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의 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남동생, 조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숨쉬듯 자연스럽고 또 그들로부터 그 말을 듣는 것도 그러한데, 왜 연애할 때 애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말을 해버리는 순간 내가 약자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나는 내가 사랑에 인색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사랑이란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도무지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을 때, 그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서운함이 아니라 '화'가 날 때,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서 관계를 유지시키는걸까? 그 화가 온통 나를 지배할 때,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일상을 유지하는걸까?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 계속해나가는 걸까?


보통 부정적인 감정, 이를테면 우울함이라든가 슬픔, 화 같은 것들은,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옅어지기 마련인데, 지독한 화는 자고 일어나서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내게 기쁨과 안정만 선사하진 않는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상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간혹 부정적 감정을 주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다들 어떻게 견디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걸까?


어제 SNS 에서 정희진 의 사랑에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였고, 강의를 옮겨온 거였다. 일단 링크하겠다.


“사랑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마침 정희진의 《낯선 시선》을 읽는 중이었다. 소설은 못읽겠다 싶어 부랴부랴 고른 책이었다. 오호라, 어디 읽어보자 하고 저 기사를 읽었는데, 와, 정말 너무 좋은 거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고,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저는 밀당을 아주 싫어합니다. 일단, 밀당의 전제는, 더 사랑하는 쪽이 더 헌신하는 쪽이 약자라는 거죠. 연애에서'조차' 권력자가 되고 싶은 거죠. (중략)

제가 밀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노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약간, '저질 권력투쟁'이라고 할까요? 

(중략)

밀당에 능해서 이룬 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어요? (기사中)



친한 친구들과 밀당에 대한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연애에 있어서 밀당은 필요한가, 하는 거였는데, 친구는 그때 내게 '난 대체 밀당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랬다. 나 역시도 밀당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해야하지? 내가 너를 사랑하고 니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밀당이 필요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굳이 밀당 같은 거 에너지 소모 하면서 할 필요 없지 않나?



정희진 쌤 강의를 들으면서도 느낀건데, 정희진 쌤은 '무지한' 남자를 엄청 싫어한다는 느낌이 든다. 해서, '무식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강의중에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문장 보니 빵터진 것.



명언이 있어요.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어서 혹은 무식해서다'. 말 많은 남자가 훨씬 낫습니다. 말 없는 남자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요. (기사中)



물론 말 많이 한다고 해서 화제가 풍부하거나 유식한 남자인 것도 아니다. 입만 열면 개소리를 나불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 그러고보니 지난번 회식 생각난다. 회식 중에 소주회사 판촉하는 여자직원이 와서 '우리 소주를 시키면 선물을 주겠다'고 하니까, 남자 부장이 예쁘다고 환호하며 '우리한테 술 한잔씩 다 따라줘요' 이러는 거다. 아 씨발.. 이게 지금 뭔소리야. 그 분은 정말 따르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부장에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 분이 우리 술을 왜 따라요?" 하고는 그 분께 "괜찮아요, 따르지 마세요" 했더랬다. 아 딥빡침이...입을 다물어야 할 때를 아는 자는 얼마나 소중한가. 입에서 똥이 나온다 진짜.



그리고 이 모든 강의의 핵심은 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연애상담을 많이 하잖아요? 저는 이미 상담이 필요한 상태라면, 사랑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면 상담이 필요 없죠. 또 상담을 해 봤자, 자신이 변하든 상대가 변하든 해야 하는데, 그게 상담으로 가능한가요? 자기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저도 연애 상담을 많이 받는데, 실은 정보를 제공할 뿐이에요. 좋게 끝내고 싶다? 좋으면 왜 끝나겠어요? 상대방의 진심? 그런 건 없어요. 모든 것은 행위가 말해줍니다. 행위로만 판단하면, 의외로 인생이 편해집니다. 쓸데없는 기대와 고민이 사라지니까요. (기사 中)



아... 뭔가 진짜 훅 들어오는 말이지 않은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좋으면 그게 왜 끝나나... 행위가 말해준다. 그래, 팩트는 그 '행위'에 있지 않은가. 행위를 엄연히 저질러놓고 거기다 대고 왜그랬을까를 고민하는 건..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아- 행위로만 판단하면 인생이 편하진다는 데 내가 적극 동의하지만, 그렇지만, 아아, 또,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 행위로만 판단하면 결정이 쉬워지지만, 그런데, 거기에 나의 감정이란 것이 섞여 버리니까, 그래서 어려운 거잖아 ㅠㅠ

안되는 줄 아는데, 그래서 놓자니 너무 좋은데... 막 이렇게 되는 거잖아??? 어휴...








아무튼 이 훌륭한 글을 읽고 너무 좋아서 출력도 해서 읽고(이러면 안되는건가??) 밑줄도 긋고, 그래, 사랑을 공부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간 내가 사랑을 넘치게 가진 사람이었고 또 표현도 잘하는 사람이어서, 사랑에 대해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아직까지도 사랑은 직접 빠져가며 몸으로 부딪쳐가며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그래 공부해보자, 공부가 어떻게든 도움이 될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는 사랑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고, 잘하고 싶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책도 어제 주문했고(응?), 또, 이 시대 최고의 책, '이유경'의 《잘 지내나요?》를 펼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인 59페이지에서부터 65페이지까지를 읽었다. 훌륭한 책이라는 것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아직 이 책 안읽은 분들이라면, 강하게 일독을 권한다.


















나는 사실 《낯선 시선》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건데...

내가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여러 명의 강의를 들어봤지만, 정희진 쌤 강의가 제일 좋았다. 들을 때마다 사고가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확- 들었던 거다.

이즈음의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기분으로 소설 읽었다가 젖은 휴지처럼 널브러질까봐, 정희진 쌤 책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한없이 축 가라앉지 말고, 똘망똘망 깨어있자! 하는 기분으로.

아..멋져..... 누가? 내가!

나는 자꾸 나를 제정신에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줄 놓지말자, 다짐하고, 해결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자, 하는 것이다.



















역시나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짚어주는데, 마지막 부분의 '배려'에 대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 광고가 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나름 문제의식을 느끼고 위원회와 인권 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마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해자(약자)를 배려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노약자석의 경우 장애인, 임산부, 노인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상대방이 선심을 베푼다고 주장하며 고마워할 것을 요구한다면 불쾌감을 넘어 억울한 일이다. 배려나 관용은 '잘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베푸는 선의가 아니다. 배려는 동등한 적대자(適對者 혹은 敵對者)와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윤리다. (p.284-285)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인생이라면, 배려는 우산을 독점하고 선별해서 우산을 나눠주려는 권력의 만행을 도덕으로 포장한 행위다. 정말 배려하고 싶다면, 원래 보장된 남의 권리를 시혜로 둔갑시키지 말고 자기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 타고난 타인의 권리에 대해 자신이 판관 노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 분별력, 주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p.286-287)




진짜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였다.




저 많은 문장들은 밑에 밑줄긋기로 첨부하도록 하겠다. 첨부하는 틈틈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고민도 좀 해보고. 


이 책을 출근하는 도중 지하철안에서 다 읽을 것 같아, 다음 책은 뭘로 할까, 책장앞에서 고민하느라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왔다. 으이크, 평소보다 늦은 지하철을 타겠네, 했는데, 정작 책은 고르지 못한 채로 그냥 나왔으며, 한참을 서성이느라 지하철도 늦은 걸 탔다. 회사가서 골라보자, 내심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회사에도 책이 많이 있다는 뜻...이 맞다. 킁.



여기나 저기나 안읽은 책들이 쌓여있어. 아하하하하.

근데 어제 막 책 또 샀고..

우산 네 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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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식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앎은 그 과정 자체다. 짧은 글도 교차 확인이 필수적인데, 대조해서 점검할 다른 지식이 없다면? "국사가 어떻게 다양성이 가능하냐?" 라는 국사학자의 말은 정치인의 제스처라면 모를까, 지식인으로서 놀랄 만한 발언이다. 지식은 가르치는(‘주입‘)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합의 과정이다. 다양성은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p.35)

유명 인사인데 잦은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출판사 관계자와 통화중에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하다면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했더니, 남성인 그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선생님은 한참 모르시네. 우리나라는요, 병역만 아니면 다 컴백해요. 무슨 일을 저질렀어도 병역(비리)만 아니면 됩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큰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승준 봐요. 지금 벌써 몇 년째예요? 그 사람이요? 1년 안데 다시 책 냅니다. 두고 보세요." (p.37)

특권층의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는 우리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부랴부랴 ‘국민은 모두 병사‘라며 국민개병(皆兵) 제도를 실시했다. 이는 국민의 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남성들은 신분과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환상을 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사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병역이 공평하기 시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병역과 관련해서 국민은 3등분 된다. 군대에 안 가는 사람, 가기 싫은데 가야 하는 사람, 못 가는 사람(여성, 장애인……). 특히 ‘못 가는 사람‘은 비(非)국민으로서 배제된 것인데 마치 면제된 것처럼 간주된다. 평등은 이 세 그룹 사이의 관계 분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병역 비리 논란은 언제나 그들만의 리그, 즉 그야 하는 남성과 안 가는 남성들 사이의 문제로 축소된다. (p.39)

분노의 이유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한 사회의 성숙도와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다. 병역 비리에 대한 분노가 압도적이고 대상에 따라 선별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혐오 현상이다. 특히 다른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소하게 취급되기 쉽다. 앞서 언급한 지인의 말대로 "군대 문제만 아니면 다 용서되는" 경향은 군대 비리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자숙의 기간‘과 별도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두 번째 기회‘는 중요하다. 주가 조작, 불량 식품 생산, 논문 표절, 배우자 구타 같은 이유로 ‘13년 동안‘ 사회 활동, 아니 입국을 막는 경우가 있는가.
똑같은 잘못을 해도 매장당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이와 관련한 억울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황교안 씨는 군대에 가지 않고도 승승장구해 왔다. 그는 가정 폭력 옹호 발언, 공안 검사 경력까지 ‘청문회 비리 종합 세트‘에 새로운 목록을 추가했다. (p.39-40)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p.51)

우리는 상대는커녕 자신조차 모른다. 우리가 강대국을 이용한다는 자신감은 부풀려진 자아, 망상적 자기애, 도취에 가까운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관은 강자를 이용하려는 약자의 자세가 아니라 강자에 대한 동일시 욕망, 허세와 착각에서 나온다. 분명한 점은, 강자는 이러한 약자의 자기 분열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60)

이즈음 배우 신성일 씨의 인터뷰를 보게 됐다. 그의 인생은 개인사라 치고, 그가 문제의 핵심을 요약해주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독립된, 개별적 인격체다. 사랑은 결혼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p.62)

특히 ‘여성 혐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성 혐오라는 대칭적 용어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혐 대 남현‘이라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분법은 A와 not A라는 타자화의 문법으로, 평등으로 여겨지기 쉬운 속임수다. 미소지니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미소지니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기 힘든 단어다.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 남성 위주 사회는 너무 오래된 역사라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남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를 자각하고 여성이 자신의 이중 노동,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혐오인가? (p.83)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게급, 지식 자원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은 성희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에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적‘인 사람들은 목소리 큰 여성들, 이동권을 주장하며 거리를 점거한 장애인, ‘일반인‘과 몸 상태가 다른 노숙인 같은 소수자들이지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갑‘들의 권리는 제도로 보장되어 있어서 가시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p.94-95)

한편, 흥미롭게도 색은 실제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연속적, 상호 의존적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주노초파남보가 같은 색의 엷은 변화이기 때문이다(무지개 깃발은 동성애 문화의 상징). 빨강에서 시작하지만 파랑으로 끝나면서 보라색으로 다시 만난다. 마치 낮과 밤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거쳐 계속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p.104)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p.139-140)

2조 원(갤럭시노트7 폭발사건 리콜비용)을 다른 곳에 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 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 강사 월급제, 택시 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 폭력 피해 여성 쉼터,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 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 잠시 ‘로또‘를 꿈꾼다.
물론 그 돈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돈이고, 5와 7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2조 원. 이것은 과학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향후 자본주의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내가 가장 궁금한)도대체 인류는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가 인간을 우러러볼 것인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과학 기술 발달의 목표는 편리함인가? 대안적 편리 개념은 없을까. 어디까지 발전해야 성이 찰까. 오래된 질문조차 멈춘 시대다. (p.144-145)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범에 부합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례식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가족 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 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p.166-167)

나는 연년생 삼 남매 집안의 큰딸이다. 우리 셋은 우애는 없는데 자주 만난다. 결국 주로 싸우고 헤어진다. 며칠 전 여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이렇게 화가 많을까……." 남동생은 평소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그러게 말야! 누나들은 왜 그렇게 만날 분노가 많아. 나를 봐, 화내는 거 봤어?" 그러자 여동생이 발끈했다. "야! 너, 말 잘했다. 맞아, 너는 화를 안 내. 근데 남을 화나게 하는 데 아주 선수야!" (p.174)

화내는 사람, 화나게 하는 사람. 누가 더 문제일까. 인간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개인의 반응이 결정한다. 스트레스가 좋은 예인데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1위 가까운 이의 죽음, 2위 결혼, 3위 이사 등), 고통은 개인의 스트레스 내성(耐性)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화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안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심리학의 입장이고, 한편으로 분노는 정의감이자 힘이기도 하다. 정당하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우아하고 차분하고 세련되게 대응해야 한다는 통념은 가해자의 이중 메세지다. (p.173-174)

사회 구조는 인성을 창조한다. 르네상스적 인간, 근대적 인간, 자본주의형 인간이란 말이 있는 이유다. 정부는 사회 구성원의 공존을 위한 인프라를 민영화 논리로 파괴하고, 기업은 승자 독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생존은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돈과 성공이 최고 가치고 미모, 행복, 마음의 평화까지 갖춰야 하는 사회다. 이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일단 불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은 맹렬히 추구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지, 출세까지 해야 되나. (p.177)

행복한 가해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피해자에게 회개를 설교하는 상황. ‘기(氣)가 막힘‘을 넘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발생하는 ‘악‘의 새로운 경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모르는 사람처럼 독을 뿜는 존재는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말하는 자기에 대한 인식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무 말이나 한다. (p.180)

내가 속한 커뮤니티들은 ‘주류 사회‘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는 누가 결혼한다 그러면 보통 "뭐 하는 사람이냐? 언제 하냐?" 이렇게 묻지만, 내 친구들은 "여자야? 남자야?"라고 묻는다. 만일, 전자처럼 질문한다면 내가 속한 모임의 성원이 되기 어렵고, 그런 경우도 거의 없다. (p.186-187)

고통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의 눈물과 분노, 넋 나간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발상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은 물론 당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기준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감수성은 창의력의 기본 요건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 마비, 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스로 정의한다. (p.218-219)

소통할수록, 가까워질수록 외로워진다. 더 소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럴수록 메울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에게서 상처받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서 더 상처받는다.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 특히 자기 충족적인 사람, 자기 몰두형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충만감을 느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가장 외롭다. (p.238)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남성들은 돈을 주고 여성의 몸을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p.252-253)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같은 여자로서 신경숙의 성공에 대해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남자보다 더 심한 비판을 할 수 있느냐, 여성의 시기심이 더 강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감히 신경숙 씨의 경쟁자도 아닐뿐더러, 여기서 나와 신경숙 씨는 여성이 아니다. 나는 그때 여성으로서 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독자‘로서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우연히 성별이 일치했을 뿐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과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데,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p.265)

2015년 10월 29일 박 대통령은 이화여대를 방문했다. 이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히 행사장에 입장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행사에 참석한 여성 인사들과의 모임은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종합 편성 채널의 남성 앵커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여대생이 여성 대통령을 반대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성이 여성을 배척하는 이런 분위기, 어떻게 보십니까?" 이 사건 역시 여성이 여성의 방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대학생‘이 ‘대통령‘에게 항의한 경우다. 학생들이 여성 혐오가 있어서 여성 대통령 입장을 막은 것이 아니다. 행사장의 ‘좋은‘ 분위기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아니라 보수와 보수의 정체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p.266)

탁월한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가장 방해되는 구조는 여성 간의 갈등을 ‘시기심‘으로 명명하는 사회라고 분석한 바 있다. (p.267)

"예전에 비하면 여자들 살기 좋아졌어, 장애인 처우가 나아졌어, 지금 굶는 사람은 없잖아……." 이런 말이 오갈 때 나는 묻는다. "그들한테 직접 물어보셨나요? 본인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처럼 일단 말하는 사람의 위치성이 논쟁거리다. 말의 정당성은 문구 자체보다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당신 말은 옳지만,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차별받는 당사자가 "저의 지위가 많이 상승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대개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입장에 있으며 타인의 현실을 모른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발언 자격이 없다. 마치 일본이 우리에게 "예전에 비하면 너희에게 잘해주고 있지 않니."라고 말하는 격이다. (p.277)

‘나아졌다‘는 판단은 어느 시대에 근거한 것일까. 중세에 비하면 누구나 나아졌(을지 모른)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조선 시대에 비하면 지금 여자들은……"인데, 나아졌는지 아닌지 나는 ㄴ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내 의문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거지‘든, 왜 이들의 처지는 항상 과거와 비교되는가이다. 만일 2013년의 한국을 미국의 1600년대(조선 시대)와 비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p.277-278)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하는가. 중산층 여성의 지위는 중산층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가난한 남성과 비교하는가. 현대 여성의 지위는 현대 남성과 비교해야지, 왜 조선 시대 여성과 비교하는가. (p.278)

음주 상태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양상은 자연과학의 의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술로 ‘필름이 끊긴‘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술을 마셔도 남녀가 성별을 바꿔 행동하지는 않으며, 모르는 외국어를 갑자기 구사하지도 않는다. 술을 마셔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대개는 ‘집에 와서, 가족‘을 구타한다. (p.281)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나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하지만 이런 투쟁은 대개 실패하기 쉽다. 상대방이 수용할 리 만무하며 게다가 소위 ‘적을 닮아 가기‘ 쉽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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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5-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시선] 꼭 읽어봐야지!!

오늘 페이퍼에 소개된 책들은 정말 최고군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5-19 14:12   좋아요 0 | URL
네, 최고의 책을 최고의 책과 함께 소개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낯부끄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7-05-1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낯선 시선> 줄 좀 그었는데 ㅎㅎ 너무 많아 다 옮길수가 없어 스리슬쩍 패쓰했는데 다락방님 올려주신거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키햐~~ 조오타~~ ㅎㅎㅎ

그나저나 세트로 훌륭한 책 이유경 작가님의 <잘 지내나요?> 59-65페이지를 꼼꼼히 읽고 싶은데 제 책을 친구에게 선물한 관계로 오늘 바로 재구매 들어갑니다. 히힛 😊

다락방 2017-05-19 16:04   좋아요 0 | URL
저 밑줄긋기 올리다가 지쳤더랬어요. 중간에 포기할까...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굳건한 의지!! 를 가지고 결국 다 옮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정말 저는 대단한 것입니다.

아니, 그나저나 단발머리님은 아주 훌륭한 분이시군요? 좋은 책은 선물도 하시는, 아주 현명하고 아름다운 분이셔요. 지구상에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모르게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버려요. 후훗.

사랑합니다 2017-05-1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지만 밀당하고 싶어요

다락방 2017-05-19 21:14   좋아요 0 | URL
ㅎㅎ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심리는 어떤건가요?

사랑합니다 2017-05-20 20: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못된 심리지요

clavis 2017-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이유경씨의 ˝잘 지내나요?˝의 59ㅡ65페이지를 읽기 위해 교보로 나섭니다.알라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서 빨리 읽어야 무식도 덜어지고,말도 덜 적어질 수 있고,그렇겠지요??? 시를 안주셔서 시집도 한아름 사올겁니다 팽~!!

2017-05-22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5-22 09:02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이렇게 귀엽기 있긔없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7-05-22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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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좆같은 일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다가 툭, 하고 좋은 일이 끼어들면서 연속되는 것 같다. 구겨진 얼굴로 다른 부서에 업무차 내려가 남자과장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나누고 가려고 하자 잠깐만 기다리라며 서랍을 열었고, 서랍 속에는 딸기맛 초코파이 한 박스가 들어 있었다. 이거 드세요, 하면서 꺼내주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순간 웃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남자 과장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스타벅스에서 화이트캬라멜초코 인가..화이트모카초코...인가 암튼간에 우라지게 단 커피를 벤티 사이즈로 매일 마시는 캐릭터다. 단 거 무지 좋아하는 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딸기맛 초코파이라니, 고맙게 받아가지고 올라왔다. 좆같은 일들 속에 드물게 일어난 기쁜 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먹을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그러면 좆같은 삶을 살아온 다른 여자의 얘기를 잠깐 해보자.


















'호노르'는 젊은 시절부터 출판사에서 근무하는데, 그녀가 맡은 역할은 출판사 대표인 '모리아니'의 비서겸 경리이다. 회사가 아주 어려울 때부터 늘 거기 있었고, 그리고 자기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대표 모리아니를 좋아하고 있다. 그 대표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고(정확히 기억안나는데 그쯤이다), 그녀의 나이 역시 그에 비슷하게 되었는데, 이제나 저제나 대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자신이 대표의 아내가 될 수도 있을거란 생각을 갖고 살고 있었다. 자기는 계속해서 대표의 옆에 있었고,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도 신경써서 대표를 배려했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징표를 믿었다. 그것은 숨겨진 이정표와 같아서 진심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을 목적지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씩, 그러나 아주 체계적으로 모리아니의 환경을 바꿔나갔다. 달력을 산뜻한 그림으로 바꾸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재고를 책장에서 치우고 모리아니가 마시는 디카페인 모카커피에 카르다모(소두구. 중동지방에서 커피에 넣어 먹는 향신료_역주)을 아주 조금씩 넣었다. 생강과의 이 식물은 긴장을 해소시키는 효능이 있어 세계대전도 막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모리아니는 그녀가 만들어낸 이런 좋은 영향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계량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모리아니의 사무실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졌고 아랍 박하와 백단향의 향기가 풍겼으며 꽃이 시드는 일이 없었다. 그 뒤로 모리아니의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p.114)



파산을 앞두고 우울에 쩔어 있는 모리아니를 위해, 비서인 호노르는 은밀하게 그를 늘 배려해왔던 거다. 그런데, 그 출판사에, 호노르의 절반쯤 되는 나이인 베티가 들어온다. '매끈하고 빵빵하고 예쁜' 아가씨. 그리고 모리아니는 사십년정도의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그런 베티에게 청혼하겠다고 하는 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진짜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욕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지만, 오늘 만큼은 욕을 좀 계속 하기로 하겠다. 참, 호노르의 삶이 너무 좆같지 않은가. 몇 십년을 옆에서 배려하고 신경써줬는데, 자기 나이의 절반쯤 되는 여자에게 청혼하겠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아무리봐도 그여자는 다른 남자랑 사귀고 있는데, 늙은 이 남자에게 관심도 없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생 헛살았다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건가. 아니, 그런데 호노르는 왜 진작에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지? 왜 그렇게 기다리기만 한거야? 만약 고백했다면 모든 일들이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는데. 물론 모리아니가 그녀를 거절했을 확률도 크지만, 설사 거절했다한들, 호노르는 아예 다른 삶을 꿈꾸는 쪽으로 바뀌었을 수 있잖아. 이게 뭐야 완전 죽쒀서 개주고.... 모리아니는 '하이든'이라는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남으로써 출판사가 갑자기 엄청 돈을 많이 벌게되면서 자기 돈도 많아지게 되는데, 그 모든 재산을 매끈하고 빵빵한 젊은 여자 베티에게 줄 생각인 거다. 평생 자기 옆에 있었던 여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로.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모리아니야, 베티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단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생.... 




모리아니는 베티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고 베티를 포기한다. 암은 그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는 이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럴 때, 그에게 호노르가 간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비스킷을 챙겨준다.




"호노르, 혹시 지금 울 거면 그 전에 내 영국 비스킷 좀 갖다줘."

호노르는 그가 말한 알루미늄 통을 값비싼 식재료들이 부패해가는 식료품 창고에서 찾아냈다. 스페인산 훈제육 위에도 파란 곰팡이 잔디가 깔렸고, 소시지는 거의 미라가 됐고, 과일들은 비쩍 말라 버렸고, 통조림 깡통들은 팽팽하게 배가 불러 위험해 보였고, 식료품 선반 사이에는 수많은 거미줄 터널이 창궐해 있었다. 이 집에는 분명 여자의 손길이 필요했다. 호노르는 비스킷 통을 열기가 겁났지만 다행히 내용물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호노르, 우리 집 지붕에 독수리들이 앉아 있지 않았어? 시체 냄새 맡고 기다리는 거야.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격 없는 말투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p.266)




나는 가급적 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이 호노르 에 대해서라면 무자비하게 스포일러가 되고자 한다. 살면서 이런 일 한 번쯤 한다고 벌받지 않겠지. 후훗. 그래서 호노르가 어떻게 되냐고?




클라우스 모리아니는 베니스의 병원에서 죽었다. 그리고 죽기전 병상에서 그의 비서였던 호노르 아니젠드라트와 결혼하고 출판사와 개인 재산 전부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p.317)



크- 그간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고, 함께 지낸 시간도 짧았지만, 아하하하하, 출판사와 재산 전부를 유산으로 받았다. 만쉐! 이제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일만 남았구나. 후훗. 글쎄,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간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노년에 돈이 많아진 것에 대해 '좋은 삶이구나' 할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외롭고 긴 날들이었다고 할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거야 이미 벌어진 일이니, 노년에 돈이 있는 건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호노르, 맛있는 것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아요!!! 








역시 짝사랑을 하더라도 돈 많은 남자를 짝사랑하는 게 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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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5-1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런 스포일러 좋아요. 카르다모, 처음 들어봐요.

다락방 2017-05-17 10:50   좋아요 0 | URL
전재산을 다 받았다는 거에 제 마음도 좋아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와같다면 2017-05-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보이지 않는 징표를 믿었다. 그것은 숨겨진 이정표와 같아서 진심으로 길을 찾는 사람들을 목적지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많이 담아서 쓴 문장같아요

다락방님과 제 마음을 건드리네요

다락방 2017-05-17 11:37   좋아요 0 | URL
어휴, 나와같다면 님의 댓글을 읽고 저 문장을 다시 읽으니 마음에 휭-하니 바람이 불어요. 하아-
 
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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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안읽었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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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05-1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감사합니다 시원하게 패스^^

다락방 2017-05-16 13:54   좋아요 0 | URL
네 패스하시고 다른 책 읽으세요! ㅎㅎ

유부만두 2017-05-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그 시간이 아깝고 그러나요?

다락방 2017-05-16 17:40   좋아요 1 | URL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팔랑팔랑 넘어가서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닌데요, 그 시간에 다른 책 읽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이게 뭐냐...싶거든요. 아하하하하 ;;

그렇게혜윰 2017-05-1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레강스하면서 샤프하며 함축적이며 구체적인 이 한줄 리뷰!!!♥ㅋㅋㅋㅋ

다락방 2017-05-16 18:0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무척 감사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17-05-1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안 읽으면 억울한 작품 많이 추천해 주세요~^^

다락방 2017-05-17 09:4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앞으로 열심히 그러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슬비 2017-05-16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만들어진다고 하니 영화만 봐도 될것같긴했어요.^^

다락방 2017-05-17 09:4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 만들어지면 볼까.. 생각중이긴 한데, 아 중간중간 너무 짜증나더라고요. 굳이 영화까지 봐야되나 이런 생각도 동시에 들어요 ㅎㅎ

라네쥬 2017-05-30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개하는 카드뉴스가 너무 흥미로워서 볼까 했는데 예전에 앞에 잠깐 봤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 나가서... 안 보고 있습니다. 솔직한 평 감사합니다. 안 봐도 될 거 같아요! ㅋㅋㅋ

다락방 2017-05-30 16:54   좋아요 0 | URL
네 안봐도 됩니다. 다른 재미있는 책 보세요! ㅎㅎ
 

"고양이, 개, 디지언트.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정말로 돌봐야 하는 존재의 대용품에 불과해. 너도 언젠가는 아기가 뭘 의미하는지,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될 거고, 그러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런다면 예전에 느꼈던 모든 감정이 실제로는-." 로빈은 퍼뜩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는 넓은 시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야."

동물을 돌보는 일에 종사하는 여자들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는 소리였다. 동물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아기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승화된 것이라는 식의 주장 말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정말 넌더리가 난다. 애나도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생에서의 기타 모든 성취를 재는 잣대는 아니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는 일이고 어떤 변호도 필요치 않은 천직이다. (p.60-61)



















이 책속에서 '디지언트digient'란, 가상 세계 속에서 사는 디지털 존재를 의미한다. 가상의 생물이라 볼 수 있을텐데, 애완동물과도 닮지 않았고, 사람도 아닌, 그러니까 독자적인 디지털 존재이다. 사람들은 디지언트들에게 식량을 주고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성장 시킨다. 놀이공원을 데려가고 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예전에 동물원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던 '애나'는 그 경험이 경력이 되어 디지언트를 개발하는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거기에서 디지언트를 학습하며 자신이 맡은 디지어트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많은 시간을 디지언트와 함께 보낸다. 그런 애나에게 직장 동료가 '네가 아이를 낳지 않아서 그래'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거다. 애완동물에게 애정을 쏟고, 가상의 존재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마치 '애가 없어서' 나오는 현상인 것처럼. 아, 진짜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된다. 로빈은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리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쉽게, '니가 이걸 안해봐서 그래' 라고 말한다. 그 말에는 '니가 지금 하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이것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담겨있다. 최고치를 경험한 나와, 그렇지 못한 너.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이 왜 웃는지, 왜 우는지 관심이 많고, 인간에게 많이 실망하지만 꼭 그만큼 인간에게 기대를 한다. 악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선한 인간이 많다는 것도 확신한다. 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엉망인 세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일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 있지만, 그러나 내 회사동료 e 에게 관심대상은 고양이이다. 우리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얘기하다가도 나는 우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고 e 는 길고양이에게 시선을 준다. 동시에 우리 앞에 아이와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각자 다른 대상을 향하는 거다. 내가 그런 e 에게 '야, 인간이 최고지' 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보는 내 시선이 나의 조카가 태어난 이후 달라진 건 사실이다. 조카가 태어난 후에 시야가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관심대상이 더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다고 해서, 아직 조카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도 이모가 되어보면 알거야' 라고 함부로 그들의 경험치를 낮게 평가하는 게 온당하다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한다는 건, 내 시야가 넓어졌다는 게 모두 개구라...개뻥...헛소리.. 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닌가? 임신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아이가 아닌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닌 동물과 함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대체존재로'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양이가, 햄스터가, 디지언트가 좋아서, 관심이 가서, 애정이 생겨서 선택한 것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존재들이 반드시 '내 아이가 생겨서'인 것도 아니다. 내 임신과 출산 경험과는 무관하게 아이란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일전에 정희진 쌤 강연을 들을 때 선생님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아주 많이 받았었다는 얘길 했었다. 그중에는 '너 성추행 당했었냐?'도 있었다고 했다.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성폭력 경험으로 아파서' 라는걸  전제한다고 생각한다니... 말이야 방구야.....너무 무식해서 부끄럽다 진짜.... 그게 할 말이냐.... 


으음 쓰다보니 갑자기 여기까지 왔군. 자,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애나는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쏟고 시간을 많이 들인다. 디지언트와 많이 대화한다. 그리고 디지언트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직장동료 '데릭'과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지게 된다. 디지언트를 만들었던 회사는 이제 문을 닫았지만, 그들은 전직장동료로서 여전히 관계를 유지한다. 그도 그럴것이, 디지언트에게 관심과 애정과 시간을 쏟는 것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데릭의 아내도 데릭이 디지언트에게 너무 관심을 갖는다고 불만을 갖는다. 그런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만이 쌓여갈수록, 데릭의 마음은 애나를 향한다. 애나와는 디지언트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데릭은 아내와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애나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자꾸 쌓이고, 데릭은 애나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아, 애나는 다른 남자인 '카일'과 사귀기 시작했고, 하아- 같이 살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애나곁의 다른 남자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면서, 데릭은 애나가 카일과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같지 않은 희망을 품기도 한다. 카일도 어쩌면 디지언트의 존재를 꺼려하지 않을까? 



애나가 폴리토프사에 취직한다면, 그녀와 카일 사이에는 균열이 생겨날 것이다. 그 점은 데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훌륭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반면에 데릭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번에는 그와 애나 사이에 균열이 생겨날 것이고 언젠가 그녀와 맺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애당초 애나와 맺어질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릭은 몇 년 동안이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환상은 졸업하는 쪽이 자신을 위해서도 낫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므로. (p.191)



아아, 데릭. 지금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여자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나와 맺어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니. 이것은 정녕 희망인가 절망인가. 스스로도 '그녀와 그 사이에 분열이 생긴다면 나에게 기회가 올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라고는, 훌륭한 생각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 속에 생겨난 솔직한 바람임을 알고 있다. 아아, 내가 맺어지고 싶은 상대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렇지만, 내 마음이 한없이 착하고 선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하다면 난 괜찮아,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내가 할 일이지'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지상에 얼마나 될까. 나 역시도 데릭이었다면, '어쩌면 칼이 디지언트를 사랑하는 애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둘 사이가 안좋아질 수도 있고, 그렇다면 디지언트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나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애나는 결국 내게로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거야. 그러면서 스스로 그런 걸 기대하고 바라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겠지. 아아, 이루지 못한 모든 사랑이여!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데릭의 마음을 아주 잘 알겠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데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의 내 모든 위로는 데릭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알아, 아주 잘 알아. 데릭...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당신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놈인건 아니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인생은 뭘까.

타이밍은 뭘까.

사랑은 뭘까.

기다림은 뭘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오늘은 데릭 때문에 너무 슬퍼서 저녁에 육개장이나 먹어야겠다.

데릭, 한국에 올래요? 내가 육개장 사줄게요. 나랑 육개장이나 한 사발 하십시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교사이기도 하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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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7-05-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자신의 경험이 설사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었다한들, 그것이 절대가치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해서 아직 뭘 모른다거나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죠.
나도 나름대로 공부하고 생각할거에요. 계속 계속 말해줘요. 친구!

다락방 2017-05-16 10:4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책을 읽는 건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자꾸 생각할 거리가 생기고 자꾸 고민할 거리가 생기니까요. 결국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계속 고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방법인 것 같아요.

moonnight 2017-05-1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조카아이들을 사랑하는 걸 가지고 ‘네 아이가 없어서 그렇지.‘ 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 많죠. 바보들-_-

다락방 2017-05-16 14:00   좋아요 0 | URL
어떻게 그렇게 단정짓고 함부로 말할 수 있죠? 아 사람들 진짜 무식해요. 조카를 사랑한다는 건, 말그대로 조카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아-

치니 2017-05-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누군가에게 두리가 이제 12세가 되어간다고 하자, ˝그럼 곧 죽겠네요˝ 라고 바로 답변하길래 어찌 그리 잔혹하게 말하냐니까 개들은 원래 그 정도 사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자기는 사람과도 헤어지면 그냥 다른 사람 또 만나면 되지, 라고 생각한다고...으음, 그분에게 대체 그럼 왜 이 세상 사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각자의 경험치가 다르고 그렇게 사는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요. 있겠지만 생명 경시하는 말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이어가기 싫더라고요.

다락방 2017-05-16 14:10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너무 무식한 발언이네요. 정말이지 입이 있다고 말을 막하고 다니는 사람들 많은 것 같아요. 개와 같이 살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무슨 그런 막말을 하지요? 그사람은 어차피 죽을 인생 왜 사는 걸까요? 치니님이 말씀하셨듯이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 어떤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치니님이 그 사람과 대화를 할 필요는 전혀 없어보이네요. 대화라는 게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액션이 있으면 적절한 리액션이 있어야 대화가 성립되는데,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뭐랄까,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일 것 같아요. 어휴..무식한 사람들... Orz

clavis 2017-05-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그 육개장 제가 사겠습니다 데릭님도 락방님도 저도 한 그릇씩 하면서 마음을 달랩시다!오늘의 위로를 모두 그에게 주신것 고맙습니다~한국엔 언제?

다락방 2017-05-16 16:1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데릭이 시간이 나야할텐데 애나 생각에 꼼짝도 안할것 같아요. 흙흙
클래비스님이 사주시는 육개장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지네요. 아아,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트 뿅뿅 ♡

clavis 2017-05-1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사랑이 아름답다 하셔서 다시 한번 락방님의 글을 읽었더니요ㅠ아름답긴커녕 마음만 쓰라란걸 워째요ㅠ
육개장의 맛이 아름다울 것이에요..데릭을 데려옵시다..데리릭~!!

다락방 2017-05-16 17:41   좋아요 1 | URL
크- 그렇지요. 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어디 가슴 아픈 걸 가지고 아름답다고 뻥을 쳤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육개장이나 먹읍시다. 데릭, 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