰는 연습을 하는 것뿐이었다. 자기가 꿈꾸던 직업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사실, 눈에 뭔가가 씐 젊은이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 그중에서 자신은 생각만큼 특출한 재능을 가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단번에 아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확실히 감정적으로 꽤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껍데기뿐인 오만에 물을 끼얹되 그로 인해 열정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니까. 이것을 해낸 아이들은 자신의 직업군에서 대단한 인물이 되는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참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 P269

어릴 때 너무도 쉽게 기적을 맛본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으니, 재능을 가진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 P271

오빠는 차라리 중간에 완전히 참패하여 어쩔 수 없이 전업을 시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는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 외의 다른 일을 찾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수년 동안 근근이나마 일거리가 있어서 아예 발을 빼지 못한 것이다. 그게 함정이었다. 나는 LA연예게에서도 딱 그 정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면서 진짜 할리우드 영화를 연출하거나 브로드웨이 연극에 출연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들. 이런 지근탄(至近彈) 유형은 여기저기서 소소하게 보상을 받아 끝내 그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 가끔씩 작은 성공을 이루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편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 실패는 해방을 안겨주는 법이다. - P271

흥미롭게도 내 자원을 쓸 수 없다는 그 자존심은 이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은 전날 그가 65인치 플라즈마 평면TV 를 사자고 졸랐을 때 이미 분명해졌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 역시 수익에 한계가 있었고(돈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중 상당 부분이 다시 사업 자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사람들이 부자로 분류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사악한 일이 벌어진다. 그 사람의 돈은 마르지 않으므로 진짜 돈이 아니며 따라서 그 사람의 관용도 진짜 관용이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P279

"그럼 ‘전부‘ 다 잃은 거야?"
그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지금 네 눈에 보이는 게 내가 가진 전부야."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구제불능의 물질주의자가 아닌데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자신에 대한 지각은 너무도 위태롭고 너무도 불확실하다. 그럴 때 이런 물리적인 상징물들은 일종의 지침이 되어 준다. 그의 포스터는 그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징물이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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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8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8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10-1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만을 마치 개인의 나태처럼 생각하는 사회의 시선이 바뀌지 않는한 비만인에 대한 싸늘한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을것 같습니다ㅜ.ㅜ

2019-10-19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0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1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듯 해 매우 조심스럽다. 일례로 내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륜소설 왜 좋아해?' 라고 되묻기도 하고, 거기에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너 불륜에 대한 로망이 있냐' 부터 '너 불륜 좋아하더라' 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거기에 대고 내가 '아니, 그게 불륜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 '라는 말을 시작할라치면, '그거 불륜 얘기잖아?' 가 되돌아오고, 불륜 얘기 이기는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을 받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참에 내가 이 영화 《5 to 7》을 좋아한다고 하면 거기에 쐐기를 박는거겠구나 싶었다. 이 영화에서도 여자는 서른 네살의 아이가 둘인 유부녀이고 남자는 스물다섯의 싱글이니까. 한줄로 요약해보라고 하면 '유부녀와 싱글남자가 만나 사랑하는 얘기' 일텐데, 그러면 어김없이 나는 불륜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버려... 후아- 심호흡 한 번 하자. 그렇게 생각하려면 뭐, 그러라지. 내가 뭐 별 수 있나.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아니, 내 몇 년간의 페이퍼를 읽고 쓴건가 싶을만큼 진짜 모든게 다 등장해. 처음부터 좋은데 끝에 가서는 대환장.. 뭐야, 나 하나를 내포관객으로 삼고 만든 영화야? 묻고 싶을만큼 너무너무 좋다. 이쯤에서 노파심에 말하자면, 그러나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거라고는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게 다 나왔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하는 건 아니잖나. 이를테면 뉴욕,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의 벤치, 구겐하임 미술관... 크- 이만큼만해도 나는 이미 너무 좋았다니까?




남자 '브라이언'은 작가다. 작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글을 써서 여기저기 투고를 해도 거절의 답장만 받을 뿐이다. 글을 쓰고 투고를 하고 거절의 답장을 읽고. 그러면서 가끔 산책을 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아직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나올지 어떨지 모른다. 그러니 그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성과라고 해야 별 거 없다. 아니 아예 전무한 실정. 그런 그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한 호텔 앞에서 여자 '아리엘'을 만나게 된다.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첫 눈에 반해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리엘에게 다가간다. 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그들은 잠깐 말을 섞었고, 아리엘은 브라이언에게 매일 금요일 이시간에 여기에 있다고 얘기해줘서 그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된다. 그 다음만남에서 브라이언은 이토록 그가 반한 여자가 아이가 둘이며 남편도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리엘은 자기가 평일 5시부터 7시(혼외 정사의 시간!)에 만날 수 있음을 얘기하지만, 브라이언은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만남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주가 가고, 이주가 가고, 삼주가 간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이 상황 때문에 자신을 아무리 막으려고 해봤자 안되었다. 결국 브라이언은 아리엘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아리엘은 프랑스 여자고 프랑스에서 살았다. 브라이언과는 달리 그녀는 남편이 있으면서 이런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큰 부담감을 갖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면 그 뿐이라면서, 자신의 남편 역시 애인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주 많이 슬펐다. 많이, 아주 많이. 왜냐하면 아리엘이 자신의 남편에게도 애인이 있다는 걸 밝힌 것은, 그러니 자신이 하는 일도 그렇게 불편한 건 아니라는 것을 뜻하려 한거겠지만, 그러나 나는 브라이언이 되었으므로, 슬퍼지는 거다. 복수, 라는 생각 때문에.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묻지 않았지만, 나는 브라이언이 되어서 아리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 남편도 다른 여자를 만나니까 당신도 홧김에 나를 만나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에게 반한 것과는 상관없이, 상대 역시 나를 온전히 나로 보아주어야 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정당성이며 정의 혹은 윤리 혹은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선택하고 당신이 나를 선택해서 우리의 관계가 맺어지고 시작할 때는,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온전한 당신 그 자체' 여야만 하는 것이지, 거기에 '복수' 라든가 '심심풀이'라든가 '쾌락'이라든가 '연민' 이라든가 하는 다른 것들이 끼어들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바람피워 복수할거였는데 상대가 나인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물론 나라고 해서 매번 그렇게 온전히 상대만을 원하는 연애를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지 않은 연애에 더 많이 몸을 던졌던 것 같다. 어떤 이는 때로 나를 심심풀이 땅콩이라고 여기는 듯했고, 어떤 이는 내가 그렇게 여겨 만나기도 했다. 상대가 내게 다른 의도로 접근한 적도 있고 나 역시 상대를 다른 의도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주는 브라이언과 아리엘처럼, 상대가 '애인이 다른 남자가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이미 상대에게 푹 빠진 상황이었으므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 애인이 바람을 피우기 때문에 당신도 피워야해서 나를 만나는거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것은 매우 중요했다. 나는 당시에 뭐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고 인생에 있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칠때였지만, 그렇다해도, 내가 아무리 자존감이 바닥을쳐도, 어떤 복수의 수단 같은 것으로 이용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너무 반해버려서 그가 하자는대로 하고 싶었고 그가 이끄는대로 가고 싶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뭘 어째야할까 싶었고, 너무 좋아서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를 복수의 수단으로 만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는 기꺼이 돌아섰을 것이다. 아니, 나는 그런 상황에 나를 놓아둘 수 없어, 하고. 그렇게나 반한 상대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에 대해서 몇날을 후회하고 통곡하며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수단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상대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만약 내가 상대를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가 나를 만나는 의도가 무엇이었든 크게 상관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딱히 온전히 상대를 보고 만나는 게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내가 상대에게 세컨드가 되어도 괜찮은 것은, 내가 상대를 세컨드로 볼 때여야만 한다. 나에게 상대가 우선순위인데 나는 상대에게 세컨드가 된다? 나는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비참해질지언정, 그를 포기할지언정, 나는 그에게 물어야 했던 거다. 혹여 나는 너에게 어떤 수단인거냐고.



그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그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만남이 더 이어진거고. 그러나, 그건 말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자신의 애인과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였다면, 그와 내가 만나는 일 자체가 이뤄졌을까?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나처럼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나름의 두려움을 가진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는 그래도 상관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어쨌든 다시 여기에 와 그녀 앞에 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감당하고 나온 것일테니까.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하고 섹스를 하고 연애를 한다. 산책을 하고 같이 술을 마신다. 아리엘은 공개적인 곳에서 키스할 순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남편이 알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자신은 이미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아내인데, 비공식적으로 그 역할을 저버리는 걸 들켜서는 안되는, 여기는 미국이니까.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아주 잘나가는 외교관이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교양도 있다. 그는 브라이언을 만나서도 아주 다정하고 예의바르게 잘 대해준다. 마치 자신의 식구인것처럼 또다른 일원으로 여겨준다. 브라이언에게는 그간 알지 못했던 세계가 하나 더 열린 셈이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부모에게도 아리엘을 소개시키지만,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이 관계가 영 못마땅하다. 왜 아니겠는가. 게다가 브라이언에게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려고 한다. 그가 투고한 원고가 뽑혔고 이에 잡지에도 실리며 상금도 받게 된것. 시상식에 그는 가장 사랑하는, 너무 사랑하는 아리엘을 초대하고 싶지만 아리엘은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만 시간을 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순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축하를 받고 싶은 순간, 그 순간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




브라이언에게는 이제 작가의 길이 열린 듯하다. 아리엘은 그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렸음을 축하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에게는 욕심이 생긴다. 작가라는 새로운 미래와 더불어, 아리엘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 사랑이 깊어지면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니 브라이언은 이들 사이의 룰을 깨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나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그리고 나는 네 아이들의 좋은 부모가 되어주겠다고. 그렇게 그들 사이의 룰을 어긴다.



이건 브라이언이 던진 승부수였다. 브라이언 역시, 자신이 누군가의 세컨드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자신의 첫번째로부터 자신이 세컨드로 취급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는 건 내가 상대를 대우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대우하길 바라는 게 아닌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러니 브라이언은 승부수를 던져야했다. 지금의 이 자리로는 난 만족하지 못해, 네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



아리엘 역시 그의 청혼 앞에 이제 기로에 놓였다. 지금은 동시에 남편이있는 가정과 애인이라는 두 가지를 가져가고 있었지만, 이 반지앞에 예스 혹은 노 를 말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자, 나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이냐 혹은 애인이냐. 이 선택은 그녀에게 매우매우 어려웠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실 사랑을 믿지 않으며 살아온 아리엘이었고, 남편은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생활은 만족스러웠고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다. 그녀도, 갑자기 그녀의 인생 이때쯤에 첫 눈에 반하고 사랑하게 될 남자가, 그러니까 한 번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 남편에게 룰을 어기고 나는 이제 애인을 선택할게, 라고 말하고도 싶다. 그러나 같이 산 세월이 있는 만큼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도 지켜야할 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깊은 고민을 하고 다음날 그에게 반지를 돌려준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다시는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말한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항상 그녀가 서있는 그 호텔 앞을 지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몇 블럭 돌아갔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는 책을 내는 작가가 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이 돌려받은 반지를 호텔의 벨보이를 통해 아리엘에게 다시 전달한 터다. 이 반지는 그녀에게 잘 도착했을까?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사이 그는 아리엘을 그리워한다. 길을 걷다가 닮은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러나 닮은 사람이었지, 아리엘은 아니었다.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자,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나는 그들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하는 사랑이 다른 사랑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우리 모두의 사랑이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에 나라고 뭐 특별한 사랑을 했을까? 사랑은, 바깥에서 보면 다 그저 그런 똑같은 사랑일 뿐이다. 똑같은 연애일 뿐이다. 그러나 그 비극은 면면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이유로 다르듯이, 그 평범한 사랑도 당사자에게는 매우 크고, 특별하고, 소중해진다. 브라이언에게는 아리엘이, 아리엘에게는 브라이언이 그랬다. 그들은 헤어졌고, 다시 만나지 않았고,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너무나 큰 사랑이었고 추억이었고 힘이었다.



시간이 흘러 브라이언의 책은 서점에 베스트셀러로 진열된다. 그는 어엿한 작가의 삶을 산다. 시간이 흘러 서점 앞을 지나다가 진열된 브라이언의 책을, 아리엘은 본다.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내어놓은 책. 그리고 그 제목에 담긴 그들의 오래전 대화. 그녀가 그 서점 앞에서 그 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브라이언은 결혼을 해 아이도 낳았다. 그는 날씨 좋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다. 오, 구겐하임! 나 알아, 나 알아, 나 거기 알아!!

그리고 구겐하임 앞에서 갑자기,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아리엘의 가족과 맞닥뜨린다. 오래전에 보았던 아리엘의 아이들은 성장해 있었다. 당연하다. 그들 가족은 서로 마주서서 각자 인사와 안부를 건넨다. 그 사이, 아리엘은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잠시 벗는다. 아리엘의 손에는 브라이언이 오래전에 돌려준 반지가 껴있다. 브라이언은 그 반지를 본다. 그 반지를 브라이언이 봤다는 것을 안 아리엘은 다시 장갑을 낀다. 그리고 그 가족은 헤어진다. 각자의 가족과 함께.




그 후에 이어지는 브라이언의 독백.




"당신이 나의 어떤 책을 좋아하든

그건 모두

한 독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나는 내려야할 지하철역에서 내렸고, 이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 역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왜 어떤 사랑은 때가 아닌 때에 내리는지, 좋은 비는 때롤 알고 내린다며, 그렇다면 좋은 비가 아닌 건가. 왜 그 때에 그들은 만난걸까. 그 때 거기에서 그런 식으로. 왜 그들에게는 그런 만남이어야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가슴에 품은 채로 산다는 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각자가 놓인 환경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러나 마음 속 성소에 품은 한 사람. 브라이언은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


어쩌면 이게 최선이었겠구나. 이게 나았겠구나.

이래야만 했을까? 묻고 이래야만 했겠구나 나 혼자 대답한다.

반지를 받고 어떤 걸 포기하고 둘이 함께하는 삶이 더 아름다울 거라는 보장은 어디있담.

어쩌면 삶은 이런식으로 한 사람에게 계속 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게 나을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게 최선이겠어.

비극이고 슬프고 애틋하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단면일 뿐인거야.

삶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놓기가 그렇게나 아쉬워도 놓고 돌아서야 하는건가.



영화 속에서 수시로 보여주는 센트럴 파크 벤치에는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날

 

 

 

길고양이 같은 표정의 오후를 핀셋으로 담벼락에 꽂아두고 나는 당신의 입술을 당겨왔다. 당신은, 나는 피 흘리는 짐승이었다. 늑대 발톱을 물어뜯으며 한 세기 전의 동굴 속을 달렸다. 티베트 여우의 눈빛 속은 따뜻하고 경이로웠지만 이별은 언제나 눈썹 위에서부터 고이기 시작하지. 당신의 손가락 끝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란 걸 알았다. 담벼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당신의 입술은 분필 가루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펑펑 꽃이 되거나 퍼렇게 멍들었다. 당신이 떠나던 날 천지에 매화 잎은 다 지고 대숲에 짓던 바람의 집처럼 사소한 일에도 새들은 떠났으며 떠난 자리마다 물 밑이 환했다.






떠난 자리마다 물 밑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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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9-10-1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글만으로도 너무 저릿해요~ 😭

다락방 2019-10-18 07:39   좋아요 0 | URL
가을입니다, 보슬비님....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