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유연석)는 기차안에서 처음 만나게 된 여자(문채원)에게 '나 오늘 그쪽이랑 잘겁니다' 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 하룻밤 잔다'는  '원나잇'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성인 남녀가 처음 만나 함께 자기를 원한다면, 그게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나 여자랑 남자는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음으로써 처음 만나게 됐고, 별다른 대화가 오고간 것도 아닌 그런 상황에서 '나는 오늘 너랑 잘 예정이다' 라고 말하는 건, 실제 상황이었다면 끔찍할만한 상황이 아닌가. 여자는 전화를 받으러 나가다가 잠깐 중심을 잃고 남자의 무릎 위에 앉게 됐었는데, 남자는 그 느낌이 좋았다고 말하는 거다. 상상해보라. 내가 기차를 혼자 타고 가는데 옆자리 남자가 '나는 오늘 너랑 잘 예정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라면 졸 무서워서 벌떡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차장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런데 이 영화속에서 문채원은 기막혀하고 당황해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서 드러나는데, 그렇게 말하는 '낯선 남자'가 '유연석' 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어마어마한 매력남이고 작업을 잘 거는 선수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들이 그 말을 듣고도 그랑 자는 걸 선택하지 그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는 것.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가 건네는 '나는 오늘 너랑 잘거야'는 여자들에게 '통하고' 여자들도 은근히 '바라고'있다는 걸 암시한다. 사실은 전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그것이 '유연석'-잘생기고 매력적이라는 상징-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설정은 마지막 장면에서 더 힘을 얻는다. 유연석의 선배(평범남)가 유연석이 한 그대로, 기차안에서 옆자리 여자에게 '나 오늘 그쪽이랑 잘 예정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옆자리 여자는 그의 뺨을 때린다. 이로써 잘생긴 남자가 '나는 오늘 너랑 잘거다' 라고 말하면 그건 가능해지고, 잘생기지 않은 남자가 '나는 오늘 너랑 잘거다' 라고 말하는 건 '맞을 짓'이 된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는 셈이다. 참... 구역질나는 상황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귀는' 남자는 잘생기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 매력적인 남자, 그러니까 이를테면 유연석 같은 남자를 드라마다 영화에서 보고, 아 저 남자 멋있다, 저런 남자를 사귀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런 남자를 만날 가능성도 낮을뿐더러, 더 깊이 들어가면, 단순히 외모만으로 그가 '괜찮은' 혹은 '좋은' 남자는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애인'을 사귈 때 고려하는 건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이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냐, 이 사람과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하느냐, 등등 외모 보다 더한 어떤 것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 서울의 어디 한 군데, 강남이든 종로든 돌아다니다보면 우리나라 여자들이 얼마나 예쁜지 알 수 있다. 여자들은 헤어스타일에도 신경을 쓰고 옷도 예쁘게 입고 화장도 곱게 하고 또 화장을 설사 안해도 참 예쁘다. 그러나 여자들의 남자친구는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나만해도 사귀었던 남자 중에 잘생긴 남자는 단 한 명이었는데, 그와는 사실 사귀었다고 볼 수 도 없는게, 짧은 시간 사귀고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잘생긴 남자는 별로 없고, 잘생긴 남자가 매력적일 확률도 그다지 높지 않고, 무엇보다,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본 여자에게 '나는 오늘 너랑 잘거야'라는 말을 해서 통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여자들이 '어머, 이 남자는 잘생겼어, 자야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전에 한 만화에서 똑같은 행위도 잘생긴 남자들이 하면 여자들이 성희롱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한 걸 본 적이 있다. 그걸 보고 너무 불쾌했었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기차안에서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는 너랑 잘거야' 따위의 말을 하는 건 불쾌하고 무서운 일이다. 잘생겼다고 해서 그 말이 여자에게 행운의 말이 아니다. 유혹의 대사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그렇게 오해하고 못생긴 남자들은 또 괜히 열폭해서 '니네 유연석 같은 놈들이 그러면 화 안낼거잖아' 같은 거 하는 거 진짜 병맛이다..



영화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남자와 여자의 병맛 캐릭터 때문에 화딱지가 났다. 병신인가...하는 말이 수시로 튀어나왔는데, 여자는 한 부서의 팀장이면서도 얼마나 어수룩하고 꽉 막혔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남자가 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드러난다. 이거야말로 김을동의 망언이 생각나는 장면인 것이다. '똑똑한 여자는 밉상'... 영화속 여자는 행동이 어설프고, 감정이 다 드러나고, 꽉 막혀있고, 순진하고, 원나잇을 겁내고, 하룻밤 섹스보다 감정의 교류를 중시하는 장면 등등으로 '세련되지 못했으나',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되어 있다. 참... 한숨이 나온다.



여자에게는 특유의 장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장점.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의 장점을 캐치해낼 수 있다. 잘생긴 남자와 하룻밤 자기 위해 장점을 '부러' 찾을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잠깐 남자랑 지내는 동안에 이 남자의 '괜찮은' 면을 찾아내는 것이다. 자신에게 '사랑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 여자인데도, 여자는 남자 앞에서 어수룩하고 꽉 막힌 여자가 된다. 




'조셉 고든 래빗'이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돈 존]에서 남자는, 포르노에 중독되었었고 또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보았지만, 한 여자를 만나 그 여자의 눈을 보고 대화를 하면서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좋은지도. 결국 영화속에서 남자(유연석)도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에 당황하고 여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결국 그도 '마음 줄 사람'하나를 찾지 못해 자신의 원나잇에 합리성을 부여하고 다닌 셈이다. 게다가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 쉬웠다, 그에게는.


잘생긴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남자보다 성공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관계가 지속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유리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차안에서 나는 너랑 잘거야, 를 말하는 것조차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너와 내가 일대일로 만나고,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하다가, 그런 상황에서 매력을 느껴서 '오늘 너랑 자고 싶다' 를 말하는 것과, 기차안에서 처음 본 여자에게 '너랑 오늘 잘 예정이야'를 말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는, 오해가 쌓이고 갈등이 쌓이지만 그걸 결국 풀어나가는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상황들을 보면서 나라면 어떨까, 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아하고 또 어떤 상황들에서는 내 상황들과 겹쳐져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것도 좋아한다. 수많은 로맨틱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여전히 사랑과 감정 그리고 연애를 다룬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구상의 남자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로맨틱한 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한 영화를 보는 여자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로맨틱한 영화속 주인공들이 반드시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저마다의 장점과 매력을 가지고 있듯이 또 저마다의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각자의 부족한 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혹은 견뎌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로맨틱한 영화의 주인공이 반드시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현명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의 분위기]에서의 남자와 여자 캐릭터는 많이 실망스러웠다. 단순히 불완전한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앞서 시선 자체가 불편하다. 영화속에서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를 많이 '돕고', '이끌어주고', '가르친다'.














한 조사기관에서 노인들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3위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것이고, 2위가 저축을 더 많이 하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1위가 성관계를 더 많이 맺겠다는 것이었다. -111쪽









나는 내 젊은 시절에 내가 문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내가 너무 많이 내 몸을 아꼈던 것을 후회한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뭐든, 하면할수록 더 잘하게 되는것처럼, 섹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행위들은,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게 더 많이 도움이 되는 법이다. 섹스의 유혹 앞에서 '아니' 라고 말하기보다 '그래, 하자'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뭐가 그렇게 '안돼'기만 했는지... 어느 순간이 되면 섹스의 유혹 자체가 줄어들다가 결국 멈춰버릴 거라는 걸 안다. 섹스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고, 섹스를 안해도 사는데 사실 그다지 큰 지장이 없지만, 살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많이 하고 살아도 좋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세상에는 쾌락으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또 쾌락으로 삶을 지탱한다고 했을 때, 그 쾌락이 반드시 섹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오늘 처음 만난 이성이 하룻밤을 제안했을 때, 나는 기꺼이 '그래!'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안돼'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각자가 어디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사람과 십년간 섹스할 수도 있고 일곱 명의 사람과 매일 번갈아가며 섹스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와 내가 함께 원했을 때에 가능하다. 특히나 기차안에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너랑 잘거야..같은 거 하면 안된다는 거다. 섹스는 누군가에겐 엄청 좋은 거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그런 게 아니다. 게다가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는 너랑 오늘 섹스할 예정이다' 같은 거 말하면, 무섭다. 그러는 거 아니다. 나랑 자고 싶다면, '나는 너랑 잘거야'를 대뜸 말하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일단 나의 호감과, 관심과, 마음을 얻는 게 우선이다. 잘생겼다고 해서 내가 '오 나야 땡큐지' 이러면서 자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팁인데, 

원나잇을 해봤더니 공허하더라, 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먹고 한 잠 푹 자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따뜻한 밥을 먹고 한 잠 푹 자는 것은, 다른 많은 공허함, 슬픔, 외로움 등등에도 도움이 된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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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처음 만난 날
    from 마지막 키스 2018-09-20 16:42 
    일전에 유연석 주연의 영화 《그날의 분위기》를 보고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유연석은, 기차의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나는 오늘 그쪽이랑 잘겁니다'라고 말한다. 미친 개소리를 씨부린건데, 이 장면에서 어떤 남자들이 '야, 유연석 정도면 여자들도 자겠지'라고 생각한다는 걸 보고는 기가 찼다. 잘생겼기 때문에 저런 발언이 허용될 것이고 여자들도 섹스를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그리고
 
 
시이소오 2016-04-1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여성분들이 이 영화 어떻게 볼지 궁금했어요. 제가 보기엔 완전 개 싸이코 영화였거든요.
저 정도면 성폭행 권장 영화 아닌가요? 정말 저러는거 아닙니다 ^^;

다락방 2016-04-18 10:41   좋아요 0 | URL
무서운 짓이죠. 그런데 잘생긴 남자가 그랬다고 뭔가 `가능한 것`으로 만든 것 같아 되게 불쾌했어요.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걸 `맞다`고 보는 것도 짜증났고요. 실제로 주변에서 한 남자가 `어차피 여자들 유연석이 자자고 하면 다 잘거잖아` 하는 말 듣고, 그런 그릇된 시선이 비단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씁쓸했고요. 그래서 이 영화를 이렇게 만드는 것에 전혀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주 짜증났어요. 영화에 삽입된 몇몇 곡들은 좋았지만 말입니다.

아무개 2016-04-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예고보고 이거 미친거 아냐? 라고 생각했는데 이영화 망했죠? 그래야지 그럼!


다락방 2016-04-18 12:37   좋아요 0 | URL
유연석(칠봉아!! ㅠㅠ)이 시나리오 보는 눈을 좀 키웠으면 좋겠어요. 문채원도 그렇고요. 하아-

차트랑 2016-04-18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만하면 남의집 서재에 흔적 남기려하지않는 일인입니다,만 써주신 이번 글에 `오 저는 땡큐지 말입니다`.
좋은 글에 깊이 공감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군요
잘 읽었습니다

차트랑올림

다락방 2016-04-18 13:56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랜만입니다, 차트랑님.

공감하여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도 더 명확하게 표현이 안되어 답답했거든요. 글쓰기를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배움이 더 깊었다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텐데..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차트랑님.

차트랑 2016-04-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토록 명료하고 유려하게 써서는 공감백배하게 해 놓으시고 이렇게 겸양하시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ㅠ

다락방 2016-04-18 15:22   좋아요 0 | URL
아이쿠, 별말씀을요! ㅠㅠ
오늘 글은 스스로 딱히 흡족하지 않은 글이에요 ㅠㅠㅠ
 

졸업하고 제가 홍콩 삼촌네 갔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섬이 있더라고요. 들어갈 때 배를 타야 된다는 거예요. '아, 뭐지? 어떡하지? 미쳤다.' 너무 무서운 거예요. 표정관리도 안 되고. 얘기도 못하고 저 혼자 끙끙 앓았는데 확실히 제가 나아진 걸 느낀 게……'이기자, 이기자' 그런 게 많이 생긴 거예요. 확실히 졸업 이후에 많이 커졌어요.

결국 배를 탔어요. 긴장되어갖고 손을 꽉 잡고 가는데, 다행히 티는 안 냈어요. '결국엔 탔네!'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인데 하나하나 극복하는 게 되게 스스로 기특하면서 …아, 진짜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있겠구나. 에전엔 '내가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아예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랬는데 이제는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섞일 수 있다는 그런 기대감? 안도감? (구술 이혜지, 세월호 당시 단원고 2학년)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팔과 다리를 다쳤고, 팔에는 깁스를 했더랬다. 물리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을 계속 갔었다. 나는 심하게 다치지 않았었지만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 중에는 아주 심하게 다친 사람들도 많았다. 그 후의 나는 버스 타는 걸 무서워했다. 버스를 안 탈 수는 없으니 타긴 탔지만, 급출발이나 급정거를 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옆 차선에서 달리는 차들을 보면 또 두근두근 했다. 기사님이 음악이나 라디오를 크게 틀면, 그건 그대로 두근두근 했다. 기사님이 졸려서 저러시나, 싶어서, 그러다 사고날까봐. 


그리고 3년전, 친구와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다. 그때는 가벼운 충돌이었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면서 '어, 이건 부딪친다' 라고 생각했을 때, 정말 그 차가 와서 박은 거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넌덜머리가 났다. 버스라면 지긋지긋했다. 지금도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긴 하지만, 나는 가급적 지하철을 타고, 장거리라면 기차가 있는 곳을 선호한다. 버스로 가야 하는 곳이면 가기를 포기하거나, 기차를 타고 최대한 가까이 가서 걷거나 택시를 타거나 한다. 내게 장거리 버스는 쥐약이다. 



그런데 세월호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의 생존자가, 배 앞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그 순간을 이겨냈다. 나보다 더 어린 학생이, 그 일을 해냈다. 내가, 이래서 읽지 않으려고 했건만, 아, 울어버렸다. 이 책을 한 권 다 읽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나는 그저 샘플북만 봤을 뿐인데, 그 샘플북의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울지 않은 장이 없었다.















이번호 시사인에서는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샘플북을 부록으로 줬다. 나는 이 책이 나온 걸 알고 있었지만 읽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이 책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샘플북이 왔고, 샘플북도 안 읽으려고 했는데, 하아, 읽어버렸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읽는데, 이들이 저마다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겪는 걸 보노라니....게다가 자신들의 아픔을 다독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까지 다독이려는 노력과 마음이, 이들을 너무 일찍 철들게 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사 간 집은 방이 하나 더 늘었어요. 사실상 엄마 방인데 형 방이라 지칭해두고 엄마가 거기서 생활하세요. 침대도 있고 다 있어요. 책꽂이 있잖아요. 거기에 형 사진 같은 거 있고 세월호 반지랑 팔지 같은 게 있어요. 다 정리해놨어요. 그런 물건들이 보이니까 그래도 뿌듯해요. 100퍼센트 좋다고 할 순 없지만 형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요. 그래도 형이 없으니까 허전한 게 있지만요. 추억이 제일 많은 게 엄마일 거예요. 형이 엄마가 한 요리를 좋아했다 했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되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거를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셨단 말이에요. 형이 맛있다고 해주는 것을 굉장히 내심 뿌듯해하시고 좋아하셨는데 그거를 좀 그리워하세요. 제가 좀 살가워지긴 했지만 그런 칭찬이 안 되잖아요. 하라면 하겠지만 자연스러운 게 아니잖아요. 인위적인 거지.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 (구술 정수범, 세월호 희생학생 정휘범의 동생)



아무쪼록 그들이 자신의 삶을 더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결코 이기적인 게 아니다.



약간 이기적일 수도 있는데, 제 삶을 더 생각하고 싶어졌어요. 그동안 많이 수고했으니까 이제는 버틸 수 있을 만큼만 하자. 희생된 친구들한테 미안한 게 많지만, 이제는 내 삶도 생각할 수 있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떼려는 게 아니잖아요. 소송도 그렇고 제가 당사자니까 제 삶을 잃지 않으면서 해나가야죠. (구술 이혜지, 세월호 당시 단원고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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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5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빨간 립스틱을 사고 싶었다. 아주 빨간 립스틱. 언제부턴가 립스틱을 사지 않고 있었으니 사게 된다면 아주 오랜만에 사게 되는 거다. 그간 가지고 있던 것과 백화점에서 화장품 사고 샘플 받았던 것, 혹은 선물 받은 립글로스나 립밤등을 사용하고 있다가, 빨간 립스틱을 사자, 라고 생각했다. 살래, 살거야. 이십대 초반에는 립스틱을 잘 사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립스틱을 사지 않았어. 자, 오만년만에! 립스틱을 사자!!


나는 인터넷으로 립스틱 쇼핑에 나섰다. 이것 저것 골라보다가 드디어 골라낸 것이 디올 제품! 이정도면 내가 원하는 빨강이겠지. 그렇게 선택하고 그 립스틱이 어제, 내게로 왔다. 슝-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된장녀의 하루인가 김치녀의 하루인가 ..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쓴 남자사람은 된장녀들이 엘라스틴 샴푸를 쓴다고 비꼬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이런 샴푸 한 번 안사본 꼬꼬마 새끼... 엄마가 사준 샴푸만 써본 꼬꼬마 새끼.... 당장 마트로 가서 샴푸 사봐라, 새꺄. 뭐가 됐든, 나는 엘라스틴 샴푸를 몇 개나 살 돈으로 립스틱 한 개 샀다. 디올이다!! 디올은 아니??






아아, 그런데, 이 예쁜 빨강이... 발라보면.. 핑크에 가까운 거다. 오, 레드여... 나의 레드는 어디에...나는 급실망을 했지만, 이미 발라본 후라 반품을 할 수도 없다. 그래, 얌전하게 회사 다닐 때는 이걸 바르자. 하아- 이것의 발색은 보이는 것보다 연하다. 바른 후의 모습이다.





아아, 너무나 얌전한 것이다... 이렇게 얌전한 걸 원한 게 아니야... 그래서 결심했다. 이 얌전한 립스틱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직장생활 할 때만 바르고, 주말용, 외출용 시뻘건 립스틱을 새로 사자! 


그렇게 나는 슈에무라 립스틱을 다시 결제했다... 립스틱 두 개에.....엘라스틴 샴푸 몇 개???





이것은 지금 내게로 오고 있다... 이 립스틱의 발색은 다음 포스팅에..to be continued....

나는 뷰티블로거로 거듭나는가.....




다른 얘긴데, 두 번째 내 사진에 파란색 동그라미, 그 부분에 점이 있다. 저기에 점 있는 거 너무 좋다. 아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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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4-15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넘나 고우신 것... 피부가 플로리스 그 자체인 것...! 맥 러시안레드나 루비우는 어떠세요?

다락방 2016-04-15 11:20   좋아요 1 | URL
아아 에이바님. 저것은 셀카어플의 힘입니다. 실제로 저는 피부가 나쁜 여자사람중의 한 명 입니다. 셀카어플은 자체 뽀샵을 해줘요. 아이폰셀카였다면 전 아마 제 얼굴을 올리지 못했을 겁니다...하아-

맥 러시안 레드? 루비우? 검색해볼게요. 우히히히.

단발머리 2016-04-1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빨강을 못 발라요. 빨강을 바르고 외출한 날에는 하루종일 이런 말을 듣죠.
˝립스틱 너무 진하다...˝ 나는, 진하다,를 찐하다 혹은 안 어울린다로 해석해요.
그래서, 나는 사계절 핑크. 핫핑크, 톤다운핑크, 그냥 핑크.

다락방님 디올 발색 좋은대요. 딱 사무실에 어울립니다.^^
단정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차장님~~~~
다음에는 나도 디올을 사볼까봐요. ㅋㅋ
근데 예쁜 얼굴 너무 많이 가린 것 아니예요? 너무 많이 가렸어요~~~~

다락방 2016-04-15 11:23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는 이십대 초중반에 빨간 거 엄청 바르고 다녔어요. ㅋㅋㅋㅋㅋㅋ 누가 뭐라고 해도 꿋꿋하게 바르고 다녔어요. 한 번은 너무 보라색이라 시꺼멓기까지 한 립스틱을 바르고 다닌 적도 있어요. 엄청 많은 이야길 들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바르고 다녔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발색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너무 약해요. 전 더 강하고, 쎄고, 진한 걸 원했습니다! ㅎㅎㅎㅎ

아아, 저도 가리지 않고 올리고 싶지만....가릴 수 밖에 없는 이 마음..... 하아.....Orz

[그장소] 2016-04-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올 컬러 곱네요~^^슈에무라도 보여주세요..바르고요!

다락방 2016-04-15 11:23   좋아요 1 | URL
네, 슈에무라도 도착하면 인증하겠습니다. 뷰티블로거로 거듭날게요! 아자!!

[그장소] 2016-04-15 18:38   좋아요 0 | URL
화사한 봄 ㅡ뷰티 ㅡ부탁~해요~!^^

건조기후 2016-04-15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왕. 색깔 예뻐요! 빨간 색도 엄청 예쁠 것 같아요!
다락방님 부러워요. 흑. 전 립스틱이 안 어울려서 빨간 색은 꿈도 못 꾸는 비루한 낯짝... ㅜ

다락방 2016-04-15 11:29   좋아요 1 | URL
건조기후님, 뽀샵 어플로 사진을 찍고 중요부위를 저렇게 다 가려주시면 누구나 립스틱은 어울립니다. 저도 가린 것의 힘이며 뽀샵의 힘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가렸겠습니까.....후........Orz

무해한모리군 2016-04-15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디올은 확실히 빨강은 아니네요... 코랄핑크 그런걸까요? 레드도 잘어울리실거 같아요. 피치도 괜찮을거 같고.

저는 볼빨간 종족이라 빨간립스틱 안어울려요 ㅠ.ㅠ 하긴 화장도 어짜피 안하고 다니지만 ㅋㄷㅋㄷㅋㄷ


다락방 2016-04-15 15:12   좋아요 1 | URL
그냥 립스틱만 봤을 때는 빨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발라놓으니 핑크가 되어버렸어요. 하아...
얼른 빨강 바르고 싶어서 좀쑤셔요. 얼른 왔으면 좋겠어요. 얼른 바르고 외출하고 싶어요!1 >.<

blanca 2016-04-15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무슨 마음인지 너무 잘 이해되는 게 제가 얼마전 정말 화사한 핑크 립스틱을 바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며칠 검색 해서 받아 봤더니만 두둥 발색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귀찮지만 립스틱은 직접 매장에 가서 바르고 지우고( 저는 이게 너무 번거로워요)하고 사는 게 확실하긴 하더라고요. 아, 궁금해요. 저 립스틱은 다락방님 입술에서 어떤 색감일까. 아, 점 ㅋㅋ 너무 귀여워요.

다락방 2016-04-15 15:13   좋아요 1 | URL
네, 사실 발색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매장가서 발라보는 게 제일이지만, 저도 이것 발라보고 지우고 또 저것 발라보고 지우고 하기가 너무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에라이~ 하고 산건데 발색에서 망할줄은.. ㅠㅠ
제가 빨강색 오면 잽싸게 인증할게요. 아 기대돼요. 빨강빨강~
제 점이 귀엽진 않지만 ㅋㅋㅋㅋ 저는 저기에 점 있는 게 어쩐지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치니 2016-04-15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다락방님 왤케 살 빠졌어요!?

다락방 2016-04-15 15:14   좋아요 1 | URL
아아 ㅠㅠ 아닙니다, 치니님. 잘못 보셨습니다. 아니, 어플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저게 뽀샵어플이라 지가 막 피부 보정해주고 얼굴 사이즈 줄여주고 그래요. 살은 1도 안빠졌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빠져서 이런 댓글 받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hnine 2016-04-15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께서 찾으시는 빨강은 저것보다 훨씬 더 새빨간색일거예요. 슈에뮤라 립스틱보다 더 빨간.
그런데 다락방님 사진 이리 가리고 저리 가리셨지만 제가 상상하던 모습이랑 다르세요. 더 동글동글한 마스크일줄 알았는데 완전 계란형!

다락방 2016-04-18 10:09   좋아요 0 | URL
나인님, 슈에무라 립스틱은 마음에 들어요. 사실 빨간 빛 이라기 보다는 다홍빛에 가깝지만, 발색만큼은 원하는대로 나옵니다. 아하하하하.

그리고 저게 위에도 몇 번 썼지만, 셀카어플을 사용해서 찍은 거라 그래요. 원래 제 얼굴은 보름달 같아요. 동글동글이 아니라 둥글둥글 ㅠㅠㅠ 셀카 어플이 이렇게 저를 많이 속여주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망고 2016-04-1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 오니 얼굴에 자꾸 색을 칠하고 싶어요^^ 디올 립스틱 예쁜데요?ㅎㅎ 빨강 후기도 부탁드려요~

다락방 2016-04-18 10:10   좋아요 0 | URL
빨강 후기도 곧 올리겠습니다! 아하하하하.
색이 진한 립스틱 바르고 외출하니까 기분이 새로웠어요. 힛 :)

셜록오 2016-04-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얌전한 빨강 맘에 드는데요 뷰티블로거님^^

다락방 2016-04-18 10:11   좋아요 0 | URL
디올 립스틱은 여동생이 가져갔어요. 마음에 쏙 든다고요. ㅎㅎ
새로 산 빨강이 마음에 드는데 사무실에서 바르고 있기가 참 난감해요 ㅠㅠ

몬스터 2016-04-17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광 피부가 이런거죠? 피부 참 좋으시다. 립스틱 색깔 이뻐요, 입술에 봄이 온듯

다락방 2016-04-18 10:13   좋아요 0 | URL
저는 물광 피부가 아니라 ㅠㅠ 기름진 피부입니다 몬스터님 ㅠㅠㅠㅠㅠ
셀카어플이 저를 물광피부로 만들어줬네요. 하아- 기술의 발전이여.....
전 셀카 어플 아니면 셀카를 찍을 수가 없는 피부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흙

저 분홍빛 디올 립스틱 여동생이 가져갔어요. 아하하하하. 제게는 이제 빨강..만 남았습니다. -0-
 

꿈에 나는 스위스 재벌의 비서였다. 그는 금발이었고 성격이 까칠했으며 나보다 젊었다. 나는 이곳에서 일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어쩌면 그 날이 처음인 것도 같았는데, 어쨌든 그는 스키를 타러 가야하니 준비하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스키 타러 가는 사람의 준비물을 챙겨줘본 적이 없어서 생각나는대로 이것 챙기셨어요, 저것 챙기셨어요, 물었는데 그는 그때마다 맞다 그것도 있어야지, 이것도 있어야지, 하면서 챙겨주는대로 다 받는 거다. 그랬더니 손에 무언가 잡다한 것들이 한아름 담기게 됐고, 그래서 결국 손이 없게 된 그를 보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커다란 검은 비닐 봉지를 찾아냈다. 여기에 한꺼번에 다 넣을테니 주세요, 하고. 그리고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에 잡다한 물건들을 다 넣고 그에게 건넸다. 그는 아, 한결 낫군, 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을 데리러 올 차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스위스의 아주 높은 빌딩이었고, 맨 꼭대기 층이었는데, 문을 열면 바로 옥상이었고 그 옥상은 아주 넓었다. 게다가 높은 빌딩이어서 주변 전망이 다 보이는데, 높다란 산들이 보여서 진짜 끝내주는거다. 그런데 여기에 차가 어떻게 온다는 걸까...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갸웃거리며, 여기 차가 어떻게 와요? 물었더니, 기다려봐 다 와, 하는 거다. 헬기가 차를 싣고 오나...라는 생각을 하며 진짜 사방팔방 둘러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한 쪽팔로 나를 감싸서 자신의 옆으로 데려오면서, 저기 차 나오는데 거기 서있으면 어떡해, 하는 거다. 그래서 어디요? 하고 둘러보는데 어떤 동굴 같은 입구에서 스포츠카가 나온다. 여기에 왜 동굴이...그리고 그 동굴에서 왜 차가....아무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내 옆에서 궁시렁거린다. 하여간 이여자는 신경쓰인다니까, 차 오는 것 잘 보고 다니지도 않고 말이야, 하면서. 젊은 새끼가 사장이라고 반말하는구나...라고 잠깐 생각했는데, 사실 그 뉘앙스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엄정화'와 '다니엘 헤니' 주연의 『미스터 로빈 꼬시기』라는 영화의, 그 뉘앙스였으니까. 그 영화속에서 엄정화와 다니엘 헤니가 남산을 오르는 길이었나...여튼 그런 데를 함께 걷다가 뒤에서 차가 오니까 다니엘 헤니가 엄정화를 데리고 피하면서 화를 버럭 냈던 거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하고. 뭐, 정확한 워딩은 저런 게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후에 엄정화는 집에 가서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자신의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다 사랑한다는 말로 들려...라고.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스위스 대기업사장이 나를 대하는 말투가 꼭 엄정화를 대하는 다니엘 헤니 말투 같았다. 그는 내게 잔소리를 하더니만 곧이어  으스댔다. 스키장을 가려면 스포츠카정도는 타줘야지, 하고. 후훗. 귀여운 녀석, 스포츠카 타는 걸로 으스대다니,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잘 다녀오세요, 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차에 올라타면서 다녀올게, 하고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네, 다녀오세요, 다시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음..비서가..사장한테...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다니...나는 그를 태운 차가 떠나자 어쩐지 웃겨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이렇게 사랑에 빠지겠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꿈에서 깼는데, 아, 왜 벌써 깼을까, 스키장 갔다온 그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데...


어쨌든 아침에 출근하면서 내내 이 꿈 생각을 했다. 이런 꿈을 꾼 이유가 뭘까, 이 꿈의 의미는 무얼까, 하고.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고, 그 꿈에 대체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실제로 예지몽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몇 편 있었고, 꿈에서 일어난 일이 그대로 일어난 적도 있었던 터라, 내 꿈을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 꿈도 해석해보려고 했지만.......잘 안되더라. 도무지 풀이할 수가 없어. 음......... 이렇게 풀이할 수 없는 꿈이라면... 결국... 아무 의미없는 개꿈인가... 혹시 내가 스위스가서 재벌과 사랑에 빠지게 될 꿈....일리가 없지........꿈에서는 한국어로 대화했지만 스위스가면 한국어로 대화할 수 없을테니...... 



좋은 꿈이었다. 내가 바라는 꿈은 아니었지만. 





어제는 아파서 한의원에 갔다가 '생각을 그만하라'는 말을 들었다. 3주쯤 치료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라는 말을 하면서 닥터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앉아서 눈을 감고 어깨에 힘을 빼고 생각을 비우라고, 머릿속을 텅 비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한다고 문제가 해결 안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맞네. 내가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해결될 문제라면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해결될 것이고, 해결 안될 문제라면 내가 생각한다고 해도 안될텐데, 그러면 이 생각들은 다 부질없는 게 아닌가... 아...명의다...명의야...명의.....우리동네 명의닷!!



고맙다고 인사하며 병원을 나오는데, 닥터는 내게 말했다. 



아, 책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재미있었어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겁나 부끄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고 한의원을 나섰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다른 얘긴데, 선거전날밤 꿈에는 김을동이 나왔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빨간 잠바를 입고 내가 가려는 길 양옆으로 서있었는데, 자신을 뽑아 달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고, 그때 김을동이 내 손을 꼭 부여잡는 거다. 나는 황급히 손을 빼내며 흥, 하고 가던 길을 갔는데, 가다보니 진선미 의원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악, 진선미 의원님, 반가워요! 하고 그 분의 손을 내가 먼저 꽉 잡았다. 김을동은 떨어졌고 진선미 의원은 당선됐다. 예지몽...


하아, 내 꿈에 은수미 의원님이 나왔어야 했는데....내가 그 손을 꼭 잡았어야 했는데....가슴이 시리다 진짜. 


그건그렇고,


생각을 그만하라는 충고를 들으니, '사라 쿠트너'의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듯 생각하게 됐다. 한 때 그 책은 내 바이블이었는데, 지금 이 책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하도 이 책 저 책 팔아가지고 .. 이 책을 안팔았다면 좋겠는데...집에 가면 찾아봐야겠네. 어제는 책장을 볼 생각도 안하고 계속 생각만 했다.



"바로 그게 제 문제에요! 전 보통 슬프지 않을 때 발작이 일어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가고 있을 때요. 그럴 때면 전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죠. 하지만 제 머리는 마치 품질이 안 좋은 퍼즐 같아요. 조각들을 잘못 자르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아귀가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퍼즐 말이에요! 항상 한 가지 원인을 찾으려다 보면 전 미칠 것만 같아요. 머릿속에서 마치 제대로 줄도 서지 않고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반항하는 유치원생들처럼 온갖 가능성들이 마구 뒤엉켜버리거든요!" 

"그럼 그걸 중단하십시오.

"뭘요?" 

"생각 말입니다." (pp.344-345) 


나는 일전에 '너는 네 기분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인지, 당시에 이 책이 바이블이었다고, 오래전의 내 페이퍼에서 내가 말하고 있었다. 오래전의 페이퍼를 읽다가, 아, 나는 정말 그런가, 하고 갸웃했다. 진짜 그랬나. 내가 나를 이렇게나 잘 몰랐나. 나... 그런거였나? 나, 나를 잘 돌보고 있지 않았나? 나를 잘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나?????



"헤르만 양! 모르겠어요? 당신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에요. 감성지수도 아주 높고요. 열정이 넘치는데다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직감까지 뛰어나죠. 그런데 그런 능력이 자신에게는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 문제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당신은 마치 머리에 널빤지라도 두른 사람처럼 우둔하게 헤매고 있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건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당신은 다른 건 전부 느낄 수 있는데, 자기 자신만은 느낄 수 없다는거요!" (p.342)


















맙소사. 지금 검색해보니 이 책 절판인데, 으아아아, 제발 팔지 았았기를, 집에 있기를 ㅠㅠ

나 섣불리 팔아버리는 버릇 고쳐야 해. 고쳐!!




오늘은 아침을 안먹고 와서 사무실에서 두유에 씨리얼을 말아먹고, 사무실 동료가 준 홍콩 쿠키에 커피를 마셨는데, 아아, 너무 이렇게 먹어서 그런지 속이 니글니글하다. 편의점에 뛰어나가서 사발면이라도 먹고 와야할까보다. 니글니글해...


어제는 비타민을 몸에서 원한 날이었던 것 같다. 오천원에 열다섯개 하는 오렌지를 시장에서 사와서는 앉은 자리에서 네 개나 까먹었다. 그리고는 평소에 먹지도 않던 오렌지 쥬스를 사서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이렇게 먹다가 어? 나 몸에 비타민 부족한가? 싶어서 아직 다 먹지 않았던 비타민제도 꿀꺽 삼켰다. 그랬더니 오늘은 오렌지를 가지고 왔는데도 먹을 생각이 없다. 다 충족됐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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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6-04-14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왜 동굴이... 동굴에서 왜 차가... ㅎㅎㅎㅎㅎㅎㅎ 아 웃기다 ㅎㅎㅎㅎㅎ
다시 멋진 인연이 나타날 건가 봐요.

선거 전날 꿈도 기분 좋은 예지몽이었네요.
꼴보기 싫은 사람들 후두둑 떨어지는 거 보니 후련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ㅋ
1번당이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아쉬운 선거였어요. 정말 은수미님은 지못미의 아이콘 ㅜㅜ

오렌지 엄청 싸네요! 저는 1개 천원도 넘는 걸 사먹고 있어요 호갱인가...

뭔가... 다시 기운이 짱짱해졌으면 좋겠어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6-04-14 15:12   좋아요 1 | URL
ㅎㅎ 다시 멋진 인연은 별로 기대하지 않아요. 그냥 이런 재미난 꿈이나 꾸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불행하다는 생각 안하면서요.

꿈에서 은수미 의원님을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두 손을 꼭 잡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다른 누구보다 은수미 의원님이 낙선이란 게 너무나 안타까워요. 야당이 많이 된 건 좋지만 박영선 당선된 것도 확 짜증나고요. 박영선 대신 은수미가 됐어야 한다고 자꾸 생각 들어요. ㅠㅠ

안그래도 오렌지가 엄청 싸서 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시장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트럭에서 팔더라고요. 맛 보라고 잘라줬는데 맛있는거에요. 그래서 냉큼 샀지요. 덕분에 충분히 맛있게 잘 먹고 있어요.

비타민도 섭취했으니 다시 기운이 짱짱해지겠죠, 곧. 저도 얼른 그렇게 되고 싶어요. 고마워요, 건조기후님. 건조기후님 좋아해요 ♡

레와 2016-04-14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자기 전에 무슨 영화를 봤는지 얘기해봐요! 락방! 어서! ㅎㅎ


다락방이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간 따위 생각하지 말고, 자신한테 집중해요 오케이?!

다락방 2016-04-14 15:13   좋아요 1 | URL
어제 자기 전에 영화를 잠깐 보긴 했지만 그게 무슨 영환지는 빔일!! ㅎㅎ 그러고보니 돈 많은 금발머리 남자가 나오긴 했네요.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 돌아와야죠. 돌아오려고 내가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 그래서 과소비도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빨강색 립스틱으로 하나 또 주문했다. 꺄울 >.<

무해한모리군 2016-04-1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생각을 하지 않고, 나자신을 찾으려고 집도 떠나고 평생 수련이라는 것도 하지 않습니까... 그거 어려운거죠.. 그런데 그냥 다정하신거 아닌가요? 이큐 공감력이 뛰어난거죠 암. ^^ 저는 그분께서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셔서 꿈도 그분 작품을 소재로 꾸고 있습니다... 지극한 팬심이란.

다락방 2016-04-14 15:15   좋아요 0 | URL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가요, 휘모리님? 저는 아무리 생각을 안하려고 해도 생각이 너무 많은데 말이지요. 가끔은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 되어요. 어떻게 이 생각을 중단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무의 상태가 될까요? 저는 정말이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노력해봐야 겠어요. 멍-한 상태가 될 수 있도록 말예요. 저를 위해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ㅠㅠ

그런데 지극한 팬심을 갖고 계신 그 분은 누구신가요??????????????????????

[그장소] 2016-04-1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ㅡ신나게 읽었어요..가끔 ㅡ이런 경우 저는 개꿈 꿨네 ㅡ혼자 그러는데 ..더 꾸고싶다는 생각이 든 꿈이 많지 않아서 말이죠 ㅡ결국은 호러로 가서...ㅎㅎ;;
다락방님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거죠..주변을 잘 살피고 ㅡ그런데 자신에게 가혹하기만하고 냉정한 편이고 ㅡ 무심하여...병이 되는 ㅡ그만큼 받고 싶은 것이 충족 안되서 ㅡ몸에 나타나는 ㅡ걸 ㅡ알겠네요 ..낯설지 않아~
..토닥 토닥 ...
일단 이기적이되시라고 ㅡㅎㅎㅎ 저도 못하면서 그럴필요는 무지 느끼는 ㅡ

다락방 2016-04-14 15:17   좋아요 1 | URL
저는 제가 저 스스로에게 냉정하거나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충분히 제 자신에 대해서도 다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엔 그게 좀 부족했는가봐요.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줘야 겠어요. 최근에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긴 했었거든요. 토닥토닥 잘 다독여 줘야겠어요. (끄덕끄덕)

그장소님, 우리 이기적이 되도록 해요. 지금보다 더 이기적이 되도록 합시다!!

[그장소] 2016-04-14 17:02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양쪽 (자의타의)모두에서 받는 애정을 스스로 충당하려니 아무래도 가끔 자주 지치는데 ㅡ그 완급조절을 잘 하는게 ㅡ현명한 자기애 같거든요 ~! 함께 화이팅~!!^^♡

몬스터 2016-04-1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 중단하기 , 제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 제일 싫어하는 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칠려고 많이 노력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놓아 버리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더라구요 ( 제게는 ).

마음이 쿵 떨어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정말 의식하고 그냥 될대로 되라 하면서 놓아버려요. 그러면 결국은 시간이 정리를 하더라구요.

다른 사람으로 안 살아 봐서 모르겠지만 , 경험상, 확실히 , 많은 수의 male sex 는 female sex 보다 단순하고 , 생각이란 것을 적게 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덜 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성격 까칠한 사람 매력 있죠.

다락방 2016-04-18 10:15   좋아요 0 | URL
그냥 놓아버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요, 몬스터님? 저도 생각을 중단하고 싶은데 끊임없이 자꾸자꾸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속상하고 고민이 많고요..

저도 결국은 시간이 정리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시간은, 결국 우리를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놓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전에 마음을 많이 다쳐야 하는 것 같아요. 절망하고 속상하고 슬프고 아파하는 과정이 있어야 또 그 다음 곳으로 가 있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마냥 착한 사람보다는 까칠한 사람이 더 매력있는 건 사실이에요. 사실 그런 사람이 대하기도 편하고요. 자신의 생각, 주장하는 바를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상대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세상을 떠나기 전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교실에 왔던 날, 선택의 그날, 그녀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떠올렸던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여태까지는 그녀가 아팠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심해서 병이 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베개를 받치고 거기에 누워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자신의 멍청이 아들을, 매력적이고 유쾌하지만 멍청한 아들을 선택하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야 딱딱하게 굳은, 늙고 암울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그리고 우리 십이인 위원회가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 걸 끝끝내 싫어했던 이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데로드에 대해 불평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이유를 분석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십이인 위원회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뽑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를 선택했으니까." 우리 중에 누구라도 데로드보다는 잘했을 것이다.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데스트라를 존경했으며, 그녀가 원한다고 판단되는 일들을 했을 것이다. 굼뜨고 결단력이 없는 나조차 그보다는 더 잘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낙담을 안겨줬다. 우리 잘못이었다. 우리 책임이다. 도시들을 위해 노력하느라 늘 분주하고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던, 이름 높은 십이인 위원회. 도시들이 몰락한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있었다. (그것의 이유, 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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