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모르게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로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라'를 지키는 데 온 힘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 물론, 이미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로라 역시 로건을 지키고자 한다. 게다가 로건은 로라가 '대디' 라고 부르는 순간에,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그간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감정에 대해 느끼게 되기도 한다. '찰스'가 잠깐 단란한 가족들 사이에서 '여기서 하룻밤 쉬어가자' 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이 그 평범함과 안락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울버린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건 내게도 통해서, 그 장면에서 나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저게 사실은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 사람과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일. 한 공간에서 함께 밥을 먹고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것들. 이거 말고 인생에 굳이 뭐가 필요할까? 




조카1은 이제 여덟살이고 이번 해에 학교에 입학했다. 이 아이는 뭘 만들고 조립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볼펜을 분해하기도 했고 몰펀을 아주 잘 다뤘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내 기대와는 달리 책 읽는 것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글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조카의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독해 능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을 해서 논술 선생님과 책읽기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내게 알렸다. 나는 여동생에게 그랬다. '아니야, 내 조카는 절대, 절대로 독해 능력이 떨어지지 않아. 지금은 글자를 잘 모르니까 읽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 글자를 읽어나가는 데 에너지를 쏟아서 그렇지, 일단 걔는 내용을 알기만 하면 누구보다 그걸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아이야. 걘 진짜로, 파악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니까?' 라고. 나름 열변을 토했는데, 조카의 논술 선생님이 조카랑 수업을 해본 뒤에 여동생에게 나랑 똑같이 말했다고 했다. 글자 읽고서 내용 파악은 힘들어하는데 그건 글자 읽느라 그런거지 다른 사람이 읽어주면 누구보다 해석을 잘하고 자기 의견 표현도 잘한다고. 아니, 내가 내 조카를 아는데 진짜 그렇다니까? 글자는 다른 아이보다 좀 늦게 알 수도 있는데, 얘가 상황 파악이나 감정 표현 능력이 진짜 탁월하다니까? 이런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시쓰기 시간이라고 한다. 선생님이 말하기를, 시 쓸 때 이 아이는 너무 신난다면서 알고 있는 표현을 죄다 끌어오면서 시쓰는 걸 즐겨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동생은 시쓰기 노트를 따로 한 권 사줬다는데 거기다 신나서 시를 쓰고 있단다. 아아, 조카야, 이모는 책은 즐겨 읽지만 시를 잘 몰라... 역시 너는 나랑 너무나 다르구나... 나는 일전에 조카랑 놀면서 몰펀이나 레고 맞출 때 완전 멘붕오고 스트레스 받아서 손이 꼼짝도 안하는데, 조카가 깔깔 웃더니 머릿속에 생각하는 걸 그냥 다 만드는 게 아닌가! 아아, 아이야, 너는 나랑 다르구나! 어쨌든.


이 논술 시간에 주제가 '여행'이어서 어디에 다녀와봤냐, 라는 식의 문답이 있었는가 보다. 나의 조카1은 '저는 제주도밖에 안가봤어요' 라고 했다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단다.


그런데 우리 이모는 많이 가봤어요. 미국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포르투갈과 헷갈린 것 같다) 홍콩도 가고 남자친구도 호주에 있어요(이것은 반만 사실이다).



그래서 여동생이 아, 이모의 삶이 이렇게 조카에게 영향을 주는구나 생각했다는 거다. 지난 주말에  우리집에 왔던 조카는 자고 일어나서는 내 방으로 들어와 나를 깨웠다. 내가 팔을 벌리자 내 품에 쏙 안겨서 내 옆에 누웠는데, 그러면서 내게 이모는 어디어디 여행가봤어? 하고 묻더라. 


응. 이모는, 미국, 포르투갈, 괌, 홍콩, 마카오, 싱가폴, 베트남, 러시아 가봤어. 

이모 프랑스는 안가봤어?

응 이모 프랑스는 안가봤어.

이모 타미는 홍콩 가보고 싶어.

아 그래? 그러면 이모랑 같이 홍콩 갈까?

응 이모랑 같이 홍콩 가고 싶어.

응 그러면 타미 지금보다 더 크면 이모랑 둘이 홍콩가자.



이모. 우리 태권도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태권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대. 근데 자꾸자꾸 생각하니까 정말 태권도 선생님이 됐대.

응 맞아, 타미야. 이모도 열다섯살 때부터 미국 가고 싶었거든. 그래서 자꾸자꾸 생각하니까 나중에 진짜 미국에 가게 됐어. 타미도 하고 싶은 거 자꾸자꾸 생각하면 하게 될거야.

진짜?

응. 사람은 하고 싶은 거 자꾸자꾸 생각하다보면 매순간 거기에 가까운 선택을 하게 되거든. 그 선택이 결국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줘.



이런 대화를 내 침대 위에서 둘이 알콩달콩 나누었는데, 내 조카가 얼마만큼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조카랑 영상통화를 하는데 이모 어디냐 물어서 '이모방이야' 했더니 진짜인지 보여줘봐! 하는 거다. 그래서 웃으면서 책장 앞에 가 섰다. 그리고 책들을 좌악- 보여주니, '이모방 맞네' 하더라. 아하하하하.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다니는데, 내 조카에게는 이런 나의 모습이 계속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는 조카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최소한 '다른 어른의 모습' 같은 거라도 주게 되는 것 같다. 아빠 어른, 엄마 어른, 할머니 어른, 선생님 어른을 주변에서 아주 자주 보겠지만, 그들과는 또 다른 '이모 어른'을 보게 되는 거다.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어른을 보게 되는것처럼, 자주 여행을 가는 이모를 또 보게 되는 거다. 다양한 어른을 알게 된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알게 모르게 나는 조카에게 다른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연대! 하하하하하.

지난 번에 조카네 집에 갔다가 술을 마셨는데, 조카2가 공룡 인형을 가지고 놀자고 하는 거다. 그래서 함께 노는데, 가장 무서운 공룡이 작은 공룡을 잡아먹는 놀이를 하더라. 그래서 내가 작은 공룡을 죄다 세워놓고 그랬다.


봐 조카야. 이렇게 큰 게 작은 거 공격하면 작은 건 이길 수가 없지만, 이렇게 작은 공룡 여러마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큰 공룡한테 덤비면 큰 공룡이 져. 하면서 작은 공룡 여러명이 큰 공룡에게 덤비는 장면을 연출했다. 결국 자기 혼자 서있던 큰 공룡은 쓰러졌는데, 


조카야 봤지?

하니까, 조카2가 응. 같이 공격하면 큰 공룡이 져.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게 연대야. 우리는 연대해야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섯살 짜리한테 내가 지금 술취해서 뭐하는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말하고 내가 빵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친하게 지내는 망고남은 지난 주말 대화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자기를 정의했다. 이 친구에게 페미니즘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페미니즘 감수성도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기도 해서, 이 친구가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라고 내가 생각해오긴 했지만, 이렇게 본인 입으로 직접 '나는 페미니스트다' 라고 발화한 적은 처음이라, 막 너무 좋았다. 이 친구가 애초에 성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알지만, 나를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또 나의 글을 읽고 나와 대화를 많이 많이 하면서, 나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장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지금 열심히 페미니즘 공부하는 나를 만난 게 아니었다면, 이런 나랑 대화하는 시간이 길었던 게 아니라면, 스스로 '나는 페미니스트다' 라고 말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이 어쩌면 인지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이런 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 ㅠㅠ 


이로써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남자사람 둘 모두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내 남동생쪽은 사실 갈 길이 아주 멀지만... 얘는 페미니즘 감수성이 썩 높질 않아...  -_-





어제는 매일 걷는 퇴근길이었는데, 이십년 가까이 해오는 퇴근길이었는데, 다른 날보다 유독 지쳤다. 지겨웠고 지긋지긋했다. 가도가도 지하철 역이 나오질 않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지하철 역에 도착했는데, 사무실에서 나온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나 있었다. 아, 싫다 진짜.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오는 게 또 수서행이야...나는 오금행을 타야 하는데...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지하철로도 한참을 가고나서 내려 집까지 걷는데도 또 오만년 걸리는 느낌... 너무 지겨워서 주저앉고 싶은 거다. 아 진짜 미치겠네, 너무 힘들고 짜증나네 ㅜㅜㅜㅜㅜㅜㅜㅜ 이러다가 퍼뜩 아?? 하고 생리앱을 켜봤고 그리고서 아..... 했다. 


너무 지쳐서 엄마한테 김치전을 부쳐달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가서는, 엄마와 남동생과 내가 셋이 식탁에 앉아 김치전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진짜 맛있었다. 엄마, 김치전 해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 맛있어, 먹고 싶었는데 엄마 없었으면 나는 귀찮아서 안해먹었을거야, 이러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퇴근길이 너무 지치고 짜증났다고 했는데, 엄마가 그랬다. 


야, 그럴 때는 집에 오지말고 근처 모텔 잡아서 자.



아???????????????? 내가 왜 이생각을 못했지?????????????????????? 그러면 되겠네????????????



뭐하러 힘든데 집에 와서 자냐, 그냥 회사 근처에 가서 자고 다음날 출근해. 



이러시는 거다.



우왓. 좋은 방법인데? 마침 회사 근처에 내가 아는 호텔도 있겠다, 다음에 지치고 지겨우면 그냥 호텔 가서 널브러져야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그런데 엄마 돈은???



하고 물으니 엄마는 '그게 문제지, 그러다 빚생기지' 이러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참나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는 이내, 야 근데 회사 근처에 호텔 잡으면 엄마한테 전화해, 하셨다. 너 혼자 자기 무서우니까 엄마가 가서 같이 자줄게, 라고. 아니 엄마...그러면 엄마가 오며가며 힘든데 뭘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돈이 많다면 회사 근처에 방 하나 얻어두고 싶다 진짜.



아 그러니까 생각나는 한 십오년 전쯤의 기억... 그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매일 회사 출근하는 길이 멀고 지쳐. 회사 근처에 방얻어줘' 라고 했더니, 반나절 후쯤에 '그 근처 사는 친구한테 방 하나 알아보라고 했어' 라고 답이 오더라. 내가 진짜냐고 물으니, '응 좋은 생각 같아, 나도 가끔 들를 수 있고' 이러는 거다. 그래서 내가 '안돼 알아보지마, 그러다 애생겨' 라고 했더랬지............... 




아, 돈 벌어서 강남에 빨리 집사가지고 망고남한테 청혼해야겠다. 강남에 집 없으면 청혼할 생각도 하지 말라 그랬는데.....힝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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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3-2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건 감상평을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조카와의 일상의 저격이라니...

그래도 연대에서 빵 터졌습니다.

역시 사람은 강남에서 살아야 봅니다.

다락방 2017-03-21 14:16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로건 보면서 펑펑 울었는데 막상 페이퍼로 쓰려니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는 않더라고요. 보는 동안 내내 막 감정이 최고치로 끌어올려졌었어요. 하핫.

다섯살 아이에게 연대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제가....아하하하하

블랙겟타 2017-03-22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다락방님 조카분에게 연대의 개념을 신선하게(?) 가르치셨네요 ㅎㅎ저도 ‘로건‘봤었어요. 예전엔 눈물을 쥐어짜낼려고 해도 안나오던게 요즘은 알게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ㅜㅜ 히어로 무비를 좋아라 하는데 서부극 느낌이 었던 이런 히어로 무비도 신선하더라구요. 그리고 로건이랑 또 봤던 영화가 일본영화 ‘아주 긴 변명‘이었는데요 혹시 기회가 되시면 추천드릴께요 ^^

다락방 2017-03-22 12:05   좋아요 2 | URL
저도 나이들면서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아요. 로건 보면서는 그냥 흐느꼈네요 아주 ㅋㅋㅋㅋㅋ [아주 긴 변명]이 블랙겟타님의 추천이란 말이죠? 오케이, 알겠어요. 기억해뒀다가 기회되면 꼭 보도록 할게요.

오늘이 수요일입니다, 블랙겟타님. 저는 금요일에 여행갈거기 때문에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들뜨고 있어요. 아하하하하. 어서 수요일도 가고 목요일도 가라, 그러면 금요일, 나는 바다로 간다!! ㅎㅎㅎㅎㅎ 이런 상태로 근무중입니다. 힛.

블랙겟타 2017-03-22 13:34   좋아요 1 | URL
우와~ 여행!이라니요 바다!라니요 ㅎㅎ 부럽네요. 다락방님, 이틀만 버티면 되네요 ^^

다락방 2017-03-22 14:24   좋아요 1 | URL
네네!! ^___________________^

[그장소] 2017-03-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한 친목카페의 아이 엄마가 제목을 라이벌로 해서 글을 올렸어요 . 아이가 새엄마 ㅡ라는 단어를 썼다잖아요 . 아 , 이 엄마는 이 단어가 대체 어디서 온건 줄 몰라 당황하다가 아이가 먼저 쓴 글의 내용을 보고 빵 터졌데요 . 저도 기발해서 웃었는데 ..우린 새엄마하면 계모로 생각하는데 아인 동물 가족 만들어주기 놀이를 하면서 돼지엄마 , 소엄마 따윌 쓰고 그날은 새 차례가 되선 새엄마라고쓴 거였데요 . 단어를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아이뿐 아니라 우리도 모르고쓰면 그와같은 인식의 영역이 되겠구나 했었네요 .

다락방 2017-03-27 08:32   좋아요 1 | URL
아, 새엄마... 저도 당연히 계모 생각했어요. 그런데 bird 의 엄마였군요. 아아. 자라면서 형성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오히려 사고를 제한하는 것 같아요. 새엄마를 다양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알고 있는 바로 그걸로만 인식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그장소] 2017-03-27 12: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 바로 그래요 . 아이들의 순수성도 어른의 고정관념으로 이렇듯 변하는 걸 보면요 .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일전에 한 개그프로에서 아동성추행에 대해 다룬 걸 보았다. 장동민이 어린 아이로 분한 코너였는데 할머니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걸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그 영상을 본 나는 정말 놀라고 끔찍했다. 대체 저게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웃기 위해 그 자리의 방청석에 와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 그리고 웃기 위해 그 프로를 보겠다고 앉아있는 많은 시청자들 중에 아동 성추행 피해자가 무수히 많을텐데, 저걸 어떻게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동 성추행의 피해자인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정말로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다. 어떻게 저게 웃기지? 저게 웃겨? 저게...웃겨? 난 아픈데? 무서운데?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개그 프로는 어른들도 보지만 아이들도 본다. 그 아이들 중에도 그 경험을 실제 '당하고'있는 아이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매체에서 '어쩔 수 없다'고 그걸 허락하는 장면을 내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할머니(할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를 조장하는 거 아닌가. 진짜 숨막히게 위험한 프로가 아닌가. 어떻게 저걸 개그라고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누군가의 아픔과 두려움을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있지?



이 책의 저자 '린디 웨스트'는 코미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코미디의 한 복판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걸 좋아했고, 그 재미있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 길로 근접하게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튕겨져 나온다. 너무나 많은 남성 코미디언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강간'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토론하는 티비 프로그램에 나가서 코미디의 소재로 강간이 쓰여서는 안된다, 너네가 그렇게 강간으로 코미디를 하는 동안 그 안에 누군가는 강간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간 코미디를 옹호하는 그 남자 코미디언은 사람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줄 안다고 말한다. 야, 강간 장면 나오는 영화도 있잖아, 그런데 코미디는 왜 안돼? 라면서. 어떻게 이 남자는 이런 걸 비교대상으로 갖다 놓은걸까?



남자 코미디언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잘못인 줄을 모른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는데, 그 강간문화(코미디)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는 그 후에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 린디 웨스트에게 매일매일 끊임없이 아주 여러 개의 트윗 멘션과 이메일이 날아오는 거다. 그것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강간도 당하지 못할 뚱뚱한 여자 주제에. 너도 강간 당하고 싶지?




린디 웨스트가 받는 그 수백개의 멘션은 그대로 강간 문화의 여실한 증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게 농담인 줄 알고 있으므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도 된다'는 남자 코미디언의 말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린디 웨스트는 그 멘션들을 죄다 묶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이에 린디 웨스트를 지지하며 강간 코미디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속속 드러난다. 이 생생한 증거 앞에 남자 코미디언은 한 방송에 나가서 '강간문화가 존재하긴 한다(자신들이 그러고 있다)'고 인정하기는 한다. 그 후에 코미디에서 강간을 다루는 것은 좀 더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러나 말끔하게 없어지진 않았다.



나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강간이 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걸 소재로 삼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왜 웃기기 위해서 그래야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강간을 소재로 삼아야 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약자를 소재로 삼을까? 그 웃음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코미디에서 강간을 소재로 사람들을 웃기려고 시도하는 것, 그리고 그 개그에 따라 웃는 것은 암묵적으로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는 것은, 실제 강간을 당한 피해자를 더 숨게 만든다. 더 숨게 만들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강간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범죄는 더욱 강해지고 피해자는 더욱 약해진다. 이런 시스템을 아주 충실히 만들어가면서 '야, 웃자고 한건데 왜그래?' 라니, 인간이 할 짓인가.




린디 웨스트는 자기가 뚱뚱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녀는 뚱뚱하다. 키가 175센치였나,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이라고 책에 밝히고 있다.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혐오스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날씬하게 보이고 싶어 애를 썼던 과거도 물론 갖고 있다. 그러나 날씬해 보이기 위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정말 날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한 뚱뚱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다. 잘못된 건, 뚱뚱한 사람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과 편견과 혐오였다.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래' 라고 하지만, 린디 웨스트는, 정말 그들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그렇게 자신의 정신에 스트레스를 주는 몸에 대한 참견을 멈춰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뚱뚱한' '여자'로 살아오면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싸우기 시작한다. 뚱뚱한 그녀가 어릴 적부터 '저렇게 되고 싶다'고 했던 마땅한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다음 세대의 롤모델이 되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당당하게 공개하고, 결혼식을 앞두고도 '그래도 결혼식이니까 막강 다이어트 해야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봐,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아름다워!



그녀가 당당한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도 실패를 했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의 옆에 껌처럼 달라 붙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장한다.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이 사랑을 더 견고히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페미니스트가 결점이 없는 인간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자신이 어딘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린디 웨스트가 선택한 페미니스트로 사는 방법이고, 그리고 자신의 그런 말과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가 뒤에 숨거나 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너 틀렸어', '그거 잘못됐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고맙다. 그녀는 그녀의 바람대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체가 너무 산만해서 초반에 읽기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꾸 웃기려고 하기 때문에 산만해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별 하나를 뺀다. 본문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괄호를 열고 닫으며 설명하는 게 많아서(물론 옮긴이의 주석도 있다) 그 점이 나의 취향에서 약간 벗어났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그녀가 공개한 결혼식 사이트에 들어가봤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대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실용적인 결혼 A Practical Wedding>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한 덩어리다. 마찬가지로, 나는 살덩어리로 된 인큐베이터 안을 돌아다니는 자궁도 아니다. 여성의 몸을 여성의 생식기관과 분리하려는 역겨운 선전-임신중절과 피임은 보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거짓말하는 것을 포함해서-과, 여자들에게 여성 자신과 몸의 크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동시에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제각각의 독립체라고 설득하려는 역겨운 선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가지 모두 "너의 몸은 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너의 자율권은 조건부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비만이 페미니즘의 의제인 이유다. (p.35-36)

대학 시절, 나는 아침마다 하워드 스턴Howard Stern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나는 하워드 스턴을 정말 좋아했었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내 확신이 공고해짐과 동시에 그에 대한 지지를 쓰라린 마음으로 어느 정도 철회해야 했지만 말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개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p.42)

사실 나는 누군가가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하는 이유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 자기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자기의 피를 공급받으며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고 자기의 미래를 재설정하는 무언가의 향방에 대한 결정권은 어떤 경우에도 자궁의 주인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타당한‘ 낙태나 ‘타당하지 않는‘ 낙태 따윈 없다. 임신한 사람 가운데 출산을 원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사람, 그리고 선택에 접근할 기회 및 지지를 얻는 사람과 장애물에 부딪히고 거짓을 주입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p.101)

여자인 나의 몸은 끝도 없이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되며,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진열대에 놓인 물건처럼 취급받는다. 뚱뚱한 내 몸은 풍자당하고 공공연하게 매도당하며 도덕적, 지적 실패로까지 여겨진다. 내 몸은 내 직업적 가능성과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고, 공정한 시험을 받을 기회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와 인터넷 악성댓글이 하나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조처, 즉 나의 사랑받을 능력을 축소시킨다. (p.106)

나는 세상의 이런 시각을 ‘전도된 신체 이형증‘이라고 명명했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뭐가 그리 역겨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똑똑하고 재미있고 타고난 재능이 많으며 사교적이고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걸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홈런이었다. (p.106-107)

끝내 체중은 줄어들지 않았고-상당한 정도로는 말이다- 간간히 일궈낸 작은 ‘성공들‘은 ‘일반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식생활 습관 덕분이 아니었다. 내 몸을 ‘고치는‘데 필수적인 제한 수준이라며 전문가들이 말해주는 방법들은 사실상 인간의 즐겁고 충만한 삶과 관련된 거라면 몽땅 제거해버리는 것들이었다. (p.115)

그들은 뚱뚱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어째서 올바르고 좋은 일인지에 대해 수많은 자극적 이유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가 혐오스럽고 성적 매력이라고는 없는 몸의 소유자임은 물론(고전적인 이유다!) 의료보험료가 줄줄 새나가는 구멍이라고, 비행기 팔걸이를 독차지한다고, ‘아이들‘한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절제하는 삶을 식탐과 맞바꾸는(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마른 사람들은 모든 측면에서 절제하는 단정한 삶을 사는 데 반해서) 어쩔 수 없는 무능력자이자 괴물같은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는 거다. 아, 우리의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걱정이 되기 때문이란다. 그들이 우리를 막 대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라는 거다(어떤 집단을 도울 때 실제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게 뭔지 아는가? 바로 그들을 척결하자는 주장을 펴는 쪽과 같은 말을 하는 거다). (p.134-135)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몸 크기가 아니라 활동량이 적은 생활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뚱뚱한 사람들은 다양한 외적, 내적 힘들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뚱뚱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빚진 거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다. 케이트 하딩Kate Harding과 매리언 커비Marianne Kirby가 『비만인 사람들에게서 얻는 교훈Lessons from the Fat-O-Sphere』이라는 책에서 쓴 것처럼, 건강은 무슨 도덕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p.136)

당신은 제 건강을 염려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제 건강을 걱정한다면 거기엔 제 정신건강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앞서 언급한 말들 때문에 제 정신은 지난 28년간 천천히 손상돼왔으니까요. 또한 당신은 제 건강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어쩌다 제 상사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제 의사는 아니니까요. 당신은 제가 뭘 먹고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혈압은 어느 정도며 당뇨병에 걸릴지 아닐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전혀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p.152-153)

낙인찍기는 이렇게 작동한다. 코미디언들은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다. 청중들은 웃는다.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공포가 사실임을-자신은 혐오스럽고 망가졌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확인한다. 헤르페스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가장 나쁜 본능-자신은 깨끗하고 행실이 올바르고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당화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헤르페스에 걸린 사람과 자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엔 누구나 동의한다. 만약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이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면-자기가 헤르페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해야 함과 동시에-과민반응을 일으켜서 재미를 망쳐버렸다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같이 따라 웃는다. 농담은 먹힌다. 너무 잘 먹혀서 아마 그 코미디언은 그런 농담을 하나 더 쓸 거고 말이다. (p.235)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우리가 다 같이 이따위 농담에 따라 웃고만 있는 거지?
나는 아함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너머로 말했다. "있잖아요, 저도 헤르페스에 걸렸을지 몰라요." (p.236)

"아마 이 청중들 중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헤르페스에 거려 있을 거예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은 웃는 척 해야 되죠. 정말 더러운 느낌일 거예요. 그냥 다른 농담을 쓸 수도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람들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나도 걸렸을 수 있죠."
아함과 나는 5년 동안이나 자잘한 파티 또는 자원 공연을 다니며 잡담을 주고받았지만, 그동안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아함이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는 쭉 내 글의 애독자였지만 그 순간이 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영원히 바꿔놓고 말았다고 말이다. "한 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는 정신이 멍해졌지."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늘 당신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었지만- 진짜, 진짜, 엄청나게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p.237)

오랫동안 나는 어떤 코미디 쇼를 보러 가든, 내 젠더를 겨냥한 수많은 야만적인 농담에 별 도리 없이 그냥 히죽 웃고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우리를 때리는 것, 우리를 강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이유 및 우리를 서열화하는 것, 우리를 성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미 비인간화된 우리 존재를 한 줌의 모욕적인 전형으로 쪼그라뜨리는 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런 농담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진보적인 대안쇼라고 하는 무대나 내 친구들이 예약한 쇼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코미디에서 여성혐오는 평범한 요소였다. 제발 내 아내 좀 데려가줘요. (p.240)

어떤 자원 무대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간밤에 여자 하나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섹스하는 동안에 얼마나 소리를 크게 내던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쉿, 너 이 강간을 살인으로 바꾸고 싶어?" (p.241)

내가 사랑하는 코미디언이 나한테 경보를 울리는-뭔가 인종주의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트렌스젠더 혐오주의적인-어떤 말을 했을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은 걸 거야. 그가 괜찮다고 했고 나는 그를 신뢰하니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르는 비밀 계약 같은 게 있는 게 틀림없어. 여자나 게이나 장애인이나 흑인 들이 그게 멋지다고, 농담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동의하는 계약 말이야.
하지만 브릿지타운에서의 그 순간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밀어닥쳤다. 그런 규칙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그런 계약을 누가 했냐고? 나는 아무 계약서에도 사인한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그건 보편적인 동의라기보다는 힘센 남자들이 자신들은 절대 겪을 일이 없는, 생명을 파괴하는-때로는 말 그대로 진짜 고문을 포함한-공포로 싸구려 웃음을 짜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설치해놓은 위장 폭탄에 더 가까워 보인단 말이지. 도대체 내가 왜 몇 시간 동안 ‘쌈박한‘ 여성혐오, ‘쌈박한‘ 인종주의, ‘쌈박한‘ 강간 농담에 환호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단지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한테도 중요한 이 산업에 끼고 싶어서? (p.241-242)

아함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내 세계에서 유일한 부분이 아니었다. 고통에 지친 나는 (그리고 나중에는 내 직업 탓에) 약간 그를 옆으로 밀쳐놓게 되었는데, 그 공간이야말로 정확히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p.332-333)

나를 속이다니! 5년이라고 해놓고. 나는 5년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2년 만에 프로포즈를 하다니.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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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7-03-2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의 표지에 손가락 하나 보태고 싶어요.
저 역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다락방 2017-03-27 08:3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요즘 어떻게 지내요? 열심히 글 쓰면서 지내고 있나요?
 
문학과 사회 116호 - 2016.겨울 (본책 + 하이픈)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아직 본책은 읽지도 않고 별책인 하이픈 <비평적-페미니즘적>의 일부만 읽었음을 우선 밝힌다. 그런데 이 별책이 참 좋다. 오늘 지하철안에서 읽으면서, 아 페미니스트들은 진짜 똑똑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나아가야할 방향을 끊임없이 찾으려고하고, 그것이 더 옳은 길임을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생각하며 또 이건 잘못이 아닌가, 하고 자기 반성도 더불어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알수록 세상의 어두운 면을 자꾸 보게 되지만, 그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더 밝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테다. 논문이라고 해야할지, 이 별책에서 '김주희'의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를 읽으면서 또 내가 더 밝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두운면을 또 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천히 읽고 두고두고 읽어야겠다. 그런데, 실린 글들 중에서 금정연 의 글은 내가 너무 실망했네? 본인의 글이라기 보다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만 했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실망스런 글이다... 어쨌든, 여태 읽은 부분까지는(별책의 34페이지..), 금정연 글 빼고는 다 너무 좋았다. 뒤의 글들을 안읽었고 그래서 어떤 글들이 나올지 모르니까 별 다섯을 주는 건 좀 보류하도록 하겠다. 아직 34페이지밖에 안읽었으니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뭔가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 '어? 이건 뭐지?' 하고 스스로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거나 확신이 없을 때, 이 책을 들춰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투갈에 장기체류(혹은 이민)하게 될 때 이 책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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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리라 그리고 성공하리라.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기

오늘 아침 알라딘을 열고 어떤 신간이 나왔나 검색을 해보다가 제목부터 흥미로운 책을 똭- 만났다. 오오, 이거 재미있겠는데? 하고 장바구니에 넣어두는데, 어라? 저자의 이름이 낯익다? 마리..루티?


















접힌 부분 펼치기 ▼

 

[책소개]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비판한 책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꽤 진보했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철저하게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그 믿음을 일반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공유하고 설득하려고 애쓴다. 여태껏 우리는 남녀에 관한 유해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데 수십 년을 바쳐왔음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터무니없고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근거와 논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성차이에 대한 결정은 그 자체가 이미 이념적이다. 지식 생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세운 가설이 그 주제를 어떤 틀로 바라보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조건화됨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연구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가치 판단’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 지식 생산의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심리학도 그렇다. 진화심리학은 젠더와 성에 대한 지배적 사회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악용되고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마리 루티라고? 꺅 >.< 

마리 루티래!!!



그렇다. 나는 마리 루티의 책이란 사실을 알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 루티라니,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읽고 인상적으로 다다다닥 리뷰를 썼던 바로 그 책, 《하버드 사랑학 수업》의 그 저자가 아닌가! 내 기억이 맞다면, 마리 루티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거칠게!! 반박했던 바로 그 저자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마리 루티의 이름을 클릭했고, 오오, 내 기억이 맞음을 확인했다. 내가 쓴 리뷰를 다시 읽노라니(먼댓글로 연결되어 있다), 아아, 마리 루티, 역시 좋구나! 싶은 거다. 크- 마리 루티가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에 대해 얘기한다니, 아아, 너무나 읽고싶다! 그렇지만..


오늘 집에 가면 내가 어제 주문한 책이 한박스가 와있을텐데???????????????????????????????????????????

그렇지만...이 한 권만 또 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버드 사랑학 수업》은 내가 중고로 팔고서는 후회하는 책이다.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서. 아아, 마리 루티의 책이라니. 제목부터 끌렸는데 이 책이 무려 마리 루티의 책이었어! ♡

















연애지침서에서는 남녀가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연애에서 성공하려면 남자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내가 가장 먼저 풀고자 하는 오해입니다. 나는 '남성 심리'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불변의 테크닉이란 없습니다. 서점에 이런 테크닉을 가르치는 책들이 넘쳐난다고요? 그것은 이런 테크닉이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보다 남녀가 각기 다른 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p.15)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자신의 책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인생에는 작은 기쁨과 큰 기쁨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작은 기쁨을 예로 들며 도넛 가게의 점원이 내 취향을 기억해주는 일을 언급했는데,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도 역시 작은 기쁨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하루종일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로 피곤했다. 퇴근 후에 동료랑 순대국에 소주를 마시면서 밝은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의 미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같은 것들. 그래도 좀처럼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동료는 내게 '오늘 피곤해보여요' 라고 하더라. 응 몹시 피로해, 라고 말한 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샤워를 하기 전, 이대로 잠들면 아침까지 우울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 우울함을 끌어안고 자는 것 같아. 나는 샤워하고 침대에 들려했지만, 침대에 드는 대신 거실로 나가 스트레칭을 했다. 팔을 쭉 펴고 다리를 쭉 펴고 허리를 쭉 펴고.. 내가 거실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사이 남동생이 나왔다. '내가 옆에서 티븨 봐줄게' 하더라. 나는 웃으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남동생은 텔레비젼을 틀고 소파에 앉았고, 나는 그 앞에서 또 팔을 쭉 펴고 다리를 쭉 펴고 허리를 쭉 폈다. 내친김에 복근운동도 좀 했다. 몸이 좀 풀렸다고 생각한 후에 남동생에게 '나 이제 잘게' 하고는 들어가 잤다. 몹시 피로했던 까닭인지 아니면 스트레칭의 영향인지, 아침 다섯시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음..어쩌다 또 이런 얘기까지 하게됐지?


어쨌든! 그래서!! 마리 루티의 신간이 나왔다는 거고 나는 넘나 신난다는 거다. 집에 가면 와있을 한 박스를 푸는 것도 작은 기쁨이며, 아아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 나왔어 하고 흥분하는 것도 역시 작은 기쁨이다. 작은 기쁨들이 삶을 계속해서 앞으로 끌고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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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3-1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의 페이퍼를 읽는 건 나에게 큰 기쁨!!!!


다락방 2017-03-15 11:07   좋아요 0 | URL
^________________________^

아무개 2017-03-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트윗에서 보고는
오오오! 했지만
당분간은 숨막히게 쌓여있는
녀석들부터 처치하는걸로!

다락방 2017-03-15 11:14   좋아요 0 | URL
저도요 ㅠㅠ 오늘도 집에 가면 한 박스가 와있을 예정이라 또 사면 안돼요 ㅠㅠ 아니 돈은 어디서 샘솟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책 읽을 시간은 또 어떻고. 페미니즘 책도 안 읽은 게 계속 쌓이고 있어요. 엉엉 ㅠㅠ

머큐리 2017-03-2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간 진화심리학의 편견에 빠진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중이죠.... 널리 소개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다락방 2017-03-21 15:25   좋아요 0 | URL
아니, 아직 저는 구매전인데 머큐리님은 벌써 읽고 계신단 말입니까! 빠르십니다. ㅎㅎ
저는 조만간 구입하려고요. 구입은 조만간 하겠지만 읽기는 언제 읽을지....( ˝)

머큐리 2017-03-22 13:38   좋아요 0 | URL
정희진 선생의 서문만 읽어도 그냥 쭈욱 빨려들어갑니다. 본문도 얼마나 매력적인데요..락방님 덕분에 ‘하버드 사랑학 수업‘도 읽어 보려구요..ㅎㅎ

다락방 2017-03-22 14:25   좋아요 0 | URL
우어어어엇 그렇단 말입니까?
저 매일매일 ‘내일까지만 참자‘ 이러면서 지름을 미루려고 했는데 아아, 머큐리님 덕에 오늘 지를 수도 있겠네요. 위기다, 위기!
마리 루티의 하버드 사랑학 수업을 저는 매우 좋아했으므로 이 책도 당연히 좋을 것 같지만, 이렇게 머큐리님이 직접 오셔서 좋다 말씀해주시 뭐랄까, 막 뿌듯하고 좋고 그러네요? 히히히히히 히죽히죽 ^__________^

버벌 2017-03-3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얼~~~ 장바구니 장바구니.. 내 통장 이미 텅장 ㅠㅠ 하지만 장바구니 ㅠㅠ

다락방 2017-03-31 11:27   좋아요 0 | URL
저는 이미 샀어요. 그렇지만 언제 읽을지는 역시나 알 수가 없어요. 아하하하하하 그나저나 연필 굿즈로 판다는 걸 버벌님 덕에 알게 되어 장바구니에 가득 넣었습니다만??
 

내가 흠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실수한 적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한다. 나의 어떤 과거, 과거의 어떤 발언이나 행동들은 누군가에게 말하기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렵다. 나는 농담처럼 새롭게 사귀게되는 연인들에게 '정치할 생각이라면 나를 만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지만 나는 털면 먼지뿐이야' 하고. '네 정치인생에 나는 치명적 약점이 될거야' 라고 말하며 정치할거면 나랑 헤어져야 해, 를 말하곤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뭐 최근에는 친구중에 국회의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하는데, 친구라는 포지션이면 내가 딱히 그의 약점이 되진 않을 것 같아서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또 알게 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과거의 나 자신이다.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던 나... 그때도 물론 나는 늘 당당했고 내가 하는 말에 자신이 있었으며 당시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닥치는 대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내가 나를 알기도 전부터 이미 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닫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때 괜찮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빻은 인간이었는지, 여성혐오에 일조하는 인간이었는지를, 토요일에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여자친구와 토요일에 대전에 갔다. 대전에서 우리 무얼할까, 하다가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재상영한다는 걸 알게되어 우리는 고민없이 이 영화를 보자! 했다. 둘다 아주 어릴 적에 봐서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언젠가는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 십대일 때 이 영화를 봤는데, 다시 보기 전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은, 브래드 피트가 지나 데이비스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그가 너무 근사했다는 것과, 드라이브 중에 치근덕대는 남자의 트럭을 터뜨린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절벽을 향해 운전하던 장면이었다. 그때 당시에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여러명과 함께 이 영화를 봤었더랬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저 장면, 성희롱 했다고 트럭 폭파시킨 장면에서 나는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저렇게까지 해' 라고 했던 거다. 그때 우리반 반장(여고였으므로 당연히 여자였다)이 내게 화를 냈었다. '저게 왜 심하다고 생각해? 저 남자는 잘못했는데?' 라고 해서 내가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트럭까지 터지게 하면 어떻게 해' 라고 했던 거다. 아아, 과거의 나여.... Orz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반장은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깨닫고 지금 공부하는 많은 것들을, 반장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얌전한 아이를 보고 내가 무심결에 '여자중에 여자' 라고 표현한 거다. 그러자 반장이 내게 그랬다.

'여자다운 게 뭔데?'

나는 갑자기 그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같은 거 있잖아..얌전하고....... 라며 얼버무리며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아, 과거의 나여.... 진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 반장은 날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곳곳에 나같은 사람이 일조했다고 생각했겠지. 그 당시에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페미니즘에 대해 1도 몰랐고, 철학에 대해서라면 더더욱이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장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철학적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아, 반장, 너는 지금 어디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니?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해했니? 하아. 부끄럽다. 반성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 되어있는걸까. 그때의 멍청한 발언과 행동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는가? 라고 물어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 사실을, 아직도 내가 많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아, 나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델마(지나 데이비스)'는 강압적인 남편과 함께 산다. 친구인 '루이스(수잔 서랜든)'과 짧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데 그 말을 차마 남편에게 하질 못한다. 남편이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큰 소리로 말해서도 안되고 남편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삶을 사는 델마는, 결국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남편이 먹을 저녁을 전자렌지에 넣어두고 쪽지를 써둔 채, 루이스와 여행을 택한다. 그들은 어느 산장으로 놀러가 이틀밤을 지내고 오기로 했다.

차를 몰고 가는 길, 중간에 델마는 쉬었다 가자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 펍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술을 한 잔씩 하다가 찝적대는 남자를 만난다. 루이스는 그가 다른 곳으로 가길 바라고, 그래서 '나는 지금 친구와 얘기중이다' 라고 그를 거절하지만, 델마는 결국 그와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춤을 춘다. 깔깔대고 웃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탓인지 어지러워져서, 루이스가 화장실 간 사이에 바람을 쐬러 가자는 남자의 말에 함께 주차장 으로 나가는데, 거기에서 남자로부터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지 말라며 남자를 거부하다 남자의 뺨을 때렸는데 돌아오는 건 남자로부터의 연이은 폭력이었고, 그렇게 얼굴도 얻어터진채로 차 위에서 뒤집어져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루이스가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와서 그만두게 한다. 

"똑바로 들어.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좋아서가 아니야."


아, 진짜 가슴 아픈 명대사가 아닌가! 남자는 총 앞에서 강간을 멈추긴 했지만 그녀들을 욕하며 내 거시기를 핥으라고 한다. 이에 폭발한 루이스는 결국 그자리에서 그 남자를 죽인다.




그들의 여행은 이제 도망이 되었다. 델마는 루이스에게 경찰에 신고하자 말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네가 술을 마시고 남자랑 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그런 이상 남자가 너를 강간하려고 한 건 네 책임으로 사람들이 몰아갈 것이다' 라는 걸, 루이스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뉴욕 포스트》같이 저속한 신문들은 테스의 10년 전 사진을, 즉 뜨개질 클럽 시리즈가 처음 출간될 무렵의 사진을 실을 것이 뻔했다. 그때 테스는 이십대 후반이었기에 짙은 금발 머리를 길게 길렀고, 미끈한 다리를 뽐내려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뒤꿈치 부분이 끈으로 된 하이힐을 신곤 했는데 어떤 남자들은 그 구두를 '남자 꼬시는 신발'이라고 불렀다(물론 그 거인도 예외일 리 없었다.). 테스가 이제는 나이를 열 살이나 더 먹었고 몸무게도 9킬로그램이나 늘었고, 성폭행을 당할 때 거의 촌스러울 정도로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신문에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세부 사항은 삼류 신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의 문장 자체는 점잖을지도 모르지만(행간에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살짝 흘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함께 실린 테스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진짜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가 바퀴를 발명하기도 전에 만들어졌을 이야기를. 여자가 야하게 하고 다녔네……당해도 싸지, 뭐. (빅 드라이버, p.271-272)





델마가 술을 마시고 남자와 웃고 떠들며 춤을 춘 건 사실이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섹스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아니'라고 말했고 그렇다면 남자는 '아니'라는 말을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 장면에서, 루이스가 그 남자를 쏴죽이고 델마가 울던 장면에서, 자꾸만 내 안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왜 그렇게 남자의 찍접댐을 받아주지?' 라는. 델마는 계속 그랬다. 브래드 피트를 길에서 만났을 때도 좋아서는 저 남자를 차에 태워주자고 한다. 결국 브래드 피트는 델마와 루이스의 전재산을 가지고 튄다. 이 모든 나쁜 일에 자꾸 델마가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원망이 내게 끼어드는 거다. 게다가 그녀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고 나약하게만 보인다. 루이스는 '울지만 말고 생각을 좀 해' 라고 델마에게 말하는데, 나야말로 델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거다. 아, 저 성격 너무 싫다, 정말 싫어, 저런 사람하고 친구하고 싶지 않아, 라고 나는 델마를 평가하고 있었던 거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아.. 갈 길이 얼마나 먼지...



그런데!



중간에 델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얘기한다. 18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4년을 교제하고 결혼한 사실, 자기 인생에 남자라고는 남편 하나뿐이었던 사실을. 그런데 그 남편이, 하나밖에 모르는 그 남자가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가사노동만 하며 남편의 출근을 뒷바라지 하고 퇴근만 기다리는 델마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을까? 놀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가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지 못한 상황속에 어릴 때부터 놓여진 델마는, 어떤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델마가 나약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싫었다.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고 생각할 줄 모르는 채로 자신에게 다가온 위험도 알아채지 못하는 델마가 너무 싫다고 생각했다. 민폐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가 일을 망쳤잖아! 라고. 그러나 델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델마를 보면서 이 모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가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었던 것은, 한 번도 그녀에게 문제를 해결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생각과 행동은 제한되어져 있었고 제약받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누군가 대신해주는 삶을 살아온 델마에게 그런 나약한 성격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본성은 아니었던 거다.



나는 여자(그리고 남자도)의 성격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됐다. 델마는 여행을 하면서, 도망을 치면서,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문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가 어땠는지, 그리고 자신의 과거의 삶이 어땠는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그러므로 델마의 성장영화이기도 했다. 루이스와 함께 하며 여러 사건을 겪은 델마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루이스와 국경을 넘기로 결심하고는,



나는 어느 지점을 이제 지나온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라고 말한다. 아아. 그녀는 이제 그녀로서 자리한다. 갇힌 그녀가 아니고 억압받는 그녀가 아니고, 온전히 그녀가 되었다. 그전까지의 삶의 모든 패턴과 방향을 누가 대신 결정해주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녀가 직접 결정한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옳다. 그녀는 남편과의 통화에서,



당신은 내 남편이지 내 아빠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으로 들어가며, 델마는 이 모든 일들, 지금의 위기들이 자신때문에 일어났음을 루이스에게 사과한다. 그때 루이스가 그런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때, 바로 그때, 루이스가 그렇게 말한 그때, 그제서야 갑자기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아, 맞아, 이게 왜 델마 잘못이야? 이게 왜 델마 잘못이냐고. 그런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델마를 원망하고 있었잖아 맙소사! 델마를 강간하려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돈을 모두 훔쳐가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의 인생이 이렇게 절벽으로 향하진 않았을텐데! 애초에 그녀를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가둬두고 살았던 남편이 없었다면? 게다가 문제의 그 트럭 폭발 장면! 대형 트럭의 운전사는 길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는 계속해서 희롱한다. 섹스의 몸짓을 표현하고 입으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그를 무시하던 델마와 루이스였지만, 결국 그를 응징하기로 한다. 가지고 있던 총으로 트럭의 바퀴를 쏴버리다가, 결국 델마가 먼저 그 대형 트럭의 짐칸을 쏜다. 거기엔 기름이 들어있었던건가 보다. 펑-펑- 연이어 커다란 불길과 함께 터져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트럭이 폭발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자들을 향해 계속 욕을해대지만, 앞으로는 여자들을 보고 성희롱 하려고 할 때 주춤하게 될거다. 트럭을 쏴버리는 여자일 수도 있어!! 이 장면에서 나는 반장을 떠올리며 반장에게 내 멍청함을 사과하고 싶어졌다. 반장, 내가 그때 너무 멍청했지. 저 트럭을 폭발한 건 하나도 심하지 않아. 저랬어야 해. 만약 저기서 곱게 돌려보냈다면, 저 남자는 그 뒤로도 다른 여자들에게 혀를 날름거리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았을 거야. 반장, 내가 개념녀 프레임에 갇혀있었던 것 같아. 아아, 너는 그때 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니.




델마는 루이스에게 그때 자신의 강간범을 죽여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만약 그때 네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놈을 살려뒀다면, 그 후의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가 너무 끔찍하다는 거다. 내가 쏘지 못한 게 후회될 지경이야, 라고 델마는 말한다. 루이스와 델마는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서 서로에게 고마워한다. 이 길에 네가 동행해서 다행이라고. 결국 이 두 명의 여자앞에 커다란 총을 든 경찰 수십명이 찾아든다. 마치 그녀들이 테러를 일삼았던 것처럼, 그들이 일제히 총을 쏠 준비를 하고는 그녀들 앞에 나타났다. 이에 남자 경찰 한 명이, 이게 무슨 짓이냐 말리지만, 수십명의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여자란,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처단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델마는 루이스에게 말한다. '잡히고 싶지 않다'고. 잡히고 싶지 않아,는 이 체제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 다시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나는 이미 어느 지점을 건너왔고 다시 돌아갈 순 없어, 를 모두 담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의 결정을 한다.




내 옆에 친구는 이미 흐느끼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에게 고마워하는 동안,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 좋은 영화를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별 감흥을 받지 못했다니 어린 시절의 내가 원망스러웠고 후회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였는데, 내가 몰랐다, 그때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이, 사소하게 그리고 엄청나게 여자들을 압박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과거의 나는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봤다.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고 친구와 나는 극장을 나왔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였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왜이렇게 남자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지?"



시종일관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그랬다. 그랬는데, 그게 지금 우리의 삶이었다. 강압적인 남편과 강간하려는 남자, 믿어주지 않는 경찰, 돈을 뜯어가는 남자,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을 일삼고 성적대상으로 보는 남자. 루이스의 남자친구는 그중 '나은' 남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자, 테이블 위의 모든 것들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여자를 '때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칠게 변하는 것은, 지금 세상의 소위 '그나마 착한 남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술을 마시면서도 함께 호텔방에 들어가서도 영화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여성혐오가 남아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그렇게나 공부를 하고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나라는 인간. 친구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델마와 루이스를 함께 본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얘기했다. 나는 내 안의 빻음을 들여다보고 다시 성찰하기 위해 이 여행을 갔는가보다.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하고 지금의 나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간임에 절망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수확이었다. 그래, 내가 그간 공부를 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거야. 만약 내가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나 분명하게 메세지를 전하고 있음에도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더 읽고, 더 보고, 더 듣고, 더 이야기하고, 더 써야 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또 쓰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빻음을 수시로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많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나의 빻음을 지적해줄거라 믿는다.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절대 아니라고 했을 때를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떠올라 부끄러울 뿐이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하면 또다시 부끄럽다. 결국 내가 외면받을 것이란 두려움이었고, 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문제나 일으키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란 두려움이었으며, 이런 나를 이 사회나 친구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었다. (p.15)







대전 아트시네마는 몇 년만의 재방문인데, 오오, 티켓이 원래 이렇게 예뻤던가?




게다가 고양이가 있는 극장은 처음이다!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부끄러웠지만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명백하게 전달하는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건 분명 큰 기쁨이다. 정말 좋았다. 내내 생각날만큼. 더 공부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더해야 해, 더. 나는 계속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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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3-13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저 극장까지 찾아오셨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극장인데 ^^
델마와 루이스는 마지막 장면이 정말 충격이었지요.
요즘 알라딘에 페미니스트 관련 리뷰와 페이퍼가 많이 올라오는 것을 읽고 있으면 이제는 세상이 좀 바뀌어갈 것 같은, 진짜로 바뀌어갈 것 같은 희망이 조금씩 생길라고 그래요.

다락방 2017-03-13 11:46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2데이즈 인 뉴욕]을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봤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요. 줄리 델피 나오는 영화였다고 기억하니까 그게 맞을 것 같아요. 그때는 소규모극장 뭐 없을까 찾아내서 알게되었고, 지금은 ‘거기에 그거 있어‘ 알고 있어서 미리 어떤 영화 하나 검색해보고 갔어요. 극장 의자는 너무 낡았지만, 화장실도 별로 안좋지만, 극장 너무 예뻐요. 게다가 이번에 이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네, 조금씩 바뀌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저도 멈추면 안된다고 생각하고요.
:)

레삭매냐 2017-03-13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델마와 루이스 아주 오래 전 작품으로 비디오
로 봤었는데, 극장에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티켓은 정말 멋지네요.

다락방 2017-03-13 11:47   좋아요 2 | URL
네, 그랜드캐년이 정말 근사하더라고요! 중간에 해뜨는 풍경을 감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멋있었어요. 그보다는 사실 내용적으로 제가 어릴 때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극장에서 보게 되니 완전 푹 몰입해서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티켓 너무 예쁘죠? 티켓 받으니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헷 :)

moonnight 2017-03-13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옛날에 봤을 때 델마가 너무나 싫었어요. 친구 잘못 만나서 루이스 인생 망쳤다고 생각했지요=_=

다락방 2017-03-13 11:59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이 되어서 민폐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아 민폐다 민폐...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델마 본래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 모든 일들이 다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점차로 성장해 나가고 루이스 옆에서 힘이 되어줘요. 아아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문나잇님!!

[그장소] 2017-03-1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쾌해요 . 트럭을 쏴버리는 여자 일수도 있어 ㅡ라니!!^^ ㅎㅎㅎ 영화를 눈 앞에 놓고 다시보는 기분이네요! 아~ 또 기꺼이 봐야겠어!!

다락방 2017-03-13 13:47   좋아요 1 | URL
네, 그장소님. 다시 보기에 충분히 정말 충분히 좋은 영화입니다!! >.<

[그장소] 2017-03-13 14:03   좋아요 1 | URL
여성인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 자기보호를 동시에 놓고 갈등하던 순간들이 우리에게 있었기에 깨달음도 더불어 큰 게 아닌가 해요 . ^^
이번엔 제대로 다락방님 그 느낌 잘 따라가며 다시 한번 볼게요!^^ 추천 고마워요!^^

다락방 2017-03-13 14:51   좋아요 1 | URL
네, 그장소님은 어떻게 보실지 궁금해요. 보시게 되면 후기 꼭 부탁드릴게요!!

[그장소] 2017-03-13 15:42   좋아요 1 | URL
오케이 오케이~ 오랫만에 영화 리뷰나 해볼까요!^^ 열중 ~ 쉬엇~!! 하고 봅니다~^^

레와 2017-03-13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장면장면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요. ㅠ_ㅠ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고 글 써줘요. 다락방.
나도 다락방 글 읽고 생각하고 공부할게! ^^


다락방 2017-03-13 16:37   좋아요 1 | URL
응 그래요 그래요. 우리 계속 얘기하면서 앞으로 나아갑시다. 멈추지 않을게요. 불끈!!

건조기후 2017-03-13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도 부족하지만 예전에 정말 얼마나 개소리를 하고 다녔는지. 말도 못 하게 멍청했던 언행들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에 열이 훅 올라요. 멍청이면 멍청이답게 멍청했던 말들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이지 기억은 또 왜 이렇게 생생하게 하고 있는지... 환장이에요 ㅜ

델마와 루이스 장면장면 눈에 선하네요. 다시 보고 싶어요. 저도 어렸을 때 봤던 거랑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다락방 2017-03-14 08:10   좋아요 1 | URL
건조기후님. 그러니까 기억이나 나지 말것이지 제가 했던 멍청한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다 기억나서 심히 괴롭습니다. 이제는 안그래야지 다짐해보지만 제가 어디서 어떻게 또 멍청한 말과 행동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요. 그나가 그때의 말과 행동이 멍청했다는 걸 이제라도 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반성을 모르는채로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어쩔뻔했어요...하아- 갈 길이 멉니다, 건조기후님. 우리 같이 갑시다.

제가 너무 어릴 때 봐서 델마와 루이스를 너무 제대로 못본 것 같아요. 다시 봐서 좋았어요.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좋네요.
:)

비연 2017-03-13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 가보고 싶네요..^^

다락방 2017-03-14 08:11   좋아요 1 | URL
상영관 안은 진짜 낡았거든요. 의자도 천 다 찢어지고... 화장실에서 변기 물내리면 바깥까지 소리가 들리고요. 그런데 저렇게 예쁘게 꾸며놓고 고양이도 있고 티켓도 예뻐서 오 예쁘다, 했어요. 후훗.

블랙겟타 2017-03-17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들렀어요. 사실 델마와 루이스라는 영화가 제목만 알지 무슨내용인지 몰랐거든요. 마침 오늘 학교내에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이 있어 첫 모임을 오늘 하고 왔는데 이 영화 이야기 하더라구요. 나중에 영화도 보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그때 이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계속 배워야될 것 같아요. ^^;;

다락방 2017-03-19 23:44   좋아요 2 | URL
블랙겟타님, 학교 내에 페미니즘 독서 소모임이라니, 그 모임에 참석하신다니, 와우! 멋져요!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거기에 참석하신다는 것도 정말 근사합니다. 헤헷. 공부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계속계속 열심히 공부합시다.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더라고요. 가장 먼저 얘기되어야 할 작품이고 또 함께 봐야할 작품임에 틀림없어요. 다 보신 후에 어떤 감상을 갖게 되실지 궁금해요. 공부하면서 틈틈이 들러 얘기해 주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