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라 슬리마니'의 장편소설 《달콤한 노래》를 어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이미 결말을 알려주긴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읽기가 두려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끔직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올 터였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고민했다. 끝까지 읽고 내일 새 책을 들고갈 것인가, 아니면 끝부분은 내일 읽을 것인가..



아침에 읽기 싫은 부분이기도 했지만 잠들기 전에 읽기는 더 싫었다. 분명 꿈을 꿀텐데, 그런 식의 꿈을 꾸고 싶지가 않았어...해서 나는 책을 덮고 자기 위해 누웠다. 잔인한 결말은 내일 읽자, 하고.



분명 초저녁에는 졸렸는데 자리에 눕자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 엊그제 넷플릭스 가입을 해둔 터다. 흐음. 그렇다면 뭔가를 볼까...산드라 블럭이 나온다는 로맨스 영화를 볼까, 에로틱한 영화를 볼까, 주루룩 훑어보다가 드라마 《아웃랜더》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에 원작 소설 '다이애너 개벌든'의 책을 읽은 터라, 그냥 훑어만 보자, 하고는 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는 않고 좌르륵 빨리감기로 해서 주인공인 '클레어'와 '제이미'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들에 집중했다. 나는 그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아웃랜더와 호박속의 잠자리 작가 '다이애너 개벌든'음 엄청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전에도 내가 이곳에 몇 번 언급했던 작가인데, 다양한 쪽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거다. 게다가 글도 잘 써! 알라딘에 이 책들의 작가소개를 보면 이렇게 써있다.



동물학 학사 학위, 해양생물학 석사 학위, 그리고 생태학 박사 학위과정을 밟았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 월트 디즈니를 위한 연작 만화를 쓰기도 했으며 12년간 대학교수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Voyager>, <Drums of Autumn> 등이 있으며, 국내 출간작으로는 <호박 속의 잠자리>의 전편인 <아웃랜더>가 있다. 현재 애리조나주의 스콧데일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클레어 시리즈를 읽는 것은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다. 책 속에서 주인공 클레어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로 날아가는만큼, 아직 의학기술은 발전하지 못했고, 민간의학이라 해야하나, 그런 걸로 사람을 치료하고 돌봐주는 장면들이 펼쳐지는 거다. 게다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를 얘기하며 역사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게 펼쳐낸다. 그 과정에서의 제이미와 클레어의 로맨스는 더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데, 클레어가 '현재'를 사는 여자이며 동시에 '과거'로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그 과거에서의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문화에서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이미는 신사이다. 그래서 클레어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남자들은 '버릇 없는 아내를 혼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체벌로써' 이루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동정으로 결혼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이미, 아내인 연상의 클레어를 원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제이미에게, 버릇 없는 아내의 엉덩이를 때리라고 하는거다.


클레어는 위험에 노출됐었다. 위기의 순간이 분명 있었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이미는 벨트로 클레어의 엉덩이를 때리고자 한다. 이에 클레어는 맞선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다, 그건 하지 말아라' 하고. 나 역시 '그건 아니야, 그러지마, 그러는 순간 화나, 정떨어지는 거 시간문제야' 라고 생각했지만, 제이미는 끝내 반항하는 클레어를 자기 무릎위에 엎어놓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거다. 바깥에서 이 소리를 들었던 다른 남자들은 '역시 그래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히 이 장면은 나에게도 불편하고 클레어에게도 그랬다. 클레어는 제이미를 사랑하고, 지금이 자기가 기존에 살던 세상과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분명 화나는 일이다. 그러니 클레어가 제이미와 다시 사이 좋아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클레어는 '다시는' 제이미가 이러지 않도록 어떻게든 강하게 인식시켜야 했다.


그 일이 있고난 뒤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틈에 평소에 제이미를 좋아했던 여자가 제이미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러나 제이미는 클레어를 정말 사랑했다. 그 여자에게 '나는 내 아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클레어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거다. 며칠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다. 클레어의 화는 당연히 아직 풀리지 않았고. 이에 제이미는 용서해줄 수 없겠냐면서, 혹시 너 나랑 그만 살고 싶은 거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클레어는 그렇지는 않다고, 그만 살고 싶은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둘은 섹스를 하게 되는데, 나는 '흐음, 이렇게 쉽게 용서하면 안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그 장면을 계속 보았다. 격렬한 섹스로 가기전 클레어가 위에 올라 있는 여성상위체위에서, 쾌락에 몸둘 바를 모르는 아래에 있는 제이미를 향해, 클레어 역시 아직 그에게 들어가 있는 채로, 저기, 옷을 벗느라 늘 가지고 있다 떨어진 제이미의 손 칼을 가져와서는 얼른 칼집에서 빼네 제이미의 심장을 겨눈다. 아직 그들은 섹스중인데, 클레어는 그 칼을 제이미의 심장에 바짝 대고는 말한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니 심장으로 내가 아침을 해먹을 줄 알아."



그러자 제이미는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의 시리즈인 저 잠자리와 아웃랜더를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희미한 내용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클레어가 과거의 스코틀랜드로 넘어간 것, 거기에서 제이미랑 결혼을 한 것, 그러다 나중에 현재로 오게된 것등등..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클레어가 현재로 돌아오게 되어 현재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을 때, 제이미도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가 그녀의 삶을 엿봤다는 것 ..정도인데, 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검색해보니 드라마는 지금 시즌4까지 나온 모양이다. 나는 시즌1을 대충 훑어서 7회까지 보게됐고. 드라마가 원작을 얼마만큼 반영할지 모르겠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현재의 남편도 열심히 클레어를 찾는 중이다. 그래서, 과거로 가는 것까지 찾게 되는걸까? 나 이 시리즈 정식으로 시작해볼까?



책은 출간됐을 당시에 아는 사람들에게선 굉장히 유명한 책이라 읽기는 했지만, 번역 상의 문제를 많이 지적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혹여 그 사이에 다시 나오진 않았을까 싶어 검색해봤더니, 여전히 위의 책들이다. 기존에 사보고 팔아버려서... 다시 사서 읽을까? 이왕이면 개정판이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저 시리즈는 저게 끝인가? 아마존 검색해봤는데 뭔가 외전으로 짧은 스토리가 있는 것 같긴한데..저게 전부인가?


드라마를 시작해볼까? 너무 길던데..그렇지만 제이미랑 클레어가 이야기 나누는 거 보고싶다.

드라마를 시작해볼까? 너무 길던데.. 역시 볼 시간이 없어. 언제 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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졔졔 2018-05-2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노래, 저도 읽으려고 주말에 도서관에서 빌렸어요. 아, 읽기 두렵네요ㅠㅠ

다락방 2018-05-28 16:25   좋아요 0 | URL
책은 잘 읽히는데 저는 피해자(희생자)가 아동일 경우에 너무 힘들어서요 ㅠㅠ
최졔님 다 읽고나면 감상 남겨주세요!

비연 2018-05-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피해자가 아동인가요.. 저도 이거 보관함에 두었는데... 읽기 겁나네요..ㅜ

다락방 2018-05-28 17:53   좋아요 0 | URL
네, 아동 피해자가 등장하는 책이라 .. 저는 읽기 좀 힘들었어요. 비연님, 다른 분들 리뷰도 참고해보세요. ㅠㅠ
 
피프티 피플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승국의 허벅지에 고개를 얹고, 그것만으로 불안했는지 앞발로 바지를 잡고 테이는 잠들었다. 덕분에 승국은 불편해 보이는 정장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했다. 형제는 볼륨을 낮춘 채 티브이를 봤다. 한 아이돌 가수가 그룹에서 탈퇴한다는 연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탈퇴하는 아이돌들 이해가 가. 같은 회사를 7년, 8년 다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거지, 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아."

"그러게 말이다." (p.83)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으면서 '아, 소설은 이야기였지!' 하고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소설은 이야기였다.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 혹은 나와 관계없는 저 먼 곳의 사람들, 또한 나의 이야기. 각자가 가지고있는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짧게 짧게 그려지는데, 그 일들마다 섬세함이 살아있어, 작가는 이 오십명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전조사를 했을까, 그 노고에 감탄했다.


이야기는 이야기마다의 힘을 갖고 있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아픈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들이 선하다. 선한 의지를 갖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내게는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위의 인용문은 늙고 병든 개가 허벅지에 고개를 얹었기 때문에, 불편해도 그 자세를 유지하는 '승국'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한데, 내가 소설을 읽을 때 '착하기만한 이야기'에 대해서 딱히 매력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착한 이야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한국 소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다. 술렁술렁 잘도 넘어간다. 오십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나와서 모두들 어딘가에서 만나고 연결되어 지는데도 '아 아까 이렇게 나왔던 인물이구나' 알면서도 이름은 까먹게 되긴하지만,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마당이 있는 집》과 연달아 읽노라니, '아 한국소설 읽는 거 너무 즐거운 경험이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섬세하게 펼쳐지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있으니, 저마다의 이야기가 자꾸 다른 기억들을 불러낸다는 데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건이나 사고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소소한 일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소개팅을 한 남녀가 그 후로 두 번 더 만났다가 끝내는 어그러지고 마는,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정말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그 소소한 이야기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아주 오래된 내 소개팅이 떠올랐고, 한 번 더, 라는 그의 답에 그러마고 답해 한 번 더 만나놓고, 사소한 이유들로 '계속 만나자'는 그에게 '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게 있었던 그 일이 내게 무슨 상처로 남아있거나 한 것도 아니고, 그 남자의 이름과 얼굴마저 잊을만큼 별 거 아닌 일이긴 했지만, 대체 인연이란 건 어디서 어떻게 얽히는 것이고 어떻게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 한참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이야기 말고도 나를 머무르게 한 이야기는 이 책 곳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로 작은 일들에 대해서.



모든 인물들이 한데 얽히는 마지막에서, 나는 바라는 결말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발 그렇게 되는 결말을 쓰지는 말아줘'라고 바랐달까. 만약 결말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내내 재밌게 읽었지만 작가를 미워하게 됐을 것 같다. 작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결말이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구에서 한아뿐》,《보건교사 안은영》을 몇 해전에 읽었었고 그 후에 가장 최근에 읽은 게 이 책, 오십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내가 읽어본 작가의 전작들보다 좋았다. 그리고 최근작이 더 좋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더 좋았다. 나랑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나랑 비슷한 세대(나보다는 훨씬 젊지만!)의 작가가, 더 성숙해진 것 같아서이다. 자꾸 자라는 느낌. 같이 자라자고, 우리 같이 나아가자고 하고 싶다. 작가의 발전이 눈에 보였다. 나는 착하기만 한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앞서 밝힌 바 있지만, 그래도 작가가 지금처럼 착한 이야기들을 자꾸 자꾸 써주었으면 좋겠다. 예의 그 세심한 시선도 유지하면서.




"극장 들어오면 영화 보고 싶네요."
이번엔 정말요, 마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영화 좋아하는군요, 말고 뭐 좀 똑똑해 보이는 말 없나. 게다가 도넛을 입에 너무 많이 넣고 씹고 있었기에 리액션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예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p.99-100)

"그럼, 저 맨입으로 고맙다 하지 말고 맛있는 거 사줘요."
그러자 천재소녀의 똑똑하고 조그만 머리가 혁현을 향한 채 가만 멈추었다. 알아들은 것이다, 데이트 신청이라는 걸. 혁현은 발바닥에까지 땀이 나는 걸 느꼈다. 병원 바닥이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화처럼 아래층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럼 내일 아침 7시 반에 옆 건물에 있는 도넛 가게 괜찮아요?"
"네, 좋아요."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거울을 보니 처참했다. (p.98)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p.248)

"아니. 각자 결혼했지. 다른 건 안 무서워해도 자기 아버진 무서워했거든. 성질이 똑같은 데 더 센 분이었어. 부잣집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금방 요절해버려서 힘들게 살았다더라고."
"저런."
이번엔 세훈이 저런, 하고 옛날 사람처럼 말했다. 약간 쑥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쪽문 식당은 어두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연락할 수는 없잖아. 나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아내와 사별하고, 3년을 넘겨 예의를 지킨 다음에 연락했는데 뭐 너무 늦은 거였지.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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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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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남자 작가들의 책을 두 권 내리 읽다가 이 책을 읽으니, 와, 세상에 그렇게 잘 읽히는 거다. 걸리적 거리는 게 없이 술술 넘어가는 게 너무 좋은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우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 가스라이팅에 자기 중심 잃은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걸 읽어가는 건 정말 힘들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이 여자야, 중심 잡어! 나는 얼마나 그렇게 속으로 외쳤던지.



마당이 있는 좋은 집에 사는 여자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던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가 교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얽히고.

그리고 이 이야기는 가난한 여자가 폭력적인 가난한 남편을 죽이면서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흥미로워서 다음장이 어떤 장면이 나올지 한 장 한 장 넘기는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여성혐오의 현실을 세련되게 박아두었다. 아마 주인공은, 나중에, 그러니까 책이 끝나고 나서도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아, 그 때 내가 멍청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겠지. 나 역시 현실에서 '그들이 멍청했다'고 깨닫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으니까.



이 소설의 가장 큰 교훈은 악을 응징하는 데 있다 하겠다. 책 처음부터 나오지만, 이 책의 결론이라고 내 나름대로 부여한 것은 이것이다.



'쓰레기 같은 남(자)편은 죽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리겠다.




제약 회사 영업직이던 남자는 유머 수준은 최악이었지만 잘생긴데다 성실해 보였다. 나는 허영이 가득한 동료와 사귀는 남자가 불쌍했고 연민을 느꼈다. 여자를 잘못 만나 당장 패가망신이라도 당할 것 같아 불쌍히 여겼던 것 같다. 나는 남자를 동정했다. 내가 구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 역시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화장을 안 한 내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검소해 보였다고 했다.
남자느느 자신의 무능을 성실함으로 포장했을 뿐이고, 나는 검소한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서 궁색하게 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키우며 연애를 시작하여 일 년이 안 돼서 결혼에 골인했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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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25 13:1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한국소설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어야할 건 유명인의 신혼일기가 아니라(!) 바로 이런 소설인 것 같아요. 후훗.

moonnight 2018-05-2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게 좋아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욧!@_@;;;

다락방 2018-05-25 13:34   좋아요 0 | URL
지루할 틈없이 팍팍 넘어가요, 문나잇님!!

단발머리 2018-05-2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거죠? 팍팍!!!
나도 찾아봐야겠어요.
믿고 읽는 다락방님 추천 도서*^^*

다락방 2018-05-25 17:0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그렇습니다!
지루할 틈없이 팍팍 넘어갑니다.
아, 그래서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러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가지로 살짝 아쉬운 점이 있긴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인 것입니다!!! ㅎㅎ
 

엊그제는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에 갔다. 나는 짧은 단발보다도 더 짧은 컷트머리인데, 그래서인지 뒤에 머리가 자라면 영 보기가 싫은 거다. 게다가 한 번 이렇게 짧게 잘라 편한 게 무엇인지 알고나니, 다시 기를 엄두가 안난다. 일단 머리 무게가 가볍고 샴푸할 때도 편해.. 세상 편하다. 그렇지만 제비초리... 자꾸 나를 미용실에 가서 머리 다듬게 해.

어쨌든 이번에도 두 달이 채 안돼 미용실에 다시 갔는데, 이번에는 다듬어달라고 말하면서 '더 짧게 해주세요' 주문을 넣었다. 원장님은 알겠다고 하셨고, 그래서 다 잘라놓고나서는 '길이 괜찮으세요?' 물으셨다. 드라이빨 강하게 먹은 나는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가볍게 미용실 문을 나섰는데,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말리니...아아..너무 짧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드라이빨 가고나니 머리가........하아........................인생은 참... 쉽지가 않아? 게다가 나는 원장님의 조언-'앞머리 짧으면 옆으로 못넘기고 앞으로만 내려와요'- 에도 앞머리를 짧게 잘라달라했어.


인생은..뭐죠?

드라이빨....대체 뭐죠?

이렇게 짧은데..어떡하죠?


어떡하죠, 내 심장이 고장났나봐... (응?)


그렇지만 뭐, 그렇게 크게 당황하지 않고 나는 쿨하게 마음 먹었다.


'금방 자랄텐데, 뭐'


그런데 오늘!!

뭔가... 어제보다 나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스타일 잡히면 멋있는데? ㅋㅋㅋㅋㅋㅋ 멋지다, 근사하다. 나는 무슨 애가 머리가 길어도 멋지고 짧아도 멋지고..그냥 다 멋지냐... 잘했다. 스무살 때 한 번 숏컷 하고서는 이렇게 다시 숏컷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래걸린 셈인데, 나는 참...짧은 머리가 잘어울린다. 뒤통수도 예뻐서 그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지금 자기뽕에 취함)




새치가 하나씩 생기고 있고, 그래서 나는 염색을 자꾸 고민했다. 지난번에 미용실 갔을 때는, '다음에 예약잡고 새치염색 하러 올게요' 했던 터다. 원장님은 자연스런 갈색으로 하면 새치가 자라나도 눈에 띄지 않을거라며 자연갈색을 권하셨고, 나는 알겠다고 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염색과 좀 멀어졌다. 염색이 건강에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자꾸 미용실에 가게 만드는 원인을 아예 제공하고 싶지 않아서. 그건 며칠 전에 읽은 책의 영향이 컸다.
















몇 년 전 언어학 교수인 친구가 눈썹을 다듬어주는 동네 가게에 학생들과 함께 가기로 약속햇다. 이는 단합을 도모하는 행사였고 학생들은 여자 교수가 함께한다는 것에 기뻐했다. 친구는 모임을 함께하자며 나를 초대했다. 나는 고마웠지만 초대를 거절했다. ˝‘미모관리용‘ 뭔가를 또 늘리고 싶지 않거든.˝ 나는 설명했다. 이후 우리 테이블에서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이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어. 눈썹 다듬기를 강요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비싸지도 않아. 겨우 10달러라고.˝ 친구는 말했다.
(중략)
당시 나는 눈썹을 다듬기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그걸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됐다. 눈썹을 다듬은 후 더 예뻐 보인다고 느낀다면, 그때부터 눈썹 다듬기는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로 추가됐을 것이다. 나는 기존의 ‘해야 할 일‘ 목록에 그 어떤 것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방식으로 내 외모를 감시하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부추기고 싶지 않았다. (p.128)




내가 새치 염색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꽤 장기간 '해야 할 일'이 될 터였다. 머리는 계속 자라고 그렇다면 나는 자꾸 염색을 해야하겠지. 나는 그 쳇바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작하면 반복하게 될 그 일을, 나는 그러므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러다가 언젠가는 굴복하고 염색을 하게될지도 모르지만, 가급적 뭔가 하나 해야할 일을 더 만드는 것은 지양하고 싶다. 일단 무언가를 하나 더 시작해서 그것이 나를 지금의 외모보다 더 낫게 보이게 만든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는 더 힘들거였다. 그렇게 돈과 에너지와 시간을 '조금 더 젊어보이게' 하기 위해 혹은 '조금 더 예뻐 보이게 하기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나에게 보이는 새치가 고작 한 두개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한두개 보다는 초큼 더 있긴 하지만...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다짐이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생긴다면, 나도 어쩔수 없이 내 발로 미용실로 찾아가 염색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러니까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외모에 관계되어 해야 할 일을 늘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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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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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8-05-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치염색 부분 너무 와닿네요. 이제는 무언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젊어보이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게 때로 너무 귀찮아요.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18-05-28 08:0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이 책 한 번 읽어보세요. 전 참 좋았습니다. 독서가 무엇인지,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깨닫게 됐어요. 블랑카님이 읽으시면 또 어떤 감상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추천합니다!

clavis 2018-06-1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알 링크 받아다 잘 읽고 지인님께 링크를 한아름 선사하려 다시 이 페이퍼에 찾아왔습당 다시 한번 락방님 만쉐♡
 
아내를 닮은 도시 - 류블랴나 걸어본다 4
강병융 지음 / 난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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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거리거나 걸리적거리거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자꾸 언급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툭툭 튀어나와 중간에 덮을까 고민했다. 아 점점 더 남자 작가의 글 읽기가 힘들어지네..

별은 2.5 주고 싶었는데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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