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문구점에 들르게 되면 이 펜이며 저 펜을 써보고 사곤 했다. 그렇게 펜을 사도 또 문구점에 들르면 이 펜 써보고 저 펜 써보고... 아, 나는 펜욕심이 있는 사람이구먼...이라고 생각하며 아주 오래 지냈다. 그러다 3년전 생일에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 받았는데, 만년필을 선물받고 나자 내가 그 뒤로 문구점에 가도 펜을 거들떠도 안보는 거다. 앗?! 펜욕심 있는 내가 왜 이제 펜을 거들떠도 안보지????????? 하고 생각했는데, 아아, 그거슨 몽블랑 만년필 때문이구나! 했다. 궁극의 펜이 있으니 다른 펜은 필요가 없어지는 거다!!


지갑도 그랬다. 지갑은 1-2년 쓰면 꼭 다른 지갑이 갖고 싶어지는 거다. 이건 이래서 불편하고 저건 저래서 불편하고 해서, 백화점에 가 이 지갑이 좋네 저 지갑이 좋네 하며 1,2년마다 바꿨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갖고 싶지만 차마 내돈 주고 사기는 손 떨렸던 지갑을 선물 받고 나자, 백화점 1층에서 이리저리 지갑을 둘러보는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그 뒤로 지갑을 바꿀 생각이 1도 안들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거다. 지금 지갑이 많이 낡았는데, 만약 이게 더 낡고 그래서 쓰기 곤란해지면 똑같은 지갑을 살 예정이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지갑인 것이다. 아, 역시 궁극의 지갑이 있으면 다른 지갑은 쳐다보지 않게 되는 거였어!!!



그리고 또 하나 궁극의 것을 찾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알라딘 앱에 접속하고 알게된 것인데, 아니, 3월의 선물이 에코백이라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전혀, 1도 관심이 가지 않는 거다. 그전의 나는 에코백이라면 계속 받아서 번갈아 쓰고 또 친구들에게 선물도 하고 그랬었는데, 에코백이 알라딘 선물로 나오면 또 받고 싶을만큼 자꾸 에코백을 받았었는데, 이제는 그걸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작년에 나의 오빠로부터 궁극의 에코백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었어!!!!!




안에 속주머니도 단단하고 손잡이도 단단하고 겉과 속이 그냥 다 단단해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지만 양질의 가방인 것이 화악-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받고나서는 '아아 다른 에코백은 이제 필요가 없다!!' 하게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궁극의 에코백이 있는데 곁다리 에코백들이 대체 무슨 필요란 말인가. 나는 어차피 물욕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아닌가? 맞나? 모르겠네?), 그것이 무엇이든 '궁극의' 것만 있다면, 두 개 세 개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궁극의 것만 있다면 한 눈을 파는 사람이 아니야!!! 궁극의 에코백이 있으니 나는 이제 더이상 알라딘에서 에코백을 준다고 아무리아무리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어떤 에코백이 있는지 들여다보지도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궁극의 에코백이 있어서, 다른 에코백에 대해 관심이 안생겨. 역시 궁극의 것은 중요하다.



다른 것들을 자꾸 기웃대는 건 궁극의 것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궁극의 가방을 못찾았어. 그거슨 내가 비싼 돈을 들여 가방을 사긴 했지만, 그보다 조금 더 돈을 주고 더 비싼 걸 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 가방을 샀는데도 그 가방 생각이 자꾸 나...이게 진짜 중요한 게, 어차피 돈을 쓸거였다면, 벌벌 떨지말고 과감히 질러버려야 하는 것이다. 괜히 손 떨다가 돈은 돈대로 쓰고 만족감도 못갖게 돼. 내게 지금 가장 후회되는 게 다이어리다. 영국까지 가서 스미슨 다이어리를 샀는데, 이게 너무 비싼거라...야 왔으니 하나 사고싶긴 하고, 정말 오래전부터 사고 싶었으니까 사긴 살건데...아, 너무나 비싸네....하고 친구와 나는 매장에서 가장 저려미 다이어리를 산 거다. 그래도 우리돈으로 5만원이 넘었어 ㅠㅠ 야, 진짜 한 번이니까, 왔으니까 사는 거지, 다이어리가 우라지게 비싸네, 하고는 그래도 어쨌든 샀는데, 해가 바뀌고 다이어리를 쓰는데 진짜 씅에 안차는 거다. 너무 사이즈가 작아. 나는 폭발하듯 글을 쓰는 사람인데, 다이어리에도 폭발하듯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일기를 쓰는 사람인데, 이 다이어리는 진짜 내 글을 다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야. 지금은 막 며칠에 걸친 칸에 쓰고 그러는데, 어차피 매일 쓰는 게 아니니까 쓰고 있긴 하지만, 이게 사이즈가 작아서 다른 다이어리를 사서 쓰자니, 이것이 딱 2018년만 쓸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것과 같이 쓰자니, 내가 대체 돈 주고 뭐한 건가 싶고.... 아...왜 손을 떨었어....조금 더 주고 그냥 더 사이즈 큰 걸 샀으면, 궁극의 다이어리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돈은 돈대로 쓰고 곁다리를 사버리고야 말았다..... 슬픔... 슬픔의 새드니스....... 궁극의 것을 찾는 것은 이렇게나 어렵다.



궁극의 사물이 이러할진데 궁극의 연인은 어떻겠는가.

어차피 이 사람 만나봤자 이게 별로고 저 사람 만나봤자 저게 부족하다면, 죄다 곁다리 밖에 안되는 것 같다.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역시 연인도 궁극의 연인을 찾는 게 답이다. 그래야 우리가 착- 하고 안착할 수 있는 것이야. 부드럽게 그리고 쏙 들어맞게 착- 

궁극의 연인과 함께해야 최상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늘 학교에 같이 가던 동네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네 집은 정원이 딸린 집이었는데, 항상 준비가 늦었던 터라 내가 "~야, 학교가자" 하고 가면 늘 그 친구네 집 거실에서 그 친구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친구의 엄마는 항상 친구에게 '너는 왜 그렇게 맨날 늦냐'고 퉁을 놓곤 했었는데, 내가 일찍 준비해 가는 게 그때 당시에 친구에게 민폐였겠구나, 하는 생각은 아주 나중에야 들었다. 결국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그냥 혼자 등교하곤 했다. 그게 세상 편한 것이야....아, 근데 얘기하려던 게 그건 아니고,


친구네 집에서 친구를 기다리면 항상 너무 좋은 냄새가 났다. 늘 그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 때 당시에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는 나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던 거다. 그걸 친구에게 '니네 아침에 뭐 먹는거야?' 묻지는 못한 채로 항상 '아 좋은 냄새...' 했었는데, 오늘 늦은 아침을 먹고 간식으로 프렌치 토스트를 하면서 알았다. 아, 버터와 계란의 냄새였구나!! 하고.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고 그 위에 계란물 입힌 식빵을 올려두는데, 냄새가, 바로 그 때 그 냄새였던 거다. 친구네 집은 버터 바른 빵을 먹는 거였어!! 프렌치 토스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버터와 빵과 계란이 그 아침에 있었던거야!! 그거였어!! 라고, 벌써 이십오년도 더 전의 그 냄새가 코끝으로 들어오며 기억을 소환해낸 거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우리 집에서 아침은 밥으로 먹는데, 계란과 버터와 빵이라니... 내가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이다...우리에게 버터는 낯선 것이었고, 버터를 집에 사두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니까. 그것도 내가 사서 냉장고에 들어 있는거지, 다른 가족은 버터를 안산다.... 


오늘,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면서, 

아아, 오래전에 알지 못했던 냄새를 뭔지 알게되었는데, 이제 나는 그 때 그 음식을 해먹는 사람이 되었네..... 했다.




이 글을 쓰면서 프렌치 토스트를 먹고 있는데, 남동생이 말을 건다.


- 누나, 다이어트 언제부터 할거야?

- 지금도 하고 있는데?

- 누나에게 다이어트는 소화를 말하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계속 프렌치토스트를 먹는다. 가만있자, 더 포스트 시간이나 알아보고 보러 가야겠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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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3-0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다이어트가 소화라니... 육성으로 빵 터졌어요! 아침에 토스트와 커피를 먹었는데 프렌치 토스트 보니 또 배가 고프고.. 이 배... 고픔의 배 ㅠㅠ

다락방 2018-03-05 07:41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진짜 이러면 안되는데 저거 먹고나서 짜파게티 먹고... 떡볶이 만들어 먹고... 비빔국수 만들어 먹었어요. 제가 만들었는데...맛이 없었어요. 언제나 그랬듯이... (시무룩)

스윗듀 2018-03-04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들을 자꾸 기웃대는 건 궁극의 것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거슨 진리다.....

다락방 2018-03-05 07:41   좋아요 0 | URL
궁극의 것을 찾는 것은 그러나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쉽게 찾아지질 않아요. 흙 ㅜㅡ

- 2018-03-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극의 토스트 ..❤️

다락방 2018-03-05 07:42   좋아요 0 | URL
맛있게 먹었어요. ㅋㅋ
저녁에 비빔국수 먹고 싶어서 만들어 먹었는데 엄청 맛없었어요... 아하하핫

비로그인 2018-03-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프프프 다이어트가 소화ㅋㅋㅋㅋㅋ 아 정말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네요ㅋ
궁극의 지갑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살 건 아니지만 그냥... ㅎㅎ

다락방 2018-03-05 07:40   좋아요 0 | URL
https://www.mulberry.com/kr/shop/women/small-leather-goods/purses/8-card-zip-around-wallet-dark-frozen-small-classic-grain

제가 샀던 같은 디자인은 지금 없는 것 같고요, 이 제품과 가장 비슷해 보입니다. 링크건 제품은 좀 딱딱한 가죽 같아요. 저는 소프트한 가죽입니다. 하핫. 가죽의 부드러움 차이를 제외하면 다른 건 비슷한 것 같아요!

charalee 2018-03-0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극의 다이어트에 한표!

다락방 2018-03-05 08:02   좋아요 0 | URL
궁극의 다이어트는 궁극의 소화일까요? 하하하
 

나는 일본영화인 《리틀 포레스트》를 참 좋아라 하는데,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가끔 아무 음식이나 만들어 먹는 장면을 재생시켜 보곤 했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잘 먹는 장면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 같아. 해서 이번에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도 보러 갔는데, 수제비든 파스타든 만들어 먹는 장면이 다 너무 좋아서 그 자체로 '좋네' 하게 됐던 거다. 당연히 나도 막 뭐든 먹고싶어지고!




겨울에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김태리가 김칫국을 끓여 밥을 먹는 장면, 거기에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처음엔 오글거리는 거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행동이 나온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오글거려서 '으윽, 끝까지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끝으로 갈수록 좋아졌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친구랑 좋다고 얘기했는데 '그런데 처음엔 좀 오글거리더라' 했더니, 친구도 그러는거다. 처음엔 좀 오글거렸다고. 이 오글거림은 어디에서 온걸까? 사실 이 영화는 뭐랄까 좀...판타지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시골에서 여자 혼자 살면서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데, 그 과정의 고단함이 전혀 없진 않을 터. 물론 이미 있던 집이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생활해나갈까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판타지가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곶감을 만들고 꽃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고, 예쁘게 떡을 만들고 디저트를 만드는 걸 보면 또 세상 좋아.








특히 좋았던 장면은 술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먹는 장면과, 다슬기를 잡다가 도시락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김태리도 류준열도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상황이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연인과 헤어진 거다. 류준열은 왜 헤어졌나고 김태리에게 묻고, 김태리는 '안헤어졌는데?'라고 말한다. 김태리 역시 류준열에게 왜 여자친구랑 헤어졌냐고 말하는데, 류준열 역시 안헤어졌다고 하다가, 그러는 거다.


나는 여기있고 걔는 거기에 있는 거야.


그러자 김태리는 '와 너 쿨하다' 하는 거다. 이 때 류준열이 그런다.


"나 엄청 울었는데?" 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나, 걔 엄청 좋아했거든."



나는 진짜 이 장면이 너무 좋았는데, 자신이 아팠음을 알고 솔직히 인정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떤 남자들은, 그 특유의 허세로 '걔가 나를 더 많이 좋아했지' 라든가 '걔가 나를 좋아해서 만나줬지' 라는 식의 말을 하곤 하는데, '나 엄청 울었다'고 하는 건 그것과는 다른 태도이기 때문이다. 김태리의 남자친구도 '여자친구가 도시락 싸들고 와서 좋겠다' 는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에, '아냐 부담스러워' 하면서 으스대는데, '나 헤어지고나서 아파서 엄청 울었어'를 말하는 솔직한 태도는 너무 신선하게 느껴지는 거다. 내 감정이 어떤지 알고 들여다보는 거,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코스라고 생각한다. 저 장면에서의 류준열은 그걸 했다고 생각하고. 그게 너무 좋은 거다. 최근에 어딘가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도 티븨였던것 같은데, 사랑을 잃고나면 성숙해지기 마련이라고. 이 말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모두에게 적용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잃고 한걸음 더 나아가고 성숙해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전의 사랑과 이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상 사랑이 끝나는 것이 상대방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한다. 아픈만큼 성숙한다고 했을 때, 물론 아프지 않는 게 더 좋지만,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별의 고통은 우리의 일상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우리를 무의식적 충동이 담긴 어두운 지하 창고로 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얻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사랑의 실패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어떻게 나아가기를 원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인생을 새로이 설계하게 만들죠. 인생 설계를 재조정하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실연만 한 것은 없습니다. 상실로 인한 번민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만들죠. (p.194)









나는 나의 지난 사랑과 이별들이 나를 이만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들에서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별을 또 겪고 싶지는 않다. 이별의 고통을 또 감당하고 싶진 않아. 이별의 고통은, 상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따라서,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별은 아프지만, 어떤 이별은 특히 더 아프니까. 이별 후에 어떻게 쿨할 수가 있나. 그건 쿨한 척 하거나, 아니면 아프지 않을만큼만 사랑한거겠지.




'좀 판타지 같지 않아?'라고 친구에게 말해놓고서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도 좀 울었다. 나이들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아. 이건 뭐 어떻게가 안되네. 대체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왜 울어... 봄이 얼마나 예쁜지, 여름의 땀이 얼마나 좋은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인데.


영화 보고 나니까 봄과 여름이 더 기다려졌다. 일자산 나무들의 색이 초록으로 짙어지겠네, 아카시아 향도 나겠지, 모든 것들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칠까, 싶어서 봄과 여름이 기다려졌다.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으로는 쫄면과 오일파스타를 먹고 싶은데, 어느 걸 선택해야 할까....



그리고,

지혜로운 당신은,

당신 인생을 더 행복한 방향으로 재조정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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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3-0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틀 포레스트,가 그런 영화군요. 난 어제밤에 손사장님과 인터뷰하는 김태리를 보면서.... 토마토가 쑥쑥 자라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흐흠. 김태리가 좋아요~~~^^

난 요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요리하는 장면을 보는 건 좋아요. 뭐든 먹고 싶어지고!!

다락방 2018-03-02 09:3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제가 리틀 포레스트를 너무 좋아해요! 일본 영화에서도 농사짓는 것부터 다 나오거든요. 쨈 만드는 거랑, 만들어진 쨈을 빵에 발라먹는 것도 나오는데, 그런 거 너무 좋아요! 난로에 빵 만드는 장면은 어떻구요. 진짜 너무 아름다운 영화예요.

김태리 주연의 한국영화에서 토마토 먹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에요. 토마토가 익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또 엄마랑 나란히 앉아 토마토 먹는 장면 나오는데(위에 제가 사진 첨부했죠), 그 장면에서 얼마나 토마토 먹고 싶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풀과 나무들 사이, 눈과 햇빛 사이의 김태리는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

요리 못하는 저도 리틀 포레스트 너무 좋아해요. 단발머리님께도 일본판부터 추천합니다!!

책읽는나무 2018-03-02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예고편을 잠깐 봤을때 김태리에게 잘 맞는 영화를 잘 선택했단 생각이 들면서 꼭 보고 싶었는데 금새 또 잊고 있었네요.
실은...일본에서 일본 요리를 해 먹는 모습이 너무 익숙하여 한국에서 한국 요리를 해 먹는 장면이 좀 낯설지 않을까?그런 걱정도 했었어요.
하지만....기우였었나 보군요^^
일본 요리는 동양 보다는 때론 서양음식 같단 생각이 많이 들어 이게 한국 전통? 음식으로 대체가 되면 좀 억지스러울꺼란 생각을 했었거든요.
암튼.....아름다운 풍경을 가득 담았을 영화일 것 같아 보고 싶네요^^
음식을 잘하진 못해도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모습 지켜보는걸 좋아하고....또 그걸 맛있게,즐겁게 얘기하면ㅅ니 먹는 모습 보는 것도 좋더라구요.
요즘 윤식당이랑 효리민박 보면 그 부분이 너무 재미있고 좋더군요^^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자기 성숙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님의 시선도 배워 갑니다^^

다락방 2018-03-02 10:05   좋아요 0 | URL
책나무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숲의 모습이 바뀌어 가는 걸 보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아름답더라고요.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진다는 건, 참 신비로운 일 같아요. 그 바뀌는 계절 속에서 곶감을 말리고 양파를 심고 사과를 따고 벼를 심고 하는 등의 일을 보는 게 참 좋더라고요. 파스타 같은 서양 음식에 꽃을 잔뜩 따 넣고 만들기도 하지만, 떡 만드는 것 보는 것도(손이 많이 가겠지만) 참 좋았어요. 막걸리 만드는 건 어떻고요! 좋더라고요. 수제비 후루룩 먹는 거 보는 것도 좋았어요. 아! 떡볶이가 정말 맛있어 보였답니다. 후훗. 보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였어요. 그거 먹는 거 보는 게 되게 좋더라고요. 손수 요리를 하고 잘 먹는 게 진짜 보기 좋았어요. 저는 자기 밥상 자기가 잘 차려 먹는 거 보는 게 참 좋아요. 후훗.

저도 최근에 윤식당 보기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와서 대화를 나누며 먹는 걸 보는 게 큰 즐거움이더라고요. 이거 먹어봐 맛있어, 이거 맛있는데? 이러면서 각국의 손님들이 먹는 걸 보는게 너무 좋았어요. 재미있어서 최근에 한 편당 1,500원 씩이나 주고 1,2,3편 봤고, 4편이 대기중입니다. 헤헷.

비로그인 2018-03-0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밥(안주?) 해먹는 이야기 좋아해요- 또 올려주세요 ㅎㅎ

다락방 2018-03-04 05:31   좋아요 0 | URL
아이참 ㅋㅋㅋㅋㅋ 알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좋아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각자의 상황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헤매이는,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책은 구성된다. 문체는 시종일관 조용하고 착 가라앉아있는데, 나는 이런 식의 문체가 정말 좋다. 나폴리 시리즈 1권 읽고는 2권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가(나는 좀처럼 이 책에 열광이 안된다), 그러다 이렇게 차분한 문체를 만나니 세상 살 것 같은 거다.



정원에서 마커스가 눈을 뜬다. 누군가가 다가와 햇빛을 가린 느낌인데, 아무도 없다. 편지와 소식과 방문은 떠난 자들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가끔씩, 그리고 아주 잠깐씩, 죽은 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는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다가, 곧 마음이 현실을 기억해 내고 어떤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24-25)



이거봐, 초반부터 이렇게나 좋아. 맞아. 소식은, 방문은, 늘 떠난 자들로부터 오는 것. 내가 책장에서 이 책을 골라내게 된 건, 제목 때문이었다. 제목이 너무 아파서. '헛된' 기다림인 게 싫어서. 그래서 얼른 읽고 이 책을 팔아버릴 셈이었다. 그러니까, 내 책장에서 기다림을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겠어! 하는 다짐을 하며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것.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데 ... 내가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발, 기다림이 헛되다고 말하지 말아줘. 내가 사랑하는 많은 책들은, 결국 기다림이 간절하면 원하는 것에 닿는다고 말해. 나는 그런 걸 원해.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가다가 발견한 이런 문장.



어떤 서정시에도 나오듯, 달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녀는 유리창을 통해 석류나무들을, 아침 이슬을 똑똑 떨어뜨리는 석류꽃과 이파리들을 바라본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표트르 다닐로비치가 사는 곳을 알아낸 그녀는 지난해 12월 그를 찾아갈 때 석류 한 개를 선물로 가져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그는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전쟁터에서 귀환한 군인들이 흔히 그렇듯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었다. (p.96)



보석처럼 반짝이는 달과 유리창을 통한 석류나무들이 눈에 선명히 보이는듯하고, 그 아름다움에 고요해진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니 유감이군요." 표트르 다닐로비치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건물 앞에 쌓여 가는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른 체격에 눈동자 색이 짙어서 성화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였다.

석류는 벽난로 옆에 있는 탁자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석류를 쪼갰다. 난로 옆에 있었던 터라 진홍색 씨앗의 표면이 따뜻했다. 생리혈의 온도, 남자의 몸에서 금방 분출된 정액의 온도.

"아프가니스탄 과일 장수들 중에는 우리 소련군 병사들에게 파는 오렌지와 멜론과 석류에 독약을 주입해서 파는 놈들도 있었죠." (p.97-98)



벽난로 옆에 있는 탁자의 석류가 따뜻해졌을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그걸 쪼갰을 때의 온도를 왜 생리혈과 정액으로 표현했을까? 저 문맥 어디에서도 갑자기 생리혈과 정액이 필요하지 않은데. 너무 뜬금없잖아? 왜? 왜 생리혈과 정액이 튀어나와?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저기, 생리혈의 온도, 정액의 온도, 저 문장은 이 책에서 들어내어버려도 진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김훈도 최근 그의 책에서 갓난 여자아기의 성기 안의 온도가 따뜻할 것이라는 글을 썼었는데, 대체, 성기 안의 온도가 왜 책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거야? 성기 안의 온도를 말하는 상황은 그저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원하는 상태로 섹스를 할 때, 그럴 때 말해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성인 남자가 갓난 여자아기 성기 온도를 짐작해 말한다는 것-그것도 아버지가!!-,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이 용납되어지질 않고, 갑자기 저기서 뜬금없이 생리혈의 온도와 정액의 온도를 말하는 것이 뜨악스럽다. 왜?


나는 여자작가가 이런 글을 썼다면, 그러니까 난로 옆에서 데워진 석류에 대한 글을 썼다면, 거기다 대고 생리혈의 온도를 운운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젖도 없는 놈들은 젖얘기를 하고 생리를 안하는 놈들은 생리혈의 온도에 대해 입을 털까? 왜?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않았고, 그리고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읽고 있었고, 이것과 저것과 이 상황과 저 상황은 이렇게 저렇게 얽혀서 인간사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구나, 차분한 마음으로 읽고 있는데, 대체 왜 석류를 따뜻하게 만들고서 생리혈과 정액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거야? 그 다음 문장들도 아름답게 읽고 있지만, 자꾸 생리혈과 정액의 온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 얘긴 왜했어? 대체 왜? 아직 조금 밖에 안읽어서 읽다가 탁탁 걸리는 부분이 혹여 또 나올지 모르지만, 생리혈과 정액의 온도는 말하여질 필요가 없었다. 왜 썼을까? 이 문장이 거기서 왜나와요? 무슨 생각으로 넣은거예요?



그렇지만, 당신과 내가 보내는 밤.



라라는 러시아에서 왔고 데이비드는 미국에서 왔다. 그리고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마커스의 집이고, 이들 모두는 상실을 겪었고 침잠해 있는 상태이다. 라라와 데이비드가 마커스의 집에서 처음 만나고, 그리고 그 밤, 잠들지 못한 깊은 밤에 그들의 집 안에서 마주친다. 아니, 이들에게 어떤 성적인 긴장감은 전혀 없다.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하는 것도 전혀, 전혀 없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데이비드는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프간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이라고 믿는다. (p.94)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위에는 별들이 떠있는데, 그 밤에 함께 있다는 것, 그 밤을 함께 보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거다. 나는 이런 게 너무 벅차는데, 세상 아름다운 게 밤을 함께 보내고 밤의 소리를 함께 들으며 또 그 밤의 소리를 함께 장식해가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에로틱한 섹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좋다고 느껴지는 밤이라는 건, 그 밤의 공기, 기운, 온도, 색깔, 별과 달, 밤으로부터 파생되는 그 모든 소리들, 그 소리들 속에 섞이는 당신과 나의 목소리.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진,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밤. 나는 이런 게 진짜 너무 좋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들을 보고, 거기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게 너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다. 비록 그들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지만.



"학교를 세우지 말아야 했어요." 그가 라디오를 끄고 나서 말한다. "테러리스트들을 도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침 일찍 잘랄라바드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겁니다. 아버님께 전해 줄래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잘 자요."

그가 방으로 올라간 후,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이따금씩 윤곽으로만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고 심리테스트의 잉크 얼룩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놀라게 하는 박쥐들을 보고 있다. (p.95)



내일 마커스에게 얘기좀 전해줘, 응, 잘자... 이게 전부인 대화인데, 나는 이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에, 밤하늘이 있고 별이 있어서, 그래서 그곳의 공기가 전해지는 듯해서, 그런데 거기에 둘이 함께 깨어 있고 그 밤을 온전히 함께, 그 순간만큼은 함께 해서, 너무 좋은 거야. 나는 이런 게 진짜 너무 좋아.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고, 저기엔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데, 나는 그냥 이런 게 너무 좋고, 그래서 책장을 덮고 하염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해보게 되는 것이야... 밤은 왜이렇게 특별할까? 밤을 같이 보내는 건 왜이렇게 특별할까? 나는 밤 열한시도 되기 전에 졸음이 쏟아지고 자야 되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째서 밤을 함께 보내는 게 이렇게나 특별하게 느껴지는걸까? 어쩌면 내가 열한시도 되기 전에 자야되는 사람이라서일까? 영화 [들어는 봤니, 모건 부부?] 생각도 난다. 시골에 함께 머무르게 됐던 그들의 시골의 밤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함께 했던 도시의 밤소리를 그리워하는 장면. 그들은 이혼한 후였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도, 함께 했던 곳의 소음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래서 한 쪽이 그 소리를 인터넷으로 찾아내어 들려주고, 그걸 함께 듣는 장면이 나오는 거다. 어떤 순간은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특별해지는 것 같다. 그것이 그저 밤하늘이고, 별이고, 달이고, 풀벌레 우는 소리만 있다 하더라도.



아주 오래전의 걸그룹 노래 가사도 생각났다.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








나는 이제 허락이 필요없다.


편지와 소식과 방문은 떠난 자들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가끔씩, 그리고 아주 잠깐씩, 죽은 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는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다가, 곧 마음이 현실을 기억해 내고 어떤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24-25)

여기 도착하자마자 쓰러지지 않았더라도, 마커스에게 잠깐이라도 이곳을 피신처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삶의 무거운 짐을 잠깐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실패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현명하거나 강하거나 용감하지 못해 길을 잃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커스는 눈길이 머무는 모든 것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소수에 속하는 것 같았다. 꿈을 통해 우리 삶에 들어오는 성자처럼. 라라는 그에게라면 지난 세월이 그녀로 하여금 인생에서 길을 잃게 만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46-47)

갑자기 그의 삶에 등장한 이 여자는 아주 내성적이어서 남에게 말을 걸거나 남의 눈을 보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어서더니 그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을 못 자서 퀭한 눈과 검푸른 멈이 든 목이 보였다. 피곤과 커다른 멍은 육체적인 것이었지만 여자의 영혼도 그렇게 지키고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p.50)

님로드(세계 최초의 왕이자 최고의 사냥꾼)가 알라의 예언자 이브라힘을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웠을 때, 후투티 한 마리가 부리에 물을 담아 와 불길에 뿌렸다. 한 구경꾼이, 그 당시의 딕 체니(9.11 테러 당시 미국의 부통령)같은 놈이, 후투티에게 두 방울의 물로 거센 불길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새가 대답했다. "모르죠. 내가 아는 건 알라가 이 불을 피운 자들과 끄려고 노력했던 자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나는 후자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p.87)

"카트리나가 그랬어. 우샤에 해마다 아내를 임신시키는 남자가 살았어. 남자의 아내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는데, 6년 사이에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지. 카트리나가 그렇게 경고하고 간청했는데도, 그는 아내의 몸이 회복될 틈을 주지 않았어. 그가 여덟 번째 출산을 앞둔 아내를 우리에게 데려왔을 때, 아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그때는 저 나무가 아직 어린 묘목이었지만 그래도 꽤 튼튼했는데, 내가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카트리나가 이곳으로 나왔어. 화풀이할 곳을 찾던 카트리나는 그 어린 살구나무를 도끼로 내리쳐 두 동강을 냈어. 어쩌면 그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 줄 채찍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p.99)

"약자들의 용서는 당신들 강자들이 들이마시는 공기 같은 거예요, 데이비드. 몰랐어요? 눈에 보이지는 앟지만, 조금 전에 분명히 느꼈을 거예요. 약자들의 용서가 있어야 당신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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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엔 <북까페 두잉>해서 하는 윤김지영 쌤 페미니즘 강연에 다녀왔다. 강연 제목은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이었다.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했지만, 끝은 예상하지 못했던 래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강의는 쌤의 다른 강의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좋았는데, 어제는 특히 좋아서 마지막엔 울컥 했다. 오길 잘했다고 스스로 한 백번쯤 칭찬했다.


쌤은 래디컬 페미니들이 주장하는 '비혼, 비출산, 이성과의 연애(혹은 사랑)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 의미있는 전략이고 또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그것을 극단적이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에 대한 유의미함이라 는 말이 너무 좋았는데, 지난해 우리가 평화적인 촛불 시위를 할 때 한 알라디너가 차벽을 넘어서 진행하는 과격한 시위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고 썼던 글이 생각났다. 격렬하게 돌진하는 것, 적극적으로 돌진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물론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없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싸울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최전방에서 싸우지 않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최전방에 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너무 느리게 오는 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속도가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하고,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래디컬이 아니다, 라거나 혹은 페미가 아니다, 라고 할 순 없다는 거다. 이 말은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나 역시 래디컬을 지향하지만 아직 그들의 속도를 다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계속 해서 래디컬이라면 지금의 나보다 뭔가 더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어떤 마음의 짐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혼과 비출산을 전략으로 내세운 것에 동의하고, 그 뜻을 충분히 짐작한다. 그러나 이성과 사랑 혹은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것이 될 지 잘 모르겠는 거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 사랑에서 오는 행복이 분명히 있는데, 그러면 나는 너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뒤로 쳐지고 래디컬의 힘을 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페미니스트로 가는 과정, 그리고 래디컬로 가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많이 혼란스럽고 또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생각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나만해도 지금은 성노동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굳힐 수 있게 되었지만, 몇 년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물론 회의도 든다. 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세상이 될까, 어떤 방향이 더 나은 걸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적 갈등을 겪고 그러다가 전투력을 상실하기도 하고 의욕이 꺾이며 지치기도 하지만, 또다시 힘을 내자고 서로에게 기운을 주기도 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내부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격려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한남들은 그냥 계속 한남들이기 때문이다. 성추행과 성폭행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는 일은 여전히 빈번하게 계속 쭉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어떻게 일조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자꾸 더 빨리, 더 세게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다음 읽을 책으로 대기중인 '쉴라 제프리스'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책의 서문에는,


'1977년에 나는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버리고 레즈비언이 되기로 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렸습니다(p.4)' 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 역시 긴 시간 레즈비언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의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결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실행될 수 있는 것 역시, 모두에게 다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엔 나는 한 남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것이다.



쌤은 국어사전에서 '래디컬'을 찾아봤더니 '속도가 빠른' 이라고 나왔는데, 그것은 래디컬에 대한 오해라고 했다. '래디컬'은 라틴어 '하디클리스'에서 온 단어이며, 발본적인, 뿌리와 근간에 해당하는 뜻이라고 했다. 뿌리와 근간을 흔들어야 하는 것이 래디컬이므로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그러므로 래디컬은 속도전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의 속도가 다른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함께 오래 갈 생각을 해야 한다고. 사실 이렇게 적고는 있지만, 내가 그 의미를 다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고 받아 적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다. 쌤의 강의에 대해 뭔가 어떤 오해가 생긴다면 그건 철저히 후기를 적는 나의 잘못이다.



강의가 끝나는데 진짜 너무 위로가 되고 힘을 받아서, 물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라는 자기질문까지 하게 되면서, 너무 좋아서 울컥 눈물이 났고, 이 강의가 좋았다는 걸 쌤께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었다. 쌤의 책을 들고 싸인을 받는 사람의 뒤에 서서 내 차례가 되자, '싸인은 지난번에 받았고요, 선생님 강의 정말 좋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강의를 들었는데, 쌤의 말씀과 또 그 자리에서 래디컬을 지향한다고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힘이 되었다.


한 사십명쯤 되는 강의였던 것 같은데, 그 안에는 나를 포함해 내 친구들이 여섯명이었다. 모두 알라디너들이다. 하하하. 우리는 강의가 끝난 후에 서로의 입장에서 이 강의가 어떻게 들렸는지 후기를 나누었다. 좋았다, 어려웠다, 전투력을 상실했다 부터 시작해서 다른 페미니즘 관련 이슈들과 강의들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지고, 또 스스로 겪는 내적갈등에 대해서도 얘기하게 됐다. 문학을 더이상 이전처럼 사랑할 수 없는 일, 기혼으로서 겪는 불합리합과 그러나 찾아오기도 하는 행복, 이성애를 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역시나 거기에서 오는 충만함까지.  또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마지막 패리시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윤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타나는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에 대해 패리시부인이 연상됐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찝찝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건, 우리가 이 강의를 다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계속 감각을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자꾸만 세상을 보고 거기에 관여하는 것,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나누는 것. 각자의 경험과 내적 갈등에 대한 걸 끊임없이 교환하는 것. 이 모두가 감각을 유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모두 필요할 것이다. 멈추지 말아야지. 지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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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8-02-25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다락방님은 또 한번 나룰 자극해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책을 읽고, 관여하고, 이야기와 의견을 나누고 교환합시다. 지치지말아요 우리!!!!!

다락방 2018-02-26 08:55   좋아요 0 | URL
스윗듀님, 우리는 자극 또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또 받읍시다. 계속해서 자극을 주고받는다면 계속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아무개 2018-02-2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
작은 접점만 있어도 언제나 비판적 연대는 가능하다.
라고 저는 정리했어요.
강의시간이 너무 늦어서 아쉬운것 빼고는
정말 좋은 시간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네요^^

다락방 2018-02-26 08:55   좋아요 0 | URL
내가 이대로 좋은가, 내가 잘 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고 있는데, 이렇게 듣게 되는 강의는 괜찮다고, 가던 길을 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너무 좋아요.
강의시간이 너무 늦은 건 정말 너무 아쉽고 ㅠㅠ 그것만 아니었다면 저도 다 좋았어요.
아니, 덕분에 ㅠㅠ 막차타고 가지 않았습니까. 흙흙 ㅜㅜㅜ

비연 2018-02-2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게 있었군요. 알았으면 갔을텐데... 아쉽습니다...

다락방 2018-02-26 08:5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비연님.
공부한다는 것도 좋지만 강연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같이 앉아 듣고 있다는 것도 되게 힘이 되더라고요.
:)
 

아니 무슨 일이야 ㅋㅋㅋ 궁극의 밀크티를 찾고 있다는 나의 댓글에 또 이런 게 도착 ㅋㅋㅋㅋㅋㅋㅋ 하루에 택배 두번 ㅋㅋㅋ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정으로 살지요!! 후훗.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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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02-2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오. .... !!!!!

[그장소] 2018-02-23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