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엄마와 함께 앉아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았다. 나는 그런 프로 잘 안보려고 하는데 엄마가 좋아하셔서.. 어쨌든 봤는데, 정작 엄마는 못보겠다고 들어가시고 나만 남아 끝까지 보았다. 그간 내가 존재도 알지 못했던 '벗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벗는 방을 운영한다는건데, 그걸 보던 남자들은 메뉴에 쓰여진대로 어떤 행위를 요구할 수 있고, 그대로 bj가 해주면 거기에 따른 돈을 지불한다는 거였다. 그 안에서는 꽤 많은 돈이 오고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들은 그 많은 돈을 다 자신이 벌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거기서 가져가는 수입은 극히 일부. 그 방송의 직원을 모집했던 방송사가 수입의 일부를 가져가고, 기획사가 또 일부를 가져가고, 또 누가 일부를 가져가고...


그저 소통하는 방송일 줄 알고 들어갔다가 벗어야 한다는 걸 알고 여자들이 빠져나오려고 했을 때는 이미 계약서에 묶인 몸이었다. 남은 계약기간 동안 벌어들일 돈을 모두 지불해야만 그 계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응했던 피해자중 한 명은, 돈도 안되고 계약서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어 눈감고 딱 한 번 벗는 방송을 찍었는데, 그 영상이 외국에도 유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습할 수 없었다고.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다보면 성매매 여성에 대해 나오는데, 성매매여성이 일반 여성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신발에 노란끈을 묶었다는 역사가 나온다. 성매매 여성, 너희들은 일반 여성들과는 급이 달라, 하고 그들을 무시했던 성구매 당사자인 남자들은, 그런 여성을 달리 취급하면서 정작 그들 자신은 떳떳했는데, 주말에 본 그알에서도 그랬다. 방송국과 기획사 모두가 떳떳했다. 애시당초 처음 그 벗방의 이상함을 찾게됐던 남자는 그 방송을 시청하던 도중 자신의 약혼녀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제보자로 나왔던 또 한 남자는 이 벗방은 사기라고 분노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여성들의 성을 팔아서가 아니라, 그가 그 방송을 보면서 돈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잃게끔 하는 가짜 아이템과 가짜 회원들이 있다는 것. 그는 그것에 분노했다. 거기에 분노해서 제보를 하고 인터뷰에 응한다는 게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안부끄러워? 여자들한테 벗으라고 돈을 줘놓고서, 그건 안부끄러워?



벗는 것도 여자고 그 영상이 유출됨으로써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여자다. 숨어 사는 것도 여자고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것도 여자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오고가는 돈은 남자로부터 나와서 남자에게로 간다. 나는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떠올렸다.






남성에게 자신의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모멸적인 것이 있다면 또 다른 남성의 이득을 위해 남성에게 몸을 팔아야 할 때이다.- 《페이드 포》, 레이첼 모랜, P124












오늘 구독하고 있는 <뉴닉>에서는 엔번방 소식을 보내왔다. 엔번방 가입자 모두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청원은 백만명 이상이 동의를 했다.








여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에 남자들이 돈을 쓴다는 게 너무 괴롭다. 남자들에게서 나온 돈이 남자들에게로 흘러간다. 여자들을 벗기고 괴롭히면서. 그리고 여자들을 협박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이 처음도 아니고 유일한 것도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들은 여자들을 죽이면서 살았다. 여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면서 만족을 느끼고 돈을 벌었다. 어제,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는데, 그 오랜 역사, '마녀 사냥'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이미 숱하게 다른 책들에서 읽고 아는 바이지만, 역시나 괴롭다. 반복해본다고 해서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니고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마녀라고 자백해도 죽지만, 마녀라고 자백하지 않아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도 어차피 죽는다. 마녀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하고 또 고문한다. 심한 고문에도 마녀라는 자백을 하지 않으면, 마술 때문에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거라고 한다. 고문에 못이겨 나 마녀 맞아, 해도 죽는것이고 나 마녀 아니라니까, 해도 죽는다. 어차피 '저 여자 마녀인 것 같다'고 찍히는 순간, 그녀는 죽는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그 마녀의 재산도 다 몰수당한다.



교회법에 따르면, 마녀의 재산은 상속자가 있건 없건 간에 몰수해야 했다. 몰수된 재산의 절반 이상을 정부가 전유했다. 재판에 든 비용을 공제하고 남은 모든 것은 정부 재정으로 들어갔다. 153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공포한 '형사법전'에 따르면 이런 몰수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그저 종이조각일 뿐이었다.

마녀 사냥이 돈과 재산을 모으는 욕망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특별 위원회로 이어졌고, 특별위원회는 더 많은 사람을 마녀와 마술사로 모함했다. 피고가 유죄 선고를 받으면, 가족은 모든 재판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위원회 위원들이 매일 먹는 식비와 술값에서부터 시작해서, 화형에 쓰이는 땔감까지 이들이 지불해야 했다. 또 다른 돈을 버는 방법은 마녀 혐의를 받은 이를 가족으로 둔 부자집에서 그 가족을 석박 시키기 위해 학벌있는 판사와 변호사에게 주는 비용이었다. 이는 또한 가난한 사람이 유독 많이 처형된 이유이기도 했다. (p.195)



봉건계급(특히 좀 더 작은 공국의 제후로, 도시의 신흥 부르자우나 더 큰 공국의 제후와 경쟁하기 힘든 이들)뿐 아니라 도시의 자산가 계급도 마녀재산의 압수를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p.197)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남자가 여자들을 죽여서 살았음을, 남자가 여자를 죽여서 부를 축적했음을. 벗방에서도 엔번방에서도 그 어떤 여자도 이익을 보지도 않았다. 부를 축적할 수 없었고 기쁨을 얻지도 못했다. 도망칠 기회를 잡아야 했고, 숨어야 했다.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웃고, 유출하고, 유포하고, 즐거워하고, 돈을 벌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죽여서, 여자들을 괴롭혀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엔번방 26만명의 신상공개를 요구한다. 돈 내고 본 게 무슨 잘못이냐고 말하는 남자들이 누구인지, 그렇게 뻔뻔하다면 신상을 공개해 두려울 게 무어랴. 여자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자본을 축적한 게 누구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동안 그런 삶을 산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면서, 이제 그 일을 더는 못하게 해야 한다. 손가락질 해야 한다. 저거봐, 여자들 괴롭히면서 즐거워한 남자야. 저 남자가 바로 여자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고 자본을 축적한 남자야. 우리는 그렇게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하고 비난을 해야 한다.

어제는 국가공무원 5급 공개채용 합격후 연수 도중 여성 연수생의 신체를 몰래 촬영해 적발된 남자가 연수원에서 퇴학당한 걸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내 승소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여성의 신체를 불법촬영해놓고 퇴학이 과하다며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하다니, 그 뻔뻔함은 대체 어디에서 나올까.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들.

벗방의 남자 제보자들도 자신들이 입은 피해 때문에 빡쳐서 나온거지, 여자들의 고통에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불법촬영 당한 여성이 얼마나 괴로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남자는, 자신의 퇴학이 과하다고 한다. 무엇이 과하고 무엇이 덜한가. 더이상 여성들이 죽음으로써 남자들이 살고, 남자들이 자본 축적하는 걸 방치해서는 안된다.



엔번방 가입자 전원 신상공개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원 처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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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23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번방 가입자 전원 신상공개 요구합니다.
앞으로도 벌어질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다락방 2020-03-23 10:33   좋아요 1 | URL
시간이 지나도 왜 그들은 나아지지 않는걸까요, 단발머리님...
마녀사냥 부분 읽는데 너무 빡쳐서 ㅠㅠ

Comandante 2020-03-2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시패스한 놈이 성범죄 저지르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소송까지 제기했었군요. 저런 고시 후배 들어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군요..

다락방 2020-03-23 12:05   좋아요 1 | URL
같은 직장에 근무하게 될 여자들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낄테죠.

Comandante 2020-03-23 12:59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남자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분노하여야 합니다.

- 2020-03-23 22:26   좋아요 0 | URL
우리 남녀 편가르지 말아요 웅앵웅... 이 이슈가 가시화되고 처벌이 논의 되게되는 과정까지의 여성주의자들의 분노와 목소리를 스킵하면 안되죠 ㅋㅋㅋ 인간으로 분노하기 전에 맥락 살피세요 ㅋㅋㅋ

- 2020-03-23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구한다 요구한다 요구한다!

다락방 2020-03-24 07:41   좋아요 0 | URL
여자 죽이지 말라는 게 왜이렇게 힘든건가요 쟝쟝님. 여자들은 계속 부르짖는데 결과가 되어 나오기는 너무 오래 걸리네요. 그나마 지금도 총선 때문에 부랴부랴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 2020-03-24 08: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계속해서 공론화하고 목소리 낸 여성들 덕에 이정도의 처벌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엔번방 함께 청원해달라고 다락방님도 올리고 하셨잖아요!! 저들은 안바뀌겠지만 우리 힘을 키워요 빠워!!!! 다 뚝배기 깨자!!

잠자냥 2020-03-23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주빈과 26만명 다 까발릴 때까지!!!

다락방 2020-03-24 07:42   좋아요 0 | URL
어제는 여러가지로 기운없고 속상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지치지 말아야겠지요. 지치지맙시다, 잠자냥 님!
 

나는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시인》의 첫문장을 외우고 있다. 아주 강력하고 짧아서 외우기에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죽음 담당이다' 라는 첫문장. 첫문장만 보면 도대체 어떻게, 왜, 죽음 담당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 확 빨려들어가지 않나.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나는 죽음 담당이다'라는 강렬한 첫문장으로 책을 시작할 수 있는건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일이다.



















세상에는 아주 유명한 첫문장들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일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은 알아두고 있으면, 다른 많은 책들을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수시로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은 여기저기 인용되고 응용된다. 만약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임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 문장들 속에서 각주를 찾아 읽어야 하거나, 제 때 감탄하고 웃거나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일단 알고 있다면, 다른 책들을 읽을 때도 제대로 제 때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러니 안나 카레니나 만큼은 읽는 것이 앞으로의 독서 생활에도 좋을 것이고, 최소한 첫문장만큼만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앞으로의 독서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하는 문장.




















이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첫문장이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으려고 책장을 펼치고 이 문장을 읽자마자, 아 좋다! 하고 감탄했으니까. 바로 이런 문장이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알라딘 서재에서도 몇 번이나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어두는 것이 앞으로의 독서생활을 좀 더 낫게 만들어줄거라고 얘기한 바 있지만(박정현은 미스 그리샴으로 노래도 만들었다니까?), 두 도시 이야기도 마찬가지. 이 첫문장을 알아두는 것은 참으로 유용하다. 내가 이 책을 읽었고, 이 첫문장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팝송 가사를 검색해보다가 딱,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 첫문장 얘기가 왜 나왔냐면, 그러니까 두 도시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바로 이 가사 때문이었다.

너는 빛이고 밤이라고, 너는 치유이고 고통이라고 말하는 가사.


<Love Me Like You Do>  by Ellie Goulding


You're the light, you're the night
You're the color of my blood
You're the cure, you're the pain
You're the only thing I wanna touch
Never knew that it could mean so much, so much
You're the fear, I don't care
'Cause I've never been so high
Follow me through the dark
Let me take you past our satellites
You can see the world you brought to life, to life
S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Touch me like you do, to-to-touch me like you do
What are you waiting for?
Fading in, fading out
On the edge of paradise
Every inch of your skin is a holy grail I've gotta find
Only you can set my heart on fire, on fire
Yeah, I'll let you set the pace
'Cause I'm not thinking straight
My head spinning around, I can't see clear no more
What are you waiting for?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Touch me like you do, to-to-touch me like you do
What are you waiting for?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like you d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yeah)
Touch me like you do, to-to-touch me like you do
What are you waiting for?
I'll let you set the pace
'Cause I'm not thinking straight
My head spinning around, I can't see clear no more
What are you waiting for?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like you d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yeah)
Touch me like you do, to-to-touch me like you do
What are you waiting for?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like you do)
Love me like you do, lo-lo-love me like you do (yeah)
Touch me like you do, to-to-touch me like you do
What are you waiting for?



아, 여러분. 글 너무 좋지 않은가. 정말 좋지 않은가. 나는 죽음 담당이다, 부터 시작해서 몇 개 안되는 단어들로 최고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나란히 써서 가슴을 들끓게 하고. 아니, 이거봐, 너는 빛이면서 밤이래.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이게 너무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는 익히 알지 않나. 누구나 저런 경험 있지 않나. 천국이면서 동시에 지옥이기도 한 경험. 그래, 줌파 라히리도 <지옥 천국>이라는 단편을 쓴 적이 있잖아. 위의 노래에서처럼 빛이면서 밤인 그런 감정을 누구나 경험해보지 않나. 허공에 떠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가 이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이 노래는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삽입된 곡인데, 이 영화에 삽입되기는 정말 적절했다 보인다. 주인공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사랑해서 설레이고 행복했지만, 그러나 그레이가 변태라서...(응?) 괴로웠다. 그레이는 성관계시 가학적 성향을 갖고 있었고 다정한 로맨스는 자신에게 없다고 했더랬다. 아나스타샤는 그레이가 좋아서 그의 가학적 성향을 맞춰주고자 했었지만, 맞으면서 기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맞고 눈물 흘리면서 '이게 니가 원하는거냐'고 묻고는 그를 떠난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주어지고, 그 때 우리는 행복과 불행중에서라면 당연히 행복을 선택하기 쉽지만, 그러나 불행과 더 큰 불행 앞에서라면 계속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울 것인가, 저것이 괴로울 것인가....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사랑했으므로 헤어지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한테 맞는 것을 사랑이라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못할 짓이다. 그것이 그의 '성적 취향'이라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너만 웃고 내가 불쾌하면 그것은 농담이 아니듯이, 너는 즐겁고 나는 눈물나는 그것이 섹스일 리 없다. 그것이 섹스일 수 없다.


아, 근데 이런 얘기 하러던 거 아닌데.. 나는 문학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단어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이렇게나 좋은 문장이 되기도 한다는 걸 말하려고 한건데 변태 때문에 또 빡쳐버리고 말았네... <하이에나>의 김혜수가 주지훈에게 그런것처럼, 나 뜨거워질 때마다 누가 나 좀 남산에 데려가서 식혀줬으면 좋겠다.....




다시 본래의 의도로 돌아가서,

나는 문장의 기교 같은 것, 그러니까 문장을 잔뜩 꾸미려고 하거나,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나 위의 첫문장들처럼, 몇 개 안되는 단어들로 졸라 멋진 문장을 만드는 것은 너무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나는 쓰지 못할 문장들이 아닐까.

팝송 가사도 그런 면에서 좋다.


You're the light, you're the night


아 너무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는 빛이고 밤이래. 무릇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니던가. 그저 계속 저녁무렵이면 그저 계속 낮이면 그것은 열정적 사랑이 아니라 그저 꾸준한 관계 아닌가. 나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빛이면서 밤인 것. 그래서 나를 들끓게 만드는 것. 아아, 그러다 내가 망했지.. 그래서 내가 사랑에 망한거야... 그저 저녁무렵인것이, 그저 새벽인것이 더 나았을거야. 빛이면서 밤인거 좋아하다가 망했어...

괜찮다.. 나는 그저 봄날을 살면 되니까.



그나저나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레이도 아니었는데(그렇게 돈이 많지도, 그렇게 젊지도 않았다) 나는 왜 아나스타샤만 보면 나같은지 모르겠다. 아나스타샤에 내가 훅- 들어가버려. 나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나... 어째서, 왜 때문에 그런가..나는 수시로 아나스타샤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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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3-2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빛이면서 밤.
빛일때 황홀함뿐 아니라 밤일때 절망스러움도 기꺼이 감수해야하는 것이군요 사랑은.
이 페이퍼 저는 정말 좋습니다 ^^

저는 다음부터 소설의 끝문장만 모아볼까요~

다락방 2020-03-23 10:23   좋아요 0 | URL
너는 빛이면서 밤, 너무 좋지요? 이렇게 몇 개 안되는 단어로 근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건 정말 마술 같아요. 작가들이 괜히 작가들이 아니구나 싶어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단어를 잘 만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인님. 쓰면서 저도 좋았습니다. 훗.

2020-03-25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25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의 요리 17. 시금치 베이컨 볶음



여동생이 시금치 베이컨볶음을 했다고 사진을 보내줬는데 너무 맛있게 생긴거다. 그래서 나에게도 레서피를 다오, 했더니 자기가 보고한 걸 그대로 전해줬는데, 뭐 이건 어렵지도 않아. 그래서 했다, 시금치 베이컨 볶음. 토요일 와인 안주로 만들어봤다.


재료: 시금치, 마늘, 기름, 베이컨


시금치를 깨끗이 씻는다

물기를 뺀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마늘다진 걸 넣고 볶는다. (이 때 썰어서 넣어도 무관할듯)

베이컨을 넣고 볶는다.

소금을 약간 뿌려 간을 맞춘다. (이건 진짜 생략해야 된다.... 여기서 내가 '베이컨이 짠데 소금을 굳이 뿌려야할까?' 하다가도, 그간 내가 요리를 못한 까닭은 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혼자 생각해서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말을 잘 듣기로 하고 소금을 넣었다가.... 개망......)

마늘이 노릇해졌다고 생각하면 씻어 물기뺀 시금치를 넣는다. 

시금치의 숨이 죽을 때까지 볶는다.

완성.





중간에 내가 소금을 넣은 바람에 짜져서 ㅠㅠ 내가 너무나 후회하며, 남겨둔 시금치마저 다 때려 넣었다. 그래도 짭짤한 맛이 가시지를 않아. 소금을 넣지 않아야 한다. 베이컨 때문에 일단 짠맛은 충분히 나고, 그리고 조금 싱겁게 먹는다면 샐러드처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베이컨까지 넣고 완성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잘 먹을까, 하다가, 

일전에 뉴욕에서 스테이크 먹을때 사이드로 시금치 주문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 스테이크는 그저 도울 뿐... 스테이크까지 굽는다. 인생..





그렇게 토요일의 술상.


이번엔 좀 짜게 됏지만, 소금을 넣지 않는다면 와인 안주로 아주 좋을 것 같다. 그냥 기름으로 볶았는데 올리브유로 볶으면 어떨까 싶어서 다음엔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 해놓고 나니 그저 간단하게 와인 안주로 너무 좋겠다는 생각들면서 막 친구 초대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 된다. 몰랑몰랑한 마음. 

그런참에 어쩐일인지 오늘은 갑자기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삽입되었던 노래, <Love me like you do>  가 생각나는 게 아닌가. 일자산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이 노래 들으면서 아 너무 좋네, 파티하고 싶다, 생각했다. 시금치베이컨 볶음 차려두고 (스테이크가 거들면 좋고) 와인을 준비해두고, 그리고 음악은 러브 미 라큐 두~ 틀어두면 사랑이 몽실몽실 피어나고 당신과 내가 함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봄 되니까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막 이런 노래 생각나고 그래...  오늘 이 노래 여러차례 들었다.




주말 너무 좋다. 늦잠도 잘 수 있고 낮잠도 잘 수 있고 밤늦게까지 술도 마실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이렇게 다 가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너무 빨라... 벌써 일요일 밤이라니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다. 흑흑 ㅠㅠ


나는 자꾸 안부를 묻고 싶다.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냅니다.

같이 잘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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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23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20-03-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음주엔 요리 시도하기로! 완전 맛나보임요 냠냠~

다락방 2020-03-23 07:56   좋아요 0 | URL
요리는 사실 하기 전에도 하고난 후에도 너무 귀찮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뭔가 새로운 거에 도전해서 성공하는 거 재밌어요. 성공은 잘 못하지만...(시무룩)
다음주에 요리 시도하시면 인증 반드시 부탁드려요!

얼음장수 2020-03-2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찌뽕2입니다! 시금치가 꼭 모닝글로리 같아요.

다락방 2020-03-23 07:56   좋아요 0 | URL
저 모닝글로리 너무 좋아해요! 이렇게 시금치를 삶거나 데치지 않고 볶으면서 바로 숨을 죽였더니 너무 맛있어요!(어쩐지 잔인하다..) 너무 제 취향인데 완성을 위해서는 소금은 빼고 베이컨도 좀 적게 넣어야할 것 같아요. 다음엔 올리브유에 볶아볼까 생각중입니다. 후훗. (나는 요리천재인가..)

syo 2020-03-23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베뽂....
근데 왜 나는 다락방님 요리 사진을 보면 웃죠?? 아니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데 대체 왜????

다락방 2020-03-23 07:5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나는 왜 쇼님 댓글 보면 터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혼자 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3-23 09:23   좋아요 0 | URL
시베뽂.. 이란 말에 이 아침에 빵 터집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03-23 09:3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 참 잘줄여요 ㅋㅋㅋㅋㅋㅋㅋ(노티내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20-03-2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맛있어 보이네요♡ 월욜 아침인데 벌써 와인 한 잔 하고 싶어요ㅜㅜ 저도 잘 지냅니다. 다락방님. 안부 감사해요^^

다락방 2020-03-23 09:35   좋아요 0 | URL
모닝와인은 또 모닝 와인대로 너무 좋지 않습니까! 저도 와인 한 잔 하고 싶네요. 회사는 좀 그만다니고...
잘 지내요, 문나잇님. 잘 지냅시다!
 

어제 오늘 날씨가 좋아서 오랜만에 일자산에 다녀왔다. 진달래는 벌써 활짝 피어 있었다. 요가센터도 한달 이상 휴관이고 한없이 게을러지는 내 자신에게 무브, 움직임을 줘야했다. 저쪽으로 집어던졌던, 그래서 잊힌지 오래였던 핏빗을 충전시키고 나갔다왔다. 날씨가 좋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다녀와서 씻고 3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꺼냈다. 북플에 보니 벌써 다 읽었다고 체크한 멤버가 있었다. 오, 분발해야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호두파운드 케익을 꺼내두고, 네스프레소 커피도 한 잔 내려서는 자리 잡고 앉는다. 



책과 독서대뒤로 조금 보이는, 저 고구마튀김 같아 보이는 것은, 고구마튀김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자, 독서하자. 이번 주말에는 너무 책을 안읽었으니 이제 읽자! 

으으. 이렇게 일요일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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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데 가장 집중이 잘되는 장소는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이지만, 가장 편한 장소는 내 서재방 내 책상앞이다. 내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맥북에 전원을 켜두고 독서대에 책을 올려두고 읽으면 모든게 다 준비된 셈이다. 책을 읽다 혹여 모르는 게 나와 찾아보고 싶으면 다다닥- 네이버를 열어 검색하면 되니까. 게다가 뭔가 메모해야 할 게 있으면 다이어리를 펼쳐서 거침없이 메모한다.


이렇게 메모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1-2년 정도?

그전에는 책 읽으며 굳이 메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 이건 페이퍼로 써야겠다, 리뷰로 써야겠다, 하고 중요 내용을 기억하고자 하면 기억이 났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돼. 바로 쓰지 않으면 다 까먹어버려서 글쓰기 창을 열어두고 아, 뭐 쓰려고 했지? 막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이젠 키워드를 메모해두어야 한다. 아, 이 책 얘기할 때는 저 책 같이 끌고 와야겠다, 아, 이걸 얘기해야겠다, 아, 그 영화 생각나네, 하고 키워드를 써둬야 하는거다. 그래서 종이 다이어리는 책을 읽으면서 엉망인 글씨로 단어들이 채워진다. 예전엔 일기가 빼곡했는데(아, 사랑이여! 이별이여!) 이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이어리 펼치면 시몬 베유 나오고 한나 아렌트 나오고 트라우마 나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낸시 폴브레, 버지니아 울프에 포드주의 찾아본 거 나오고 분리주의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생은 진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니깐?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영화 《링컨:뱀파이어 헌터》는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의 원작 《뱀파이어 헌터, 에이브러햄 링컨》과 큰 줄기는 같되, 내용 부분에서 많이 다르다.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라는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책에선 좀 늘어진 경향이 있었다. 조금 더 짧게 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영화에서는 두시간 분량으로 담아내다보니 많은 것들을 쳐냈고 책에서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에 집중했다면, 영화에서는 뱀파이어 헌터인 링컨의 결투 장면에 집중했다. 시각적 매체이다보니 당연한 선택이었을텐데, 그래서 영화도 재미있다. 나쁘지 않아. 책과 영화의 다른 점은 이렇게 어디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었느냐에 있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링컨의 아내인 '메리 토드'의 역할도 크게 달랐다. 책에서는 메리 토드가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인 것을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서는 결국 알게 되고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 책은 책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링컨이 궁금해졌다. 아니, 메리 토드가 궁금해졌다.

책에서는 대부분의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하면 링컨과 메리 토드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아들중 두 명이 링컨이 죽기 전에 죽었다. 링컨 부부는 아들 둘을 어릴 때 잃었던 것. 게다가 링컨이 암살당하고 나서 또 아들이 죽고 결국 메리 토드는 아들 넷중 아들 셋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던 거다. 아이들의 때이른 죽음과 남편이 암살당하는 걸 본 메리는 어떻게 삶을 견뎌냈을까에 마음이 쓰이는 거다.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는 책에서 메리 토드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밝히고 있다. 정신병원에 나중에 입원도 한모양인데, 메리 토드를 검색해보니 그녀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남편의 암살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뤄졌기 때문인듯도 하다. 오래전부터 편두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다 연결이 되어있는걸까.


링컨에 대해서라면 책을 좋아했고 수염이 있고 노예 해방에 앞장선 대통령 이라는 정도밖에 모르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라면 아예 모르고 있던 터라 너무 궁금해진 거다. 메리 토드는 자신이 사랑하고 결혼한 남자가 결국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란 사실을 알았을까? 알면서도 그걸 선택한걸까? 책을 읽고난 뒤부터 영화를 보고나서까지도 나는 그게 궁금했다. 나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라서.


일전에도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으면서 나는 '왕의 아내'는 될 수 없겠다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야망이 쪼꼬만 탓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막중한 책임 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메리 토드가 링컨을 만나 약혼을 결심하기 전에 이미 링컨은 하원의원을 했던 적이 있어서, 아마도 메리 토드는 링컨이 정치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둘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쩌면 연애하던 도중에 링컨은 메리에게 '나는 장차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 때 메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 그렇다면 나는 영부인이 되겠군!' 이라는 생각을 했을까, '아, 나는 대통령의 아내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했을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메리 토드가 그 자리에 알고 간건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건지가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게다가 남북전쟁, 노예해방이란 굵직한 일들의 중심에 남편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또 자기의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검색의 결과만으로 보자면, 메리는 남편이 정치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질투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는데 무엇이 그녀를 우울증을 앓게 한건지는 이 검색만으로는 알 수 없겠다. 나는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당시에 링컨이 아니라 링컨의 라이벌인 의원과도 알고 지냈는데, 그녀가 굳이 링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링컨의 아내였다가 영부인이 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궁금한 거다. 메리 토드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 알라딘에 '메리 토드'를 넣고 검색해보았지만 결과가 없었다. 하는수없이 링컨의 전기를 읽어볼까 싶어 링컨을 넣고 검색했더니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나왔는데 내가 읽고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에 정치하겠다고 한 사람이 옆에 있었던 적도 없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 삶은 딱히 달라질 것 같질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는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나랑 연애를 하고 있는 남자가 혹은 결혼한 남자가 갑자기 '나 정치인이 되겠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할 것인가. '정치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살면서 내가 갖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에 일단 전혀 욕심나진 않는다. 그리고 사실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만약 내가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라고 밝히는 남자였다면 나는 그 사람과 굳이 앞날을 기약하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아닌가. 나랑 결혼해서 살고 있다가 갑자기 '나 대통령을 해볼까 해' 라고 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가. 너무 싫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통령의 아내 하기 싫다. 차라리 내가 대통령을 하지. 아니 이게 그러니까 내 행동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거라면 그건 어차피 나의 몫이지만, 내가 대통령의 아내라면 내 행동이 내가 아닌 남편에게로 리액션이 되어 갈 게 아닌가. 내 과거가 나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내가 감당하면 되는데, 내 과거가 내 남편 때문에 털리는 거라면 이래저래 너무 싫은 거다. 두 유 노 왓 아이 민?

사실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 의견을 내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 내 의견을 하나 보태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음, 그렇지만 그게 정말 최선일까? 이런 식의 부작용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또 귀기울여야 할 일이니까. 그렇지만..

아..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또 심란해하고 있다. 망상..



메리 토드가 너무 궁금하다. 그러나 메리 토드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 본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또 그게 지금까지 전달된다면 너무 좋을텐데.. 특히나 역사의 큰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이 기록을 남겨줬다면 그게 의미있었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당신 삶을,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가짐을 이렇게나 궁금해 하는데...

링컨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메리 토드에 대해서는 쓴 사람이 없는 걸까.



여자들아, 글을 쓰자. 기록을 남기자. 지금 내가 남기는 사소한듯한 기록들 마저도, 먼훗날 누군가가 되게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기록은 중요하고 기록은 의미있다.


















오늘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은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의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도 카트리나는 기록에 대해 얘기한다. 여자들이 마라톤에 참가할 수 없었고 달리는 여자들에 대해서라면 너 임신·출산에 안좋으니까 달리지말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일들, 그래서 정식으로 참가하지 못해 숨어 있다가 같이 달리거나 남장을 하고 달렸던 것들. 그 때 달렸던 여자들에 대해 기록이나 그들의 생각을 찾으려해도 딱히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대해 카트리나가 서운해 하는 거다. 우승을 했어도 여자에 대한 것이라면 짧게 소개되고, 결혼하지 않고 자녀가 없는 여자였음에도 아이가 둘인 걸로 소개되기도 하는 거다. 이럴 때 여자가 직접적으로 자기의 기록을 남겨두고 그게 전해진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1964년 여자 마라톤 세계 초고 기록은 두 번이나 깨졌다. 그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에 실린 두 번째 세계 기록 경신 기사는 이렇다.

"지난 8월 어느 토요일,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오클랜드 교외 마누레와에 거주하는 밀리 샘슨Millie Sampson, 31은 새벽 1시까지 춤을 췄다. 다음 날에는 11인분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중간에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서 3시간 19분 33초에 완주했다."

실제 밀리 샘슨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리그의 기록을 8분이나 단축했다는 사실은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기사의 대부분은 뉴질랜드 중거리 육상선수 피터 스넬Peter Snell(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도쿄 올림픽 중장거리 금메달리스트-옮긴이)이 다가오는 세계 선수권대회 준비 과정을 소개하는 데 할애되었다. (p.102-103)




기록하고 기록하고 또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기록해야 잊지 않는다. 기록해야 기억한다. 기록해야 뒤에도,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전해진다.

내가 내 기록을 해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에 맞설 수 있는 것이야.

메리 토드가 악처라는 얘기도 검색해보면 나오고 나름 행복했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그런데 그것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 메리 토드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아쉽다. 아쉽고 또 아쉬워.

기록하자. 기록하는 삶을 살자.





오늘 사무실에 06:58에 도착했는데 이미 해가 환하게 떠있었고,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걸로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너무 좋은걸. 퇴근 후에는 술과 안주를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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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20-03-2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도착이 6: 58 이라니요.. 항상 출퇴근에 독서에 매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그리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작성하는 글도 너무 좋아요~~ㅎㅎ

다락방 2020-03-20 12:41   좋아요 0 | URL
아아, 좋다고 말씀해주시니 제가 좋습니다. 으하하핫. 이맛에 글 쓰는가 봅니다. 으하하핫.
제가 출근시간이 빨라요 ㅠㅠ 나쁜 회사 ㅠㅠ 어서 빨리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으엉 ㅠㅠ
그래도 오늘 금요일이라 너무 씐나요! >.<

비연 2020-03-2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때문에 요즘 자차를 이용하는데,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없어져 슬픕니다. 얼른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백퍼 이백퍼 동감하며.

다락방 2020-03-22 15:11   좋아요 1 | URL
비연님, 우리가 퇴사하고 늦잠자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비연님도 저도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아침에 늦잠자고 일어나서 만나 늦은 아침식사를 함께 합시다.. 게으르게...아주 게으르게 말예요... 모닝 와인을 살짝 해도 좋고요.... 그 날을 기다립시다...

- 2020-03-22 21:40   좋아요 1 | URL
아아 그날, 저도 거기에서.... 뵙겠습니다.....

비연 2020-03-23 09:23   좋아요 1 | URL
다들 그날 거기에서 보아요. 모닝 와인잔 하나 들고. 책도 한 권 들면 더 좋고.

다락방 2020-03-23 09:36   좋아요 2 | URL
모닝 와인으로 대동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