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창원에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KTX 를 세시간가량 탈 예정이니 8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허랜드를 가져가자! 다짐했는데, 얼라리여, 집에서 나갈 시간인데 이 책이 어디있는지를 모르겠다. 아, 어딨지 어딨지 하며 이 책장 저 책장 둘러보고 지저분한 책상 위도 보고, 침대 헤드도 보았지만 보이지가 않아. 안되겠다, 다른 책 가져가자, 하고는 챙겼다가, 나가기전에 그래도 다시 한 번,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 하면서 둘러보고, 찾았다! 여기있다! 그렇게 허랜드를 들고 나는 슝- 나가서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책장을 열어, 언제나 그랬듯이,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리고...





1860 년에 태어난 작가라는 걸 몰랐다. 오래전에 태어난 사람이구나. 오래전이라면 지금보다 여성에게 여성성 강요가 더 심했을 때인데, 그 때도 이런 상상력과 이런 필력으로 글을 써냈다니. 친구들을 만나서도 얘기했지만, 언제나 여자들은 잘못된 걸 인지하고 그걸 바꾸려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다만 그 목소리를 억누르는 목소리들이 더 크고 강했을 뿐.


철학자에, 의사에, 교수에, 판사에, 경찰에... 예부터 왜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까. 나는 공부를 하는 능력,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 그것을 발휘하는 능력이, 동등한 조건에서라면 여자나 남자나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등한 조건에서라면 여자나 남자나 절반의 비율로 그 직업들을 차지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억압당하고 또 억압당해서 그 자리에 서기가 힘들었고, 설사 그 자리를 보란듯이 차지했다해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직업을, 어느 위치에 있는 여자, 라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 여자의 다른 면을 드러내기.


기차 안에서 친구는 자신이 본 영화 <밤쉘>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계속 연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쁜 배우로만 알려진 사람.



'샬롯 퍼킨스 길먼'의 작가소개를 보자.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강요된 성역할과 산후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어떻게 닥터가 내린 처방이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하고 지적활동을 하지말라'는 것일 수 있나. 어떻게 이런 처방을 내려, 어떻게. 지적인 사람이 지적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을 듣고 더 아파질 수밖에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나. 샬롯 퍼킨스 길먼은 그 처방으로 인해 '더' 아팠고, 결국 아내의 역할도 어머니의 역할도 내려놓기를 결심한다.



닥터의 처방이 '지적 활동을 하지말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당시에 '경제적 독립만이 여성에게 참된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 이 얼마나 용기 있고 지적인 여성인가.



창원에서 친구들과 대화 도중, 나는 이런 샬럿 퍼킨스 길먼에 대해 얘기했다. 전통적 성역할 강조, 지적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그중 한 친구가 얘기했다. 지금은 인연을 끊었지만, 자신과 알고 지내던 남자중에 한 명이 '가장 싫은 여자가 책 읽는 여자'라고 했다고. 그 때 너무 기겁했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매우 놀랍다. 이런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에 놀랍다는 게 아니라, 지적활동하는 여자를 싫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 저런 남자라면 나도 이십대 중반이 이미 경험해본 적이 있다. 무려 나의 남자친구였는데, 그는 나에게 '너 책도 그만 읽고 신문도 그만 읽어'라고 말했다. 그걸 반드시 강요했다기 보다는 그 당시에 그는 나에게 웃으며 말하긴 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한 동기는 내가 그에게 너무 말대꾸를 한다는 거였다. '너는 왜 지지를 않아?' 라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데 그 때는 그 남자 좋다고 사귀었다. 게다가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잊지도 못했지.. 아아 나여.. 부끄러운 나의 과거는 웁니다.. 미안해, 과거의 나여.....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 회사 남자 임원도 내게 '넌 늘 책을 들고 다닌다' 면서 '책 읽는 여자는 아주 싫어'라고 내 앞에서 대놓고 말했다. 어쩌라고...


나는 내 친구들도 그리고 애인도 똑똑하기를 원한다. 그들이 지적활동을 활발히 하기를 원한다. 경제적 활동 역시 할 수 있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지적활동도 놓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누구나 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상대,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똑똑하기를 원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나는 '책읽는 남자가 제일 싫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사귀는 남자가 책을 읽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책 읽는 남자라고 반드시 지적인 남자라거나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거나,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절대로, 결코, 활발한 독서활동이 그가 더 나은 인간임을 보장하진 않아. 그렇지만, 지적활동을 하란 말이야, 지적활동을 해야 대화가 되는 거잖아. 아니, 연애상대에게 지적활동 하기를 거부하는 것, 심지어 연애상대가 아닌 이성에게 지적활동을 하지 말기를 원하는 것은, '너는 나의 대화 상대는 아니야'를 전제하는 거 아닌가. 그건 상대가 대화가 아닌 다른 상대이길 원하는 거잖아. 자신이 상대보다 더 똑똑하다는 걸 드러내야 하고, 그러고 싶고, 상대는 그런 나에게 속하기만 해야 하는, 그저 성적 대상이기만을 원하는 거잖아. 어떻게 지적활동 하는 여자를 싫다고 말할 수 있지? 그 멍청함에 너무 부끄럽다.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얼마전에 썼던 페이퍼에서 내가 3년전 뉴욕에서 만났던 그 남자사람 생각이 난다. 책 많이 읽는 여자, 생각 많은 여자는 남자들이 싫어한다던... 그런 남자는 여자들도 싫어합니다...... 어우, 끔찍해..



샬롯 퍼킨스 길먼은, 결혼한 후에 힘들었으면서 치료도 받았으면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포기했으면서, 그런데 왜 '또' 결혼을 한걸까. 아마도 두번째 남편은 첫번째 남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에 결혼했겠지만, 이미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어떻게 굴러가는지 경험해본 사람이 어떻게 그 제도 속으로 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시대적 배경 자체가 1900년이어서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사는 것 자체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결혼해서 빡쳐서 이혼했는데 또 결혼으로 간 것은 .. 글쎄, 잘 모르겠다.




주말동안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한정식 집에 가 코스요리를 시켜먹고, 친구의 집에 가서는 2차로 와인과 과일을 먹었다. 이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했다. 우리는 돈이 좋구나, 얘기했다. 우리 네 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스트레스를 견뎌가며 돈을 벌고 있었다. 우리 계속 돈 벌자, 돈 벌고 살면서 이렇게 좋은 시간을 계속해서 갖도록 하자, 고 반복해 얘기했다.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로 다정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다정해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오래된 노래를 듣고, 수다를 떠는 것. 이런 시간을 오래오래 가지고 싶다. 그러려면 우리는 건강해야 하고, 지적활동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계속 탄탄해야 한다.





허랜드를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읽었다. 남자 세명이서 '여자들만 모여산다는 나라'에 도착했다. 그중 남자 하나는 그곳에 젊고 예쁜 여자들이 가득할거란 환상에 부풀어 있다. 그가 생각하는 '여자'란 그저 젊고 예뻐야 한다. 성적대상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그에게는 '여자'인 것.




그가 목소리를 낮춰 투덜댔다. "젊은 여자들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늙은 대령들 집단한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냔 말이야."

우리는 이곳에 대한 논의나 추측을 할 때마다 늘 무의식적으로 젊은 여자들을 떠올렸었다.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p.42)



그렇다면, 젊은 여자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젊은 여자들에게는 할 수 있지만 늙은 여자들한테는 할 수 없는 말이란 무엇일까? 왜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 가면서 젊은 여자들에게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이게 다, 지적활동이 부족한 때문 아닌가?


이런 걸 지적하다니, 정말이지 샬롯 퍼킨스 길먼도 너무나 똑똑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지적활동이 활발한 때문입니다..




추상적으로 '여자' 하면 젊고 매력적일 거라 상상한다. 여자들이 점차 나이가 들어 그런 시기를 지나가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한 남자에게 소속되거나 아예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그런데 이 건강한 여자들은 나이 든 사람들 같은데도 아주 팔팔했다. (p.42)


이 부분에 대해서라면, 이미 얼마전에 읽었던 책, 《탈코르셋 선언》에도 언급되지 않던가.



‘늘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란 처절한 꾸밈노동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그러한 여성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태어난 존재로 신비화함으로써 인위적 꾸밈노동의 모든 노력들-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화장술과 시술, 지속적 운동과 고강도 식이요법-과 사회적 압력들을 단번에 비가시화해 버립니다.이는 마르크스가 거론한 ‘상품의 물신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의 물신화 현상은 일종의 착시 현상입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마치 그러한 노력의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상품 자체가 가진 자연적·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교환가치를 발생시키는 독자적·독보적 존재물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P35








허랜드의 이 뒷부분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나는 책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지적활동을 할것이다. 책읽는 내가 싫다면 싫어하라, 지적활동 하는 여자가 싫다면 싫어하라. 나는 그 따위 놈들에게 관심이 없다.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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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9-08-2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 앞부분에 지나가는 듯이 나오긴 하지만 제가 좀 충격을 받았던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옷을 잘 입은 여자를 보고 얼굴이 보고 싶어 빨리 걸어 그 여자를 봤는데 나이가 오십은 더 된 것 같아 울었다 뭐 이런 장면이요. 진짜 어이없어서 웃었는데.. 웃고 있는 저 자신한테 충격 받았어요. 여자는 젊고 예뻐야 한다고 세뇌되었나봐요 ㅠㅠ 세월의 거품 영화랑 책 정말 좋아하는데, 저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네요. 여자의 존재가 저랬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그 땐 그랬더라도 지금은 그러면 안 돼.. 이 정도까지는 했어야 했는데...

다락방님이 소개해주셔서 저도 이 책 샀어요 ㅎㅎ 곧 읽을 거에요^^

다락방 2019-08-27 08:00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크-
이런 경험이 저라고 없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책을 읽다 그런 경험을 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 그러기도 했는데요. 아니, 나이가 많은데 왜 저렇게 옷을 입었지? 나이가 많은데 왜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지? 등등요.. 하아-
저 역시 여자는 젊은 거에 세팅해두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꼬마요정 님이 샀다는 책은 어떤 책일까요? 탈코르셋 선언 일까요, 허랜드일까요? 무엇이 됐든 파바바박 깨어나는 독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빠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제 이 책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다. 퇴근길 지하철이 무척 재미있었어. 일단 표제작인 <징구>는 말 그대로 재미있다. '내가 교양있지' 자부하는 사람들 틈에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징구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라고 말을 꺼냄으로써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어버려. 다들 자신이 모른다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아는척하며 징구에 대해 말을 보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아무도 징구가 뭔지 몰라. 저마다 그것은 책이거나 종교이거나 철학인건 아닐까 생각할 뿐. 그러나 징구는 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알지롱.


이 <징구> 가 재미있어서 하하, 이디스 워튼 재밌어, 하고 읽다가 나는 그 다음 단편 <로마의 열병>을 읽게 되는데, 아아, 내가 이 단편집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 바로 이것이다. 다음날인 오늘까지도 계속 생각나. 나는 로마의 열병을 읽은 사람들만을 모아서 수다를 질펀하게 떨어보고 싶다.


자, 아주 결정적인 스포는 안터뜨리겠지만 그래도 내가 스포를 팡팡 터뜨릴 예정인데, 이게 추리 소설은 아니니까 뭐 .. 상관없지 않나 하다가, 그래도 이걸 모르는 채로 읽는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망설이다가, 그런데 내가 또 이걸 이정도는 얘기해야 이 페이퍼가 진행이 되니까...라는 이기적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내가 지금부터 이 글을 쓰도록 하겠다, 라고 내 손이 쓰고 있다. 제가 생각할 때는 말입니다, 글은 진짜 손으로 쓰는 거에요. 키보드 위에서 내 손이 뭘 다다다닥 쳐댈지는 나도 치기 전까지 모릅니다. 다 친 다음에 읽어보고 아아, 이런 명문을 써놨구나, 감탄하는 거에요. 자, 갑니다. 히비고~





중년의 여자 '슬레이드 부인'과 '앤슬리 부인'은 로마의 콜로세움 앞 레스토랑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테라스에서 풍경을 감상한다. 젊은 시절에는 친했지만 어느새 소원해진 관계가 다시 만나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다가, 한쪽이 참았던 화를 터뜨린다.


젊은 시절, 콜로세움에서 네가 내 남편을 만난 것을 알고 있다, 고. 아직 슬레이드 부인이 남편인 델핀과 결혼하기 전, 앤슬리 부인과 자신의 약혼자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때 콜로세움에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쪽지를 보낸 건 델핀이 한 게 아니라 내가 보낸 거였어, 라고 말하면서 그 과거를 되살려낸다. 여태 그것이 델핀이 보낸 편지인 줄 알았던 앤슬리 부인은, 비록 받은 즉시 누가 볼까 태워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그 남자로부터 받은 유일한 편지였는데, 그게 그 남자가 보낸 게 아니었다니, 하고 속상해하며 운다. 



"글쎄, 내가 받은 유일한 편지였는데, 그 사람이 쓴 게 아니라며?"

"아, 어쩜 넌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그 추억을 아끼는 거지." 앤슬리 부인이 말했다.

슬레이드 부인은 계속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친구는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바람이 단숨에 먼지를 쓸어가듯 순식간에 몸이 쪼그라든 것처럼 초라해보였다. 그걸 보니 질투심이 되살아났다. '그 오랜 세월을 편지 한 통에 기대어 살았던 거야? 재만 남은 추억까지 저리 아낀다면 도대체 그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던 말이야! 친구의 약혼자를. 진짜 괴물은 그레이스 앤슬리, 바로 너야!'

"넌 그이를 나한테서 뺏으려고 안간힘을 썼잖니, 안그래? 그런데도 실패하고 말았어. 결국은 내가 그이를 차지했지. 그게 다야."

"그래. 그뿐이지." (p.79)



그 날, 자신이 보낸 편지에 콜로세움에 나가 한참을 기다렸던 앤슬리 부인이 다음날 아팠다는 소식을 듣고 슬레이드 부인은 좀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화가나 질투에 차서 보낸 편지에 그녀가 하염없이 그 축축한 곳에서 기다렸을텐데.. 그러니 감기에 걸렸겠지.



"난 장난으로 그랬어!"

"장난?"

"음, 아가씨들이 간혹 표독스러워질 때가 있잖아. 사랑에 빠진 아가씨들은 특히 더 그렇지. 난 네가 어두운 데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신경쓰면서 혼자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저녁 내내 웃었어. 그런데 나중에 네가 많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몹시 안 좋았어." (p.81)



내 약혼자와 친구가 사랑하는 사이라니. 이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인가.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떤 말을 하게될지 또 어떤 행동을 하게될 지 알 수 없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가장 감정이 깊게 허우적대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실수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감정이 가장 극에 달했을 때, 그 때는 잠깐 그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법.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내가 침착할 수 있을까? 그럴 때 나는 어떡해야 할까? 이 소설에서는 델핀이 왜 약혼자를 놔두고 약혼자의 친구와 사랑하는 사이인건지, 왜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면서 다른 여자와 약혼한건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약혼이 먼저였는지, 사랑에 빠진게 먼저였는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슬레이드 부인의 입장에서는 '내 약혼자가 내 친구와 사랑하는 사이다' 라는 것이고, 앤슬리 부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내 친구와 약혼한 사이다' 라는 것. 어쨌든 한 남자를 두 명의 여자가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약혼한 사이인 슬레이드 부인은 당연히 질투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다. 화도 날것이다. 그러니 그날 밤, 차갑고 축축한 콜로세움으로 그녀를 불러낸 것이지. 어디 한 번 당해봐라, 하는 마음으로 순간적으로 표독스러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밤을 보낸 후 많이 아팠다는 소식에 마음이 좀 거시기해졌을 것이고. 내가 보낸 편지이니 실제로 그 남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친구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겠지.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을런지는 모르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아프고... 자신이 한 일이 표독스러운 일이었다는 걸 알고 또 그 시간이 친구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슬레이드 부인은 약혼자와 보란듯이 결혼했고, 25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이 죽는 순간까지. 그러니 그 과거를 떠올리며 친구가 미웠다가 그 때 미안하기도 했다가... 그러면서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왜? 그 남자랑 결혼한 건 자신이니까. 그런데, 아아, 앤슬리 부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아니, 난 기다리지 않았어. 그 사람이 모든 걸 알아서 했으니까. 거기 왔었어, 그 사람. 그래서 바로 안으로 들어갔어."

슬레이드 부인이 기댔던 몸을 퍼뜩 일으켜 세웠다.

"델핀이 거기 갔었다고?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고? 아냐, 거짓말! 부인이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앤슬리 부인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이가 왔어. 당연한 거 아냐?'

"왔어? 널 거기서 만나게 될 줄 어떻게 알았대? 말이 안 되잖아!"

앤슬리 부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뭇거렸다.

"내가 편지에 답장했거든. 거기 가겠다고 했어. 그러니 그 사람이 왔지."

슬레이드 부인이 두 손을 얼굴께로 쳐들며 어이없어 했다. "맙소사, 답장을 했어? 네가 답장할 줄은 생각도 …."

"편지 쓰면서 왜 그런 생각은 못했니?" (p.81-82)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그러니까 앤슬리 부인은 그 차갑고 축축한 콜로세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오지 않을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아프게 된 게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 날, 그 밤! 그 차갑고 축축한 곳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만나서 함께 그 밤을 보냈기 때문에!!! 그래서 아픈 것이었어! 꽥!!!!!!!!!!!!!!!!!!!!!!!!!!!!!!!!!!!!!!!!!!!!!!!!!!!!!!!!



아, 모를 것을. 정녕 몰랐어야 했을 것을. 아아... 몰랐다면 더 좋았을텐데. 모를걸 ㅠㅠ 이런 걸 알게 하지마 ㅠㅠ 모를걸. 아아, 슬레이드 부인이여..왜때문에 그 과거를 끄집어내서, 알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알게된 겁니까. 왜, 왜... 그 밤, 거기에서 그들이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약혼자가 그녀에게로 찾아간 것을, 남들의 눈을 피해 둘이 만난 것을, 그리고난 후에 나와 결혼한 것을... 왜때문에 알게된 겁니까, 슬레이드 부인이여....Orz



절망

절망

절망

절망

절망이가 찾아온다...............



약혼자에 대한 욕은 패쓰하기로 하자... 입아프다.




당황해하고 충격 받은 슬레이드 부인에게 앤슬리 부인은 미안하다고 말한다.


"난 그날 밤 전혀 기다리지 않았으니까."(p.83)



슬레이드 부인은 당황하고 슬프고 화나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지만, 그러나 꼿꼿하게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래, 내가 졌다. 하지만 내가 널 못마땅해 하면 안 되겠지. 벌써 오래 전 일인걸. 결국,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은 나야. 난 25년 동안 그이를 가졌고, 네겐 그이가 쓰지도 않은 편지 한 통 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p.83)




이 소설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요? 덧붙이자면, 83페이지 위 인용문이 이 소설의 끝페이지. 저 문장 뒤에 딸랑 몇 문장 더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 뒤의 문장이 무엇일지는 대부분 짐작 가능할 터.


아아..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너무 재미있잖아요. 물론 약혼자가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건 세상 쓰레기 같지만 그렇지만 이야기 너무 재미있다. 그리고 휘성의 노래가 생각났다. 안되나요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람 사랑하면서 살아가도 돼요 그대만 곁에 있다면...


그게 정말 됩니까?

가능해요?

그러면 정말 만사 오케입니까?







이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내가 저 두 여자중에 한 명이 된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것인가.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고 굳건한 신뢰가 바탕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 우리 둘이 함께 살아간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늙어가는 것만큼 안정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세상에 사람들이 다 내 맘같지 않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지도 않아. 심지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내가 너를 100 만큼 좋아한다고 해서 너가 나를 100만큼 좋아하는 일은 보통 잘 일어나지 않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기적이라고들 하지 않나. 자, 그러니까 저런 상황에 놓여서, 내가 둘 중의 한명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앤슬리 부인은 다른 남자랑 결혼했지만,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추억을 아끼며 평생을 산다.

슬레이드 부인은 사랑하는 남자와 25년을 내내 함께 살았다. 그러나 뒤늦게 그 남자가 그 날 밤 다른 여자에게로 가 잊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나름대로의 마음속 성소 혹은 마음속 다락방을 만들어두고 그리고 내 옆에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오랜시간을... 물론, 같이 살면서 남편은 그 날 밤을 그리고 그 날의 여자를 잊었을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살고 싶다. 사랑은 어쨌든 결국은 이별로 향하는 것이라 해도, 오랜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다정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랑 함께 살고 나를 보고 웃고 나에게 얘기하고 나에게 다정하면서, 퇴근하면 내게로 오고 잠들기 전에 내게 팔베개를 해주면서, 그러나 마음속 성소에 다른 여자를 두고 있었다면...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너무 싫다.

휘성의 안되나요 감성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냥 어쨌든 내 옆에만 있어줘, 하는 그 감성이.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됐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그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라면,

나였다면,


차라리 콜로세움의 축축한 밤을 아끼는 추억 삼으면서 그를 내 마음속 다락방에 묻어둔 채로 사는 삶을 택하겠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설사 다른 남자와 다정해질지는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내 옆에 다른 여자 가슴에 품은 남자를 두고 싶진 않아. 그러나 내가 마음 속 성소에 누군가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면, 나를 만나게 될 다른 남자는 그 남자가 휘성의 안되나요 감성 품고 살아가야 되겠지. 아아, 인생은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인생 뭔가요. 사랑 뭔가요. 왜 삶은 깔끔하게 딱딱 떨어지지 않나요. 그래서 수학자들은 숫자를 좋아하나요?



그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나는 그럴 사람이야.

내 옆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 생각하는 사람...하고 살고 싶지 않아.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보는 사람이라니. 나는 그런식으로 뒤로 밀쳐진 채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세컨드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개새끼가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결코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가장 먼저, 가장 우선순위가 되고 싶어. 그게 아니라면 나는 그냥 혼술하는 삶을 살겠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사람은 자기가 살고자하는대로 살기마련인가봅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야!!!!!!!!!!!!!!



추억을 아끼며 낮과 밤을 보내고 있다.

여름도 다 가고있어.

써운해...

사무실 앞 정원에서 풀벌레가 가열차게 울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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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8-2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다 보면 단편마다 다 반전이 있잖아요? ‘로마의 열병‘은 그중에서도 특히 그 반전이 ㅋㅋㅋㅋㅋㅋ 세 권이나 주문하셨다니 읽고 곧 토론하실 모양이네요! 뭐라고들 하실지 궁금합니다~ ㅎㅎ

다락방 2019-08-22 13:02   좋아요 1 | URL
아 토론은 못할 것 같아요. 두 권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로 한 권씩 갈거고요, 한 권 역시 친구에게 선물했어요. 우리는 다 뿔뿔이 흩어져 이 책을 읽을 것이니..

맞아요, 잠자냥 님!
저는 로마의 열병이 계속 생각나긴 하는데, <다른 두 사람>도 너무 좋았어요! 다른 두 사람은 이 부부가 다르다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다보니...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너무 재미있는 책읽기였어요, 잠자냥 님! 이 시리즈로 케이트 쇼팽 있던데 이것도 조만간 주문해 읽어봐야겠어요. 꺅 >.<

징구 도 너무 좋고 로마의 열병도 너무 좋아요. 로마의 열병은 진짜 읽은 사람들 모아놓고 막 수다 떨고 싶어요. 너라면 어떻겠어? 하고 말이지요. ㅎㅎ

syo 2019-08-2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 이야기 나와서 더 안 읽고 바로 휘리리릭 내렸다? 이 책 읽어보려구요.

그랬더니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가 나왔어요.
그랬더니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야!!!!!! 가 나왔어요.

와 이 책 되게 재밌겠다ㅋㅋㅋㅋ 꼭 읽어봐야지.

다락방 2019-08-22 13:10   좋아요 0 | URL
음...................

음...................

음...................


이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그렇게 나오긴 했는데, 이 내용이 그렇게 연결되는거냐 하면 제가 지금 연결을 잘 못시키겠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꼭 읽어보세요 ,쇼님. 이 책 한 시간이면 다 읽을 거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19-09-16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6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징구 - 로마의 열병 / 다른 두 사람 / 에이프릴 샤워 얼리퍼플오키드 2
이디스 워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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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디스 워튼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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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 페미니즘 철학 세미나 1
윤지선.윤김지영 지음 / 사월의책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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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김지영과 윤지선은 이 책에서 탈코르셋의 의미와 의의를 정확히 궤뚫고 있다. 게다가 철학자들이니만큼, 들뢰즈, 마르크스, 부르디외 등을 데려와 글에 설득력을 더한다. 들뢰즈 무엇 마르크스 무엇.. 이냐 라며 그들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서, 이 작은 책 한 권을 읽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페미니스트라면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 윤김지영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몇 해전 책출간 행사에서 였다. '독자와의 대화' 같은 것이었는데, 그 당시 윤김지영 교수님은 긴 머리에 예쁜 원피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계셨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남자들이 다 죽어야 끝날 것 같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ㅎㅎㅎ 그 때 거기 계시던 다른 독자분께서 '아니에요,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라고 말씀해 주셨더랬지.

그런 윤김지영 교수님이 지금은 브라대신 니플패치를 하고 원피스 대신 바지를 입는다고 하신다.

 

 

- 얼마전에 여자 k 가 남자친구에게 불만인 점을 얘기했었다. 자신은 항상 예쁘게 화장하고 옷을 입고 나가는데, 남자친구는 꼭 집에 있다 바로 나온 옷차림이라 화딱지가 난다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k 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자신에게 성의를 보이지 않는 남자인데 자신 혼자 성의를 보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고 했다.

 

이런 일은 비단 k 에게만 있는 일은 아니다. 나도 데이트 하면서 집에 누워있다 나온건가, 싶은 남자들을 더러 만나기도 했으니까. 편한 게 좋지, 라며 나는 그들에게 옷차림이나 겉모습에 대한 어떤 지적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원피스에, 힐에, 화장에, 무거운 가방을 들었으면서. 씨부럴..

 

 

- 꾸밈노동을 '내 기분이 좋다, 내 의지다' 라고 주장하며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나 역시 내가 좋아서 하는 줄 알았었지. 후훗. 그러나 탈코르셋을 접하고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으면서, 아 내가 그동안 누구 좋으라고 화장 하고 다닌건가, 하는 것에 더 강한 의문을 갖게 됐다.

 

낯선 나라, 여행지에서의 일이다.

그림을 보러 갔는데 화장을 전혀 하고 가지 않았다. 박물관에는 나 외에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 남자들도 많았는데, 내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그들의 시선에 대해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홀가분함, 바로 그것이었다! 늬들이 거기 있든지 말든지, 나를 보든지 말든지, 가 내가 화장을 하지 않으니 비로소 가능해졌던 것. 나는 그냥 그림을 보러 온 사람1 이었다.

그간 나는 남자들에게 잘보이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한 게 아니라고 내 스스로 생각해왔다. 내 기분 좋으니까 한거야, 라고 당연한듯 생각해왔지. 그러나 그 박물관에서, 이국에서 온 남자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홀가분한지를 깨닫고는,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의식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화장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겠구나, 하는 깨달음. 그러니까, 내가 꾸몄기 때문에 꾸밈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든 바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그것이 과연 나의 자유의지였을까?

이 경험은 나에게 굉장히 새롭고 충격적이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느낌.

 

 

 

- 인스타에는 숱한 여자들이 사진을 올린다. 날씬한 여자들이 '통통한 몸이지만 뭐 어때' 라고 올리고, 이목구비 뚜렷한 여자들이 '오늘 못생겼어..' 라고 올린다. '운동이 좋아' 라면서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몸매 과시하는 옷을 입어 올리고. 그런 사진들에는 보란듯이 하트가 수백 수천개씩 따라붙고 팔로워도 많다. 누가 봐도 의도와는 다른 멘트로 올려지는 사진들.

반면 탈코르셋을 해시태그로 쓴 사진들에는 거침없는 욕이 따라붙는다. 화장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서 사회가 정해놓은 '미'에 거스르는 것, 못생기거나 뚱뚱하게 되는 건 탈코 당사자들일텐데도, 그걸로 욕을 하는 남자들은 대체 무슨 심리일까. 자기들이 못생겨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뚱뚱하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화장 안할거야' 라고 하는 여자들에게 못생겼다, 쿵쾅댄다 욕을 할까. 그여자들이 못생겨서, 뚱뚱해서 싫으면 그 여자들하고 안놀고 안사귀면 되잖아. 저리 가. 니네가 원하는 예쁜 여자 찾아, 쭉빵 여자 찾으라고.

 

나는 이게 내가 여행지에서 느꼈던 바로 그 자유로움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나에게 예쁘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남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는 것.

미모에 대한 자연스런 갈망은 애초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위 사람들과 매스컴에서 엄청 주입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는 나에게 선택받기 위해' 당연해 지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저 남자에게 선택받기 위해' 당연해져 버리는 것.

탈코르셋은 기본적으로 이걸 거부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화딱지가 나는 것 같다.

왜 너는 나에게 잘보이기 위해 화장하지 않지?

왜 너는 나에게 잘보이기 위해 날씬해지려 하지 않지?

화장 안해서 못생겨진다면, 다이어트 하지 않아서 뚱뚱해진다면, 그리고 그게 나쁜거라면, 그걸 하는 '당사자'는 탈코르셋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인데, 탈코르셋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자기는 살던대로 그 얼굴에 그 몸매로 살면서, 화장하지 않고 다이어트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여자들을 비난하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사는데 왜그럴까?

 

 

- 완전히 코르셋을 버리진 못했지만 나도 탈코르셋을 시작하면서 가장 기이하게 생각됐던 게 볼터치였다. 볼터치라면, 하아- 과어의 내가 '반드시 해야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볼터치 하지 않으면 밖에 못나가겠어, 했었는데. 친구에게도 '우리 볼터치 하며 살자' 며 선물하기도 했는데. 하하하하. 이제는 볼터치한 사진들을 보면 너무 기이한거다. 이렇게 이상한 걸 내가 왜 했지? 너무 이상하잖아. 왜 볼이 발갛게 보여야 해? 왜 발갛게 보이려고 심지어 거기에 색을 입혀? 볼터치한 사진만 보면 미쳐버릴 것 같다. 그거 너무 이상해요...

나는 제일 먼저 볼터치를 갖다 버렸다.

 

 

 

- 요즘은 색조화장을 안하고 산다. 개기름이 끼는 걸 어떻게 방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고민이긴 하지만, 세상 편해. 일터에서 내가 맡은 자리가 있어 립스틱까지 버릴 순 없지만, 회사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이제 화장을 하지 않는다. 팩트 사둔 건 썩고 있고 파운데이션을 이제 사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다. 나는 모든 화장품을 백화점에서 비싼 것만 사서 쓰는 사람이었는데, 화장품 비용이 싹 줄어들었지. 게다가 여행지에서 화장을 하지 않으니, 외출 준비도 빨리 끝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팬티랑 속바지 대신 남자 드로즈 하나 입고 원피스 입고 바깥에 나가버리면 끝이여. 이번 여행에서 동행과 함께 나갈라치면 나는 화장하는 동행을 계속 기다려야 했는데, 동행이 자꾸 미안해했다. 아녀, 천천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는 친구가 화장하는 동안 크레마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든가, 가족들과 연락을 하든가, 스맛폰을 들여다보든가 했지.

 

남자사람 만날 때도 걍 노메이크업으로 나간다. 코르셋을 벗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여.. 남자 만나기 전에는 약간 고민이 되는 것이다. 하도 화장 안해버릇 하니까 하기 너무 귀찮은데 내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인가...고민이 되다가,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나가자, 그 남자도 안하는데 내가 뭐하러 해. 이런 내가 싫으면 그 다음부터 안만나겠지 뭐, 이러면서 남자 1 만날 때 화장 안하고 나갔더니 그 다음에 남자2 만날 때도 노메이크업이 당연해지더라.

 

 

-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이력을 보노라면 그 타이틀의 화려함에 너무 반해버린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이며, '연구자' 이며, '교수' 라니.. 너무 멋져버리는 것. 여자들이 지금보다 좀 더 많이 타이틀을 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사, 박사, 교수, 국회의원 등등 여기저기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더 많이 보일 수 있기를.

 

 

 

 

 

- 인용하는 구절이 매우 많은데, 그냥 이 책 사서  읽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내에서 교환가치가 일어나지 않는 신체를 가진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취급을 받았나요? 이 사회에서 그러한 여성들은 소위 게으르고 쓸모없는 자들로 취급되고 조롱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회가 그러한 여성을 자연적으로 거저 주어진 스스로의 여성-신체자원의 가치조차 제대로 활용·관리하지 못하며 꾸밈노동이라는 의무를 방기한, 나태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폄하하기 때문입니다. - P22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유용한 여성-신체자원(자궁-여성 유기체로서의 대상)으로 동원, 소비, 착취, 억압되는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일 뿐만 아니라, 이때껏 스스로의 신체의 교환가치를 더 높이고 적어도 남성의 성애적 욕망의 투여가 일어나지 않는 무가치한 몸(교환가치=0)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지속적이며 의무적으로 수행하던, 일체의 꾸밈노동을 집단적으로 보이콧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거부와 보이콧의 물결이 일으키는 진폭과 파장은 우리 사회의 인식론적 담론 지형뿐만 아니라 정상성 규범의 실천 지형까지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회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판‘에 대한 도전이며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층화 작용‘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의 움직임입니다. - P23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의 신체를 남성석 성애의 투자(investissement)대상물이자 순수한 부계혈통의 성씨를 날인한 세대 재생산의 몸으로 환원시키는 일체의 작용을 거부하는 탈지층화(destratification)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25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여성들은 남성 욕망경제에 철저히 귀속되어 있는 이성애 연애와 섹스, 결혼, 출산의 경로를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욕망의 서사로 받아들이길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 성담론 속에서 남성의 성애적 욕망의 대상인 삽입구 기관으로 축소되고 환원·유통-단체 카톡방 내 음담패설, 성희롱,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 피해-되는 것을 폭로하며 이와 절연을 선언합니다. 그와 동시에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내에서 성적 대상물-물방울 모양 가슴, 핑크빛 성기, 애플힙, 11자 다리-이란 기호로 부유하는 것을 벗어나, 특이성과 비전 등과 같은 다각적 요소들과 함께 구축해 나가며 새로운 욕망의 서사를 배열, 조성해낼 수 있는 구조적 장을 기획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 P27

『자본론』에 따르면 ‘상품‘(commodity)이란 ‘타인과의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유용한 물건‘입니다. 여성의 신체 역시 남성적 담론과 실천의 장 안에서는 교환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 되면, 따라서 일종의 상품으로 기능합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는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교환가치가 인정되는 상품으로 존립시켜야 할 대상이 됩니다. 달리 말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여성-신체자원이라는 ‘천연적 노동대상물‘을 타고 났으며 이를 보다 세련되게 관리하고 정교히 세공해내는 기술을 투입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체를 ‘가공된 노동대상‘으로 탈바꿈하는 ‘꾸밈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 P32

‘늘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란 처절한 꾸밈노동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그러한 여성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태어난 존재로 신비화함으로써 인위적 꾸밈노동의 모든 노력들-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화장술과 시술, 지속적 운동과 고강도 식이요법-과 사회적 압력들을 단번에 비가시화해 버립니다.이는 마르크스가 거론한 ‘상품의 물신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의 물신화 현상은 일종의 착시 현상입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마치 그러한 노력의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상품 자체가 가진 자연적·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교환가치를 발생시키는 독자적·독보적 존재물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 P35

남성의 신체자원이 성적으로 동일한 방식과 강도로 채굴되고 착취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가부장적 교환가치-남성 욕망경제의 기호품이자 부계혈통의 세대 재생산 도구-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성의 성적 신체자원은 그들의 노동력의 기본값(default value)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업무의 분야에 상관없이 여성들을 향한 아름답고 젊어 보이는 외모에 대한 요구는 사회적으로 이미 조건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용모단정의 엄격한 규준을 준수해야 하는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성적 신체자원은 노동 상품성의 자격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기본값으로 간주되기에 고용주의 상품판매 촉진과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와 자원으로 원할하게 동원됩니다. - P39

여성을 보지라는 신체자본(capital corporel)을 통해 신분상승과 부(벼슬, 잉여가치)의 창출을 손쉽게 추구하는 존재로 환원하고 있는 ‘보슬아치‘라는 용어는 매우 문제적입니다. 여성의 신체자원이 채굴, 배분, 활용, 억압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맥락 이해 자체가 상실되어 있고 성차별적 현실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남성들을 여성들에 의해 부와 특권을 탈취당하고 피해를 입는 계층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 P43

‘보슬아치‘는 ‘창녀와 꽃뱀, 된장녀와 김치녀‘라는 여성혐오 용어의 스펙트럼 확장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연애와 결혼의 잠재적, 현실적 상대인 모든 여성들이 성적 매력자원을 미끼로 남성들이 어렵게 취득한 부와 계층적 특권을 손쉽게 탈취하거나 나눠 갖는다는 기묘한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사실상 ‘모든 남성이 남근권력의 상징물인 경제적 부와 계층적 특권을 보유한 강력한 팔루스(Phallus)가 될 수 없다‘는 남성 특유의 구조적 불안의 원인을 스스로의 자격미달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 P43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과 구별되는 외형과 속성(propriete)들로 구성되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여성들이 어떠한 역량들(puissances)을 가지고 있는가(여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문제의 축 자체를 이동시켜 버립니다. 여성을 옥죄며 가동되던 식별(distinction)의 코르셋-남성보다 가녀린 신체, 선이 곱고 예쁜 이목구비, 볼륨감 있는 몸매, 사근사근함, 애교 등-으로부터 스스로의 신체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역량과 감각을 발굴하며 더 이상 남들에게 예쁜 인형이 아닌, 다양한 역량의 다발체로서의 자신을 조우하고 탐험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 P52

예를 들어 급격한 체중감량을 위해 식욕억제제와 이뇨성분이 든 다이어트 약을 섭취하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해당 약품의 합성(melange)작용이 일으키는 탈수 증상과 복통, 기력쇠진과 두통, 생리불순이라는 부정적인 감각증상에 대해 자신의 존재 및 신체역량의 축소와 하락의 상태(etat)를 느끼며 술픔의 정동(affect)에 놓입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신체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신체와의 만남과 합성은 우리의 신체를 불유쾌하고 유해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며 조화로운 신체 밸런스를 깨뜨리고 파괴한다는 점에서 슬픔의 정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 P58

개인의 성향과 취향의 체계는 그 개인이 속한 성별, 사회적 위치, 경제적 계층, 교육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고 결정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비춰볼 때 여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성별 계층성(sex class)에 의해 침투·각인되어 있는 다양한 습속들-특정 취향과 기호, 소비성향, 행동방식과 습관, 태도, 말투, 걷거나 앉는 방식, 제스처 등-의 총체들을 무의식적으로 체화하고 있습니다. - P74

이러한 관점에서 화장이나 외모 꾸미기에 대한 여성들의 취향이나 관심,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인형이나 분홍색에 대한 선호, 나긋나긋한 말투나 수동적 태도 등은 여성에게 각인된 ‘아비투스‘(habitus)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계층적 가치가 육체에 각인된 상태로서,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성을 온전히 체현한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하고 무언가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화장과 같은 꾸밈노동을 여성 개인의 사적인 취향이나 기호로 오인하도록 만드는 구조야말로 성별 계층성에 의해 도식화된 개인의 행동패턴과 특정 라이프스타일의 재생산 효과가 얼마나 한 개인의 신체와 사고방식에 온전히 칩습되어 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74

예컨대 남성보다 가녀린 신체, 선이 곱고 예쁜 이목구비, 볼륨감 있는 몸매, 긴 머리, 호전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순종적인 태도와 눈빛, 배려심, 착하고 고운 마음씨, 애교 등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특성들의 총합일 뿐이지만, 이것이 남성과 확연히 대별되는 신체적, 심리적 차원의 성별 특성들의 총체를 형성함으로써 결국에는 ‘여성‘이라는 하나의 균질하고 동질적인 성별 계층성의 고유한 특질(property)로서 고정화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 P75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 대한 성별 식별체계로 가동되고 있는 아비투스 도식들의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사회구조의 차별성과 억압성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여성성‘ 분류화의 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구심을 제기하고 반기를 드는 행위입니다. - P75

화장과 꾸밈노동이라는 아비투스를 거부하는 행위는 단순히 ‘~하지 않음을 선택함‘을 넘어서 여성의 행동양식과 감각, 활동반경과 인식태도, 욕망과 기호까지 온전히 새로이 발굴하고 주조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탐색을 추동시키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탈코르셋 운동은 성별 식별체계 내부에 식별 불가능한 존재들이자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질적인 몸들을 난입시킴으로써 성별 식별체계의 가동에 거대한 타격을 가하며,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라는 위계적 질서가 새겨진 사회적 공간을 균열시키고 그로부터 탈주를 감행케 하는 것입니다. - P81

대다수의 여성들은 외모 꾸미기는 사회적 강요가 아닌, ‘내가 좋아서‘,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왜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는지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이 세계가 구조적 착취와 차별의 시스템으로 가동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깨달은 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파란 약을 먹고 그 진실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서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환상에 젖어 살 것인지, 아니면 빨간 약을 먹고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며 매트릭스의 파괴를 힘겹게 싸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 P92

우리 대다수가 꾸밈노동의 완벽한 수행을 찬사와 무조건적인 박수로 맞이했었다면, 여성들의 민낯과 짧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불편함의 감각‘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기존의 여성성 수행 방식에 대한 반란자들이자 이 억압적 사태에 ‘동참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전히 꾸밈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윤리적 불편함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배제와 차별의 정치라고 반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코르셋이야말로 수많은 여성들을 스스로의 신체와 불화케 하고 아름다운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만 합니다. - P99

화장이나 외모 꾸미기라는 행위에 대한 고정화된 기쁨의 정동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코르셋을 전시하는 이들에 대한 일방적 비난과 설득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화장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보다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이 드러내는 존재역량의 상승의 사진들과 경험담들, 이로 인한 새로운 삶의 양식들의 전략과 태도들이 더 많이 사회적으로 발화되고 공유됨으로써 탈코르셋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가 더 높아질 때, 많은 여성들은 그 기쁨의 정동의 물결을 스스로 따를 것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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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8-2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성의 변증법‘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남성보다 ‘더 순수한‘존재로 여김으로서 그들의 열등한 지위가 정교한 ‘숭배‘하에 은폐되어 있었다고 꼬집고 있던데요. 이 관점에서도 왜 남성은 아무렇게나 입어도 될 자유를 얻고 여성은 꾸밈노동을 하지 않으면 욕먹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요.. 아무래도.. 이 책 그냥 사서 읽어보는게 낫겠죠? (๑◔‿◔๑)

다락방 2019-08-21 13: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블랙겟타님. 이 책은 얇으니까 금방 읽을 수 있을 거에요. 사서 읽어보시는 걸 적극 추천합니다. 책 한 권에 전체적으로 밑줄을 긋고 싶더라고요. 이개 철학세미나 시리즈 1편이던데, 앞으로 나올 시리즈도 기대돼요. 하하하하.

그나저나, 성의 변증법 읽고 계시군요. 화이팅입니다, 블랙겟타님! 빠샤!!

별족 2019-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르겠네요.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고,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고. 연예인이 학벌을 자랑하는 것도 우습고, 교수가 미모를 자랑하는 것도 우습고. 그럼에도 교수가 아름다우면 한 번 더 눈이 가고, 연예인이 학벌이 좋으면 또 그렇고.
‘꾸밈노동보다 타이틀에 집중하라‘라는 게 의미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타이틀을 숭상하는 것은, 예쁜 것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 나은가요? 저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 거니까 ㅋ

다락방 2019-08-21 15:05   좋아요 0 | URL
누군가 타이틀을 숭상하는 것은 예쁜 것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으냐, 는 말을 꼭 할 것만 같아서 부연 설명을 하느라고 했는데 잘 안닿았나 보네요. 저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좀 더 많이 다양한 곳에 자리잡아서 서로에게 보이자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력 있는 자리는 대부분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런 곳에 여자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뜻으로 타이틀을 얘기한 거에요. 교수라는 타이틀, 연구자라는 타이틀, 국회의원 이나 판사라는 타이틀을 우리가 좀 더 많이 가져오자고요. 저는 의미있다고 한 말인데 별족 님은 의미를 모르겠다 하시면 그것까진 제가 뭐 어떻게 할 수 없고요. 저 역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거니까요.

단발머리 2019-08-21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좋죠~~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제일 좋지요.
주의할 점은..... 여성들에게 더 지엽적인 일, 보조적인 일들이 제안되고, 주어지고, 강요된다는데 있다고 봐요, 저는.
주변을 정리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런 성향의 여성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들을 하도록 강제하는 문화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탈코르셋도 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요. 자신을 아름답게 정돈하고 꾸미는 일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테죠.
그런 남자, 그런 여자가 있겠죠. 문제는 1년 365일 대부분의 시간을 민낯으로 보내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달리,
여성이 민낯으로 나서면 ‘어디 아프냐‘는 이야기부터 듣게 되니까요.
화장을 안 하겠다는 여성들에게 달리는 혐오댓글이 보여주죠.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여자 사람이란 남자를 위해 ‘단장하는 여자‘라는 것을요.

잘 읽고 가요, 다락방님. 참 좋은 책이었어요, 그죠? ㅎㅎㅎ

다락방 2019-08-22 08:02   좋아요 2 | URL
예전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님께서 저에게 직장인이냐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렇다고 하니 당신 딸은 너무 못생겨서 취직이 안된다고 어떡하면 좋겠냐고 하셨어요. 가수들이 노래 실력만으로는 뜨기 힘드니 성형 수술하라는 권고를 받는다는 건 우리도 종종 듣곤 하잖아요.
소개팅 할 때도 남자들은 제일 먼저 ‘예뻐?‘ 를 묻죠. 요즘은 카톡으로 프로필 사진 보며 얼굴 직접 확인하고요.
어디를 가나 무얼 하나 그 여자가 예쁜지를 확인하는데, 이 얼마나 강요된 코르셋인가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뻐야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선택받는다는 걸 끊임없이 주입하잖아요.

그렇게 외모를 가꾸어야 대우받는 상황에서 또 지하철안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못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를 만나기 전에, 출근하기 전에 셋팅은 반드시 집에서 하고 와라, 셋팅하되 셋팅하는 과정을 보이지 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들은 셋팅하기 위해서 더 일찍 일어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하죠. 하아-


어제는 윤자매님들이 다른 여성학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탈코르셋에 대해 이해한 것은 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철학이 그렇게 만든건가, 하는 생각요. 탈코르셋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불쾌해하곤 하는데, 윤자매님들은 그 불쾌함의 지점까지 명확히 짚어내주시잖아요. 그동안 공부했던 철학들이 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걸까, 결국 학문은 철학으로 닿게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철학도 좀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만..... ( ˝)


단발머리님,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이 책을 단발머리님 덕에 읽게 되고 또 우리가 같이 읽었다는 것도 너무 좋아요. 같은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일이야 언제나 환영할만한 일이고 기쁜 일이지만, 이 책에 대해서라면 더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책, 좋은 독서였어요. 얇은 책 한 권에 북마크를 얼마나 붙였는지 몰라요.

단발머리님, 우리 계속 공부하도록 해요!

별족 2019-08-23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까지, ‘화장하라‘는 억압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공감이 안 생기는 거 같습니다. 저는 ~촬영,일 때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화장했거든요.
그러면서, 저는 예쁜 사람들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예쁘게 꾸미면, 화들짝 마음이 쿵, 하는 타입이거든요. 내 얼굴은 거울이 없으면 볼 일이 없으니, 저렇게 예쁘게 꾸민 사람들은 참으로 이타적인 사람이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네, 고맙구나, 생각하거든요.
 


'레벨 윌슨' 주연의 영화 《어쩌다 로맨스》를 얼마 전에 봤었는데, 이번에 뉴욕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뒷부분의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 보고 싶어서 뒷부분만 다시 보았다. 내가 보고싶었던 장면은 바로 이것.






등장인물들 노래하고 다같이 춤추고 이러는 거 너무 좋음. 그래서 다시 보았다. 나중에 막 고성으로 올라가는 부분도 좋은데, 이건 립싱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어쨌든.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로맨스를 믿지 않는 여자가 우연히 로맨틱한 환경에 놓이게 되고, 거기에서 잘생기고 돈많은 남자와 애인 사이가 된다는 것, 그러나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베스트 프렌드가 자신의 짝임을 확신하고 그를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베스트프렌드에게는 완벽한 얼굴과 몸매와 돈..을 가진 여자가 약혼자로 딱- 옆에 자리잡게 되었지. 그러니까 각자에게 최선의 상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래, 따로 있었지만, 각자가 만나게 된 연인은 누구나 바라오던 바로 그 이상형이라는 거다. 물론 여자주인공인 '나탈리'는 '그러나 이 근사한 환상적인 남자가 내 짝이 아니다, 내 짝은 오랜 친구인 조쉬다' 라는 걸 깨닫지만, 남자인 '조쉬'는 '나는 결국 우리가 짝이 될거라고 생각했었어' 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며, 자칭 '요가 대사관' 이라고 말하는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다.



나탈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남자, 나탈리에게 반해서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너도 느끼니'라고 묻는 남자, 돈도 많고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매너도 좋고 암튼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이 남자는 자꾸만 '크리스 햄스워스' 같아서, 설마 그인가.. 했다가 그가 이런 로맨스에 나왔단 말인가, 하고 뚫어지게 보다보면 '아니구나 닮은 사람이구나' 하게 되는데, 그래서 영화 끝나고 찾아보니, 얼라리여, 그는 '리암 햄스워스' 였고, 크리스 햄스워스의 동생이었다..아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나 닮은 것이었군요.





극중 '요가 대사관'으로 나오며 남자주인공의 이상형 여자로 나오는 '이사벨라' 역의 '프리얀카 초프라'. 나탈리는 그녀에게 요가에 '대사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요가 대사관'이라는 거 뭔가 너무 웃겨서 인상적으로 계속 남는다. 이사벨라는 스스로를 'yoga ambassador' 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것. 사진 속의 여자가 바로 그 요가 대사관.




요가 대사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요가하는 장면은 하나도 안나옴 ㅋㅋㅋㅋ 계속 요가 대사관 요가 앰버서더.. 이러고 있다, 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가 앰버서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탈리가 이상적인 남자인 '블레이크'를 차버리는 데에는, 그가 그녀의 능력과 재능을 마치 자신의 것인듯 하는데에 있었다. 사실 그가 근사한 남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나탈리가 그와 감정적으로 통했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 단순히 내 작품이 왜 네것이야? 라는 데에서 오는 불만도 있지만 애초에 그를 '사랑'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잘생기고 돈도 많고 매너도 좋고 나에게 푹 빠진 남자...이니 내가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애인이 되는 것은 어째서 잘못된 것인가.


내가 바로 그런 경우에서 연애를 한 적이 있다.


잘생겼고 인간성도 좋고 심지어 나를 좋아해서 그가 사귀자고 할 때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 그때의 나는 20대 였는데, 나는 이 남자가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해서 내 친구와 소개 시켜주기도 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나한테 사귀자는 거야. 내가 내 친구에게도 소개시켜준 남자인데 내가 그를 거절할 명분..같은 게 있을리 없잖아. 만약 그를 거절하면 '너는 너도 싫은 남자를 왜 니 친구에게 소개시켜줬어?' 에 뭐라고 답한단 말인가. 아무튼 나는 그를 그래서 사귀어버린 것이다... 이십대의 나여... 하아-


그러나 내가 그를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라, 사귀자는 데 딱히 반대할만한 남자가 아니라 사귄 것이므로, 문제는 툭툭 튀어나오는 것인데, 일단 그랑 같이 있기를 원하는 나.. 같은 게 없었고, 다른 남자 만나서 ... 네..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 양심에 내가 찔려서, 아아, 우리는 이러지 말아야 할 것 같아, 라고 그에게 말하고, 그는 웁니다... 밥을 먹지 못합니다.. 미안합니다... 3년이고 30년이고 나만 기다리겠다고 하던 그 남자는, 그러나 지금 결혼해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여...




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그러니까,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는 것과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탈리의 경우 만나게 된 상대 남자는 정말이지 누가 봐도 '어떻게 저런 남자를 애인으로 삼을 수 있었냐'는 말을 듣게 하는 남자였지. 그건 조쉬의 경우도 마찬가지. 조쉬가 만난 요가 앰버서더 도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돈까지 많아서 진짜 .. 와..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게 어리석게 보일 정도. 그러나 나탈리는 '블레이크'에게 '내 곁에서 꺼지'라고 말하게 됐고, 조쉬는 이사벨라와 결혼을 약속한다.




나는 그런 실수(?)를 예전에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뭔가 흠잡을 데 없는 남자라고 해서 무작정 연인이 되지는 않을거라고, 이제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나 같은 결정을 내릴 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이를테면, 나는 만나는 남자가 잘생기고, 매너 좋고, 돈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뭔가 내가 좋다, 라는 생각이 들어야 그 사람을 애인이란 포지션으로 내 옆에 둘 생각을 할 거란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나는 확신할 수가 없다. 특히나 남자의 경우, 이사벨라 같은 여자를 만났을 때 '아니'를 말하기가 쉬울까? 여자가 얼굴과 몸매가 완벽하고 돈도 많고 나에게 반했다, 라고 할 때, 그러나 내 마음이 그녀에게로 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아니'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남자들을 대입시켜 보았다. 그 남자는 그녀를 거절할 수 있을까? 뭐 이건 내가 그냥 추측하는 거지만, 내 짐작만으로는 그녀에게 '아니'를 말할 남자가 별로 없을 것 같아. 내가 그녀를 왜 거절한담? 하며 그녀를 선택하겠지. 그리고 좋아하기도 쉽겠지. 좋아하는 게 선택보다 나중이 될지언정, 좋아하는 거 쉬워지지 않을까. 그렇겠지. 그럴거야. 그렇겠지.




그러나 영화속에서 그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나 완벽한 이성이 내 앞에 나타나 '당신에게 반했어요' 같은 거 말하지 않아. 오히려 조쉬가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우리가 결국엔 함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가 현실이 되었지.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우리가 함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사람과, 그러니까 오래 편하게 알고 지낸 사람과 결국은 함께 하게 되는 것. 요가 앰버서더가 아니라 현실의 내 오랜 친구와 함께하게 되고, 재벌에 근육맨 남자가 아니라 오래 나를 봐주었던 친구와 함께 하게 되는 것. 그런데 저거 되게 중요한 메세지인것 같다. 조쉬가 현재 나탈리와 연인이 아님에도, 자기 혼자 나탈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음에도, '결국 우리가 함께 하게 되지 않을까' 했던 것. 늘 바라보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내가 바라본 건 사실 너였어'를 말하게 되는 것. 그렇게 오랫동안 숨길 수 있는 건 없는 법이니까.




아,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페이퍼를 다다다닥 세 개나 썼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잘 먹어서 그러는 것인가봉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점심엔 짬뽕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공기밥도 주는 곳으로... 슝 =3=3=3




아무튼 소식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 나야말로 요가 앰버서더가 되어야겠다. 뿜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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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8-16 14:2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일단 사전 찾아보고 쓴 글인데요,

영화속에서 한글 자막은 ‘요가 대사관‘으로 나오고 등장인물은 ambassador 라고 말해요. 영화속에서 ‘이사벨라‘가 영어에 서투른 사람인 설정인듯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나탈리‘가 ‘요가엔 ambassador 라고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는 것 같고요. 저는 영화에 나오는 그대로의 자막과 대사를 가져다 썼습니다.

:)

별족 2019-08-16 16:06   좋아요 0 | URL
^^ 아, 감사해요. 그런 유머는 저는 영화를 봐도 이해 못할 듯 합니다.

다락방 2019-08-16 16:07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유머를 이해한 건 아니고요, 그냥 영어에 서투른 외국인이구나, 정도로만 이해했어요. 오히려 댓글 쓰다 보니 그것이 그것이었나 보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오네요. ㅎㅎ

syo 2019-08-1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속의 조쉬는 뭔가 살찐 배정남같이 생겼네요.
정감 간다.

요가 대사관이라면, 다락방님도 한 번 지원해보시지 그래요?

다락방 2019-08-16 22:32   좋아요 0 | URL
네????!?????!!! 뭐라구요??????????????

syo 2019-08-16 22:33   좋아요 0 | URL
내가 이 나라에 요가를 전파하러 왔다!!!!!
막 이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면 다락방님도 자격 요건 완비......

다락방 2019-08-16 22:41   좋아요 0 | URL
아니야 난 아직 아니야 난.. 난... 난 아직 ....... 준비가 안됐다구욧! 한 8년 정도 더 있어야해!!!!!

syo 2019-08-16 22:54   좋아요 0 | URL
8년..... 요가 앰배서더 하시랬더니 요가 대통령 할려고 하신다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8-16 23:36   좋아요 0 | URL
할 거면 대통령 하자! 😤

syo 2019-08-17 10:16   좋아요 0 | URL
맞아 기왕 항 거면 큰 거 하자!!😎
화이팅!! 8년 뒤의 요가대통령이시여!!

- 2019-08-1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생이여................ ㅋㅋㅋㅋㅋㅋ 이 글 너무 러블리하네요. 영화도 왠지 러블리할 것 같아요. 다락방님은 영화 리뷰도 다락방님의 스타일로 쓰시는 것 같다는!

다락방 2019-08-19 18:46   좋아요 1 | URL
영화는 너무 뻔해서 딱히 추천할만하진 않아요. 이 영화 보다는 멜리사 맥카시 주연의 [스파이] 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추천합니다.
러블리하다니, 별말씀을요!! 으흐흐흐

- 2019-08-19 18:53   좋아요 0 | URL
락방님 구 연애사를 한탄하는 글은 언제나 럽!흘!리!

다락방 2019-08-19 18:59   좋아요 1 | URL
이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